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택(金春澤: 1670~1717)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부친 김만기(金萬基)의 장손(長孫)으로서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에 의해 대표적인 주1으로 지목받아 벼슬도 하지 않고 평생을 옥사와 유배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저술이 나올 수 있었는데, 저자는 생전에 자신의 시문을 자편(自編)해 놓았다.
20권 7책으로, 운각인서체자(芸閣印書體字)로 된 활자본이다. 이는 1760년에 간행한 초간본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760년(영조 36) 김춘택의 손자 김두추(金斗秋)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 책은 원래 저자가 손수 지은 9책으로 정리해 두었지만, 출간되지 못하고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 구서(舊序)와 자발(自跋)은 완본이 나올 때까지 출간을 보류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끝에 김두추의 후서가 있다.
맨 앞에는 권1, 2의 목록이 있고, 권36, 권79, 권1012, 권1315, 권1618, 권1920으로 나뉘어 각기 책(冊)별로 목록(目錄)이 달려 있다.
권1~6은 시(詩)이다. 초년록(初年錄) 1권, 수해록(囚海錄) 2권, 그리고 취산록(鷲山錄), 은귀록(恩歸錄), 노산록(蘆山錄)이 각 1권씩이다. 초년록은 138제(題)로, 1691년 22세에 제주로 유배 중인 부친을 뵈러 갈 때 지은 시부터 1701년과 이듬해까지의 부안(扶安) 정배(定配) 시절을 포함하여 1706년 제주로 정배되기 전까지의 시이다. 수해록은 103제로, 1706년 8월 이후 제주 정배 중에 지은 시이고, 취산록은 68제로 1710년 7월에 임피(臨陂) 부안역(蘇安驛)으로 이배된 이후 지은 시이다. 은귀록은 48제로, 1712년 5월 석방된 이후 지은 시이고, 노산록은 76제로, 1715년 처자를 이끌고 와서 노산(蘆山)에 우거하게 된 이후 지은 시이다.
20대 이후 48세로 사망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을 옥사(獄事) 연루와 정배(定配)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관계로 시의 대부분이 당시 상황 속에서의 억울함 심정, 자위(自慰)하는 마음을 읊은 것이다. 그리고 유배지의 풍광을 읊은 시, 유배지로 찾아온 가족이나 친지와 차운한 시 등이 많은데, 특히 동생 김보택(金普澤), 김운택(金雲澤)을 비롯해 오정빈(吳廷賓), 이희지(李喜之) 등과 차운한 시가 많이 실려 있다. 또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한역(漢譯)한 시와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思美人曲)」을 이어 언문(諺文)으로 「별미인곡(別思美人曲)」을 짓고 나서 대지(大旨)를 적은 시가 눈에 띈다.
권720은 문(文)이다. 권712는 초년록, 권13~16은 수해록, 권17은 취산록, 권18은 은귀록, 권19는 습유록(拾遺錄), 권20은 노산록이다. 이 가운데 습유록은 초년 이후 노산록 시기 이전의 문 가운데 빠진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수록 내용을 문체별로 정리해 보면, 서(書) 11편, 서(序) 19편, 기(記) 8편, 설(說) 5편, 록(錄) 7편, 애사(哀辭) 5편, 제문(祭文) 21편이 순서대로 실려 있고, 소(疏) 10편과 찬(贊) 2편, 사론(史論) 33편, 종사지감(終事志憾) 9편, 산고(散藁) 6편, 지(識) 2편, 서후(書後) 2편, 의책(擬策) 3편, 명(銘) 2편과 변(辨), 광명(壙銘), 묘표(墓表), 문답(問答), 장(狀), 공사(供辭), 행장(行狀), 총론(總論) 1편씩이 실려 있다.
서(書)는 이담(李橝), 이여(李畬), 중부(仲父) 김진규(金鎭圭) 등에게 보낸 것이다. 서(序)는 연경으로 가는 이이명(李頤命)에게 지어 준 것을 비롯한 다수의 송서(送序), 오정빈이 1691년경 제주에서 저자와 수창한 시를 모은 『동천창수록(東川唱酬錄)』에 지은 서(序) 등이다.
기(記)는 부친을 대신하여 김만기의 묘에 적은 「선묘어필표음기(先墓御筆表陰記)」, 제주의 동천(東泉) 적사기(謫舍記) 등이다. 설(說)은 제주 유배 시절 해녀에 대해 지은 「잠녀설(潛女說)」, 송무원(宋婺源)에게 지어준 「몽설(夢說)」 등이다. 록(錄)은 모친의 행록(行錄), 증조모 윤부인(尹夫人)의 언행별록(言行別錄), 1694년 옥사 때의 일을 적은 「옥중록(獄中錄)」, 1706년 임부(林溥)의 옥사 연루 때 지은 「피체록(被逮錄)」, 이어 제주로 귀양갈 때의 「보행록(涉海錄)」, 1707년 박의량(朴義良)의 옥사 연루 때의 「후피체록(後被逮錄)」, 1710년 임피로의 이배 때 지은 「경인섭해록(庚寅涉海錄)」이다. 옥사에 연루되고 유배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여타의 묘도문이 없는 저자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문은 부친을 대신하여 지은 이사명(李師命)의 제문, 외조부 이광직(李光稷), 종조부(從祖父) 김만중(金萬重) 등에 대한 것이다. 소(疏) 가운데 초년록에 실린 9편은 모두 부친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부친 김진귀(金鎭龜)는 척신이라는 점과 누차 옥사에 연루된 저자로 인하여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소론계 인물물들에게 많은 논척을 당하였는데, 그때마다 저자가 부친을 대신하여 지었던 것이다. 사론은 초년록에 실린 것으로,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에게 홍범(洪範)을 진달한 일 등 중국 역사 사건 및 인물에 관한 33편의 글이다. 기존 사론의 문제점이나 신하로서의 분의(分義), 군자와 소인의 구분, 편당(偏黨)의 문제를 여러 문헌 등을 인용하여 다양하게 논하였다.
이 밖에도 『시경(詩經)』의 「관저(關雎)」, 『서경(書經)』의 「군석(君奭)」, 『논어(論語)』의 구절 등에 관한 의문을 변석한 「간석변의(看書辨疑)」, 고조 김반(金槃), 증조 김익겸(金益兼), 조부 김만기, 종조부 김만중 등의 일화를 적은 「기문(記聞)」, 종조부 김만중을 위해 지은 「서포유사별록(西浦遺事別錄)」, 중국과 우리나라의 시문을 논한 「논시문(論詩文)」 등도 있다. 맨 뒤에는 손자 김두추가 1760년에 지은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