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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역(良役)

    조선시대사제도

     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역역(力役) 징발과 재정확보를 위해 원칙적으로 16세 이상 60세까지의 양인(良人) 또는 양민(良民)의 남자 즉, 양정(良丁)에게 부과하던 각종 신역(身役)의 통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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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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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
    시대
    조선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역역(力役) 징발과 재정확보를 위해 원칙적으로 16세 이상 60세까지의 양인(良人) 또는 양민(良民)의 남자 즉, 양정(良丁)에게 부과하던 각종 신역(身役)의 통칭.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우선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용례부터 본다면 이미 태종 때부터 찾아지지만 16세기까지만 해도 군역(軍役)·국역(國役)·신역(身役) 등의 표현이 보다 일반적이었고, 양역의 용어는 17세기 이후에 가서야 널리 사용하게 된다.
    또 양역의 주된 형태가 군사활동과 관련된 군역이고 군역이 노비 등 천인(賤人)을 제외한 양인에게만 부과되었기에 흔히 군역과 구별 없이 혼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속오군(束伍軍)의 편성으로 군역 부담자 속에 노비가 상당히 포함(즉 軍役=良民·奴婢)되면서 필요한 경우 엄격히 구별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역의 용어가 극히 빈번하게 사용된 조선 후기의 경우 주로 국가재정과 관련해서였다면, 태종·연산군·중종 때 간헐적으로 찾아지는 전기에는 예컨대 ‘천첩자(賤妾子)의 신역을 양역에 속하게 하느냐 천역에 속하게 하느냐’(『중종실록(中宗實錄)』 권 13, 6년 4월 庚辰條), 또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사람들에게 양역을 지게 하느냐, 천역을 지게 하느냐하는 논의’(『태종실록(太宗實錄)』 권 28, 14년 11월 丙辰)에서 보듯이 양인·천인 사이의 신분 불명자(不明者)에 대한 신분귀속 관계에서 양인신분임을 규정해주는 기준으로서 즉, 주로 신분적 측면과 관련해 사용되는 차이가 있다.
    전기와 후기에서 보이는 이러한 용어 및 용례상의 차이는 당연히 시기의 변천에 따른 양역 편성과 성격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과정을 보기 전에 먼저 양역이 갖는 전·후기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시급한 왕실 숙위(宿衛)와 국방체제를 갖추기 위해 군제개편과 군사기구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그 토대로써 필요한 인적자원 확보를 위해 군역이 정비되었다.
    나아가 정부에서 필요한 인력과 물자 조달을 위해 군역 이외의 제반 잡색역의 정비와 새로운 역종(役種)도 설치되었다. 특히 제반 잡역과 관련해서는 향리·역리·조례·나장 등 역종이 세습되는 특수 신역과 서리·산원·악생 등 관청에 일정기간 봉사하는 관속류가 생겨났다. 그 숫자는 1393년의 기록에 보면 10만 명 정도로서 20만 명이던 군역의 2분의 1에 이를 만큼 비중이 컸다.
    조선 전기에 군역을 포함한 각종 역의 편성에 필요한 인원이 모두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려우나 성종대의 기록(『성종실록』 권 81. 8년 6월 乙卯條)에 의거하면 군역만으로도 50만 명이 넘고 있다.
    이와 같이 막대한 숫자에 이르는 군역·잡색역의 인원은 결국 당시의 호적에 기재된 인적 자원에서 확보해야 했다. “사람이 있으면 역이 있다.(有身者有役)”라는 전통적인 동양사회의 역역징발 원칙은 이를 합리화해주는 논리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양역 부과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양·천으로 대별되는 당시의 신분에서 각기 그 주인에게 역을 바쳐야하는 천인(노비)은 제외되었다.
