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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政治)

정치개념용어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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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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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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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한국의 정치는 전통시대의 정치와 근대의 정치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대원군 집권을 경계로 하여 이와 같은 구분을 할 수 있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시작하여 그 시기에 미치는 전통시대의 정치는 주로 왕조체제(王朝體制)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대원군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정치는 문호개방에 수반하는 외세의 개입과 그에 대한 대응 속에서 서구(西歐)의 새로운 사조에 힘입어 민족주의·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전개되어 온 것이다.
전통시대의 정치를 역사적으로 살피면서 유의하여야 할 바는, 첫째로 시대구분에 있어서 왕조를 중요한 단위로 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사를 통하여 일반적인 시대구분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도 기인하지만, 그보다도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가벼이 할 수 없다는 점에 보다 큰 이유가 있다.
둘째로 정치의 역사적 전개란 정치권력의 흐름을 뜻하는만큼, 정치권력을 정형화(定型化)시키는 통치체제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통치체제는 그것을 성립시키고 주도해 간 지배세력의 성향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는 점에서 통치체제는 지배세력과의 상호관계라는 안목에서 살피려고 하였다.
셋째로 정치적 추이(政治的推移) 속에서 왕조의 교체라든가 그 밖의 중요한 정치적 변란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변혁들까지도 포괄시키는 견해를 취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역사적 전개와 긴밀한 관계를 지니는 정치사상(政治思想)의 문제는 여기에서 논외로 하였다. 또한, 정치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대외관계에 대해서도 서술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한편, 근대의 정치는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침입을 당하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정치상황에 진입하여 전개되는만큼, 다소 관점과 방법을 달리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대의 정치
  1. 1. 국가의 형성과 발전
    한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정치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농경활동이 활발해져서 경제생활에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고, 정복활동이 본격화됨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부족장(部族長)의 지배적 위치가 부각되어 갔다.
    그리하여 신석기시대의 원시공동체사회는 해체되고, 새로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사회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부족장의 후예들이 새로운 정치사회의 지배자로 대두된다고 생각되며, 청동제무기와 지석묘는 바로 그들의 권위와 지배권력을 말해 주는 귀중한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권력의 발생과 정치사회의 성립에 따라 나타나는 최초의 국가형태를 흔히 성읍국가(城邑國家)라고 부른다.
    그것은 당시 정치적 지배자가 구릉지대 위에 토성(土城)을 쌓고 살면서 성 밖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몇 개의 읍락(邑落)의 농민들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연대상으로는 보통 청동기시대의 개시시기로 잡는 기원전 10세기까지 거슬러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성읍국가로서 역사기록에 전하는 존재로는 고조선(古朝鮮)을 비롯하여 부여(夫餘)·예맥(濊貊)·진국(辰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정치형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조선사회의 일면을 말하여 준다고 여겨지는 단군신화에 의하면, 그 정치적 지배자는 제사를 아울러 담당하는 제정일치적 존재(祭政一致的存在)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었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의 보좌를 받았는데, 이들은 뒷날 고구려의 대가(大加) 밑에 있었던 가신(家臣)인 사자(使者)·조의(皂衣)·선인(先人) 등에 비견된다.
    한편, 뒷날의 연맹왕국(聯盟王國) 단계에 이르러, 위씨조선(衛氏朝鮮)에서는 상(相)이나 경(卿),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가(加), 삼한에서는 신지(臣智)나 읍차(邑借)라는 명칭으로 나타나는 자들이 성읍국가 지배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읍국가는 일정한 필요성과 계기에 따라 몇 개가 연합하여 보다 큰 단위의 정치조직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연맹왕국이라는 것이다.
    약탈과 전쟁이 거듭되고, 철기문화(鐵器文化)의 보급으로 경제생활에 일대변혁이 나타나는 등, 외적·내적 요인에 의하여 성읍국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국가조직의 확대 발전으로서의 연맹왕국의 성립에 도달하는 존재로서 고조선·부여·고구려 및 삼한을 들 수 있다.
    연맹왕국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자연히 정치체제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왕(王)의 등장이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에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부여는 1세기에 왕의 명의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바 있으며, 역시 1세기 초에 왕망(王莽)과 대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고구려의 후(侯)도 왕의 성격을 지닌다고 여겨진다.
    사회발전이 약간 뒤지는 남쪽의 삼한의 경우, 왕이 대두하는 것은 2세기 말로부터 3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의 일이다. 이렇게 등장하는 왕은 궁실에서 살면서 높은 정치적 지위를 누렸고, 그 명의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연맹왕국은 성읍국가시대의 소박성을 탈피하고, 본격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기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연맹왕국 단계에서 권력의 집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왕은 연맹장(聯盟長)의 성격을 지닐 뿐이었다.
    연맹왕국을 구성하는 성읍국가의 독자성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따라서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 스스로의 가신을 거느리고, 읍락의 유력자인 호민(豪民)을 매개로 농민인 하호(下戶)를 지배하였다.
    부여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의 제가는 성읍국가의 기반을 가진 존재들이며, 이들이 선출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왕은 흉년이 들면 갈리거나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5부족의 우두머리인 대가들은 왕과 마찬가지로 가신을 거느렸고 죄인이 생기면 이들이 협의하여 처벌하였다. 이처럼 연맹왕국체제 아래에서 사실상 정치적 실권과 경제적 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성읍국가의 지배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맹장으로서의 왕의 출현은 국가조직의 확대 강화와 권력의 집중화라는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방향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곧 이어서 왕권이 강화되면서 연맹왕국의 변질이 이루어지게 된다.
  1. 2. 삼국의 귀족정치
    느슨하였던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조직은 권력의 집중화 경향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북쪽에서 고구려가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고 남쪽에서 삼한으로부터 백제와 신라가 대두하여 삼국의 정립으로 나아가는 추이 속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이 무렵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내적인 결속과 일원적인 국가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맹왕국을 형성하던 성읍국가의 독자성은 점차 소멸되고 연맹장의 성격을 지니던 왕이 통치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게 됨으로써 연맹왕국체제는 새로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종래 성읍국가의 지배자는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되었다. 이때 통일적인 국가체제를 뒷받침하여 주는 정신적 지주로서 불교가 수용되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은 율령(律令)의 반포로 일단락되었다. 우리 나라 고대의 율령은 모두 일실되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 자체가 국가의 통치를 규정하는 성문법(成文法)의 성격을 띠는 것이 분명한 만큼, 이 단계에서 고대의 국가체제는 완비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371∼384) 때에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백제는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근초고왕(346∼375) 때에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체제를 갖추고, 이어서 침류왕 1년(384)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에 이르러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까지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4세기 중엽 이후 6세기 초엽에 걸쳐 완비되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왕과 귀족이었다.
    물론 왕실이 고정되고, 왕위는 부자상속에 따라 계승되었으며, 그 정치적 권능이 확대되는 등 왕권이 뚜렷이 강화되었지만, 이와 같은 왕을 보좌하면서 때로는 견제의 구실을 하였던 귀족들의 존재가 중요하였다.
    그들은 종래 그 자신이 지녔던 독립세력으로서의 강약대소(强弱大小)의 위치에 따라 일정한 신분의 귀족적 특권을 보장받게 된 사람들로서, 특정한 가문을 단위로 존재하면서 중앙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었지만, 그 지배층을 이루는 것은 왕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귀족이었다고 하겠다.
    이들 귀족의 존재는 고구려의 경우 14관등(官等)의 체계 속에 그 원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으며, 백제는 유명한 8성(姓)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라의 골품제가 이 시기의 귀족제를 가장 잘 알려준다.
    최고의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그리고 육두품(六頭品)·오두품(五頭品)·사두품(四頭品)에 걸친 신라 귀족층은 각기 혈연을 기반으로 가문별로 존재하면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성골은 곧 소멸되었고, 진골이 정치면이나 군사면에서 절대적 우위를 독점하는 지배세력으로서의 귀족적 지위를 향유하였다.
    귀족들은 중앙의 관부(官府)들, 이를테면 백제의 6좌평(佐平)이나 내관(內官) 12부(部)와 외관 10부(部), 신라의 병부(兵部)·사정부(司正部)·품주(禀主)·위화부(位和府)·예부(禮部) 등이 행정사무를 분장하면서 국가의 통치를 구현시켰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의 실제는 관료적인 관부보다는 합의기구(合議機構)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수상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이 선출하였고, 백제에서는 재상을 정사암(政事巖)에서 투표하여 임명한 것으로 해석되는 사례들이 합의제를 시사하여 주지만, 신라의 화백(和白)이 그것을 가장 뚜렷이 알려준다.
    진골 귀족 출신의 대등(大等)을 구성원으로 하는 합의체인 화백은 왕위계승·선전포고·불교승인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였는데, 상대등(上大等)을 의장으로 하는 이 회의는 만장일치제의 원칙에 따랐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정치가 전개되는 양상은 한결같지 않았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나 신라의 진흥왕과 같은 영주(英主)가 나타나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 대대적인 영토팽창을 이룩하는가 하면,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명문귀족 출신으로서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취임하여 무단적인 독재정치를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에 밀려 공주에 천도한 백제에서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문주왕이 귀족들에게 시해당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갖추어져서 온 나라의 토지와 인간에 대한 일원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왕의 권한은 합의체제를 통하여 구현되는 강력한 귀족세력에 의하여 일면 뒷받침되고, 일면 견제당하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정치형태였다.
  1. 3. 통일신라의 전제왕권
    삼국은 각기 귀족정치를 펼쳐 나가면서 대외정책에 큰 힘을 기울였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민감하였고, 중국과의 무력충돌도 거듭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삼국 상호간의 관계는 항상 미묘하고 유동적이었다.
    삼국이 어떠한 공통의 유대의식을 지녔다는 확증은 쉽사리 찾아지지 않지만, 언어가 통하고 긴밀한 교섭이 거듭되는 가운데 막연하게나마 중국이나 일본과는 구분지어 친근한 존재로서 상대방을 이해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그와 같은 친근감보다는 삼국 가운데 누가 통일을 이룩하고 패권을 차지할 것인가가 절실한 문제였고, 그 때문에 대립과 전쟁이 줄곧 계속되었다.
    마침내 당(唐)과 손잡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대두되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백제 공벌, 고구려 공벌,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라의 당군(唐軍) 격퇴(712)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였다.
