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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慶州南山)

불교유적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불교 유적 관련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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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이칭
금오산
분야
불교
유형
유적
성격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불교 유적 관련 산.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6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으로 뻗어내린 산맥에는 상사암(想思巖)·해목령(蟹目嶺)·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고, 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烽火谷]이 1.5㎞ 정도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이 계곡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산재해 있으며, 각 계곡별 유물·유적 현황은[표]와 같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蘿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었다.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현신해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나라는 마침내 멸망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이 특히 호국의 보루로서 존숭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경주 동 남산
남산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산맥의 제일 첫번째 계곡으로, 그 초입에 최치원(崔致遠)의 상서장(上書莊)이 있고 왼편으로는 도당산이 솟아 있다. 이 골짜기 입구에서 200m쯤 되는 곳에 옛 절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다수의 치미(鴟尾)와 석탑의 옥개석(屋蓋石) 2기가 발견되었으며, 이 곳에 있었던 석조여래입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래입상은 높이 2m, 너비 1m로서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를 가린 설법인(說法印)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1. 1. 경주 남산 왕정골
    1. 1.1. 경주 남산 왕정골 인용사지
      왕정골[王井谷] 입구 남천(南川)의 남쪽 기슭에 있었던 인용사(仁容寺)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친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위하여 지은 절이다. 김인문이 당나라와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신으로 갔다가 옥에 갇혀 있었을 때, 신라 사람들은 그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이 절을 관음도량으로 지었다.
      김인문이 귀국하던 도중 바다에서 죽자, 그 관음도량을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바꾸어 조성하고 명복을 빌었다. 이 절터에는 두 탑의 잔재가 남아 있다. 동쪽 탑은 첫층의 지붕돌과 2층의 탑신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탑자리만 남아 있다. 이 밖에 팔방(八方) 대좌의 지대석(地臺石)이 발견되었다.
    1. 1.2. 경주 남산 왕정골 천관사지
      도당산의 서쪽 기슭에 천관사지(天官寺址)가 있다. 절터는 현재 논으로 변하였고, 논두렁에 지대석의 조각·탑재(塔材)·주춧돌 등이 널려 있다. 김유신(金庾信)을 사모하였던 기생 천관(天官)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절이다.
    1. 1.3. 경주 남산 왕정골 상서장
      왕정골의 남쪽에 있으며, 최치원이 살았던 집이다. 효공왕 때 최치원은 왕건의 뛰어난 인격을 흠모하여 ‘신라의 계림은 낙엽이 지고, 고려의 송악에는 솔이 푸르다.’라는 뜻의 글을 올린 일이 있었다.
      고려 8대 현종은 최치원이 고려 건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음을 높이 평가하여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리고 공자묘(孔子廟)에 그의 위패를 모시게 하였다.
      이 때부터 최치원의 집을 상서장(上書莊)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태조에게 글을 올린[上書] 집이라는 뜻이다. 고려 말기에는 이곳에 문창후최치원상서장유허비(文昌侯崔致遠上書莊遺墟碑)를 세웠다.
      그 뒤, 건물이 무너졌던 것을 근세에 후손들이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정각에는 최치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현재 건물의 밑계단에는 신라 때의 건물 초석으로 보이는 주춧돌 두 개가 남아 있다.
  1. 2. 경주 남산 절골
    절골[寺谷]은 상서장에서 남산리로 가는 문천가에 양지마을이 있고, 그 동편에 절터가 있다. 논둑의 주춧돌로 보아 규모가 컸던 절로 보이며, 목탑지가 남아 있다. 이 목탑지는 황룡사구층목탑지·망덕사목탑지·사천왕사목탑지 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지이다.
    이 밖에 삼층석탑으로 보이는 탑재들이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데, 옥개받침이 5단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8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 3. 경주 남산 부처바위골
    부처바위골[佛谷]은 남산의 동쪽 기슭 인왕리에 있다. 계곡 입구 산기슭에 두 곳의 절터가 있지만, 주춧돌·기왓장 등이 산재해 있을 뿐 별다른 유적은 없다. 그 곳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가 있으며, 보물 제198호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높이 3m, 너비 4m의 자연암석에 약 1.2m 깊이로 감실(龕室)을 만들고 불상을 조각하였다. 얼굴모습은 단아하여 여성적인 느낌을 주며, 두 손은 포개어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자락은 두 무릎 밑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의문(衣紋)의 조각수법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이 불상은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단석산의 자연석굴과 석굴암 인조석굴의 중간단계로 보고 있다.