    따라서 비천인(非賤人)인 양인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제반 역의 부과대상이었다. 양역이 국역(國役)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관료나 교생(校生) 등을 제외한 양반사족도 부과 대상에 포함되었다.
    다만 고려시대 이래의 관례에 따라 공민권(公民權) 행사의 주체로서 남자만이 봉공(奉公)의 의무가 있다고 해 여자는 제외되었다. 또 16세 이하의 어린이와 60세 이상 된 늙은이는 노동력의 징발이 불합리하다해 원칙적으로 면제되었다.
    여기서 양인·천인을 가리지 않고 호(戶)를 구성해 생계를 영위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요역(徭役)과 다르고,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사역하거나 그 대가를 징수한 천역과도 다른 16세 이상 60세까지의 양인 남자를 대상으로 노동력을 징발하거나[立役], 대신 옷베를 징수하는[納布]양역이 성립하게 되었다.
    군사력 강화를 위한 태종·세종대의 군제개편과 특히 전국적인 국방체제의 구축을 목표로 한 세조대의 5위체제 확립은 위에서 보듯 50만이 넘는 막대한 인원의 확보를 필요로 하였다.
    그 결과 양역의 인원수 내에서 군역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양역의 부담형태에서 제반 잡역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양역이라 하면 곧 군역으로 인식되었다.
    양역의 부담방식은 직접 군사활동하는 것[立役―이를 수행하는 자를 正丁 또는 正軍이라 한다]과 군사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옷베로 납부하는 것[助役-이를 부담하는 자를 奉足 또는 保人이라 한다]의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보인들은 정군에게 개별적으로 예속되어 포를 납부할 뿐, 국가의 군역징발은 어디까지나 정군을 통해 이루어진 만큼 전기의 경우 양역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노동력[力役]수취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양역은 16세기 전반기인 성종·중종대를 지나면서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를 보인다. 첫째, 양반사족층의 군역기피 현상이 나타나고 시기가 지나면서 양반사족의 군역 제외는 당연시되며 그에 따라 군역은 양인내에서 일반 백성 즉, 흔히 양민(良民)으로 표현되는 신분층으로 국한되었고, 나아가 양민 안에서도 경제력이 있는 자의 피역 현상이 크게 일어나 양역은 이제 힘없고 가난한 양민들이 부담하는 것으로 부과대상의 축소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세도가 변하고 기강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지적과 함께 16세기이래 사족지배체제 형성에 따라 반상(班常)의 신분제가 자리 잡아가는 현상과, 양반층의 왕실 지지기반으로서의 군역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급된 과전의 소멸에 있다고 설명된다.
    한편으로는 양반사족의 군역부담을 위해 설치된 충순(忠順)·충찬위(忠贊衛) 등의 특수 병종에 대한 체아직(遞兒職)과 품계지급, 관직 진출의 기회 등의 특권이 유명무실해가며, 또 군역 균일화에 따른 양반층에 대한 일반군역 부과와 함께 군역징발자에 대한 반대급부인 산관의 품계지급 역시 소멸되어 전반적으로 군역의 질적 저하가 심화되던 현상도 그 원인이라 한다.
    군역부담자가 양민으로 좁혀지기 시작하던 16세기에는 출역(出役) 형식이 입역에서 점차 수포(收布)라는 물납(物納)으로 전환되는 변화도 일고 있었다.
    입역하는 정군은 비록 보인으로부터 보포(保布)를 받는다 해도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일정기간마다 번상(番上)하거나 유방(留防)하는 일은 귀찮고 고통스러웠다. 거기다가 전쟁이 없다 보니까 점차 각종 사역에 동원되어 역졸화(役卒化)되는 경향이 심해졌다.
    이에 보포로 사람을 사서 자신의 입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代立) 또는 고립제(顧立制)가 생겨났다. 이것은 본래 정군과 대립인(代立人) 사이의 사적인 관계였으나 그에 따른 폐단이 일자 국가가 개입, 번상을 면해 주면서 대신 포를 병조에 납부하게 하고[代役納布 또는 放軍收布] 병조에서 필요한 군사를 값을 지불하고 고용하는[給價雇立] 방식으로 바뀌어갔다.
