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는 소리를 저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음악고고학적 유물로 악기들은 그 존재 자체가 소리를 재생할 수는 있었지만, 모든 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었다. 또한 기보법(記譜法)의 발달로 공연되었던 음악을 다시 재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였다. 이렇게 소리를 저장하고자 했던 인류의 욕망은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 과학적인 장치를 고안하게 하였다.
프랑스의 에두아르-레옹 스콧 드 마르탱빌(Édouard-Léon Scott de Martinville)은 먹지에 소리의 파동을 남기는 포노토그래프(phonautograph)를 발명하고, 1853~1860년 사이에 약 50건의 인류 최초의 음성 녹음 기록물을 남겼다. 이후 1877년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먹지 대신 석박(錫薄)[Tin Foil]을 원통형으로 말아서 소리의 파동을 만들고, 이를 개량하여 석박 대신 밀랍(蜜蠟)을 사용한 생산형 축음기[유성기]를 제작하였다. 에디슨이 제작한 축음기에는 소리의 파동이 원통형 음반에 기록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원반 형태의 음반(音盤)은 독일계 미국인 에밀 베를리너(Emile Berliner)가 발명하였다. 그는 에디슨 축음기의 종진동(縱振動) 녹음 방식을 횡진동(橫振動) 방식으로 바꾸어 평평한 원반형 음반을 제작할 수 있었다. 에디슨의 원통형에 비해 보관도 쉽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다.
베를리너의 음반은 60rpm에서 130rpm에 이르는 다양한 속도로 제작되었는데, 1912년 그라모폰 컴퍼니(Gramophone Company)에서 음반 회전속도를 78rpm으로 하는 음반을 발매하였고, 이후 이 회전속도가 축음기에 표준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78rpm 회전수를 가진 음반을 SP(Standard Play) 음반이라 했고, 보편적으로 10인치[25.4㎝], 12인치[30.48㎝] 크기로 제작되었다.
초기 SP 음반의 녹음은 나팔통식 녹음이라고 해서, 나팔을 통해 집음하고, 그 진동을 커팅 바늘에 전달하여 녹음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1920년대 마이크로 소리를 모아서 증폭하여 녹음할 수 있는 전기 취입 방식이 고안되었다. 마이크를 통해 증폭된 소리 신호를 사용했기에 작은 소리도 선명하며 녹음할 수 있게 되어 녹음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하지만 SP 음반도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먼저 셀락(shellac)이라는 재료로 제작된 음반은 깨지기 쉬웠으며 한 면에 녹음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깨지지 않고 더 오래 감상할 수 있는 또 다른 음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1948년 미국의 컬럼비아(Columbia)에서는 33·1/3rpm의 회전속도를 가지는 LP(Long Play)를 개발하였다.
이 LP는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들어 내구성이 향상되었고, 그 이름에서와 같이 긴 재생 시간을 갖췄다. 그 크기는 SP와 동일한 10인치, 12인치 등으로 제작되었는데 촘촘한 소리골 때문에 더 긴 시간 재생할 수 있었다. 이후 1952년 RCA 빅타(Victor)는 LP와 경쟁하기 위해서 45rpm 회전수를 가지는 7인치[17.78㎝] 크기의 EP(Extended Play)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음반 업계는 기존 LP의 음질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보통 하이파이(High Fidelity)라고 하는 용어는 더욱 완벽한 소리를 재생하기 위해 1920년대 등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LP 등장 이후에 스테레오포닉(Stereophonic)한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입체적인 소리는 녹음 시 수평 차원의 움직임과 수직 차원의 움직임을 모두 적용하여 각기 다른 채널로 소리를 분리하여 재생함으로써 달성되었다. 이는 사람이 양쪽 귀로 소리 신호를 받아들이는 원리를 적용한 것이며, 스테레오 녹음에서 임장감(臨場感)을 더 느낄 수 있었다.
이후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소리를 디지털로 녹음할 수 있게 되었다. 1976년 네덜란드 필립스(Philips)가 콤팩트디스크, 즉 CD(Compact Disk) 개발을 시작하여, 1979년에 일본의 소니(Sony)와 공동 개발을 진행한 후, 1982년 10월 말부터 첫 제품이 출시되었다.
CD는 알루미늄 박막에 레이저로 홈을 파서 디지털 신호를 저장하며, 레이저를 주사하여 소리 신호를 받아들인다. 일반적으로 12㎝ 직경으로 제작되어 74분 정도 길이의 소리를 저장할 수 있다. LP가 원반 밖에서부터 소리가 재생된다면 CD는 안에서부터 소리가 재생된다. CD는 오늘날까지 주요 음반 형식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CD 등장 이후 LP는 생산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1990년대 제작이 중단되었다.
