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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西學)

천주교개념용어

 조선후기 중국에서 도입된 한역 서양 학술서적과 서양 과학기술문물과 이를 토대로 연구하던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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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위편 / 서학동래전말
분야
천주교
유형
개념용어
시대
고대-삼국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후기 중국에서 도입된 한역 서양 학술서적과 서양 과학기술문물과 이를 토대로 연구하던 학문.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조선서학이라고도 한다.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명말·청초의 중국에서 포교활동에 종사하던 예수회(耶蘇會, Society of Jesus)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서양서적을 한문으로 번역, 간행하면서부터이며, 이러한 서책들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혹은 서학서(西學書)라고 불리었다.
『삼국유사』에 “의상(義湘)이 서학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건너갔다.”라는 구절이 보이나, 이 서학은 서쪽 나라에서 불교를 익힌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이기에 조선 후기의 그것과는 다르다. 중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1601년 리치(Ricci,M., 利瑪竇)의 포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뒤,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건너와 활동하게 되는데, 그 중 한 사람인 바뇨니(Vagnoni,A., 高一志)는 서양 정치학개론서인 『서학치평 西學治平』·『민치서학 民治西學』과 서양윤리학서인 『수신서학 修身西學』을 저술, 간행하였다. 또한 알레니(Aleni,J., 艾儒略)는 서양교육 및 학술개론서인 『서학범 西學凡』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명·청 양대에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교 신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하여 서양문명의 여러 측면을 알려 주는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 저술하면서 서양학술과 기술 및 문화를 ‘서학’이라는 용어로 나타내었다. 우리 나라에는 한역서학서들이 조선 후기에 들어오게 되면서 서양인의 학문으로서 인식되었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연기 湛軒燕記』에서 “북경성 안 네 곳에 큰 집을 세우고 그들을 그곳에서 살게 하여 천주당이라고 부르게 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서학이 성해지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태서인지학(泰西人之學)’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서학변 西學辨」이라는 저술을 남긴 신후담(愼後聃)은 ‘서태자학(西泰子學)’이라는 명칭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명칭은 모두 서양에 대한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조선서학(朝鮮西學)’이라는 용어는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조선 후기 사회의 지식인들이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문물을 섭렵하고 전개시킨 학문적 연구를 뜻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서학 자료
조선 서학의 학문적 연구자료는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문물이었다. 한역서학서란 명말·청초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중국인들에게 천주교를 이해시키는 한편, 서양문명을 전수하기 위하여 서양의 천문·역산·지리·과학·기술 및 윤리·종교에 관한 내용을 한문으로 저술한 서적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의 역사적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에 놀라게 되었다. 이런 문화세계에서 전도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한문을 익히고, 중국고전을 읽어 중국문화를 이해한 바탕 위에서 중국인들과 직접 교섭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중국인 협력자들의 도움을 얻어 많은 서학서를 간행하였다. 첫 한역서학서는 루지에리(Ruggieri,M., 羅明堅)의 『성교실록 聖敎實錄』이고, 그 뒤에 리치의 『천주실의 天主實義』가 간행되었다. 리치는 그 밖에도 20여 종의 저술을 간행하였고, 『만국여도 萬國輿圖』라는 세계지도도 작성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가톨릭 포교의 중심적인 축을 이루었던 예수교 선교사들은 1601년부터 1775년 교황령에 의하여 해산될 때까지의 약 170년 동안 약 500여 종의 서학서를 출간하였다. 그 밖의 다른 전교단체에서도 적지않은 수의 한역서학서를 저술, 간행하였다.
한역서학서는 서양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친 것이나 윤리·종교적인 내용의 이(理)의 측면과 과학·기술적 내용의 기(氣)의 측면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소개되고 있는 서양문화는 저자들이 성직자들이었기 때문에 중세 스콜라철학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과학기술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한역서학서의 영향은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일본·만주·몽고·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나라에 미쳐서 새로운 문화활동을 자극하게 되었다.