    이 부근에서는 삼화령석조미륵삼존상(三花嶺石造彌勒三尊像)을 연상시키는 여래상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른손은 위로 쳐들고, 왼손은 밑을 향한 감실의 불상과 거의 같은 시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1. 4.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골 입구에서 약 300m쯤 동남쪽으로 가면 탑골[塔谷]의 입구이다. 그곳에 옥룡암(玉龍庵)이라는 암자가 있고, 그 뒤에 있는 거대한 암석에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탑곡마애조상군(塔谷磨崖彫像群)이 있다. 암석의 가장 높은 북면은 높이 9m, 너비 6m이다. 동면은 높이 7m, 너비 12m이며, 서면은 높이와 너비가 6m 정도이다.
    1. 4.1. 경주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
      북면 바위의 중앙에는 여래상이 있고 양쪽으로 목탑이 늘어서 있으며, 그 위로 비천(飛天)하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목탑 앞에는 사자형상의 짐승 두 마리가 좌우로 지키고 있다.
      이 목탑은 실물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라시대의 목탑형식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체 모습이 상징하는 뜻은 석가모니의 설법광경으로 추정된다.
      서면 바위에는 여래좌상과 비천상이 있는데, 광배(光背) 부분에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배치되어 있다. 남면 바위에는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마멸이 심하다.
      왼편으로 여래상이 있고, 그 불상 앞에 여래의 입상이 서 있다. 그 정면으로는 석등을 세웠던 자리와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과 삼존불 앞에 큰 바위가 가로놓여 있는데, 승려가 합장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동면 바위는 크게 셋으로 갈라진 상태이다. 제일 끝면에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새겨져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이 절의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동쪽 둘째면에는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첫째면에는 보리수 두 그루와 결가부좌한 수행상이 새겨져 있다.
    1. 4.2. 경주 남산 탑골 석조여래입상과 삼층석탑
      남면 바위 앞에 2.2m 높이의 불상이 있다. 얼굴은 반 이상 파괴되었고, 목에는 삼도(三道)를 표현하였고, 옷주름을 복부 부근까지 늘어뜨렸다. 입체적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 남쪽에 있는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에 전체높이가 4.5m이다. 지붕돌이 짧고 둔한 느낌을 주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과 다른 점이 이채롭다. 최근까지 넘어져 있던 탑을 1977년에 재건하였다.
  1. 5. 경주 남산 미륵골
    현재의 임업시험장 대밭의 뒤쪽 골짜기를 미륵골[彌勒谷]이라고 한다. 그곳에 보리사(菩提寺)와 보물 제136호인 미륵곡석불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연꽃무늬의 밑받침에 간석(竿石)을 세우고, 다시 연꽃무늬의 팔방연화대를 올렸다. 그 위에 2.24m의 여래좌상을 안치하였으며, 광배는 반으로 쪼개진 것을 철로 이어서 부착하였다. 얼굴모습은 온화하며, 손은 항마인(降魔印)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몸통부분이 얼굴에 비하여 작은 편인데, 이 같은 조성양식은 신라통일 이후에 유행하던 수법이다. 보리사 입구의 동쪽 소로를 따라 300m쯤 되는 곳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전체높이 1.5m의 광배형 감실에 0.9m의 여래좌상을 조각하였다. 원만한 얼굴 모습에 옷자락이 두 무릎 사이까지 늘어지고 있다. 조각기법은 세련되지 못하였으며, 불곡의 불상을 모방하여 후대에 조성한 불상인 듯하다.
  1. 6. 경주 남산 천암골
    미륵골 옆의 천암골[千巖谷]에는 장사(長沙)와 사적 제187호 헌강왕릉이 있다. 장사는 망덕사(望德寺)와 임업시험장 사이의 모래밭으로, 신라 박제상(朴提上)의 부인이 일본으로 가는 남편을 따라가다가 이 모래밭에서 길게 누워 탄식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49대 헌강왕릉의 주변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봉분의 주변에는 직사각형의 호석을 둘렀으며,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으나, 난간이나 상석 등이 매우 빈약하다.
