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459년(세조 5) 세조는 어린 나이로 죽은 세자 덕종(德宗)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왕 명의로 창건하여 정인사(正因寺)라고 하였다. 1457년 8월 덕종이 죽자 이듬해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검소하게 절을 지어 덕종의 넋을 위로할 것을 명하여, 착공 1년 만에 완공하였다.
그 뒤 1471년(성종 2) 봄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이 절을 창건할 때 급히 지어서 재목이 매우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판내시부 이효지(李孝智)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궁중에서 절약한 물품을 쌀과 베로 계산하여 내수사(內需司)에 주어 경비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이 때 대왕대비도 협력하여 1471년 2월 공사를 시작했는데, 국민을 부역시키지 말고 노역에 대한 삯을 주도록 명하였다. 당시 서울 가까운 지역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공사에 참여하였다. 그 해 10월 절을 완공하였는데, 총 119칸이었다.
이 절의 설계는 화엄종의 고승 설준(雪峻)이 맡았는데, 법당에서부터 방앗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단청의 아름다움 또한 빼어나 그 아름다움이 봉선사(奉先寺)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인수대비는 절을 운영하기 위해 특별히 미곡 100섬을 시주하였고, 사찰 집기 등을 여유 있게 마련해 주었다.
1472년 사월초파일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크게 실시했는데, 이때 여러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간행하였다. 이날 오색구름이 일고 이상한 향기가 절 주위에 가득했으며, 서기가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성종도 또한 교지를 내려 인수대비가 시주한 전답과 노비 외에도 이 절 승려들의 여러 가지 부역을 면제시켜 주어, 번뇌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인수대비의 중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잘 알 수 없으나, 그 뒤 불탔으며 남은 건물도 퇴락하여 폐사 상태에 이르자, 1900년 초 월초거연(月初巨淵)이 고종의 도움을 받아 다시 중창하였다. 1995년 주지 한자용(韓慈容)이 법당 안팎을 금으로 개금한 황금보전을 신축하였다.
건물로는 황금보전과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미륵불입상과 관세음보살입상이 있다. 대웅전 안에 봉안된 4점의 불화는 1907년 왕실에서 발원하여 태자와 태자비, 의친왕과 의친왕비, 영친왕 등의 안녕과 천수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조선 후기의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았고, 서울과 가까운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이름 있는 학자들과 문필가들이 이곳을 찾아 많은 글을 남겼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노사신(盧思愼)ㆍ성임(成任) 등이 이 절을 대상으로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