1992년에는 소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대체하기 위해 미니디스크, 즉 MD라는 음반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 MD는 광자기 기록 방식으로 디지털 정보를 저장하는 매체였다. CD의 절반 크기인 지름 6㎝ 정도의 디스크에 케이스를 씌워 제작하여 크기를 줄였다. 녹음 시간은 CD와 같은 74분 이외에, 60분, 80분 분량으로 규격화하였다. MDLP(MiniDisc Long Play) 모드를 사용할 경우 재생 시간을 2배 내지 4배를 늘릴 수 있어 많은 사용자들이 CD를 대체하여 사용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음반들은 플래시 메모리 기반의 MP3 플레이어가 등장한 후,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걸었다. 온라인을 통한 불법 다운로드 여파로 음반 시장은 활로을 찾을 수 없었다. 1995년 리얼네트워크사(社)가 개발한 리얼오디오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스트리밍 서비스(Streaming Service)는 음반 산업의 판도를 바꾸게 되었다.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없이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방식의 이 서비스는 음반 자체의 제작과는 무관하게 음악을 유통하게 되면서 음반 소비량을 급격히 줄게 만들었다. 또한 SD 메모리 카드나 USB와 같은 저장 장치의 보급과 더불어 이를 음원을 유통하는 새로운 매체로 활용하는 경향도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요즘 음반들은 디자인이나 해설서, 관련 굿즈(goods) 등을 보강하여 음악뿐만 아니라 관련 문화를 담아내는 매체로 다시 거듭나고 있다.
한국에서의 음반 산업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19세기 말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6년 7월 24일, 미국의 인류학자 앨리스 플레처는 당시 하워드대학교(Howard University)에 유학하던 조선인 3명인 안정식, 이희철, 양손이 부르는 「단가」, 「애국가」, 「매화타령」 등의 노래를 원통형 유성기음반에 녹음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육성 녹음이다.
우리나라에서 원통형 유성기음반이 녹음되어 소개된 기록으로 제일 이른 것은 『황성신문(皇城新聞)』 1899년 3월 10일자에 실린 기사로, “유성기(留聲機)를 매래(買來)해서 서서(西署) 봉상사(奉常司) 앞 113통(統) 9호(戶)에 두었는데 그 안으로 가적생금성(歌笛笙琴聲)이 운기(運機)하는 대로 나와 완연히 연극장과 같으니 첨군자(僉君子)는 이곳으로 내임(來臨) 완상(玩賞)하시오”라는 광고였다. 봉상사에 위치한 유성기 소리는 국내 명인 · 명창들의 음악을 담고 있었는데, 당시 원통형 음반은 판매가 아니라 감상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00년대 초 상업적인 목적으로 SP 음반이 처음 발매되었는데, 미국 콜럼비아와 빅터에서 제작한 평원반(平圓盤)으로, 한쪽 면만 녹음된 쪽반이었다. 미국 콜럼비아 음반은 1906년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삼광당(三光堂)에서 취입되었고, 1907년 한국에서 시판되었다. 대한제국 악공 한인오(韓寅五), 관기 최홍매(崔紅梅), 김화녀(金化汝) 등으로 잡가, 시조, 가사 등 30여 곡을 10인치 음반으로 취입하였다.
미국 빅터 음반은 1906년 말 서울에서 녹음되었고, 10인치 65장, 7인치 36장 총 101장이 제작되었다. 당시 녹음 기술자는 윌리엄 가이스버그였고, 이를 주선한 이는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였다. 미국 빅타 유성기음반은 미국 콜럼비아와 다르게 경성을 비롯하여, 평양, 대구, 동래, 청주, 성주, 이천, 김해 등 전국의 명인 · 명창을 망라하여 음악을 취입하였다. 그 중 전라도 창부 송만갑(宋萬甲)과 청주 가객 박팔괘(朴八卦)의 음반이 주목을 받았다. 1915년에는 양면반을 출시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음반은 일본 자본에 의해 잠식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일본에서 설립된 일본축음기상회에서는 1911년부터 ‘NIPPONOPHONE[일축조선소리반]’이라는 상표로 한국 음악을 취입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첫 취입된 음반에는 경기 명창 박춘재(朴春載), 김홍도(金紅桃), 서도 명창 문영수(文泳洙), 판소리 명창 심정순(沈正淳), 그리고 피리 명인 유명갑(柳明甲) 등의 음악이 쪽반으로 취입되었다.
