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살이 (집살이)

가족
개념
여자가 시집가서 시집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심신 양면으로 겪는 고된 생활.
내용 요약

시집살이는 여자가 시집가서 시집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심신 양면으로 겪는 고된 생활이다. 봉건시대의 유물이지만 특히 조선시대 500년간 고착된 혹독한 여성차별의 결과물이다. 남존여비와 삼종지도의 유교원리가 지배하던 조선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것은,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시부모를 섬기며,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기 위함이라는 효도지상의 유교윤리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가난과 조혼의 풍습은 여성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중시켰다. 오늘날 여권이 신장되고 핵가족화 추세가 심화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의
여자가 시집가서 시집식구들과 함께 살면서 심신 양면으로 겪는 고된 생활.
시집살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여권이 신장되고 점차 핵가족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실감조차 나지 않는 퇴색한 말이지만, 이 시집살이 때문에 우리 할머니 · 어머니들은 많이도 울고 한숨짓고 쫓겨나며 심할 때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기도 하였다. 그것은 옛이야기 삼아 실토한 할머니들의 경험담으로써 또는 문학작품,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어온 우리 주변의 전설 · 민담 · 속담으로써 막연하나마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시집살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봉건시대의 유물이다. 따라서 요즈음에도 ‘시집살이’ 하면 고되고 어렵고 구속이 심하고 지긋지긋하도록 부자유한 생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일이 힘든 데다가 윗사람의 잔소리가 심하면 ‘시집살이가 심한 직장’이 되고, 늘그막에 몸이 고된 처지가 되면 ‘늘그막에 된 시집살이 만났다.’고도 한다. 또 자녀들이 까다롭게 굴면 젊은 엄마는 ‘애들이 시집살이 시킨다.’고 푸념한다.

한편 시집살이와 대비되는 것이 처가살이이다. 처가살이에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이른바 아들이 없어 양자삼아 데려다 함께 사는 데릴사위의 경우와 생활력이 없어 처자식을 데리고 처가에 들어와 얹혀사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처가살이는 모계사회의 잔재로서 일정한 기간 동안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이른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형태와는 다르다. 또 앞에 말한 ‘데릴사위’같이 여가(女家)의 필요에 의하여 사위를 들여 사는 경우와도 다른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시집살이’의 대가 되는 ‘처가살이’는 남자가 무능하여 처가에 얹혀사는 경우를 말한다. 딸은 출가외인(出嫁外人)인데 외인이 못 되고 다시 들어왔으니, 그 남편인 사위는 주변머리 없고 면목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시집살이가 고된 생활인 데 반하여, 처가살이는 치사하고 굴욕적이고 눈칫밥 얻어먹는 신세라 할 수 있다.

시집살이의 배경

고생의 대명사 같은 ‘시집살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왜 근래까지 500년 이상의 장구한 생명을 유지해왔는가?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시대의 배경에서 찾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집살이는 봉건사회의 부산물로서 철저한 남존여비와 효도지상의 유교윤리, 그리고 가난과 조혼의 풍습 등 사회적 병폐 속에서 생겨났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남존여비와 삼종지법

여성사에서 볼 때, 조선시대야말로 우리나라 여성에게는 최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원시 샤머니즘사회의 사제자(司祭者)로서의 여무(女巫)의 위치라든가, 모권사회의 일을 그만두고라도 신라시대만 하여도 여왕이 셋이나 나왔다는 사실로써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또, 고려시대에도 신라 때만큼은 못해도 조선시대같이 비참하지는 않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남녀이합무상(男女離合無常)’이라는 말과 같이 연애가 자유로웠고 왕실에서조차 여성의 재혼이 가능할 정도로 남녀의 인권에 어떠한 제도적 차별대우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주자학의 수입으로 고려말부터 차츰 떨어지기 시작한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완전히 제도적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 근본을 이루는 것이 남존여비와 삼종의 법이다. 예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상 위에 누이고 구슬을 주어 놀게 하고, 딸을 낳으면 상 아래 누여서 실패를 가지고 놀게 한다[弄璋之慶弄瓦之慶].”고 하였듯이 다같은 혈육이건만 남녀는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귀천으로 갈라져서 차별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가정내에서도 ‘남편은 곧 아내의 하늘[夫乃婦天]’이라는 사상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남편을 3인칭으로 ‘소천(所天)’이라 부르기도 하며, 손님같이 공손히 받드는 것이 아내의 미덕이라 하였다. 자기에게 의견이 있어도 남편이 하는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설사 남편이 “소금섬을 물로 끌라.”고 하여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하는[女必從夫] 유교원리는 ‘여자의 음성이 중문 밖에 나가면 그 집의 법도를 알겠다.’느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하여 여자는 유순과 복종만이 미덕이라 일컬어 왔다. 여자에게 강요된 복종은 남편에게뿐만 아니라 출가 전에는 부모의 명령을 좇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하였다. 이것이 곧 삼종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여자는 일생 중문 안에 갇혀서 신분이 높을수록 바깥세상을 모른 채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奉祭祀],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고[事舅姑, 事夫], 시가 형제 및 동서들과 우애있게 지내고[善姨姒], 노복을 다스리고[御奴僕], 손님을 대접하는[接賓客] 일이 본분이었다. 이것을 여자의 여섯 가지 도리라 하였다. 그런데 노비를 거느릴 수 있는 계층의 여인이라면 육체적 노동은 면하였을 것이니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 고통 못지않다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남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문학작품 속의 허구뿐 아니라 실지로 8 · 15광복 전까지만 해도 상류가정에서 가끔 일어난 며느리의 자살사건이다. 이같은 남존여비사상과 삼종의 법이 시집살이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그것은 시집식구를 상전시(上典視)하여 남편의 형제들에게 ‘서방님’ · ‘도련님’ · ‘작은아씨’(또는 아기씨) 등을 받쳐부르는 말씨에 며느리의 지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효됴지상주의