한편, 서양 과학기술문물을 서양으로부터 가져온 기계·기구들이거나 중국왕실의 요청에 의하여 성직자들이 중국에서 제작한 기구·무기·지도 등으로, 이런 것으로 전해지는 서양 기술문명은 중국사회에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시계·망원경·지구의와 같은 기구에서부터, 천문관측기구나 각종의 화기(火器)·역산·수리·지도제작기술 등이 소개되어 중국의 전통적 과학과 생활기술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역서학서와 더불어 이러한 서양의 과학·기술 기구와 지식은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대사행원(事大使行員)에 의해 도입되어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는 학문적인 연구로 전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서학의 전개
조선 서학사를 단계적으로 구분하면 ① 서학접촉기(西學接觸期, 선조 중엽∼숙종 중엽의 약 100년간), ② 서학점성기(西學漸盛期, 숙종 후기∼정조 초기의 약 80년간), ③서학실천기(西學實踐期, 정조 초기∼순조 초기의 약 30년간), ④ 서학점식기(西學漸熄期, 순조∼고종 초기의 약 70년간)로 나눌 수 있다.
  1. 1. 서학접촉기
    서학접촉기는 부경사대사행원(赴京事大使行員)들이 북경에서 중국의 서학과 접촉하여,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이 도입되고, 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의 열독과 관찰로 서양과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는 시기이다.
    북경에서 중국 서학과의 접촉은 소현세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에 파견되던 부경사행원에 의해 진전되었다. 병자호란의 정치적 인질로 북경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소현세자는 샬(Shall,A., 湯若望)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1644년(인조 22) 귀국할 때 여러 가지 서양 과학기술문물과 한역서학서를 그로부터 받아가지고 왔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서양 성직자들과의 접촉, 사천주당(四天主堂)과 흠천감(欽天監)의 견학,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의 도입의 주역을 담당한 것은 부경사행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사대외교관계를 취하게 된 뒤 해마다 파견되던 외교적 사명을 띤 사신과 그 사신의 수행원들을 뜻한다. 정사·부사와 서장관과 정식 수행원들은 모두 선발된 인물들이기에 정치적 식견과 학문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북경에 들어가 머무르는 동안에 동서남북 네 곳의 천주당과 천문과 역산을 주관하는 기관인 흠천감을 방문하여 서양 성직자들과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모든 시설을 관람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중국 서학과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학문자료가 도입되었다.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연결되는 부경사대사행로(赴京事大使行路)는 대륙과 서양 선진문명 도입의 문화도관(文化導管)이었다. 바로 이 길을 통하여 서학과의 접촉이 약 1세기간에 걸쳐 진행된다.
    그 최초의 사례는 1603년 이광정(李光庭)의 세계지도 도입이었다. 또한 1630년(인조 8) 진주사(陳奏使)로 사행한 정두원(鄭斗源)은 로드리케즈(Rodriquez,J., 陸若漢)와 만나 천문·역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천문·역산·지리에 관한 한역서학서와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 등 다수의 서양 과학기술의 이기류(利器類)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는 서양기술을 도입하여 이용해 보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서양 학술을 최초로 활용한 사람은 김육(金堉)이다. 김육은 1644년 관상감제조로 있을 때에 북경에 사행하였는데, 이 때 샬에 의해 제작된 시헌력(時憲曆)의 우수성을 알게 되어 관계서적 다수를 입수해가지고 귀국하여 조선에서도 서양역법을 토대로 한 시헌력을 채용하게 하였다.
    조선의 선각적 관료들이 서양의 천문·역법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농업국가에 있어서 천문·역법의 사항이 제왕학(帝王學)으로 군주가 책임져야 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당시 조선사회에서 사용하던 수시력(授時曆)이 사실과 어긋나 혼란이 빚어지고 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필요에서였다.
    김육과 달리 사행하기 전에 이미 서양의 천문학에 대한 학식과 우주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북경에서 서양인과 접촉한 것으로는 이이명(李頤命)의 예가 유명하다.
    고부주청사(告訃奏請使)로 1702년(숙종 46)에 사행한 이이명은 북경에서 흠천감으로 사우레즈 (Saurez,J., 蘇霖)와 괴글러(Kogler,I., 戴進賢)를 찾아가 그가 품었던 의문을 질문하고 의견을 교환한 뒤 귀국할 때 여러 가지 한역서학서를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이와 같이 1세기 동안에 걸쳐 조선사회에 도입된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은 이제 서서히 많은 지식인들의 학문적인 관심대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즉, 많은 학자들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또는 학문적 호기심에서 한역서학서를 열독하였고 서양 과학기술문물을 관찰하여, 이해하기에 힘썼다.
