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 ()

대한민국 헌법 초안
대한민국 헌법 초안
법제·행정
개념
사회규범 중 국가적 강제성으로 실현되는 법률 · 법령 · 조례 등의 규범. 법.
이칭
이칭
내용 요약

법제는 사회규범 중 국가적 강제성으로 실현되는 법률·법령·조례 등의 규범이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배분 및 협력의 관계를 규율하기 위해 발달한 규범의 체계로, 그 효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적인 강제성이 뒷받침된다. 인간이 공동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율적 규범질서로 존재하기 시작한 법제는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그 내용과 형식도 변천을 거듭해 왔다. 한국의 법제사는 씨족·부족법 시대, 고구려·통일신라·고려의 율령법 시대, 조선의 통일법전 시대, 갑오경장 이후 타율적 서구법 수용 시대, 1945년 이후 주체적 서구법 수용 시대로 나뉜다.

정의
사회규범 중 국가적 강제성으로 실현되는 법률 · 법령 · 조례 등의 규범. 법.
개설

법은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고, 배분 및 협력의 관계를 규율하기 위하여 발달한 규범의 체계로서, 그 효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직적인 강제성이 뒷받침된다. 이러한 법은 강제성인 점에서 도덕과 상이하지만, 법에는 도덕적 의미를 갖는 규범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시대구분

법은 문화의 일부로 언어 · 종교 · 도덕 · 정치 · 경제 등과 함께 문화현상으로서 파악되며, 법과 다른 문화영역 상호간에는 매우 복잡한 교차관계를 가진다.

역사 속의 법이란 인간이 어떠한 사회조직을 만들어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및 집단과 개인과의 관계를 조정하여 살아 왔으며 발전하여 왔는가를 사회통합의 수단으로서 파악하는 규범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법제사적 시대구분은 법 그 자체의 연계를 명확히 하고 법계(法系)의 소장을 구명하는 입장에서 확정함으로써 법을 발전적 · 동태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국사학에 있어서의 시대구분은 여러 문화현상의 교차관계를 고려하면서 특정 사회 또는 국가의 발생 · 흥망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나, 아직 일반적으로 승인된 시대구분법은 없는 실정이다.

한국법제사의 시대구분 또한 특정 사회 또는 국가의 발생 · 흥망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실정이나, 한편 우리 고유법의 성격, 외국법 · 문화의 수용, 법전 편찬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시대구분을 시도하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① 씨족법시대(기원전 4세기까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며, 원시적 씨족공동체의 자율적 규범질서의 시대이다.

② 부족법시대(기원전 3세기∼373년):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옥저 · 동예 · 삼한삼국시대 초기까지이며, 부족사회 또는 부족연맹사회에서 각기 부족법 또는 부족간의 공통법이 고유한 불문법 · 관습법으로서 존재한 시대이며, 고구려가 율령을 공포, 시행한 때까지이다.

③ 율령법시대 전기(373년∼10세기):고구려의 율령공포를 기점으로 하여 율령정치의 최성기인 통일신라시대까지이며, 성문제정법시대가 시작된다.

④ 율령법시대 후기(11∼14세기): 고려시대에 해당하며, 당나라의 율령을 비롯하여 송나라 · 원나라 율령의 부분적 계수시대이다. 율령은 형식에 불과하며, 왕의 명령이나 판례법 · 관습법이 율령에 대신하여 율 대신 칙령이 통치의 근간이 되는 한편, 율령정치의 말기적 현상이 나타난다.

⑤ 통일법전시대(15∼19세기 말):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에 해당하며, 『대명률(大明律)』을 계수하지만 육전방식(六典方式)에 의한 고유의 통일법전을 통치의 기본도구로 삼아 법치주의정치를 이상으로 한다. 법전의 편찬과 개수의 연속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⑥ 서구법 계수시대(19세기 말∼1945년):1894년의 갑오경장으로부터 민족항일기의 서구법의 타율적 계수시대이다. 전통적 법체계는 일본에 의하여 각색된 근대법에 의하여 대치된다.

⑦ 현대(1945년∼현재):1945년 국권의 회복과 독립으로 근대적 민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여 대륙법과 영미법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또 수용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까지이다.

이와 같은 시대구분은 시대구분 표제어에 무리가 있으나, 전통적인 국사의 시대구분과 대체로 일치하므로 혼란을 가져올 염려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종래의 시대구분을 따르기로 한다.

씨족사회의 법

우리나라의 씨족법시대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기원전 8세기경까지의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며,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씨족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원시사회로서 아직 국가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사회생활을 규율하는 법은 관습법이나 불문법이며, 법규범이 종교 · 도덕에서 분화되지 않고 일체로 되어 있어 사회를 통제하는 힘은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 주술적 규범이었다.

종교적이라 하는 것도 자연숭배적 · 정령숭배적이며, 우주의 만물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애니미즘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인간은 물론 산 · 강 · 바다 · 바위 · 나무도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혼은 멸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육체는 멸하더라도 영혼은 멸하지 않고 살아 있으며, 자손들은 시체를 신앙과 관습에 따라 보호함으로써 조상의 영혼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다.

특히 태양을 숭배하여 후대의 주몽(朱蒙)이나 혁거세(赫居世)의 난생설화(卵生說話)에서의 태양빛이라든지, 단군의 할아버지로 되어 있는 천상의 환인(桓因)이나 주몽의 아버지로 되어 있는 천제(天帝)는 태양이 신격화된 것이라 하겠다.

동시에 씨족은 어떠한 자연물에 대하여 친연관계가 있다고 믿는 토테미즘이나 터부의 관념 자체가 이 사회에 있어서의 법이었다. 바로 토템이 원시사회의 씨족적 집단의 결합을 굳건히 해 준 것이다.

씨족원은 모두가 토템을 자기의 명칭으로 삼고, 씨족 모두가 같은 선조로부터 나온 혈족이라고 믿으며 서로 깊은 정신적 일체성을 의식하였다. 후대의 단군신화의 곰, 신라 박씨의 말, 김씨의 닭은 토템씨족임을 입증하여 준다.

토템집단이 거의 유일한 사회생활의 장이므로 생활의 모든 방면을 지배하고 개인은 오직 토템집단과 함께 믿고 생각하고 노동하며 싸우고 향락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아직 개인적 소유권의 관념은 발달하지 못하고 개인은 집단을 위해서 노동하며, 생산된 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에 의해서 소비되는 원시공산제였다.

토테미즘이야말로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규범이었다. 터부도 미신적 · 본능적 관념으로 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현실을 보장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이를 범한 자에게는 제재를 가하였다는 점에서 또한 법적 규범이었다.

샤머니즘도 널리 행해져서 씨족원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생각되는 악귀를 주술적인 방법으로 물리침으로써 어떠한 재난에서도 구제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가해주술(加害呪術)도 처벌되었으며, 악신을 물리치고 선신을 맞아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오게 할 능력을 가진 것으로 믿는 주술사를 두었다. 고조선의 단군과 한(韓)의 천군(天君), 신라의 고유한 왕호의 하나인 차차웅(次次雄, 또는 慈充)은 주술사나 무(巫)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의 무당도 이 원시적 샤머니즘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이들 주술사는 노래와 춤 · 북 · 방울 등을 사용하여 종교의식을 행하였고, 병을 고치고 고기잡이나 사냥이 잘 되도록 하고, 농경을 순조롭게 하여 행복을 부르고 불행을 제거하는 주재자의 구실을 한 점에서 주술사가 씨족장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족사회의 법

기원전 8세기경부터 청동기문화가 들어와 원시적인 농경생활이 발달하였고, 이어 기원전 4세기경부터는 철기문화가 들어옴으로써 노동생산력을 본격적으로 높임과 아울러 원시적 씨족공동체 내부의 계급분화를 촉진하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

금속기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사유재산제가 싹트고, 이것이 발달함에 따라 씨족 사이의 경쟁과 투쟁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씨족공동체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씨족공동체가 담당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공적 기능이 일부는 부족적 공동체로, 일부는 사유에 기초를 둔 가족공동체로 옮겨지게 되었다.

