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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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10년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 · 정미칠조약 체결 ·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내용 요약

정미의병은 1907년∼1910년 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칠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이다. 해산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은 규모와 전력 면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유생 이외에 평민·천민 출신 의병장이 대거 등장하는 등 상인·공인·노동자·농민 등 전 계층이 의병항쟁에 동참하였다. 1908년 초에는 전국의병진의 연합에 의한 서울진공작전이 추진되어 동대문 밖 30리까지 이르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특히 호남에서의 의병항쟁이 치열했다. 대규모 의병항쟁으로서는 마지막 항쟁이다.

목차
정의
1907∼1910년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 · 정미칠조약 체결 ·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내용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무능한 순종을 즉위시켜 한국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력저항세력을 제거하였다.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소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은 규모면 · 전력면에서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장을 하여 거국적인 의병항일전인 정미의병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해산군인들은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진 당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먼저 8월 2일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군인들이 일제히 무기고를 점령한 뒤 그곳 주1과 합세하여 원주시를 장악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여주주대(驪州駐隊) 군인들도 이튿날 본대에 합류하였다.

다음으로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군인들이 8월 10일 대일항전에 나서 한때 강화성을 장악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각처로 분산되었다. 이밖에도 홍주분견대는 집단탈영을 시도하였으며 진주진위대도 봉기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각처에서 봉기한 해산군인들은 이후 각자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일전의 주축이 되었다.

정미의병의 전국적 활동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민긍호(閔肯鎬) · 박준성(朴準成) · 손재규(孫在奎) 등 원주진위대 해산군인들은 각자 의병진을 편성, 강원도 · 충청북도 ·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강년(李康秊)신돌석(申乭石) 등은 경상북도 북부일대에서 각각 항일유격전을 펼쳤다.

다음으로 경기도에서는 허위(許蔿)연기우(延基羽)를 부장으로 하는 강화분견대 군인들을 포섭하여 임진강유역의 포천 · 연천 등지에서 강력한 항전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호남지역에서는 기삼연(奇三衍)이 장성에서, 전해산(全海山)이 나주에서, 김태원(金泰元) · 심남일(沈南一)은 함평에서, 문태수(文泰洙)는 무주에서, 이석용(李錫庸)은 임실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문태수 · 이석용 의병진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종종 경상남도 안의 · 거창 방면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접경지를 중심으로 한 공주 · 회덕 · 연산 · 진잠 등지에서는 김동신(金東臣)이 유력한 의병진을 편성, 활약하였다.

한편, 북한지역에서도 이 시기에 들어와 의병항일전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황해도에서는 박정빈(朴正彬) · 이진룡(李鎭龍)이 주축이 되어 평산에서 봉기하였고, 평민출신 김수민(金秀民) 의병진이 경기도 장단에서부터 황해도 서흥일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평안도의 경우에는 김여석(金汝錫) 의병진이 덕천 · 맹산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채응언(蔡應彦)은 함경도 · 평안도 접경지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함경도 의병항일전은 홍범도(洪範圖) · 차도선(車道善) 등이 삼수 · 갑산 등지에서 산포수와 광산노동자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최재형(崔在亨)은 경원에서 이범윤(李範允) · 엄인섭(嚴仁燮) ·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의병진을 편성, 일본군과 신아산전투(新牙山戰鬪)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함에 따라 1908년 초 이인영(李麟榮)을 주축으로 전국의병진의 연합에 의한 서울진공작전이 추진되기까지 하였다. 원주에서 봉기한 이구재(李求載) · 이은찬(李殷贊) 등의 추대로 관동의병장(關東義兵將)이 된 이인영은 전국의병진의 연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보냈다. 이에 호응한 각 도의 의병들이 양주의 대진소로 모여들면서 총 48진, 1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결성,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하였다. 1908년 1월 허위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후속부대와의 연락이 단절되면서 패퇴하고 말았다.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되면서 여러 의병들은 분산, 독자적인 항일전을 수행해갔다.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항쟁이 보다 격화되어가자, 일제는 야만적인 초토화작전을 전개, 의병활동지역 안의 촌락들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대량 살육함으로써 의병항일전의 근원을 봉쇄하려 하였다.

특히, 후기로 접어들면서 호남일대의 의병 항쟁이 치열해지자,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에 걸쳐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대공세를 펼쳤다. 그 결과 정미의병은 1909년 후반기부터 점차 예기가 꺾여 1910년을 지나면서부터는 전면항일전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정미의병은 이전 의병에 비해 다음과 같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첫째, 의병진 성원이 다양해진 점이다. 유생 이외에도 해산군인 · 평민 · 천민의병장 등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 · 공인 · 노동자 · 농민 등 전 계층이 의병항일전에 동참함으로써 전면항일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둘째, 해산군인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무기와 편제가 정예화되어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의병주도계층이 다양해짐에 따라 의병진이 점차 소규모화, 다원화되어 산간지대를 근거로 하는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넷째, 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명맥을 이어오던 정미의병은 점차 북상, 남북만주 · 연해주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항전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리하여 1920년대의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군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의병운동사』(김의환, 박영사, 1974)
『의병과 독립군』(윤병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독립군운동사연구』(박성수, 창작과 비평사, 1980)
「반일(反日)의병의 역사적전개」(강재언, 『한국근대사연구』, 한울, 1982)
「大韓帝國期 義兵硏究」(朴敏泳, 한울아카데미, 1998)
「義兵의 抗日戰」(尹炳奭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9, 1984)
주석
주1

민간인으로 구성한 부대. 또는 그 구성원.    우리말샘

집필자
윤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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