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는 경기도의 중서부에 위치한 시이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부평과 인천을 합하여 신설한 부천군에서 유래하였다. 고구려시대에 주부토군이었는데 장제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150년 안남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 부평도호부로 개칭되었다. 1895년 군으로 강등되어 인천부에 소속되었다. 1908년 복숭아 과수원이 조성되면서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관광명소로 유명해졌다. 1957년부터 범박동 일대에 대한예수교부흥협회에 의해 신앙촌이 형성되었다. 수도권 전철이 개통됨에 따라 주거와 공업 기능을 분담하는 서울의 위성도시로 변모하였다.
지세는 남동부가 비교적 높고 북서부가 낮은 지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부에는 성주산(聖株山, 217m) · 할미산(153m), 중남부에는 원미산(遠美山, 124m) 등 200m 내외의 산들이 솟아있다.
서부에는 구지천 · 김포천이 북부에는 굴포천 · 미리내천 등이 북서 또는 북진하여 한강에 합류하고 있는데, 이들 하천 주변에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특히 북서부는 범람원의 하나로 토지가 비옥하고 동부간선 수로와 같은 수리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농산물 생산량이 많다. 기반암은 시생대의 결정편암계와 백악기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평균기온은 11℃, 1월 평균기온 -2.3℃, 8월 평균기온 24.1℃로 한서의 차가 크지 않은 편이나 같은 위도의 동해안 지역과 비교하면 겨울 기온이 낮다. 연강수량은 1,517㎜, 1월 평균강수량 5.0㎜ 내외, 8월 평균강수량 300㎜내외로 호우지역에 속한다.
이 지역에서 구석기나 신석기유물이 발견된 바는 없으나 한강유역에 신석기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고, 삼한시대에는 이 지역이 마한의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이 있었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신석기시대부터는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천시는 대부분의 시 · 군과 달리 전통시대의 행정치소가 위치한 곳이 아니며, 일개 자연마을 내지 면지역으로부터 성장 발전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역사적인 변천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천지역에 속했던 부평의 내력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부평은 고구려시대에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 칭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장제군으로 개칭되어 한주(漢州)에 소속되었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樹州)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鍊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되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를 두었다. 1150년(의종 4)에는 안남도호부로 승격되었는데, 안남이란 계양산(桂陽山)의 별칭인 안남산에서 따온 것이다.
1215년(고종 2)에는 다시 계양산의 이름을 따서 계양도호부로 개칭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는 길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1310년(충선왕 2)에 부평부로 개명, 강등되었으며, 금주 · 동성 · 통진 · 공암 · 김포 · 수안의 6개 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부평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조선조에 와서 도호부로 내려오던 부평이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강등되어 인천부에 속했다가 1896년에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1899년 경인선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부천지역에 소사역이 설치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인천부는 개항장에 한정되고, 그 나머지 지역과 부평부 그리고 남양군의 영흥면 · 대부면과 강화군의 신도 · 시도 · 모도 · 장봉도 등을 통합, 부천군이 신설되었다. 이때부터 부천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부평과 인천을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지금의 부천지역이 부평군 당시는 석천면(石川面) · 수탄면(水呑面) · 옥산면(玉山面) 지역이던 것이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이들 지역이 통합되어 계남면(桂南面)이 되었다. 1931년에 이르러 계남면이 소사면으로 개칭되었고, 1941년에는 소사읍으로 승격되었다.
소사는 복숭아로 유명한데, 수원의 딸기, 안양의 포도와 함께 경기삼미(京畿三味)로도 알려져 왔다. 소사에 복숭아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1903년경에 일본인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시험 재배한 때부터라고 한다.