유교이념을 국시로 삼고 철저히 예악(禮樂)으로 시종한 조선시대에는 ‘효’를 백 가지 행실의 으뜸으로 삼았다. 효행은 조상에게는 봉제사라는 형식으로,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이라 하여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주고 아침에는 이를 돌아보는 조석봉양으로써 실천하는 것이다.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韓氏)가 쓴 『내훈(內訓)』에 “시아버지 ·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얻음은 효도하게 함이니 진실로 그렇지 못하면 너를 얻어 무엇에 쓰리오.”라는 대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봉건시대의 결혼관은 효를 목적으로 삼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즉,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시부모를 섬기며,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기 위함이다. 따라서 효는 모든 면에 앞서므로 부부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부모가 마땅해 하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였다.

역시 『내훈』에 “자식이 심히 그 처를 좋아하더라도 부모가 기뻐하지 않으면 내치고, 자식은 그 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부모가 좋아하시면 부부의 도를 지켜 끝까지 함께 마친다.”는 구절이 보인다. 즉, 봉건시대의 결혼이란 오늘날과 같은 1:1의 남녀 결합이 아니라, 한 가문이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애당초 아내를 맞이할 때 본인의 의사가 무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쫓을 때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가 없다는 이치이다. 그러기에 ‘계집은 다시 얻으면 그만이지만 부모는 한 번 가시면 다시 모실 수 없다.’는 것이 봉건윤리에서 나온 부부관이다. 속담에 ‘지나친 효자는 아내가 외롭다.’고 하였듯이, 며느리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의 존재는 시집살이에 별로 크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정절 숭상

시집살이에 치명적인 굴레가 정절사상이었고, 이에 따라 종교의 계율같이 강요된 것이 여자의 재가금지법(再嫁禁止法)이다. 이것은 주자학의 실천철학 가운데 여성들에게 가장 혹독하고 잔인한 악법이었다. 노리개 삼아 여성들의 옷고름에 차던 은장도(銀粧刀)는 남을 찌르라는 것이 아니라 정조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뜻에서 생겨난 것이다. 자신의 의지 아닌 순전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정조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도 실절(失節)이니 훼절(毁節)이니 하여 본인은 물론, 그 가문까지 세상에서 지탄을 받았다. 그것이 당대뿐만 아니라 몇 대 선조 중에 그 같은 실절한 부인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양반사회에서 매장의 조건이 될 수 있을 만큼 준열한 것이었다.

박지원(朴趾源)이 쓴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과부의 아들로 자라난 두 형제가 출세의 경쟁자인 어느 선비를 이 조건을 들어 매장시키려 꾀한다. 그 어머니가 이를 듣고 깜짝 놀라서 “부녀자의 그 같은 행실은 남이 알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그러한 소리를 하느냐?” 하고 물은즉, 아들이 “풍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씨는 “풍문을 가지고 남을 중상모략하느냐!”고 나무라고 이어 과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하며 슬프고 외로운 것인가를 자기의 체험담을 통하여 설명해 준다. 박지원은 실학정신에 입각해서 이 이야기를 통해 지나친 열녀사상을 비판하였다.

그러면 정절사상과 재가금지가 시집살이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여자는 시집살이를 못 해내면 가문을 욕되게 하므로 갈 데가 없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므로 시집에서 쫓겨나는 여자에게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친정으로 되돌아가서 일생 소박데기의 이름을 들으면서 올케나 형제들의 눈치를 보며 뒷전에서 죽어지내는 길과,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이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장안의 명문가 부녀자가 음독을 하거나, 심지어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가 종종 있었다. 개화된 세상이었는데도 이것만은 조선시대와 별 차이가 없어서, 신분이 높을수록 남의 이목을 꺼려 소박데기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봉건시절에 딸을 시집보낼 때는 으레 “부디 공경하고 조심하라(敬之戒之).” 하고 “조석으로 부지런히 잘 받들어라.” 하는 것이 부모의 마지막 당부였다.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그 울타리 밑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괴롭고 서러워도 견디어 내야하는 것이 시집살이였다. 이러한 시집살이의 절박성은 시집식구편에서 보면 그 약점을 오히려 역이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네가 한번 시집온 이상, 이 집 아니고 어디 갈 데가 있느냐? ’는 생각이다.