훈족(Huns)의 세력에 밀린 한족(漢族)의 일부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밀려옴에 따라 토착 씨족공동체는 약화되거나 해체과정을 겪으면서 이 외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부족으로 형성되어 갔다.

그리하여 일부는 부족국가를 이루었고, 이들은 다시 발전하여 부족연맹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으나, 그 형성과정 · 연대 · 규모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기원전 5, 6세기경부터 서기 3세기경에 이르기까지 부족으로서는 북쪽으로부터 부여 · 예맥 · 읍루 · 조선 · 옥저 · 동예 · 마한 · 진한 · 변한 등이 있었다.

이들의 부족적 · 정치적 · 경제적 발전상황은 그 시기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는 이들 가운데서 다시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지배적 부족에 의해서 영도되는 부족연맹적 성격을 지니는 왕제국가(王制國家)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사실(史實)은 중국문헌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므로 자세하고 명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각 부족사회에는 그 부족 고유의 불문부족법(不文部族法)이 형성되었으며, 이들 각각에는 공통된 요소가 많았다.

가장 오래된 법으로 전해지는 고조선의 이른바 「팔조법금(八條法禁)」은 살인죄 · 절도죄 · 상해죄의 내용만이 전해오고 있을 뿐이나, 이 밖에도 간음죄 · 강간죄 · 독신죄(瀆神罪) · 가해주술죄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살인자는 바로 죽이며,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게 하고, 절도를 범한 자는 피해자의 노(奴) 또는 비(婢)로 삼으며, 또 속죄하려면 50만 전을 내놓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응보형은 모든 고대사회에 공통되는 것으로서 복수본능에서 나온 것이나, 속형(贖刑)이 인정된 점에서 상당히 발달한 형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형벌노비가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생각하면, 사유재산제도와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발달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팔조법금」은 뒤에 60여 조로 늘어났다고 하나 전해오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형률은 공통된 문화기반을 가지고 있는 후세의 다른 부족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방부족인 부여에서도 형벌이 매우 엄하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으며, 절도자는 절취물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경우에는 남녀를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부인의 질투를 특히 중죄시하여 죽인 뒤 그 시체를 서울 남쪽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하고, 만약 여자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하였다.

살인의 경우에 연좌형을 과하고 절도의 경우에 재산형을 과한 점은 고조선의 형률과는 공통되면서도 사유재산제도가 더욱 발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읍루족은 절도자는 절취물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모두 죽이며, 삼한족도 형벌이 매우 엄하였다.

삼국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는 부족연맹적 체제이면서도 왕권이 성립, 강화되어 고구려에서는 모반자나 반역자는 기둥에 매어놓고 횃불로 태운 다음 목을 베는 혹형을 과할 뿐 아니라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절도범은 절취물의 10배를 배상하게 하고 배상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자녀를 노비로 삼았다. 공사채무를 갚지 못한 경우에도 그 자녀를 노비로 삼아 변제에 대신하였고, 소나 말을 절취한 자도 노비로 삼았다.

신라에서도 반역자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일족을 멸하였으며, 전쟁에서 패퇴하거나 항복한 자도 사형에 처하였다. 백제에서도 반역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전재산을 몰수하며, 전쟁에서 패퇴한 자나 살인죄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다만, 살인자는 노비 3인으로써 속죄할 수 있었고, 절도자는 종신금고나 유형(流刑)에 처하여 절취물의 3배를 징수하였으며, 처가 간통하면 부가(夫家)의 노비로 삼았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형벌은 노예소유자경제의 성행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삼국이 다분히 귀족적 관료제 국가로서 발전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 시대의 법의 특색은 고대법에 공통되는 응보사상의 기초 위에 사유재산제 및 일부다처의 가부장적 가족제도 등의 제도적 요청에 의한 형벌이 가미된 것이며, 형법은 이미 민중법의 영역을 넘어서 지배자계급의 필요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왕제국가로 발전되면서는 전통적 형률사상에 바탕을 두면서도 속형이 보편화되고, 동시에 왕권의 유지 및 강화에 필요한 형률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씨족법시대의 종교적 · 주술적 성격도 계승되었다.

한편, 사유재산제도와 가족제도에서 싹튼 민사관계법은 새로운 사회경제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주로 관습법으로 존재하였다.

삼국시대의 법

율(律) · 영(令) · 격(格) · 식(式)

삼국시대는 고구려의 율령공포를 기점으로 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율 · 영 · 격 · 식이 지배한 성문제정법시대(成文制定法時代)이다. 율령이란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법조직이며, 중국에서는 진(秦) · 한(漢) · 삼국시대부터 일어나서 위(魏) · 진(晉) · 남북조를 거쳐 수 · 당 시대에 일단 정비되었다.

율령제도의 목적은 왕토왕민원리(王土王民原理)의 기초 위에서 국민에 대한 전제적 지배를 관철시킴에 있었다. 각종의 지배조직이나 정부조직을 영(令)에 의해서 규정하고, 이에 거역하는 자는 율(律)이라는 벌칙으로 다스리는 것이며, 격식과 함께 주권자의 통치수단이자, 교령징계(敎令懲戒)를 목적으로 하는 근본법이었다.

율에는 일관된 정신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예(禮)이다. 유교의 예는 성인이 만들어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으로서 과하여진 것으로, 권위를 지니고 있으나 강제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예의 법칙에 강제력을 지니게 하고 이를 위반한 자를 처벌하는 벌칙을 정한 것이 율이다. 따라서, 예의 특색은 그대로 율의 특색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는 가족 내부에서의 존비(尊卑)의 등급과 사회구성에서의 계급이라는 두 개의 차등을 명백히 구별하고 서로 범하지 않을 것을 목적으로 하며, 예의 주장을 그대로 체현하는 율은 필연적으로 가족과 사회에 있어서의 두 개의 층을 준별하여 상의 하에 대한 권리와 하의 상에 대한 의무를 명백히 열거하고 있다.

고구려의 법

삼국 중 율령정치의 시작은 고구려가 가장 빨라서 373년(소수림왕 3)에 율령을 공포하였다. 이미 372년에는 율령정치의 기반으로 태학(太學)을 세워 유학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유학은 이미 교육보급의 단계에 들어가 통치관료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유교문화의 도입은 바로 율령정치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가부장적 통치이념과 윤리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같은 해에 불상과 불경이 들어오고 다시 2년 뒤에는 절을 세웠다. 이러한 불교문화 도입의 목적 또한 원시적 샤머니즘에 대신해서 새로운 체제의 종교적 통일기반을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고구려의 율령은 중국 위 · 진의 율령을 계수한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그 전모가 전해지지는 않는다.

『삼국사기』나 중국의 사서(史書)에 의하여 복원, 추정하여 보면, 율에 있어서는 모반죄 · 모역죄 · 항패죄(降敗罪) · 살인죄 · 행겁죄(行劫罪) · 살우마죄(殺牛馬罪) · 절도죄 등의 죄목이 있었고, 형으로는 참형 · 화형 · 기시형(棄市刑) · 족형(族刑) · 찬형(竄刑) · 적몰형(籍沒刑) · 태형(笞刑) 등이 있었다.

국가통치를 위한 조직법과 작용법도 영에 의하여 규정되었는데, 관위령(官位令) · 직원령(職員令) · 사령(祠令) · 상장령(喪葬令) · 부역령 · 학령(學令) · 악령(樂令) · 의관령(衣冠令)이 있었다.

백제의 법

백제의 율령공포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260년(고이왕 27)에 이미 관료제도를 정비하여 육 좌평(六佐平) 이하 문무관을 두고 각각 품계와 관복을 정하였고, 262년에는 관리로서 뇌물을 받은 자는 3배를 추징하여 종신금고에 처한다는 영을 내린 사실로 보아 일찍부터 관료제적 · 집권적 국가체제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늦어도 4세기경에는 백제율령이 성문법전으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율의 죄목으로는 모반죄 · 살인죄 · 간통죄 · 절도죄 · 수뢰죄(受賂罪)가 있었고, 형벌로는 참형 · 연좌형 · 금고형이 있었으며, 중앙의 조정좌평(朝廷佐平)이 형옥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반드시 중앙정부에서 심리하여 왕에게 다섯 번 상주하여 처결하도록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형정이 매우 조직화되고 신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법

신라는 고구려보다 148년 뒤인 520년(법흥왕 7) 정월에 율령을 공포, 시행하고 비로소 관리의 복제와 복색을 정하여 존비상하의 질서를 세웠다.