  1. 7. 경주 남산 철와골
    헌강왕릉의 남쪽 450m 지점이 철와골[鐵瓦谷] 입구이다. 이 계곡은 매우 넓고 깊은 편이나 불적(佛蹟)이 없다고 알려졌는데, 1959년 이곳에서 거대한 불두(佛頭)가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였다.
    머리높이는 1.53m이고, 백호(白毫)가 뚜렷하며, 전체적으로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얼굴과 몸통의 비례는 대략 6배 전후인 것이 신라불상의 전형이므로, 이 불상은 9m를 넘는 큰 부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남쪽 마을에 「거문고갑을 쏘라 射琴匣」는 전설로 유명한 사적 제138호의 서출지(書出池)가 있으며, 서출의 못둑에는 2개의 석등대석이 있다.
  1. 8. 경주 남산 국사골
    서출지에서 150m쯤 남쪽으로 가면 국사골[國師谷] 입구이다. 상사암·남산부석(南山浮石) 등 기암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계곡에서는 세 곳의 절터가 확인되었다. 절터에서는 허물어진 축대·기단면석(基壇面石)·갑석(甲石) 및 탑의 지붕돌 등이 발견되었을 뿐, 별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1. 9. 경주 남산 오산골
    오산골[鰲山谷]은 국사골의 남쪽 골짜기로, 고인돌군이 있는 계곡의 남쪽 암석에 마애불상이 있다. 그 서북쪽에 개선사지(開善寺址)가 있고, 이곳에서 발견된 약사여래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체의 기교나 가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며, 높이 1.7m, 너비 0.56m이다.
  1. 10. 경주 남산 대지암골
    대지암골[大地巖谷]은 개선사지 입구에서 도로를 따라가다가 50m 지점에서 시작되는 서북쪽 계곡이다. 이 곳에는 네 개의 절터가 있으며, 계곡 입구 탑마을에는 보물 제124호로 지정된 남산리삼층석탑 2기가 있다. 동탑의 높이는 6.9m이고, 서탑의 높이는 5.6m이며, 서탑의 기단부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다.
    동탑은 서탑과 전혀 다른 양식인데, 탑신은 지붕돌과 붙은 한 돌이며 낙수면이 없고 지붕돌 받침과 마찬가지의 층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전탑(塼塔)을 모방한 수법으로 조각한 것이다.
  1. 11. 경주 남산 쑥드듬골
    쑥드름골[蓬丘谷]은 절터와 허물어진 삼층석탑이 있었는데, 동탑은 불국사역 앞의 로터리에 옮겨 세웠다.
  1. 12. 경주 남산 승소골
    승소골[僧燒谷]은 남산리 계곡의 마지막 지류(支流)로서 절터와 높이 3.6m의 삼층석탑이 있었으나,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1. 13. 경주 남산 천동골
    천동골[千洞谷]에서는 절터와 함께 두 개의 석주(石柱)가 발견되었다. 석주는 작은 감실을 파고 불상을 안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부근에는 탑의 지붕돌도 발견되었다.
  1. 14. 경주 남산 봉화골
    봉화골[烽火谷]은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계곡으로, 입구에서 4㎞ 지점에 칠불암과 신선암·봉수대 등이 있다.
    1. 14.1. 경주 남산 봉화골 칠불암
      칠불암(七佛庵)에는 큰 암석에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에 칠불암이라 하였다.
      보물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칠불암마애석불은 위엄있는 모습에 나발(머리카락이 달팽이 모양으로 동글게 모여있는 모습)과 삼도(목 부분의 3겹 주름 모양)가 선명하다.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은 감로병을 들고 왼손을 치켜든 모습이고, 왼쪽의 협시보살은 왼손에 천화(天花), 오른손에 연꽃을 쥐고 있다.
      아미타삼존불로 추정되며, 곡선의 표현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서 당나라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사방불은 조각수법이 삼존불에 비하여 떨어지는데, 동면의 약사여래 이외에는 단정적으로 불상의 명칭을 확정짓기는 곤란하다. 이 주위에는 석탑의 지붕돌·석등대석 등 유물이 남아 있다.