조혼 풍습

시집살이가 존재한 또 하나의 이유로 조선시대 조혼풍습을 들 수 있다. 신분이 귀할수록 혼인연령이 빨랐던 것은 왕실에서 10세 내외면 국혼(國婚)을 하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딸을 둔 집에서는 가난하면 식구 하나 줄이기 위해서 서둘고, 가세가 넉넉한 집에서도 신랑의 나이가 어리므로 아무리 신부의 나이가 2, 3세 위라 해도 어차피 10대 조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조혼풍조는 조선시대에 빈번한 명나라와 청나라에서의 공녀(貢女) 요구와 임진왜란 · 병자호란 등의 난리 때 서둘러 머리를 올려놓음으로써 적병에게 유린당하는 욕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왕들의 예를 보면 세종 · 문종 · 세조가 모두 12세에 혼인을 하였으니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원래 조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8 · 15광복 전까지도 우리 사회의 혼속(婚俗)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민간에서는 17, 18세가 보통의 혼령이었으니 더 옛날 조선시대에는 그보다도 더욱 빨랐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심신 양면으로 미숙한 나이에 낯설은 식구 속에 뛰어들어 혼자 겪어내야 하는 시집살이가 힘겨웠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에 신랑이 어리다는 사실이 여성에게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켜 주는 결과가 된 것이다. 연을 날리다가 논 수렁에 빠져 옷을 몽땅 버려가지고 들어왔다든가, 팽이 치고 놀다가 얼음이 깨져 겨우 살아 돌아온 어린 신랑의 이야기는 흔히 들어온 이야기이다. 이 경우 일일이 물을 데워서 쓸 수도 없는 처지에서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에, 정월 우물물이나 개울물로 남몰래 빨아 입혀야 하였던 어려움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육체적인 고생만이 아니라 어린 신랑 때문에 겪은 정신적 시집살이도 적지않았다. 이를테면 악의 없이 새색시 이야기를 자기 어머니에게 한 것이 고해바친 격이 되어 화가 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리하여 옛 여인들은 “코 흘리고 팽이 치는 아기, 언제 길러 내 낭군 만드나.” 하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빈곤

시집살이의 어려움 중에는 경제적 이유로 야기되는 심신 양면의 고생을 제외할 수는 없다. 1970년대 고도성장으로 발돋음하던 이전에도 우리 국민생활은 빈곤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그 옛날 조선시대의 빈곤은 이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이었을 것이다. 순전히 농업에만 의존한 농업국가에서 경지면적은 한정되어 있는 터에 인구의 자연증가는 생산을 앞지르므로,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민중은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박지원이 「양반전(兩班傳)」에서 그린 바와 같이 양반을 팔고 산 강원도 정선고을 선비의 이야기나, 「허생전(許生傳)」에서 그린 남산골 허생원이야기들은 소설 속의 허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도 그랬겠지만 중기에는 두 번의 큰 국난이 있었고, 후기 무렵에는 세도정치의 부패풍토 속에서 빈곤은 연속되었으며, 더욱이 국권을 빼앗긴 일제강점기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8 · 15광복 후에도 미구에 몰아닥친 6 · 25전쟁과 그 여파로 1960년대까지 우리 국민생활은 너나없이 어려웠지만,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의 가난이 가장 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가난과 시집살이가 무슨 연관성이 있었던가! 물론 안살림의 주관자는 시어머니라 하더라도, 가세가 빈곤하면 며느리의 신역이 더욱 고될 것은 당연하였고, 또 집안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며느리의 입에 음식이 넉넉히 들어갈 리 없었다. 옛날에 어느 여인이 시집에서 쫄쫄 배를 주리다가 친정에 가서 그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가 “요 미련한 것아, 살강 위의 찬밥이라도 찾아먹지, 그래 굶는단 말이냐.”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찬밥인들 남았겠는가. 시집온 지 몇 년이 되어도 근친(覲親:친정 어버이를 뵙는 일)]을 안 보내주어서 친정 그리운 애달픔도 컸다. 나뭇잎도 제 뿌리를 찾아간다는데 5리 밖 지척에 친정을 두고 못가는 안타까움을 읊은 노래가 많다. 근친을 안 보내는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었다. 가난 때문에 그 차비를 차려줄 수가 없었다. 선비의 집안이면 우선 가마를 세내야 되고 교군꾼의 품삯이 있어야 하며, 서민이라도 최소한 엿과 떡 동고리에 술병은 들려보내야 하는데 너나없이 빈곤하던 시절에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한 시집살이 가운데 가장 절실한 문제는 역시 육체적 고통이었다. “오리물을 길어다가/십리방아 찧고……”라든가, “우리 어메 보고들랑/옷을 벗고 우드라소/우리 아베 묻거들랑/신을 벗고 우드라소.” 등의 민요는 가난으로 인하여 시집살이의 혹독함이 더욱 뼈에 사무치는 경우를 보여준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시집살이