1957년부터 이곳 범박동 일대에 ‘대한예수교부흥협회’라고 하는 종교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총 43만 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주택 · 공장 · 공공시설 등을 건설하여 1만 여 명이 입주했는데, 이곳을 신앙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63년에 소사읍의 7개 리와 오정면의 2개 리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고 작약도가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1973년에 부천군이 폐지되고 소사읍 일원을 중심으로 부천시가 신설되면서 과거 부천군의 소래면을 시흥군으로, 오정면 · 계양면은 김포군으로, 영종면 · 북도면 · 용유면 · 덕적면 · 영흥면 · 대부면은 각각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뒤 1975년에 오정면과 소래읍의 일부지역이 다시 부천시에 편입되었다. 1979년에 원미동으로 시청사가 이전되고, 1988년 남구 · 중구가 설치되었다. 1993년에는 오정구가 설치되었으며, 중구는 원미구로, 남구는 소사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6년 7월 소사구, 오정구, 원미구가 폐지되고 동 기능이 강화된 10개의 행정복지센터가 신설되었다. 2019년 7월 1일 36개 행정동이 10개 행정동으로 개편되었다.
2024년 1월 10개 광역동을 폐지하면서, 원미구 · 소사구 · 오정구의 3개 구를 복원하고 동시에 37개 일반동 체제로 전환하였다.
과거 부평군에 속한 면지역에서 최근에 갑자기 발전했기 때문에 유물과 유적이 없는 상태이다. 주요 사찰로는 연흥사 · 천군사 · 석왕사 등이 있다.
부천시를 흐르는 하천으로는 굴포천이 있는데, 이 내를 따라 운하를 파려던 김포굴포(金浦掘浦)로 유명하다. 김포굴포는 인천쪽의 황해와 김포쪽의 한강을 연결하여 배를 이곳으로 통행하게 하려던 운하계획이었다. 이 굴포천에는 지금 부천시 오정구 오정동과 인천광역시 계산동 사이에 한다리[大橋]라고 하는 다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중앙교(中央橋)가 세워져 있다.
심곡동에는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궁시장의 김박영이 있다. 성주산 기슭에는 육각정이 자리하고 있어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소사동에는 시 보호수인 쌍느티나무가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부평향교 · 문학향교(文鶴鄕校)가 있었다. 현재의 춘의동 · 범박동 · 송내동 · 성곡동 · 원미동에는 사설 서당이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은 1895년 「소학교령」이 공포되었으나, 부천에 소학교가 없어 신교육에 관심을 둔 사람의 자제들은 인천계산공립소학교(현재의 부평초등학교)와 시흥 · 안산 · 김포 양천리 등의 소학교에 다녔다.
그 뒤 1922년 소사심상소학교(현재의 부천남초등학교)가 최초로 설립되었으나, 주로 일본인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한국인 학교로는 1925년 소사보통학교(현재의 부천북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31년 오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45년 8 · 15광복 후에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1개교, 기술고등학교 2개교가 설립되었다. 1973년 시로 승격됨에 따라 시역 확장과 인구 증가로 교육기관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2개교, 중학교 45개교, 고등학교 30개교가 있다.
전문대학은 유한대학교 · 부천대학교 등 2개교, 대학교는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 서울신학대학 등 2개교가 있다.
사회 · 문화 · 교육기관으로는 한국예술인총연합회 부천시지부가 있어서 음악 · 미술 · 무용 · 건축 · 사진 · 문학 등의 여러 분야에 걸친 문화예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 1965년에 발족한 부천문화원은 각종 문화예술행사는 물론 『복사골문화』를 출간하여 지역문화의 계승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그리고 범박동 일대에는 종교취락인 신앙촌이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석천면(현재의 송내동) 일대에서 성행했던 고두마리농악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매년 김매기가 시작되면서 음력 칠월백중 세벌매기 때까지 지속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송내동 주변 마을인 상동 · 중동과 지금은 인천광역시에 편입된 구산동 일대 마을에서 농기(農旗)를 만들었는데, 제일 먼저 만든 마을이 상좌(上座)를 차지하게 되어 있어 일명 상좌다툼놀이라고도 하였다.
놀이방식은 지난 해 패자이었던 마을에서 승자와 패자가 일렬로 서면 패자마을의 농기가 승자마을의 농기에 예를 올리는 상견례를 한다. 이어 승자마을에서 한마당놀이로 흥을 돋우고 나서, 기와 기가 맞대어 상대방 기를 쓰러뜨리는 농악놀이가 진행된다.