    1. 14.2. 경주 남산 봉화골 신선암마애보살상
      칠불암 뒤의 높이 솟은 바위에 보물 제199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에, 한 손에는 연꽃을 들고 한 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얹었고, 그 곳에 장식된 영락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너비는 1.3m, 높이는 2.3m로, 참배객들은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1. 14.3. 경주 남산 봉화골 봉수대
      칠불암 바위등을 타고 정상에 오르면 용장계곡과 갈라지는 분수령이 된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250m쯤 떨어진 봉우리에는 허물어진 축대와 토대만 남아 있는 봉화대가 있다. 축대의 높이는 1.5m, 길이 38m 정도이며, 토대는 25m이다.
      이 곳에서 발견되는 기왓조각이나 그릇조각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들이어서 이 유적이 신라 때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명활산성이나 선도산성 등과 삼각을 이루는 중요한 요충지임을 감안하면 신라 때부터 봉화대로서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경주 서 남산
  1. 1. 경주 남산 천룡골
    고위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천룡골[天龍谷] 계곡에는 천룡사지(天龍寺址)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사신 악붕구(樂鵬龜)가 천룡사에 와서, 이 절이 허물어지면 나라가 망하리라고 예언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터에는 석탑·석등·주춧돌·귀부(龜趺)·법당터·석조(石槽, 2개)·불상대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천룡사는 원래 수리사(水利寺)라고 하였으나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중창하면서 천룡사라고 불렀다. 200년 전까지도 이 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밭으로, 일대에 주춧돌·기왓장 등이 무수히 널려 있다.
    절터에는 석탑이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1층 지붕돌에서부터 3층까지의 탑재들만 남아 있다. 현재의 상태로 보아 약 4m 정도 높이의 탑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현재 머리부분이 없는 귀부는 사각의 대석 위에 42.7㎝ 높이로 거북을 만들었는데, 그 위에 당석(幢石)을 세웠던 구멍이 패어 있다.
    석조는 물을 담아놓는 장치로서 길이 2.4m, 넓이 1.3m의 두 기(基)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석등·법당터·맷돌, 그리고 고려시대의 절터와 불상대좌(佛像臺坐) 등이 남아 있다. 규모가 매우 컸던 절임을 알 수 있으나, 보존상태는 미흡한 편이다.
  1. 2. 경주 남산 용장골
    용장골[茸長谷]은 고위산과 금오산 사이의 계곡으로서 남산에서 가장 깊고 넓은 계곡이며, 만물상(萬物相)이라 불릴 만큼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유적으로 보아 18개 소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름이 전하는 곳은 용장사 한 곳 뿐이다.
    용장사의 약사여래상과 불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으며, 삼층석탑은 보물 제186호로, 석불좌상은 보물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용장사터의 동쪽산맥 위에 솟아 있으며, 높이는 4.5m의 작은 탑이다. 신라탑의 전형으로 석가탑의 양식을 답습하였다. 단지, 다른 점은 하층기단이 없고 직접 자연암석에 상층기단을 세운 점이다. 이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표현한 슬기로서, 지형적 특성을 잘 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동편 계곡에 석탑의 지붕돌이 흩어져 있으므로 역시 삼층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애여래좌상은 삼층석탑 밑의 10m 암벽에 결가부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기법이 사실적이면서도 밑부분의 연꽃무늬 때문에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불상이다. 높이 1.9m, 너비 1.1m이다.
    보물 제187호인 여래좌상은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라고도 한다. 하대석은 직육면체인데, 윗부분을 다듬어서 둥글게 새겼으며, 그 위로 3층의 원형대좌를 만들고 결가부좌인 불상을 안치하였다.
    머리부분이 없어져서 불상의 명칭을 확정짓기 어려우나 승려상이라는 설과, 보살상·불상·미륵불상이라는 설도 있다. 전체높이는 4.6m이며, 넘어져 있던 것을 1923년에 복원하였다.
    이 용장사에는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인 태현(太賢)과 조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가(瑜伽)의 대덕 태현은 용장사에 살면서 그 절에 있는 미륵불의 석조 장륙상(丈六像)을 예배하였다. 태현이 불상을 예배하면 불상도 또한 태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또, 김시습은 만년에 이 곳에 머무르면서 『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저술하였으며, 죽은 뒤 사당을 금오산의 남쪽 동구(東丘)에 세웠다고 한다. 이 밖에도 용장골에는 18곳의 절터가 있고, 산꼭대기에는 자연석에 복련화(覆蓮華)를 새긴 대좌 1기와, 비를 세웠던 비대석 1기, 삼층폐탑 등이 있다.