이미 503년(지증마립간 4)에 사라(斯羅) · 사로(斯盧) 등으로 불리었던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호인 마립간을 왕으로 바꾸었으며, 다음해에는 유교적 예제에 의한 상복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514년에는 고대 중국에 기원을 둔 시법(諡法)을 채용하였으니, 이미 율령정치의 기초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법흥왕은 율령을 공포한 뒤에 국사를 총괄하는 재상인 상대등(上大等)을 두고 행정부로서 최초의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651년(진덕여왕 5)에 시행된 관직의 대개혁을 통해 관료체제가 정비되고 직계성(職階性)도 더욱 엄격하여졌음은 율령정치의 기반이 확고히 닦여지게 된 것을 뜻한다.

이 관제개혁 때에 형률을 관장하는 좌이방부(左理方府)를 설치하여 장관인 두 사람의 영을 두었으며, 이듬해에 천효(天曉)를 좌이방부령으로 임명하였다.

654년(태종무열왕 1년) 5월에는 이방부령인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세히 검토하게 함과 아울러 이방부의 조직법령인 이방부격 60여 조를 제정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율령격식을 계수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전제체제를 더욱 굳히기 위한 것이었다.

660년에 백제를, 그리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문무왕은 667년에 우이방부를 설치하였고, 681년에는 율령격식을 개정하여 새로이 공포, 시행하는 등 당나라를 본받아 여러 가지 제도를 다시 편성,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율령체제가 완성되었다.

율령정치는 경덕왕대에 이르러 그 절정기에 달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 구주제도(九州制度)를 확립하고, 이듬해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으며, 805년(애장왕 6) 8월에는 공식(公式) 20여 조를 공포, 시행하였다.

7세기 말부터 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율령정치가 가장 성하였던 시기이며, 율령은 변방의 말단행정단위인 촌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침투되어 실효를 거두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나라(奈良)의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당시의 촌행정보고서인 이른바 신라장적(新羅帳籍)이 입증하고 있다.

이는 3년마다 자연촌락단위로 촌세(村勢)를 중앙정부에 문서로써 보고한 것으로, 여기에는 촌의 구역, 호(戶) · 인구의 수, 소와 말의 수, 토지의 면적, 뽕나무 · 잣나무 · 호두나무의 수효, 호구의 감소와 소 · 말 · 뽕나무 · 잣나무 · 호두나무의 감소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율령체제는 9세기 초부터 민란의 봉기, 지방호족의 자립 등으로 인하여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함으로써 율령은 실효성을 잃게 되어 율령국가는 붕괴과정을 걷게 되었다.

신라의 율령은 처음에는 고구려의 율령을 계수하였고, 뒤에 당나라의 율령도 계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문이 전해오지 않으므로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사기』에 의하여 대체의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율에 있어서 죄목으로는 모반죄 · 모대역죄(謀大逆罪) · 요언혹중죄(妖言惑衆罪) · 사병이직죄(詐病離職罪) · 배공영사죄(背公營私罪) · 역사불고언죄(逆事不告言罪) · 기방시정제(欺謗時政罪) · 적전부진죄(敵前不進罪)가 있었고, 형벌로는 족형 · 거열형 · 사지해형(四支解刑) · 기시형 · 자진형(自盡刑) · 육시형(戮屍刑) · 사변형(徙邊刑) · 장형(杖刑)이 있었다.

또한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나타난바, 어떠한 행위의 실현 혹은 질서의 유지를 하늘에 맹세한 후, 그 행위가 실현되지 못하여 그 맹세가 허위가 된 경우에는 자기의 몸에 천벌이 내릴 것을 승인한 점으로 미루어, 천벌이라는 종교적 처벌을 확신하고 있었다. 서약이나 맹세의 위반행위도 명백한 죄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으로서는 관위령 · 직원령 · 사령 · 호령(戶令) · 학령 · 선거령(選擧令) · 군방령(軍防令) · 의복령 · 의제령(儀制令) · 악령(樂令) · 공식령(公式令) · 전령(田令) · 부역령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법

율령체제가 붕괴된 신라의 율령체제의 바탕 위에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호족세력을 통합하여 건국한 고려광종 때에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구축이 시도되어 10세기 말인 성종 때에 이르러 중국 역대 왕조의 제도를 참작하여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관료체계가 편성, 정비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유교적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통치의 기본인 율령법체계가 확립되어야 했다.

고려는 주로 당률(唐律)을 계수하여 형률을 시행하였다. 『고려사』 형법지에 고려율은 옥관령(獄官令) 2조, 명례(名例) 12조, 위금(衛禁) 4조, 직제 14조, 호혼(戶婚) 4조, 구고(廐庫) 3조, 천흥(擅興) 3조, 도적 6조, 투송(鬪訟) 7조, 사위(詐僞) 2조, 잡률 2조, 포망(捕亡) 8조, 단옥(斷獄) 4조 등 총 71개 조로 되어 있다고 하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률은 총 502개 조에 달하는 방대한 법전이며, 고려율은 당률에서 필요한 것을 채택하여 고려의 사정에 맞게 시행하였다고 한다.

이 71개 조로 된 고려율이 하나의 율전으로서 왕명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편찬된 것인가에 관하여는 긍정설과 부정설이 있다.

하지만 아마도 성종 초의 중앙집권통치체제 정비시에 신라율령에 없는 것을 보충함과 아울러 새로운 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특히 필요한 것을 우선 부분적으로 계수한 것이며, 율전으로서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또한 이 고려율은 초기에 일시 시행되었으나, 뒤에 송형통(宋刑統)과 송령(宋令), 송의 칙(勅)을 계수함에 따라 고려율의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율을 개정하지 않고 별도로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왕법인 판(判) · 제(制) · 교(敎) · 지(旨) · 영(令) · 조(詔)에 의하여 통치하고, 따라서 기본법전인 율전 없이 단일왕법으로 통치하였다. 그리하여 이 단일왕법이 쌓이게 되면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본법전이 없거나 무용지물이 된 경우 왕법에 의한 정치는 자칫하면 법의 혼란을 가져오거나 난세가 되어 독재군주가 나타난다.

또 왕권이 약해지면 자의적인 법의 남발로 말미암아 법의 개폐가 무상하고 법의 안정성을 잃게 된다. 고려 말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극에 달하였으며,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속담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이와 같이 당 · 송의 율령을 부분적으로 계수하였지만, 전통적인 율령제 국가가 아니라 단일왕법에 의하여 율령에 대신하는 왕법국가이었다.

그래서 마치 중국의 송대에 와서 조칙(詔勅)이 율을 대신하게 되어 율이 있기는 하나 행하여지지 않는 법전이었던 것과 그 사정이 같다.

이 시대에 편찬된 법령집으로 오늘날 그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는 『판안(判案)』 · 『식목편록(式目編錄)』 · 『의식조령(儀式條令)』(30권)이 있으며, 개인이 편찬한 법령편람과 같은 성격의 법령집이 있었을 것이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다시 율령체제에의 복귀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미 고려율은 실효성이 없어진 지 오래되어 법의 통일성과 안정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1377년(우왕 3) 2월에는 모든 형사재판을 원나라의 『지정조격(至正條格)』에 따르도록 하였고, 1388년에 전법사(典法司)는 명률과 원의 『의형이람(義刑易覽)』을 참작하여 율전을 새로 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특히 고려 최후의 해인 1392년(공양왕 4) 2월에는 정몽주(鄭夢周)가 고려의 법령과 원의 『지정조격』 및 명률을 참작하여 새로 율전을 만들었다.

은 6일 동안 이 신율(新律)의 강의를 듣고 그 훌륭함에 감탄하여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손질하면 법률로 시행하여도 좋다고 하였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정몽주가 지은 신율은 비록 개인이 만든 사법전(私法典)에 그치고 말았으나 역사상 명백한 최초의 사찬법률서(私撰法律書)이다.