    이러한 노력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이다. 여기에는 이광정이 중국에서 들여온 한역세계지도와 한역서학서 가운데에서 가장 널리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에 대한 논평이 실려 있다.
    논평의 내용은 세계지도가 매우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다는 것과 『천주실의』의 내용 편목(篇目)을 소개한 간단한 것이었다.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유몽인(柳夢寅)도 『천주실의』와 『교우론 交友論』 같은 한역서학서를 읽고 나서 『어우야담 於于野談』에서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의 전통종교와 천주교의 관계를 논하였다.
    천주(天主)를 유교적 전통사회에서의 상제(上帝)와 같은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과 신부들의 불혼취제(不婚娶制)를 배격하며 천주교를 혹세의 이교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수광이나 유몽인의 서학서의 열독과 논평은 호기심에서의 접근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직도 서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숙종대의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이명은 부연하기에 앞서 본국에 있을 때 여러 가지 한역서학서를 읽어 그 나름대로 서양과학과 천주교에 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다가 부연사행의 기회에 서양 선교사들과 학문교류를 가졌던 것이다.
    이상의 예로 알 수 있듯이 조선 중기의 선각적 지식인들은 부연사행의 기회에 북경에서 서양 성직자들과 직접적인 교섭을 가져 중국 서학과 접촉하였다. 또 한편으로 도입된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은 국내에서도 학문적 호기심을 일으켜 한역서학서와 서양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 의식세계의 폭을 넓히게 하였다.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종류와 양이 축적되었고, 이를 대하는 선각적 지식인도 그 수가 늘어나서 이해와 깊이도 심화된다. 18세기에는 실학사가 안정복(安鼎福)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역서학서는 선조 말부터 우리 나라에 흘러 들어왔고 명경(名卿)·석유(碩儒)도 이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나 도교와 불교의 서적과 같이 서재에 갖추어 두게 되었다.”
    또한 뒷날 정약용(丁若鏞)이 “서학서를 구하여 탐독하는 일이 나의 청년시절의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실토할 정도로 서학서를 가까이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추세를 배경으로 마침내 이익(李瀷)에 이르러 조선 서학으로서의 학문세계가 열리게 된다.
  1. 2. 서학점성기
    서학점성기의 기점을 이루는 이익의 학문세계는 18세기를 전후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이이(李珥)·유형원(柳馨遠)의 경세의식(經世意識)을 이어받은 이익은 정치기강의 문란과 농촌사회의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박학과 실용에 치중한 그의 실학정신은 서학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익은 실학의 조종(祖宗)이었고 동시에 조선 서학을 학문적 기반 위에 올려놓은 학자였다.
    이익이 읽은 한역서학서는 역사서(天問略 등 6종)·천문서(渾蓋通憲圖說 등 6종)·지리서(職方外紀 등 3종)·세계지도(坤輿圖說 등 3종)·과학서(泰西水法 등)와 『천주실의』를 위시한 다수의 종교·윤리서 등이었다.
    그는 서학서의 중요 내용을 이해하기에 힘쓰면서 파악된 것을 메모식의 문장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성호사설 星湖僿說』이나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과 『성호선생문집 星湖先生文集』에 실린 많은 서학관계의 논평문을 통하여 그의 서학의 학문적 깊이를 알 수 있다.
    그는 브라헤(Brahe,T.)의 천문과학을 골자로 한 그리스도교적 서양 천문학을 전적으로 수긍하였다. 즉, 지구중심의 천동적(天動的)인 우주체계를 이해하였으며 시헌력의 선진성을 받아들이는 등 서학의 새로운 우주체계와 역산술의 이해를 통하여 서학세계로 문화인식의 폭을 넓혀갔다.
    그는 서학의 물질적 면뿐만 아니라 서학의 정신적 측면인 종교·윤리에 대하여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서학서를 통한 자신의 이해와 제자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천주교를 선유의 상제사상(上帝思想)과 통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주교의 당옥론(堂獄論)을 허황한 것으로 규정하고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이익은 실학적 실증정신을 살려 엄격하게 서학을 비판하였고 수용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것과 배척되어야 할 것을 가려가면서 선택적으로 인식하였다.
