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은 대중, 매체로 연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호소력 있는 음악이다. 순수음악, 즉 예술음악이 아니어서 특별한 음악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이며,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공동체에 의해 향유되고 해석되는 민속·전통음악이 아니어서 공간의 제약 없이 익명의 대중이 향유하는 음악이다. 그 결과 오락성·상업성·유행성 등의 기본적 특징을 가진다. 20세기에 정착한 대량 생산·매개·소비되는 대량문화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우리에게 서양음악의 한 갈래로 19세기 말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대중음악은 현재는 K팝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속에서 환영받고 즐기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대중음악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파퓰러 뮤직(popular music)’의 번역어로 출발했다. 따라서 ‘대중적인 것(the popular)'이 무엇인가를 정의해야만 대중음악을 정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정의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일단, 대중음악을 ‘어떤 음악이 아니다’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첫째, 대중음악은 순수음악, 정확히 말하면 예술음악(art music)이 아니다. 예술음악이 전문적, 음악적 훈련을 받아야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음악이라면, 대중음악은 특별한 음악적 지식이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이다.
둘째, 대중음악은 민속음악이나 전통음악, 즉, 지역 공동체의 음악이 아니다. 민속음악이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공동체에 의해 향유되고 그 안에서만 그 의미가 해석되는 음악이라면, 대중음악은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익명의 대중에 의해 향유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상의 이유로 인해 대중음악은 오락성, 상업성, 유행성 등의 기본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되고 있다. 이는 각각 심미성, 진정성(예술성), 지속성 등에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대중음악의 역사는 더 오래 소급될 수도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 대중음악은 19세기의 기술적 변화가 20세기에 산업적으로 응용되면서 탄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녹음(sound recording) 기술이 대중의 오락(연예)을 위해 사용되면서 하나의 산업, 즉, 음악산업이 성립했다. 적어도 1930년대 이후 음악산업은 레코딩 산업(recording industry)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대중음악이라는 용어도 이 때 이후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녹음된 음원을 저장(storage)한 뒤 그 복제본(copy)을 만들고 이를 회수(retrieval)하는 실천을 산업적으로 통제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형태를 달리 하면서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음악산업의 기본 공식이다. 음악산업은 대체로 사적 기업으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대중음악은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의 기본적 논리를 근본적으로 무시하지 못한다.
그 점에서 대중음악은 현대, 정확히 말하면 20세기 이후 대량문화(mass culture)의 하나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대중음악은 대량생산되고, 대량매개되고, 대량소비되는 현대 대량문화의 일반적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결과 20세기 이후의 대중음악은 ‘음악산업에 의해 대량의 청중을 위해 배급되는 음악’이라고 재정의할 수 있다. 이는 대중음악이 악보, 무대, 방송 등 복합적 매개체(mediators)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음악은 여러 장르를 탄생시키고 특정 장르가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역사를 보이고 있다. 넓게 보아 20세기 전반기를 ‘재즈의 시대, 20세기 하반기를 ‘록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대중음악의 지배적 장르가 교체되는 현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주류 장르가 시간이 지나면서 비주류 장르로 변화되기도 한다. 하나의 장르에는 다수의 세부 장르가 있어서 그들 사이에도 복잡한 위계관계가 존재한다.
이렇듯 대중음악의 장르들 가운데 사회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을 가로질러 넓은 호소력을 갖는 경우를 ‘주류 장르(mainstream genre)’ 혹은 ‘인기 장르(popular genre)'라고 부르는 반면, 어느 정도 동질적인 사회문화적 집단 내부에서 호소력이 강한 경우 고유명사의 장르를 갖는다. 고전적인 예를 들면, 리듬앤블루스(rhythm&blues)는 ( 미국의) ‘흑인’ 음악, 컨트리앤웨스턴(country&western)은 (미국의) ‘시골’ 음악이라는 특정한 청중을 기반으로 했다. 후자의 경우 대중음악에 속하면서도 비주류, 대안, 얼터너티브, 언더그라운드 등의 기호를 가지고, 때로 주류의 상업주의에 반대하는 진정성(authenticity)의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또한 개별 장르에는 그 장르에 고유한 관습과 실천이 수반된다. 이는 장르가 단지 음악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 음악이 창작되고 실연(perform)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정의된다는 것을 뜻한다.
