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

조선시대사
개념
조선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이민족의 침략에 저항한 자발적인 백성의 군대.
이칭
이칭
민병, 향병, 근왕병, 의승군, 의사(義士), 촌병, 의려(義旅), 의진(義陣), 의용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의병은 조선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이민족의 침략에 저항한 자발적인 백성의 군대이다.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1, 2차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시기에 활동한 의병은 활동 목표, 방향에 따라서 다소 성격을 달리한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향병과 근왕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의 의병은 일본군에 대한 저항과 국왕의 호위라는 명분에 따라 창의(倡義)하여 활동하였다. 병자호란 때의 의병은 근왕병의 성격이 강하였다.

정의
조선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이민족의 침략에 저항한 자발적인 백성의 군대.
의병의 개념

의병은 국난을 당할 때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적과 싸운 민병(民兵)을 말한다. 의병은 의병장과 그 예하의 병사를 합친 개념이며, 의병의 주력인 예하의 병사가 다양하였기 때문에 각기 달리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은 국가가 성립된 삼국시대 이후부터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부터 의병의 개념이 뚜렷해졌다. 그 까닭은 조선시대에 성리학(性理學)이 학문뿐만 아니라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을 당하자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양반 사대부들의 주도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사전적 어의로서 의병은 의(義)를 위하여 일어난 군대를 말하지만, 이는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달리 정의될 수 있다. 의병의 자의(字意)는 『오자(吳子)』 도국(圖國) 편에서 군대를 다섯 종류로 나누고, 첫 번째를 정의(正義)의 군대라는 의미로 의병이라 하였다. 즉, 폭도(暴徒)를 금하고 난리를 구하는 것을 의라고 하였다.

그런데 송대(宋代)에 금(金)나라의 침략을 받아 남송(南宋)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관병이 아닌 향병(鄕兵)을 단결시켜서 무기를 스스로 갖추고 관의 녹봉(俸祿)을 받지 않고 방위를 맡은 자를 의병이라 하였다.

송나라의 병제(兵制)는 금군(禁軍), 상군(廂軍), 향병, 번병(蕃兵)으로 이루어졌는데, 향병은 향촌 방위를 위해 조직된 민병으로서 당(唐)의 단련병(團練兵)과 성격이 유사하였다. 향병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지만, 특히 거란(契丹)과 서하(西夏)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북쪽 변경지방에서 발달하였다.

향병은 평상시에는 농경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전투에 가담하는 군사로서 둔전(屯田)과도 관련이 있다. 『송사(宋史)』 「병지(兵志)」에서는 향병은 호적에 올라 있는 자 중에서 선발하였는데, 간혹 토민(土民)으로 응모하여 단결 · 훈련된 바가 있으면 방수(防守)의 병사로 삼았다고 하였다.

정의로운 군대인 의병의 정신은 춘추의리(春秋義理) 정신에서 비롯하였다. 의리는 춘추의리와 대의명분으로 표현되는 유학의 일관된 가치관이며, 시대상황을 반영하였다. 의리는 공자(孔子)에서 비롯되어 맹자(孟子)를 거쳐 송나라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의(義)는 정당함으로 인식되었으며, 성리학의 단계에 이르면 의는 사물의 근본인 리(理)와 연결되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의리(義理)라고 인식되었다. 주희(朱熹)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통해서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중화사상의 역사적 발현이며 대의명분을 중시한 모습이다.

그런데 송대에 중국 한(漢) 민족을 침략하는 이민족에 항쟁하는 군사를 의병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대외관계가 중요시되면서 춘추의리, 이단론(異端論)이 중시되었다. 특히 송대에 실시된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16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시행 · 보급되었다.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 거주하던 도학자 여씨(呂氏) 4형제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내걸고 시행하였다. 이것을 후대에 남전향약(藍田鄕約)이라고 일컬었다. 이후 남송 때 주자(朱子)가 「주자증손여씨향약」을 문집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수록하였다. 향약은 향촌 사회의 규약이지만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추구하는 실천규범이 되었다.

성리학의 대외관계는 외환(外患)에 직면하고 있던 송나라에서 비롯되었다. 민족적 · 국가적 · 문화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던 송나라에서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정치체제의 구축이 요구되었다. 이에 군신(君臣) 사이의 도덕적 관계의 강화가 외적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긴요한 전제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성리학은 신분과 계급을 돌보지 않는 충절(忠節)을 강조하였다. 특히 주자(朱子)의 정치사상은 충절이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의무가 아니라 순결한 내심(內心)의 발동이며, 이것이 곧 천리(天理)라고 역설하였다. 때문에 성리학의 이기(理氣) 논리가 외적의 침입을 당하면 현실적으로는 민족적 저항을 고취시키는 이념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민족적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성리학의 정치사상은 그러한 위기의식을 역사의식으로 전용시키면서 공자 · 맹자 이후 단절된 춘추대의(春秋大義)적 유교정치 이념의 정통성을 재확립하고, 노장(老莊) · 불교(佛敎) 등의 이설을 이단으로 배척하게 되었다. 종래의 세계주의적 중화(中華)사상을 민족주의적 정향 위에서 재편성하면서 강력한 배외적(排外的) 이념을 함축하였다. 이에 금나라에 저항한 악비(岳飛)를 추앙하고, 진회(秦檜)를 간신(姦臣)으로 배척하였다.

송나라 때 이민족에 대항하는 정치이념으로, 그리고 이설에 대해 정통을 지키는 문화이념으로 형성된 성리학의 정치사상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조선왕조에서 채택된 성리학의 정치사상은 단순한 도덕적 가치체계나 학문체계를 넘어 새로 성립된 정치체제를 정당화하고, 통치구조의 원리를 제공하는 국가 이성(理性)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 건국 초에는 새로 받아들인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확립하기 위하여 노불(老佛)사상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까지도 사설(邪說)로 간주하여 이를 신봉하는 자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처단할 정도였다. 이후 성리학은 성종조에 이르러 왕조의 지도이념으로 정착되었으며, 동시에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정통사상으로 기능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정치집단이 사림(士林)이었다. 사림은 국왕의 통치권과 밀착하여 정치적 ·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던 지배계층이었다. 그들은 조선왕조 정치체제에서 성리학의 정치사상을 이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까지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사림의 정치이념은 성리학적 덕화교민(德化敎民)에 기초한 왕도정치(王道政治), 그리고 이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으로 지치(至治)를 강조함과 동시에 윤리적 차원에서 지치의 원리를 사(邪)와 위(僞)를 제거 · 척결하는 데서 찾았다.

