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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私田)

고려시대사제도

 고려시대 토지지배관계에 따른 구분으로 조(租)가 국가에서 지정한 사인(私人)에게 귀속되는 토지, 또는 소유권이 사인에게 있는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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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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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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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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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시대
고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시대 토지지배관계에 따른 구분으로 조(租)가 국가에서 지정한 사인(私人)에게 귀속되는 토지, 또는 소유권이 사인에게 있는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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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고려시대는 토지를 크게 공전(公田)과 사전으로 구분하였다. 여기에 속하는 토지의 구체적인 지목(地目)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사』 식화지 상평의창조(常平義倉條) 현종 14년(1032) 윤9월 판(判)에 의하면, 공전은 1과·2과·3과로 구분되며, 사전은 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양반전(兩班田)과 군인호정(軍人戶丁=軍人田)·기인호정(其人戶丁=其人田)으로 구분되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공전·사전의 정확한 개념은 아직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과거의 통설은 수조권이론, 즉 조(租)의 귀속에 따라 공전·사전을 구분하였다. 즉 조가 국고·왕실 혹은 기타 국가의 공적 기관에 귀속하는 토지는 공전, 본래는 국고에 수납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대신 국가에서 지정한 어떤 사인에게 조가 귀속하는 토지는 사전으로 인식되어왔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위의 의창법 규정 안에 보이는 공전과 일부 사전은 대체로 합리적으로 이해된다. 사전의 경우를 보면, 군인전은 조가 군호(軍戶)에, 기인전은 조가 기인호에 수입되었으므로 국가가 지정한 일정한 사인에게 조가 귀속하는 토지를 사전이라고 한다는 수조권이론에 의거한 인식은 타당하다.
수조권이론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토지지배관계를 토지공유제=토지국유제의 입장에 서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당시의 토지지배관계를 보면 공전이건 사전이건 간에 전국의 토지는 모두 국유이므로 유일한 토지 소유주, 즉 지주(地主)는 국가라는 이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토지의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는 개인으로서의 지주라는 존재는 이론상 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학설은 현재 비판받고 있다. 특히 공전과 사전의 조를 일률적으로 동질적인 것처럼 해석한 것은 큰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수조권이론은 토지공유제=토지국유제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 것으로, 그 전제조건 자체가 현재의 연구수준에 비추어 보아 이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수조권이론은 일부 타당성이 있으나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고려시대의 토지지배관계는 과거에 인식되어온 바와 같이 토지공유제=토지국유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의창법의 규정 안에 있는 사전의 각 지목들이 토지공유제=토지국유제의 이론에 부합되는 국유지 또는 관유지(官有地)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족정(足丁) 17결로 편성되어 있는 군인전은 본래 군호가 소유한 민전 위에 설정하거나, 또는 군호의 토지 소유량이 지급량에 미달할 경우 부족한 부분 만큼 다른 민호(民戶)의 민전 위에 보충해 설정하였다. 기인전의 경우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토지 위에 설정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종의 수조지(收租地)였음은 확실하다.
군인전이나 기인전의 경우, 본래 국가에 조를 바쳐야 할 의무가 있는 민전이었다. 그러나 군인전·기인전으로 편성되면서부터 그 조는 국고에 수납되는 대신에 국가가 조의 수취권을 인정해준 특정의 사인, 즉 군인·기인에게 귀속하게 되었다.
군인전·기인전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사전이며, 수조권이론에 입각해서 이들을 사전으로 규정한 해석은 타당하다. 그러나 궁원전·사원전·양반전이 민전 위에 설정된 군인전과 같은 순수한 수조지였는지는 의문이 많다.
먼저 궁원전을 보면, 궁원이란 왕족이 거주하는 저택으로서 이것은 공적 성격을 띠는 일종의 공관(公館)이었다. 왕족은 자연인으로서는 일개 사인(私人)에 불과하지만, 왕실 내지는 왕실의 외곽을 구성하는 종친으로서 공적 성격을 띤 공인(公人)이었다.
왕족의 공관인 궁원에는 그것을 관리하는 관원들이 배치되고 토지와 노비들이 부속되어 있었는데, 이 궁원에 부속된 토지가 궁원전이었다.
궁원전에는 왕족들이 본래부터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와 국가로부터 조의 수취권을 인정받은 수조지의 두 유형이 있었다. 전시과의 법규에는 일반 양반의 경우와 같이 궁원에 수조지를 분급한 규정은 보이지 않으나, 공해전시가 궁원에 지급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궁원공해전이 바로 궁원에 소속된 수조지였다고 생각된다.
궁원은 많은 장(莊)·처(處)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는 장·처에 거주하는 장·처민의 민전이었다. 따라서, 장·처전의 소유주는 일반 농민이며, 궁원은 단순한 수조권자에 불과하였다.
수조지로서의 궁원공해전은 당연히 일반 민전과 같은 공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2과공전과 대비되어 있는 사전으로서의 궁원전은 수조지와는 관계가 없고, 궁원이 소유하는 사유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전으로서의 사원전도 같은 맥락에서 사원의 사유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원도 궁원의 경우와 같이 많은 장·처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들 장·처전 역시 장·처민의 민전이며, 사원의 사유지가 아니라 단순한 수조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2과공전에 대비되어 궁원전과 같이 병기되어 있는 사원전은, 사원이 지배하는 공전의 성격인 수조지까지도 포함한 것이 아니라, 사원 소유의 사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원이 소유하는 사원전은 국가에 조를 납부할 의무가 없는 면세 특권이 부여된 토지였다. 궁원전도 같은 면세지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궁원전이나 사원전에서는 조가 국가와 궁원·사원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궁원·사원과 이들의 소유지를 경작하는 전호(佃戶)주 01)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민전과 같이 토지 소유주가 국가에 바치는 지세(地稅)가 아니라, 타인의 땅을 차경(借耕)하는 토지용익자(土地用益者)가 지주에게 부담하는 지대(地代)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양반전은 궁원전·사원전과 같은 양반의 소유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반전은 양반들의 수조지이기는 하였으나, 군인전·기인전 같은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단순한 수조지는 아니었다.
양반전의 모체는 나말여초의 호족들이 소유한 광대한 전장(田莊)에 소속된 토지였다고 짐작된다. 이들 전장은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가 제정될 무렵에 일단 국가에 회수되는 형태를 취했다가, 이 회수된 토지 위에 다시 양반전이라는 지목이 설정되어 지급된 것으로 이해된다.
옛날 호족들의 전장 위에 설정된 양반전은 과거의 전장이 그러하였듯이 전호에 의한 소작경작에 의해 경영되었다. 따라서, 양반전에서 성립하는 조는 궁원전·사원전의 경우처럼 소작제 경영을 통해 실현되는 지대의 성격을 띠는 것이며, 군인전·기인전의 조와 같이 지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 설명한 바를 요약하면, 3과공전 즉 민전과 동류(同類)인 군인전·기인전은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로서의 사전이었고, 2과공전 즉 국가의 공적 기관에 부속된 공유지·관유지와 병기된 궁원전·사원전은 수조권에 입각해서 조를 수취하는 수조지가 아니라, 궁원·사원이 사유재산으로서 소유하는 사유지였다.
그리고 군인전·기인전의 조는 지세로서, 궁원전·사원전의 조는 지대로서 실현되는 것이었다. 양반전은 군인전·기인전 따위의 민전 위에 설정된 단순한 수조지는 아니며, 여기서 실현되는 조는 지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상으로 보아 공전·사전의 구분을 수조권이론에만 입각해서 가름한다면 이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지배와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의 문제, 그리고 ‘조’의 성질이 ‘지세’에 해당하느냐 ‘지대’에 해당하느냐 등의 문제가 동시에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소유권이론과 수조권이론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전의 지목을 검토해보면, 국가에 조를 바쳐야 할 의무가 없는 사유지로서의 궁원전·사원전은 당연히 사전이며, 또한 민전 중에서 그 조가 군인·기인 등 국가가 지정한 일정한 개인에게 귀속하는 토지도 사전으로 인정됨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사전은 고려 후기에 국가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권문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하여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토지소유관계가 문란해지자 국가재정의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 일부 개혁론자들은 과전법(科田法)을 주장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리하여 중앙집권이 강화된 조선 초기에 이르러 토지지배관계는 수조권의 귀속에 따라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토지제도사연구(高麗土地制度史硏究)』 ( 강진철 ,고려대학교출판부,1980)

