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신앙은 불력으로 국가와 왕실의 번영을 꾀했던 불교 신앙이다. 초기의 신라 불교는 호국신앙을 통해 국가안보를 지키고 국가 의식을 고취했다. 고려 시대에 호국신앙은 재앙을 막고, 이익을 증대하고 악을 굴복시키는 등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목적을 수행하였다. 배불로 일관한 조선 시대의 호국신앙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집약되었다. 1592년(선조 25) 왜군의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자 휴정과 그의 제자들이 분연히 궐기하여 승군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개를 표방하는 대승불교의 호법의지를 반영하는 역사적 사례이다.
불교 도입 초기에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호국신앙은 우리 나라 불교의 중요한 신행으로 이어져 왔다. 고대 한국 사회에서는 천재지변, 외적의 침입, 내란 등 국가의 중대사에 직면할 때 이와 같은 호국 법회의 개설이 상례였다. 특히, 신라에서는 어떤 실제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기도형(祈禱型)의 의례를 거국적인 차원에서 호국의 의지로 승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 실례가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이다.
이는 인왕법회 · 백좌법회 · 호국법회라고도 불리는데,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惠亮)이 그 법회를 최초로 개설하였다. 그는 거칠부(居柒夫)와의 인연으로 신라에 귀순하였는데, 신라의 초대 승통(僧統)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7세기 초반 수나라에서 귀국한 원광(圓光) 등이 주로 이 인왕경도량을 집전하였다. 특히, 신라통일 이전에 성행하였는데, 주요한 법회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608년(진평왕 30)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 닿았다. 백고좌도량을 열어서 여러 고승들이 경을 강설하였는데 원광이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② 613년(진평왕 35) 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황룡사에서 백고좌도량을 열고 원광 등 법사로 하여금 경을 강설하도록 하였다.
③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을 위하여 봉덕사를 창건하고 인왕경도량을 1주일 동안 열었으며 죄인을 방면하였다.
이 호국법회는 주로 인왕(仁王)에 의한 국토 수호가 목적이었고, 그 인왕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본질로 하고 있다. 즉, 지도자의 자질을 인왕으로 인식하였으며, 그 인왕은 반야의 예지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메커니즘에 의한 호국이라기보다 반야를 수행함으로써 정보(正報)의 국토를 지키는 일이 오히려 중요하게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호국이라는 현실적 목적을 중요시한 중국불교와는 다른 사상성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남북조시대의 북조(北朝)불교는 왕즉불(王卽佛)의 신앙으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원광은 그 북조 불교문화권에서 유학을 하였다.
이 호국신앙은 초기의 신라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국가안보라는 현실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원초적 심리의 반영이다. 둘째, 불교를 통한 국가의식의 고양이 가능해진다는 면이다. 씨족 중심적 국가관에서 통일에로의 의지 승화를 도모하려는 통일 전야의 신라 군왕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정신의 단합과 국가의식의 고취였다. 이 인왕법회가 거국적 행사로 유행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호국법회의 성격은 중국과 우리 나라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인왕법회만이 선호되었다기보다는 일련의 호국경전, 예컨대 『금광명경(金光明經)』 · 『대운경(大雲經)』 등이 모두 동격의 취급을 받은 반면, 신라의 경우에는 인왕법회가 성행하였다. 원광 이후에 등장한 자장(慈藏) · 원효(元曉) · 의상(義湘) 등에게는 예외 없이 이 호국신앙이 전승되고 있다.