사림의 정치이념은 정의를 보고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는 실천성이었다. 사림의 정치이념은 국내외로부터의 사(邪) · 위(僞) · 불의(不義) · 부정(不正)의 도전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발현되었다.

대내적인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시비의 정도를 밝혀내고 대외적인 도전에 대해서는 민족의 자존과 보위를 사수하는 순의(殉義) 정신으로 나타났다.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채용한 조선왕조가 이민족의 침략 앞에서 민족의 위기에 대처하여 적극적 저항의 자세를 보였던 것은 이러한 이념적 기반과 연결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자연발생적 의병 활동, 병자호란 후의 북벌사상, 조선 말기의 대외항쟁을 위한 의병운동 등은 모두 성리학의 정치이념과 연관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사림의 정치이념이 조선시대를 관통한 성리학의 정치사상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렇게 춘추의리는 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우선 고려 왕조의 부정 문제를 둘러싸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정통론과 더불어 중시되었다. 16세기에 사림파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성리학의 실천유학인 도학(道學)이 강조되었다. 사림의 입장에서는 의의 실천이 리의 실천으로 동일시되었다.

사림파의 일시적인 퇴조를 거치면서 성리학의 체계화가 이루어졌는데, 학문적 다양성이 나타나면서 실천적인 학풍이 강조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식(曺植)이었다. 그는 성리학 속에서 실천성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실천은 의리로 표현되었다. 그에게 의는 외향적인 실천성의 강조로 나타났다. 외침에 대해서는 화이론(華夷論) 입장에서 적극적인 토벌을 주장하였으며, 의리의 지침서인 『 춘추(春秋)』를 강조하였다.

조식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곽재우(郭再祐)는 춘추의리와 대의명분은 절대시하였는데, 국난이 발발하자 일본의 침략을 오랑캐의 침략인 왜란(倭亂)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창의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서구에서도 의병을 전쟁사적인 측면에서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일어나 조직된 의용군(義勇軍)과 국왕에 대한 충성과 절의(節義)를 위해서 봉건관료들로 조직된 충의군(忠義軍)으로 구별해 사용한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

의병이란 의(義)로써 뭉쳐진 군인이다. 그러므로 의병은 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의를 위해 싸워야겠다는 투철한 정신력을 갖는 군인이 진정한 의미의 의병이다. 말하자면 의를 위해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것이 의병이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에 대해 중세 봉건사회에서 전개되었던 충의군으로만 파악한다면, 백성들의 역할과 활약상을 사상시켜 버릴 소지가 많다. 임진왜란 때 의병은 의병에 참여해 활동한 상하 계층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민병(民兵)이나 향병이 적합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은 『 선조수정실록』에 “군사를 소모(召募)하는 사람이 곳곳에서 있게 되어 의려(義旅)를 거두어 모집하여 각자 군을 삼았는데, 주현(州縣)의 호소(號召)를 받지 않은 자를 의병이라 하고, 수령이 군민을 조발(調發)하여 원수의 절제를 받는 자를 이름하여 관군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관군과는 달리 의병은 혈연적 또는 지연적으로 깊이 맺어 있어서 일본군을 만나 싸워도 향토를 보존하겠다는 신념이 강해서 쉽게 패하지 않은 특성이 있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병의 자발성과 자립성, 활동 목표와 창의 동기를 검토해야 한다. 첫째, 의병에 있어서 자발적 창의와 독자적 유지가 중요하다. 의병과 관군(官軍)을 나누는 기준은 자발성이 중요하다. 즉,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관권(官權)에 의하지 않고 자모(自募)에 의한 것이었으며, 관군은 수령의 조발(調發)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의병은 관인(官人)이 아니라 사적(私的)으로 맺어져서 의병장의 지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관군에 비하면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한편, 의병은 소모 방법에 따라 자모의병(自募義兵)과 소모의병(召募義兵)으로 구별할 수 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소모의병도 많았으며, 소모에 강제성을 띤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소모의병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침략을 일찍부터 오랫동안 받았던 경상우도에서 활동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경상좌도의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의 활동에서 알 수 있다.

실제 경상우도에서는 백성으로서 숨어 사는 자는 그 집을 불사르기도 해 군사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고 한다. 소모의병에는 세자 광해군(光海君)의 힘도 컸다. 그는 임진왜란 발생 후 분조(分朝)를 하자, 지방에서 의병을 직접 소모하였다. 소모의병은 의병 창의에 중대한 계기를 이루었다. 문치(文治)를 이념으로 하고 관료에 의한 통치를 시행하던 조선왕조에서 개인이 사병을 모집한다는 행위는 반역에 해당되며 위정자가 가장 위험한 행동으로 여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의병의 활동 목표나 창의 동기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은 향토를 중심으로 한 지역 방위에 목표를 둔 향병, 한성(漢城) 수복과 실지(失地) 회복에 목표를 둔 국가방위적 성격을 띤 근왕병(勤王兵)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영남 지방과 함경도 지방의 의병 활동을 들 수 있으며, 후자는 호남 지방 의병에서 나타난다.

실제로 전라도 의병의 이념은 국가방위의식이 강하였으며, 행동은 상경지향(上京志向)이 강하였으며, 다른 지역에 대한 지원이 적극적 · 조직적 · 통일적이었다. 반면에 경상도 의병은 향토방위적 의식이 강하였으며, 활동에 있어 지역적인 폐쇄성을 보였다. 이러한 차이는 일차적으로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으면서 창의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한 의병장과 호응한 의병들 사이에는 정치적인 입장, 사회적인 신분, 그리고 경제적인 이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을 결합하게 만든 요인이 있었다.

첫째, 의병장이 대부분 양반 중에서도 문반(文班) 출신이나 전직 관료로 대부분 야인(野人)이었다. 지방의 거족으로 평소에 배운 유교의 도학(道學)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근왕정신(勤王精神)이 지방의 유생들 사이에 팽배하였는데, 이들은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과 비겁함에 격분하였다.