    신라의 정치적·사회적 발전을 토대로 김춘추(金春秋)의 능란한 외교활동과 김유신(金庾信)의 탁월한 군사전략이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건국하여 만주지역을 차지하기 때문에 통일신라의 북방경계선은 대동강(大同江)과 원산만(元山灣)을 연결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랫동안 독립적 전통을 지니고 분립되어 온 삼국을 합쳐서 하나의 통일적 국가체제를 이룩하게 하고, 한국민족이 한덩어리가 되어 발전할 수 있는 위대한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는 의미에서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는 북쪽의 발해를 고려할 때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었던 시기로 이해되지만, 통일신라의 영토와 주민 및 그 문화가 한국사의 주류를 이룬다는 점은 명확하다고 하겠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통치체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관대하게 포섭하면서 그 귀족들은 약간 격을 낮추어 골품제 속에 일정한 신분층으로 편입시켰고, 그들 다수를 소경(小京)에 이주하게 하였다. 종전에 비하여 크게 늘어난 영토와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개편, 9주5소경제도를 확립시켰다.
    그리하여 통일신라의 지방통치는 크게 강화되어 모든 촌락의 구석구석에 그 행정력이 미치게 되었던 것인바, 근래 일본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8세기 중엽의 신라 장적(帳籍)이 이를 알려준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전제왕권의 성립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루어질 무렵 김춘추는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데(태종무열왕), 이것은 상례에서 벗어난 큰 변혁이었다. 그 이후 통일사업이 완수되고 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전제화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진골인 태종무열왕에 뒤이어 그의 자손이 연이어 즉위함으로써 새로운 신라 중대(中代)의 왕통이 시작되었고, 바로 그 자손인 문무왕(661∼681)과 신문왕(681∼692)은 무자비한 귀족숙청을 통하여 세력기반을 굳혀 나가는 한편, 김씨(金氏) 안에서의 근친혼(近親婚)으로 권력의 배타적 독점을 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화백회의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결국 강력한 왕권이 대두, 전제왕권의 확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왕권의 성립에 대응하여 관료제(官僚制)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 말기에 품주로부터 개편, 신설된 집사부(執事部)는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대두하여 강력한 왕권의 행사를 뒷받침하였는데, 그 장관인 중시(中侍)는 진골 출신이지만, 임기가 3년으로 왕의 대변자 구실을 하는 관료적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 차관인 시랑(侍郎)은 특히 유교(儒敎)의 식견을 갖춘 육두품 출신의 관료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병부·조부(調部)·창부(倉部)·예부·승부(乘部)·사정부·선부(船部)·위화부·좌우이방부(左右理方部) 등의 중앙관부는 대개 삼국시대부터 있어 온 것들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관원조직이 확장되고, 관원수가 증가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중·하층의 신라관료는 상당한 수에 이르렀고, 그들 가운데 다수는 육두품 출신 유학자 관료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전제왕권은 진골귀족세력에 대한 통제 강화를 위하여 이들 육두품세력과 결탁, 유교적 정치이념을 표방하려 하였고, 이와 같은 상황 아래 국학이 설치되고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전제왕권 체제하에서 신라는 성덕왕(702∼737) 때에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기운은 경덕왕(742∼765) 때까지 계속되어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과 같은 위대한 문화적 업적을 낳았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부터 신라 전제왕권은 동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귀족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중앙관부의 명칭과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친 한화정책(漢化政策)이 이루어지지만, 바로 다음의 혜공왕(765∼780) 때에 이르러 귀족들의 반란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한화정책은 취소되고 끝내 왕은 시해당하는 것이다.
    뒤이어 선덕왕(780∼785)이 즉위함으로써 신라 하대(下代)가 개막되며, 이것은 전제왕권의 시기가 끝나고 진골 귀족들의 연립정치에 의한 신라쇠망기에의 진입을 뜻한다. 이와 같은 변화의 추이 속에서 골품제에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사회 질서가 배태되고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려시대의 정치
  1. 1. 고려의 성립과 문벌귀족정치의 전개
    약 150년에 걸친 신라 하대는 정치적 혼란기였고, 시회적 격변기였다. 이때의 혼란과 격변은 골품제의 한계와 모순을 노정시키는 것이었다.
    혈연관계를 기반으로 신라사회의 구성원리·운영원리로 기능하여 온 골품제는 더 이상 유용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왕위쟁탈전의 주인공인 진골 귀족 대신 지방 출신의 호족(豪族)이 새로이 역사의 주역으로 대두하고 있었다.
    해상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부(富)를 축적하거나, 군진세력(軍鎭勢力)을 배경으로 대두하거나, 또는 촌주(村主)로서의 토착적 기반으로부터 성장한 이들 호족은 약화된 신라의 통치력을 부정하고, 실제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독립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독자적 군사력과 행정기구를 지닌 그들은 성주(城主) 또는 장군(將軍)으로 자처하였다. 이러한 많은 호족들 가운데 하나인 왕권(王建)이 고려를 건국하고 새로운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그에 앞서 9세기 말의 농민반란을 계기로 반신라적인 견훤(甄萱, 892∼935)의 후백제와 궁예(弓裔, 901∼918)의 후고구려가 세워짐으로써 후삼국 시대라는 일대내란기가 개막되었는데, 후고구려, 즉 태봉(泰封)으로부터 고려를 일으킨 왕건(918∼943)이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공벌하여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것이다(936).
    왕건은 송악(松嶽) 사람으로 선대부터 해상활동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인근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전형적인 호족 출신이었다.
    그는 송악과 마찬가지로 옛 고구려 땅이었던 패강진(浿江鎭)을 비롯한 근기(近畿)지역의 여러 지방 출신의 세력들을 다수 규합하였고, 생민(生民)의 구제를 외치면서 가렴주구를 금지시켰고 서경(西京)을 설치,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다.
    커다란 혼란과 격변의 시기는 이처럼 새 지배세력으로서의 호족세력의 대두와 현실을 직시한 정책방향에 의하여 지양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발해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고려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북진정책이 꾸준히 추진되어 청천강 너머 압록강 하류의 동쪽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호족연합정책(豪族聯合政策)을 통하여 타협적 시책을 폈으나, 광종(949∼975) 때에 이르러 과감한 개혁정치가 이루어져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새로운 관료체계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통적 통일왕조로서의 고려가 확립되었다. 고려는 신라사회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 기반 위에 당송(唐宋)의 제도를 광범위하게 수용하여 새로운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성종(981∼997) 때까지 3성·6부와 중추원을 근간으로 하는 중앙관제가 완비되고, 과거제(科擧制)와 음서제(蔭敍制)가 함께 적용되는 인재등용방식이 정착되었다.
    또한, 지방의 호족들을 향리(鄕吏)로 격하 개편하고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성립에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시무책(時務策)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로부터 유교적 정치이념이 고려의 정치에 바탕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새로운 통치체제가 정비되면서, 유수한 문벌귀족이 대두하였다. 성종 때로부터 시작하여 현종(1009∼1031) 때에 이르면, 근기지역의 호족 출신인 안산 김씨(安山金氏)·인주 이씨(仁州李氏)·해주 최씨(海州崔氏)·파평 윤씨(坡平尹氏)·이천 서씨(利川徐氏)·평산 박씨(平山朴氏), 그리고 신라 왕실의 후예인 경주 김씨(慶州金氏)·강릉 김씨(江陵金氏)와 육두품 출신의 경주 최씨(慶州崔氏) 등이 유력한 귀족가문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본관(本貫)을 떠나 수도인 개경(開京)에 거주하면서 높은 관직에 올라 정치적 특권을 향유하였다. 전시과체제(田柴科體制)에 입각하여 그들에게는 과전(科田)과 공음전시(功蔭田柴)가 분급되고, 따로이 녹봉(祿俸)도 지급되었다. 대체로, 귀족관리들은 과거제와 음서제를 혼용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자손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었다.
    유력한 귀족가문은 서로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왕실과도 혼인하여 외척세력으로 대두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회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이들 문벌귀족들이었고, 새로이 정비된 관료체계와 통치체제는 귀족제의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고려는 당송의 제도를 수용하여 정연한 중앙관제를 갖추었지만, 정치의 실제에서는 합의제(合議制)가 중시되었다. 3성제의 중심을 이루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들은 회의를 통하여 정책결정을 하였고, 경우에 따라 중추원(中樞院)의 추신(樞臣)과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최고위의 귀족관리였다.
    왕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최종적 결정권을 보유하지만, 실제로는 귀족관리들이 합의한 정치적 사안(事案)을 확인하고, 때로는 그것을 조정하고 종합하는 구실을 하였다.
    감찰기구로서 어사대(御史臺)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고, 왕의 인사권은 대성(臺省)의 서경(署經)에 의하여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이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균형과 견제의 장치였다.
    고려의 귀족정치는 문종(1046∼1083) 때를 거쳐 예종(1105∼1123) 때에 이르기까지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려가 성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 세 번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지만, 끝내 그것을 격퇴시킬 수 있었고, 또한 송과의 외교관계를 고려의 처지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대외정책면에서의 사태 진전에 영향받은 바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혼란과 격변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사회 체제를 가다듬을 수 있었던 고려인들의 역사적 경험과 정치적 역량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고, 그 기반 위에서 고려의 귀족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1. 2. 무신란과 무신정권
    고려의 귀족정치는 문신이 주도하는 것이었고, 그 이념은 유교에 기반을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본적인 틀에 반발하는 정치적 대사건이 인종(1122∼1146)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뒤이어 발생한 묘청(妙淸)의 난이었다.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서경천도운동을 벌이다가 끝내 서경에 대위국(大爲國)을 세움으로써, 유교적 이념을 정면에서 부인하면서 개경의 귀족세력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성향까지 보이는 이 난은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토벌되었거니와, 이에 뒤이어 30여년 만에 문신 위주의 정치에 반발하는 무신란이 발생하여 고려를 정치적·사회적으로 크게 뒤흔들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의종(1146∼1170) 말년에 극적으로 발생한 무신란은 고려 귀족사회에서 무신들이 지니는 열악한 지위와 처우에 대한 누적된 불만의 폭발이었다.