신라 호국신앙의 또 다른 형태로는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당나라 군사의 내침을 격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고 명랑(明朗)을 상수(上首)로 한 신인비법(神印秘法)을 편 법회의식을 말한다. 그 의례는 물론 주술적(呪術的)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당시의 지적 수준과 관련을 맺고 있다. 즉, 불교가 갖는 현실 긍정성이 국가 의지로 승화되는 사회화의 한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이 호국신앙은 보다 주술적이고 의식주의적(儀式主義的)인 경향으로 발전해 나간다. 다분히 신비적이고 의타적인 경향을 띠는 이들 호국신앙 의례는 식재(息災) · 증익(增益) · 조복(調伏) 등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목적에 의하여 수행되어 가는 특징을 지닌다. 때로는 경전 고유의 종교성이나 사상성을 떠나 지역적이거나 민족적 성격에 의하여 이 호국법회는 운영되어 나간다.
고려 때의 호국법회는 매우 다채롭고 빈번한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 ·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 · 관정도량(灌頂道場) · 제석도량(帝釋道場) · 약사도량(藥師道場) · 문두루도량 · 인왕도량 · 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 ·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 · 염만덕가위노왕신주도량(閻曼德迦威怒王神呪道場) · 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 등이다.
이것은 고려불교의 성격이 매우 의타적이고 주술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주술적 성격은 호국이라는 이상으로 승화한다. 즉, 고려의 역대 왕실에서는 내우외환의 위협 앞에서 늘 호국의 의지를 제일의 이상으로 삼아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적 책임의식과 위기감은 민족주의적 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구체적 실례가 바로 『고려대장경』의 조조(彫造)이다. 대몽항쟁(對蒙抗爭)의 와중에서 대장경의 조조가 이루어진 것은 1236년(고종 23)이었다. 이 『고려대장경』을 다시 만들 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규보(李奎報)의 상세한 언급이 있는데, 몽고의 잔인성과 폭력성, 그로 인하여 소실된 부인사(符仁寺) 대장경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이 대장경의 재조(再彫)로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간곡한 호국의지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때는 1232년(고종 19)이었고,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설치된 것은 1236년이었다. 1237년부터 1244년(고종 31)까지 대부분의 판각은 끝났고, 1248년에는 대장목록(大藏目錄), 즉 함별(函別)로 수록된 목록이 완성되었으며, 1251년(고종 38)에 대장경 전질의 조조가 완간을 보게 되었다. 이 대장경 완간의 의의는 문화사적인 면보다 호국이라는 현실적 목적이 강하다.
몽고의 침입은 대내적인 결속을 필요로 하게 되며, 그 촉매의 구실을 담당한 것이 바로 고려대장경 조조사업이었다. 즉, 민족적 긍지를 집약시켜 몽고를 야만시하고, 이 역사(役事)의 당위성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인식시키는 절실한 지표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 대업의 완수를 이루려는 민족자존의식의 응결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이다. 이와 같은 호국의지는 일연(一然)이 살던 고려 후반에도 계승되고 있다. 즉, 『삼국유사』의 역사의식은 몽고 지배하의 고려인들에게서 민족의식의 고취와 호국성 강조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불로 일관한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호국의지가 천재지변을 없애기 위한 주술적 의례로 나타난 적이 많았다. 조선 때의 대표적인 호국 의례로는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 · 장경도량(藏經道場) · 식재도량(息災道場) · 불정도량(佛頂道場) · 용왕도량(龍王道場) · 무차대회(無遮大會)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호국법회는 그 빈도수에서는 고려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세조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치세(治世) 때를 제외하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기우(祈雨) 등 실제적 현상 때에만 그 식재에 초점을 맞추고 집행된 예가 있다.
그러다 조선불교의 호국신앙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집약되었다. 1592년(선조 25) 왜군의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즈음, 휴정(休靜)과 그의 제자들은 분연히 궐기하여 승군을 조직하였다. 이 승군의 조직은 이미 신라 말기에 상존하였으며, 국난 때에는 항마군(降魔軍)이라는 별칭으로 자원 운영된 예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공주의 갑사(甲寺)에 있던 영규(靈圭)는 휴정의 제자였다. 그는 의승군(義僧軍)을 규합하여 청주성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바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발발 후 첫번째의 승전보였다. 영규는 곧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끝내 전사하였다.