둘째, 의병의 창의는 향토와 동족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민족 감정의 발로였다. 유교적 윤리를 철저한 사회적 규범으로 여기던 조선은 고려 말부터 왜구(倭寇)의 계속적인 약탈 때문에 일본인을 침략자로 여겼으며, 문화적으로 멸시하여 왜(倭) 또는 섬 오랑캐라고 불렀다.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의병의 창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은 지방에서 사회의 상층부에 있으면서 정신적인 지도층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층으로 농민과는 토지를 매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향토 침입은 그들의 사회적 · 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렸다.

한편, 백성들은 관권에 의한 강제징집으로 무능한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국의 전선을 전전하며 싸우기보다는 평소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의병장이 휘하에서 싸우기를 바랐던 것이다. 또한, 향토 주변에서 부모와 처자를 보호하기에는 관군보다 의병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였다. 조정에서도 의병의 창의를 촉구하기 위하여 의병을 공적인 군대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의 의병진 참가자는 줄을 이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은 해당 지역의 사정에서 일차적인 토대를 마련하여 형성 · 활동한 지역방위군, 즉 향병의 성격이 강하였다. 정탁(鄭琢)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에는 성심껏 토적(討賊)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의 편의를 위해 투탁(投託)한 자들이 행동을 임의로 하면서 절제를 받지 않고 단지 향리만 보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향병은 경상도와 함경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상우도는 일본군의 최초 침략지였지만, 어느 지역보다 의병이 빨리 일어나고 적극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을 선도하고 국난극복에 기여한 지방이었다. 경상우도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성리학이 보급되어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향당적인 기반이 광범하게 형성되었던 지역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과 백성이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질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고령 의병장 김면(金沔)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향청(鄕廳)에 연락을 취하였으며, 뒤에 김면 군에 합류한 이득춘(李得春)은 고령향안(高靈鄕案)을 작성하였다.

김면은 모병 과정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지역의 사림을 임용하였다.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기구는 소모의 과정과 의병의 운용에도 활용되었는데, 전쟁기에는 의병소(義兵所)라는 통제기구를 마련하였다.

전쟁을 당하여 직접적으로 향민(鄕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향약(鄕約)의 실시를 통한 사족 지배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향약의 시행에서 주목할 점은 하층민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조선 초기 이래 생활기반 속에서 존속하고 있던 촌계류(村契類) 등 기층민의 조직은 사족계(士族契)나 향약계(鄕村契)의 하부구조로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속하고 있었다. 즉, 향도(香徒)나 두레 등의 형태로 향촌 사회의 하층민 조직으로 존속하였다.

이런 조직들이 향약의 시행과 함께 사족 상층부의 조직과 결합하는 형태로 향촌 사회의 조직은 정비되었다. 특히 하층민의 성장을 전제로 한 동약류(洞約類)의 광범위한 존재는 향병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임진왜란 때의 향병은 촌과 면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지역병이었으며, 대부분 순수한 농민층과 하층민으로 구성되었다. 향병은 전투과정에서는 촌계의 순수 자위조직으로 거주촌을 중심으로 활약하다 사족의 의병 조직으로 흡수되는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고평동계(高坪洞契)의 규약에 복수창의(復讐義兵)란 조목이 추가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향병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전개된 의병에 참가했던 상하 계층 모두를 포괄하는 성격으로서 지역방위군이었다.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의 향병은 의병 자체를 말하며, 참가한 하층민의 역할과 성장을 고려한 용어였다. 임진왜란 의병이 조직되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향병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먼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병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관의 인식과 방법에서도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이 향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은 촌락공동체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상하 계층의 결집이 가능하였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은 의병을 소모하면서 각 지역의 재지사족을 소모관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경상좌도 감사 때 김성일은 영산의 신방주(辛邦桂), 창녕의 성안의(成安義), 현풍의 곽참(郭趲) 등을 지역의 소모관으로 삼았다.

안집사 김륵도 각 고을마다 이장(里長)이나 유사(有司)를 정하여 이들을 축으로 하고, 그 구성원은 모든 계층이 포함되는 연대의식으로 일체감을 갖게 하였다. 의병 활동에서 중요한 군량의 조달도 경내의 백성들을 파악하여 부유한 정도에 따라 할당하여 조달하였으며, 이때 초모의 임무는 각 사자(士子)가 거주하는 리(里)를 단위로 할당되었다.

다음으로 향병과 관련해서 유성룡(柳成龍)이 군제 개혁에서 향병제 실시를 주창한 점이다. 그는 각 군으로 하여 먼저 지역을 선정하게 하면 어느 마을이 있고, 그 면과 마을에서 넓고 좁은 것을 가려 초관(哨官)을 정하고, 각기 기총(旗摠)과 대총(隊摠)을 내보내어 향민을 연습시키자고 하였다.

유성룡은 송의 향병제 도입을 통해서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생겨난 속오군(束伍軍) 제도 시행을 위한 방편으로서 향병을 언급한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속오군은 지방 군현에 새롭게 편성되어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토적을 제압하고 변란을 방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속오군은 면리제(面里制) 아래에서 말단의 자연부락인 촌마다 소부대의 편제를 이루고 있어서 향도계(鄕徒契)와 같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국가에서 의병의 창의보다는 향병을 모집하도록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단결을 위한 일로 명령을 내렸다. 향병을 국가가 직접 모병하고 통제하고 있으며, 아울러 속오군의 편제가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 집단의 유형을 모병의 주체, 모병 방법, 집단 규모, 소모 지역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사민(士民)이 향병을 공동으로 소집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병 방법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구성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의병 활동 중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원(官員)으로 문반(文班) 출신이 많았으며 무인(武人)들은 소수였다. 그 가운데는 덕망이 있어 자기 고을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생(儒生)들이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을 근거지로 하여 이를 확대하거나, 더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소모했는데,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의병이 널리 일어나게 한 것은 조정의 의병장에 대한 직첩(職帖)의 부여였다. 임진왜란 직후 조정에서는 관군의 모병을 위하여 각 도에 선전관이나 안집사를 파견하여 모병에 노력하였지만 성과가 미미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발적인 의병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격려하고 의병 집단을 공적인 군대로 인정하였다. 의병장의 대부분은 전직 관료이거나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과 서얼(庶孽)이었다.