음악산업의 특징이 가장 먼저 확립된 나라가 미국과 영국이고, 영미 대중음악은 자국의 경계를 넘어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영미 대중음악은 팝 음악(pop music)이라고 압축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대중음악과 팝 음악을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대중음악(popular music)은 대중적 취향에 호소하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포괄하는 우산 범주(umbrella music)인 반면, 후자(pop music)는 통상 특정 시기의 특정한 음악 장르와 연관된다. 또한 팝 음악은 1950년대 중반 로큰롤(혹은 록)의 탄생과 더불어 청년 세대의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왔다.
영미 대중음악의 국제적 영향력을 영미 헤게모니(Anglo-American hegemony)라고 부른다. 이는 영미 대중음악이 세계 각지의 시장에서 배급되고 소비되는 경제적 비중에 국한되지 않고, 각국 · 각지에서 생산되는 대중음악의 형식에 보편적 어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 이후 영미권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음악에 대해서도 ‘○○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이 헤게모니와 무관하지 않다. 유로팝, 라틴팝, 제이팝(J-pop), 케이팝(K-pop) 등이 몇 가지 사례들이다.
한국에서 대중음악은 서양음악, 이른바 양악(洋樂)의 한 갈래로 소개되었다. 따라서 대중음악에 대한 담론에서는 현대성의 문제와 더불어 외래성의 문제가 종종 제기된다. 이는 한국에서 대중음악이 양악의 하나로 수입된 것이 19세기 말부터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대중음악의 초기 형식이 정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1920년대 말에 형성되어 1930년대에 확립된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는 당시 성립한 음반산업(혹은 레코드산업)에 의해 유행가(流行歌)라는 용어로 지칭되었다. 일본의 엔카[演歌]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유행가는 1930∼40년대를 거치면서 폭넓은 호소력을 지니면서 1960년대까지도 대중음악의 형식을 정의했다. 한때 ‘뽕짝’이라는 비칭(卑稱)으로 불리던 이 장르의 명칭은 1960년대 이후에는 트로트로 정착된다. 그렇지만 식민지 시기 유행가 외에도 신민요, 재즈송, 만요 등의 장르, 당시 용어로 ‘곡종(曲種)’이 존재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주장되고 있고, 이는 트로트가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로 확립되는 과정이 경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식민지 시대의 대중음악은 유성기 음반(SP음반)과 더불어 악극(樂劇)이나 가극(歌劇) 등의 무대예술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생산, 매개, 소비되었다. 악극 혹은 가극은 연출가, 작곡가, 가수, 악단, 무용수, 코미디언 등이 어우러져 무대에 올린 악극은 오페라 · 뮤지컬 · 신파극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종합무대예술이었다. 일제시대 조선악극단, 반도가극단, 랑랑악극단, 백조가극단, 라미라가극단, 남대문악극단 등으로 전성기를 누린 악극은 1945년 이후에도 KPK악단, CMC악단, OMC악단, 장미악극단, 남대문악극단, 뉴코리아 악단 등이 활동했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은 ‘무대가요’라는 용어가 실존했던 점은 초기의 대중음악이 무대에서의 실연을 매개로 대중에게 전파되었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유행가’ 혹은 ‘대중가요’, 혹은 ‘가요’는 유성기 음반뿐만 아니라 악극 무대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는 음악을 의미했다.
한편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량주둔하게 된 주한미군을 위한 무대가 탄생하고, 이를 ‘미8군 쇼 무대’라고 불렀다. USO(United Sevices Organization)가 조직한 쇼를 기초로 발전한 미8군 쇼는, 1950년대 중반부터 음악인을 비롯한 연예인이 미군을 위한 쇼를 수행하는 제도로 확립되었다. 미8군 쇼는 단순한 음악 공연이 아니라 노래, 무용, 코미디, 마술 등이 가미된, 이른바 ‘버라이어티 쇼(variety show)'의 형태를 취했고, 이를 위해 악단, 가수, 무용수, MC, 코미디언이 모두 포함된 단체, 이른바 ’쇼단‘을 구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베니 김(김영순)의 베니 쇼, 이봉조의 헐리우드 쇼, 최상룡의 서머 타임 쇼, 송민영의 토미아리오 쇼, 박성원의 블랙 아이스 쇼, 김희갑의 에이원(A1) 쇼, 김동석의 웨스턴 주빌리 쇼, 최태국의 스프링 버라이어티 쇼 등이 당시 활동한 미8군 쇼단들이었다. 미8군 무대는 1960년대 전반기에 전성기를 누리고 베트남전쟁이 발발하면서 쇠퇴했지만, 한국 대중음악에 깊은 영향을 행사했다.