    고려는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 문신과 군사를 맡는 무신을 각각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으로 하여 대등한 관품(官品)의 편성을 하면서도, 무신은 정3품을 상한으로 그 이상의 진급이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유사시의 최고군사지휘권은 문신이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통념상으로 무신을 낮추어 평가하여서 고려 귀족사회는 문신 위주의 지배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일찍이 현종(1009∼1031) 때에 최질(崔質)·김훈(金訓) 등의 무신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의 장악을 꾀한 바 있었지만 곧 몰락하였으며, 문벌귀족정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이와 같은 무신의 불만은 표출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자겸의 난을 겪으면서 고려의 귀족정치가 크게 동요하였다.
    특히 묘청의 난을 통하여 고려 귀족정치의 기본적 틀이 도전을 받는 사태에 이르러, 문신 중심의 지배체제와 그것을 둘러싼 모순점들은 언제든지 비판당하고 문제화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의종의 과도한 향락생활로 인하여 천대받는 호위병으로 전락된 무신들은 오랫동안 쌓인 울분을 터뜨렸으며, 이것이 바로 무신란인 것이다.
    이 때 무신들의 수하에 있는 군인들도 그들의 토지를 탈점당한 데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무신란의 발생에 상당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도 주목되는 바이다.
    무신란은 쿠데타의 형태로 나타나 집권중인 문신귀족들을 제거시켰을 뿐 아니라, 왕을 교체하여 새로이 명종(1170∼1197)을 즉위시키고 전왕(前王)을 시해하기에 이르렀다.
    정중부(鄭仲夫)를 대표로 하는 무신들이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무단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나 격심한 권력투쟁으로 공포와 불안의 20여 년이 흘렀으며, 마침내 최충헌(崔忠獻)의 대두로 안정된 무신정권이 수립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최씨 무신정권이 고종(1213∼1259) 말엽까지 4대 60여 년 동안 계속되고, 그 뒤에도 김준(金俊)과 임연(林衍)의 집권이 10년 남짓 이어지므로, 무신집권기는 약 100년간 지속되는 셈이다. 그 동안 고려의 왕실은 유지되었지만, 무신집권자는 왕의 폐립을 자행하였으며, 따라서 왕은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무신란이 발생하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노비의 반란이 일어나 신분해방운동으로 발전하여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고려사회는 기층으로부터 흔들리는 큰 격변을 겪거니와, 정치적으로는 무신집권기에 독특한 지배기구가 성립된다는 점이 특히 주목되는 것이다.
    무신란 직후에는 고위 무신들의 합의기구로서 중방이 정치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최씨정권이 수립된 다음에는 강력한 최씨집정을 중심으로 하는 새 기구가 만들어졌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교정도감(敎定都監)과 정방(政房)인데, 전자는 무신정권의 최고 막부(幕府)와 같은 것으로 최충헌 이래의 역대 무신집정은 그 장관인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서 권력을 전단할 수 있었다.
    후자는 최씨집정이 그의 사제(私第)에 설치하였던 인사행정기관인바, 이를 통하여 모든 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문신들을 회유, 포섭하여, 그들을 교대로 숙위(宿衛)하게 한 서방(書房)도 흥미있는 존재였다.
    군사적으로도 사병조직(私兵組織)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당초 경대승(慶大升)이 만들었던 도방(都房)이 최씨정권에 이르러 크게 확대되어 수천 명의 병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도방의 군인들은 최씨집정에 절대적 충성을 하는 사병으로서 사사로이 경제적 급부와 시혜(施惠)를 받았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최씨집정의 광대한 농장(農莊)들이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산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무신정권의 지배체제는 국가적 제도를 형식상 존치시키면서 별도로 존립하였다. 교정도감은 법제적 기구로 만들어졌던 것 같지만, 정방은 사기관(私機關)이었고, 도방은 물론 사병조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기구들은 당시 고려의 정치를 이끌어가는 데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은 독자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여 100년에 걸치는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지만, 고려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인하지 못한 채, 사실상 이중체제(二重體制)를 유지시키면서 오히려 왕조체제에 기생(寄生)하는 한계성을 지녔던 셈이다.
  1. 3. 부마국체제와 권문세족
    고려의 무신정권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내 붕괴되고 말았다. 최충헌에 뒤이어 최이(崔怡)가 집권한 가운데 몽고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힘겨운 항쟁을 계속하였지만, 현실을 외면한 주전일변도(主戰一邊到)의 최씨정권은 문신과 무신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이어 무신으로 권력을 장악한 김준 및 임연도 몽고와의 화해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마침내 거세됨으로써 무신집권기는 끝나고, 고려조정의 개경환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이 전복된 다음부터 몽고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여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임연과 그 아들 유무(惟茂)는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1259∼1274)의 의지로 거세되었다.
    그 결과 무신정권에 충성하던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켜 개경의 고려조정과 맞서 투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결국,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삼별초를 평정함으로써 고려의 대몽항쟁은 마무리되거니와, 이로써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 큰 변혁을 초래한 무신집권기는 대외관계의 추세와 관련하여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된 셈이다.
    이로부터 고려는 원(몽고)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태자가 원 세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곧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가 충렬왕(1274∼1308)인데, 이로써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이어 원의 압력에 의하여 왕과 왕실에 대한 칭호가 격하, 개칭되고, 관제도 축소, 개편되었으며, 왕은 반드시 원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이고, 그 소생이 왕위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당시 대제국으로 발전한 원을 중심으로 하여 수립된 동아시아세계의 통일적 정치질서 안에 편입된 고려는 독립왕국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부마국체제를 갖춘 채 커다란 정치적 제약을 받고 있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부마국체제가 성립되는 큰 변혁 속에서 고려의 지배세력과 통치체제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무신란으로 문신 귀족세력이 몰락하고 무신집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가 성립되었던 것인데, 또다시 격변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이다.
    새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가 부마국체제를 갖추면서 대원관계(對元關係)를 정립, 유지시키는 가운데 두드러진 구실을 한 존재들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고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역인(譯人) 출신, 원에 매를 진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응방(鷹坊)의 일에 종사하였던 사람, 환관(宦官) 출신으로 원에 가서 원왕의 신임을 받은 자, 원에 자주 입조(入朝)하는 고려왕을 수행하여 친종공신(親從功臣)이 되어 출세하는 경우, 또는 원의 일본정벌에 피동적으로 참여한 고려의 장수로서 그 무재(武才)와 공로가 인정되어 원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출세하였던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대개 미천한 상태로부터 진출한 신흥세력이었지만, 높은 관직을 받고, 음서제에 의하여 그들의 지위를 세습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지배세력으로서 자리를 굳혀갔다.
    물론, 새로이 구축한 경제적기반과 원과의 결탁관계가 그들의 성장을 뒷받침하여 주었다. 이러한 사정 아래에서 고려 후기의 새 정치적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이 성립되는 것이다.
    권문세족은 불법적 탈점에 의하여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을 정도의 대토지소유가 고려 후기 농장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와 같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확대가 국가재정을 궁핍하게 만들고, 사회적 모순을 증대시켰다. 또한, 권문세족은 다양한 형태로 원과 결탁하였다.
    우선 원의 관직을 지니는 경우인데, 그들은 직접 원에 가서 수직(受職)하기도 하였지만,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이나 만호부(萬戶府)의 관직을 받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다른 형태로, 혼인관계를 맺는 것을 들 수 있는 바, 당초 공녀(貢女) 출신으로 원의 유력자의 아내가 된 이들이 많았는데, 뒤에는 적극적으로 딸을 원의 제실(帝室)이나 유력자에게 시집보내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원과 결탁하는 목적은 원의 위세에 힘입어 고려에서의 정치적 위치를 굳히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부마국체제 아래 지배세력으로서의 권문세족의 성향을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였다.
    무신정권이 붕괴된 다음, 고려의 왕권은 강화되었다. 무신집정에 짓눌렸던 왕의 권위가 회복되고, 특히 강력한 원나라의 부마로서 상당한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하는 왕권의 신장은 절대적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고, 새로이 권문세족이 대두되어 그들의 독자적인 대원결탁(對元結託)이 이루어짐에 따라 왕권은 점차 실추되어 갔다.
    특히 충렬왕과 충선왕, 그리고 충숙왕과 충혜왕이 원의 조처에 따라 중조(重祚)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은 가중되었다. 이에 상응하여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통한 합좌기능을 강화시키면서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뒤에 이르러 부원배(附元輩)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그에 따라서 고려의 정치기강은 크게 흔들려 혼란상을 노정시키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원의 위세에 시달리면서 4차에 걸친 입성책동(立省策動)을 경험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고려의 국가로서의 체제를 해체시키고 원의 지방행정단위인 성(省)으로 편입시키자는 움직임이었다.
    그때마다 고려는 저지운동을 벌여야 하였던바, 이제현(李齊賢) 같은 사람의 활약이 컸다. 그러한 가운데, 격심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운동이 시도되고는 하였으니, 충선왕의 개혁정치와 충목왕 때의 정치도감(整治都監)에 의한 개혁활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당시 모순의 소재는 부원배들의 발호에 기인하였던 것인만큼 부마국체제 아래에서의 개혁은 궁극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꾸준한 현실개선에의 움직임이 부마국체제 아래의 암담한 정치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축적을 뜻하는 것임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시대의 정치
  1. 1. 조선의 건국과 양반관료제의 성립
    고려 후기에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됨으로써 야기되었던 사회적 혼란과 국가적 위기는 공민왕(1351∼1374)의 반원운동과 개혁정치를 통하여 일단 극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원이 쇠망하고 명(明)이 흥기하는 중국대륙에서의 정세변화에 대응하면서 이루어진 이 변혁은 비상수단으로 부원배 세력을 제거하고 군사행동을 감행하여 원에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함으로써 고려의 국가적 자주성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당시 격심하였던 사회적 모순과 혼란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원의 간섭기에 꾸준히 시도되었던 개혁활동의 확대 발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세력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주로 향리 자제로서 새로이 수용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며 과거로 관료에 진출한 그들은 자연히 권문세족과 상반되는 사회적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는 상황 아래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공민왕대부터 대외관계의 긴장 속에 군사행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병흥(兵興)의 시대를 당하여 무장(武將)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대부분 권문세족 출신이지만, 미미한 가문 출신도 없지 않았는데, 동북면 출신의 신흥무장 이성계(李成桂)는 탁월한 무재와 친병조직(親兵組織)을 통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면서 두드러진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복잡한 내외의 정세를 배경으로 하여 야기된 위화도회군은 정국의 근본적 재편성을 초래하여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최영(崔瑩)의 몰락과 우왕의 폐위를 가져온 반면, 이성계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과 신흥사대부 세력의 급격한 부상을 낳게 되었다.