  1. 3. 경주 남산 비파골
    용장골에서 경주쪽으로 700m 지점에 비파마을이 있다. 비파골[琵琶谷]에는 네 곳의 절터와 4기의 석탑 터가 남아 있다. 이 계곡에 석가사(釋迦寺)와 불무사(佛無寺)를 세운 것은 692년이다.
    효소왕이 진신석가(眞身釋迦)가 현신한 것을 알지 못하고 희롱을 한 뒤 뒤늦게 깨닫고 석가가 사라진 자리에 불무사를, 진신석가가 산다고 한 비파바위 아래에 석가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1. 4. 경주 남산 약수골
    약수골[藥水谷]은 현재 교도소가 있는 뒤쪽 계곡을 가리킨다. 원래 산호골[珊瑚谷]이라고 하였는데, 약수 때문에 명칭이 바뀌었다. 여섯 곳의 절터와 2체의 불상, 1기의 석탑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여래좌상과 마애여래대불이 있다. 방형의 대좌에 안치된 여래좌상은 높이 1.15m, 너비 0.8m로서 결가부좌를 한 모습에 손은 항마인을 취하였다. 어깨와 몸통부분이 경쾌하고 육감적이며,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우수한 불상인데 머리부분이 없는 상태이다.
    마애여래대불은 현재까지 발견된 남산의 마애불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전체높이 10m이며, 장방형 자연암석에 옷자락과 손의 모습 등을 음각과 양각으로 조각하였다.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허리부분으로 늘어뜨린 설법인의 입상이다. 머리부분은 별석(別石)으로 조성하였으나 현재는 없다.
    약수골의 입구에는 사적 제222호인 경애왕릉이 있다.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다가 후백제 견훤(甄萱)에게 죽음을 당한 경애왕의 무덤으로서, 능 둘레는 32m이며, 신라왕릉의 규모로는 제일 작은 것이다. 직사각형의 석재로 호석(護石)을 쌓고, 다시 오각형으로 된 돌기둥을 둘렀으나 흙에 파묻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또 사적 제221호인 지마왕릉(祗摩王陵)은 삼불사(三佛寺)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넘으면 나타나는 작은 호수 기슭의 송림 속에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6세손인 지마왕의 능으로, 둘레는 34.5m이다. 신라왕릉으로는 작은 편에 속하며, 무덤 둘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원형토분(圓形土墳)이다.
  1. 5. 경주 남산 삿갓골
    삿갓골[笠谷]은 삼릉골의 지류로서 경애왕릉 뒤편 계곡이다. 세 곳의 절터와 여래입상이 있다. 여래입상의 오른손은 설법인을 취하였고, 조각수법이 세련되어 있다. 허리 아랫부분은 깨어져 없어졌고 엉덩이 부분의 토막이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 6. 경주 남산 삼릉골
    사적 제219호로 경명왕릉·신덕왕릉·아달라왕릉 등 세 능이 있다고 해서 삼릉골[三陵谷]이라고 하며, 9곳의 절터와 10체의 불상이 남아 있다. 산으로 올라가면 석불좌상과 마애관음보살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머리가 없는 석불좌상은 높이 1.6m, 무릎너비 1.56m로,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이 곳에 안치하였다. 사실적이며 기백이 넘치는 조각수법으로서 신라통일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북쪽에는 마애관음보살의 입상이 있다. 높이는 1.5m이며, 오른손에는 설법인, 왼손에는 감로병을 들었으며, 머리의 보관에는 화불(化佛)인 아미타불이 조각되어 있다.
    석불좌상에서 30m 가량 올라가면 동서 양벽에 각각 삼존불을 선각으로 조각한 6존상이 있다. 우측 삼존상의 본존은 좌상, 협시는 입상이다. 음각으로 두광·신광·광배를 나타내었고, 밑으로는 연화대를 조각하였으며, 본존의 높이 2.4m, 협시는 1. 8m이다.
