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

김시습 초상
김시습 초상
한문학
인물
조선전기 『매월당집』 · 『금오신화』 · 『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 문인.
이칭
열경(悅卿)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35년(세종 17)
사망 연도
1493년(성종 24)
본관
강릉(江陵)
출생지
서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시습은 조선전기 『매월당집』·『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인이다. 1435년(세종 17)에 태어나 1493년(성종 24)에 사망했다. 5세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 보던 책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었다. 생육신으로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며 유랑인의 삶을 살다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불교적 사색을 병행했으며, 선가의 교리까지 포괄하려고 시도하는 등 다채로운 면모를 보였다.

정의
조선전기 『매월당집』 · 『금오신화』 · 『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 문인.
개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 청한자(淸寒子) · 동봉(東峰)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생육신의 한 사람.

그의 선대는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이다.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 · 태현(台鉉)로 전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매월당집』의 세계도(世系圖)에 의하면 김인존(金仁存)이 맞다. 증조부 김윤주(金允柱)는 안주 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김겸간(金謙侃)은 오위 부장(五衛部將),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 선사 장씨(仙槎張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생애

김시습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莊陵誌)』 · 『해동명신록』 · 『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5세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 · 『시경』 · 『서경』을 배웠고, 겸 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 · 『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서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별세하였고, 당시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였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인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 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철원에 은거하였으며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김시습은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만나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교정(校正)하는 일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세조 11)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공조 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시편들을 지어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 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 · 양양 ·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육경(六經)과 자사(子史)의 글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 · 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東峯自畫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김시습을 비롯한 이맹전(李孟專) · 조여(趙旅) · 원호(元昊) · 성담수(成聃壽) · 남효온(南孝溫)의 절개를 칭송하여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

사상과 문학

그가 쓴 많은 시가 유실되었으나 중종 때에 정부관료들에 의해서 그의 시가 좋다는 의견으로 문집 편찬이 논의되었다. 이자(李耔)에 의하여 10여 년 동안 수집하여 겨우 3권으로 모아졌으며, 1583년(선조 16) 선조의 명에 의하여 윤춘년 · 박상이 모여진 자료들과 이이가 지은 전을 합해서 교서관에서 개주 갑인자로 23권을 간행하였다. 일본 봉좌문고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김시습은 지금까지 『금오신화』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 · 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으로 주목을 요한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의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李滉)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때에는 불교 자체를 엄격히 이단시하였으므로, 김시습과 같은 자유분방한 학문추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의 사상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분석이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만족할 만큼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 점은 그의 생애가 여러 차례의 변전을 보여 주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 또한 상황성을 띠고 있기에 일관한 연구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신귀설(神鬼說)」 · 「태극설(太極說)」 · 「천형(天形)」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의 신비론(神秘論)을 부정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론을 펴고 있다.

이는 유교의 속성인 현실을 중심으로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면과 맥이 닿고 있다. 잡저(雜著)의 대부분은 불교에 관계된 논문들인데, 그는 부처의 자비정신을 통해 한 나라의 군주가 그 백성을 사랑하여, 패려(悖戾: 도리에 어그러짐) · 시역(弑逆: 부모나 임금을 죽이는 대역행위)의 부도덕한 정치를 제거하도록 하는 데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은 그의 「애민의(愛民議)」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혹자들은 그의 성리사상이 유기론(唯氣論)에 가까운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불교의 천태종에 대해 선적(禪的)인 요소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특히, 「귀신론」은 귀신을 초자연적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철학적으로 인식하여, ‘만수지일본(萬殊之一本)’ · ‘일본지만수(一本之萬殊)’라 하여 기(氣)의 이합집산에 따른 변화물로 보았다.

그의 문학세계를 알게 해주는 현존 자료로는 그의 시문집인 『매월당집』과 전기집(傳奇集) 『금오신화』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전기집인 『금오신화』에 집중되어왔으며, 그의 시문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시문집인 『매월당집』은 원집(原集) 23권 중에 15권이 시로써 채워져 있으며,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도 시이다.