    이어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사대부 개혁론자들의 주도 아래 전제개혁운동이 전개되어 과전법(科田法)의 성립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신흥사대부 중심의 새 경제질서가 수립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어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형식을 빌려 이성계를 태조로 하는 조선왕조가 개창되었다(1392).
    결국, 공민왕의 개혁정치로부터 시작된 정세의 변화가 신흥사대부와 신흥무장의 정치적 성장과 새로운 왕조의 성립으로 귀결된 셈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은 일찍이 무신란으로 표출된 고려사회의 모순과 부마국체제 아래 축적된 혼란과 폐단을 해결하고 수습하려는 몸부림의 결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새로이 성립된 조선은 사상적으로 억불양유(抑佛揚儒)를 표방하고, 대외관계면에서 명에 대한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취하였다. 그리고 양반(兩班)이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앞 시대의 고려와는 구분되는 새 정치질서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우선, 조선이 양반사회로 규정되는 의미를 살핀다면, 조선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대부들은 새 왕조에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양반관직을 차지하고 관리로서 특권을 향유하게 된다. 양반이라는 말이 문반이나 무반의 관직을 획득할 수 있는 신분층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넓혀졌고, 따라서 이와 같은 양반이 지배세력을 이루는 조선을 양반사회라고 하게 되었다.
    조선의 양반은 신라의 진골귀족이나 고려의 문벌귀족과 마찬가지로 특권층이었고, 가문을 단위로 세습성이 강하였지만, 수적으로 보아 훨씬 많았으며, 따라서 그 사회적 기반도 더욱 넓었다.
    그러므로 관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하여 격심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였다. 조선시대에 음서제의 범위가 좁아져 문벌만 가지고 출세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그러한 때문이었다.
    조선 양반사회는 역시 신분제사회였고 귀족제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조선을 양반관료국가라고 하는 까닭을 이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이 양반관료체제를 완비하기까지 상당한 과정을 거쳤다.
    태조(1392∼1398)가 새 왕조를 개창하였지만, 그것을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것은 태종(1400∼1418)이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 일부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 그는 사병혁파(私兵革罷),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실시, 새 수도인 한양(漢陽)의 건도 등 주요 사업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새로운 통치체제를 가다듬었다.
    이어서 세종(1418∼1450)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획기적 업적을 쌓는 한편, 4군6진을 개척, 영토를 확장시키고, 고제(古制)의 연구를 통하여 문물제도의 정비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세조(1455∼1468)는 조카인 단종(1452∼1455)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던 군주이지만, 부국강병책을 쓰면서 조선의 국가조직과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그것을 만세불역(萬世不易)의 법전(法典) 속에 담고자 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였으며, 이것이 성종(1469∼1494) 때에 여러 번 수정을 거쳐 반포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건국 후 약 100년간에 걸쳐 여러 왕의 적극적 시책에 힘입어 그 정치체제가 정비되고, 그것이 『경국대전』의 반포로 일단락되지만, 그 내용은 중앙집권적 양반관료국가의 모습을 띠는 것이었다.
    조선의 정치기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기관인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적 정무기관인 육조(六曹)였다. 고려시대의 재추회의와 도평의사사를 뒤잇는 의정부는 영의정(領議政)·좌의정(左議政)·우의정(右議政)의 3정승이 합의하여 국가 중대사의 처결에 절대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육조의 지위가 높아지고 육조직계제에 의하여 주요 정무가 육조와 왕 사이에 직접 보고되고 하달되는 체계가 굳어지면서 육조의 중요성이 커지고 의정부는 자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국가의 모든 정무는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조의 소관이었고, 육조는 각기 정연한 관료체계에 의하여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육조의 권능 강화는 합의제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의 왕은 전제군주로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군림하는 존재였다.
    고려시대에 무신란 이후 왕권이 위축되었던 경우에 비하여, 조선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이 행사되었는데, 유능한 왕들이 나오고 육조직계제와 같은 정치체제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간원(司諫院)이 독립된 간쟁기관으로 성립되고 삼사(三司)의 언관기능이 강화되었으며, 왕은 어릴 때부터 유교교육에 순치되어 납간(納諫)이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던 상황 속에서 왕권은 커다란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왕은 절대적 위치에서 만기(萬機)를 재결하는 존재로 표방되면서도 실제로는 양반관리의 수장(首長)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이니, 조선시대에 정2품 이상의 고관을 대감(大監)이라 한 데 대하여 왕을 상감(上監)이라 부른 것도 이 점을 시사하여 준다. 이러한 조선 정치체제의 기반은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에 의한 대민수취(對民收取)에 있었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300여 개의 부·목·군·현을 설치하여 각각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파견함으로써 유례가 드물게 철저한 지방통치를 수행하여, 일반 백성으로부터 공세(貢稅)와 부역(賦役)을 수취, 양반국가의 경제적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선 양반관료국가의 정치체제는 전대(前代)에 비하여 한층 더 세련되고 정돈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1. 2. 사림정치와 사화·당쟁
    조선건국 후 약 100년 동안은 새로이 양반사회의 기틀이 잡혀지고 양반관료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새 지배세력으로서 위치를 굳힌 양반들이 정돈된 관료조직을 운용하면서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갔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수립되었으며, 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실용성을 지니는 찬란한 민족문화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새로운 조선왕조체제가 잡혀가는 초창기였고, 세조의 찬탈 같은 커다란 갈등과 부조리가 파생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효과적인 양반관료정치를 펼쳐 나가면서 부국강병을 달성함으로써 국가적으로 크게 고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종대 이후 사림세력(士林勢力)이 대두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새 국면에 들어선다.
    이때까지 정치를 주도한 양반들은 이미 보수적 처지에 놓인 훈구세력(勳舊勢力)이었는데, 종래 지방에 세력기반을 지니던 재야의 문인·학자들이 사림으로서 새로운 양반관리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이들 사림세력은 향촌에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고, 고려 말에 이미 사족(士族)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여 양반으로 진출할 자격을 지녔던 것이다.
    그 동안 성리학에 침잠하여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내세워 스스로의 도덕적 수양과 공도(公道)의 실현에 깊은 관심을 지닌 채 정치의 표면에 나설 기회를 기다려 왔다. 특히, 길재(吉再)의 손제자인 김종직(金宗直)이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던바, 성종 때에 훈구세력의 비대한 권력을 견제하려는 왕이 정책적으로 그들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사림세력 대두의 단서가 열렸다.
    이렇게 해서 사림세력이 진출하여 마침내 정계를 석권하게 되거니와, 이것은 훈구세력의 퇴장을 뜻하는 큰 변화이지만, 동시에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서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정치의 심화와 양반관료체제의 세련화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림세력이 성장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까지 훈구세력과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거듭되었고, 그것이 무참한 사화(士禍)로 나타나고는 하였다. 사화란 사림세력을 이루는 신진의 사류(士類)들이 화를 당하여 죽거나 유배당한 정변으로 연산군(1494∼1506) 때의 무오사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역사편찬의 기본자료가 되는 사초(史草)에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실은 것을 빌미삼아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었다.
    곧 이어서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중종(1506∼1544) 때에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던바, 유교적 도덕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아 향약(鄕約)의 실시와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위하여 힘쓴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몰락을 가져온 기묘사화는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에 가한 또 다른 일대타격이었다.
    그 뒤 명종(1545∼1567)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지만, 끝내 선조(1567∼1608) 때에는 사림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림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서원(書院)의 발달과 향약의 실시에 힘입은 바 컸다.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와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지는 서원은 이 무렵에 각 지방에서 사림세력의 주도 아래 설립되어 증가하여 갔는데, 향촌에서의 사림세력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구실을 하였다.
    향약(鄕約)은 유교적 덕목을 향촌사회에 널리 보급시켜 일반 백성들을 교화시키려는 것이었고, 그 보급운동을 앞장서서 추진한 것이 바로 사림세력이었던만큼 향약의 확대 보급은 그들의 정치적 성장과 긴밀히 연관되었던 것이다.
    사림세력의 지배 아래 정치운영방식에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공론(公論)을 중시하여 지배층의 여론을 널리 수렴해서 정치에 반영시키고자 한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성종 때부터 삼사의 언론활동이 활발하여지고, 경연(經筵)에서의 정치에 대한 토론이 활기를 띠게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경향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두드러진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는 신진기예한 유신(儒臣)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주장이 삼사를 통하여 수합되고, 그것이 삼사의 상소와 그에 대한 처리과정을 거쳐 귀결점을 찾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와 동시에 합의제에 입각한 의정부의 기능이 강화되고, 뒤에는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어 중신들의 합의에 따라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결정함으로써 정치운용에서 독단성을 배제하려 하였던 것도 마찬가지의 경향이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이상적인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지향하였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사림들은 먼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을 어진 존재로 하기 위하여 왕에게 성군을 본받도록 끊임없이 요청하였고, 정치에 임하는 자는 도덕적 수양을 쌓은 군자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군자를 자처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향약의 실시를 꾀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지치주의정치(至治主義政治)는 유교적 도덕이 구현되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림정치에서는 명분론과 보편주의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림정치의 바탕은 『경국대전』에 입각한 양반관료체제였다.