  • 「공전(公田)·사전(私田)과 민전(民田)」 ( 김재명 ,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93)

  •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토지분급(土地分給)과 전품(田品)」 ( 박국상 ,『한국사론(韓國史論)』18,1988)

  • 「고려전기(高麗前期) 가전(家田)과 조가전(朝家田)의 세액(稅額)·조액(租額)과 그 전호(佃戶)의 경제적(經濟的) 지위(地位)」 ( 홍승기 ,『역사학보(歷史學報)』106,1985)

  • 「고려시대(高麗時代) 십일조(什一租)에 관한 일고찰(一考察)」 ( 김재명 ,『청계사학(淸溪史學)』2,1985)

  • 「고려초기(高麗初期) 공전(公田)·사전(私田)의 성격(性格)에 대한 재검토(再檢討)」 ( 박종진 ,『한국학보(韓國學報)』37,1984)

  •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사전(私田)의 개념(槪念)에 대한 재검토(再檢討)」 ( 김당택 ,『진단학보(震檀學報)』53·54합집,1982)

  • 「고려전기(高麗前期)의 공전(公田)·사전(私田)과 그의 차솔수조(差率收租)에 대하여」 ( 강진철 ,『역사학보(歷史學報)』29,1965)

  •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왕토사상(王土思想)과 공전(公田)」 ( 이우성 ,『조명기박사화갑논총(趙明基博士華甲論叢)』,1965)

  • 「고려(高麗)의 영업전(營業田)」 ( 이우성 ,『역사학보(歷史學報)』28,1965)

  • 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  (浜中昇, 法政大出版局, 1986)

  • 「高麗の公田」 ( 旗田巍 ,『史學雜誌』77·4,1968)

  • 「朝鮮における近代的土地所有の成立過程」 ( 深谷敏鐵 ,『史學雜誌』55·2·3,1944)

  • 「朝鮮の土地慣行 ‘竝作半收’試論」 ( 深谷敏鐵 ,『社會經濟史學』11·9,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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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小作人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강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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