196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대중음악은 악극무대(혹은 ‘일반무대’)에서 내국인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가요’와 미8군 무대에서 미국인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팝’으로 이원화되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몇몇 음악인이 미8군 무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국인을 대상으로 가요를 창작하고 연주하면서부터다. 1961년 손석우가 작사 · 작곡하고 한명숙이 부른 ‘팝(컨트리) 스타일의 가요’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기념비적 히트를 기록하면서, 가요와 팝의 구분이 이제는 가요 내부의 장르(혹은 계열)의 구분으로 전화된 것이다. 1960년대 가요의 두 갈래는 트로트 계열과 스탠더드 팝 계열로 구분되었고, 당시 용어로 전자는 ‘뽕짝조(調)’, 후자는 ‘재즈조(調)’라고 불렸다. 이는 각각의 요람이 일반무대와 미8군 무대로 이원화되었던 1950∼80년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팝 계열의 가요는 ‘방송가요’라는 형식의 출현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국영방송 KBS를 중심으로 추진된 방송가요운동은, 방송을 통해 전파되는 가요는 레코드나 무대를 통해 전파되는 상업가요와는 달라야 한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라디오와 TV 등 방송국마다 전속악단과 전속가수를 운영하면서 ‘밝고 명랑한 가요를 보급한다’는 정책 기조는 1957년 ‘국민개창운동’으로 본격화한 이래 몇 차례의 정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이는 뽕짝 혹은 트로트에 대해 ‘왜색가요’라고 비판하는 일련의 캠페인을 낳았다.
1964년 이미자가 부른 트로트 계열의 「동백 아가씨」(한산도 작사 · 백영호 작곡)가 기록적 성공을 거둔 사실에서 보듯 방송가요운동이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이는 당시 대중의 취향의 공간적 분할을 보여주는데 팝 계열의 가요가 도시공간에서 선호되었다면, 트로트 계열의 가요는 농촌공간에서 선호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양자의 구분이 적대적이지는 않았고 ‘대중가요’라는 큰 범주 안에서 조화롭게 성장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실제로 동일한 작곡가나 가수가 두 계열 모두를 창작하고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대는 팝 계열의 가요의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면서 세대별 취향의 분화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룹 사운드(록 음악)’와 ‘ 포크송’으로 대표되는 젊은 층의 음악은 대학생과 고등학생에 의해 적극 수용되어 1970년대 중반에는 대중적 장르가 되어 주류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975년의 ‘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대표적 작품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대표적 음악인들의 활동이 정지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어도 두 장르는 대중음악에서 청년시장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장르에 속하는 음악인들은방송 출연이나 음반 제작에서는 한국어 가사를 가진 음악을 창작하는 것이 지배적이었지만, 생음악 살롱이나 나이트클럽의 무대에서는 영어 가사를 가진 팝송을 원곡 그대로 연주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1980년대는 방송, 특히 지상파 TV의 파워가 가장 강력했던 시대다. 1980년 12월의 방송통폐합을 통해 두 개의 지상파 방송국만 존립한 조건에서 방송국의 쇼 프로그램은 대중음악의 매개의 절대적 조건이자 전국 각지의 대중이 음악을 향유하는 지배적 경험으로 정착했다. 1982년 통행금지 해제로 인해 야간유흥업소가 성행한 것, 경제성장의 효과로 음반 판매가 급증한 것, 휴대용 음악재생기(‘워크맨’)의 보급에 따라 가정을 벗어난 음악 청취가 보편화된 것, 영미의 ‘팝송’을 더 많이 듣던 젊은 세대가 ‘가요’를 더 많이 듣기 시작한 것 등이 1980년대를 거치면서 확립된 현상이다.
