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한제국기 궁내부특진관, 규장각학사, 중추원찬정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882년 개성부유수로 승진하였다가, 1884년 이조참판 · 홍문관부제학, 1887년 성균관대사성, 1888년 대사헌 · 규장각직제학이 되었다. 예조참판을 거친 뒤, 1890년 지경연사(知經筵事) · 형조판서, 1891년 한성부판윤 · 예조판서, 1892년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893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중, 황주에서 향촌 세력과 향리 등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이 민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난을 이끈 이관석(李寬石) 등을 엄벌에 처한 뒤 귀양보냈다. 또한 탐학하여 백성을 괴롭힌 자들을 엄하게 징계하였다.
1894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 해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8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95년 왕태후궁대부가 되었다. 그 뒤 국장도감 제조와 장례원경(掌禮院卿) · 명헌태후궁대부(明憲太后宮大夫)를 역임하였다.
1901년 판돈녕부사 · 명헌태후궁대부, 1902년 태의원경(太醫院卿) ·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 표훈원부총재(表勳院副總裁), 1903년 태의원경, 1904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 표훈원부총재 · 판돈녕원사 · 홍문관학사 · 규장각학사 · 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 · 중추원찬정(中樞院贊政)을 거쳤다. 1906년 이후에도 궁내부특진관과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일강 관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
1908년에는 교육 · 위생 · 환난을 서로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관진방회(觀鎭坊會)의 찬무장(贊務長)을 맡아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문품안(文品案)』
- 『승정원일기』
- 『일성록』
- 『국조방목』
- 『갑신일록(甲申日錄)』
- 『일제침략과 친일파』(임종국, 청사, 1981)
- 『한국사강좌―근대편―』(이광린, 일조각, 1981)
- 「고종조의 민란연구」(박광성, 『전통시대의 민중운동』하, 풀빛, 1981)
- 『朝鮮紳士名鑑』(牧山耕藏, 日本電報通信社京城支局,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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