그들이 바란 것은 관직의 획득이었으므로 조정에서 의병장에게 관직을 부여한 것은 큰 영향을 주었다. 의병장들은 그들의 몸을 국가에 바치려 하였고, 그들이 소유한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아 의병의 규합에 필요한 병기의 제조나 군량에 충당하였다. 의병 부대가 소규모였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병기와 군량의 확보가 어려웠던 것도 이유였다.

의병장은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소수의 의병 집단보다 명망 있는 의병 집단에 통합되어 대부대의 의병군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진격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주요 요충지에만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는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지역은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적인 저항의 온상이 되었으며,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의병의 전략이나 전술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처럼 대부대로 정규전을 펼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지리와 지세를 이용한 유격전을 펼쳤다.

이는 의병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그들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의를 상실케 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출신지 의령의 세간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에게 육지전의 첫 패배를 안겼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이 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예로 이정암(李廷馣)은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 자원자의 성명을 「의병약서책(義兵約誓冊)」에 기록하였다.

그때 활동하면서 정한 군율(軍律)은 8조목이었다. 적과 부딪쳐서 패하여 물러나는 자는 참수한다.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 주장(主將)의 일시의 명령이라도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 처음에 약속했다가 후에 가서 배반하는 자는 참수한다. 논상(論賞)할 때 적을 사살한 자를 으뜸으로 하고 목을 베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 적의 재물을 얻은 자는 전부 상금으로 준다. 남의 공을 빼앗은 자는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상을 주지 아니한다. 이처럼 의병은 자체적인 군율을 엄격하게 하여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전체 숫자는 1593년(선조 26) 정월에 명나라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를 기준으로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이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의병의 활동이 활발했던 1592년(선조 25)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것은 관군이 차츰 회복되자 의병의 창의를 절제하고 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가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기존의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어 나갔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두드러진 각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전라도 담양의 고경명(高敬命), 나주의 김천일(金千鎰), 보성의 임계영(任啓英),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황해도의 이정암(李廷馣), 경기도의 우성전(禹性傳) 등을 들 수 있다. 지역적으로 유학이 발달한 남부 지방에서 의병 항쟁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는 승려들로 조직된 의승군(義僧軍)이 있었다. 의승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1592년 7월 이후 나라에서 승통(僧統)을 설치하고, 의승군을 모집하기 위하여 묘향산에 있는 휴정(休靜)[서산대사(西山大師)]을 불러들인 때부터였다. 그는 73세에 8도(道) 16종(宗) 도총섭(都摠攝)의 직책을 제수받아 전 승군을 관장하였다.

휴정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8도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을 모집하였다. 대표적인 의승장으로는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유정(惟政)[사명대사(四溟大師)], 호남 지리산의 처영(處英)을 꼽을 수 있는데, 모두 휴정의 고제(高弟)들이었다.

의승장으로 먼저 공을 세운 이는 영규(靈圭)였다. 그는 공주 청련암(靑蓮庵)에 있다가 난이 일어나자 스스로 의승장이 되어 의승군을 모집하여 800명을 거느렸다. 그는 청주성을 수복하는 데 조헌과 함께 공을 세웠지만, 금산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의승군은 1593년 1월 명나라 원군과 조선 관군이 평양을 수복할 때 유정이 모란봉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여 평양성 수복에 기여하였다. 1593년 2월 행주대첩에서 처영은 의승군을 이끌고 눈부신 활약을 하여 대첩을 이루는 데 공이 컸다. 의승군은 독자적인 전투를 하였지만, 대부분 각 지방에서 봉기한 의병진에 참가하여 그들과 합세하였고, 군량을 운반하는 등 그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초기에 큰 역할을 수행했던 의병은 전란의 장기화에 따라 점차 변질되어 갔다. 1592년 10월 이후에는 각 지방에서 의병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고, 이들 의병이 난입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다. 또한, 의병 중에는 명목뿐인 의병도 있었다. 그 이유는 관군의 징발을 꺼리는 의병들이 이름 없는 의병장의 휘하에 모였기 때문이었다.

100여 진에 이른 의병 중에는 안전한 곳에서 영세한 적이나 쫓고 전공을 탐내거나 관군과 대립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의병은 국가의 통제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행동으로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국가에서 의병을 해체시켜 나갔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비를 강화하고 초기 의병을 본뜬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을 조직하였다.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의 효시는 고경명의 큰아들인 고종후(高從厚)의 의병이지만, 복수의병군이 정식으로 광범하게 조직된 것은 1596년(선조 29) 12월부터였다. 즉, 일본군에게 부모 · 형제 · 처자 중에서 희생을 당한 자를 자원하게 하고, 그중에서 대장을 뽑아 수효의 다소를 불문하고 복수군(復讎軍)이라 칭하게 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수군은 소리만 요란했지 전과도 별로 없이 유야무야되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침입한 지방에서 자생적인 의병이 다시 일어났지만, 의병은 규합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소수로 구성되었다. 이에 소수의 의병으로는 향토에 침입한 영세한 적을 소탕하기도 벅찼다.

병자호란 시기의 의병

병자호란으로 알려진 전쟁은 정묘호란(丁卯胡亂)(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을 합친 용어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각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패배로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자는 데 있었다. 즉, 대부분이 근왕병(勤王兵)이었다.

호란 때의 의병은 침입을 당한 지역뿐 아니라 후방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일어났다. 침략을 받은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직접 적과 싸워 손실을 입히는 것이었다. 후방 지역에서의 창의는 모집한 의병을 한곳에 집결하여 싸움터로 나가서 관군의 무력함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호란 중의 의병 활동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였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혼란, 경제적 파탄, 사회적 불안이 연속됨으로써 왕조를 중심으로 한 당국과 백성 사이에 일체감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호란 때 의병은 적이 침범한 지역에서는 별로 뚜렷한 활동을 볼 수 없었다. 후방 지역인 호남과 영남에서 모의(募義) 활동이 전개되었지만, 북쪽 싸움터로 향하던 중 인조(仁祖)가 청나라에 굴복하자 그대로 해산해 버렸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세력이 된 서인은 대외 정책으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밀고 나가 멸망해 가는 명(明)에 친선을 표하고 후금(後金)과의 관계를 끊었다. 더욱 후금을 자극한 사건은 반란에 실패한 이괄(李适)의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가 부당하게 즉위했다고 호소했기 때문이다.