    이익은 많은 서학자료를 활용하여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확고한 학문정신 위에서 파악하였기 때문에 ‘서학’이라는 학문분야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의 서학열은 문하에서 배출된 많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이익 제자들의 서학연구로 ‘조선 서학’의 폭이 확대되고, 질적으로 심화되어 마침내 서학의 수용 실천과 서학의 배척이라는 대립되는 두 경향의 이론적 배경이 성숙되었다.
    이 상반되는 두 흐름의 활발한 활동과정 속에서 조선 서학은 학문적으로 더욱 진전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익은 실학운동의 조종인 동시에 조선 서학의 사조(師祖)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익의 제자들은 후에 서학의 실천운동에 나서거나 또는 반대로 서학배척운동에 나서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의 스승의 학풍을 따라 실학과 서학에 힘썼다. 스승 이익으로부터 사학(史學)에 힘쓸 것을 권고받고 마침내 실학사가로 이름을 남기게 된 안정복도 스승과 서학에 관해 자주 의견을 교환하였고, 각종 한역서학서를 탐독하였다.
    그는 『천주실의』·『기인십편 畸人十篇』·『변학유독 辨學遺牘』 등의 한역서학서를 연구하고, “천주학은 정핵(精覈)하나 결국은 이단지학(異端之學)”이라 단정하고 장차 천주교가 홍수나 맹수보다도 무서운 해를 가져올 것이라고 인식하고 그 위험성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고 하였다.
    『천학고』에서는 동양고전을 활용하여 천주학의 연원을 밝히기에 힘썼고, 『천학문답』은 31항목에 걸쳐 조목조목 따져가며 천주학이 이단임을 밝혀놓은 척사론서(斥邪論書)이며 위정론서(衛正論書)이다.
    안정복과 달리 정신적 측면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물질적 면마저 배격하여야 한다는 처지에서 서학을 연구한 이익의 제자는 신후담이다.
    철저한 유교적 교양을 받은 신후담은 박학다식하여 『하빈잡저 河濱雜著』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학자이며 학문적으로 이익을 사사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한역서학서를 가까이하였다. 그리하여 「서학변」이라는 장편의 서학론을 폈다.
    그는 「서학변」에서 『직방외기 職方外紀』에 실린 세계 대세와 서양교육과 학술을 논평하였고, 『천주실의』와 『영언여작 靈言蠡勺』을 철저히 검토하여 천주교의 영혼론을 극명스럽게 비판하였다.
    이는 서학을 배격하기 위해서는 서학을 연구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바탕을 둔 연구였다. 신후담의 서학연구는 정학(正學)의 보위, 사학(邪學)의 배격을 전제로 한 척사위정의식(斥邪衛正意識)에서의 연구였다는 점에 특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안정복·신후담은 이익의 제자이며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하는 학자로 서학배격론적 처지에서 서학을 연구한 데 대하여, 그들과 학통을 달리하며 서학의 가치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또다른 서학연구의 흐름이 있었다. 이들은 뒷날 북학파(北學派)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로 홍양호(洪良浩)·홍대용·이덕무(李德懋) 등이 이에 속한다.
    홍양호는 두 차례나 북경에 사행하여 청나라와 서양의 학술에 관하여 청나라 학자들과 토론을 전개하였다. 홍대용도 1765년(영조 41) 이후 세 차례나 북경에 들어가 천주당·흠천감 등을 답사한 뒤, 할레르스타인(Hellerstein, 劉松齡)·고가이즐(Gogeisl, 鮑友管)과 서학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홍대용의 서학적 관심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주해수용 籌解需用』을 저술하여 서양 수학을 소개하였고, 자택에 혼천의(渾天儀)·자명종 등을 설치하고 서양의 천문과 시제(時制)를 연구하였으며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세 차례의 중국여행을 통하여 청나라 문화의 선진성과 서학의 실용성을 인식하고 청나라의 학문에 대한 연구, 즉 북학(北學)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 3. 서학실천기
    선조 말 이후 영조 말까지 약 150년간에 걸친 서학의 접촉과 서학연구의 결과는 정조대에 접어들면서 서학실천기를 맞게 된다. 정조 대의 서학실천의 노력은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활용의 주장과 그리스도신앙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서양 기술과 과학의 수용을 적극 주장하고 나선 것은 박지원(朴趾源)이었다.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북경에 사행하였을 때 청나라 석학과 교유하는 한편, 서양 성직자와도 서학을 논하였고 청나라와 유럽문명의 우수함을 직접 목도하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잔재주가 아니라 정신의 극치”로 여겨 마침내 “진정 국민 대중을 위하여 유익하고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오랑캐의 소산이라 해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청나라와 서양의 기술문명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지원은 서학의 일부인 천주교는 독소가 강한 것이라고 인식하면서도 과학·기술의 유용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서학의 이원적 이해의 입장에 섰다. 박지원의 뒤를 이어 박제가(朴齊家)는 서양인이 조난을 당해 조선에 표착하게 되면 그들로부터 선제(船制)와 그 밖의 기예(技藝)를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는 중국에서 전교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서양 전교 신부들이 이용·후생의 기술에 밝으니 그들을 조선으로 초청하여 천문·역산·의약·건축·조선·채광 등의 과학기술을 배워야만 한다고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폈다.
