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신앙은 나한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 신앙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이다.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16나한, 오백나한을 나한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나한은 삼명, 육신통, 팔해탈법을 모두 갖추어서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라 하였다. 대표적인 나한도량으로는 함경남도 길주군 석왕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 전라북도 완주군 봉서사, 서울 수유동 삼성암 등이 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의역하여 살적(殺賊) · 응공(應供) · 응진(應眞)이라고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고, 응공은 모든 번뇌를 끊고 도덕을 갖추었으므로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뜻이다.
이 아라한은 천안명(天眼明) · 숙명명(宿命明) · 누진명(漏盡明)의 삼명(三明)과 천안통(天眼通) · 천이통(天耳通) · 타심통(他心通) · 신족통(神足通) · 숙명통(宿命通) · 누진통(漏盡通)의 육신통(六神通), 팔해탈법(八解脫法) 등을 모두 갖추어서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라고 하여 일찍이 신앙대상으로 존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16나한, 오백나한을 주로 나한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규모가 큰 대부분의 사찰에는 영산전(靈山殿)을 두고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우에 10대 제자 또는 16나한 · 18나한 · 오백나한을 봉안하고 있다. 나한전이나 응진전(應眞殿)을 따로 건립한 사찰도 많다.
10대 제자는 지혜제일 사리불(舍利佛), 신통제일 목건련(木犍連), 고행제일 마하가섭(摩訶迦葉), 해공제일 수보리(須菩提), 선법제일 부루나(富樓那), 논의제일 가전연(迦旃延), 천안제일 아나율(阿那律), 지계제일 우바리(優婆離), 다문제일 아난타(阿難陀), 밀행제일 라후라(羅睺羅)를 가리킨다.
16나한은 빈두루 바바라타사 · 가락가발사 · 가라가바리타사 · 소빈타 · 낙구라 · 발타라 · 가리가 · 벌사라불다라 · 술박가 · 반탁가 · 라호라 · 나가사나 · 인게라 · 벌라바사 · 아시다 · 주다반탁가 등이다. 이 16나한에 제빌다라와 빈두루 두 존자를 더하여 18나한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나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수로왕이 도읍을 정한 뒤 “산천이 빼어나서 가히 16나한이 살 만한 곳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보천(寶川)이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 북대(北臺)의 상왕산(象王山)에 석가여래와 함께 오백 대아라한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또, 임종 전에 북대의 남쪽에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원상석가(圓像釋迦)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오백나한을 그려 봉안하고, 낮에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게 하며, 이름을 백련사(白蓮寺)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나한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고려 때는 923년(태조 6) 태조가 양(梁)나라에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오백나한상을 가지고 귀국하자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하게 하였다. 그 뒤 고려왕실에서는 나한재(羅漢齋)를 자주 베풀었다.
1053년(문종 7) 9월에는 문종이 신광사(神光寺)에서, 1090년(선종 7)에는 선종이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서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8년(숙종 3)에는 숙종이 외제석원(外帝釋院)과 왕륜사(王輪寺)에서 나한재를, 이듬해 4월에는 보제사(普濟寺)에서 오백나한재를 베풀었다.
1102년(숙종 7)에는 숭산 신호사(神護寺)에서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166년(의종 20)에는 의종이 보제사 나한전에서 1만 등을 밝혔으며, 이듬해에는 금신굴(金身窟)에서 나한재를, 1169년(의종 23)에는 의종이 친히 축문을 써서 산호정(山呼亭)에서 나한재를 베풀었다.
1173년(명종 3)에는 명종이 외제석원에서 나한재를 베풀었고, 1176년에는 왕륜사(3월)와 보제사(4월)에서 오백나한재를, 1177년에는 외제석원과 왕륜사에서 나한재를, 1178년에 3월에 보제사에서 오백나한재와 4월에 왕륜사에서 나한재를 베풀었다.
