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은 왕과 왕비의 분묘(墳墓), 원은 왕세자 · 왕세자비 · 왕세손 · 왕세손비 및 왕의 생모인 빈(嬪)의 분묘, 묘는 빈 및 왕자 · 공주 · 옹주의 분묘를 이른다.
신라 때 제릉(諸陵)에 수호(守戶)가 있었고 고려 때도 제릉서(諸陵署)를 두어 능을 관리하였으나, 그 부속 토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능역(陵域)을 정하고, 그 외곽에 산림금양지(山林禁養地)와 방화지(防火地)로 화소(火巢)를 두었다.
성종 원년에 "수호군절급전(守護軍折給田)"이라는 기록에서 능의 부속 토지가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능 · 원 · 묘의 관리를 위해 능을 관리하는 수호군과 보인(保人)에게 부역을 면해 주는 동시에 위전(位田)을 지급하였다. 본래 위전의 지급 액수가 법적으로 정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각 능이 실제 보유한 액수는 일정하지 않은 듯하다. 1729년(영조 5)에 마련된 「비변사제아문전답출면세별단면세질(備邊司諸衙門田畓出免稅別單免稅秩)」에 의하면 각 능위전에 대해 80결까지도 면세를 허용하고 있다. 이후 정조 연간에 수호군의 급복 및 위전의 액수를 일정하게 하려는 조처가 있었다.
가령 1777년(정조 1)에 예조에서 능원묘위전은 건원릉(健元陵)의 예에 따라 80결이 정식이므로 광릉(光陵)은 7결 97부, 명릉(明陵)은 20결, 소녕원(昭寧園)은 57결, 의소묘(懿昭墓)는 266결 97부 7속을 감하고, 감한 액수는 예조에 속하도록 하자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왕은 광릉 · 명릉은 결수가 크게 넘어서지 않았으니 그대로 두고 소녕원 · 의소묘는 시정하도록 하였다. 이후 1785년에 편찬된 『대전통편』에는 각 능위전은 80결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또한 정조 연간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위전의 규모가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덕릉(德陵)과 안릉(安陵) 17결, 지릉(智陵) 14결, 숙릉(淑陵) 15결, 의릉(義陵) 21결, 순릉(純陵) 17결, 정릉(定陵)과 화릉(和陵) 14결, 건원릉 87결, 재릉(齋陵) 35결, 정릉(貞陵) 무(無), 후릉(厚陵) 무, 헌릉(獻陵) 58결, 영릉(英陵) 180결, 현릉(顯陵) 29결, 장릉(莊陵) 무, 사릉(思陵) 무, 광릉 87결 97부, 경릉(敬陵) 36결 56부, 창릉(昌陵) 43결 60부, 공릉(恭陵) 34결 19부, 선릉(宣陵) 무, 순릉(順陵) 무, 정릉(靖陵) 무, 온릉(溫陵) 무, 희릉(禧陵) 31결 51부, 태릉(泰陵) 61결 51부, 효릉(孝陵) 50결 1속, 강릉(康陵) 42결 77부, 목릉(穆陵) 무, 장릉(章陵) 34결, 장릉(長陵) 30결, 휘릉(徽陵) 6결 20부, 영릉(寧陵) 무, 숭릉(崇陵) 2결 68부, 명릉 100결, 익릉(翼陵) 50결, 의릉(懿陵) 80결, 혜릉(惠陵) 무, 원릉(元陵) 50결, 홍릉(弘陵) 70결, 영릉(永陵) 28결 94부, 영우원(永祐園) 40결 75부, 순강원(順康園) 50결 45부, 소녕원 80결, 수길원(綏吉園) 무, 순회묘(順懷墓) 무, 소현묘(昭顯墓) 무, 민회묘(愍懷墓) 무, 의소묘 80결 등이다. 순조 연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위전이 2,018여결에 달한다고 하였다.
위전은 능의 부근에 있는 경우도 있으나 멀리 떨어져 있거나 여러 곳에 산재해 있기도 하였다. 대체로 경기도 일대의 토지가 지급되었으나 황해도 · 평안도 · 전라도 · 충청도 등지에도 보인다. 1776년의 경우에는, 경기에 832결, 충청도에 26결, 전라도에 280결, 경상도에 347결, 황해도에 284결이었으며,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위전의 수조(收租) 액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유토궁방전(有土宮房田)의 경우처럼 한 부당 조(租) 2두로 정해진 듯하다. 유토궁방전이란 조선 후기에 내수사 또는 궁방이 보유한 토지를 가리키며, 출세결(出稅結)과 면세결(免稅結)로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