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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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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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학
개념
동물의 질병치료 · 예방 · 육종 · 사육 · 이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수의학은 동물의 질병치료·예방·육종·사육·이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내과학·미생물학·번식학·병리학·생리학·약리학·외과학·육종학·해부학 등으로 세분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마를 비롯한 잡축들의 사양(飼養)과 병역의 관리에 행정적인 준비와 시설들을 갖추었다. 조선시대에는 수의학적 지식이 산림경제가들이 알아야 되는 상식으로 보급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수의학 교육도 서양 수의학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최근에는 개·고양이 등 애완동물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지면서 수의학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특히 인수공통전염에 대한 업무가 대폭 강화되었다.

목차
정의
동물의 질병치료 · 예방 · 육종 · 사육 · 이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
내용

이는 내과학 · 미생물학 · 번식학 · 병리학 · 생리학 · 약리학 · 외과학 · 육종학 · 해부학 등으로 세분되어 있다.

수의는 중국 주(周)나라 때의 직제(職制)를 기록한 『주례(周禮)』의 천관편(天官篇)에 식의(食醫) 중사(中士) 2인, 질의(疾醫) 중사 8인, 양의(瘍醫) 하사(下士) 8인, 수의 하사 4인 등 제도적으로 4과(科)를 두고 있어, 수의가 서기전부터 중국에 있었으며 짐승들의 병을 치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왕궁에서 사용하는 우마와 군마 등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육식을 하였으며, 또한 전쟁에 필요한 군마(軍馬)를 중요하게 여겨 왔으므로 군마와 함께 식용에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가축들의 병을 예방, 치료할 수 있는 전통적 수의학의 지식을 가졌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관제 중에 약부(藥部) · 목부(木部) 등과 함께 마부(馬部)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부의 직제 중에 수의제도가 포함되어 있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0에는 284년(고이왕 51)에 백제가 아직기(阿直岐)를 일본에 보내어 양마(良馬) 2필(匹)을 주니 일본은 아직기를 시켜 그 말을 기르게 하고 그곳을 구판(廐板)이라고 부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595년(영양왕 6)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가 불교를 선포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을 때 일본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그의 신하인 다치바나[橘猪弼]를 시켜 혜자로부터 말을 치료하는 술법을 배워서 그 뒤부터 역대로 그 술법을 전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수의술(獸醫術)의 태자류(太子流)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의 수의학이 일본에 전래되고, 통일신라시대의 의학적 지식과 술법이 고려에 계승되어 이어 왔음은 분명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마정(馬政)과 목축을 분담한 관서로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사복시(司僕寺)를 설치하여 여마구목(輿馬廐牧)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 또 봉거서(奉車署)를 두어 궁궐내 마굿간 일을 맡게 하였다.

한편, 전구서(典廐署)에서는 잡축(雜畜)을 사양(飼養)하게 하였으며, 장생서(掌牲署)에서는 종묘제례(宗廟祭禮)에 필요한 희생(犧牲)들을 추천하게 했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고려의 행정제도들은 우마를 비롯한 잡축들의 사양과 병역의 관리에 행정적으로 모든 준비와 시설들을 갖추게 하고 있어 수의학적 지식을 보급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수의가 제도적으로 어느 부서에서 어떻게 일하였는지는 전연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1388년(창왕 1) 8월에 조준(趙浚)이 시무(時務)를 진술하는 가운데 사복시에 수의 5인과 구사(驅使) 30인을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없애라는 기록이 있어서 수의가 사복시에 소속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식화지에는 1076년(문종 30)에 다시 제정된 전시(田柴)의 과결(科結)에 수의박사(獸醫博士)가 모든 영사(令史) · 서사(書史) · 주사(主事) · 복사(卜師)들과 함께 제16과 전(田) 22결에 배정되어 있다.