이 고장의 동제로는 오월단오 또는 섣달에 행해지는 장말도당굿이 있다. 도당굿은 송내동의 장말에서 지내는 굿으로 도당굿 또는 고창굿이라고도 하였다. 세습무들에 의하여 행해지는 한강 이남의 안성 · 수원 · 오산 · 평택 · 김포 · 시흥시 · 소사 등지의 도당굿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장말은 덕수장씨가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는 할아버지당(큰당)이 있고, 마을 중앙 당나무 밑에는 할머니당이 있다. 굿의 순서는 당주굿 · 부정굿 · 도당모셔오기 · 돌돌이 · 장문잡기 · 시루말 · 제석 · 터벌림 · 손굿 · 구능굿 · 중굿 · 도당할아버지굿 · 도당할머니굿 · 도당모셔들이기 · 뒷전의 순으로 진행된다.
도당할아버지는 장씨 중에서 세습되는데, 무당은 아니고 단지 당신이 실려 도당굿을 할 때 당신을 모시고 도당굿 절차에 실수 없이 굿을 할 수 있도록 지휘, 감독하는 구실을 한다.
이 지역에는 지명유래담, 자연물에 관한 설화, 이인 · 악인설화 등이 전한다. 송내동의 「서도사설화」는 인과응보를 말하여주는 악인의 이야기이다. 포악하고 인색한 서도사는 인근의 전답을 모두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하루는 남루한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는데, 재워주기는커녕 하인을 시켜 곤장을 치게 하였다. 매 때리는 것이 서툴러서 그랬는지 매 몇 대에 과객이 맥없이 죽어버렸다. 시신을 묻으려고 하는데 몸에서 숨긴 마패가 나왔다. 과객은 암행어사였다.
이 소문이 퍼져가자 서도사는 강화도 소실집으로 피해다니다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서도사가 죽은 뒤, 그 가족 중에 두 명이나 정신병자가 나왔고, 가세도 기울어 살기가 곤궁해져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가계마저 끊어지고 말았다고 전한다.
범박골의 「배못탱이전설」은 이 마을의 형성 유래담이기도 하다. 배못탱이는 동구밖 느티나무의 이름인데, 이 나무의 동남쪽은 하천 · 평야지대로 매우 지형이 얕은 곳이다. 옛날 큰 장마가 져서 이 일대에 물이 범람하자 몇몇 사람이 뗏목을 만들어 높은 곳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산과 산 사이의 구릉을 따라 분지에 이르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어서 여기에 배를 매고 상륙하여 마을을 이루니 바로 지금의 범박골이며, 느티나무는 배를 매었던 곳이라 하여 ‘배못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귀신과 바둑을 둔 담력 큰 원님에 대한 설화도 있다. 옛날 부평에 원님이 부임만 하면 죽어가므로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한 사형수를 고을 원으로 보내었다. 부임한 원님이 첫날밤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는데 일진광풍이 일어나며 촛불이 꺼지고 옥관자(玉冠子)를 한 선비 차림의 귀신이 나타났다.