이즈음 묘향산에 있던 휴정은 왕명으로 팔도총섭(八道摠攝)의 직함을 받고, 전국 승려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전 불교도가 왜적을 쫓아내는 싸움에 가담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스스로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전국의 승군 최고의 영도자로서 승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의 제자 유정(惟政)은 관동지역을 중심으로 승군을 일으켰으며,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승군을 일으켰다.
이 밖에도 혁혁한 전공을 세운 승병장들로는 의엄(義嚴) · 경헌(敬軒) · 신열(信悅) · 청매(靑梅) · 해안(海眼) · 법견(法堅) · 쌍익(雙翼) · 해은(海隱) · 설미(雪眉) 등이 있다. 배불의 박해 속에 있던 불교인들이 국난을 당하여 오히려 신명을 아끼지 않은 사실은 호국신앙을 계승한 한국불교의 특성을 나타내 주는 직접적 사례가 된다. 이것은 또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개를 표방하는 대승불교의 호법(護法)의지를 반영하는 역사적 사례였다.
우리 나라 불교에서 이 호국신앙이 정착하게 된 것은 원광으로부터였다. 전술한 인왕법회뿐 아니라, 걸사표(乞師表) · 세속오계(世俗五戒) 등의 일화에서 보는 대로 그의 활약은 주로 호국적 목적으로 귀결되고 있다 하겠다. 원광이 활약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까지의 신라 사회는 국가의식이 빈약하던 시기였다. 불교가 공인된 527년(법흥왕 14)부터는 70여 년 후이고 유학승 명관(明觀)에 의하여 불교 전적(典籍) 1,700여권이 도입된 지는 불과 30여 년 후이다. 일반인들의 불교 이해는 그 연륜과 마찬가지로 일천(日淺)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급격한 군사적 · 정치적 정세 변화는 새로운 가치질서의 확립을 요구하게 되었고, 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의 고취는 신라불교의 새로운 숙제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원광은 중국불교의 새로운 물결과 국가의식을 신라에 이식(移植)함에 있어서 불교를 일상생활에 적응시키고, 더 나아가서 그와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확고한 국가관을 확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 화랑(花郎)이라는 호국집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 자장이 활약한 7세기 중반의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은 이 호국정신의 구체적 시현(示現)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아홉 층의 탑마다에 구체적인 나라 이름이 지시되고, 그를 조복(調伏)받는 힘이 불력임이 강조되고 있다. 즉, 삼국통일을 위한 현실적 목적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호국신앙에서 ‘나라’라는 개념은 단순히 국가의 경계를 뜻하는 좁은 의미로 쓰일 수는 없다. 본질적으로 호국신앙은 중국적 불교의 형태이지만, 그것을 새롭게 부각, 전개시킨 면에서 한국적 특징이 있다. 그때의 ‘나라’는 결국 불교의 진리가 상존하는 대지라는 의미로 확대 해석되고 있다. 즉, 한반도라는 좁은 국토 개념으로서의 국수주의(國粹主義)를 탈피하여 ‘정법(正法)의 대지’를 지킨다는 대승불교의 일반적 특성을 답습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호국신앙은 호법의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신라의 오악삼산(五岳三山) · 사령지(四靈地) 등도 모두 호국신앙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지만, 그때도 또한 이 호법의지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호국신앙이 왕권의 강화나 국태민안의 수단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전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인왕경』 · 『대운경』 등을 강설하는 대법회를 여는 일을 항규(恒規)로 삼았지만, 6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그와 같은 모임이 열린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고려 말까지 800여 년 동안 이 호국법회가 주류를 이루어 오고 있다. 즉, 우리의 호국신앙은 단순한 국가안보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법수호라는 이상적 가치 기준의 현전화를 도모하는 성격으로 발전 해석되었다. 그와 같은 점에서 호국신앙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며, 거국적인 행사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