이에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1627년(인조 5) 3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평안도와 황해도를 차지하였다. 이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이 일어나 적에 맞서 싸웠다. 이에 배후의 보급로가 끊어진 적들은 평산에 머물며 강화를 제의하였다.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먼저 정묘호란 시기의 의병이다. 뜻밖에 후금의 침공을 받고 미처 손을 쓸 수 없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역량을 모아 적을 격퇴하기 위해 과감히 나섰다. 적이 통과한 청천강 이북 지역은 1월 말부터 의병 항쟁에 나서서 적의 배후를 끊고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청천강 이남과 황해도에서도 의병 부대를 편성하여 공격에 나섰다.

정묘호란 때 의병이 창의한 계기는 인조가 자기의 과실을 자책하고 백성들이 분발해 난국을 타개하도록 죄기교서(罪己敎書)를 발표한 후 김장생(金長生)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을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로 삼아 의병을 창의하여 근왕하도록 하면서였다.

정묘호란 때의 의병에서 으뜸가는 공적을 세운 것은 정봉수의 의병 부대였다. 정봉수는 임진왜란 때 무관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는데, 호란 때에도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용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용골산성에서 여러 차례 의병을 이끌고 수만의 후금 군사를 물리쳐 성을 지켜냈으며, 양민을 구출하는 등 관군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전과를 세워 적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정묘호란 때에 경상도호소사(慶尙道號召使) 정경세와 장현광의 활동으로 경상도의 근왕병과 의병이 창의하였다. 경상도 18개 읍의 의병장과 참모가 모여 3월 10일 충주에 의병을 집결시키토록 하였다.

예안현에서는 광산김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예안현의 사족들이 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예안현의 사족들은 의병청(義兵廳)[의병소]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임무를 나누어 활동하였는데, 군사의 동원보다는 대부분 군량 동원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실제 군사 활동은 거의 없이 강화가 추진되면서 의병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의병장의 선임을 둘러싸고 사족 상호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으며, 실제 의병으로는 노비들이 주로 동원되었다. 반면에 사족들은 의병소를 통하여 활동하면서 의량(衣糧)을 모으고 운반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다음으로 병자호란 시기의 의병이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가 교문(敎文)을 발표해 8도의 사대부들에게 의병을 창의하도록 하였다. 병자호란 때의 의병은 상당한 활기를 띠었다.

양호(兩湖)를 중심으로 하여 후방 지역에서 의병장의 주축으로 모병(募兵) · 모속(募粟) 등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후금의 점령 지역인 평안도에서도 의병 활동이 두드러졌다. 평안도 여러 지역에서 전직 관료가 중심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유적(遊敵)을 참살하는 등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성리학의 대의명분과 근왕정신에 따라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이 조직적으로 구성된 지역은 호남이었다. 청(淸)의 침입 소식이 전해지자 옥과현감 이흥발(李興浡) 등이 자진하여 의병 모집에 앞장섰다.

1636년(인조 14) 12월 19일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위급을 알리며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과 무기를 수집하여 청의 침략군을 무찌르라는 교서(敎書)가 전달되자 기병(起兵)의 움직임은 박차를 가하였다. 이들은 모의청(募義廳)을 설치하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어 각 고을에 모의도유사(募義都有司)와 유사를 나누어 배정하고 일제히 궐기하였다. 도내 각 읍의 의병 소모의 책임자는 도유사였는데, 도유사가 정해진 옥과 등 20개 고을에서는 적게는 2~3인에서 많게는 14인의 도유사가 있었다.

의병 소모에서 활약한 인사들 중에는 정묘호란 때 의병 막부의 핵심 간부로 활약했던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안방준(安邦俊)이 있는데, 병자 호남의병의 경우 정묘의병의 인사가 다수 참여하였다.

경상도에서도 김시회(金湜會) 등이 의병을 일으켜 여주에서 퇴각하는 경상감사 심연(沈演)의 군과 함께 조령과 죽령 사이를 잠행하였지만, 청군이 침입해 온다는 와전으로 도산하여 무위로 끝났다. 병자호란 때 경상도의 근왕병과 의병이 창의하여 활동하면서 12월 함창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상주 출신의 전식(全湜)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으로 삼았다. 예안현에서는 광산김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예안현의 사족들이 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사족들은 의병청[의병소]을 중심으로 임무를 나누었는데, 김광계(金光繼)가 의병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군사 동원보다는 대부분 군량 동원에 주력하였다.

실제로 군사 활동은 군사를 조직하여 의병도대장 전식 이하의 일부 의병이 남한산성 쪽으로 진격하여 경상도 근왕병에 합류하였지만, 쌍령전투 패배 이후 조령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동원된 군사도 대부분 노비들이었다. 이때도 군사 활동은 거의 없이 강화가 추진되면서 의병이 해산하고 말았다.

화의가 성립된 뒤에 박철산(朴鐵山)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용강 부근의 적산에서 적의 주력부대에 완강하게 저항하였는데, 적산은 뒤에 의병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병자호란 중에도 의승군의 활약이 있었다. 그 규모나 성과는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의 활약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난을 당하여 의승군이 봉기했다는 면에서는 같다.

정묘호란 때 의승군을 일으켜 활약한 명조대사(明照大師)는 병자호란 때도 의승군을 일으켜 의속(義粟) 수백여 석을 모곡(募穀)하여 군량에 충당토록 하는 등 공을 세웠다. 또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각성(覺性)은 지리산 화엄사에 있다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융복(戎服)[군복]으로 갈아입고 기의(起義)하였다. 그는 각 사찰에 격문을 보내 모인 수천 명의 의승군을 항마군(降魔軍)이라 부르고, 인조가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중도에서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한말의 의병

1. 의병의 이념

한말 의병의 이념적 기반은 조선왕조의 이념인 성리학 정치사상의 큰 흐름의 연장선에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다. 19세기 전반에 조선왕조의 정통적 성리학이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림에 의해서 재정비되어 학통이 이어지고, 19세기 중엽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충격이 시작되자 조선 성리학의 정통성을 계승한 사림들은 성리학의 정치사상 기조 위에서 척사(斥邪) 논의를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뿌리를 두면서 조선 후기에 등장한 위정척사론은 처음에는 서양의 이질 문화가 도전해 오는 위기 상황에서 이단에 대해 정학(正學)을 지킨다는 교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사상운동으로 발흥하였다.