    이것이 1541년(중종 36)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으로 법제화되어 기병과 유방정군(留防正軍)을 제외한 보병에서의 수포는 일반화되었다. 군역의 수취방식이 군사활동 위주에서 재정적 성격의 징포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왜란을 거치면서 5위제가 완전히 붕괴되자 시급한 군사력의 재건을 위해 중앙에 훈련도감이 창설되고 지방에는 속오군이 편성되었다. 그 중 훈련도감은 모병제에 의해 군사를 선발하고 국가재정에서 급료를 지급하는 양병제(養兵制)의 형식을 취해 그만큼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겼다.
    17세기 중엽인 현종 때에 약 6,000여 명의 훈련도감 군사[三手軍]를 양성하는데 1년에 호조 재정의 3분의 2인 8만석이 소요되었다 하며,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별도로 포보(砲保)와 군향보(軍餉保)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국가 재정에서의 군사비 지출은 결국 국가재정의 심각한 부족현상을 초래했으며, 이를 메우기 위한 대책으로서 이미 16세기 이래 시작된 양역의 포납화 경향은 더욱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속오군은 일종의 전시 동원체제로서 양민은 물론 양반·유생·향리와 공사천(公私賤)까지 이른바 양인·천인을 모두 포함해 편성되었다.
    그러다가 전란이 끝나면서 양반·유생·향리 등은 빠져나가고 양민과 공사천만 남게 되었다. 천인에게 군역을 부과할 수 없다는 원칙에 따른다면 공사천도 제외되어야 했으나, 전란에 따른 인적 손실 때문에 그들마저 뺀다면 속오군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뒤이어 여러 개의 군영들이 설치되면서 양민이 그쪽으로 빠져나가자 속오군은 점차 천예군(賤隷軍)화 하다가 1736년(영조 12) 양속오(良束伍)의 제외 조처로 완전히 천예군이 되었다.
    이제 군역에는 양민이 지는 양역과 천인이 지는 천역의 두 가지 형태가 있게 되어 군역을 곧 양역으로 간주하는 전기 이래의 관행은 엄밀한 의미에서 통용될 수 없게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에도 이 관행은 지속되었다)
    17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군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친명책의 표방으로 대북방관계가 악화된 데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거니와 공신세력 사이에 군사권 경쟁이 벌어진 결과 새로운 군문의 창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인조초의 총융청·수어청 설치에서 비롯된 군문 창설 시도는 어영청·정초청(精抄廳)·훈련별대로 늘어나고 다시 정초청·훈련별대를 합쳐 금위영으로 삼은 숙종초에 5군영체제의 확립으로 완료되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군영의 명목과 엄청난 양정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훈련도감의 삼수군 양성에 워낙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었기에 양병제에 의한 군영 증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따라서 다시 전기와 같은 번상급보(番上給保)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조 말년 경의 어영청이 번상에 의한 1,000명의 군사를 확보하는 데 2만 명 정도의 번상 정군과 같은 수의 자보(資保, 번상시의 왕래 비용 부담), 41,000명의 관보(官保, 번상병에게 지급되는 料米 부담) 등 합계 8 1,000명의 인원이 필요했던 예에서 보듯이 많은 양정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어청과 총융청은 각기 경기 남·북부 지역의 속오군으로 편성하고 둔전(屯田)으로 경비를 자체 조달하는 편법을 썼다. 그러나 군사적 기능이 떨어지는데다가 거기에도 적지 않은 양정이 편입되어야 하였다.