그러면 시집살이의 정체, 즉 그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예로부터 이러한 제재를 다룬 문학작품이 적지 않다. 그런데 객관성이 더 많이 요구되는 소설보다는 주관적 정서로 호소한 내방가사 · 사설시조 · 민요 등에서 더욱 절실하다. 이 밖에도 오랜 세월 동안 생활철학의 경구(警句)로써 전해내려오는 속담 중에도 시집살이에 얽힌 미묘한 인정세계를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 많다. 이러한 문학작품이나 속담 등에 나타난 시집살이의 정체는 대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시집식구와의 대인관계, 즉 정신적인 것, ② 힘에 겨운 노동의 고통, ③ 가난, 즉 경제적인 설움 등이 그것이다. 노동과 가난은 당연히 상관성이 있지만 없을 때도 있다. 그것은 대인관계의 갈등, 즉 가난과는 관계없이 시집식구의 학대에서 오는 고역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궁핍의 고통 등 세 가지를 놓고 그 고난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은 자칫 관념론에 흐르기 쉽다. 따라서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서 체험적으로 표현한 문학작품을 통하여 구명하는 것이 그 고통의 실체에 좀더 접근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인간관계의 갈등

한마디로 말하면 시집식구의 학대이다. 굳이 조선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8 · 15광복 전까지만 하여도 시집살이를 못하고 쫓겨오고, 드디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거나 심지어 자살의 길을 택한 여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가난과 노동보다는 남자의 주1이 아니면 시집식구의 학대가 대부분의 이유였다. 어떤 경우에는 남자의 외도 자체가 시집식구와의 불화에서 비롯되는 수가 적지 않았다. 그 몇 가지 경우를 문학작품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은 숙명적이라고도 한다. 어찌보면 시어머니는 같은 여성이라 며느리의 고충을 이해도 해주고 편을 들어줌직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 고부라는 묘한 관계이다. 이는 아들을 사이에 둔 애정의 줄다리기의 변태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가 크면 클수록 며느리에 대한 질투가 반비례한다. 그 실례로 시어머니 중에서 과부, 그 중에서도 그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고 살아온 주2 시어머니가 더욱 어렵다는 통념이다. 이 밖에 자기자신이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어본 시어머니의 경우이다. 이는 일종의 보상심리이며, 마치 상급생에게 몹시 시달림을 받은 학생이 훗날 후배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는 올챙이 적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개구리의 생리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시어머니의 학대는 옛날이 더 하였으련만 웬일인지 고전소설에서보다 오히려 신소설에서 양적으로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준다. 이인직(李人稙)「치악산(雉岳山)」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살해하려고까지 하였고, 그밖에도 최찬식(崔瓚植)「안(雁)의 성(聲)」, 이해조(李海朝)「봉선화(鳳仙花)」, 선우일(鮮于日)의 「두견성(杜鵑聲)」, 작자미상의 「홍도화(紅桃花)」 등에 그려진 며느리 학대는 그 수법도 다양하다. 이와 같이 신소설에 고부간의 갈등이 많이 다루어진 사실은 당시 일본의 메이지시대(明治時代) 문단을 수놓았던 도쿠토미(德富蘆花)의 「불여귀(不如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로부터 내려온 속담에는 고부간의 미묘한 심리를 다룬 것이 많아 흥미롭다. ‘며느리가 미우면 뒤꿈치가 달걀 같다고 한다.’고 한 데 대해 며느리는 잔뜩 찌푸린 날씨를 보고 ‘사흘 굶은 시어머니상 같다’고 응수하였다. 사흘쯤 굶으면 누군들 좋은 얼굴을 하랴마는 하필 시어머니에게 결부시킨 내심을 알 만하다. 또 다음과 같은 사설시조는 너무나 원색적이다. “가마귀 깍깍 아무리 운들 내가 가며, 님이 가며, 베틀에 앉은 아기딸이 가랴. 재넘어 물길러 간 메늘아기 네나 갈까 하노라.” 이러한 증오와 학대 밑에서 시집살이하면서 며느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설시조를 읊었다. “시어머니, 며느리가 나빠 벽바닥을 구르지 마오. 빚에 채온 며느린가.”로 시작한 다음 “밤나모 썩은 등걸에 휘초리 난 이같이 알살피신 시아바님, 볕뵌 쇠똥같이 되쫑고신 시어머님, 삼년 겨른 망태에 송곳부리난 이같이 뾰족하신 시누이님” 하고 어줍잖은 시집식구들을 하나하나 소묘한다. 그리고 “당피[唐稗]갈온 밭에 들피[野生稗]난 이같이 샛노란 외꽃같은 피똥[血便]누난 아들 하나 두고 건밭에 메꽃같은 며나리를 어디를 나빠하시난고.” 이렇게 대들어 보지만 사실은 부엌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넋두리 정도이지, 면전에서 이렇게 말대답하였다가는 소박데깃감이다. 그리하여 “고치장이 맵다 하니 시어머니두구(보다도) 더 맵더냐.” 하였고, 결국 시어머니는 시집살이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민요에서 시어머니의 수식어는 다음과 같이 다채롭다. “구름같은 시어마이/범같이도 달려들어”, “여수같은 시오마씨/버선발로 쫓아나와”라든가, 조그마한 잘못도 매정하게 꾸짖는 시어머니를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두구(보다도) 더 푸르랴.”고 표현하였다. 이렇듯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은 숙명적인 것이라 체념해온 것이 지난날 우리 여성들의 통념이었다.