    또한, 천주교가 당옥설을 내세우고 있는 점은 불교와 같으나, 불교는 후생지구(厚生之具)의 기술이 없으니 천주교가 불교보다 생산성이 높다고 파악하였지만, 천주교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실학의 집대성자라 할 정약용도 널리 한역서학서를 구하여 이를 연구하였다.
    한때는 천주교를 가까이하였다. 그러면서도 서양의 기술문명에 식견을 지니고 이의 도입·활용을 적극 주장하였고, 그 자신이 직접 과학기술을 활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인간이 인간다운 점은 오륜(五倫)을 실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술을 소유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점에 있다는 새로운 인간관을 내세웠다. 또한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민생활이 유족해지기 위하여는 산업기술이 발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하여는 기술자를 우대하여 그들이 새로 생산기술을 연구, 개량하도록 뒷받침해 주어야 하며, 북경에 사람을 보내어 발달한 청나라와 서양 과학기술을 배워 이를 활용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중가(機重架)·활차륜제(滑車輪制)를 개량하여 수원성 축조에 활용하였고, 서양 종두법(種痘法)을 받아들여 이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주변 사람들이 북경에 갈 때마다 실용의 학문과 후생의 기술을 배워오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이상 북학을 통한 서양기술의 도입, 실용의 주장은 그들의 실학적 정신에서 우러나온 국부민안(國富民安)의 길을 찾기 위한 구체적 제안이나, 한편 이익 이후 연구되어온 서학의 성과가 축적됨으로써 생겨난 서학 수용의 실천적 역사전개였다.
    서학의 정신적 측면이라 할 종교적·윤리적 가치체계를 수용하여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은 천주교 신앙생활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이익의 학통을 받은 남인계(南人系)의 소장학자인 이벽(李檗)·정약전(丁若銓)·권철신(權哲身)·이승훈(李承薰) 등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 관계의 서교서(西敎書)를 연구하였다.
    1777년을 전후해서는 천진암(天眞庵)·주어사(走魚寺) 등에서 집단적으로 서학서를 토론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의견을 교환, 신앙의 길을 개척하였다.
    이승훈이 부연사신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갔을 때 그 곳에서 정식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고 귀국하자 그를 중심으로 1784년(정조 8) 서울에서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조선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한편, 이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이존창(李存昌)은 내포(內浦)에, 윤지충(尹持忠)·유항검(柳恒儉)은 전주에 교회를 창설하여 천주교신앙을 봉행하게 되었다.
    이들의 천주교신앙의 실천은 보유론적 해석을 토대로 한 천주교신앙의 수용이었으나, 그 뒤 거듭되는 수난을 겪으면서 보유론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신앙을 체득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교세를 확대하여 마침내는 중국으로부터 주문모(周文謨)신부를 맞아들였다.
    또한 서민의 교화를 위하여 교리서도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정약종(丁若鍾)의 『주교요지 主敎要旨』는 그 중의 하나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유교와 불교의 신앙세계를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조선사회 내부에 이질적인 종교체계인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1. 4. 서학점식기
    1800년까지 조선사회 내의 일부 선각자들에 의한 실학운동과 서학연구를 통하여 근대에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사회의 현실모순에 대한 통찰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정신이, 주체적 활동을 통하여 도입되고 연구된 서학과 상호작용하여 형성시킨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실학과 서학은 전통적 가치를 고집하는 벽이론자(闢異論者)와 위정당국자의 학문적 반격과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활동을 전개하여 한역 서구 과학기술에 대한 북학파의 주장이 생겨났고, 천주교 신앙의 실천과 교회의 창설을 보았다.