한편, 민사관계법은 일반적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서 관습법과 판례법으로 존재하였으며, 전통적인 고유한 법의식은 관습법과 판례법에 의해서 지탱되어 유지, 계승되었다. 한편, 『고려사』 형법지에는 고려시대에 행해진 형법조문 100여 조가 그와 관련된 판(判)을 비롯한 왕법이나 상소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순서는 명례(名例:五刑 · 刑杖式 · 辜限 · 禁刑) · 공식(公式:相避 · 官吏給暇 · 避馬式 · 公牒相通式) · 직제 · 간비(奸非) · 호혼(戶婚) · 대악(大惡) · 살상 · 금령 · 도적 · 군율 · 휼형 · 소송 · 노비로 되어 있고, 공포연월일이 없는 조문은 대개 당률을 본뜬 것이되 고려 나름대로 간략화하거나 수정한 것들로, 그 중에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고유의 것도 있다.

이 법률은 순수한 형률뿐 아니라 영에 해당되는 것도 있다. 이는 『고려사』의 편자가 고려시대의 여러 자료 중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 나름대로 체계화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부터 고려율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고려율 71개 조를 비롯하여 형법지에 있는 100여 조의 형과 법은 모두가 반드시 그대로 시행되고 준수된 것이 아니라 개중에는 이상법(理想法)의 성격을 지닌 것도 있다.

조선시대의 법

고려시대의 법이 개별적인 왕법과 관습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데 비하여, 조선시대의 법제사적 특징은 통일법전의 제정과 그것의 계속적인 증보 및 중국의 『대명률(大明律)』의 포괄적 계수에 의한 법치주의 통치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시대를 통일법전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기본적인 통일법전과 형법인 『대명률』을 통치수단으로 하여 전국토와 국민을 조직적 · 통일적으로 지배, 규율하였던 것이다.

대명률의 계수

고려 말 이래 형사법에 관한 기준의 미비로 혹형이 자행되고, 관리나 관청에 따라 동일한 범죄에 대한 형벌의 차가 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그래서 형사법을 통일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원의 법령(法令)과 명률 등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원의 『지정조격(至正條格)』 등은 개별사례를 종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적 형사법원으로는 부적당하였다. 그래서 신흥사대부들은 당률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법령을 종합한 『대명률』을 모범형법으로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수용할 의지를 표명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헌전(憲典)에서 『대명률』을 일반형법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우선 문무관(文武官)의 공사죄(公私罪)에 직첩(職牒)을 회수하거나 가산을 몰수할 때 『대명률』에 의거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후 형사법원은 『대명률』 외에 고려율, 원률, 당률 등과 같이 다양하였는데, 대명률은 구체적인 사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적용범위를 넓혀 1461년(세조 7) 『경국대전』 형전을 편찬할 때 용률조(用律條)에 “대명률을 적용한다[用大明律]”로 규정되어 일반형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중국사회를 모태로 하고 있는 『대명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중국과는 달리 모계적 전통이 강한 친족에 대한 범죄와 중국에는 없는 노비와 관계되는 범죄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대명률』과는 다른 새로운 법령이 등장하였으며, 이는 『경국대전』 형전을 비롯한 후대의 법전에 특별규정으로 규정되었다.

『속대전』 형전 용률조(用律條)에 “『경국대전』에 따라 『대명률』을 적용하되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해당되는 율문(律文)이 있을 경우에는 두 법전에 따른다.[依大典用大明律 而大典續典 有當律者 從二典]”라고 규정되어 일반법인 『대명률』과 특별법인 조선 법령과의 관계가 분명히 되었다.

『대명률』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것은 초기부터 인식되었다. 그래서 1395년(태조 4) 2월에 이해하기 어려운 『대명률』을 일반 관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두를 섞어 번역한 대명률서가 출간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이와 비슷한 책과 구별하기 위하여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고 부른다. 직해는 원문 그대로 직역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이두를 사용하여 고유한 용어로 풀이하였음은 물론, 원문과 다르게 당시의 고유법으로 대치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대명률직해』도 일반관리들에게는 난해하여 태종연간에 다시 『대명률』을 번역하려고 하였으나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적용된 『대명률』은 『대명률직해』가 아닌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로 이는 『대명률직해』나 현존하는 중국의 『대명률』과도 약간 다른 우리나라에만 있는 『대명률』이다.

『대명률』로 형사법원을 통일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은 『대명률』보다는 익숙한 종래의 관습형법이나 원나라의 형법을 적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본격적으로 중국 율령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또한 명나라의 『대명률』을 포괄적으로 계수하였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유교정치이념의 실현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것을 실현할 통일형법이 없는 당시로서는 필연적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경국대전』 형전(刑典)의 첫머리에 용률조(用律條)를 두어 『대명률』을 적용한다고 규정하였으며, 그 뒤 『속대전』 형전에도 위의 조문에 덧붙여서 『경국대전』에 의하여 『대명률』을 적용하고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규정 중에 『대명률』에 해당하는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양전의 규정을 우선적으로 적용할 것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대명률』은 조선 건국 이후 1904년에 『형법대전(刑法大全)』이 공포될 때까지 500여년 동안 형사법의 보통법으로서 적용되었으며, 조선법전의 형사법은 특별법으로서 우선적으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즉, 법전에 해당 규정이 없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대명률』이 적용되었다.

『대명률』의 일반적 적용으로 말미암아 사법 관서의 형사재판과 행정에 있어서는 통일성과 안정성을 기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고려 말과 같은 혼란을 막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한편 특수한 사건이 생긴 경우에 그 특유의 사정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대명률』을 적용하거나 유추적용하는 폐단이 생겼으며, 고유형법의 발달을 제약하였던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물론 『대명률』은 순수한 율적 성격의 조문도 있지만 율 · 영 · 격 · 식을 모두 포함한 전장(典章)으로서의 성격을 갖춘 법전이기 때문에 어떠한 조문의 적용이 거론될 경우에 중국과의 문물제도나 풍속의 차이로 말미암은 적용 가부의 논란이 많았다.

물론 개개의 조문 중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 있었으나, 『대명률』이 압도하였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법의 존재형태와 입법

제정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국왕의 명령이었다. 국왕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인 제조(制詔) · 성지(聖旨) · 칙지(勅旨)에 대해서 교(敎)라고 하고, 형식화된 것을 왕지(王旨) 또는 교지(敎旨)라고 하며, 각 관청에 하달된 교지를 시행하는 뜻에서 수교(受敎)라고 하였다.

또 국왕의 명령은 그 내용의 경중에 따라 교지와 전지(傳旨)로 구별하였다. 세부사항에 관한 명령이 전지이었던 반면, 경사가 있을 때 나라에서 죄인들을 용서해 주는 반사(頒赦)를 비롯하여 의정부에 명하여 국민에게 알릴 사항은 반드시 교지를 사용하였다.

실제로 입법의 대부분은 그 관청의 상신에 대해서 국왕이 재결하는 형식으로 성립하였다. 1404년(태종 4) 10월에 결정된 입법절차에 의하면, 새 법을 제정하고자 할 경우에는 반드시 의정부에 올리고 다시 왕에게 상신하여 그 재결을 받도록 하고 있다.

왕에게 상신하여 재결을 받아 시행하는 것을 봉왕지시행(奉王旨施行) · 계문취지시행(啓聞取旨施行) · 수판시행(受判施行) 또는 계하행이(啓下行移)라 하였다.

재가를 받은 왕지를 판지(判旨)라 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이를 수판이라고 하였으므로 ‘수판시행’은 ‘봉왕지시행’과 같다. 따라서 왕명을 대별하여 수교와 수판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 이를 합하여 모두 수교라고 칭하고, 수교가 법조문화된 것을 조례(條例) · 조령(條令) · 조획(條劃) · 조건(條件)이라고 하였다.