    물론, 육조직계제가 후퇴하고 비변사가 대두되는 등 중요한 변화가 있었지만, 정치기구가 그대로 유지되고 왕의 권능은 여전히 강력하였으며, 양반관료에 대한 인사행정제도는 더욱 주도면밀하게 정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중앙집권적 지방통치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사림정치는 양반관료체제를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를 폭넓고 활기차게 발전시킨 것으로, 성리학을 통하여 유교적 이념을 심화시킨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사림정치가 전개되면서 계파간의 대립이 야기되어 붕당(朋黨)들이 나타나고, 마침내 그들 사이에 격렬한 권력투쟁, 곧 당쟁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선조 때에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신·구대립으로 인한 동서분당(東西分黨)에서 시작하여, 곧 동인은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지고 뒤에 숙종(1675∼1720) 때에는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누어졌으니, 이것들을 사색당파(四色黨派)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때에 따라 더 미세하게 갈라진 경우도 있거니와, 이와 같은 분당작용과 격렬하였던 정치적 대립의 원인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관직의 보유가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 조선 양반관료체제 사회에서, 관료에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사림들 사이의 경쟁 각축과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대립 투쟁이 함께 얽혀 야기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초 동인은 이황(李滉)의 문인이 다수였고, 서인은 이이(李珥) 계통의 인물들이 많았으며, 이황과 이이는 각각 성리학에서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를 대표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따라서 붕당의 발생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으리라 여겨지며, 이와 같이 학파의 대립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므로 당쟁은 각 지방의 서원을 근거지로 삼아 집요하게 오래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파간의 대립 갈등이 가장 심하였던 것은 현종(1659∼1674)으로부터 숙종을 거쳐 경종(1720∼1724) 때에 이르는 시기였다. 인조반정(1623) 이후 서인이 집권하였으나 남인 일부가 조정에 참여하여, 붕당들이 서로 비판하면서도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고, 이러한 상황이 효종(1649∼1659)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복제설(服制說)을 둘러싼 시비가 나타나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다가 마침내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뒤 숙종이 즉위한 다음에는 또다시 남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들어서는 경신환국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 뒤에도 환국은 거듭되었으며, 그 동안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져 정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격렬한 대립 투쟁 속에서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도 죽어야 하였다. 숙종과 경종 때에는 왕비와 세자와 관련된 왕실문제가 개입되어 당쟁을 더욱 가열시켰던 것이다.
    사림정치가 이루어지고 붕당이 발생하여 모순과 대립이 야기되는 가운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외침을 당하여 그에 대처하였다.
    임진왜란의 경우, 전후 7년간에 걸친 일본 침입군과의 전쟁을 통하여 조선은 처음 열세를 보였으나, 명의 원군과 각지의 사림을 주축으로 한 의병들의 활약에 힘입어 끝내 격퇴시킬 수 있었다.
    또한, 여진이 흥기하여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중에 조선을 침입하고, 조선은 결국 굴복하여 화친을 맺게 된 것이 병자호란이지만, 이것이 조선왕조의 정치적 질서에 별다른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동아시아세계를 뒤흔든 이 두 가지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그 체제와 지위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은 그만큼 조선왕조의 국가체제가 강고하고, 사림정치와 그것을 뒷받침한 성리학이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또한, 붕당간의 대립이 가장 격렬하였던 숙종 때에,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는 새로운 세법인 대동법(大同法)을 확립시켜 실시하게 되는 것도 사림정치의 일면을 보여주는 주목할 바인 것이다.
  1. 3. 세도정치와 민란
    극도로 격심하여진 붕당간의 대립은 조선의 정치에 커다란 불안을 초래하였다. 특히, 숙종 때부터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환국이 이루어지고, 그때마다 정치적 보복이 가하여져 많은 사람이 죽거나 유배당하고는 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이익(李瀷)과 같은 재야의 실학자들은 붕당론을 개진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였거니와, 당시 복잡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1724∼1776)는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미 세력을 굳혀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남인 및 북인의 네 당파의 인물을 고르게 등용하여 격심한 정쟁을 지양하려는 것이 바로 탕평책이었는데, 대체로 온건한 편에 선 이들을 중심으로 완론(緩論)의 탕평을 이루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영조에 뒤이어 정조(1776∼1800)도 탕평책을 계속하여 썼지만, 척신세력의 배제와 의리(義理)·명절(名節)의 존중이 표방되는 가운데 준론(峻論)의 탕평이 이루어졌다.
    그 동안 정치적 갈등이 간간이 여러 형태로 표출된 바 있지만, 전대에 비하여 영·정조대는 승평(昇平)의 시기로 간주되었으며, 그 바탕 위에서 규장각(奎章閣)을 중심으로 문화의 꽃이 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탕평책은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숙종 이후의 가열된 정쟁은 공론의 수렴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지향하는 사림정치 자체를 파행으로 몰고 가서, 붕당 상호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불신의 늪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제보합(調劑保合)을 위주로 하는 탕평책은 결국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탕평책이 시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이면적으로 붕당간의 대립은 엄존하였으며, 그 위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대립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무렵 새로이 서양문물이 알려지고, 천주교가 전래되어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성리학 지상주의를 표방해 온 조선양반사회에는 큰 파문이 일고 있었다.
    유교적인 의식을 일체 거부하는 천주교에 대하여 국가에서는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지령을 내린 바 있지만, 남인 학자들 가운데에는 정권에서 소외된 상태에서 그에 접근하여 신봉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1800∼1834)가 즉위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우선, 탕평책이 표방되면서 호도되었던 정치적 대립관계가 표출되고, 이념적으로 조선 양반사회를 위협하는 천주교에 대한 극단적인 경계심이 발로됨으로써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담은 채 천주교도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가한 신유사옥이 발생하였다.
    다음으로 김조순(金祖淳)이 왕비의 아버지로서 정치권력을 독점하게 되고 그의 일족인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고위관직을 두루 차지하여 영달함으로써 그들이 정권을 농단하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종전에도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지만, 이 경우는 왕의 권능이 영락(零落)된 상태에서 왕비를 매개로 그 일족이 정치를 독점하는 특이한 양상을 띠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세도정치는 헌종(1834∼1849) 때에는 그 모후의 친족인 풍양 조씨(豊壤趙氏)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되었고, 철종(1849∼1863) 때에는 다시 안동 김씨가 왕비가 되어 그들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는 노론이었지만, 각기 그들 일족만이 배타적으로 정권을 독점하였던 것인데, 사림정치가 격심한 정권투쟁으로 와해된 뒤에 특이한 조건 아래 성립된 세도정치는 조선의 정치발전 과정을 통하여 커다란 후퇴요, 반동이었다.
    세도정치 아래 정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하여졌고, 국가의 통치체제도 크게 해이하여졌다. 이러한 상태에서 양반 지배층의 불법적 수탈이 자행되었다.
    영조 때에 국가는 대민시책으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함으로써 농민들의 조세부담을 경감하여 준 바 있으나, 그 뒤 세도정치가 행하여지는 가운데 3정의 문란으로 수취체제는 극도로 혼란해지고, 그를 통하여 지방관의 유례 드문 대민수탈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조선사회에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체제가 크게 동요되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들이 속출하면서 잔반(殘班)으로서 불만세력을 이루는가 하면, 일부 농민이 부(富)를 축적하여 지위를 향상시키고 노비가 해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 속에서 세도정치의 계속과 양반 지배층의 점증하는 대민수탈은 역사 발전의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모순은 결국 민란(民亂)의 발생을 결과하였다.
    농민들의 불만으로 인한 반란의 징후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최초의 대규모 민란은 순조 때에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었다.
    이것은 잔반들의 주도 아래 이 지역의 상인과 농민들이 참여한 대대적인 반란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대부분을 그 지배 아래 넣을 정도였다. 결국,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지만 그 충격과 후유증은 심대하였다.
    뒤이어 철종 때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지방관의 악행과 수탈에 항거하여 농민들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역시 그 파급범위가 넓었고, 기세가 맹렬하여 조선의 조정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이와 같은 민란은 세도정치에 대한 반항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 양반지배체제에 대한 강한 부정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의 정치가 심각한 국면에 들어섰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고종(1863∼1907)이 즉위하고, 흥선군(興宣君)이 대원군으로 피봉되어 과감한 개혁정치를 하였다. 조선사회의 피폐와 청(淸)에서의 아편전쟁으로 표출된 서구 제국주의 침투에 대한 깊은 우려와 위기의식이 팽배된 가운데, 대원군은 그 동안 누적된 양반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폈다.
    이 개혁정치는 조선이 근대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시도된 뜻깊은 움직임이었고, 그 결과는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정치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근·현대의 정치
한국 근·현대정치사를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먼저 거론하기로 한다. 한 가지는 인식방법론으로 일종의 절충적인 방법으로서 사적 구조론의 논리를 전개시키려고 한다.
사적 구조론의 구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지만, 다만 베버(Weber,M.)적인 인식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성격을 종합하여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한 가지는 한국 근·현대정치사의 100여 년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기에서는 경제사회적 성격과 정치체제적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단계화하기로 한다.
제1기:아시아적 전제통치의 몰락(조선 후기), 제2기:제국주의 영향(대외적 개항시기), 제3기:식민지 침탈기(일본의 식민지통치체제기), 제4기:분단체제기(광복 이후)이다.
이와 같은 시기 구분은 단지 인식적인 편의만을 전제로 하기보다는 각 시기는 그 시기만의 특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다른 전제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이들 각 시기의 사회 경제적 성격과 경제적 사회관계로서의 계급구성문제, 그리고 정치체제에서의 연관문제를 함께 고찰하기로 한다.
  1. 1. 아시아적 전제통치의 몰락
    조선왕조의 후기에 접어들면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혁을 예고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조짐이 등장하게 된 것은 대체로 1800년대 초기부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짐이 나타나기 이전의 시기까지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의 정치사적 특징으로서는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아시아적 전제군주국가적 속성이며, 다른 하나는 일종의 준 가산관료제적 체제였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이 서로 결속되어 조선왕조체제의 특이성을 조성하였다고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아시아적 전제군주제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중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아시아적 전제군주제는 중국과 그 주변 국가의 왕조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통치양식이다.
    ② 아시아적 전제군주제는 통치구조의 위계성을 체계화하고 있으며, 그 최고정점에 국왕이 자리한다. 국왕의 전제권에 대해서는 어떠한 세력으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권을 향유한다.
    ③ 국왕의 전제권을 보장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민간인 관료체제, 무력적인 군사체제, 그리고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④ 국왕의 전제권을 보장하여 주는 이들 세 영역은 힘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행사를 차단하게 되는 사회적 견제를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국왕에 대한 상호 충성경쟁에 치중하게 된다.
    ⑤ 국왕·관료·신민의 3자관계에서 신민은 오직 경제적 가치의 창출과 국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
    ⑥ 국왕의 절대권은 국토를 국왕의 개인적 사유지로 규정하며, 관료는 단지 국왕이 분여하는 녹봉으로 경제적인 생활을 유지한다.
