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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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예조참의,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언평(彦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3년(연산군 9)
사망 연도
1565년(명종 20)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수찬|응교|좌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의|이조판서|우의정
내용 요약

윤원형은 조선전기 예조참의,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03년(연산군 9)에 태어나 1565년(명종 20)에 사망했다. 153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경원대군을 세자에 책봉하려고 모의하였다. 인종이 즉위하고 윤임 등 대윤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가 명종이 즉위하면서 득세하게 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유관·유인숙 등 대윤을 제거하고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을 계기로 대윤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1563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문정왕후가 죽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예조참의,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 형조판서 윤계겸(尹繼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욱(尹頊)이다.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이며, 어머니는 이덕숭(李德崇)의 딸이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537년 권신인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 해 김안로가 사사되자 풀려나왔다. 그 뒤 수찬 · 교리 · 지평 ·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세자(世子, 뒤의 인종)를 폐위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 이환(慶原大君 李峘, 뒤의 명종)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모의를 진행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알력이 생겼다. 이에 1543년에는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하여 외척간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 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좌부승지 · 좌승지 · 공조참판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윤의 송인수(宋麟壽)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8개월 만에 붕어하고, 11세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이를 계기로 득세해 예조참의에 복직되었다.

대윤 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이기(李芑) · 정순붕(鄭順朋) · 임백령(林百齡)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안으로는 자신의 첩 정난정(鄭蘭貞)을 궁중에 들여보내 대비와 임금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다.

일찍이 이기가 병조판서가 되려 할 때 유관(柳灌)이 이를 방해했고, 임백령은 기생첩 때문에 윤임과 다툰 일로 원한을 품었으며, 정순붕은 평소부터 사림들을 미워해 언제든지 한번 분풀이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에 이들과 결탁해 윤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관 · 유인숙(柳仁淑) 등에게까지 화가 미치도록 음모를 꾸몄다. 음모의 내용은 “임금(인종)의 병환이 위중할 때에 윤임이 장차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임금의 아우(명종) 대신 계림군 유(桂林君瑠)를 세우려고 하였다. 여기에 유관과 유인숙도 협력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예조참의로 있던 윤원형에게 윤임 · 유관 · 유인숙 등을 처치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그러나 처벌을 반대하는 공론이 일기도 하였다.

즉 승정원을 거치지 않아 세인의 의혹을 피할 길이 없고, 또 신하의 의리는 자기가 섬기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인데 이제 와서 그 당시 대행왕(大行王)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심한 죄를 주는 것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그리고 왕실 외척간의 문제로 왕의 덕에 누가 된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결국 8월 29일 궁중에서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윤임 · 유관 · 유인숙 등을 사사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윤원형은 4, 5명의 악한 무리를 심복으로 삼아 평소에 원한 있는 이들을 유배 또는 삭직해 적대 세력을 도태시켰다. 을사사화 후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이 되고,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으로 개봉(改封)되어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위력과 권세가 높아지자 뇌물이 폭주해, 성안에 집이 열 여섯 채요,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것이 다 윤원형의 손에서 나왔다. 또, 아내를 내쫓고 기생첩 정난정을 정경부인에 봉하니, 권력을 탐하는 조신들은 그 첩의 자녀와 혼인을 하였다.

생살(生殺)의 권한을 잡은 지 20년에 사람이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1546년(명종 1)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었으나 윤원로가 유배되자 더욱 세력을 굳히고, 1547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 벽서의 내용은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봉성군 이완(鳳成君 李岏)참판 송인수 및 이조좌랑 이약해(李若海)는 사형되고, 이언적(李彦迪) · 정자(鄭滋) · 이염(李爓) · 임형수(林亨秀) · 노수신(盧守愼) · 정황(丁熿) · 유희춘(柳希春) 등 잔존 인물을 숙청하였다.

한편, 동지춘추관사로서 『중종실록』 ·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54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55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1557년 영중추부사, 이듬해 다시 우의정, 1560년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63년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리다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실각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향리로 쫓겨났으며,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소대기년(昭代紀年)』
집필자
이범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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