『경국대전』 예전 의첩조(依牒條)는 입법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신법을 제정하거나 구법을 개정하고자 할 경우에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왕에게 상신하고, 왕이 재결하면 예조사헌부사간원가부 심의[署經]를 거쳐 예전의 입법출의첩식(立法出依牒式)의 형식에 따라 법으로서 확정하여 효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그 관청에 알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법의 제정과 발달에는 ‘계하행이’ · ‘봉왕지시행’ · ‘계문취지’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예전의 의첩조의 절차가 전혀 행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간(臺諫)이 새로운 입법의 서경을 거부하거나 그 관청이 올린 법안을 신법이라는 이유로 왕이 중신회의에 회부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해당 관청이 사무처리에 필요한 사목(事目)이나 조건을 상신하여 왕이 재가하고, 그것이 해당 관청에만 한해서 유효한 법으로서 성립하는 방편을 사용하였으며, 모든 관청이 모두 그와 같이 하므로 입법의 수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 범람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사항에 관하여 전후 규정이 다르거나 각 관청 상호간에 법을 달리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법전 편찬은 그러한 사태를 해결함으로써 법의 안정과 통일과 간명(簡明)을 기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각 조(曹)를 비롯한 관청에서는 모든 수교 · 수판 사항을 등록하여 둠으로써 그것을 수집하여 영구히 시행할 조문을 선택하고 수정, 편성하여 법전을 만들게 되었다. 행정체계는 육조로 구성되어 있었고, 따라서 육조의 명칭에 따른 육전(六典)이 편찬된 것이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은 말하자면 그와 같은 작업의 첫 단계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법은 원칙적으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 관청을 주된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교와 법전의 규정은 대부분이 국가행정기관과 그 운용에 관한 행정법규이며, 관청 · 관리에 대한 직무상의 준칙이었다. 법은 공사법이 구분되지 않은 이 · 호 · 예 · 병 · 형 · 공(吏戶禮兵刑工)의 육전체제(六典體制)이다.

행정과 형벌에 관한 규정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기 때문에 사법규정은 거의 없고 있더라도 백성의 권리체계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무체계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백성 상호간의 권리관계는 행정법규에 의해 간접적으로 규율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사법, 육전체제는 사물을 바라보고 나누는 틀일 뿐이며, 공사법의 구별이 없다고 해서 대상, 즉 사법 규정 자체가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통시대에는 권리의무관계, 즉 법률관계가 아니라 다만 대상, 즉 객체에 따라 구별하였기 때문에 민사법원 가운데 매매 등 거래법에 대한 규정은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형전에 있는 것과 같이 행정상의 내용과 대상에 따라 기본법전인 『대전회통』과 『대명률』을 비롯한 여러 법전에 산재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사법이라는 용어는 없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사법체계가 존재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법전을 편찬하거나 공포하더라도 법전 자체는 이를 필요로 하는 각 관청과 관리들에게만 배포되었으며, 수교도 관리들에게만 하달되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법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그들의 권리의무에 관계되는 법령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았다. 이는 특히 소송에서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법령을 근거로 권리주장을 하고 있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법전편찬

경제육전과 속전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일체의 제도와 법제는 고려의 것을 따르되, 법률을 정립하여 모두 율문에 따라 처결함으로써 고려 때의 폐단을 밟지 않을 것, 즉 통치의 기본방침으로서 혁명적인 개혁을 하지 않고 통일적 법률을 정립하여 법치주의를 기본으로 할 것을 밝혔다.

그리고 즉시 관제를 공포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뒤의 의정부) 밑에 부속기관으로서 오늘날의 법제처에 해당하는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를 설치하여 법령의 판정 · 정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5월에는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였다. 이는 『주례(周禮)』와 원나라의 『경세대전(經世大典)』을 본받아 새로운 왕조가 의거하여야 할 유교적 통치이념의 기본 지침을 치(治) · 부(賦) · 예(禮) · 정(政) · 헌(憲) · 공(工)의 육전으로 분류하였다.

헌전에서는 『대명률』을 그대로 채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공적인 법전 편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법전 제정작업은 검상조례사에서 조준(趙浚)의 책임하에 수행되었다. 태조가 실권을 장악하였던 1388년(우왕 14)부터 당시까지에 시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영구히 시행할 법령을 수집, 분류하였으며, 1397년 12월에 완성하여 『경제육전』이라고 명명하여 공포, 시행하였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통일성문법전이다.

『경제육전』은 오늘날 전해오지 않으나, 이전 · 호전 · 예전 · 병전 · 형전 · 공전의 육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권마다 단행법령을 원문 그대로 분류, 수록하였다.

따라서 조문이라고는 하지만, 법령의 공포연월일과 이두 · 방언이 수교 원문 그대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짧은 시일에 완성한 것이기 때문에 법조문이 추상 · 일반화되어 있지 못한 소박한 것이었다.

1399년(정종 1년) 11월에는 『경제육전』을 개수하기 위하여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였다. 1407년(태종 7) 8월에는 『경제육전』의 개수와 그 뒤에 공포된 법령의 법전화 작업을 위해서 속육전수찬소(續六典修撰所)를 만들어 하륜(河崙)의 책임하에 『경제육전』 조문의 공포연월일 · 이두 · 방언을 없애고 법문장(法文章)으로 바꿈과 아울러 『경제육전』에 누락된 법령과 그 뒤에 공포된 법령을 수집하여 『속육전』을 편찬하였다.

1412년 4월에 『경제육전원집상절(經濟六典元集詳節)』과 『속집상절(續集詳節)』이라는 이름의 초안이 완성되었는데, 다시 여기에 검토가 가해져서 1413년 2월에 『경제육전원전』 · 『경제육전속전』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법전으로서 확정하여 공포, 시행하였다. 이것을 편의상 ‘원육전(元六典)’ · ‘속육전’ 혹은 단순히 ‘원전’ · ‘속전’이라고 불렀다.

한편, ‘원육전’과 ‘속육전’ 사이 및 이들 법전의 규정과 새 법령 사이에 모순 · 저촉되는 규정이 있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415년 8월에는 법전 편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즉, 모든 법령은 한결같이 원전의 규정을 본위로 하여야 하며, 원전의 규정과 모순되거나 개정된 속전의 규정을 모두 삭제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원전의 규정은 그대로 두고 그 조문 밑에 주(註)의 형식으로 작게 표시함으로써 법의 통일을 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전 편찬에 있어서의 ‘원전 존중의 원칙’, 즉 원전인 『경제육전』은 창업주인 조종(祖宗)이 만든 성헌(成憲)이기 때문에 절대로 존중하여야 하며, 속전이나 뒤의 법령으로 개폐할 수 없다는 이른바 ‘조종성헌존중주의’이며, 이 원칙은 그 뒤 조선시대 내내 기본 원칙의 하나로 지켜졌다.

1422년 8월에도 태종조의 속전 이후에 공포된 법령을 법전화하기 위하여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여 이직(李稷)의 책임하에 태종이 정한 편찬 원칙에 따라 속전을 개수, 증보하여 1426년 12월에 『신속육전(新續六典)』과 『등록(謄錄)』을 완성하였으며, 이때 또 하나의 편찬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영구히 지켜야 할 법령은 전(典)에 수록하고 일시적인 필요에 의하여 시행한 법령은 ‘녹(錄)’이라는 이름의 법령집에 수록한다는 것이었다. 즉, 전에 수록된 법령은 영구히 변하지 않는 조종성헌이 되는 것이다. 이 ‘전’과 ‘녹’을 구별하는 원칙도 그 뒤의 법전편찬에서 지켜졌다.

1428년 11월에는 다시 하연(河演)의 책임하에 『속전』과 『등록』을 개수하여 1429년 3월에 완료하였으나 공포되지 않았다. 이를 다시 황희(黃喜)가 검토한 뒤 1433년 정월에 정전(正典)과 등록으로 구성된 『신찬경제속육전』을 공포하였다.

문종 때에도 『신찬경제속육전』이 불완전하므로 다시 편찬하기 위해서 제조도감(提調都監)을 설치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경국대전

조종성헌존중주의에 입각하여 원전을 고정시키고 법령이 누적된 뒤에 전후모순 · 불비 ·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 또는 등록으로 증보하는 고식적인 편찬 방법을 계속하는 한 혼란은 항상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아울러 기존 법령이 성헌으로서의 안정성을 기할 수 없었기에 그와 같은 고식적인 편찬 방법을 지양하고 원전 · 속전을 비롯한 모든 시행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새로이 조직적 · 통일적 법전을 편찬해야만 했다.

