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號)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정석(崔鼎錫, 16781735)의 아들이다. 옻골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대구(大丘)의 칠계(漆溪)에 대대로 거주했다. 1722년(경종 2)에 향시(鄕試) 생원초시(生員初試)에 주1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칠계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생을 마쳤다. 1739년(영조 15)에 대구 팔공산(八公山) 부인동(夫仁洞)에서 중국 북송(北宋)의 남전향약(藍田鄕約, 呂氏鄕約)을 모범으로 삼아 향약(鄕約)을 실시했다. 이 향약은 납세를 충당하는 선공고(先公庫)와 빈농을 구제하는 휼빈고(卹貧庫)를 핵심으로 하여, 약 100여년간 유지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향약이다. 인척인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이른 시기부터 연구한 것을 인정받아, 영조의 왕명으로 대구 감영(監營)에서 『반계수록』을 간행할 당시 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과 가깝게 교류하여, 영남 남인(南人)으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말년에 동몽교관,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 등에 주2,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인 1789년(정조 13)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며, 1790년에는 좌승지(左承旨)에 주3.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의 주4 원본을 포함하여 최흥원의 향약 운영과 가정 경제, 인적 교류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옻골 경주최씨 백불암파 종가 소장 전적이 백불암 주5에 전한다.
『백불암문집』을 최초로 편찬한 최흥벽(崔興璧, 1739~1812)은 최흥원의 주6이자 수제자이다. 자는 사교(士敎) 또는 사경(士敬), 호는 두와(蠹窩)이다. 최사석(崔師錫)의 아들이다. 저서로 『두와집(蠹窩集)』이 있다.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하여 벼슬에 나아가지는 못했으나, 영남에서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도 배웠다.
『백불암문집』을 간행한 최효술(崔孝述, 17861870)은 최흥원의 증손자이다. 자는 치선(穉善), 호는 지헌(止軒)이다. 저서로 『지헌집(止軒集)』이 있다. 외조부 정종로(鄭宗魯, 17381816)에게 수학하고, 퇴계학파의 가학을 이었다.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천거로 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다.
『백불암문집』에는 간행 경위를 알려주는 서발문(序跋文), 간기(刊記)가 없다. 그러나 최흥원의 연보, 언행록, 묘도 문자 등에 관련 기록이 산재한다. 이에 의하면 최흥원의 사망 직후에 최흥벽을 중심으로 한 대구 사림(士林)들이 유고를 수습하고, 1808년경, 정종로에게 초고의 교정을 의뢰했다. 정종로의 교정본을 가지고, 최흥원의 증손자이자 정종로의 외손자인 최효술이 원집(原集) 14권, 부록(附錄) 4권 합 7책의 구성으로 목판본 『백불암문집』을 간행했다. 그 시기는 최흥원 사후 30년, 즉 1816년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초간본 『백불암문집』이다.
이후에 최효술은 최흥원의 언행록(言行錄)을 간행했다. 언행록에 1835년(순조 8)의 주7 기사가 있으므로, 간행은 그 이후로 볼 수 있다. 이 연보는 『백불암선생언행록(百弗菴先生言行錄)』이라는 표제의 별도 서적으로 각급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시 그 이후에 최효술은 원집을 주8 8권 4책으로 축소한 중간본(重刊本)을 목판으로 간행했다. 간행 연대는 미상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언행록과 합철된 중간본이 소장되어 있다.
초간본은 원집 14권, 부록 4권, 총 18권 7책의 구성이다. 10행 18자, 상하내향2엽화문어미(上下內向2葉花紋魚尾)의 목판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초간본을 축소한 8권 4책, 10행 18자, 상하내향2엽화문어미(上下內向2葉花紋魚尾)의 목판본 중간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는 시 50수가 수록되어 있다. 청년기에 팔공산(八公山) 보재사(寶齋寺)에서 공부할 당시의 작품을 시작으로, 주변인들과의 주9, 경물에 관한 시 등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도학사상(道學思想)을 피력한 것이 많다. 이 가운데 「차경산수엄공황정운(次慶山守嚴公荒政韻)」에서는 흉년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며, 이에 대한 괴로운 심정을 읊었다.
권2~10에는 장(狀) 5편, 서(書) 391편이 수록되어 있다. 장(狀)은 모두가 사직(辭職)에 관한 내용이다. 서(書)는 방대한 분량으로 학문적인 문답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주로 예학(禮學)에 관한 것이며, 간혹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것도 있다. 특히 이상정과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학문적 문답을 행한 것이 많고, 이상정 사후에 이광정에게 애도의 뜻을 표한 것도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권11~13에는 잡저(雜著) 13편, 잠명(箴銘) 3편, 축문 8편, 제문(祭文) 15편, 비갈 3편, 행장(行狀)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독서잡록(讀書雜錄)」은 독서하는 중에 선현들의 중요한 말을 그때그때 적어 놓은 것으로, 대개 심성(心性)에 관한 것이 많다. 「역중잡록(曆中雜錄)」은 저자가 31세인 1735년(영조 11) 부친상을 당한 해부터 66세인 1770년까지 연도별로 집안일에 대한 것 등을 기록한 것이며, 날짜별로 세세하게 되어 있지는 않으나 상당히 방대한 분량이다. 이밖에 「봉선입의(奉先立議)」 · 「효제당절목(孝悌堂節目)」 · 「학재절목(學齋節目)」 · 「부인동동약절목(夫仁洞洞約節目)」 등은 문중(門中) 또는 향리(鄕吏)의 친목 · 교화 및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정한 절목으로, 내용이 상세해 연구할 만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가야산 기행문인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은 경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제문은 이상정을 비롯한 주변인과 일가 친척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비갈은 부인동동약의 운영을 위해 공전(公田)을 설치한 내력을 기록한 「부인동동약공전비(夫仁洞洞約公田碑)」, 6대 조부모의 묘갈이고, 행장은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 함안조씨(咸安趙氏)를 위한 것이다.
권14에는 평거강어(平居講語)가 수록되어 있다. 생전에 최흥원이 제자들과 강론하며 문답한 내용을 최흥벽이 기록, 정리한 것으로, 최흥벽의 후지(後識)가 첨부되어 있다. 저자의 사상과 학문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부록 권14는 최흥원의 세계도 · 연보 · 행장 · 묘지명 · 묘갈명 등이다. 세계도에는 중시조인 최단(崔鄲)부터 최효술까지 16대가 기록되어 있다. 행장은 이광정이, 묘지명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묘갈명은 정종로가 각각 지었다.
조선 후기 남인계 학자의 학문과 교유 관계, 향촌 공동체 운영 양상을 보여주는 문헌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