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는 무, 배추, 오이 등의 여러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버무려 발효시킨 식품이다. 비타민과 무기질의 보고인 채소는 원 상태로 저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장, 초, 향신료 등과 섞어서 새로운 맛과 향기를 생성시키면서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개발된 우리 고유의 식품이 바로 김치이다. 김치라는 이름은 원래 ‘지(漬)’, ‘저(菹)’라고 하다가 조선 초기에 딤채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중엽, 고추가 수입되면서 김치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고, 19세기에 들어서 오늘날과 같은 김치가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를 ‘지(漬)’라고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김치담그기를 ‘염지(鹽漬)’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가 물에 담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는 유교가 도입되어 복고주의로 흘러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저(菹)’라는 명칭이 쓰였다. 즉 본래 지라고 부르던 것이 유교의 복고주의에 따라 고려말부터 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딤채’라는 말이 보이는데, 1518년(중종 13)의 『벽온방(辟瘟方)』에는 “ 무딤채국을 집안사람이 다 먹어라.”라는 말이 나오며, 1525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저를 ‘딤채조’라 하였다.
즉 우리 겨레는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림으로써 독자적으로 국물이 많은 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채소 국물에 침지(沈漬)된다. 또 국물이 많은 동치미 같은 것에서는 채소가 국물 속에 침전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네 고유의 명칭인 침채가 생겨난 것이다. 박갑수(朴甲秀)는 침채가 팀채가 되고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딤채는 구개음화하여 김채가 되었으며, 다시 구개음화의 역현상이 일어나서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김치와 관련하여 『시경』에 “밭두둑에 외가 열었다. 외를 깎아 저(菹)를 담그자.”는 구절이 최초의 기록으로 언급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저’는 김치의 직접적인 기원이 아니라 '원시형 채소절임'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석명(釋名)』에도 저에 관한 설명이 있다. 『석명』에 의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가 짓무르는 것을 막아준다.”고 하였다. 이로써 저는 채소를 젖산 발효시켜서 저장하도록 하는 젖산 발효식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 때의 『주례(周禮)』에도 순무 · 순채 · 아욱 · 미나리 · 죽순 등 일곱 가지 저를 만들고 관리하는 관청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저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음을 증명하는 문헌상의 자료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의 식품에 관한 서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나, 우리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문헌을 통하여 그 시대의 식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의 『쇼쇼원문서[正倉院文書]』나 『연희식(延喜食)』 같은 문헌에 의하면 소금 · 술지게미 · 장 · 초 · 느릅나무 껍질에 절인 김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수보리지란 김치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쌀가루와 소금에다 채소를 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쌀가루로 담그는 김치는 500년경의 중국 식품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도 나와 있다. 『제민요술』에는 이밖에도 많은 종류의 김치가 설명되고 있다. 일본은 기후가 온습하기 때문에 쌀가루를 쓰는 김치가 쉽게 산패하므로 쌀가루를 쌀겨로 바꾸게 되어 일본의 대표적인 김치인 단무지가 형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단무지의 원조는 수수보리지라 하겠는데 다른 김치들과 달리 수수보리라는 고유명사를 붙인 것이 주목된다.
일본의 옛 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오진왕[應仁王] 때 백제사람 수수보리가 건너와서 누룩으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수수보리지는 중국에서 백제로 전해져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백제에는 수수보리지뿐만 아니라 『제민요술』의 여러 김치가 식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백제에서뿐 아니라 삼국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려 중엽에 이규보가 지은 「가포육영」이라는 시 속에 순무를 재료로 한 김치가 우리 문헌상 최초로 등장한다. “무 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되네.” 이로써 고려시대의 김치로는 무장아찌와 무 소금절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달충(李達衷)](E0043952)의 「산촌잡영(山村雜詠)」이라는 시에서는 여뀌에다 마름을 섞어서 소금절이를 하였다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초로도 김치를 담갔던 것 같다.
고려 때의 문헌에 의한 기록은 이것뿐이지만 일본의 『쇼쇼원문서』나 『연희식』에는 채소에 조피나무열매 · 여뀌 · 양하 등의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보이고, 원나라 때의 식품서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는 채소에 마늘이나 생강 같은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우리네 김치에도 채소와 향신료를 섞은 것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조선시대 중엽에 들어와서 고추가 수입되면서 우리나라 김치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이전의 김치는 소금물에 담그거나 천초 · 회향 등 향신료를 이용하여 담갔다. 1670년(현종 11)경의 『음식디미방』에는 동아를 절여서 담그는 소금절이 김치나 산갓을 작은 단지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붓고 뜨거운 구들에 놓아 익히는 김치가 보인다. 이것은 무염침채(無鹽沈菜) 처럼 채소 자체를 소금 없이 숙성시키는 것이다.