시누이 · 올케 사이의 갈등

시집살이에서 시어머니 못지않게 며느리를 울리는 존재가 시누이다. 머지않아 자기도 남의 집 며느리가 될 처지이면서도 올케를 울리는 시누이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시어머니의 건망증과 동질의 것이다. 시누이 · 시어머니 모녀가 합동하여 올케를 괴롭히는 일이 적지 않았고, 대체로 고부간의 불화가 이 시누이의 고자질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고, 민요에서 보더라도 시누이에 대한 올케의 증오는 시어머니보다 덜하지 않았다.

‘졸락같은 시누이년’(제주도 민요), ‘할림새 시누이씨’, ‘여우같은 시누이년’, ‘앵도같은 시누이씨’ 등으로 비유하였다. 여기서 ‘앵도같은’은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뜻이 아니고, 앵돌아졌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요망하다 요시누야/너도너도 머잖았다/말탄 서방 머잖았다.”라고 은근히 벼르기도 하고, 또 “논에 가면 갈이 원수/밭에 가면 바래기 원수/집에 가면 시누이 원수/세 원수를 잡아다가/참실로 목을 매어/법슨 곬에 옇고지라.”와 같이 증오심을 원색적으로 표출하기도 하였다. 또 “산도 설고 물도 선 곳에 누를 보고 내 여기 왔나/네 오라비 아니더면 기와집이 열다섯 길인들 구경하러 내 왔더냐.”고 대들었는가 하면, 더욱 노골적인 것은 시누이의 부고를 듣고 기뼈하는 대목으로, “잘죽었네 잘죽었네/요망하던 요시누야/요망하던 요시누야.” 하였으니 시누이에 대한 증오가 이토록 골수에 사무쳤던 것이다.

큰동서 · 시숙과의 갈등

대가족제도에서 한 집에 몇 쌍의 아들 부부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경우 큰동서 부부는 시부모에 버금가는 어려운 존재였다. 대체로 동서간은 서로 같은 처지이므로 감싸주고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부모 없이 맏동서가 시어머니 구실을 대신할 경우에는 ‘시앗보다 더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런 때 맏동서는 시동생을 길러 장가를 들였기 때문에 시어머니와 같은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를 읊은 민요는 그리 많지 않지만 “홍치같은 맏동세”(군위지방), “흥글흥글 맏동서”(선산지방)니 하고, 또 “칠월일채(日菜) 푸르다더니 맏동서두구 더 푸르랴?”(부령지방)라고도 하였다. 단 큰시숙(시아주버니)에 대해서는 어려운 존재임을 의식할 뿐 별로 적의적 표현은 없고 도리어 ‘장독같은 시아주범’ 따위의 우호적 표현이 더러 눈에 뜨인다.

남편에 대한 불만

조혼이 보편화되었던 봉건시대에는 새색시가 신랑보다 3∼4세, 많을 때에는 5세 정도 위인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새색시에게 미친다는 것은 앞에 말했거니와, 시집살이의 어려움에 나이 어린 신랑의 존재가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민요에서 어린 신랑을 ‘미련새’라 하고, 자신은 ‘썩는 새’라 하기도 하였다. “시아버지 호랑새요/시어머니 꾸중새요/동서하나 할림새요/시누이하나 뾰족새요/시아지비 뽀중새요/남편하나 미련새요/나 하나만 썩는 샐세”(경산지방)

그러나 어린 신랑이라 하여도 자기 색시를 두둔해준 예는 민담으로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다. 가령, 어린 신랑이 밥할 적마다 부엌에 와서 색시더러 누룽지를 긁어달라고 보채므로, 하루는 시어머니가 없는 사이에 어린 신랑을 번쩍 들어 지붕 위로 던져 버렸다. 시어머니가 돌아와서 지붕 위에 있는 아들을 보고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아들은 천연스럽게 “박이 굳었나 안 굳었나 살펴보려구요.”라고 대답하였다. 시어머니는 “뭐, 아직 자라지도 않았는데 벌써 굳을 리가 있느냐? 저런 철부지 녀석 같으니!” 하며 혀를 쯧쯧 찼다. 이로써 숨을 죽이고 있던 며느리는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어린 신랑은 가정에서 너무나 무력하였다. 그래서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한 색시가 차라리 중이나 되려고 “모시석자 바랑짓고/자주석자 끈을 달고/임아임아 나는 간다” 하였을 때, 어린 신랑은 “가지말게 가지말게/그 부모가 매양사나/그 시누가 매양사나/그 머슴이 매양있나” 하고 말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린 신랑이 아니더라도 ‘부모가 불납(不納)이면 자기가 좋아도 내쫓아야 하는 것’이 봉건윤리였으니 별 수 없는 것이다.