원이 이 밤중에 어인 행차시냐고 인사를 건네자, 귀신은 신천면에 묻혀 있는 하씨인데, 자신의 묘 주위에 있는 소나무를 도벌꾼이 자꾸 베어가니 이를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려고 여러 번 고을 원님을 찾아왔으나, 그때마다 원님이 죽어 소원을 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다음 날 원님을 장사지낼 준비를 하고 있던 아전을 앞세우고 하정승의 묘를 찾아가 도벌꾼을 잡아 엄히 다스렸다. 그러자 이날 밤 다시 찾아온 하정승은 고맙다고 사례하며 바둑을 두자고 하여 그 뒤 날마다 찾아오는 것이었다. 원님은 밤마다 귀신과 바둑을 두느라고 몸이 수척해지자 아전들에게 귀신 쫓는 방도를 물어 복숭아를 준비해두었다. 다시 찾아온 하정승에게 복숭아를 권하니 “주책없이 내가 매일 왔다.”며 “잘 있으라.”하고 떠난 뒤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현재 시흥시 신천동에 하정승의 묘가 있다. 이 밖에도 동네에 자주 화재가 나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는 「신도비전설」, 봄철 나뭇잎이 위에서부터 피어 아래로 내려오면 풍년이 들고 그 반대이면 흉년이 든다는 소사동의 「쌍느티나무전설」 · 「하우고개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노동요 중 여성노동요가 중심이 된다. 다른 노동요나 비기능요가 거의 없는 것은 서울과 인접해 있어 일찍 소멸되거나 미처 채록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여성노동요로 구체적인 작업과 관련있는 「바느질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해바다 한가운데/노상나무 한그루에/동편가지 죽은 후에/해오라비 앉았구나/소음잣을 서른석대/고이고이 솎아내어/명주애기 짝저고리/아삭바삭 말라내어/동편가지 걸어넣고/들며나며 바라보니…….” 이 노래는 바느질을 하며 온 정성을 쏟는 여성들의 아뜰한 정을 낭만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소박한 내용과 표현을 지니면서도 4 · 4조를 기본 운율로 하는 음영민요이다.
여성들이 일을 하거나 유흥에 두루 부르는 노래로는 혼인하자 아내를 잃은 불행한 신랑의 넋두리를 잘 표현한 「배좌수딸노래」가 있고,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문답형식으로 읊는 「시집살이노래」도 있다. 이 밖에 길 떠난 부모형제의 안녕을 비는 「부모요」,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쥐노래」 등 여성들의 섬세하고 애틋한 정이 소박하게 잘 표현되었다. 또한, 4 · 4조의 형식을 지닌 음영민요가 전해진다.
전 토지의 33.8%가 경지이고 대지는 24.5%, 임야 19.5%, 도로 9.9%, 공장 5.1%이다. 경지 중 논 982㏊, 밭 282㏊인데 인구의 증가와 공업단지의 증가로 경지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최근에는 논이 연평균 10%씩 감소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감자 · 고추 · 배추 · 오이 등이 생산된다. 과실류로 포도 · 복숭아 등이 생산되고 있으나 생산량이 계속 줄고 있다.
주요 임산물로 밤 · 은행 · 대추 등이 생산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 인구의 0.6%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 인구의 10.5%이다. 주요 광산물로 석회석이 생산되며, 제조업은 조립금속업 · 비금속제조업 · 화학공업 · 섬유공업 · 종이 인쇄업 · 자동차 공업 · 전자 공업이 발달하였다.
상업 시설은 14개가 있는데 일반 시장은 10개 그중에서 심곡동에 자유시장이 입지하고 있으며 부천역 지하에 대규모 상가 이외에 백화점 · 연쇄점 · 쇼핑센터가 있다.
도로는 경인고속도로가 북부 지방을 동서로 지나고 국도 6호선이 경인고속도로와 평행하게 지나다가 내동에서 동북진하고 있다. 또 국도 46호선이 남부지방을 동서로 지나고 국도 33호선이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지방도로 339호선, 국도 46호선이 부천역에서 분기하여 북진하고 있다.
철도는 경인선이 국도 46호선과 나란히 동서로 지나고 있다. 경인 철도는 1974년 전철화가 된 이후 승객의 증가로 복선화가 되었다. 부천시는 철도와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경인 철도는 소사구와 원미구를 나누어 놓았고 경인고속도로는 원미구와 오정구를 나누어 놓고 있어 지역 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서울지하철 7호선은 2000년 8월 1일 서울 장암역∼부천 온수역 간 46.9㎞ 구간을 개통하였으며, 2012년 10월 온수역에서 부천을 거쳐 인천지하철 1호선의 환승역인 부평구청역을 잇는 10.2㎞ 구간을 연장하여 개통하였다. 부천시 관내에는 까치울역, 부천종합운동장역, 춘의역, 중동역, 부천시청역, 상동역이 있다.