또 생치침채법(生雉沈菜法)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은 간이 든 오이김치를 껍질을 벗겨 한치 길이만큼 가늘게 썰어 물에 우려두고, 꿩을 삶아 오이지와 같이 썰어, 따뜻한 물에 소금을 알맞게 넣어 나박김치와 같이 담가 삭혀서 먹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김치는 식물성 식품과 동물성 식품을 아울러 이용하는 데 커다란 특색이 있는데, 1600년대 말엽에 비록 고추를 쓰지 않았어도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김치의 재료로서는 동아 · 오이 등의 외무리가 많고 무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음식디미방』에는 ‘생치잔지히’ · ‘생치지히’ 등이 보이는데 이들은 오이지를 재료로 하여 꿩고기와 함께 간장기름에 볶은 것이다. 이로써 2차 재료로 쓰이는 소금절이 가공품도 역시 ‘지히(지)’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55년(효종 6)에 신속(申洬)이 엮은 『농가집성』에 「사시찬요초」라는 월령식농서가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침과저(沈瓜菹)와 침즙저(沈汁菹)가 나온다. 침즙저는 가지 · 장 · 밀기울을 섞어 뜨거운 마분(馬糞)에 묻어 20일이 지난 뒤 먹는 것으로 오늘날의 즙장이다. 즙장에 가지가 들어가니 이것은 장아찌의 일종이 되기도 하겠는데 이것을 저로 보았다.
1600년대 말엽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요록(要錄)』이라는 문헌에는 11종류의 김치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김치류에도 고추를 재료로 쓰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 · 배추 · 동아 · 고사리 · 청태 콩 등의 김치와 무를 소금물에 담근 동치미[冬沈]가 설명되어 있다. 또 무염침재라 하여 무에 맑은 물을 넣고 4일쯤 두어서 거품이 일면 즙을 버리고 다시 맑은 물을 넣어 만드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오이김치인 엄황과(淹黃瓜)에서는 향신료를 쓰고 있다. 즉 오이를 뜨거운 물에 데쳐내고 건조시켜 소금 · 당 · 천초 · 회향 · 식초를 넣어서 담갔다. 이로써 당시에 고추가 전래되었으나 아직 김치에 이용되지는 못하였고 향신료로 천초나 회향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15년(숙종 41)경의 『산림경제(山林經濟)』의 김치류를 보면, 고추가 들어온 지 1백년이 지났는데도 오늘날과 같은 김치는 보이지 않고 소금에 절이고 식초에 담그거나 향신료와 섞어 만들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자(鮓)만들기 다섯을 설명하고 있다.
『석명』에서는 자가 저의 일종으로 소금과 쌀로써 물고기를 익혀서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늘날의 생선 식해이다. 「고사십이집」에서는 쌀 · 누룩 · 소금 · 기름 등을 써서 채소를 발효시켜 먹는 것도 자라고 하였다. 이를 『임원십육지』에서는 자채(鮓菜)라 하고 있다. 이 채소로 만드는 자는 백제의 수수보리지와 같은 것으로 조선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도 식해를 담글 때 무를 함께 섞는 일이 있다.
그러다가 50년이 지난 1766년(영조 42)에 나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는 김치에다 고추를 도입한 것이 보이고 있다. 침나복함저법(沈蘿葍醎菹法)을 보면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채 · 호박 · 가지 등의 채소와 고추 · 천초 · 겨자 등의 향신료를 섞고 마늘즙을 듬뿍 넣어서 담그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같은 것이다. 또 황과담저법(黃瓜淡菹法)은 오이의 3면에 칼자리를 넣고 속에 고춧가루 · 마늘을 넣어서 삭히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오이소박이이다. 그밖에 동치미 · 배추김치 · 용인오이지 · 겨울가지김치 · 전복김치 · 굴김치 등 오늘날의 김치가 거의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김치는 중국에도 전해졌다. 1712년(숙종 38)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곳에서 김치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녀가 만든 동치미의 맛은 서울의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1803년(순조 3)의 『계산기정(薊山紀程)』에 의하면 “통관(通官) 집의 김치는 우리나라의 김치 만드는 법을 모방하여 맛이 꽤 좋다.”고 하였다. 『계산기정』의 김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18세기에는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건너가서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중국의 쓰촨포채(四川泡菜)는 포채항아리에 8% 정도의 소금물을 6할 정도 되게 넣은 다음 여기에 소금물의 0.1% 정도의 천초, 3%의 고추, 3%의 술을 넣고, 따로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20%의 소금물에 절였다가 꺼낸 것을 항아리에 담고 약 10일간 숙성시켜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동치미와 비슷하다. 쓰촨지방은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중 쓰촨출신의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하므로 우리의 동치미가 쓰촨에 전하여졌다는 추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조리 · 가공법은 1872년(고종 9)경의 『임원십육지』 속에 집대성되었다. 