시아버지와의 관계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시집살이의 어려움 중에서 시아버지 때문에 못 살았다는 경우는 소설이나 민담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며느리에게 있어서 시아버지는 가장 어려운 존재의 하나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민요에서는 ‘하늘같은 시아버지’의 ‘하늘’ 외에 ‘호랑이’ · ‘범’ · ‘장닭’ 등으로 비유하였고, 시아버지 대하기가 외나무다리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고도 하였다. 구미 · 거창지방 민요로 시집가서 사흘 만에 은잔(또는 금동이)을 깨뜨렸더니 온 집안식구가 “네 친정에 가서 물어달라고 하라.”고 야단을 치는 노래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시아버지이다. 그 모습을 ‘고초 같은 시아바씨’ 또는 ‘범 같은 시아바씨’라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편이며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맞서 두둔해 주는 구실을 하는 존재이다.

육체적 고통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옛날 결혼관이 첫째는 아들을 낳아 대를 잇게 함이요, 둘째는 일을 시켜서 시어머니를 편하게 하는 것이었으니, 며느리의 신역(身役)이 고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노역은 몸종과 유모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안팎 노비를 부리는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경중의 차가 있을 뿐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림의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집안일이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의식주의 모든 생활양식이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원시에 가까울 만큼 비과학적이었으니, 옛 여인들의 고생이란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오리물을 길어다가/십리방아 찧어다가/아홉솥에 불을 때고/열두방에 자리걷고……” 이 민요의 경우, 과장은 있겠으나 생활의 규모로 보아 가난한 집은 아니다. 그런데도 아침 저녁 물동이를 이고 우물물을 길어와야 되고 힘겹게 방아도 찧어와야 끼니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식생활도 어렵지만 의생활은 더욱 어려웠다. 비누도 없던 시절에 잿물을 내려서 빨래를 하고 또 삶아서 풀먹여 만진 뒤 다듬이질하고 다시 홍두깨에 올려 명주라면 물방울이 구르도록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야 한다. 또 바느질도 여간 어렵지 않았다. 추야장 기나긴 밤이 새는 줄 모른다.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한중록(閑中錄)』을 보면 공주의 5대손이며 시아버지가 판서를 지낸 명문의 집안인데도 며느리가 밤에 날이 밝기까지 길쌈과 바느질을 하였다. 그나마 남의 입에 오르내릴까봐 보자기로 창을 가리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예를 볼 때 일반백성의 아낙, 특히 시집살이하는 어린 새색시들이 그러한 풍토에서 혼자 먼저 제 방으로 들어가 자버릴 수도 없다. 그러기에 언제나 시집살이에는 수면 부족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민요에 ‘잠노래’가 적지 않다. “잠아 잠아 오지마라/시어머니 눈에 난다/시어머니 눈에 나면/임의 눈에 절로 난다.”

농촌에서는 밭일까지 해야 하니 시집살이는 완전히 노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모란 꽃같은 내 얼굴에/개나리꽃이 무삼일꼬/삼단같은 내 머리에/비사리춤이 무삼일꼬/분결같은 이 내 손에/조막호미 무삼일꼬.”, “삼단같은 요 내 머리/비사리춤이 다 되었네/백옥같은 요 내 손길/오리발이 다 되었네.” 그리하여 “열새무명 반물치마/눈물씻기 다 젖었네/두폭붙이 행주치마/콧물받기 다 젖었네”라고 하였다. 아무리 친정에서 일을 해본 색시라 하더라도 시집와서 하는 신역은 훨씬 더 고달프다. 노동에 찌들어 너무나도 변해버린 자기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오늘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집살이가 고되면 고될수록 그립고 생각나는 것은 오직 친정뿐이었다. 대체로 며느리에게 근친 말미를 주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 8 · 15광복 전까지만 하여도 서울의 중류층 이상의 풍속에서는 복중이 그 시기였다. 갓 시집온 새댁이 어른 앞에서 여름을 나면 시부모나 며느리나 서로 옷을 벗기도 어렵고 목물조차도 조심스러우므로 친정에 보내어 여름을 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일이 많아 여름에는 엄두도 못내고 가을 추석 때 보내는 고장도 있었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팔월령에는, “며느리 말미받아 본집에 근친갈 제/개잡아 삶아건져 떡고리와 술병이라/초록장옷 반물치마 장속(裝束)하고 다시보니/여름지어 지친 얼굴 소복(蘇復)이 되었느냐/중추야(仲秋夜) 밝은 달에 지기(志氣)펴고 놀고 오소.”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인심이 후한 집의 경우이고 친정에 꼭 가야만 할 일이 있어도 시가에서 보낼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친정에 가는 길, 또 가서 날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 기한이 되어 시집으로 돌아올 때의 애달픈 심정, 이러한 것이 민요나 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친정으로 갈 때에는 오동나무 꺾어쥐고 ‘오동오동 간다’ 하였고, 친정에 있는 동안은 ‘석달 장마져라.’ 하였고, 시집으로 올 때에는 느릅나무 꺾어쥐고 ‘느름느름 온다’고 하였다.