그러한 요청에 따라 『경국대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세조 즉위 후에도 속전의 개수작업이 집현전에서 계속되었으나, 양성지(梁誠之)가 법령의 기본적 조사 및 확립의 필요성과 함께 이것을 기초로 통일법전을 만들 것을 건의함에 따라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여 육전상정관들이 편찬에 착수하였다.

1460년(세조 6) 7월에 먼저 재정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戶典)과 호전등록이 완성되어 『경국대전』 호전이라고 명명, 시행하였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이 완성되었으므로 공포, 시행하였다.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 · 예전 · 병전 · 공전도 완성하여 전면적으로 재검토한 뒤 1468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는 세조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였고, 예종이 육전상정소를 설치하여 원년 9월에 『경국대전』을 매듭지어 1469년(예종 1) 1월부터 시행한 것이 전면적으로 공포, 시행된 최초의 『경국대전』이다.

이 가운데 누락되거나 불완전한 점이 있으므로 성종은 이를 다시 교정하여 1471년(성종 2) 1월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제2차의 『경국대전』이다.

그러나 이 대전도 130개 조문이 누락된 것이 발견되었고, 또 새 법령을 추가할 필요가 생겼으므로 다시 개수하여 1474년 2월부터 시행하였으며, 이것이 제3차의 『경국대전』이다. 이때 개수한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으로서 시행할 필요가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에 수록하여 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새로운 『대전』과 『속록』이 시행됨으로써 법전 편찬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속록』에 수록하여야 할 법령이 증가하고, 또 『대전』이나 전의 법령과 저촉되는 경우가 많아서 시행에 혼란을 가져왔다. 따라서, 조종성헌을 아무리 고수하려고 하여도 법전 개수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481년에는 다시 대전개수론이 나오게 되었으므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 개수하여 1485년 1월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제4차의 『경국대전』이다.

이는 성종에 의해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을 최종적으로 확정된 법전이라고 규정지었으며, 영세불변의 조종성헌이자 통치의 기본법으로서 그 시대를 규율하게 되었다.

우리 역사상 이 제4차의 『경국대전』이 오늘날 전해 오는 유일한 법전이며, 이전의 『경제육전』 · 『속육전』 · 『등록』 · 『경국대전』 · 『속록』 등은 하나도 전해오지 않는다.

이전의 법전이 전해오지 않는 까닭은 당시 새로 법전을 제정하여 시행할 때는 구 법전을 모두 회수하여 폐기하였기 때문이며, 『경제육전』은 『경국대전』이 시행될 때에 폐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구 법전을 회수, 폐기한 이유는 매우 특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건국 초기인 당시의 관리들은 고려 말 이래의 전통적인 법에 익숙하였다. 처음에 『경제육전』은 그들에게 익숙하고 편리한 법이었기에, 새 법전이 나올 때마다 낯선 새 법전을 적용하지 않고 낯익고 익숙한 구 법전을 그대로 적용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구 법전을 회수, 폐기하였다.

그래도 이러한 사태가 근절되지 않으므로 구 법전의 판목(版木)도 모두 폐기하여 다시 인쇄하여 이용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경국대전의 편제와 내용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방식을 따랐으며, 이전 · 호전 · 예전 · 병전 · 형전 ·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각 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하고 조문도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 일반화되어 있어 건국 후 60여 년에 걸친 연마의 결정답게 명실상부한 훌륭한 법전으로서의 면목을 갖추었다.

이전은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 임면 · 사령 등을 규정하였다. 호전에는 재정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제도 · 토지제도 · 조세제도 · 봉급 · 통화 · 부채 · 상업과 잡업 · 염장(鹽場)에 관한 규정, 특히 토지 · 가옥 · 노비 · 우마의 매매와 입안, 매매계약의 취소기한, 채무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민사적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잡과과거, 관리의 의장, 외교와 제례, 상장(喪葬), 묘지, 관인(官印), 오복(五服), 봉사와 제사상속 · 양자제도 · 혼인 등 친족법규범과 여러 가지 공문서 서식이 수록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사항이 들어 있다.

형전은 『대명률』에 대한 특별형법으로서의 형벌 · 재판 · 공노비 · 사노비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재판에 관한 규정과 사노비에 관한 규정 중에는 재산상속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재산상속법이 형전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당시 재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노비에 관한 분쟁이 주로 상속에 관한 것이며, 그것이 재판을 통해서 판례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공전은 도로 · 교량 · 도량형 · 식산(殖産)에 관한 규정들이다.

법전편찬의 역사적 의의

『경제육전』과 『경국대전』은 정치의 요체는 법에 있으며, 법전에 의한 법치주의 통치를 표방한 창업주의 이상의 종국적 결정(結晶)이었다. 이 의지가 계승, 발전된 『경국대전』은 명실상부한 조종성헌이며, 우리 법제사상 최대의 업적인 동시에 영광이다.

법치주의를 표방한 태조는 창업군주다웠고, 그 이상을 계승한 후대의 왕과 관료들도 훌륭한 법률가이었다. 왕에 의한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실현하는 최대의 도구이자 수단인 법을 바르게 인식하고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며, 『경국대전』의 편찬은 조선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 즉 통치규범체계를 확립시킨 점에 큰 뜻이 있다.

더욱이 법전의 편찬에 있어서는 고려의 판례법 · 관습법 등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그것에 조종성헌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에 대한 방파제의 구실을 한 점에도 큰 의의가 있다.

생소하고 혁명적인 법을 제정하거나 그것을 강제함으로써 법의 실효성과 안정성을 저버리는 것보다는 전통적이며 현실적인 일반적 법의식을 존중함으로써 법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경제육전』과 『경국대전』의 완성은 바로 조선왕조 존속의 기초임과 동시에 고유법 계승의 기틀인 것이다.

경국대전 후의 법전과 법령집

영구불변의 조종성헌인 『경국대전』의 확정과 시행으로 법치주의의 기초는 확고한 궤도에 올랐다. 그래서 그 뒤에는 태종과 세종 때에 정립된 편찬 원칙에 따라 여러 가지 법령집과 법전 및 법률서가 끊임없이 편찬되었다.

1492년(성종 23) 5월에는 『경국대전』 이후 공포된 법령을 담은 법령집인 『대전속록(大典續錄)』이 편찬, 시행되었고, 『대전속록』 이후의 법령집인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이 1543년(중종 38) 11월에 편찬, 시행되었다.

1555년(명종 10)에는 『경국대전』의 조문 가운데 해석하기 어려운 조문이나 용어에 대한 공적 주석서인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가 편찬되어 대전에 대한 부속법전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1698년(숙종 24) 3월에는 『대전후속록』 이후의 법령집인 『수교집록(受敎輯錄)』이, 1740년(영조 16)에는 『수교집록』 이후의 법령집인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이 편찬되었으며, 이들 여러 법령집들은 『경국대전』과 함께 공적인 법원(法源)이 되었다.

한편, 『경국대전』과 그 뒤의 법령집 참조의 번거로움과 불편을 덜기 위해서 『경국대전』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현행법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공적으로 시도되어 1706년 8월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이루어졌다.

『전록통고』에 『신보수교집록』을 증보한 『증보전록통고』영조 때(16년에서 22년 사이로 추정)에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모두 새로운 통일법전 편찬을 위한 초안이었다.

그러나 이들 초안을 하나의 법전으로 편찬할 수는 없었으므로 1746년 4월에 『속대전』을 편찬, 시행하였다. 『속대전』은 『경국대전』 후의 각 법령집의 법이 전후 모순되거나 이미 효력을 상실한 법령도 있어 법의 적용에 혼란과 차질을 가져왔으므로 이들 법령집 중에서 현행되고 있고 또 영구히 시행되어야 할 법령만을 골라 법전으로 편찬한 것이다. 『속대전』이 시행됨으로써 당시의 법전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두 가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법의 통합기도는 정조대에 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조는 『속대전』 이후의 법령과 『경국대전』 · 『속대전』을 하나로 통합한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1785년(정조 9) 6월에 공포, 시행하였다.

또 1787년에는 『대전통편』과 『대명률』의 관련조문을 통합한 『전율통보(典律通補)』가, 1796년경에는 육조의 사무에 참고가 되는 법례를 묶은 『백헌총요(百憲摠要)』가 편찬되었으나, 이들은 출간되지 못 하였다.

