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시대의 정치는 크게 전기(성립기)와 후기(확립기·붕괴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무신정권의 전기는 독자적인 집정부(執政府)를 갖추지 못하고 전대의 왕권체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과도적인 정권이었다. 정중부는 왕권 체제 하의 관직인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이의민은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동중서 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들은 관직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동·서반(東西班)을 위압했고,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이들의 권력은 정치기구의 하나인 중방(重房)을 배경으로 행사되었다.
중방은 원래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좌기관이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 무신집권자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정사를 펼쳤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치 형태를 중방정치(重房政治)라 일컫는다. 중방정치는 무신들에 의한 일종의 합의제 정치를 말한다. 당시 합의제 정치가 행해진 것은 무신 집권자들이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추지 못해 확고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최씨정권이 성립되면서 그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무신정권의 후기는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춘 최씨정권이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인 독재체제의 확립은 곧 무신정권의 확립을 뜻하며,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되어 아들 최우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최충헌은 1196년(명종 26)에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였고, 조신(朝臣)들을 학살하였다. 또한 국왕에게 봉사 10조(封事十條)를 올려 정치·경제·사회의 혼란을 시정하도록 요청하였다. 이것은 최충헌이 1인 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인 것이다. 결국 최충헌은 명종과 신종을 연이어 폐하고, 희종을 세웠다.
1209년(희종 5)에 최충헌은 청교역리(靑郊驛吏)와 여러 사찰의 승려들의 암살시도를 겪은 직후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였다. 처음 교정도감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데에 이용되었으나, 뒤에는 비위의 규찰, 인사행정, 세정(稅政), 기타 서정(庶政)을 처리하는 데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 기구는 최씨정권기는 물론 김준과 임연 부자로 이어지다가 무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었다.
교정별감이 설치된 후 최충헌이 수장인 교정별감이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의 무신집권자들도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그 직책을 가지고 정치를 좌우하였다. 교정별감은 무신집권자로서 당연히 임명되었으나, 장군직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던 것 같다. 최충헌이 장군으로서 교정별감이 되었고, 최우 또한 장군으로서 부직(父職)을 이어서 교정별감이 되었다. 그 이후 최우의 서자(庶子)였던 최항이 세습하였다. 그는일찍 출가해 만전(萬全)이라는 이름을 얻은 선사(禪師)였으나, 1247년(고종 34)에 환속하여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이 되었으며, 이후에 교정별감이 되었다. 최의는 최항의 사생아로서 최항이 죽자 차장군(借將軍)이 되었다가 곧 교정별감이 되었다. 김준 역시 장군으로서, 임연·임유무 부자 또한 군직자로서 각각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교정도감에 버금가는 권력기구로 정방(政房)이 있다. 정방은 1225년(고종 12) 최우가 그의 사저(私邸)에 설치한 인사행정, 즉 전정(銓政)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 권력기구는 최우가 죽은 뒤에도 역대 무신 집권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무신정권이 몰락된 뒤에도 존속해 국가기관이 되었다. 이후 존폐 과정이 있기는 했으나, 지인방(知印房) 또는 차자방(箚子房)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다가 창왕 때 상서사(尙瑞司)로 개편되었다.
정방에 대해 『고려사』 최이전(崔怡傳)에 따르면, “백관이 최우의 사저에 가서 정안(政案)을 올리면 최우는 마루에 앉아 이것을 받고, 그때 6품 이하의 관리는 마루 아래에서 재배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올려보지를 못하였다. 최우는 이로부터 정방을 사저에 설치하고 문사(文士)를 뽑아 이에 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필도치[必闍赤]라 하고, 백관의 인사를 처리해 비목(批目)에 써서 왕에게 바치면 왕은 다만 이를 결재해 내릴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방의 설치 경위와 기능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일국의 인사 행정권을 장악한 것은 이미 최충헌 때에 있었다. 최충헌은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뒤 3년 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부지사(吏部知事)를 겸해 문무관의 인사에 깊이 관여했다. 또한 교정도감을 설치한 뒤에는 인사행정을 장악하고 독단하였다. 따라서 정방의 설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종전의 교정도감의 기능 가운데 인사행정을 분리 독립시켜 그것을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한편 무신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력이었다. 무력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이 더 효과적이다. 무신정권의 사적인 기구는 도방(都房)과 삼별초(三別抄) 그리고 마별초(馬別抄)를 들 수 있다.
① 도방은 원래 경대승에 의해 처음으로 설치된 사병집단이었다. 경대승이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자, 무신들은 경대승을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적의를 품었다. 이에 경대승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사대 백수십 명을 사저에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를 도방이라 하였다. 도방은 경대승이 죽은 이후에 폐지되었으나, 최충헌이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구가 되었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타도할 무렵부터 많은 사병을 양성해왔다. 그러나 1200년(신종 3) 그의 사병집단을 6번 도방(六番都房)이라 하여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의 하나로 제도화하였다. 이것은 아들 최우 때에 더욱 강화되어 내·외 도방(內外都房)으로 개편되었다.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저택을 호위하였고, 외도방은 친척과 기타 외부의 호위를 맡았다.