경제적 궁핍

경제적 궁핍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지만 시집살이하는 며느리의 고통은 더욱 심하다. 더욱이 넉넉한 친정에서 자란 색시가 궁핍한 집으로 시집왔을 때는 적응하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예로부터 “며느리는 못한 집에서 데려오라”고 하였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이다. 더욱이 조선시대 양반집에서는 ‘혼인하는 데 재산을 논함은 오랑캐의 법(婚娶而論財夷虜之道)’이라 하여 가문을 중시하고 경제적 조건같은 것은 ‘제 복 있으면 잘 산다.’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음 민요는 이러한 데서 나온 슬픔과 한탄의 독백이다.

“비단치마 입던 몸이/곡베치마 무삼일꼬/영초(英綃)저고리 입던 몸에/미영(무명)적삼 웬 일일꼬/은가락지 끼던 손에/호미단갈 웬 일인가.” 그보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양식이 없어 끼니 때마다 겪는 어려움이다. “시집온 지 사흘만에/부엌이라고 내려가서/가마뚜껑 열어보니/엉거미가 줄을 치고”라 하였으니 다소의 과장은 섞였다 하더라도, 호강스럽게 자란 규수가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사는 적응의 문제는 자못 심각하였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은 옛날에 친정에서 고생 모르고 자라나던 시절의 추억이고, 그럴 때마다 단숨에 달려가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것이 시집살이의 어려움이다. 그래서 “새벽서리 찬 바람에/울고가는 외기러기/동남 갓을 향해가나/동서 산을 향해가나/우리 집골 가거들랑/이내 말을 전해주소/우리 어메 보고들랑/옷을 벗고 우드라소/우리 아베 묻거들랑/신을 벗고 우드라소.”라는 노래가 있다.

한편 내방가사에도 시집살이의 설움에 대하여 표현한 것들이 있다. 다음 노래는 먼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한을 읊은 다음, “어와 여자신세/가련하다 여자신세/그리운 우리 친정/오리지히 던져놓고/금년이나 명년이나/경지명지 간단 것이/일평생 지나도록/시가공의(媤家公議) 어떻던고/그 공의 기다리면/황하천년(黃河千年) 맑겠도다/가소롭다 여자신세/여자 명목(女子名目) 가소롭다.” 5리 밖 가까운 곳에 친정을 두고도 못 가는 이유는 시집어른들의 허락이 없기 때문이며, 그 가족회의의 결재가 차일피일 몇 삼 년을 미루어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가난 때문이다. 근친날을 기다리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 아닌 ‘천년하청’이라 꼬집고 있다.

처신의 어려움

시집살이에 있어서 처신상의 구속감도 나이 어린 신부들에게는 힘든 일의 하나였다. 음성이 커도 안 되고 웃음이 헤퍼도 안 된다. 밥먹는 모습, 걷는 모양, 온갖 거동이 다 흉이 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조심해야 되는 것은 ‘말’이다. 이른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석삼년을 살고 나니 아제비꽃이 다 피었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어느 어린 새색시의 이야기가 『해서기문(海西奇聞)』에 전한다. 즉, 며느리가 시집와서 도무지 말을 안 하므로 벙어리로 알고 시아버지가 친정으로 데려다주려고 가는 도중 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저기 꿔더덕이 날아가네”하여 벙어리가 아님을 알고 도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말조심에는 말을 옮기지 않음이 첫째이며, 주3 쓰는 것도 포함된다. 시가식구에게는 존댓말을 하여야 한다. “비록 아래 항렬(行列)의 어린이라 할지라도 갓 시집온 새색시가 ‘얘’ · ‘쟤’ 하고 주4를 쓰는 것은 당돌하게 보이느니라”고 부모들은 출가하는 딸에게 타일렀다. 이러한 훈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어느 여인의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오고 있다. 개가 자꾸 짖으니까 시아버지가 며느리더러 나가 보라고 하였다. 잠시 후 며느리가 조용히 들어와서 아뢰었다. “쇠[牛]씨가 덕썩씨를 쓰옵시고 마당에 서 계시니까 개[犬]씨가 짖으시옵니다.” 또 덮어놓고 경어만 써서 웃음거리가 된 예도 있다.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이 붙었습니다.” 한편 말을 옮기지 않는 처신법에 대해서는 『내훈』에 “출가한 시고모나 시누이하고도 한 상에서 밥을 먹지 말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서로 다른 가문 며느리인 여인들끼리 무심코 하는 대화를 통하여 시집의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감을 경계하는 뜻에서이다.