    서학에 대하여 온건한 교유책(敎諭策)을 써오던 정조의 죽음과 서학을 비호하던 채제공(蔡濟恭)의 사망, 순조의 즉위에 따른 반천주교적 성향을 지닌 벽파(僻派)의 득세로, 19세기를 맞이하면서 조선 서학은 점식기에 들어가게 된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전개되자 천주교회의 지도적 인물이 일소되고 교회활동은 잠행적(潛行的)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천주교 신앙이 양반층과 서민층으로 급속하게 전교되면서 전통적 신앙생활, 예속질서에 혼란이 초래되고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유교적 신분질서가 도전을 받게 되어, 국초 이래의 성리학적인 벽위정신(闢衛精神)이 발동되었다.
    이에 벽파의 반시파적정쟁(反時派的政爭)이 결부되어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는 사상적·문화적 차원에서의 척사와 정치적·문화적 차원에서의 쇄국의 결합에서 전개된 반서학운동의 일면이었다.
    이러한 집권세력의 정치적 의구심이 더욱 확고해진 것은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및 기해박해 때의 프랑스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함대가 조선에 나타났던 사건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쇄국양이(鎖國壤夷)의 정책은 더욱 굳어졌다.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1880년대 사상적 차원에서의 척사위정과 정치적 차원에서의 쇄국양이가 일체적으로 결합되어 전개되었다.
    지속적인 박해는 천주교세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서양 기술문명의 수용을 주장하였던 북학파의 서학열을 꺾어놓았고, 근대성의 맹아를 차단하는 결과만을 야기시켰다.
    신유박해로부터 시작된 철저한 천주교 혹은 서교금압정책으로 서교와 관련이 있는 근기학파의 신서학자(信西學者)들이 숙청됨은 당연한 귀결로서, 그들은 처형되거나 유형에 처해졌다.
    박해세력의 공격대상은 서교와 서교도들이었으나 박해의식의 경직, 확대에 따라 서학 도입을 적극 주장하던 북학파에게도 미쳤다. 당시 북학파의 홍대용은 이미 사망하였고 박지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칩거 중이었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康津) 땅으로 유배에 처해졌고 남아 있던 학자는 박제가뿐이었다.
    박제가는 1786년 「병오소회 丙午所懷」를 상소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을 위하여 서양인 오랑캐[夷]를 스승으로 삼고 그들의 선진문명에 대한 수용과 활용을 적극 주장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종교가 이 땅에 유포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서학의 필요를 상소하였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윤행임(尹行恁)의 배려로 북경에 사행하여 일시 안정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귀국 후 종성(鐘城)으로 유배당하였다. 이리하여 북학과 서학을 적극 수용할 것을 정책당국에 상소할 정도로 높아졌던 선각자들의 주장은 억압을 받으면서 좌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당국의 박해정책하에서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이라는 이름으로 백과전서적 학문활동을 폈던 순조대의 관료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자주채서(自主採西)의 개시통상(開市通商)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초야의 몰락양반학자인 최한기(崔漢綺)가 그의 독특한 기철학(氣哲學)을 통하여 서학을 이해하고 법제지선(法制之善)·기용지리(器用之利)·토산지량(土産之良)을 수용, 활용하기 위하여 통상의 문호개방론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책 속에서 맴도는 설계였고, 또한 초야 서생(書生)의 외침에 지나지 않아 서학의 전면 거부와 문화적 봉쇄의 흐름을 바꾸어놓는 힘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이들 이외에는 강력한 집권당국의 서학의 금압과 서교의 박해 기세에 눌려 조선 서학은 마침내 질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 전반의 벽이논리인 숭정학(崇正學)·벽사학(闢邪學) 의식은 전통적 유교가치체계 고수의 성격을 띤 것으로 서구적 가치체계에 대한 거부와 배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박해의 대상은 서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학 자체의 거부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서구 식민세력의 청나라 침범, 조선왕국에 대한 외국 성직자의 잠입활동과 이양선(異樣船)의 침략적 접근에 더욱 경직되어, 마침내 어양양이운동(禦洋壤夷運動)으로 격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학은 점차 소멸되어 마침내는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근대에의 대응을 위한 사상적·문화적 자생기반의 계기로 기대되던 실학마저 조락(凋落)을 면치 못하게 되어 18세기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개되려던 새로운 세계관은 충분히 발전되기도 전에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
서학은 실학과는 다른 뿌리에서 나타난 조선 후기의 선진적 학문활동이라기보다 오히려 실학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외래문명에 대한 적극적 자세에서의 학문활동이었다는 데 그 특색이 있었다.