조선왕조의 국가적 지도이념이면서 동시에 사림의 정치이념으로 기능했던 성리학의 정치사상은 점차 형식화 · 전통화함으로써 성리학으로서의 본질을 잃어 갔다. 이에 이를 시정하기 위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이 등장하였지만, 근본 정신은 유교적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비판이나 배척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서학(西學)이라 일컬어지던 천주교(天主敎)가 영 · 정조 시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천주교는 전통적인 예교(禮敎) 질서를 파괴하는 교리 및 행동을 수반하고 있었다.

부모와 선조의 제사를 부인하고 전통적으로 최고선으로 존중되어 오던 효(孝)와 충(忠)의 가치를 절하시키며,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질서 체계를 파괴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천주교는 성리학의 사상으로 규율되어 오던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위험사상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그 교세가 점차 커지고 반유교적 정신과 행동이 실천적 차원으로 드러나게 되자, 이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배척하는 동시에 성리학적 정치윤리 사상을 정학(正學)으로 지키고자 하는 위정척사론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천주교[서양 문명]라는 이질적인 문화가 도전해 오는 위기의식의 상황에서 성리학의 유교사상을 수호하기 위한 하나의 사상운동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위정척사론은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러 점차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노골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전반적인 변화와 파괴를 강요하는 구체적인 물리적 힘으로 다가오자, 강력한 민족적 자존의식을 바탕으로 한 구국의 지도이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말기에 등장한 위정척사 사상은 춘추대의와 벽이론(闢異論)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화이론적 세계관, 사대주의적 모화(慕華)사상, 그리고 보수성과 배타성을 강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바른 것[正]을 지키고 그른 것[邪]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 사상에서 정(正) · 사(邪)의 내용과 성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적 여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정으로 하여 지키고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문명을 사로 규정하여 물리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동시에 사대성과 보수성을 기본 성격으로 하는 위정척사론이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지켜야 할 정으로 설정하고, 반면에 물리쳐야 할 사를 서구 열강과 일제의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던 위정척사 사상의 성격도 민족자존과 구국애족의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 · 발전하여 나아갔다.

사실 조선 후기에 이황(李滉)의 주리론(主理論)은 영남 중심의 후학들에게 이어지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이진상(李震相) · 곽종석(郭鍾錫)에 이르러 이일원론(理一元論)으로 발전하여 위정척사운동의 흐름이 되었다. 또한, 이이(李珥)의 주기론(主氣論)은 호락논쟁(湖洛論爭)을 거치면서 서울 근교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과 이항로(李恒老) 등은 주리론을 이일원론으로 발전시켜 위정척사의 철학적 바탕을 이루었다.

위정척사 사상이 고양된 것은 병인양요 이후였다. 조선왕조 말기에 대두된 위정척사 사상은 이항로와 기정진, 그리고 이항로의 제자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등에 의해 크게 보급되었다.

특히,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은 김평묵에 의해 보다 발전적으로 집대성되는 동시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에 의해 실천적 차원의 의병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에 의해서는 의병운동의 연장선에서 항일구국 독립운동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최익현은 1876년(고종 13)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조약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그는 흑산도로 귀양 가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의 위정척사론과 위정척사운동의 방법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초기 상소(上疏)에 의한 평화적 위정척사운동으로부터 점점 의병 봉기를 통한 무력적 정치투쟁을 동원한 위정척사운동으로 변화하였다.

2. 한말 의병의 전개

한말의 의병은 크게 1895∼1896년의 제1차 의병전쟁[을미의병(乙未義兵)]과 1905∼1910년의 제2차 의병전쟁 [을사의병(乙巳義兵)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나눈다. 한편으로는 의병 봉기의 동기를 중시하여 봉기 연도의 간지(干支)를 사용하여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구분한다. 이를 전기 의병, 중기 의병, 후기 의병으로 부르기도 한다.

첫째, 을미의병이다. 을미의병은 위정척사를 위한 척사의병(斥邪義兵)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위정척사란 용어는 정조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천주교를 배척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척사의 주체 이념인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이었으므로 위정척사 사상은 조선 초기에 원류를 두고 있다. 이때 춘추대의는 척사로 이해하였는데, 다음에 척사의 주인공을 국왕으로 보았기 때문에 척사의병은 모두 근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을미의병이 모두 척사의병은 아니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을 계기로 일어난 안동의 서상철(徐相轍) 의진(義陣)이나 상원의 김원교(金元喬) 의진은 척사를 전제하지 않고, 충군 논리에 입각한 근왕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성리학 질서가 붕괴되는 위협에 당면하여 척사의병이 봉기했는데, 그때도 강릉의 민용호(閔龍鎬) 의진,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의진은 척사보다 충군의식이 앞섰다. 척사의병의 성격이 강렬한 의진은 유인석(柳麟錫)의 호서의진과 기우만(奇宇萬)의 광산의진이었다.

민중들은 을미사변의 국모 시해와 갑오경장의 단발령(斷髮令)에 항거하여 일본과 친일파 관료들을 응징하기 위한 무력투쟁을 벌였다. 의복제도는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서양식 복제로 바뀌었는데, 의복제도 개정은 유생들의 주체적인 문화인식에 충격을 가져와 반일 의병의 봉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음사(陰邪)로 상징되는 흑색의 복제 채택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였다.

한편, 유교 통념의 사회에서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써 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것은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의식으로 연결되었다. 즉, 유생들은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처사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은 반침략 · 반개화의 의병을 봉기하여 이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을미의병 봉기를 가능하게 한 사상적 요인으로는 유생들의 중심 이념체계라 할 수 있는 위정척사론과 일반 농민층까지 널리 퍼져 있던 척왜양창의론(斥倭洋倡義論)이다. 척왜양창의론은 동학농민군이 주창했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이념을 말한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세력들은 척왜양창의의 구호 아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정부의 일련의 정책을 반대하는 반제국 · 반봉건의 동학농민전쟁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은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주동하여 일어났으며, 충의(忠義)를 위해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었기 때문에 의병이라 불렀다.