    그 결과 18세기초인 1702년(숙종 28)경 5군영에는 [표 2]에서 보듯이 정군 102,714명, 보인 188,259명, 합하여 290,973명의 군역부담자가 속했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5군영과 속오군의 신군제가 성립했다하여 군역 부담자의 수[軍額]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기의 5위는 폐지되었으나 거기에 속했던 기병과 보병·갑사·정로위(定虜衛) 등의 군액은 구군적(舊軍籍)으로 별도 분류되어 병조에 귀속되고 군적수포법에 따라 군포(良布라고도 함)를 내야 하였다. 후기에 보이는 병조의 기보병 또는 병조의 이군색(二軍色)은 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시급한 문제는 전란으로 인해 빠져나간 인원[闕額]을 보충하는 일이었다. 1648년(인조 26) 당시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적인 궐액은 약 25만명이었다. 그리고 도망하거나 죽고, 또 60세가 넘어 군역에서 제외되는 등의 이유로 궐액은 매년 발생하였다.
    이런 궐액의 보충을 위해 중앙에서 지방별로 일정 액수의 양정을 할당해 강제로 궐액을 충당하게 하는 세초(歲抄)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702년(숙종 28)경 그 숫자는 표에서 보듯이 7명목의 정군이 59,800명, 군적수포법에 따라 포를 내는 보인이 14명목에 283,600명 합해 343,400명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연해변의 어민(漁民)을 수군으로 고용할 비용마련을 위해 설치된 수포군으로서의 수군 41,400명이 있으며, 대개 전졸(戰卒)로 파악되는 지방군 355,200명도 설치되어 있어서 18세기초인 숙종 28년경 전체 군액은 정군 내지 전졸 517,714명, 보인 내지 수포군 513,259명, 합계 1030,973명에 달한다.
    군역 부담자의 숫자가 나라를 통틀어 실제의 군졸과 수포군이 각기 50만이라는 당시 위정자들의 언급이 사실로 확인되는 셈이다.
    숙종 전반기에 보이는 위와 같은 군제와 군역 명목 및 군액은 1704년(숙종 30)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의 건의에 따라 전체적인 정비를 보게 된다.
    서로 상이한 군영간의 편제를 통일하고 불필요한 군액을 줄여 궐액의 충당에 제공한다는 목적에서 추진된 이 개편 정비작업은 결과적으로 중앙의 군사력을 훈련도감이 전담하도록 하였다.
    어영청·금위영의 번상병은 크게 축소되었으며, 거기에다가 흉년 등으로 번상을 중지하고 대신 포를 거두는 정번수포(停番收布)가 잦아서 이제는 신군제마저 군사적으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련도감군은 모병에 의해 선발된 직업 군인이어서 군역과는 일단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중앙의 군사력은 군역과 무관한 직업군인에게 의존하게 된 셈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속오군 내에서도 양속오(良束伍)의 제외 조치로 인해 완전한 천예화(賤隷化)가 이루어져 속오군은 군역 내의 천인이 담당하는 역이 되었다.
    중앙군은 직업군인이, 지방군은 천인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양민으로 하여금 군사비용 및 일반재정을 담당하도록 이끌었다.
    일찍이 유형원(柳馨遠)이 “병조가(그 소속의 군병에 대해) 각처의 파수꾼이나 사환으로 부리는 자 이외에는 모두 방군수포하고 있다. 병조가 이러니 지방에서 이를 본뜸이 더욱 심해 장부를 펼쳐 사람 수를 헤아려서 매달 들어올 가포(價布)나 셈하고 있다. 지금 경외(京外)의 아문으로 방군수포하지 않은 데가 없다. 그러므로 군사라 하면 문득 포를 바치는 사람으로만 여기고 보병이라 하면 사람들은 면포로만 알뿐 그것이 본래 군사의 이름인 줄 모른다.”(『반계수록(磻溪隧錄)』 권 21, 兵制)고 지적한 것 처럼, 군역내의 양민부담자들에게 수포화가 진행된 결과 양역이 면포를 의미할 정도로 수포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군역내의 천역은 지방군의 입역을 중심으로, 군역내의 양역은 수포중심으로 운영되어서 양역의 부세적 성격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표 2]는 현종 이후 양역에서의 수포수를 표시해 본 것이다. 산출 근거의 상이(相異)와 당시 사람들의 부정확한 숫자 관념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하나 수포의 양이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양역의 수포화 경향이 그만큼 심각하게 진행되었음을 나타낸다.
    군역의 폐가 문제되는 속에 유독 양역내의 수포군수 파악을 위해 1743년(영조 19) 「양역총수」와 1748년의 『양역실총』이 편찬된 이유도 그것이 국가의 재정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양역총수」의 내용을 명목과 인원수를 중심으로 정리해 [표 3]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보면 큰 구분으로 경안(京案)과 외안(外案)이 있다. 경안이란 중앙에 납포하는 양역이며 외안은 감영·병영·수영 및 제진(諸鎭)에 납포하는 것을 말한다. 경안에는 모두 68종의 명목에 473,616명, 그리고 외안에는 2명목 103,892명이 속해 있다.