『임원십육지』에서는 김치의 종류를 엄장채(醃藏菜) · 자채(酢菜) · 제채(虀菜) · 저채(菹菜, 沈菜)의 넷으로 크게 분류하였다. 또 엄장채란 소금 · 술지게미 · 향신료 등에 채소를 섞어 넣어 겨울을 위하여 저장하는 것이고, 자채와 저채는 같은 종류이지만 자는 소금과 쌀로써 발효시킨 것이고 저는 젓갈 · 장 · 생강 · 마늘 · 식초 등의 짜고 시고 매운 것과 잘 조화시킨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저채에 대한 설명에서는 “엄장채 · 자채 · 제채가 다같이 저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개발된 종류의 저를 특히 저채라고 한다. 이들을 구태여 구별한다면 저채는 발효시킨 뒤 그대로 먹는 것이고 엄장채는 물에 씻어서 2차 가공이나 조리 재료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저채와 제채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는 잘게 썬 것이고, 저는 채소를 통째로 발효시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채와 자채의 관계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누룩이나 곡물을 쓰는지의 여부로 구별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 김치류의 주종은 저채(침채)이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존재가 되어 있고 나아가서는 저채로써 저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임원십육지』에는 또 젓갈을 섞어주는 김치인 해저방(醢菹方), 곧 섞박지가 등장한다. 이것은 소금에 절인 잎줄기가 달린 무에 오이 · 배추 등의 다른 채소, 청각채와 같은 해초, 고추 · 생강 · 천초 · 마늘 · 겨자 등의 향신료, 조기 · 젓갈 · 전복 · 소라 · 낙지 등의 해산물, 산미완화제(酸味緩和劑)가 되는 전복껍질 등을 함께 버무려 알맞은 소금농도에서 젖산 발효시킨 것이다.
이로써 오늘날의 김치가 규모상으로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그 뒤는 과실 · 짐승고기 · 잣 등 기호에 따라 보충하는 정도의 발전이 있었고, 또 채소의 품질개량에 따른 재료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김치류의 제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증보산림경제』나 『임원십육지』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대 및 현대의 김치 변화의 주된 요인은 김치 재료의 품종개량과 젓갈 및 조리법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속이 꽉 찬 결구형 배추가 우리 식탁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계속하여 배추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1960년대까지도 서울배추, 개성배추라고 하는 반결구형의 배추를 사용하여 김치를 담그는 집이 많았었다.
반결구형 배추 중 서울배추는 조직이 단단하고 수분이 적고 저장성이 좋아 김장 김치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아직도 드물지만 김치를 담글 때 서울배추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김치 재료의 하나인 젓갈도 전에는 각 지역에서 잡히는 생선을 이용하여 각 가정에서 젓갈을 많이 담가서 김치에 넣었으나 요즈음 대도시에서는 집에서 젓갈을 담그는 일이 매우 드물게 되었고 공장에서 김치용 액젓이 생산되어 많은 가정에서 이용하고 있다.
김치 조리법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은 6 · 25전쟁과 도로시설과 교통수단의 발달과 매스컴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지역 사이를 왕래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아 각지방의 고유한 김치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지역을 이동하게 되었으며 그 지방에서 장기간 머물게되면서 서로 다른 지방의 김치를 먹어보고,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게 되어 다양한 조리법을 접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로시설이 좋아지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들게 되면서 물자의 유통이 빨라진데다 TV 등 매스컴의 영향으로 각 지역의 독특한 김치는 지역성을 잃은 대신 조리법이 일반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 김치는 세계적인 음식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2000년에는 일본 · 미국 · 영국 등 외국에 7,900만달러의 김치를 수출하였다. 또한 2001년 7월 5일에는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서 김치를 ‘국제식품’으로 공인을 하여, 앞으로 해외로의 수출 전망이 밝아졌다.
우리나라의 김치는 지방에 따라, 그리고 각 가정에 따라 특유한 것이 있어서 실로 다양하다. 특히 지방에 따른 특색은 고춧가루의 사용량과 젓갈의 종류들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는 고춧가루를 적게 쓰는 백김치 · 보쌈김치 · 동치미 등이 유명하며, 호남지방은 매운 김치, 영남지방은 짠 김치가 특색이다. 젓갈로는 새우젓 · 조기젓 · 멸치젓 등이 쓰이는데, 중부 · 북부지방에서는 새우젓 · 조기젓을 쓰고 남부지방에서는 멸치젓 · 갈치젓을 많이 쓴다. 지역에 따른 김치의 종류 및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 서울: 궁중음식으로 고춧잎깍두기 · 오이소박이 · 장김치 등이 독특하였으나 요즈음은 여러 지방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므로 특징을 잃어가고 있다.