단발령 공포 후 을미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을미사변 직후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다. 을미의병은 1895년 9월 18일 무과 출신으로 진잠현감을 역임한 문석봉(文錫鳳)이 유성에서 처음으로 봉기하였다. 이후 이천, 춘천, 제천, 홍주, 강릉, 안동, 진주, 장성, 나주 등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봉기한 점이 특징이다.

을미의병의 참여층은 지휘부와 병사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된다. 지휘부는 주로 관료 출신의 양반유생 또는 재지유생들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도 화서학파, 노사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 등 위정척사 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다.

을미의병은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철저한 척사적(斥邪的) 성격, 근왕성 반침략성, 반개화성을 띠고 있다. 을미의병의 척사적 성격은 유생 의병의 경우에는 반동학적 성격을 동시에 띠었다.

을미의병은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치열한 반개화 · 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을미의병의 지휘부를 이룬 인물들은 존화양이론에 입각하여 제국주의 세력의 정치경제적 침략에 성리학 질서를 수호하려는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한 바 있으며, 1894년 이후 일제의 무력적 침략에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반침략 의병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을미의병의 무장투쟁은 위정자와 일제 침략군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을미의병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제천의병의 경우 끝까지 고종의 해산 조칙을 거부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의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의병장들은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전국적으로 민족수호를 위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둘째, 을사의병이다. 을사의병은 1904년(고종 41)부터 1907년(고종 44) 전반기에 걸쳐 일어났는데, 을사의병부터는 구국의병으로 발전하였다. 을사의병은 을미의병 해체 이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한일의정서 등 일련의 침략 정책이 강제로 시행되는 과정에서 여기에 반발하는 운동이 의병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의병의 배경에는 여러 형태의 농민운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을사의병에서는 유림 의병이었다고 하더라도 을미의병과 같은 척사 이념은 부차적이거나 잠복하고, 구국 이념이 중심 개념으로 부상하였다. 성리학자라고 해도 성리학이 존립할 국가가 위태로운 형편에 성리학을 위해서도 먼저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을사의병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계기로 일어난 의병에서 비롯된다. 즉, 을사조약의 소동이 일어나기 전에 한일의정서나, 8월의 한일협약으로 나타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있었다.

이때 허위(許蔿) · 원용팔(元容八) · 정운경(鄭雲慶) 등과 같이 유림도 있지만, 보다 많았던 것은 활빈당(活貧黨) 등의 농민운동 조직이 의병으로 전환해 간 경우였다. 1896년(고종 33) 을미의병이 해산한 후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자료에 남학당 · 영학당 · 동학당 · 북대 · 남대 · 초적 · 화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때의 농민조직이었다. 그들은 1900년 무렵부터 활빈당으로 정비되다가 1904년부터 의병으로 전환해 갔다.

활빈당이 의병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경우가 신돌석(申乭石) 의진이다. 의병으로 전환하기 전의 1896년부터의 남학당 · 활빈당 등의 농민항쟁을 광무농민운동이라 하는데, 이념은 반봉건성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으로 표현된 일제의 침략을 맞아 반봉건이 실현될 근거인 국가가 위태롭게 되어 활빈당운동은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이때의 이념은 반제국주의적 구국 이념이었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때 무장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의병부대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을사의병은 1905년 11월의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원용팔 · 민종식 · 최익현 등이 봉기하였다. 이들 가운데 유인석 · 노응규 · 최익현은 사상적 계보를 화서학파에 두고 있으며, 전라도에서 일어난 기우만이항로와 함께 조선 후기 위정척사 사상의 양대 지주를 이루었던 기정진의 손자로서 사상적 뿌리는 위정척사 사상에 있었다.

의병 활동이 치열했던 곳은 충청 · 전라 · 경상도 지방으로 지도자는 유교를 숭상하는 전직 관료가 대부분이었다. 그 밑에는 농민들이 전투 병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광무연간에 활동했던 동학당 · 영학당 · 화적 · 활빈당의 무리가 다수 포함되었다.

을사의병은 을미의병 봉기 이후 10여 년 동안 변화된 시대적 여건을 변수로 여러 면에서 발전된 형태로 항일전쟁을 전개하였다. 이 단계의 의병은 이전의 을미의병, 1907년 하반기에 들어 계기적으로 연속되는 정미의병을 염두에 둘 때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을사의병은 일제 침략이 한층 강화되는 어려운 객관적 조건 위에서 활동을 시작되었다. 1904년 이후에는 수도 서울에 일제의 소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군 정예 병력까지 전국토를 침략하고 있었다.

1904년에는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을 강요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침략은 직접적이고도 절박한 국권 침탈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의병에 투신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 앞에 일신을 불사르는 살신성인의 구현이었다.

을사의병은 을미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는 지역성과 학통성, 혈연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가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의병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되어 가던 사실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을사의병 단계에서는 전술상의 변화도 점차 나타났는데, 단위 의병의 수는 늘어나고 편제 성원의 수가 감소하는 경향은 정미의병의 보편적 전술인 유격전의 형태가 등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산악지대가 의병의 근거지로 점차 비중을 더해가게 된다. 그만큼 일제 군경을 상대로 한 전투가 치열해져 갔음을 의미한다.

을사의병은 다음 단계의 정미의병으로 끊임없이 계기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을사의병은 일제 군경에 비해 여전히 화력 면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여 있어 큰 전과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을사의병 단계에서 활동하던 각지의 의병은 홍주의병과 산남의진 그리고 호남의 여러 의병의 예에서 단적으로 보이듯이, 1908년 군대해산 이후 전력을 한층 강화하며 활동의 폭을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되어 가는 의병전쟁의 초석을 다져 놓았다.

셋째, 정미의병이다. 정미의병은 1907년 7월의 광무황제[고종]의 퇴위와 정미조약( 한일신협약) 그리고 8월의 군대 해산 등의 망국 사태를 맞아 민족적인 규모의 의병봉기와 더불어 해산군인이 의병전선에 대거 참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이념은 다원적이고 다양하였다.