1913년에는 새로운 음반이 양면반으로 취입되었으며, 정가의 조모란(趙牧丹), 김연옥(金蓮玉: 1900~), 판소리의 송기덕(宋基德), 태평소의 한응태 등의 연주자들이 더 참여하였다. 일본축음기상회에서는 1923년에 ‘닙보노홍’이라는 상표로 대략 70종의 음반을 발매하였고, 경기 명창으로 김일순(金逸淳, 金逸順), 조국향(趙菊香), 김연연(金娟娟: 1901~?), 한부용(韓芙蓉: 1895~?], 이유색(李柳色), 유운선(柳雲仙: 1889~?), 박채선(朴彩仙: 1902~?) 등과 남도 명창으로 강남중(姜南中, 신옥란(申玉蘭), 신옥진(申玉眞), 신옥연 등이 녹음에 참여하였다. 이때 일부 경기 명창들이 일본 유행가 번안곡을 취입하였다.
1925년에는 ‘일츅죠선소리반’이라는 상표로 대략 158종의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심정순, 강소춘(姜笑春) 등의 판소리 명창과 손진홍(孫眞紅: 1893~?), 이진봉(李眞鳳), 최섬홍 등의 경기 명창, 그리고 홍난파(洪蘭坡), 안기영(安基永) 등의 양악, 김영환(金永煥)의 영화 설명 등이 주목된다.
일본축음기상회의 한국 음반 발매에서의 독주 체제는 1925년 일동축음기주식회사가 ‘제비표 조선레코드’라는 음반을 발매하면서 끝을 맺는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는 3년 정도 기간 동안 180종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가곡의 하규일(河圭一), 현매홍(玄梅紅: 1905~?), 정악에 최학봉(崔學奉 , 崔學鳳), 김화녀, 김창근(金昌根), 이응룡(李應龍), 김계선(金桂善) 등, 잡가의 박춘재, 문영수, 박월정(朴月庭), 판소리의 김창환(金昌煥), 김창룡, 송만갑, 김녹주(金綠珠), 박녹주(朴綠珠) 등, 성악의 윤심덕(尹心悳) 등 당시 최고의 전통음악 예술가들이 이 음반 취입에 동참하였다. 이기세(李基世: 1888~1945)는 일동의 조선총대리점인 조선축음기상회를 신설하고 음반 취입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1927년에는 합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비행기표 조선소리판’이라는 상표로 한국 음반을 5종 발매하였다. 이향란(李香蘭: 1894~?), 김월선(金月仙: 1899~?), 백운선(白雲仙: 1899~?) 등이 단가와 일본 유행가 및 조선산업과와 같은 정책가요를 취입하였다. 이 합동축음기주식회사는 당시 주류였던 일축이나 일동의 음반에 밀려 더 이상 신보를 발매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을 기점으로 한국 음반 취입은 나팔통식 녹음 방식에서 전기 취입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일본축음기상회는 미국 콜럼비아와 합작하여 일본 콜럼비아로 재출발하면서 전기 취입 방식을 채택하여 Columbia 40000 단위의 정규반을 시작으로 한국 음반을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콜럼비아는 이 정규반 이외에도 후기정규반[Columbia 44000 단위], 특별반[Columbia 45000 단위], 대중반[Regal C100 단위], 보급반[Regal C2000 단위] 등의 음반을 발매했는데, 그 수량이 대략 1,470종에 달한다. 콜럼비아에서는 단가, 판소리, 창극, 민요, 가야금병창, 민속기악, 정악, 무속, 불교, 대중가요, 서양식 고전음악, 재즈, 만담, 연극, 영화, 동요, 동화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이 취입되었다.
일본 콜럼비아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음반 시장을 양분하였던 일본 빅타 또한 1928년부터 한국 음반을 발매하였다. 일본 빅타의 경우 정규반[Victor 49000 단위], 보급반이라 할 수 있는 주니어반[Victor KJ-1001 단위], 스타반[Star KS-2000 단위]을 비롯하여 아동반[Victor KJ-3000 단위, 8인치] 등을 1,000여 종 제작하였다. 빅타의 경우도 콜럼비아가 취입한 전 분야의 예술을 망라했는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나 현제명(玄濟明), 김연준(金連俊), 이인범(李仁範), 김천애(金天愛) 등의 초기 양악가 및 동요와 동극을 특별히 기획하여 발매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일본 콜럼비아와 일본 빅타에 대적할 수 있는 음반회사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음반회사로 포리도루, 시에론, 오케, 태평 등이 있었다. 포리도루(Polydor)는 유럽계 음반회사로 1927년 설립된 주식회사 일본포리도루 축음기상회가 1931년 한국에 진출하여 한국 음반을 발매한 것이다. 포리도루는 정규반[Polydor 19000 단위] 및 보급반[Polydor X500 단위]으로 대략 649종에 해당하는 음반을 출시하였다.