그 밖에 태의감(太醫監)은 제6과 전 70결, 시(柴) 27결, 태의(太醫)는 제8과 전 60결, 시 21결, 약장랑(藥藏郎)은 제10과 전 50결, 시 15결로 되어 있다. 어의(御醫)는 제11과 전 45결, 시 12결, 대의박사(大醫博士)와 대의승(大醫丞)은 제14과 전 30결, 시 5결, 식의(食醫) · 의정(醫正) 등은 제15과 전 25결, 주약(注藥)은 제17과 전 20결로 되어 있어 수의박사의 관직에 대한 등급과 봉록(俸祿)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수의학이 어느 수준까지 발달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없고, 다만 조선 정종 1년(1399)에 편찬된 『신편집성마의방 · 우의방(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을 통하여 그 개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즉, 방사량(房士良)이 쓴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권중화(權仲和)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백락경(伯樂經)」과 「원조결(元朝訣)」을 경위(經緯)로 하고, 그 밖에 모든 방서 중에 효력 있는 방문(方文)과 동인(東人)들이 이미 경험한 술법들을 채집하여 편집한 것이라고 하였음은 이 책이 송 · 원대의 우마방서(牛馬方書)와 동인들의 경험방을 수집한 고려시대의 수의학 전통지식을 이어 온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또 편집을 계획한 조준과 김사형은 고려 말의 중신으로 조선 건국에 참여한 공신들이며, 편집에 종사해 온 권중화와 한상경도 고려 말의 문신들인데, 특히 권중화는 의약학 지식에도 능통하였다. 서문을 쓴 그 당시의 전의소감(典醫少監)인 방사량은 고려 공양왕 1년(1389)의 전의시승(典醫寺丞)이었으므로 고려시대에 쓰여 있던 전통 지식에 기초를 둔 우마의방서들을 중심으로 편집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이미 학술적 체제를 갖춘 수의학 전문서인 마의방과 우의방들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특히 수의방에 대한 동인들의 경험방들이 널리 실용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1399년에 제생원(濟生院)에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집, 간행할 때에 부록으로 함께 편성되었고, 그 뒤 1580년(선조 13)에 전라도 전주에서 재간되고, 1633년(인조 11)에 제주에서 복간되었다. 최근 제주본을 대본(臺本)으로 만주 봉천시(奉天市: 지금의 瀋陽) 췌문재(萃文齋)에서 영인된 사실은 중국에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에 관제를 정할 때 고려의 구제(舊制)를 이어받아 중앙에 사복시를 두어 여마구목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 전구서를 따로 설치하여 목축 · 사양의 일을 맡게 하였으며, 그 밖에도 종묘제례의 희생을 봉양하는 전생서(典牲署)와 잡축을 기르는 사축서(司畜署)가 따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왕가에 바칠 유락(乳酪)을 만들기 위하여 우유소(牛乳所)를 따로 세웠으며, 제주도에는 축마별감(畜馬別監)과 축마점고사(畜馬點考使)를 두어 마우의 세공(歲貢)과 재적장부(在籍帳簿)를 자세히 감시하도록 하였으며, 각 도에는 목장을 설치하고 각 목장에는 감목관(監牧官)을 두어 마우들의 관리와 목양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또 지방에는 도(道) · 부(府) · 목(牧) · 군(郡) · 현(縣) 이외에 역(驛)과 진(鎭)을 따로 두고, 각 역에는 반드시 상당수의 역마(驛馬)를 배치하여 국가의 공용이나 군사의 응급에 수용하게 하였으며, 사복시에 소속된 잡직 중에는 이마(理馬)와 마의(馬醫)들의 상당수가 배치되었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병전 중에는 구목(廐牧) 조항을 따로 설치하여 마우의 목양(牧養)과 이마 · 마의들의 직무 태만을 감시하여 왔다. 이러한 정책상 방대한 행정제도들의 정비와 함께 마우 및 잡축들의 병역(病疫)을 예방, 퇴치하기 위하여 수의학적 지식과 그 보급에 상당한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 마 · 우의 교역과 수의학의 교류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수백 필의 말을 보냈으며 때로는 종마(種馬)를 보내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에 명나라 사신 태복시소경(太僕寺少卿) 축맹헌(祝孟獻) 등이 수의 왕명(王明) · 주계(周繼) 2인을 데리고와 말 1만 필의 교역을 청하였는데, 수의들이 말을 고를 때 4척 이상은 중마(中馬)로 하고 3척 이하는 받지 않기로 하였다.

그 다음해 2월에 축맹현과 왕명이 다시 와서 마필의 모색치세(毛色齒歲)들을 조사하여 선택의 규격을 정하였으며, 1404년에는 명나라의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경우(耕牛) 1만 필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407년에 세자 제(禔:讓寧大君)가 사절로 명나라에 갈 때 판전의감사(判典醫監事) 양홍달(楊弘達) 이외에 양마(養馬) 3인과 마의 1인을 데리고 함께 가게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나라와 많은 마우를 교역하였으며, 수의들의 왕래로 인하여 수의학적 지식의 교류도 상당히 전개되었다.

