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부췌(家禮附贅)』는 조선시대의 학자 안신(安迅)이 주자의 『가례』를 대상으로 문헌 고증을 통해 내용적 완결성을 제고하고 필요한 의절을 보완하여 행례 시에 참조하도록 편찬한 예서이다. 이를 위해 『가례』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뽑아 기록하고, 당시 조선의 제도와 중국의 민간 의례서와 조선 학자들의 문집 가운데 예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채록하여 그 밑에 덧붙여 적었다. 또한 『가례』에는 빠져 있지만 행례의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다수의 의절을 수록하였다.
『가례부췌』의 저자인 안신(安迅)의 본관은 광주, 자는 대지(待之), 호는 오휴당(五休堂)으로 경상남도 밀양 출생이다. 아버지는 참판에 추증된 광소(光紹)이며, 어머니는 고성(固城) 이씨로 참의에 증직된 교(校)의 딸이다. 장현광의 제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군기사부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전 연구에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심경』과 『소학』에 밝았다. 전란으로 서당이 파괴되어 학생들이 배울 곳이 없자 동지를 규합하여 서당을 지어 학생들에게 교육을 권장하였고, 향사당(鄕射堂)을 짓고 조약을 만들어 학문에 힘쓰도록 하는 규칙을 세웠다. 『오현전(五賢傳)』 1권과 우리나라의 말과 중국의 한자말에 대한 연구서인 『자해(字解)』 2권의 저술이 있다. 저서로는 『오휴당집(五休堂集)』 2권이 있다.
6권 3책의 목판본이다.
1628년(인조 6) 8권 4책으로 성서(成書)되어 전승되다가 안정복의 교정을 거쳐 6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안정복이 「교정가례부췌서(校訂家禮附贅序)」를 작성한 것은 1758년(영조 34)이지만,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성서된 지 270여 년, 안정복 사후 109년이 지난 1899년(고종 36) 밀양에서 초간된다. 안정복이 교정할 당시 저본으로 사용했던 필사본이 규장각에 소장된 『가례부췌(8권 4책, 필사본)』이다. 해당본에는 안정복인(安鼎福印)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을 뿐 아니라 본문 곳곳에 교감 또는 교정 관련 사항들이 본문의 여백과 난외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가례부췌』가 아닌 『가례부해(家禮附解)』라는 제목의 필사본 2종이 현전한다. 하나는 임흘(任屹)의 『용담전집(龍潭全集)』에 수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소장본으로, 모두 8권 4책본이다. 3종 필사본의 차이는 서(序) 또는 제사(題辭)에 보이는 약간의 출입과 수록된 도(圖)의 종류 수 그리고 거향잡의의 결락 여부 정도이다. 그 점에서 3종은 옮겨 베끼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종(異種)의 필사본으로 판단된다.
본서는 원래 8권 4책이었던 것을 안정복이 권7에 기록되어 있던 새로 증보된 내용[新增]을 각 편의 별록(別錄) 부분으로 옮겼다. 또한 권8의 「속거가잡의(續居家雜儀)」와 「거향잡의(居鄕雜儀)」에서 「속거가잡의」는 『소학』을 요약한 것이며, 『소학』은 당시 사람들이 외우면서 배우고 있던 내용이므로 제거하였다. 그리고 「거향잡의」는 권1의 「거가잡의」로 옮겨 6권 3책본으로 편집하였다.
본 책에는 1626년(인조 4) 안신이 쓴 「가례부췌서(家禮附贅序)」와 『가례』에 실려 있는 주희의 본서(本序), 그리고 「가례부췌교정범례(家禮附贅校訂凡例)」, 「인용서책(引用書冊)」, 「가례부췌목록(家禮附贅目錄)」과 통례와 관례에 해당하는 권1과 권2가 포함되어 있다. 인용 서목에는 중국의 서적으로 『이정전서(二程全書)』, 『여씨향약(呂氏鄕約)』, 『한위공제례(韓魏公祭禮)』, 『주자대전(朱子大全)』, 『의절가례(儀節家禮)』, 『가례회통(家禮會通)』, 『가례집설(家禮集說)』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학자의 저술로는 김종직(金宗直)의 『점필재집(佔畢齋集)』, 이황(李滉)의 『퇴계집(退溪集)』, 정구(鄭逑)의 『한강집(寒岡集)』, 조호익(曺好益)의 『지산집(芝山集)』, 안여경(安餘慶)의 『옥천예설(玉川禮說)』, 손기양(孫起陽)의 『농한예해(聾漢禮解)』, 정경세(鄭經世)의 『우복집(愚伏集)』 등 퇴계학파 학자들을 위주로 거론되고 있다.
『가례』의 통례에는 사당(祠堂), 심의제도(深衣制度), 거가잡의(居家雜儀) 등을 다루고 있으나 본서에는 심의제도 부분이 상례(喪禮) 부분으로 옮겨져 있다. 아울러 『가례』의 본문(本文)과 본주(本註)만 인용 및 해설되어 있고 부주(附註)는 최소한으로 인용되고 있다. 권2의 경우에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사당의 후반부에는 안로(安璐)의 『죽계잡의(竹溪雜儀)』에서 인용한 추증제의(追贈祭儀)와 신주이안의(神主移安儀), 저자가 구성한 신주봉안의(神主奉安儀), 추후조주의(追後造主儀), 안여경(安餘慶)의 『옥천잡의』에서 인용한 개조신주의(改造神主儀)가 보완되어 있다. 고례(古禮)와 송대(宋代) 학자들의 설을 이용하여 본문의 내용을 고증한 부췌별록(附贅別錄)이 권말에 첨부되어 있다. 거가잡의의 후반부에 보완된 거향잡의는 구준(丘濬)의 『가례의절』에서 원용한 것이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를 다룬다. 관례의 끝부분에 있는 부췌별록에는 『예기』의 「옥조(玉藻)」, 「교특생(郊特牲)」, 「잡기(雜記)」, 「증자문(曾子問)」과 『의례』, 『대대례기(大戴禮記)』,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 관례와 유관한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혼례에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현구고례(見舅姑禮), 서현부지부모례(壻見婦之父母禮) 등 『가례』에 규정된 절차에 대한 해설과 고증이 실려 있고, 구준의 『가례의절』에서 원용한 서현부지사당(壻見婦之祠堂)과 『옥천잡의』에서 인용한 서부상견례(壻婦相見禮) 등 의절이 증보되어 있다.