수도권 전철이 개통됨에 따라 부천시는 서울과 인천이 주거 기능일부를 분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업기능도 분담하고 있는 서울의 위성도시로 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적하기만 했던 옛 소사는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한적한 시골 풍경은 사라져 갔고 타지역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복숭아 과수원이 만들어지면서 무릉도원의 복숭아 산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던 고장이다. 나지막한 산록면에는 4월이 되면 연분홍 복사꽃이 화사하게 만발하여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고 관광명소로 유명하였다.
특히, 소상동 · 심곡동 · 송내동지역이 그 대표적인 고장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포도와 딸기 재배도 유명하여 서울사람들의 주말 나들이 겸 휴식처로 인기가 높았던 관광지였다.
1973년 소사읍의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되고 나머지 지역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소사의 복사골은 점점 소멸되기 시작, 지금은 몇 군데 남아 있는 복숭아밭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요즈음에는 아파트단지가 확장되어 타지 사람들의 드나듦이 심한 고장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세조 때의 공신 변종인의 신도비가 있다.
최근 매년 봄이 되면 복사골종합예술제를 개최하고 미술전, 합창공연, 연극제, 체육대회 등 문화관광행사를 통하여 애향심을 기리고 있다. 최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부천만화축제 등의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국제관광도시로 발돋음하고 있다.
시의 남부에 있었던 구. 면적 12.8㎢, 인구 22만 2016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소사본동이었다.
본래 부평군(富平郡) 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평군 수탄면(水呑面) · 수곡면(水谷面) · 옥산면(玉山面) · 석천면(石川面) 등 4개 면 지역을 통합하여 17개 리로 구성하고 부천군 계남면(桂南面)이라 개칭하였다.
행정구역은 당시까지 주로 계남면에 해당하였다. 1931년 계남면이 소사면으로 개칭되었다. 1988년 1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제(區制)가 실시되었고 남구와 중구가 신설될 때 남구지역에 해당했다.
199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역곡 1 · 2동과 상동 · 중동 지역을 제외한 기존의 남구 지역 즉 경인철도의 남부 일대를 행정관할로 둔 소사구가 신설되었다.
2016년 7월 소사구가 폐지되고 동 기능이 강화된 행정복지센터가 신설되었다. 2024년 1월 소사구가 복원되었다.
남서쪽 경계에 성주산(聖柱山, 217m), 남쪽에 봉매산(129m) · 할미산(153m) 등이 있으나, 높은 산지는 찾기 힘들다. 도시화가 진전된 만큼 각종 사업체가 소재하는데, 특히 괴안동 · 송내동 일대에 식료품 · 목재품 · 지류 · 비철금속 관련 업체가 다수 분포한다.
교통은 구의 북쪽을 횡단하는 경인선 철도가 원미구와의 경계선을 이루며, 송내 · 부천 · 역곡 등의 역을 통과한다. 46번 국도가 경인선 철도와 함께 나란히 북부를 가로지르며, 북쪽 중앙지점에서 46번 국도와 교차한 39번 국도가 남쪽으로 종단하면서 남부지방으로 그 도로망을 이어간다. 이 외에 시도와 여러 도로망이 구 곳곳을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소사본동에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심곡본(深谷本) · 소사본(素砂本) · 범박(範朴) · 계수(桂壽) · 옥길(玉吉) · 괴안(槐安) · 송내(松內) 등 7개 동이 있었다.
시의 북부에 있었던 구. 면적 20.0㎢, 인구 18만 4073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오정동이었다.
본래 부평군(富平郡) 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평군 주화곶면(注火串面) · 상오정면(上吾丁面) · 하오정면(下吾丁面) 등 3개 면 지역을 통합하여 12개 리로 구성하고 부천군 오정면(吾丁面)이라 개칭하였다. 현 행정구역은 당시까지 주로 오정면에 해당하였다.
198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중구와 남구 중에서 중구지역에 속했던 곳이다. 1993년 개칭과 구역조정이 있었을 때, 기존 중구 지역 중 북부 일대를 넘겨받아 오정구가 신설되었다. 1995년 8월 23일 광복50주년 고유지명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오정구(吾丁區)를 오정구(梧亭區)로 한자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6년 7월 오정구가 폐지되고 동 기능이 강화된 행정복지센터가 신설되었다. 2024년 1월 오정구가 복원되었다.