1980년대 주류 대중음악에서는 하나의 장르에 특화된 음악보다는 여러 장르를 고르게 소화하거나 혼합한 음악이 지배적이었다. 조용필, 전영록, 이문세 등의 남자가수, 주현미, 나미, 이선희 등의 여자가수 등은 지상파 TV에 자주 얼굴을 비추고 많은 음반을 판매하면서 당대의 스타의 지위를 누렸다. 이들 가수의 작품을 창작 · 연주하는 작 · 편곡가 및 연주자의 음악적 전문성, 그리고 음반 · 음원 녹음의 기술적 수준도 현저하게 제고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트로트, 발라드, 댄스라는 한국 대중음악의 대표적인 주류 장르가 확립되었다.
지상파 TV가 지배하는 주류 음악에 대항하여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성장한 것도 1980년대의 일이다. 주류 음악과는 대조적으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포크, 록, 블루스, 헤비 메탈, 퓨전 재즈 등의 영미 팝 음악의 장르에 충실하면서 예술적 진정성(authenticity)의 태도를 견지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지상파 방송의 음악 쇼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지 않았고 ‘가요’라는 호칭을 사양했지만, 음반 제작과 소극장 공연을 통해 활동했다. 사랑과 이별의 주제가 지배하는 주류 대중음악과 달리 자기성찰이나 사회적 비평을 담은 가사를 담고 있다는 점도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특징이다.
한국에서 대중음악의 현황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 초중반에 형성된 ‘신세대 댄스가요’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하는 일군의 젊은 가수 겸 댄서들은 댄스가요를 주류 장르로 정착시키고, 대중음악의 시장을 10대 위주로 재편했다. 이 시점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얼굴은 ‘아이돌’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대체로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국에서 아이돌은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했다. 아이돌은 음악인이나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잘 생긴 외모와 춤 실력을 바탕으로 여러 재능(talent)을 선보이는 예능인으로, 신흥 연예기획사에 의해 정교하게 제작되고 관리받으면서 활동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이 시스템은 더욱 정교화되어 엄격한 오디션을 받고 수년 동안의 훈련을 받는 연습생 제도로 발전했다. K팝(혹은 K-pop)이라는 새로운 호칭은 이런 새로운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이돌 시스템은 음악인(작곡가 · 연주인 · 프로듀서)이 활동하는 방식 전반을 변화시켰다. 컴퓨터를 비롯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보급이 가속화되면서 이를 이용하여 음악을 창작 · 제작하는 것이 보편화되면서, 이제 음악인은 작곡가와 프로듀서를 겸하면서 음악산업의 일부로 정교하게 통합되고 있다. 더 최근에는 유무선 통신산업( 인터넷과 모바일)이 음악산업과 융합되어 대중음악의 매개와 전파에 혁신이 발생한 것은, 이는 대중음악의 소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대중음악을 향유하는 지배적 경험은 더 이상 유형의 물체(디스크와 테이프)가 아닌 무형의 ‘파일’, 이른바 음원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 정규 음반(앨범)이 아닌 디지털 음원(싱글)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역설적으로 ‘라이브 음악’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도 최근 대중음악의 또 하나의 현황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서울 일부 지역에 밀집한 라이브 클럽에서 태동한 ‘ 인디 음악’은 대학생 세대의 취향에 호소하면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주류 댄스 음악의 강력한 대안으로 부상했다. 인디 음악 대부분은 스스로 음악을 창작하여 연주하는 밴드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독립 레이블(indie label)을 설립하여 음반 · 음원을 자가제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각종 음악 페스티벌이 성행을 이루어서 인디 음악이 더 많은 청중에게 전파되는 중요한 통로로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아시아권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초기에는 이른바 ‘ 한류(韓流)’의 한 부문으로 인식되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K팝(K-pop)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한류/K-pop이 세계의 상이한 지역에서 수용되고 의미화되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2012년에는 싸이(Psy)의 「강남 스타일」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뮤직 비디오를 통해 세계 음악산업의 중심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동시 히트하는 보기 드문 현상이 발생했다.
대중음악을 저급한 오락 정도로 취급하는 인식이 지배해 왔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대중음악은 상이한 인구집단의 정체성을 주조하고 형성하는 데 깊은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미쳐 왔고, 그 점에서 진지한 성찰과 조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대중음악이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대중음악 내부에서도 주류 대중음악의 상업적 성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대중음악 일부에서는 음악산업의 상업적 성격에 반대하여 예술성과 심미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대중음악은 일시적 유행 이후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근에는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명반’이나 ‘명곡’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실천이 나타나고 있다. 그 점에서 대중음악은 특정 사회구성원의 기억을 조직하고 공동체를 상상하는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