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권시(權諰, 16041672)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팔음재(八吟齋) 또는 탄옹(炭翁)이다. 권득기(權得己, 15701622)의 아들이다. 서인(西人)의 영수인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의 처남이고, 후일 소론의 영수가 되는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장인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는 사돈 관계이다. 권시는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19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인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장인 박지경(朴知警)의 동생인 박지계(朴知誡, 15731635)에게 수학했다. 이후 그는 두 차례 문과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전시(殿試)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627년(인조 5)에 공주(公州) 유성(儒城) 탄방리(炭坊里)(현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로 이주하여, 점차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명현(名賢)으로서 이름을 얻으며 인근의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과 교류했다. 활인서 별제(別提), 선릉 참봉(參奉), 시강원 자의, 공조 정랑(正郎)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56년(효종 7)에 시강원 진선(進善)으로서 서연(書筵)에서 강연한 것을 시작으로, 몇 차례 경의(經義)를 강론했으며, 사돈인 윤선거(尹宣擧, 16101669)를 천거하기도 했다. 이후 병조 참지(參知), 한성부 우윤(右尹)에 제수되었으나, 1660년(현종 1)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의 상에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윤선도(尹善道, 1587~1671)를 옹호하여 서인의 당론(黨論)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송준길이 서용(敍用)을 청하여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탄방리에서 유생들을 교육하며 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 1692년(숙종 18)에 제자들이 권시가 강학(講學)하던 탄방리에 도산서원(道山書院)을 건립하고, 권득기와 권시를 제향했다.
권말에 “무오년 봄에 간행하다, 책판은 공주 도산서원에 있다〔戊午春刊, 板在公州道山書院〕”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공주 도산서원은 권득기, 권시 부자가 제향된 도산서원을 의미한다. 현재는 대전광역시에 속한다. 서발문(序跋文)이 없어, 정확한 간행 경위는 알 수 없다. 『탄옹집』 권2에 「자서(自序)」가 수록된 것으로 볼 때, 권시는 생전에 문집을 자편(自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득기의 문집인 『만회집(晚悔集)』이 1712년(숙종 38)에 간행되었고, 이익(李瀷, 1681~1763)이 지었으나 『탄옹집』에 수록되지 않은 서문인 「탄옹권선생유집서(炭翁權先生遺集序)」가 있는 사실로 추정하자면, 『탄옹집』이 간행된 무오년은 이익의 사망 이전인 1738년(영조 14)으로 볼 수 있다.
원집(原集) 12권, 부록 1권, 총 13권 7책의 구성이다. 10행 20자, 상하향2엽화문어미(上下向2葉花紋魚尾)의 목판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국학진흥원,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시 160여 제(題)와 만(挽)으로 별도 편차된 만시 50제가 수록되어 있다. 시체(詩體)별로 분류하지 않고, 창작 시기 순으로 배열했다. 청년기에 스스로의 행실을 반성한 24수 연작시 「자계(自戒)」를 비롯하여 작자 자신을 소재로 한 작품들과, 주변인에게 준 증시(贈詩), 주2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운시 중에는 수신인을 명시하지 않은 것들도 상당수 있다. 만시는 자형(姉兄) 심지원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권3에는 소(疏) 22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의 「논대동삼세소(論大同三稅疏)」는 대동삼세(大同三稅)의 부세(賦稅)가 너무 편중하여 민간의 고난이 극심하고 원성이 높으니, 부세와 형벌을 경감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 한다며 그 폐해를 논하고 시정을 촉구한 글이다. 「논병량소(論兵糧疏)」는 당시 겨우 전흔(戰痕)을 씻고 평화 시기가 되었으나 전쟁의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으니,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병량(兵糧)을 비축해야 함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그보다 민력(民力)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역설했다. 그 밖에도 사직소를 제외하고는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덜어 주려는 뜻에서 올린 소가 대부분이다.
권4에는 경연강의(經筵講義) 1편, 서연강의(書筵講義) 5편이 수록되어 있다. 「경연강의」는 경연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던 중, 북제(北齊)의 조정(祖挺)이 곡률광(穀律光)을 죄를 씌워 죽였고, 당나라 위징(魏徵)이 비방을 받았다는 사실(史實)을 들어, 참간(讒間)의 두려움을 논한 글이다. 「서연강의」는 왕세자에게 『논어』 · 『맹자』 등 경전을 강론하면서 존심(存心)과 양성(養性)으로 심성(心性)을 바르게 하고 추기급인(推己及人)해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의한 내용이다. 1656~1659년에 세자시강원 진선, 찬선 등에 재직할 당시에 강론한 내용이다.
권5∼8에는 서(書) 191편이 수록되어 있다. 송시열, 윤선거, 윤증, 윤휴(尹鑴, 1617~1680)에게 보낸 서찰이 매우 많고, 이 외에 김집(金集), 심지원, 허목(許穆) 등에게 보낸 서찰들이 있다. 사우간에 경전의 훈고(訓詁)와 성리학의 논변, 의례(疑禮)에 대한 논구 등에 관해 주고받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가운데 「상잠야선생서(上潛冶先生書)」는 스승인 박지계(朴知誡)가 인심(人心) · 도심(道心)은 아직 미발시(未發時)에 이미 두 마음이 상대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한 데 대해, 『서경』의 인심 · 도심은 이발(已發)한 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올린 서찰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낸 「여송영보(與宋英甫)」는 예송(禮訟)에서 기년설(朞年說)을 반대하고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다가 죄인으로 몰려 죽게 된 윤선도(尹善道)를 구원하려는 뜻에서 보낸 서찰로, 저자의 처신과 당시 당쟁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자료이다. 말미에는 아들들을 비롯하여 가족에게 보낸 서찰들이 편차되어 있다.
권9·10에는 잡저(雜著) 28편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는 주로 예설(禮說)로서, 예송논쟁이 격회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거의가 복제(服制) 등에 관한 내용이다.
권11에는 한거필설(閑居筆舌) 3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감자경지(隨感自警識)」는 경전을 읽다가 스스로 경계 삼을 만한 것을 골라서 기록한 뒤에 그것을 옆에 두고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붕우견경지(朋友見警識)」는 사우(士友)들로부터 받은 교훈적 글귀들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논심도(論心圖)」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도해(圖解)한 것이다.
권12에는 제문(祭文) 35편, 묘갈명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박지계, 심지원 등, 사우(師友) 겸 친인척들, 가족들의 묘도문자를 비롯하여 주변인들을 위해 지은 글들이다.
부록으로 저자에 대한 가장(家狀) · 지문(誌文) · 묘표 · 치제문 · 제문 · 봉안제문 · 축문(祝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은 아들 권기(權愭)가, 지문과 묘표는 사위 윤증이 지었고, 송시열이 지은 묘표도 있다. 제문은 송시열, 윤휴, 윤증 등이 지었다. 봉안제문과 축문은 도산서원의 제향과 관련된 것으로, 윤증의 동생인 윤추(尹推), 윤증이 각각 지었다.
서인계 주요 인물의 학문과 예학, 교류 관계를 보여 주는 문헌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