상례의 초종(初終)에서 문상(聞喪)까지의 절차에 대한 고증과 해설이 기록되어 있다. 초종, 목욕(沐浴) · 습(襲) · 전(奠) · 위위(爲位) · 반함(飯含), 영좌(靈座) · 혼백(魂帛) · 명정(銘旌), 소렴(小斂), 단괄발문좌(袒括髮免髽) · 전(奠) · 대곡(代哭), 대렴(大斂), [보(補)]성빈(成殯), 성복(成服), 조석곡(朝夕哭) · 전(奠) · 상식(上食), 조(弔) · 전(奠) · 부(賻), 문상(聞喪) · 분상(奔喪) 등이 포함된다. 이와 함께 『가례』에서는 다루지 않은 조정사제의(朝廷賜祭儀), 상복(신증(新增)), 본종오복해(本宗五服解), 외복복해(外族服解), 처위부당복해(妻爲夫黨服解), 출후자위소후복해(出後子爲所後服解), 대부위사서강복해(大夫爲士庶降服解), 잡복해(雜服解), 식격(式假) 등의 항목이 보완되어 있다.
상례의 치장(治葬)에서 반곡(反哭)까지의 절차에 대한 고증과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치장, 천구(遷柩) · 조조(朝祖) · 전(奠) · 부(賻) · 진기(陳器) · 조전(祖奠), 견전(遣奠), 발인(發引), 하관(下棺) · 사후(祠后) · 제주(題主) · 성분(成墳), 반곡(反哭) 등이다. 아울러 개장의(改葬儀), 반장의(返葬儀), 합장의(合葬儀), 초혼반가의(招魂返家儀), 대여(大轝), 영거(靈車), 요여(腰輿), 제기제도(祭器制度) 등이 보충되어 있다.
상례의 우제(虞祭) 이후의 절차와 기타 관련 사항에 대한 고증과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우제, 졸곡(卒哭), 부(祔), 소상(小祥), 대상(大祥), 담(禫), 거상잡의(居喪雜儀), 치부전장(致賻奠狀), 위인소장(慰人疏狀) 등의 항목이 다루어지고 있다. 속례(俗禮)에 따라 보완된 삭전절사의(朔奠節祠儀)와 『죽계잡의』에서 원용한 체천길제의부조매(遞遷吉祭儀附祧埋) 그리고 『가례』에서는 소략하게 다루고 있는 조석상식(朝夕上食)에 관한 내용을 보충하였다.
제례(祭禮)에 해당하는 사시제(四時祭), 녜(禰), 기일(忌日), 묘제부후토(墓祭附后土) 등의 항목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생일제고비의(生日祭考妣儀), 영분의(榮墳儀), 분묘가토의(墳墓加土儀), 개사의(改莎儀), 석물고묘의(石物告墓儀), 분묘화위안의(墳墓火慰安儀) 등 『가례』에 빠져 있으면서 실제적으로 필요한 의절들이 보완되어 있다. 권말에는 부록으로 「가례부췌도(家禮附贅圖)」 25개와 1758년(영조 34) 안정복의 발문과 1899년(고종 36) 안상진(安尙鎭)이 쓴 발문이 실려 있다.
『가례부췌』의 내용상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통례고증(通禮考證), 관혼고증(冠婚考證), 초상례고증(初喪禮考證), 상장고증(喪葬考證), 제례고증(祭禮考證)이라는 항목을 통해 『가례』에 대한 문헌 고증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증의 항목을 설정함으로써 『가례』의 문헌적 정합성을 확보하려 시도한 것은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이 도입된 이후 민간의례 연구서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둘째는 부췌별록(附贅別錄), 신증(新增)으로 표시된 부분에 『가례』에는 명문 규정이 없지만 행례(行禮)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다양한 의절을 수록함으로써 『가례』의 수행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목록에 보완된 14개의 의절 가운데, 조정사제의(朝廷賜祭儀, 『가례회통』), 개장(改葬, 『가례의절』), 반장(返葬, 『가례의절』)을 제외한 11개의 의절은 조선의 학자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신주이안의(神主移安儀), 체천길제(遞遷吉祭), 추증제(追贈祭)는 안로(安璐)의 『죽계잡의(竹溪雜儀)』에서, 개조신주의(改造神主儀)는 옥천(玉川) 안여경(安餘慶)의 『옥천잡의(玉川雜儀)』에서, 상견례(相見禮)는 조식(曺植)의 것을 원용한 것이다. 나머지 5개는 저자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동시대인 신의경(申義慶)의 『상례통재(喪禮通載)』에는 길제(吉祭)가, 김장생의 『상례비요』에는 길제와 개장(改葬)의 의절이 수록되어 있을 뿐임과 비교하면 『가례부췌』의 이러한 성과는 『가례』를 조선의 상황에 맡게 보완하여 현지화하려는 진일보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