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형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궁내부특진관, 규장각학사, 중추원찬정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여문(汝聞)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8년(철종 9)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남양(南陽)
출생지
서울
정의
대한제국기 궁내부특진관, 규장각학사, 중추원찬정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문(汝聞). 서울 출신. 홍재룡(洪在龍)의 손자로, 판서 홍석종(洪奭種)의 아들이며, 헌종의 비인 효정왕비(孝定王妃)의 조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4년(고종 11)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대교에 임명되었다. 이어 장령·부응교를 거친 뒤, 1877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여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개성부유수로 승진하였다가, 1884년 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 1887년 성균관대사성, 1888년 대사헌·규장각직제학이 되었다. 예조참판을 거친 뒤, 1890년 지경연사(知經筵事)·형조판서, 1891년 한성부판윤·예조판서, 1892년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893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중, 황주에서 향촌 세력과 향리 등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이 민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난을 이끈 이관석(李寬石) 등을 엄벌에 처한 뒤 귀양보냈다. 또한 탐학하여 백성을 괴롭힌 자들을 엄하게 징계하였다.

1894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 해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8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95년 왕태후궁대부가 되었다. 그 뒤 국장도감제조와 장례원경(掌禮院卿)·명헌태후궁대부(明憲太后宮大夫)를 역임하였다.

1901년 판돈녕부사·명헌태후궁대부, 1902년 태의원경(太醫院卿)·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표훈원부총재(表勳院副總裁), 1903년 태의원경, 1904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표훈원부총재·판돈녕원사·홍문관학사·규장각학사·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중추원찬정(中樞院贊政)을 거쳤다. 1906년 이후에도 궁내부특진관과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일강 관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

1908년에는 교육·위생·환난을 서로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관진방회(觀鎭坊會)의 찬무장(贊務長)을 맡아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참고문헌

『고종실록』
『순종실록』
『문품안(文品案)』
『승정원일기』
『일성록』
『국조방목』
『갑신일록(甲申日錄)』
『일제침략과 친일파』(임종국, 청사, 1981)
『한국사강좌―근대편―』(이광린, 일조각, 1981)
「고종조의 민란연구」(박광성, 『전통시대의 민중운동』하, 풀빛, 1981)
『朝鮮紳士名鑑』(牧山耕藏, 日本電報通信社京城支局,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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