1203년(신종 6)에는 신종이 보제사에서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262년(원종 3)과 1269년에는 원종이 보제사에서 오백나한재를 베푸는 등 왕실에서 주관한 것만도 28회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나한재는 주로 보제사와 왕륜사 · 외제석원 · 숭산사 등에서 행해졌으며, 그 목적은 나한에 대한 기도를 비롯하여 비오기를 기원하거나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는 등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이후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 사찰에는 나한을 봉안하는 영산전이나 나한전, 오백나한전 등이 건립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되기 전에 이상한 꿈을 꾸고 안변 설봉산(雪峰山)의 토굴에서 공부하는 대사 무학(無學)을 찾아서 해몽을 부탁하였다. 무학은 장차 크게 귀한 자리에 오를 징조라 하면서 “나한전을 세우고 오백나한을 봉안하여 500일 동안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 때 함경도 길주 광적사(廣積寺)가 화재로 폐사가 되어 오백나한이 딴 곳에 안치되어 있었으므로, 석왕사(釋王寺)를 창건한 뒤 오백나한을 배로 운반하여 안변해안에 두고 하루에 하나의 나한상만 옮기면서 500일 동안 기도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2구의 나한상을 한꺼번에 옮겨 나한전에 안치하였는데 그 2구가 이에 노하여서 밤 사이에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으며, 그 뒤 묘향산 상비로봉에서 나타났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태종 때에는 유신(儒臣) 변계량(卞季良)이 나한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이 연회를 베풀었을 때 변계량도 참여하였으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경이 나한재를 지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하였다. 1422년(세종 4) 5월에는 세종이 호조판서 신호(申浩)를 길상사(吉祥寺)에 보내서 나한재를 베풀었고, 1428년 9월에는 세종이 예조의 건의에 따라서 태조가 창건한 석왕사를 중창하고 나한재와 시왕재(十王齋)를 베풀 수 있도록 토지 50결(結)을 내렸다.
1436년 6월에는 집현전 부제학 안지(安止) 등이 “경성 안의 인왕동(仁王洞)에 나한당이 있는데 귀천남녀를 물을 것 없이 내왕연락하니 뒤에는 금지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하면서 나한당을 폐쇄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억불정책 속에서도 나한신앙이 상당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65년(세조 11) 3월에는 세조가 원각사(圓覺寺)에서 나한의 분신사리(分身舍利)를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나한에게도 사리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1480년(성종 11) 5월 23일에는 원각사의 대광명전(大光明殿)에서 불사(佛事)를 지냈는데 이튿날 아침에 성수(性修)와 지일(智一)이 “동쪽의 제1나한이 돌아선 것을 보았다.”고 하여 의금부에서 성수를 불러 문초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를 믿는 우리나라에서는 대승의 보살과는 달리 나한을 소승의 성자라 하여 참선을 하는 고승들이 대단치 않게 취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우리나라 나한신앙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석가모니의 화신이라고 하는 진묵(震默)과 율봉(栗峯)은 나한에 얽힌 이적을 보인 대표적인 고승이다. 진묵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서사(鳳棲寺)에 있을 때 관재(官財) 수백 냥을 축낸 뒤 도망하겠다는 아전에게 나한재를 올릴 것을 권하였다.
나한재를 올리자, 진묵은 아전에게 비어 있는 형방(刑房)을 자청해서 맡도록 한 뒤 주장자(柱杖子)로 나한의 머리를 차례로 때리면서 “아전의 일을 잘 보아주어라.”고 하였다. 나한들은 그 아전의 꿈에 나타나 “네가 구하는 일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어찌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고 하였다. 그때에 마침 죄인들이 많이 생겼고, 뇌물을 주는 자가 많았으므로 한 달 만에 축낸 관재를 모두 갚고 죄를 모면했다고 한다.
또 진묵이 길을 가다가 한 사미승(沙彌僧)을 만나서 동행하게 되었다. 한 강가에 이르러서 사미가 “먼저 물을 건너보아서 그 깊이를 알게 하겠다.”고 한 뒤 옷을 걷고 건너는데 물이 깊지 않은 듯하였다. 진묵도 옷을 걷고 건너다가 깊은 물에 빠지게 되었다. 진묵은 이것이 나한의 장난임을 깨닫고 “잿밥이나 즐기는 나한이 작은 신통은 나보다 나으나 대도(大道)는 마땅히 늙은 나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면서 나한을 꾸짖었다.
한편,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 수도한 조선 후기의 고승 율봉은 신도들이 기도를 오면 불공을 올리지 않고 대중공양을 한 뒤 나한전에 가서 주장자로 나한의 머리를 치면서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을 명하였는데, 나한들은 큰스님의 분부라 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하루는 사미승이 와서 예배하고 어떤 별실로 인도하였는데 그곳이 얼마 뒤 변소로 바뀌었다.
율봉은 나한의 장난임을 깨닫고 이튿날 아침에 주장자로 나한상의 머리를 부수려고 하자 대중들이 나한전 앞에 모여서 만류하였다. 간밤 꿈에 사미승이 나타나서 “내일 아침에 큰스님이 우리를 부수려고 하니 막아달라.”고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율봉은 웃으면서 “소승이란 요사스럽다.”고 나무랐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나한이 계율을 깊이 지키고 성격이 괴팍하다는 이유로 나한재를 지낼 때 특별히 몸가짐에 신경을 쓴다. 그리고 나한에게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복을 구하는 자들은 지극히 신봉하고 있다.
현재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나한신앙이 크게 성행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나한도량으로는 함경남도 길주군 석왕사, 경상북도 영천시 거조암(居祖庵),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사(雲門寺),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서사, 서울 수유동 삼성암(三聖庵) 등을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