    한편, 준 가산관료제의 의미는 가산관료제국가의 기본적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 사이의 미분리적 현상으로서, 이는 곧 국왕의 경제적 지배권의 절대적 성격을 의미한다.
    국가예산과 왕실경비가 미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국왕이 곧 국토의 핵심이며, 국왕을 위한 신민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이다. 왕조의 관리는 단지 왕실, 특히 국왕 개인에 충성을 바치는 일종의 가신적 의무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정치구조는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성격에 의해서 전반적인 윤곽이 파악될 수 있다. 조선왕조체제는 유럽에서 쉽사리 발견될 수 있는 봉건제적 군주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봉건제적 군주는 봉건영주라는 중요한 국왕 견제적 사회세력에 의한 부단한 도전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변동의 경제적 안정과는 달리 정치적인 불안정이 쉽사리 조성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봉건체제하의 군주가 행사하였던 권력의 자기 제약성이나 군주절대권의 견제적 성격을 아시아적 전제군주제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사회는 바로 이 점에서 다른 사회가 보여주는 변혁적인 정치화의 과정을 스스로 제약받는 한계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실의 절대적인 권위는 최소한 몇 가지 제도적 보장에 의하여 강화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리학의 군신관계의 정신적 가치체계였다.
    국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은, 국왕의 무능이나 부도덕까지도 문제시될 수 없는 윤리적 가치체계로 정립되었다. 국왕은 바로 정신세계의 유일적 절대자로서의 현세성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의 권위와 왕조체제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였던 또 다른 요소는 엄격한 사회신분에 의한 반상제도이다. 세습적인 신분제도는 철저한 위계질서를 강조하였으며,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구속성은 절대적이었다. 피지배계급에 대한 엄격한 통제는 왕실과 양반 지배세력에 대한 복종만을 세습화시켰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국왕과 왕실의 지배체제를 강화시키고 지속시킬 수 있었던 요소로서는 단순반복적인 사회경제제도 때문이었다. 농경사회의 속성은 경작방법의 단순반복에 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왕실과 지배세력의 수요에만 극히 한정적으로 공급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상공업은 확대재생산이 사실상 금압되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농업생산에서 축적되는 잉여가치는 상업으로의 전환이나 공업에로의 투자와 같은 형태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극히 단순한 확대재생산이 농업을 일정 영역으로 하여 반복되었기 때문에 쉽사리 퇴적자본으로 소실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의 이와 같은 성격은 최소한 국내적인 사회여건에서는 정체성의 오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종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흔히 식민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정체성의 논리, 즉 후진사회의 속성을 내면화하였다기보다는 발전의 가능성을 억압하였던 지배통치구조의 의미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바로 이 점에서는 발전적 가역성(可逆性)의 내면적 속성을 무시하는 논리로 이어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발전적 가역성은 국왕과 지배계급의 억압체제가 부과하는 정체적 안정성에 의해서 정치적 내면으로 관류하게 되었다.
    발전적 가역성의 속성은 피지배계급적 차원의 한 요소라면, 지배계급의 정체적 안정성 사이에 격심한 길항관계(拮抗關係)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 말기 사회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의미는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갈래의 사회구조적 성격이 조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왕조의 말기에는 흔히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다음 몇 가지의 사실 때문에 피지배계급의 발전적 가역성이 분출될 수밖에 없는 자기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요소는 지배계급에의 격심한 대립 갈등관계가 왕실의 위약을 가속화시켰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입각하였던 지배체제였기 때문에 호문숭상이 널리 만연되어 있었다.
    유자(儒者) 계층의 확장은 사림정치의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정된 관직과 녹봉으로는 유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권세를 장악한 기호파나 도전적 성격을 추구하였던 영남파 사이에는 초기만 하여도 건국의 국가적 위세에 의하여 도전적 성격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반기 이후부터 사림파의 욕구는 거세게 분출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관직 점유를 중심으로 하는 사화·당파 등의 대립현상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점차 왕권을 특정 당파의 보호막으로 이용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통치적 성격은 왕권에 대한 제약으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의 이러한 성격은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외척의 등장에 의한 이른바 세도정치에 의하여 사실상 왕권의 극소화현상이 나타나고 말았다. 세도정치는 외형상 왕권체제지만 실제 권력의 행사는 특정 가문에 의하여 전단되었다. 이들 가문은 왕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척으로 권문세가의 지위를 구축하였다.
    이들은 당시 통치의 기본성격이었던 관직점유를 자의적으로 전횡하였다. 조선왕조에서의 관직은 후기에 이르면 일종의 민중수탈체제적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외척의 발호와 삼정의 문란은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농민들은 지방의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발전적 가역성은 농민에게 있어서 기존 체제에 대한 격심한 반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대상은 왕실 그 자체보다는 권문세가와 지방의 관직자였다. 그만큼 당시 농민들의 정치의식의 미분화적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외척의 세도정치가 철종 이후 고종에 이르러 대원군의 섭정으로 종식되게 되었다. 대원군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반동적인 왕권강화로 지향하였다.
    시대적인 상황이나 국내적인 성격은 정치체제의 변혁을 요청하였지만, 대원군의 통치는 외국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에 의하며 척사위정을 고집하였다. 그 결과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의하여 과해지고 있었던 영향력을 시기적으로 유예할 수 있었다.
    또한, 국내의 농민저항과 천주교 전래, 그리고 동학의 만연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금압조처의 강화로 대응하였다. 억압과 통제, 그리고 왕권의 권위확보를 당연한 귀결로 생각하였다.
    대원군의 이러한 통치는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외척의 발로를 단절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으로도 일반 농민의 오랫동안의 원성을 해결하여 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이나 창조적인 통치에 의한 농민의 지지가 아니라, 오랜 억압에 대한 농민불만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반사이익을 대원군 통치 초기에서는 확보할 수 있었다.
    대원군 통치는 사실상 몇 가지의 문제점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 첫째는 성리학에 대한 존화사상의 상대적인 경시에 의하여(구체적으로 서원철폐와 같은 조처) 유생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들 유자 계층에 대한 대원군의 홀대는 자연히 조선왕조의 기본적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대한 정통성 부여에 한계를 의미하였다. 전체적으로 유자들의 저항은 그만큼 대원군 통치의 명분적 이념을 훼손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둘째는 대원군 통치는 일반 농민들에게도 점차 기대감을 무산시켰고 새로운 억압 수탈체제의 강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삼정의 문란에 대신하여 각종의 부역이 강화되었고, 조세도 늘어났으며 농민에 대한 수탈은 오히려 조직적으로 행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의 통치체제에 대한 불만은 자연히 왕조체제의 변혁으로까지 치달리는 속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셋째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비단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국가로부터의 심한 반발은 물론이고 청으로부터도 지지를 잃어가게 되었다.
    이미 영미국가로부터 한낱 종이 호랑이로 취급받았던 청은 그 위세의 회복을 속방인 조선에서의 영향력 행사로 도모하려 하였다. 청의 이러한 시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세 가지 사정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적 정황과 그것에 거역하면서 과거지향적 복고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대원군 통치와의 갈등을 필연화하였고, 그것은 결국 대원군의 몰락으로 종결되었다.
  1. 2.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
    대원군을 축출하고 국왕친정을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 정권을 장악하였던 민비세력(閔妃勢力)은 통치의 기본적 구도를 반(反)대원군적 성격의 강화에 두고 있었다.
    대원군 통치의 성격이 왕권의 강화였다면 민비의 통치는 또 다른 세도가문의 발흥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전향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더 한층 과거지향적 복고의 성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시대상황에서는 반동적인 것을 넘어 반시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당시 이미 만기친제를 주장하면서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였던 민비 일파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으로써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내외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이전의 대원군 세력의 도전은 물론이고, 농민들의 저항은 이미 조직적 성격을 보여주게 되었다. 또한, 외부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반도 진출이 가열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 당시 고종의 통치는 외적인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 것에서 탈출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탈출구의 구체적인 대상이 바로 청(淸)이었다.
    청에 의존하고 있었던 조선왕조의 권력기반은 일본·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관점에서는 이미 식민지 전락의 가능성으로 예고되고 있었다. 당시 제국주의적 강대국에게 있어서 조선은 침탈의 대상지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는 제국주의 국가로의 등장이 시기적으로 다른 국가에 비하여 늦었기 때문에, 이것을 만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태평양의 진출에서 찾고 있었다.
    미서전쟁(美西戰爭) 이후 필리핀의 영유는 그 방파제적 성격으로서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을 요구하면서 조선왕조와의 통상조약의 체결을 시도하였다. 조선에서의 우월한 지위의 점유는 미국으로 하여금 태평양 국가로서의 가장 확실한 보루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으로 남진하고 있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반도가 가지고 있던 지정학적 가치는 그만큼 중요하였다. 러시아가 태평양으로의 남진의 발진기지로 한반도를 목표로 하였던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이른바 후발 근대국가로의 등장을 조선에의 진출로 국제사회에 실증할 필요가 절실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조선은 강대국의 식민지화의 일차적인 대상지였다.
    이들 국가는 때로는 회유로, 때로는 통상을 조건으로, 그리고 때로는 무력적 위협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강대국의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였던 조선왕조는 사실상 아무런 구체적인 대응책이 없었다.
    실제로 대응책을 강구하여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국내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대응양식이 주장되었다.
    첫째는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한 척사위정론자들이었고, 둘째는 개화파의 주장을 들 수 있다. 농민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반제·반봉건의 동학사상적 대응양식도 논의되고 있었다.
    척사위정론은 성리학적 인식체계에서 연유된 화이관의 표출이다. 일체의 서구사상과 문물에 대한 강력한 배척을 주장하면서 오직 성리학적 전통사상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척사파들은 당시의 세계사적 상황에 대한 지식의 결여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강한 집착이 깔려 있었다.
    한편, 개화파의 경우는 당시의 세계사적 조류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문호개방은 물론, 근대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서구 강대국가의 지원과 문물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개화파의 이러한 주장은 일면의 타당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당시의 강대국이 보여주었던 제국주의적 침탈을 고려한다면 적지 않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대국의 지원은 결국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 것이며, 서구의 근대적 문물의 수용은 그들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도서기론적 변용(東道西器論的變容)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모든 제도는 사상을 근간으로 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사상과 근대적 제도는 결국 혼돈의 가중으로 떨어지고 만다. 다시 말하면, 당시 개화파의 주장은 식민지적 전락의 한 단계적 현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농민층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동학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전통적 주체의식의 강력한 반체제적 저항의식을 그 밑에 깔고 있었다.