    경안 소속이 외안보다 8대2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는 후기의 군제가 중앙군 강화에 초점을 맞춘 편제상의 특징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역 자체가 부세화하면서 중앙 재정에 양역이 집중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양역제의 문제점은 크게 보아 ① 양역제도 자체의 모순, ② 양역제 편성상의 모순, ③ 양역 징수상의 불합리란 세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
    ① 양역제도 자체의 모순이란 양역이 이미 부세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역적인 전통에 따라 포를 인정(人丁) 단위로 거두고 있음을 말한다.
    역역의 징발이라면 당연히 인정 단위가 되어야하지만 물납이라면 경제력에 기초해 징수해야 한다. 또 인정 단위의 수포라 해도 부담이 적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양정 한사람에게 평균해서 2필 정도의 부담이란 그렇게 무겁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가족으로 본다면 부담의 중압감은 달라진다. 한 집안에 부자, 형제 3∼4인이 양역을 진다면 쌀로 환산해 5∼6석, 돈으로 계산하면 20냥이 초과되었다.
    후일 균역법 제정의 주관자인 홍계희(洪啓禧)에 의하면(『균역사실』) 이 시기 양역에 응하는 농가 1호당 토지의 평균수입이 5석(25냥) 정도였다 한다. 이로 보아 양역의 부담은 바로 농가 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양역제 자체의 모순과 관련해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인정 단위의 수포면서도 신분적 요소가 작용해 양반이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당시가 신분제 사회이니 만큼 특권 신분인 양반사족의 양역 이탈은 용인될 수 있고, 또 전체 호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소수에 그치는 만큼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양반의 군역 이탈이 양역을 져야할 양민의 피역(避役)주 01)을 유발하는데 있었다.
    양역을 부담한다는 것은 양민신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바람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사회에서는 그런 길이 완전히 막혀 있지는 않았다. 쉽지는 않았지만 양반신분을 취득하거나, 합법적으로 면역의 특전을 부여받은 유생이나 교생 등의 모칭으로 그것이 가능하였다.
    그 결과 홍계희에 따르면 62만 호가 져야할 양역을 10여 만 호가 부담하는 모순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양역폐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인 양정 부족을 초래해 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 등의 양역의 폐단을 낳게 한 것이다.
    ② 양역제 편성상의 모순이란 임진왜란 이후 군제 편성에서 초래된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왜란 당시의 훈련도감·속오군 설치도 그러했지만 인조 이후의 계속된 군영 창설은 전쟁의 위기속에 급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처음부터 계획적일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군사권 장악 경쟁으로 자기계열 군영의 양역 편성에 각종 예외와 특혜를 남발함으로써 양역 행정의 난맥상을 부채질하였다.
    이러한 군영설치와 양역 편성의 무원칙·무정제성은 다양한 역종(役種)의 명목설정과 군액의 과도한 증가, 그리고 힘들고 편한 역의 부담상의 차이를 가져왔다.
    1702년(숙종 28) 우의정 신완(申琓)의 보고[진팔조만언봉사차 (進八條萬言封事箚), 『경암집(絅菴集)』 권4]에 의하면 관서지방의 경우 양역 명목이 100종 가까이 된다 하며, 위에서 본 『양역실총』의 명목만으로도 70종을 헤아릴 수 있다.