최항 때에는 분번제(分番制)를 더욱 확대해 36번으로 조직을 개편 강화하였다. 도방 36번은 최우 때의 내·외 도방을 통합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몽골과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도방 36번은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김준과 임연·임유무 부자에 의해 계승되었다가 임유무의 몰락과 함께해체되었다.
이와 같이 도방은 무신 집권자들의 사적 호위기관으로서 병력의 규모가 커서 36번의 분번 조직으로 구성되었고, 장비나 기동력에 있어서도 국가의 군대를 능가하였다.
② 삼별초는 최씨정권 때 조직된 사병집단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반관반사(半官半私)의 특수군대였다. 삼별초는 최우가 야별초(夜別抄)를 편성하여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밤에 순찰을 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도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이를 증강해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고, 거기에 몽골에 잡혔다가 도망 온 자들로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해 완성된 것이다. 완성 시기는 대체로 최항 때로 여겨진다. 삼별초는 최씨정권의 조아(爪牙)로 이용되었으며, 김준과 임연 부자에게 계승되었다. 이후 삼별초의 항쟁으로 발전되었으며, 결국 이것을 계기로 소멸되었다.
삼별초는 처음 밤에 도둑을 단속하는 임무였으나 차차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이 기구는 경찰 임무인 포도(捕盜)·금폭(禁暴)·형옥(刑獄)·국수(鞠囚)를 맡았고, 군사 임무인 도성(都城)의 수비를 비롯해 친위대(親衛隊)·특공대(特攻隊)·정찰대(偵察隊)·전위대(前衛隊)·편의대(便衣隊) 등을 담당하였다. 특히 몽골에 대한 삼별초의 항전은 주목된다. 고려는 몽골과의 항전에서 처음 정부군의 활약이 두드려졌으나, 이후 정부군을 대신한 삼별초의 항쟁이 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주체성 발휘에 있어서 높이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사병이라기보다는 관군적인 성격이 더 크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③ 마별초는 최우가 몽골 기병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기병대이며, 최씨정권의 호위 및 의장대로 활약해오다가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소멸되었다. 최씨정권은 도방·삼별초·마별초 이외에도 가병(家兵)이라는 사병을 거느렸다는 주장이 있다. 최충헌의 생질인 대장군 박진재(朴晋材)가 거느렸던 문객(門客), 신종 때 최충헌이 거느렸던 시종(侍從)과 문객 3,000명, 1223년(고종 10) 최우가 개성의 나성(羅城)을 수축하는데 동원한 가병, 1233년(고종 20) 서경에서 홍복원(洪福源)·필현보(畢玄甫)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최우가 보낸 가병 3,000명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병이 도방·삼별초·마별초 등과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했다.
무신정권의 특수한 호위 기관으로 서방(書房)이 있었다. 서방은 최씨정권기에 이루어진 권력기구의 하나로서,1227년(고종 14) 최우에 의해 만들어져 임유무 때까지 지속되었던 숙위기관(宿衛機關)이다. 『고려사』 최이전에 따르면, “최우의 문객 가운데는 당대의 명유(名儒)가 많아 이들을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서방에 숙위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최우는 문객 가운데 무사를 도방에구성하였고, 문사를 서방에 구성하였다. 이처럼 문사들을 숙위하도록 한 것은 그들을 우대 포섭하겠다는 뜻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고사(故事)에 밝고 식견이 높은 그들을 고문(顧問)에 등용함으로써 정치에 활용하고자 했던 데에 있었다. 따라서 문사들은 무신정권 수립 이래 최우 때에 이르러 정방이 설치되고 서방이 설치됨으로써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서방은 3번의 분번제로 편성되어 도방·삼별초 등과 더불어 새 집권자 추대에 참여하기도 하고, 최씨정권이 타도된 뒤 왕의 행차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한편무신정권기에 정치적으로 크게 주목되는 것은 문신의 지위이다. 무신정권은 성립과정에서 문신들을 대량 학살했으나, 그들이 표방한 것과 같이 문신들을 전멸시키지는 못하였다. 문신들이 비록 무력에서 열세였지만 그들이 쌓아온 세력기반이 전멸을 당할 정도로 허약하지 않았다. 무신들이 정변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한 이상 필요 이상의 만행은 바람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살을 모면한 문신들은 정치에서 추방을 당했다.
반면 무신정권기에 무신들은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능력적인 면에서 열악했고 정무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이에 무신정권은 정무 수행을 담당할 새로운 문신을 활발히 등용하였다. 당시 문신 계층은 무신정권과 타협할 수 있는 구문신(舊文臣) 계통과 향리 또는 중앙의 이속(吏屬) 등을 상대로 과거를 통해 등용하는 신진문신들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일부였고, 후자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무신정권기에는 이전 문신귀족 정치시대에 비해 과거 급제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를 보면, 문신 등용시험인
대업(大業)주 01)에서 문신 귀족정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예종·인종·의종 3대 65년간에 비해 시행 횟수나 급제 인원이 무신정권기에 오히려 상회한 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과거가 베풀어진 상황을 통해 무신정권시대에 새 문신층이 활발히 등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최씨 정권기는 정방과 서방을 설치하고 문인을 우대 포섭함으로써 저명한 문사들을 배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