시에론은 나고야에 위치한 제국발명사(帝國發明社)에서 제작한 음반으로, 1931년부터 5년간 정규반[Chieron 0 단위], 고급반으로 특별은반(特別銀盤)[Chieron 500 단위]을 한국 음반으로 277종 출시하였다. 시에론은 문예부장 이서구 기획에 따라 음반을 제작하였는데, 만담이나 넌센스의 발매가 두드러졌다.
오케(Okeh)는 오케축음기상회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1933년부터 대략 1,297종의 음반을 선보였다. 실소유주가 일본 제국축음기주식회사이나 이철(李哲)이 문예부장으로 주도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수의 음반을 발매한 만큼 음반번호 체계가 다양한데 정규반[Okeh 1500 단위, 12000 단위, 20000 단위, 30000 단위]을 비롯하여 특별반으로 신흑반, 교육반, 아동반 등이 존재한다. Okeh 30000 단위 중 일부는 적반(赤盤)으로 고급반에 해당한다. 오케는 대중가요로 신민요, 유행가 출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평(太平)은 태평축음기주식회사에서 1932년부터 발매한 음반으로 대략 680종의 음반이 취입되었다. 음반은 정규반[Taihei 8000 단위], 적반[Taihei 8600 단위], 태평 후기반, 특별반 이외에도 기린(麒麟)이라는 저가 보급반 상표의 음반을 별로도 운영하여 신보를 발행하였다.
이외에도 1930년대에는 군소 음반회사에서 금조인(金鳥印) 특허레코드, 뉴코리아, 돔보(Tombo), 디어레코드(Deer record), 밀리온(Million), 쇼지쿠(Shochiku), 코리아(Corea) 등 상표의 음반을 제작 발매하였다. 이중 밀리온은 고라이(Korai)라는 상표로도 음반을 제작하였다.
해방 후에도 파괴된 음반 산업 아래에서도 SP 음반의 제작은 계속되었다. 건국가요 「사대문을 열어라」 음반이나, 이승만(李承晩) 귀국 제1성 및 애국가를 수록한 음반, 그리고 김구(金九) 선생의 육성이 음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음반회사들도 속속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1946년 조선레코드회사가 등장하였고, 같은 해 부산에서 코로나레코드가 발매되었다. 고려레코드는 1947년 국민가요[건국가요], 대중가요, 민요와 같은 음반을 발매하였다.
1948년경 설립된 서울레코드는 1949년부터 대중가요 음반을 시장에 내놓았다. 대구에서는 이병주가 오리엔트레코드를 설립하였는데 주로 대중가요를 발매하였다. 1948년에는 오케레코드가 다시 음반을 제작하였는데, 일제강점기 오케와는 다른 회사였다. 이즈음 한국방송협회에서는 KBC레코드를 발매하였는데, 방송에 사용할 음반들을 제작하여 시중에 유통되지는 않았다.
1949년에는 현인(玄仁)의 주도로 럭키레코드가 등장하였는데, 대중가요, 동요, 고전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기원을 이룩하겠다는 포부로 출발한 음반회사였다. 일제강점기 대중가수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남인수(南仁樹)도 1949년 아세아레코드를 창립하여 음반을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6·25전쟁 바로 직전 메아리레코드가 설립되어 음반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음반들은 열악한 음반 제작 환경으로 기존에 발매되었던 음반을 재활용하여 제작된 것들이 많아 음반의 상태나 음질에 조악하였다.
6·25전쟁은 한국 음반 산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때까지 존재하던 음반회사들은 지역적 기반을 잃고 남으로 이전하기도 하고, 새로운 음반회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전쟁 시기에는 대구를 기반으로 하는 오리엔트나 부산 지역의 도미도와 같은 음반회사들이 음반을 제작 공급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는 일제강점기 태평에서 활동하던 백년설(白年雪), 이재호(李在鎬), 반야월(半夜月) 등이 함께 서라벌레코드를 창립하였고, 서라벌레코드의 투자자였던 김영준의 형제였던 한 인물이 유니온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부산에서는 가수 한복남(韓福男: 1910~?)이 설립한 도미도레코드가 간이 녹음 시설을 설치하고 음반을 제작하였다. 대중가요, 민요, 영화주제가, 경음악, 동요집으로 음반을 구분하여 체계적으로 발매하였다. 스타레코드는 김흥산(金興山: 1906~?)과 손영준이 합작하여 설립한 음반회사로 전쟁 중 HLKB[부산방송곡] 스튜디오를 빌려 녹음하였고, 일본을 통해 음반을 제작하였다. 실제 음반 발매는 전쟁이 끝난 1954년에 이루어졌다.