서쪽 끝은 굴포천(堀浦川)이 인천과 경계를 이루며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다. 동부간선수로(東部幹線水路)가 남서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패어있고, 중앙을 관류하는 베르내천(비릿내)의 물길 또한 남북 방향이다.
농업이 주요 산업기반이 된 것은 먼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 물론 여전히 시 전체 생산량의 3 · 5에 달하는 미곡이 산출되나 다른 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정도이다. 3개 구 가운데 기업체수는 물론 종업원 숫자도 제일 많고, 각종 산업시설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주요 업종으로 석유화학 · 조립금속 · 지류 · 인쇄업 등을 들 수 있으며 관련 업체가 내동에 특히 집중되어 있다. 이 외에 오정동 · 역곡동 등에도 분포한다.
교통 통행량을 나타내는 경인고속도로가 내동인터체인지를 지나 구의 중앙을 시원스럽게 횡단하면서, 서울 · 인천간에 화물량이 많다. 그리고 서쪽에서 뻗어 나온 6번 국도가 구의 중앙을 지나 북서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39번 국도가 구의 서쪽을 종단하면서 다시 6번 국도와 접한다. 이 외 399번 지방도가 구의 중앙을 종단하는 등 여러 도로망이 잘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고강본동에 변종인(卞宗仁) 신도비가 있다.
작(鵲) · 여월(如月) · 원종(遠宗) · 고강(古康) · 오정(吾丁) · 대장(大壯) · 내(內) · 삼정(三井) 등 8개 동이 있었다.
시의 중부에 있었던 구. 면적 20.6㎢, 인구 44만 2898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원미동이었다.
본래 부평군(富平郡)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오정면과 계남면이 신설되었다. 현 행정구역은 주로 신설된 오정면 · 계남면 일대로 나뉘어 있었다.
198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2개 구 중에서 중구에 속했던 곳이다. 1993년 명칭의 개칭과 구역조정이 있었을 때, 기존 중구의 남부와 남구의 역곡동 일부와 상동 · 중동을 포함하여 원미구가 신설되었다.
2016년 7월 원미구가 폐지되고 동 기능이 강화된 행정복지센터가 신설되었다. 2024년 1월 원미구가 복원되었다.
남동부에 원미산(遠美山, 124m)이 있다. 3개 구 가운데 농가 인구가 가장 많으나 두드러진 농산물은 찾기 힘들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사업체가 다수 분포하여 고용인력만 10만 명이 넘는 각종 산업시설이 자리잡았다. 특히 도당동 · 춘의동 · 심곡동 일대에는 조립금속 · 전기전자 · 석유화학 · 인쇄 · 목재 업종을 중심으로 대단위 사업장은 물론 중소규모의 업체가 다수 위치하여, 이 지역 공업발전의 선도 역할을 담당한다.
시청사의 신축과 함께 고층아파트, 대형 백화점, 각종 문화시설과 휴식공간을 갖춰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가 이루어졌고, 최근 업무중심권과 상업중심권으로 각광받고 있다. 1997년에 ‘부천국제영화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시로서, 그 연장사업으로 상동택지개발지구 안에 영상테마파크를 조성하였다.
구 전체 인구의 1 · 2 이상이 거주하면서 인구밀도도 가장 조밀한 지역이다. 경인선 철도가 소사구와 경계를 이루며 구 남단 끝을 통과하면서 중동 · 역곡역을 지난다. 김포공항까지 연결되는 39번 국도가 중앙을 남북으로 달리고, 399번 지방도가 동쪽으로 39번 국도와 병행하여 이어진다. 최근에는 중동 신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중동대로가 완공돼 새로운 교통축이 되고 있다.
심곡(深谷) · 원미(遠美) · 소사(素砂) · 역곡(驛谷) · 춘의(春衣) · 도당(陶唐) · 약대(若大) · 중(中) · 상(上) 등 9개 동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