② 경기도: 풍요하고 모양이 화려하다. 용인오이지 · 순무 짠지 · 순무김치 · 꿩김치 · 고구마줄기김치 · 숙김치 · 보쌈김치 · 섞박지 · 비늘김치 · 백김치 등이 있다.
③ 강원도: 바위와 산이 많아 산물이 많지 않으므로 다음해 봄까지 먹도록 저장해야 한다. 서거리깍두기 · 채김치 · 동치미 등이 있다.
④ 충청도: 젓국을 쓰지 않고 소금만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박김치 · 파짠지 · 열무물김치 · 가지김치 · 시금치김치 · 새우젓깍두기 등이 있다.
⑤ 전라도: 조기젓 · 밴댕이젓 · 병어젓을 사용하고, 참깨와 찹쌀 풀을 넣어 독특한 맛을 낸다. 갓쌈김치 · 고들빼기김치 · 배추포기김치 · 검들김치 · 굴깍두기 등이 있다.
⑥ 경상도: 멸치젓을 사용하며, 기후 관계로 간이 세며 국물이 없고 양념이 비교적 적다. 전복김치 · 속새김치 · 콩잎김치 · 우엉김치 · 부추김치 등이 있다.
⑦ 제주도: 전복김치 · 동지김치 · 해물김치 · 나박김치 등이 있다.
⑧ 황해도: 동치미 · 호박김치 · 갓김치 · 고수김치 등이 있다.
⑨ 함경도: 생선이 흔하여 김치에도 생태 · 대구 등 기름기 없는 것을 넣어서 시원한 맛을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콩나물김치 · 갓김치 · 함경도대구깍두기 · 채칼김치 · 봄김치 등이 있다.
⑩ 평안도: 양념이 간단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며 육수를 사용해서 단맛을 낸다. 가지김치 · 영변김장김치 등이 있다.
우리나라 김치의 가장 큰 특성은 김치에다 고추를 섞는 것이라고 하겠다. 고추는 비타민 C가 매우 많아서 사과의 50배, 밀감의 2배에 이른다. 또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과 고추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 E는 비타민 C의 산화를 막아주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긴 겨울 동안 부족되기 쉬운 비타민 C를 이 김치를 통하여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캡사이신은 젓갈의 지방이 산패하여 비린내가 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김치에 들어가는 고추와 마늘은 김치를 발효시키는 젖산균의 번식을 크게 도와준다고 한다. 그밖에도 김치는 식물섬유로서의 구실도 크게 하고 있다. 이렇듯이 김치는 미각 · 촉각 · 시각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영양상으로도 식물성과 동물성을 아울러 가진 완전한 영양식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양념에서 밥반찬을 거쳐 하나의 부식량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849년(헌종 15)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김장과 장담그기는 일년의 2대 행사라고 하였다. 1816년(순조 16)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보이는 김장 모습은 다음과 같다.
무우 · 배추 캐어들여 김장을 하오리다
앞냇물에 정히 씻어 함담(鹹淡)을 맞게 하소.
고추 · 마늘 · 생강 ·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두리요 바탱이 항아리요.
양지에 가가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김치는 종류나 먹는 시기에 따라 독 · 중두리 · 바탱이 · 항아리 등에 담는다. 김치항아리도 정성을 다하여 만든 것이라야 김치가 제 맛을 낼 수 있다. 우수 · 경칩이 지나 땅이 풀린 직후의 흙을 빚어서 이른봄에 제일 처음 구운 독이라야 잡내가 나지 않고 단단하다는 것이다.
또 김치를 잘 관리하자면 얼지 않고 시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정도에서 4∼6주간 보관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농가월령가」에서 보듯이 김치항아리를 짚에 싸서 깊이 묻어 온도의 변화를 막는다. 또 김치의 산패를 막으려면 공기와의 접촉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김치항아리에 김치를 단단히 눌러서 넣고 위에는 우거지를 덮어 이것으로 공기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온상재배의 발달에 따라 김치재료인 채소가 계절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게 되고 인구의 도시집중과 아파트 생활자의 증가에 따라 옛날처럼 많은 김치를 한꺼번에 담그는 일이 적어지고 소량씩 담그게 되었다. 또 아파트나 연립주택의 경우 김치독을 묻을 땅이 없으므로, 스티로폴이 들어간 이중벽의 플라스틱 김치독이 등장하게 되었고, 김치항아리를 톱밥이나 왕겨에 묻는 방법도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김치 전용 냉장고가 만들어져서 김치를 최장 4개월까지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전통적인 김치에도 현대문명의 물결이 몰려들고 있다.
또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가정에서는 김치를 담글 시간이 없다. 그래서 김치만들기의 일부는 이제 공장으로 빠져나가 합성수지주머니로 진공포장한 김치제품이 나오게 되었으며, 김치를 담가 각 가정에 배달해주는 전문업체들도 생겼으며,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김치를 담가 배달해 주는 업체도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