    좌측 삼존상은 특이한 형태로 본존의 오른손은 설법인,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고, 높이는 2.7m이다. 협시는 보살인지 천인(天人)인지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하여 공양하는 자세이다. 지물(持物)은 꽃(혹은 茶具)으로 보이며, 높이는 1.8m이다. 그 남벽으로 미완성의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삼릉계의 중턱에는 보물 제666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있다. 얼굴부분은 위로 반만 남아 있고 아랫부분은 파괴되었다. 옷주름은 가늘게 표현되었고 몸 부분은 풍부하다. 이 석불에는 원형의 신광과 보주형의 두광으로 된 큰 광배가 있으나,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다.
    이 석불 뒤쪽에 있었던 약사여래상은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삼릉계의 정상부근의 암자 위쪽에는 마애여래불상이 있다.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서 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높이 5.2m, 무릎너비 3.5m로서 굳센 기상과 단정한 모습을 담은 뛰어난 작품이다.
  1. 7. 경주 남산 선방골
    선방골[禪房谷]은 삼릉 입구에서 경주쪽 400m 지점에 있다. 길이가 700m 정도의 짧은 계곡이나 두 곳의 절터와 4체의 불상, 2기의 석탑 등이 남아 있다.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배리석불입상은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3체가 있다고 하여 삼체석불이라고도 한다. 중앙의 여래상은 높이 2.6m로 평면의 기단석 위에 안치된 입상이다. 얼굴은 단아하며 입가의 미소 처리가 뛰어나다.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이며, 특히 고신라 때의 유물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수인(手印)이다. 좌측 보살상은 높이 2.3m로 이중의 연화대 위에 서 있으며, 목에서 사리까지 영락을 드리웠고 오른손으로 그것을 감싸고 있다. 얼굴은 본존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머금었다.
    우측 보살상은 높이 2.3m로, 오른손은 가슴에 얹고 왼손은 굽혀서 허리에 대고 있다. 이 삼존불의 특성은 동안(童顔)의 미소, 수인, 옷주름의 처리 등이고, 고신라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 8. 경주 남산 기암골
    기암골[碁巖谷]은 속칭 배실이라고도 하는데,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놀았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탑지가 두 군데 있고, 머리가 떨어진 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산봉우리의 바둑바위 부근에는 사방 5m 가량의 금송정(琴松亭)터가 있으며, 그 동쪽으로는 천연의 돌난간이 있다. 기왓장이 다수 흩어져 있음으로 보아 건물터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이 금송정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며, 그는 신선이 되어서 하늘 나라로 올라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이곳의 앞 바위는 봉생암(鳳生巖)이라고 부른다.
    바둑을 두었다거나,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등의 전설은 모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설화이며, 불교의 성역에 습합된 도교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지금 금송정터에는 돌로 만든 대석이 남아 있다.
  1. 9. 경주 남산 유느리골
    유느리골[潤乙谷]에는 두 곳의 절터와 마애약사여래삼존불과 오층석탑이 있다. ㄱ자형의 암벽에 삼존을 새겼으며, 전체높이는 0.8m이다. 조각수법은 뛰어나지 않지만 고졸한 운치가 있다.
  1. 10. 경주 남산 포석골
    원래 부흥골[富興谷]이라 하였는데, 포석정이 있기 때문에 포석골[鮑石谷]이라고 하였다. 포석정 뒤 계곡일대를 가리키는데, 전체길이는 2.5㎞에 이른다.
    사적 제1호인 포석정지(鮑石亭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고도 한다. 이궁이란 별궁의 뜻이며 왕과 귀족들의 놀이터로서, 개울가에 솟은 바위에 돌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주고받게 하였다.
    그러나 경애왕이 이 곳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면서 신라는 끝을 맺게 된다.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 곳에 왔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9세기 이전부터 포석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포석정 뒤 계곡의 산정 부근에는 황금대(黃金臺)가 있다.
    그곳에는 10m가 넘는 높은 바위들이 줄이어 있는데, 그 바위빛이 짙은 누른색을 띠며 빛나고 해질 무렵에는 금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 일대가 선사시대의 주거지였다고 한다. 또한 선각의 마애여래상은 연꽃 위에 앉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높이는 1m, 무릎너비 86㎝, 어깨넓이는 40㎝이다. 곡선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석탑이 있는 등성의 고갯길에는 사리탑이 있다. 2기의 탑신이 무너져 내려 앉아 있는데, 한변의 길이가 66.7㎝로 아무런 장식도 없다.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보주형이 있을 따름이다.