서학에 힘쓴 학자들은 모두가 유교적 교양을 철저히 익힌 지식인으로서, 그들의 서학인식도 유교적 교양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신앙의 인식·소화조차도 보유론적 인식이며 수용이었던 점이 조선 서학의 한 특성이다.
조선 서학의 흐름은 결과적으로 서학의 전면 배격(安鼎福·愼後聃·李基慶의 흐름), 서학의 전면 수용(李檗·李承薰·丁若鏞의 흐름), 서학의 일면 수용, 일면 배격의 이원적 파악(洪大容·朴趾源·朴齊家 등 북학파의 흐름)으로 크게 대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초야의 실학자이거나 미직의 관료학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학문내용을 조선 후기 사회에 정착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근대성의 맹아가 서학의 흐름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서학과의 접촉과 연구를 통하여 전통적인 화이론적(華夷論的)인 세계관에 동요가 일어났으며 근대적 세계관에로의 개안이 진행되었다.
17세기에 도입된 한역 세계지도와 지리서를 통하여 중국 이외의 광대한 세계를 의식하게 되었고, 세계 각국에 대한 인문지리적 지식이 새로워지는 한편, 한역 천문서를 통하여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과는 다른 지구설·지동설이 수용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만이 정계(正界)가 아니라 세계 각국이 모두 정계일 수 있다는 균시정계(均是正界)의 사상이 받아들여, 전통적인 중화적 세계관의 기반을 이루던 화이지분(華夷之分)·내외지분(內外之分)과 춘추대의(春秋大義)의 명분론이 극복되면서 만방균시(萬邦均是)에 터전한 새로운 세계관이 수용되었다.
이러한 문화의식의 확대와 자주의식의 깨우침을 얻는 가운데 근대성의 사상적 맹아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선진된 서양 과학기술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어 합리적 실용과학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되었다.
북학파의 실학적 의식을 가진 선각자들은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활용을 적극 주장할 정도로 서양 과학기술의 유용성과 합리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의 수용을 위하여 서양인의 초빙까지도 주장하였다.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학문적 이해와 합리적 실용의 개방자세와 더불어 음양·오행을 골자로 한 성리학적 자연철학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도 근대성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서양 자연과학의 경험적 관찰 및 합리적 논리에 접하면서 유가의 음양·오행설에 의혹을 품게 되고, 자연구조원리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서양 과학의 주장을 받아들여 경험주의적 자연철학에 접근하게 된다.
한편 기술을 곧 인간의 본래적 특성으로 보고 삼강오륜의 도덕률과 더불어 사람과 짐승의 구별기준이 된다고 느꼈다는 점에서, 성명의리(性命義理)와 도학적(道學的)·샤머니즘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전통적 의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신이 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천주교신앙의 이해와 봉행을 통해 새로운 인간정신을 추구하게 된 점에 근대성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서학연구에서, 특히 서양의 종교·윤리체계에 끌리게 된 선각자들은 고유(古儒)의 상제사상(上帝思想)을 원용하여 정주학의 이신론적(理神論的) 인간당위론(人間當爲論)을 떠나 상제를 인격적 신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 현세의 부조리를 제도개폐나 산업진흥, 관기숙정에서 구하기보다 인간평등과 내세구원의 새로운 종교·윤리체계의 수용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이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여 마침내 교회를 창설하고 조직적인 천주교신앙의 실천봉행을 추진하였다. 비록 신적 질서(神的秩序)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 영생·구복적인 신앙운동이었으나 동시에 전통적 신분제·직업관·사회규제의 불평등을 극복할 원리의 수용이기도 하였다.
즉, 종교적 차원의 표현형태를 띠고 있으나 전통적 사회의 봉건적·윤리적·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가치체계의 수용이고 인간상의 추구이며, 나아가 근대 서양과의 연계를 가능하게 할 통로의 개설이라는 점에서 근대성으로의 접근을 예측할 수 있는 맹아적 역사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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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이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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