그는 문(文)에서도 각 체 문장을 시범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그의 사상편(思想篇)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김시습의 시는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2,200여수나 되지만 실제로 그가 지은 시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스스로 술회한 그대로 어릴 때부터 질탕하여 세상의 명리나 생업과 같은 것을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대로 산수를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나 읊으면서 살았다. 원래 시란 자기실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역대의 시인 가운데서 김시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말한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로써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시적 충격과,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적 동기도 모두 시로써 읊었다.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그는, 시를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했기에 시를 택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서 유출되는 모든 정서가 시로써 표현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도 고려하지 않았다. 실천적인 유교이념을 가진 그의 지적 소양에서 보면, 그는 모름지기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였고, 문장으로 경국(經國)의 대업에 이바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몸을 맡긴 곳은 자연이요 선문(禪門)이었으며, 그가 익힌 문장은 시를 일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문은 이단이요 시작(詩作)은 한갓 여기(餘技)로만 생각하던 그때의 현실에서 보면, 그가 행한 선문에 몸을 던진 것이나 시를 지음에 침잠한 것도 이미 사회의 상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행적이 괴기하다든가 그의 시작이 희화적(戱畵的)이라는 평가는 당연하였다. 우리나라 한시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김시습의 시에서도 가장 흔하게 보이는 주제적 소재는 ‘자연’과 ‘한(閑)’이다. 몸을 산수에 내맡기고 일생을 그 속에서 노닐다가 간 그에게 자연은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도 그 일부가 되곤 하였다. 평소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한 그는 특히 자연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현실에 대한 실의가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자연의 불변하는 영속성 때문에 특별한 심각성을 부여하고 비극적인 감정이 깃들이게 하였다. 일생을 두고 특별한 일에 종사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어쩌면 ‘한(閑)’이 전부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가지고, 자연과 함께 평화스러운 상황에 놓이기가 어려웠다. 한의(閑意)가 일어났다가도 세상일이나 다른 사물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흔들어 놓곤 하였다. 때문에 「한의(閑意)」 · 「한극(閑極)」 · 「한적(閑適)」 · 「우성(偶成)」 · 「만성(漫成)」 · 「만성(謾成)」 등 그의 시에서 보여준 그 많은 ‘한(閑)’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한일(閑逸)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의 시에 대한 뒷사람들의 비평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힘들이지 않고서도 천성(天成)으로 시를 지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생각이 높고 깊으며 뛰어나 오묘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이 모두 인상비평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인 자신이 “단지 시의 묘한 곳을 볼 뿐이지 성련(聲聯)은 문제 삼지 않는다.”라고 하였듯이 그의 시에서 체재나 성률은 말하지 않는 쪽이 나을 듯하다.

저서

그의 시 가운데서 역대 시선집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여 수에 이른다. 그의 뛰어난 대표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산행즉사(山行卽事)」(7절) · 「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7절) · 「도중(途中)」(5율) · 「등루(登樓)」(5율) · 「소양정(昭陽亭)」(5율) ·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5율) · 「고목(古木)」(7율) · 「사청사우(乍晴乍雨)」(7율) · 「독목교(獨木橋)」(7율) · 「무제(無題)」(7율) · 「유객(有客)」(5율)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도중」 · 「등루」 · 「독목교」 · 「유객」 등은 모두 『관동일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관동지방으로 떠났을 때의 작품이며, 대체로 만년의 작품 가운데에서 수작(秀作)이 많다.

『금오신화』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등 5편이 전부이며, 이것들은 김시습의 사상을 검증하는 호재(好材)로 제공되어 왔다. 그러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를 제외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담(怪奇譚)이다. 이 전기의 틀을 빌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결핍되어 있던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나라 역대 시인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 되었다. 그의 역사사상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문제를 풀어 가는 소재로 인식하였으며,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역사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이란 논문에서 역사적 위기도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파악하고, 항상 인간의 마음씀씀이를 중시하였다. 그가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한 점은 단순히 성리학적 견해만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이론이기도 하다. 또한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에서는 삼대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생활에 공헌을 하였기 때문으로 해석하였으며 인간의 고대문화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도 단군조선으로부터 당대까지의 역사를 문화사, 사상적으로 파악하여 발전적 역사관을 보였으며, 금오신화 중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

김시습의 저서로는 『매월당집』, 『금오신화』,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관호록』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1707년(숙종 33)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매월당집(梅月堂集)』
『한국유학사략』(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6)
『매월당집해제』(최진원,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73)
「김시습의 역사철학」(정구복, 『한국사학사학보』2, 2000)
「15세기 후반 이학적 우주론의 대두: 매월당 김시습의 천관을 중심으로」(구만옥, 『조선시대사학보』7. 1998)
「금오신화의 사상적 성격」(박혜숙, 『한국문학사의 쟁점』, 1986)
「김시습의 정치사상의 형성과정」(김용곤, 『한국학보』18, 일지사, 1980)
「매월당의 시세계」(민병수, 『서울대학교인문논총』3, 1978)
「김시습론」(민병수, 『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77)
「김시습」(정병욱, 『한국의 인간상』, 신구문화사, 1967)
「김시습고」(임헌도, 『인물한국사』, 박우사, 1965)
「김시습의 귀신관과 도교관」(정주동, 『조윤제박사회갑기념논문집』, 신아사, 1964)
「김시습의 문집과 저술」(정주동, 『경북대학교어문논집』2, 1964)
「김시습의 불교관」(정주동, 『경북대학교논문집』6, 1962)
「김시습연구」(정병욱, 『서울대학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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