    지주와 지배세력의 억압적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저항투쟁은 점점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의 생활에 직접 타격을 미치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침탈에 저항하는 민족투쟁의 한 측면도 보여주었다.
    다만, 이들 농민저항은 계급투쟁이라는 의식의 이행성과 시대적 상황의식의 부정확함에 의하여 왕조체제 그 자체를 완전히 전복시키려는 상태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동학농민운동은 일종의 ‘재크리난(亂)’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척사위정사상·개화사상, 그리고 동학사상 등의 대외적 대응양식은 어느 면에서나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인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주장은 국민적 의식의 분렬과 대립감까지 조성시킴으로써 일종의 적전 분연상태까지 보여주었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왕조체제는 무정견의 형태로 무원칙하게 방치함으로써 식민지적 전락의 위험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었다.
    왕조체제나 지배세력은 오직 정권의 유지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청의 세력에 의존하였으며, 또 다른 상황에서는 러시아에 의존하였고, 심지어 일본에까지 지원의 힘을 빌리려는 정권말기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조선왕조는 국내 민중의 도전에 대해서는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제국주의세력을 불러들여 그 힘으로 통제권을 행사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왕조 말기에 이르면 이미 조선반도는 제국주의적 열강의 지배체제의 예속성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과의 전쟁이나 청과 일본과의 전쟁은 극동에서의 패자를 결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전쟁들의 귀결은 자연히 한반도의 식민지귀속국가를 규정하여 주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었음에 대하여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들어서면 주로 두 갈래의 계층에서 반식민지적 애국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한 갈래는 당시 왕조의 하층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개화파인사들로서, 이들에 의한 적극적인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각종의 민간계몽단체가 조직되었으며, 정부의 지원에 의하여 몇몇 근대적인 제도들, 예를 들면 학교와 신식군대 등을 조직하여 근대적인 사회로의 발전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시 한계가 적지 않았다.
    또 다른 한 갈래는 이전의 척사파의 유생들에 의한 저항이었다. 점차 식민지로 전락되어 가는 국가에 대한 신민적 열정이 의병활동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이들의 의병운동은 그 초기단계에서는 일종의 근왕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척사파의 애국운동이 점차 일본에 의하여 조선반도에서 구축되었음과 동시에, 개화파에 의한 애국계몽운동도 역시 왕조체제의 억압에 의하여 그 활동을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조체제는 일본의 침탈에 의하여 식민지로 전락되었지만, 왕조의 지배세력의 주류에는 사회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즉, 일본이 1910년 조선왕조를 강압적으로 식민화하였지만, 이것은 본질적 차원에서는 일본의 지배세력인 군국주의자들과 조선왕조의 지배세력 중에서 상당수의 인사들이 야합하여, 왕실의 지위를 일본 속국의 조선왕으로 전락시킴과 동시에 일반 민중을 식민화하는 특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의 억압대상은 일반 민중이었고 그들을 억압하였던 세력은 왕조시대의 상당수의 지배세력과 일본의 식민지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군국주의자들이었다.
  1. 3. 식민지적 침탈과 민족운동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 통치를 받아야 하였다. 일본의 조선식민지통치는, 다음 세 가지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첫째는 일본은 조선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중요한 관직을 일본인으로 충원하였으며, 그들에 협조하였던 한국인에 대해서는 훈작과 상훈을 제공하였고 그 밖의 명예와 예우를 해주었다. 그러한 성격의 구체적인 사실이 바로 「조선귀족령」이었다. 친일세력에 대한 일정한 예우는 자연히 그들을 조선인에 대한 상층계급적 지배세력으로 잔존시켰다.
    둘째는 이른바 무단통치의 강압적 방법을 동원하였다. 헌병경찰제도를 통하여 군국주의적인 억압을 자행함으로써 “노예선에 대한 강압”을 그대로 자행하였다. 총독부의 시책에 어긋나는 민중에 대한 가혹한 규제는 철저한 억압 그 자체였다.
    셋째는 일본의 조선식민지통치는 이른바 동화정책으로 일관하였다. 동화정책은 철저하게 조선의 민족적 일체성과 독자성을 말살시키면서 일본의 한 속령으로, 그리고 하층민으로 강제편입시키는 정책이었다.
    조선에서의 역사교육의 금지는 물론이고, 그것의 왜곡과 날조는 마치 조선민족이 일본민족의 부속적 지류인 것처럼 논리화하였다. 언어와 문자에 대한 말살정책도 철저하게 이행되었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개명하게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식민통치정책은, 일본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등장함에 있어서 요청되는 경제적 약탈과 인력동원 등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정의 희생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본식민지통치는 다음과 같은 시대적 구분이 가능해지며, 이들 각 시기에서의 일본의 통치는 특징을 달리하였으며, 그것에 대응하는 민족투쟁양식도 다르게 나타났다.
    ① 제1기(무단통치기, 1910∼1919):국내외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② 제2기(문화통치기, 1920∼1937):국내 민족운동의 민중계몽 지향적 문화민족운동과 이데올로기적 분열, ③ 제3기(전시통치기, 1937∼1945):국내 민족운동의 지하화이다.
    위의 사실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식민통치의 전 기간을 살펴보면, 일본의 제국주의적 세계전략에 따라서 식민지 지배양식에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억압적인 군사통치체제만은 불변의 요소였다. 이러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였던 민족운동도 각 시기마다 다르게 표출되었다.
    초기에 일본의 무단통치하에서도 국내의 의병운동과 각종의 문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의 무력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도 1910년대 말에 들어서면 국내투쟁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은 국내의 무장투쟁이 다소 소강상태를 보여주었던 시기에 발생하였다.
    무저항민족운동의 양식을 택하였던 3·1운동은 당시 보수적인 장로세대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최초의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저항이었다. 3·1운동은 강압적인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무저항민족운동의 한 표본이었다. 이 운동은 최소한 세 가지의 영향을 남겨주었다.
    첫째로, 일본의 식민지통치방식에서의 변화였다. 3·1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통치는 유화적인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일정한 범주 내에서의 집회와 결사도 허가하였다. 심지어 신문·잡지의 발간도 허가해 주었다.
    둘째로, 국내의 민족운동에서 그때까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장로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청년층의 진보적인 사상운동이 민족운동의 한 양식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됨에 따라 국내의 민족운동은 좌우의 양대세력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보수우파의 민족운동이 민중계몽에 의한 민족적 역량의 구축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면서, 일본의 식민지통치자들에 대한 전체 민족적·단일적 결속에 의한 투쟁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파의 경우는 민족투쟁과 계급투쟁을 동질적인 차원으로 수용하였으며, 일본 당국자들에 대한 투쟁에 앞서서 민족내적 계급모순의 극복에 치중하였다.
    다시 말하면, 민족 내에서의 지주와 자산가를 적대계급으로 간주하여 그들에 대항하는 계급적 투쟁을 강화하였다. 좌파의 이러한 성격은 어느 의미에서는 민족운동선상에서의 민족간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기능하였다.
    제2기에 들어서면 민족운동은 일시 신간회 조직에 의하여 좌우파의 연대성이 구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모스크바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하부조직체적 위치에 놓여 있던 조선공산당의 추수적(追隨的)인 행동은 단일전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신간회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부터 우파의 경우는 주로 이전의 민족투쟁방법이었던 민중계몽과 인력양성에 주력하였으며, 좌파의 경우는 농민과 노동자에 직접 계급투쟁의식을 고창하는 사회주의운동으로 지하에 잠입하였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3·1운동이 일어난 뒤부터 우파의 일부에서는 친일적인 변신이 자행되어 이른바 자치정부론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자치론자들의 친일적인 행각은 우파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셋째로, 해외독립운동에서의 단일전선적인 조직체의 모색이었다. 국권회복을 도모하여 만주·연해주 등지에서 군사적인 투쟁까지 감행하고 있던 독립운동은, 사상적인 차원에서나 운동의 계보에서는 대단히 심한 분파를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분파를 극복한 3·1운동은 단일적인 임시정부조직의 필요성을 절감시켰다. 그러한 필요성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발전되었다.
    물론, 임시정부는 그 구성인자 사이의 불협화와 주장·이념간의 격차로 초기부터 분열이 되풀이되었지만, 단일적인 망명정부의 형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족독립운동은 1930년대 중반기 이후 세계대전의 발발에 의하여 식민지 당국자들의 격심한 통제로 국내의 민족투쟁은 극히 예외적인 투쟁사례를 제외하고서는 철권압제하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국내상황에서나 국외관계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 가중은 민족운동의 자체적 한계로 대두되었으며, 특히 친일세력의 발호는 194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징병제도 등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이 일본에 의하여 철저하게 자행되었다.
  1. 4. 미군정기의 정치적 혼돈
    ‘해방’으로 표현되는 1945년 8월의 일본 패망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등 국내상황의 변화는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혁을 조성시켰다. 이러한 혼돈은 몇 갈래의 중첩된 사실 때문에 조성되었다.
    먼저 국내의 각 정파세력들 사이의 격심한 분열 때문이었다. 당시 국내의 중요한 정치세력은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金性洙) 중심의 한국민주당계,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이라는 3분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들 정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주로 외국의 강대국에 대한 선호적 연계성과 국가수립 이후의 정권장악 등에 대한 이해의 갈등에서 빚어지고 있었다.
    또한,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미주지역의 이승만계(李承晩系), 중국에서의 김구계(金九系), 소련 등지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3분현상도 이러한 국내정파의 갈등을 상승시켰다. 이처럼 격심하게 분열된 각 정파간의 대립은 민족독립의 가능성과 국제적인 호기를 상실하게 하였다.