1865년(고종 2) 9월에는 조선왕조 최후의 육전체제 통일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이 편찬, 시행되었다. 이는 『대전통편』 이후의 법령을 보충한 것이다.

『대전통편』과 『대전회통』은 『경국대전』의 규정이 설사 개정되거나 폐지되었더라도 삭제하지 않고 수록함으로써 조종성헌존중주의를 그대로 지켰다. 1867년 5월에는 중국의 회전(會典) 방식에 따라 행정법규와 사례를 수록한 『육전조례(六典條例)』를 편찬, 시행하여 기본법전과 함께 법적용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의학서이면서 검시의 준거법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 『만기요람(萬機要覽)』 · 『추관지(秋官志)』 · 『춘관지(春官志)』가 공적으로 편찬, 간행되었으며, 『사송유취(詞訟類聚)』 · 『경세유표(經世遺表)』 ·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한 많은 법률서가 개인에 의해서 저술되어 널리 이용되었다.

근대의 법

개화기의 법

19세기 말 사회 · 경제의 내부적 모순과 외세의 침투는 법제면에서도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법제사적인 면에서 특히 실정법적으로는 1894년의 갑오개혁에 의한 개혁부터 개화기의 기점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일부 사상가들의 개화운동의 정신적 바탕에서의 주체성은 외세,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희생되고 20여 년의 짧은 기간에 타력에 의하여 놀랄 만한 속도로 서구적 근대법제에 접하게 되었다.

서구제국의 강압 앞에서 정부의 존립을 걸고 법치국으로서의 면모를 이루어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제는 그들의 처지를 그대로 우리에게 강요하였으니, 개화를 법제적 · 서구적 근대화로 받아들일 때 이 타력적 근대화는 전통과 상관없는 제도의 이식으로 말미암아 전개되는 생소함과 마찰, 민족적 저항의 숙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강제되었던 갑오개혁은 비뚤어진 가운데도 그런대로 서서히 제도적 근대화를 위한 기반을 굳혀가고 있었다.

갑오개혁은 정치적 · 경제적으로 근대적 절대군주제 국가라고 하는 새로운 통치체제의 수립과 이 새로운 통치체제의 유지 및 발전에 장애가 되는 낡고 불합리한 봉건적 제도의 철폐로부터 시작되었다.

통치체제에 있어서는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며, 입법부격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비롯하여 궁내부(宮內府), 행정부로서의 의정부 및 각 아문의 관제를 제정하여 사무분장을 명확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독립국으로서 특명전권대사를 각국에 파견함으로써 문명개화된 서방세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제도의 철폐에 있어서는 봉건적 신분제의 철폐와 고래의 누습이던 가족제도상의 개혁이 그 대상이었다. 우선 양반계급에 있어서는 사색당론을 타파하여 문벌을 불문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문무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 등을 비롯하여 특권의 상징이었던 관리의 의복제를 간소화하고, 평교자 · 초헌과 같은 승용물과 재신(宰臣)의 부액(扶掖)의 폐지, 고관의 수행원을 제한하였다.

다음으로 노비제도의 폐지와 역인(驛人) · 창기 · 배우 · 피공(皮工)을 면천하여 인간화를 선언하고, 평민일지라도 이국편민(利國便民)할 방책을 군국기무처에 상서할 수 있는 언로를 열었다.

가족제도상의 개혁으로는 적서차별 철폐의 일환으로서 우선 적처와 첩에서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입양하도록 하는 『경국대전』 이래의 구법을 재확인하고, 혼인연령을 남녀 각 20세 · 16세로 정함으로써 남녀조혼의 폐해를 없애며, 귀천을 불문하고 과부의 개가를 자유롭게 하였다.

이러한 봉건적 제도의 철폐는 1894년 2월부터 10월까지 사이에 의결된 개혁의안 중 주로 6월 말까지에 최우선적으로 의결된 것이며, 혁명적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 · 평등 · 인권과 직결되는 민주적 개혁의 목표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실현에 있었다.

체제는 명목상으로만 중앙집권체제일 뿐 실질적으로는 말기적 정치현상이 노정되고 있었으므로 공법적 · 정치적으로는 이러한 국가를 근대적 정치체제에 의한 정치적 집중으로 재편성함과 아울러 정치참여자의 저변을 확대하는 정치적 확대를 꾀하고, 사법적(私法的) · 경제적으로는 자유 평등한 근대적 권리 주체에 의한 경제활동의 실현을 기하고자 하였다.

1895년 1월에는 개혁정치의 기본 강령인 「홍범14조(洪範十四條)」가 발표되고, 1899년 8월에는 전제군주제의 헌법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선포되어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홍범14조」 중에는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여 자의적인 감금이나 징벌을 금지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조항이 이미 들어 있었다.

형사법 분야에서는 역대의 흠휼(欽恤)의 이상을 실현하여 근본적으로 여러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법관청과 행정관청의 분리 및 형벌의 완화라는 근본방침하에 많은 형사관계 단행법이 공포되었다.

그 가운데 특기할 것은 1905년 4월의 『형법대전』이다. 이것은 『대전회통』 · 『대명률』, 그리고 갑오개혁 이후의 법령을 참작하여 제정한 것으로, 680개 조문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일반형 법전이다.

이는 일본법의 영향하에 있으면서도 일본형법을 수용하지 않고 동양고래의 객관주의적 형법사상에 입각하였다. 종래의 전통적인 육분주의(六分主義)를 버리고 근대적 법체제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이 시대의 자주적 입법의 대표적 예인 동시에 이 시대 최후 · 최대의 입법사업이었다.

민사법 분야에서도 새로운 형식의 「가계발급규칙(家契發給規則)」 · 「토지가옥증명규칙」 ·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 · 「민적법(民籍法)」 · 「이식조례(利息條例)」 · 「민형소송에 관한 규정」 등 부분적 · 개별적 법률이 공포되어 전통적 기반 위에서 왜곡된 형태로나마 근대적 법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모든 분야에 걸쳐 방대한 신식 법령이 쏟아져 나왔고, 근대적 법치국가로서의 형식과 면목을 갖춘 듯 당시 발행된 『법규유편(法規類編)』(1899) · 『현행대한법규유찬(現行大韓法規類纂)』(1907) · 『현행한국법전(現行韓國法典)』(1910)에 수록된 법령은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법령은 대부분 일본인 고문의 관여나 주도하에 일본의 법령을 본떠서 만든 것이며, 이미 국권이 기울고 있던 때이므로 타율적 근대화는 필연적이었다. 더욱이 전통적 법의식은 새로운 제도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법의 운용과 의식 사이에 심한 갈등이 일고, 반일감정은 전통적 가치관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법

이미 통감부시대에 식민지지배의 기반을 닦은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8월의 조약을 기화로 식민지통치를 시작하였다. 1911년 3월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에 의하여 조선통치를 할 법적 기초를 마련하여 조선총독의 명령인 제령(制令)을 비롯한 통치법체계와 기구가 형성되었다.

조선총독은 제령을 비롯한 법령과 각종 행정명령에 의해서 강력한 행정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입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여 1919년까지 총독 밑에 정무총감(政務總監)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 계통과 경무총감부(警務總監府)를 정점으로 하는 헌병 · 경찰 계통이 말단에 이르기까지 병립하여 무단적 군사지배통치를 하였다.

이와 같은 무단통치는 3 · 1운동을 계기로 하여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되었으나, 헌병경찰이 보통경찰로 바뀌었을 뿐 전에 못지 않는 군사적 · 경찰적 억압체제였다.

‘일시동인(一視同仁)’에서 시작하여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 · ‘내선일체(內鮮一體)’ 등 동화정책(同化政策)을 강조하고 회유하면서 지배권력을 강력하게 발동하여 언어 · 관습을 무시하고 식민지적 특수법을 제정하여 참정권을 부인하였으며, 권리의 향수를 차별하고 사법권의 독립을 확보하지 않은 채 권력통치를 계속하였다.

1912년에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과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을 제정하여 일본의 기본적 실정법을 의용(依用)하게 됨으로써 대륙법계의 법체계가 도입되었다.