이강년(李康秊) · 이인영(李麟榮) · 이석룡(李錫庸)처럼 전통 유림의 충군적인 성향도 있으며, 허위(許蔿) · 민긍호(閔肯鎬)처럼 충군적이지만 근대국가를 지향한 성향도 있으며, 홍범도(洪範圖) · 김수민(金秀民) · 池龍起(지용기) · 안규홍(安圭洪)처럼 평민의병이 추구하는 반봉건적인 성향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념이 분명하지 않은 수많은 의진이 전국에서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념이 분명하지 않은 의병이 많았다는 것은 이념이 다양했음을 의미하며, 목표가 뚜렷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나 의병전쟁이 민족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논리를 극복하고 새 정치이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유인석은 백두산 일대의 지리적 조건이 유리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인적 · 물적 기반의 조성이 용이하며, 나아가 유사시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에 좋은 국제적 환경을 가지고 있는 곳을 거점으로 하는 근거지 이론과 장기적 구국투쟁의 전략을 내세웠다.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1910년 6월 13도 의군(義軍)을 조직하였다.

13도 의군은 국내외를 망라하여 계몽운동가와 의병운동가가 합류된 전민족적 연합의병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도총재에는 유인석, 참여 인물로는 이범윤(李範允) · 홍범도 · 안창호(安昌浩) · 이상설(李相卨)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정미의병 이후 국내 의병운동은 독립군 전투부대로의 연속성을 가지면서 발전해 갔다. 즉, 1909년(순종 3) 여름 이후 일본군의 남한대토벌과 일본의 조선병합으로 국내에서의 의병항쟁이 어려워지자 많은 의병들이 집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에 근거를 두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외에서 근거지를 확보하고 국내 의병운동을 독립군 전투부대로 연결 · 전환시키는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 다름 아닌 위정척사 사상의 거봉 유인석에 의해 주도된 의병부대였다.

유교적 충효사상에서 근대국가의 주권 옹호를 위한 독립전쟁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런 흐름은 일제강점기에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의병이 근대국가 이념을 확실히 갖추게 되는 것은 전환기 의병에 이르러 해외에서 계몽주의자와 함께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성취한 일이었다.

계몽주의자는 의병의 정의론과 무장방략을 수용하였고, 의병은 계몽주의자의 근대국가 이론을 수용하였다. 연해주에서 의병과 계몽주의자가 연합한 13도 의군의 결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한 뒤의 잔여 의병이 식민통치 속에서 항전을 계속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한말 의병의 이념이 이전의 것을 발전시킬 형편이 못되었던 것은 식민지에서 어쩔 수 없는 일로 이해된다.

정미의병은 의병전쟁사를 대표할 만큼 여러 가지 특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할 것은 정미의병은 해산병의 합류로 전투 조직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이 독립전쟁의 양상과 성격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그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지 않던 북부 지방에서 정미의병부터 의병이 크게 일어나 전국이 의병전쟁의 격전장이 되었던 점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예고하는 현상이었다. 실제로 1907년 말부터 전개한 13도 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의병전쟁의 격조와 높은 수준을 웅변하고 있는 역사적 계획이었으며 그의 실천이었다. 정미의병은 1908년이 의병 절정기였는데, 의병 봉기가 연 2000회, 참가 인원이 3만 6000여 명이었다.

한말의 의병이 민병이었으므로 부대의 편성도 정규 군대의 조직처럼 규모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유림에 의해서 비롯된 의병 조직이었으므로 전통시대의 편성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미의병까지 전투부대를 전군, 중군, 좌군, 우군, 후군 방식으로 편성하고 있었던 사실이 말해준다. 그러나 의병이 새로운 변화에 대처하여 근대 군대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한 한계를 엿볼 수 있다.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민군(民軍)이다.”라고 말하였다. 원초적 의병 집단은 농촌마을 주민의 자기방어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촌락은 전통적으로 향약 · 동계(洞契) 또는 촌계(村契)로 결속된 공동체 조직으로서 독자적인 자치단체로 존속해 왔다.

민군은 바로 촌락공동체를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향촌 행정의 최저 단위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원칙에 따라 조직되었으며, 군사행정은 십호일장(十戶一兵)의 원칙에 따라 선발되는 것이 상례였다. 10호 1병의 원칙에 따라 소집된 민병들은 다시 십병일초(十兵一哨)의 원칙에 따라 편성되었는데, 그 장을 초십장(哨十長)이라 하였다.

의병의 기본 편성단위는 전통적인 십장제를 바탕으로 하였는데, 상부조직은 전해산(全海山)의 「진중일기(陣中日記)」에 보이는 졸병(卒兵)- 십장(什長)- 도십장(都什長)- 도포(都砲)- 선봉(先鋒)- 대장(大將)의 수직관계로 구성되었다.

유명한 호남의병장 심남일(沈南一) 의진의 경우도 포졸, 기사, 보병, 서사(庶事)를 10명으로 편성하고, 통장(統長)이 이를 지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엄격한 군율을 정하여 의병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도록 명령하고 있다. 즉, 그의 「고시군중문(告示軍中文)」 9항에서는 ‘군율을 어긴 자는 난군(亂軍)이요, 적군(賊軍)이요, 도군(盜軍)'이라고 하였다.

이강년(李康年)의 속오작대법(束伍作隊法)은 의병 부대의 기본편제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실례이다. 속오작대법에 따르면 먼저 병사 10명이 좌우 2열 종대로 서고, 선두에 대장 1명, 후미에 소병(小兵) 1명이 서는 것이 의병군의 최하 단위의 기본대형인데, 이것이 대(隊)이다.

의병은 스스로 군율을 정하여 약탈과 토색질을 금하였다. 그것은 별도로 군자금 조달의 정당한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은 민군이기 때문에 국고의 지원이 전혀 없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민이 스스로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부담 원칙은 각 호(戶)의 재력에 따라 분배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부민(富民)이 군자금을 대고, 빈민이 민병으로 나가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외형상 신분적인 향촌 규제에 따른 것으로 불응자에 대해서는 군율에 따라 처단하였다.

의병의 편제와 향촌 조직의 결합은 전통적인 향군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에 의병은 강력한 항쟁력과 끈질긴 지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의병의 조직 원리는 1910년 이후의 간도의병으로 계승되었으며 독립군도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의병이 사용한 기본 화기는 화승총이었다. 아주 드물게 양총(洋銃)을 사용하고, 활 · 창 · 칼 등을 사용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때문에 의병들은 유격전, 기습작전, 그리고 복병작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의 의병들은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시도하고 수성전(守城戰)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것의 불리함을 깨달은 뒤부터는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이름난 의병장은 모두 유격전에 능란한 사람들이었다. 이강년 · 신돌석이 좋은 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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