전쟁 후 북한에서 내려운 임정수, 김능억 등도 부산에 공장을 두고 미도파레코드를 제작하였다. 이 미도파레코드는 1954년경 빅토리레코드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작곡가 백영호가 이를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미도파와 빅토리는 대중가요와 경음악을 전문적으로 발매하였다.
6·25전쟁 이후 주목을 받은 음반회사로 유니버살, 오아시스, 신세기, 킹스타 등이 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출신 김재창이 설립하여 녹음 기사 이경순과 함께 운영하였던 유니버살에서는 한국가곡집, 행진곡집, 동요, 한국민요집, 외국민요집, 영어회화 초급, 국민가요, 영어교재, 가요곡, 박시춘경음악집, 양경음악 및 영화주제가 등의 음반을 출시하였다.
오아시스는 중국 봉천시에서 아세아악기점을 경영하던 원지복이 남대문에다 차린 회사였고, 가요곡, 민요, 만담,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대금독주, 피리독주, 고전무용곡, 경음악, 양곡 등을 취입하였다. 신세기는 자동차 부속품을 하던 개성 사람 강윤수가 창설한 회사였고, 킹스타는 서울 하월곡동에서 임창덕이 설립 운영하였다고 한다. 킹스타에서는 나화랑(羅花郞)이 히트 음악을 제조하며 킹스타를 주요 음반회사로 올려놓았는데, 이후 독립하여 라미라레코드를 설립하였다.
이외에도 센츄리, 문교, 아세아, 백조, 크라운, 라라, 라이온, 흥아, 애호, 노벨, 비코토리, 나폴리, 아리랑, 태평양, M · M레코드, 승리, 파라마운트 등의 유성기음반이 존재했었다. 이중 센츄리는 영화를 제작 배급하던 세기상사에서 제작한 음반으로 서양 고전 음악, 최신 경음악 및 영화주제가 등의 음반을 제작하였고, 문교는 1957년 국어와 음악 교육용으로 문교부에서 제작한 음반이었다.
이상 SP 음반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 존속했으나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도입된 LP 음반이 본격적으로 출시되면서는 더 제작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LP의 효시는 1958년 공보실레코오드제작소에서 12인치로 제작한 ‘KBS레코드 KOREAN BROADCATING SYSTEM RECORD SRIES No. 1’ 음반이었다. 이 KBS레코드 시리즈의 음반들은 우리 음악을 방송에서 활용하고, 해외에 소개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민간에서도 LP 음반 제작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유니버살이 1959년 안양에 최신 설비를 설치하고 EP 음반을 시험 제작하였으며, 오아시스, 미도파, 킹스타도 이에 가세하여 LP를 제작하게 되었다. 초기 민간 LP 음반들은 제작 기술이 부족해서 일반 비닐 안에 표지를 인쇄하여 넣어 밀봉한 형태로 자켓을 만들어 사용하곤 하였다. 이후 LP 시장에 대도레코드가 뛰어들면서 초기 LP 시장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LP 음반은 1990년대 초까지 음반의 주요한 매체가 되었는데, 앞서 언급한 유니버살, 오아시스, 미도파, 킹스타, 대도 이외에도 신세기, 신진, 예그린, 지구, 힛트, 신세계, 대한, 현대, 태광 등 음반이 LP 음반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1987년 SKC가 우리나라 최초로 디지털 음원을 사용한 CD 음반을 발매하면서 LP의 점유율을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LP 음반은 1994년을 기점으로 제작 중단을 알리게 되었다.
현재는 CD 음반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상태에서, 2010년대 다시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으로 LP 음반이 다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이 급격화되면서 도입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 의해 CD 음반의 위치도 위협받고 있다.
음반은 소리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성질의 매체이기 때문에 1차적으로 녹음된 소리[음악 및 음향]는 세대를 넘어 공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갖는 음반은 그 자체로 기록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동이 자유롭고, 반복이 가능하며, 녹음 장비의 발달에 따라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특징 때문에 인류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음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음악의 지역성이 극복되었고, 음반에 최적화된 음악이 자연스럽게 선택되기도 하였으며, 음반을 활용한 또 다른 예술 창작의 길이 열리고, 교육 분야에서 음악이나 음악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고음반연구회가 발족되어 근현대기 정리되지 않은 우리나라 음반의 발굴 및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