궁중에서는 이 말단속의 훈련으로 궁녀가 새로 입궁하면 섣달그믐날 저녁 대궐 뜰에 한 줄로 세워놓고 수십 명의 젊은 내시들이 횃불을 들고 “돛의 부리 지져!”, “쥐부리 지져!” 하고 소녀들의 입 가까이에 횃불을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함으로써 겁을 주었다 한다. 이것은 정월 첫째 해일(亥日) · 자일(子日) · 묘일(卯日) · 사일(巳日)에 해충의 피해 없이 그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뜻에서 쥐불을 놓던 궁중의 세시풍속을 신입 궁녀의 입단속에 원용한 것 같다.

시집살이의 이 말조심은 혼례식을 올리고 신랑을 따라 대문을 나설 때 어머니가 딸의 옷고름을 고쳐 매어주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삼가고 조심해라.” 하는 훈계 속에 포함된 것이었다. 옛날 시집살이의 어려움은 다음 민요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성님성님 사촌성님/시집살이 어떻던고/드러누워 명지꾸리/하나 감을만하더라.” 명주실은 헝클어지기 쉬워서 앉아서도 감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드러누워 감을만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지경이라는 뜻을 거꾸로 표현한 말이다.

오늘날의 시집살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집살이는 봉건시대의 유물이다. 따라서 여권이 신장되어 가정 안에서 주부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부권(父權)이 약해진 오늘날 더욱이 아파트의 보급이 핵가족 풍토를 몰고와 장자라도 부모를 모시기 꺼려 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시집살이라는 낱말 자체를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실감조차 못하게 되었다. 일부 전통적 유습을 지키는 가문에서 시부모 및 시형제들과 동거하고 있는 집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옛날 그대로의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시부모도 없거니와 이것을 실행하는 며느리도 없다. 남아선호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이나, 여자호주제(女子戶主制)가 거론되는 시대에서 시집살이란 더욱 빛 바랜 주5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강요하지 않는 것은 시대적 인식으로 체념한 탓도 있겠으나, 공리적 타산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시누이의 올케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올케에게 잘 보여야 자신에게 물질적으로 유리할 뿐 아니라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부모 사후의 타산까지 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며느리의 위치에서 볼 때, 대개 집안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자기 손으로 시부모에게 용돈을 드리고 시동생들을 거두어 가르치고 장차 그 결혼까지도 책임이 있다는 자부심이 있는데, 무조건 복종의 전세대적 시집살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반드시 이 같은 타산에서 보아도 시가식구나 며느리나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는 관계로 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임을 알고 있으므로 마찰이나 반목을 피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오늘날 선진국일수록 친정부모를 시부모보다 더 가까운 자리에 두고 보살피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나라도 차츰 이 바람에 휩쓸려가고 있다. 이제는 ‘사돈집과 변소는 멀어야 한다’는 경계가 무너져 가고 있다. ‘아들 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자’는 현실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이나, 딸이 없는 시부모가 외롭지 않게 며느리가 시부모를 정성을 다해 보살펴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같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시킬 시부모가 있을 리 없다.

참고문헌

『내훈(時調詩學敍說)』(소혜왕후)
『해서기문(海西奇聞)』
『시조전서(時調全書)』
『한국가족의 심리문제』(이광규, 일지사, 1981)
『규방가사연구』(권영철, 이우출판사, 1980)
『한국민요집』(임동권, 동국문화사, 1961)
『한국의 고부관계』(김용욱·이기숙, 청림각, 1917)
「전통적 부덕의 비판」(김용숙,『숙대학생생활연구』11, 숙명여자대학교, 1977)
「시집살이요고」(임동권, 『아세아여성연구』 2, 숙명여자대학교, 1963)
주석
주1

첩을 둠.    우리말샘

주2

젊어서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자.    우리말샘

주3

사람이나 사물을 높여서 이르는 말. ‘아버님’, ‘선생님’ 따위의 직접 높임말, ‘진지’, ‘따님’, ‘아드님’ 따위의 간접 높임말, ‘뵙다’, ‘여쭙다’, ‘드리다’ 따위의 객체 높임말이 있다.    우리말샘

주4

상대 높임법의 하나. 상대편을 아주 낮추는 종결형으로, ‘철수야, 빨리 자라. 내일 새벽에 운동해야 한다.’ 따위이다.    우리말샘

주5

과거에는 쓰였으나 현재에는 쓰이지 아니하게 된 언어. 또는 그런 단어. 고대 그리스어, 고대 라틴어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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