    양역 명목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외방의 영(營)·진(鎭)·읍 또한 각종 군관·아병(牙兵) 등의 명목으로 군보를 모았다. 이들 명목은 불법적이고 은밀히 이루어져서 중앙의 통계에는 잡히지도 않았다.
    이런 양역 명목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양역명목에 따른 양역부담의 차이를 가져왔다. 병조의 기보병이 16개월에 한 번 번상하거나 출포함에 비해 어영청의 기사(騎士)는 15개월에, 보군은 48개월에 한 번씩 번상내지 납포하였다.
    숙종연간 양역이정청에서 파악한 조사에 따르면 수군·조군(漕軍)의 5종목이 3필역이고 사복시(司僕寺) 제원이 2필반, 기보병의 호·보, 훈련도감의 포보 등 37종은 2필, 정로위·어부보(漁夫保) 등은 1필을 바쳤다 한다.
    명목의 다양함과 출역의 차이는 헐역처(歇役處)주 02)로의 투속(投屬)을 불러 일으켰다. 양역에서 빠지지 못할 바에야 누구나 부담이 가벼운 역을 지려 했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런 점을 노려서 각군·아문들은 새로운 명목과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양정을 불러모았다. 그 결과 1702년(숙종 28) 경에 군액은 총 100만을 넘고 그 안에 양역 부담자는 50만 명을 웃돌게 되었다.
    실로 피역과 헐역처의 투속은 역의 명목을 갖지 아니한 양정의 씨를 말리다시피 하여 양정의 부족현상을 가져오는 기본요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생하게 마련인 궐액의 대정(代定)을 어렵게 하여 어린아이와 죽은 자의 백골까지도 양역의 명단에서 빠지지 못하게 하는 참상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③의 양역징수상의 불합리란 군총제(軍摠制)를 말한다. 조선 후기는 각 지방에 일정한 군액의 총 숫자를 배정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군액에 해당하는 군보를 확보해 번상시키거나 혹은 포를 상납해야 하였다. 이를 군총(軍摠)이라 불렀다.
    그래서 각 읍은 궐액이 발생하면 다른 양정으로 이를 채워 넣으며,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책임이 수령에게로 돌아오므로 수령들은 불법임을 알면서도 백골징포·황구첨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가에서는 때로 거두지 못한 신포를 일부 탕감해 주기도 하고 농민의 유리로 호구가 줄어든 이른바 군다민소(軍多民少)한 군현에 대해서는 특별히 군총수를 줄여 주거나 민다군소(民多軍少)한 고을의 양정을 옮겨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총제 자체는 폐기되지 않았으며, 1748년(영조 24) 『양역실총』으로 확정된 지방 군현별 군총은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19세기에 문제가 된 3정 중의 군정 폐단은 군총제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반계수록(磻溪隨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균역사실(均役事實)

    • 양역총수(良役摠數)

    • 양역실총(良役實摠)

    • 「양역의 편성과 폐단」(정만조,『한국사』 32,국사편찬위원회,1997)

    •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변통」(정연식,서울대 박사학위논문,1993)

    • 「17세기 군역제의 추이와 개혁론」(김종수,『한국사론』 22,한국편찬위원회,1990)

    • 「조선후기의 부세제도이정책」(김용섭,『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일조각,1988)

    • 「양역과 천역」(류승원,『조선초기신분제연구』,1987)

    • 「양반과 군역편제」(이성무,『조선초기양반연구』,일조각,1980)

    • 「양역변통론에 대한 검토」(정만조,『동대논총』 7,1977)

    • 「군역의 변질과 납포제 실시」(이태진,『한국군제사』 근세전기편,1968)

    • 「사회구조와 군역제도의 정비」(민현구,『한국군제사』 근세전기편,1968)

    • 「임란이후의 양역과 균역법의 성립」(차문섭,『사학연구』 10·11,1961)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역을 피함
    주02
    役의 부담이 다른 곳에 비해 가벼운 곳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정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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