    이 계곡의 정상에는 상사암이 있다. 이 바위의 중앙에는 감실이 있고, 그 밑에 높이 80㎝, 너비 35㎝의 작은 석불이 있다. 머리부분은 없어졌고 두 손은 통인(通印)이다. 전체 모습이 배리의 삼체석불과 흡사하다. 그 곁에는 남근석(男根石)이 있는데, 이곳에는 1856년에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
    즉, 누구누구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여 아들을 얻었다는 내용으로서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바위에는 부처의 형상을 한 자연석이 있다.
    포석골의 대표적인 절터로는 창림사지(昌林寺址)가 있다. 현재 귀부와 석탑이 남아 있으며, 탑은 도괴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귀부는 신라 때의 것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원래 거북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마리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거북의 등에 신라명필 김생(金生)의 글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에는 비신과 거북의 머리가 모두 없어졌다. 이곳에서는 목없는 비로자나불상이 발견되었는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 11. 경주 남산 장창골
    창장골[長倉谷]에서는 천은사지(天恩寺址)를 비롯한 6곳의 절터와 3체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4곳의 탑자리와 1기의 당간지주가 있다.
    천은사지는 장창골 본류(本流)에서 동쪽의 고개 위에 있으며, 초석·탑지붕돌 등이 남아 있다. 이 곳에서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대석으로 여섯 마리의 사자가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농대석(籠臺石)이 발견되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삼화령석조미륵삼존상은 장창골 절터에서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덕왕 때의 고승 충담(忠談)이 차를 달여 공양하였던 불상으로서 본존은 의자에 걸터앉은 특이한 모습으로 천진스런 미소가 돋보인다. 보살입상도 역시 동안의 천진스런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간결소박한 느낌을 준다.
    또한 이곳에는 장창지(長倉址)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591년 장창을 지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문무왕 때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우창지(右倉址)는 남북 50m, 동서 17m로서 장방형 기단을 쌓고, 주춧돌이 정연하게 놓여 있는 정면 17칸의 건물이었다. 좌창지는 정면 45m, 측면 15m이며, 중창지는 정면 107m, 측면 23m의 가장 큰 규모의 식량저장소였다. 그리고 남산성 기슭에는 사적 제173호 일성왕릉(逸聖王陵)이 있다.
    전체둘레는 47.5m이며, 봉토둘레에 나지막한 호석을 쌓았을 뿐 조각은 없다. 남간사지(南間寺址)의 오른쪽 언덕에는 양산대(陽山臺)가 있다. 육촌장(六村長)이 다스리던 신라 초기 때의 여섯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또 사적 제245호 나정은 박혁거세가 알에서 탄생하였다는 설화가 있는 우물터로서, 현재 박혁거세왕의 탄생에 관한 내력을 새긴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1802년에 세워졌다. 나정과 양산대 사이에는 신라를 세운 육부 촌장의 재실이 있으며, 내부에는 양산부 이씨(陽山部李氏)·고허부 최씨(高墟部崔氏)·대수부 손씨(大樹部孫氏)·간진부 정씨(干珍部鄭氏)·가리부 배씨(加利部裵氏)·명활부 설씨(明活部薛氏)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 12. 경주 남산 식혜골
    식혜골[識慧谷]은 약 700m의 짧은 계곡이며, 두 곳의 절터가 발견되었다. 골짜기의 막다른 골목에서 발견된 절터는 기와의 명문에서 밝혀진 대로 사제사지(四際寺址)이다. 기단면석에 팔부신중을 새긴 석재가 발견되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남산성과 포비암(布飛巖) 등이 있다. 남산성은 남산 해목령을 중심으로 사방 4㎞ 되는 성으로서 진덕여왕 때 쌓았던 것을 문무왕 때 대규모로 수축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고, 다만 지세에 맞추어 그 높낮이를 조정하였다. 이 성을 쌓을 때 여러 마을에서 조(組)를 지어 각각 구역을 나누어 쌓았다고 한다. 포비암은 식혜골의 정상에 있던 바위로서 전설에 의하면 옛날 베짜던 곳이라고 하여 베나리바위라고도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신라의 폐사』 Ⅱ(한국불교연구원,일지사,1977)

  • 경주남산고적  (윤경렬, 경주시, 1980)

  • 慶州南山の佛蹟  (朝鮮總督府,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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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6년)
정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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