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접촉기는 부경사대사행원(赴京事大使行員)들이 북경에서 중국의 서학과 접촉하여,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이 도입되고, 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의 열독과 관찰로 서양과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는 시기이다.
북경에서 중국 서학과의 접촉은 소현세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에 파견되던 부경사행원에 의해 진전되었다. 병자호란의 정치적 인질로 북경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소현세자는 샬(Shall,A., 湯若望)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1644년(인조 22) 귀국할 때 여러 가지 서양 과학기술문물과 한역서학서를 그로부터 받아가지고 왔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서양 성직자들과의 접촉, 사천주당(四天主堂)과 흠천감(欽天監)의 견학,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의 도입의 주역을 담당한 것은 부경사행원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사대외교관계를 취하게 된 뒤 해마다 파견되던 외교적 사명을 띤 사신과 그 사신의 수행원들을 뜻한다. 정사·부사와 서장관과 정식 수행원들은 모두 선발된 인물들이기에 정치적 식견과 학문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북경에 들어가 머무르는 동안에 동서남북 네 곳의 천주당과 천문과 역산을 주관하는 기관인 흠천감을 방문하여 서양 성직자들과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모든 시설을 관람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중국 서학과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학문자료가 도입되었다.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연결되는 부경사대사행로(赴京事大使行路)는 대륙과 서양 선진문명 도입의 문화도관(文化導管)이었다. 바로 이 길을 통하여 서학과의 접촉이 약 1세기간에 걸쳐 진행된다.
그 최초의 사례는 1603년 이광정(李光庭)의 세계지도 도입이었다. 또한 1630년(인조 8) 진주사(陳奏使)로 사행한 정두원(鄭斗源)은 로드리케즈(Rodriquez,J., 陸若漢)와 만나 천문·역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천문·역산·지리에 관한 한역서학서와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 등 다수의 서양 과학기술의 이기류(利器類)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는 서양기술을 도입하여 이용해 보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서양 학술을 최초로 활용한 사람은 김육(金堉)이다. 김육은 1644년 관상감제조로 있을 때에 북경에 사행하였는데, 이 때 샬에 의해 제작된 시헌력(時憲曆)의 우수성을 알게 되어 관계서적 다수를 입수해가지고 귀국하여 조선에서도 서양역법을 토대로 한 시헌력을 채용하게 하였다.
조선의 선각적 관료들이 서양의 천문·역법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농업국가에 있어서 천문·역법의 사항이 제왕학(帝王學)으로 군주가 책임져야 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당시 조선사회에서 사용하던 수시력(授時曆)이 사실과 어긋나 혼란이 빚어지고 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필요에서였다.
김육과 달리 사행하기 전에 이미 서양의 천문학에 대한 학식과 우주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북경에서 서양인과 접촉한 것으로는 이이명(李頤命)의 예가 유명하다.
고부주청사(告訃奏請使)로 1702년(숙종 46)에 사행한 이이명은 북경에서 흠천감으로 사우레즈 (Saurez,J., 蘇霖)와 괴글러(Kogler,I., 戴進賢)를 찾아가 그가 품었던 의문을 질문하고 의견을 교환한 뒤 귀국할 때 여러 가지 한역서학서를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이와 같이 1세기 동안에 걸쳐 조선사회에 도입된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은 이제 서서히 많은 지식인들의 학문적인 관심대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즉, 많은 학자들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또는 학문적 호기심에서 한역서학서를 열독하였고 서양 과학기술문물을 관찰하여, 이해하기에 힘썼다.
이러한 노력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이다. 여기에는 이광정이 중국에서 들여온 한역세계지도와 한역서학서 가운데에서 가장 널리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에 대한 논평이 실려 있다.
논평의 내용은 세계지도가 매우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다는 것과 『천주실의』의 내용 편목(篇目)을 소개한 간단한 것이었다.
이수광과 같은 시대의 유몽인(柳夢寅)도 『천주실의』와 『교우론 交友論』 같은 한역서학서를 읽고 나서 『어우야담 於于野談』에서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의 전통종교와 천주교의 관계를 논하였다.
천주(天主)를 유교적 전통사회에서의 상제(上帝)와 같은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과 신부들의 불혼취제(不婚娶制)를 배격하며 천주교를 혹세의 이교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수광이나 유몽인의 서학서의 열독과 논평은 호기심에서의 접근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직도 서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숙종대의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이명은 부연하기에 앞서 본국에 있을 때 여러 가지 한역서학서를 읽어 그 나름대로 서양과학과 천주교에 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다가 부연사행의 기회에 서양 선교사들과 학문교류를 가졌던 것이다.
이상의 예로 알 수 있듯이 조선 중기의 선각적 지식인들은 부연사행의 기회에 북경에서 서양 성직자들과 직접적인 교섭을 가져 중국 서학과 접촉하였다. 또 한편으로 도입된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은 국내에서도 학문적 호기심을 일으켜 한역서학서와 서양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 의식세계의 폭을 넓히게 하였다.
한역서학서와 서양 과학기술문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종류와 양이 축적되었고, 이를 대하는 선각적 지식인도 그 수가 늘어나서 이해와 깊이도 심화된다. 18세기에는 실학사가 안정복(安鼎福)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역서학서는 선조 말부터 우리 나라에 흘러 들어왔고 명경(名卿)·석유(碩儒)도 이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나 도교와 불교의 서적과 같이 서재에 갖추어 두게 되었다.”
또한 뒷날 정약용(丁若鏞)이 “서학서를 구하여 탐독하는 일이 나의 청년시절의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실토할 정도로 서학서를 가까이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추세를 배경으로 마침내 이익(李瀷)에 이르러 조선 서학으로서의 학문세계가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