    단일적인 민족투쟁기관의 활동이 결여되어 있고 국민적인 카리스마의 구체적인 활동과 미래지향적 이념의 미정립 등은 해방의 시점을 또 다른 민족수난의 상황을 예비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특히, 당시 전승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의 극동정책에서의 의견차이는, 국내정파의 분열과 때를 같이하여 38도선에 의한 국토분단으로 자행되었고, 남북한에서 각각의 군정을 실시하는 등 분단고착화를 조성시켜 가고 있었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는 그에 협력하였던 보수우파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남한에서 미군정청을 개설하였다. 미군정청은 먼저 국내의 부분적 치안권을 행사하고 있던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배척하였으며, 미군정청만이 남한의 유일합법적 정부라고 선언하였다.
    미군정청은 일본총독의 관리들에 의한 행정의 지속을 명령함으로써 해방군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함과 동시에 점령군의 성격을 드러내었다.
    남한에서 미군정청의 통치는 억압과 혼돈의 가중을 심화시켰다. 억압의 상황은 이념적인 분야에서는 더욱 더 격심하였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그 대신에 이전의 친일파에 대해서는 포섭의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에 민족투쟁의 상황을 역전시키게 되었다.
    혼돈의 경우도, 미군정청의 시행착오와 행정의 미경험은 사회혼돈의 가속화를 가져왔다. 아사자의 속출, 치안행정의 부재, 급격한 물가고 등은 민생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해방의 상황에서 빚어졌던 이와 같은 현상은 결국 다음의 몇 가지 상황에서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첫째로, 민족지도세력의 능력적 한계 때문이다. 이른바 민족지도자로 자처하였던 인사들 가운데 사실상 강대국 추수의 사대주의적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의 한반도 진주에 대하여 해방의 의미를 부여하고 말았다.
    민족적 의지는 이들을 점령군으로 규정하여 민족독립의 기정화로 지향하여야 함에도 그러한 의식과 행동이 따르지 못하였다. 그 결과 미군의 진주를 대환영하였고 소련군의 해방군으로서의 위치 부여에 부심하는 작태를 보여주었다.
    둘째로, 민중의 민족적 의식의 한계였다. 지도자들의 문제와 함께 일반 민중이 보여주었던 지나친 파당의식과 추종적 굴종의식이 결국 분단체제의 고착까지 수용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셋째로, 어느 의미에서는 한반도에서의 분단과 투쟁의 혼돈을 조성시킨 기본적 원인의 제공자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들의 극동외교정책에 의하여 한반도는 재식민화의 상황으로 전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에서 1948년의 분단체제의 형성까지 약 3년간 한반도에서의 미군과 소련의 점령정책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세력의 소진과 사대주의세력의 발흥을 조성시켰던 계기가 되었다.
    남한에서는 친미주의자들의 결집이 나타났으며, 북한에서는 친소공산주의자들의 철저한 통제가 자행되었다. 구체적으로 남한에서의 친미사대주의자들의 결집은, ① 다수의 미주유학생과 미주지역 거주자, ② 국내의 보수우파의 일부, ③ 일본 총독부기관에 근무하였거나 협조하였던 친일세력들에 의하여 핵심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세력은 자연히 공산주의자와 순정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결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은 남한의 전역에 걸쳐서 미군정에 저항하는 합법적·비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물론, 박헌영의 이러한 투쟁은 민족적인 성격보다는 친소적인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대주의적 발로였다.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에서 전개하였던 일련의 비합법적 투쟁은 맹동주의의 성격까지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속성은 결국 일개 정파의 정권탈취라는 기본적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해방’의 상황에서 논의되었던 중요한 쟁점은, ① 친일파 제거문제, ② 토지개혁문제, ③ 정부수립문제였다. 먼저 친일파 제거문제만 해도 미군정은 자체적인 점령정책으로 인하여 이들을 비호하였으며, 심지어 이들로부터 지원까지 받는 연대적 우군의 성격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군의 이러한 남한점령정책은 한국의 민족운동에는 치명적인 결과로 작용하였으며, 그 뒤 일부 사대주의자들의 지속적인 발로를 가능하게 하였다.
    토지개혁의 문제는 당시 8할이 농민이었던 남한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농민의 지주에 의한 수탈의 비인간적인 대우는 더 이상 이러한 제도의 존속을 용납할 수 없었다. 농민들의 욕구는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자들은 그 정책의 기본적 성격이 남한에서의 보수세력의 보호육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소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남한사회를 격심한 계급갈등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마지막으로 정부수립의 문제는, 사실상 남한에서의 각 정파간의 타협은 물론이고 그것에 기인한 남북한간의 단일정부가 수립되어야 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의 각 정파간의 대립 갈등은 미군정에 의하여 오히려 고취되는 면도 없지 않았다.
    때로는 좌우합작을 종용하면서, 때로는 미군정청 입법의원을 통하여 보수우파의 지원을 도모하였는가 하면, 남북협상까지 시도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난조는 당시의 상황을 극도로 혼란 속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 당시 이미 북한에서는 소련점령군사령관의 휘하에 소련계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식적으로는 인민위원회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철두철미한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공고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단지 한반도문제에 대한 책임전가의 의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와 연이어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는 결국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 이관시켰다.
    당시 국제연합은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내세우면서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결정은 국내의 보수세력에게는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였다.
    1948년 5월 10일의 제헌국회의원의 선거와 7월의 헌법제정,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선포는 이러한 국내외적인 과정에서 치러졌던 결과이기도 하였다.
    남한단정론의 제기와 때를 맞추어 북한에서도 단독정부수립의 형식적 절차를 마침으로써 마침내 남북한간의 분단체제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분단체제는 궁극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강대한 원심력에 의하여 전개되었던 민족분열이었고, 순정민족주의자들의 패배를 의미하였으며,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에서의 민족주의세력의 쇠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 5. 이승만의 권위주의통치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념적으로는 정통적 민족세력의 가치체계를 기반으로 하였다. 정통적 민족세력은 국내에서의 우파민족세력과 국외의 상해임시정부계의 법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념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에서는 한반도에서의 유일합법정부로서의 법통을 강조하였으며, 이것은 곧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전체 민족성원의 열망을 총결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대한민국의 헌법에서는 또한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것은 정치형태로서는 공화제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의 지향을 의미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이념적인 지향은 민족주의·민주주의 및 경제적 발전을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시민사회를 지향하였다. 이와 같은 이념적 지향은 구체적인 정치권력의 구조화과정에서는 몇 가지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즉, 5·10선거에서 상해임시정부계 일부 인사들의 불참 및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과 좌파의 선거 거부 등은 민족성원의 총의적 결집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이들의 선거불참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였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남북한의 이질체제를 조성시키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주장은 이념지향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미 그 당시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붉은 군대의 강압적인 통제하에 공산주의정권이 가동하고 있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공산화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5·10선거의 불참세력은 현실상황에 대한 인식보다 당위성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셈이었다.
    또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권력의 구조화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를 던져주었다. 첫째 친일파세력에 대한 완전한 숙정을 단행하지 않았으며, 둘째 식민지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근원적으로 변혁시키지 않았고, 셋째 미국의 영향을 차단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즉, 첫째의 친일파들은 광복 후 한때 몸은 숨겼지만, 이승만의 등장을 기화로 하여 북한의 공산주의자와의 대결에서 그들의 지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 부분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둘째의 사회의 근원적 변혁은 일종의 전근대적 사회구조, 특히 지주·소작 관계라든가 전통적 지배체제의 온존 등을 완전히 변혁시켜 사회가치의 공정한 재배분이 요청되었지만, 이 점에서는 보수우파세력의 정치권 합류로 인하여 일종의 부분적 개량으로 시종되었다. 이 점에서 사회적으로는 전근대적 권위구조의 지속으로 이행되었다.
    셋째의 미국의 영향은 이승만 정부에서는 행정의 실무책임자나 권력구조의 핵심인사들 중 상당수가 미국에서 수학하였던 친미적 인사로 충원되었다. 그 결과 중요한 정치행정제도들, 가령 군사·경찰·교육 제도 등은 미국제도를 모방하였으며,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를 미국지향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행정체제는 민주주의적인 성격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민주시민적인 정치문화의 결여, 일부 지도체계의 충원의 한계, 민족분단상황 등에 의하여 ‘위로부터의 통치’라는 지배양식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기습적인 남침에 의하여 보다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시체제라는 상황적 여건이 이승만지배체제를 권위주의체제로 귀결시켰으며, 이러한 성격은 마침내 1960년 4월혁명에 이르기까지 경직적으로 심화되었다.
  1. 6. 소결론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를 지난 100년의 기간 동안 고찰하였을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경제적 토대의 발전과 정치적 상부구조 간의 역전관계의 성격을 지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통설적인 논리에 의하면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로서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결정론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에서는 오히려 정치적 성격이 경제적 토대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②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정치상황의 결점은 국제관계의 상황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지정학적 성격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주변의 강대국에 의하여 격심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조성된 민족적 주체성의 한계를 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③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주의적 지도세력과 영향력의 한계를 찾아볼 수 있다. 민족주의 정치세력의 영향력 한계는 결국 분단지향적 인사들의 강대국 추수노선에 의하여 민족주의세력을 억압하고 심지어 강대국의 종속적 상황까지 수용하는 일면도 보여주었다.
    ④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 계층의 성장이 극도로 위축되었기 때문에 왕조체제하의 신민적 수동성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위로부터의 억압체제가 사회제도적 성격으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영역에서의 자발적인 성장이 그만큼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에서 민중 부분의 자기세력강화에 의한 지배세력에 대한 도전은 결과적으로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권위주의체제적 성격을 가속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해방시기까지 한국의 정치사에서 실제적인 중요한 결정은 한국민족의 내재적인 민족·민중 역량의 결집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강대국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하여 자행될 수 있는 속성을 지속화시켰다.
    ⑤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에서 실제 정치과정은 통합과정의 의미보다는 배척과정의 성격이 강하게 지배하였다. 다양한 사회세력과 정파들을 통합적으로 조정하기보다는 이들 정파들을 분리하고 배척함으로써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정치과정에서의 격심한 대결이 민중부분과는 단절된 채 지배세력간에 자행됨으로써 한정된 정치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고려할 때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의 기본적 성격은 조선왕조시대의 아시아적 전제정치와 준 가산관료제적 성격이 그 뒤 일본식민지통치에서의 군국주의적 식민체제를 거쳐서 해방의 시점에서는 일종의 ‘권위주의체제’의 성격으로 전락됨으로써 마침내 분단체제라는 민족적 비극을 조성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민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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