사법(私法)의 영역에서는 일본의 민상사법(民商事法)이 의용됨으로써 대체로 식민지 지배체제로서는 개화기와는 달리 모든 면에 걸쳐 통일적 · 추상적 실정법체계가 정비되고 운용되었으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법치주의의 가면을 쓴 자의적 전제지배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이로부터 법률에 의하기만 하면 된다는 법만능주의적 사고와 불가항적 지배하의 무권리 · 무관심 · 무비판적 노예정신이 우리 국민에게 널리 만연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체제에 상응하는 민상사법 등 정치적으로는 무색한 법이 적용되고, 사적 분쟁에 대해서는 순수한 민사재판이 행하여져서 서구적 · 근대적 사법제도(司法制度)에 접할 수 있었으나, 법의 난해성과 개화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적인 소송절차하에서의 시간과 비용이 드는 재판제도는 근대적 법의식 · 권리의식을 신장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전제적 · 식민지적 지배라는 전체적 압제분위기 속에서 준법정신의 결여, 법의 경시풍조를 한층 심화시켰을 뿐이다.

특히 가족법 분야는 조선의 관습을 존중한다 하여 친족 · 상속에 관하여는 관습법이 적용되었으나, 그 관습법은 총독부 당국이나 법원 등이 통첩 · 회답 · 결의 등의 형식으로 선언한 관제관습(官製慣習)이었다.

조선의 관습을 존중한다고 하여 한국적 · 유교적 가족도덕을 순풍미속이라고 찬양하면서 그것을 강화하고 더욱 체계화시켜 획일적으로 강제함으로써 식민지통치체제 확보에 이용하는 한편, 일본식 가제도(家制度)의 원리를 서서히 침투시키면서 1939년의 일본식 씨제도(氏制度) 이식에 의한 성명 말살에까지 이르렀다.

관습의 존중을 내세우건 일본법을 강제하건 근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식민지통치라는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효적절한 수단이 되었다.

즉, 고유한 관습을 존중한다는 미사여구 아래 동화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을 밀고 나간 데에서 통치방식의 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현대의 법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지배해 온 일본화된 서구적 근대법은 총체적으로는 제약된 형태와 범위에서 절대적인 권위와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수단으로서의 근대법이었다. 아울러 우리 민족은 근대법체계라는 허울 속에서 왜곡된 법체질을 간직한 채 1945년 8· 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의 감격과 흥분에 휩싸여 개화기 이후의 전통단절을 메울 반성과 시간의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미국의 군정과 민정이라는 과도기를 지나면서 우리나라에는 일본화된 대륙법체계 속에 영미법이 주로 공법 분야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48년 5월 10일에는 우리나라 정치사상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그 달 31일에 제헌국회가 구성되어 민주헌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의 법적 기초가 될 「헌법」의 제정이라는 역사적 임무수행을 위하여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독립국가의 조직 · 구조 · 체제를 담은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이어 국민의 자유권 보장, 삼권분립, 단원제 국회, 대통령제, 헌법위원회제, 통제경제제도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통과되어 7월 17일에 공포, 시행되었다.

7월 20일에는 대통령부통령이 선출되고, 8월 3일에는 국무총리의 임명승인과 대법원장의 임명인준이 끝나 8월 15일에 역사적인 대한민국독립선포식이 거행되고, 12월에는 우리 정부가 국제연합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음으로써 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되었다.

정부와 국회는 독립자주국가로서 일제의 의용법의 수치를 씻기 위하여 주체적인 법체계 완결을 급선무로 하고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민법」을 비롯한 기본법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9월에 「형법」, 1954년 9월에 「형사소송법」, 1958년 2월에 「민법」, 1960년 1월에 「상법」 · 「어음법」 · 「수표법」, 1960년 4월에 「민사소송법」이 제정되었다.

이로써 기본적인 5법이 완결되었으며, 아울러 수많은 행정법령이 제정됨으로써 행정법체계도 완성되어 이른바 기본육법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 법전은 혼란과 경황 속에서 충분한 연구 검토를 거칠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자주국가로서의 체통유지의 여망 때문에 기왕의 의용법전을 기본으로 하여 부분적으로 영미법과 독일법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 육법의 기본체계 외에는 여전히 민족항일기의 법령이 대부분 그대로 시행되었으므로, 1961년 7월부터 1962년 1월까지의 사이에 구 법령 615건 중 400건을 폐지하고, 213건의 대치법령을 공포함으로써 법치국가로서의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이는 치안 · 국방 · 재정 · 경제 · 사회 · 노동 · 교육 · 문화 · 교통 · 보건위생 등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로는 국내외적으로 종래의 전통적인 법률의 테두리로써는 파악하고 규율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 고유한 새로운 문제가 계속 대두되고 있고, 거기에 대처할 새로운 개별적 법률 분야가 개척되고 있으며, 세법 · 경제법 · 농업법 · 토지법 · 공업법 · 운수교통법 · 보건법 · 환경법 · 매스커뮤니케이션법을 비롯하여 국제거래법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법체계의 완결과 보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법의 지배를 통한 법치주의의 확립과 발전에 있다. 우리의 현대법사의 일그러진 모습은 개헌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

건국헌법 이래 1952년의 발췌개헌,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 1960년 6월의 내각제 개헌, 1960년 11월의 부정선거처벌을 위한 소급개헌, 1962년의 전면개헌, 1969년의 3선개헌, 1972년의 유신개헌, 1980년의 개헌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1987년의 개헌 등, 그 중심은 국가권력의 제한 및 국민의 기본권의 보장과 신장보다는 정치권력의 향방을 위한 개헌이었다.

개헌과정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 절대권력을 장악하는가에 초점이 있는 ‘정치의 시대’이었으며 ‘법의 시대’가 아니었다. 초법적 정당성이 합법성을 억압하는 법의 침묵의 시대이었다.

그리고 우리 현대 입법사는 법치주의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국민이 직접 입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법을 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중요입법은 정치적 격변기에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밀실에서 이루어졌다.

1961년의 국가재건최고회의, 1972년의 비상국무회의, 1980년의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중요한 법령은 제정되었다. 그들은 자체로 법령의 정당성을 보장하였다.

1987년 6.10민주항쟁 이후 비상입법의 폐해를 바로잡는 법령의 정비가 있었다. 그리고 1997년 IMF사태를 맞이하여 법제의 개혁을 요구받았다. 국제적 기준에 합당하게 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춘 법령의 정비를 요구받아 거래와 관련된 상법, 경제법, 노동관계 법령은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근대 시민사회가 성립되면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였고, 다만 질서유지자로서의 소극적 기능만 부여하였다.

그러나 현재에는 복지국가의 이념에 따라 급부자로서의 국가는 적극적으로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국가의 권능은 확대되었고, 행정이 확대 · 강화되었다.

이에 수반하여 적극적으로 국가의 권능을 보장하는 법령의 정비가 필연적인 추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의 보장, 법치주의 내지 법의 지배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다. 국가권능의 확대와 법치주의의 확립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중용의 입법이 필요하다.

전자기술의 발전에 따라 현재는 전자화 · 정보화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기존의 법체계는 산업사회에 터잡고 있어 새로운 사회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

이에 따른 법질서의 정비가 요청되고 있다. 그리고 정보화의 진전에 따라 정보의 격차는 경제적 · 사회적 격차를 더욱 크게 하고 있다. 이에 따른 대비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여성 · 아동 · 장애인 · 외국인 등 사회적 소외계층인 소수자에 대한 배려적 입법은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급부자로서의 강대한 국가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위축시키게 된다. 종래의 법질서는 국가권력을 제한하여 국가의 통제를 축소하고 개인의 사적인 영역 즉,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적 영역의 확대는 개인들 사이의 불평등을 야기하였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복지국가의 이념이 등장하면서 국가의 통제 내지 지원이 강조되고 개인의 자유가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보화사회가 되면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은 극도로 축소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국가의 전면적인 통제와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법은 생활의 보호자로서의 국가권능의 확대와 이에 따른 사적 영역의 보장 즉, 통제와 자유를 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와 통제를 적절히 조정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정의와 법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위한 법,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 법제를 정비하는 것이 21세기 한국법의 과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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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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