(2) 수의학의 권장

수의학을 권장하기 위하여 『경국대전』 병전의 취재(取才)에 마의를 선발하는 데는 병조에 사복시제조와 함께 수의 전문서인 『안기집(安驥集)』 중에서 세 곳씩 강(講)을 받도록 하였는데, 의과취재(醫科取才)에는 초시(初試) · 복시(覆試)로 나누어 시행되었으나 수의취재(獸醫取才)에는 단시제(單試制)를 채택하였다.

1413년에는 혜민국조교(惠民局助敎) 김경진(金敬珍) 등 4인을 사복시에 임시로 파견하여 마의방을 학습하게 하였으며, 1427년(세종 9)에는 우마의방서(牛馬醫方書)를 전의감의 의원들에게도 배우게 하여 사복시의 권지(權知:후보자 혹은 試補)로서 수의의 일을 분담하게 하였다.

때로는 사복시에 전속시켜 나이 젊은 이마들에게 마의방의 약명 및 치료술을 전습하게 한 뒤 마병(馬病)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전임 서용(敍用)하게 하였다. 1463년에는 일반 의경(醫經) 및 모든 방서 중에서 양우법(養牛法)을 뽑아 초록하여 의생(醫生)으로 하여금 학습하게 하는 등 각 왕조에서 수의학을 계속 권장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3) 수의서의 편집

1399년 고려 수의학의 전통을 이어 온 『신편집성마의방 · 우의방』을 편집, 1466년(세조 12)에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여 마의서(馬醫書)를 편집하였다.

1494년(성종 25)에 승정원(承政院)에서 이창신(李昌臣) · 이거(李琚) · 권오복(權五福) 등에 명하여 『안기집』과 『수우경(水牛經)』을 번역, 반포하여 우마의 치료법을 널리 쉽게 알게 하였다. 이는 우마의 병을 치료하는 우마의(牛馬醫)들은 거의가 식견이 낮고 문리(文理)도 해득하기가 어려워 치료가 제대로 잘 되지 않는 폐단이 많았으므로 알기 쉽게 번역, 간행하여 일반에게 널리 알도록 한 것이다.

『안기집』이 마의(馬醫)의 취재 선발시험에 강서(講書)로 채택된 것은 『송사(宋史)』에 처음 보이는 송대의 수의전서(獸醫專書)이며, 『수우경』은 청나라의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 채록된 중요한 수의서이다.

그리고 『우마양저염역치료방언해(牛馬羊猪染疫治療方諺解)』는 1541년(중종 36)에 왕명으로 편집한 책인데, 『신편집성마의방 · 우의방』과 송나라 때의 『중수정화경사증류비용본초(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 그 밖에 『신은방(神隱方)』 · 『산거사요(山居四要)』 · 『사림광기(事林廣記)』 등에서 우 · 마 · 양 · 저 등의 전염병에 쓰이는 치료방들을 뽑아서 수록한 것으로, 한글과 이두(吏讀)로써 일반에게 알기 쉽고 또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자세히 해설하였다.

이 책이 초간된 뒤 1636년(인조 14)에 해주목(海州牧)에서 중간되었다. 이 중간본에 실려 있는 좌승지 권응창(權應昌)의 서문에 의하면 1541년에 평안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성행하므로 우마양저의 염역치료방을 선정하여 중앙의 교서관(校書館)이 그날로 19권을 인출하여 10권은 본조(本曹:兵曹) · 전생서 · 사축서 · 오부 · 전의감 · 혜민서 등에 고루 나누어 배치하게 하고, 나머지 9권은 개성부(開城府) 및 8도에 보내어 각 도에서 다시 출판하여 각 지방관에게 널리 보급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증응골방(新增鷹鶻方)』은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이조년(李兆年)이 편술한 『응골방(鷹鶻方)』중종 때 이염(李爓)이 신증(新增)한 것이다. 매[鷹]는 우리나라, 특히 황해도 해주목과 백령진(白翎鎭)에 많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고려 때는 응방(鷹坊)을 설치하고 매년 원나라에 보내는 매를 관리해 왔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매가 ‘해동청(海東靑) 보라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응골방』은 1640년에 일본에 전해졌고, 3년 뒤 일본에서 중간되었다.

그리고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는 상 · 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간행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1682년(숙종 8)에 영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하사한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인본(印本)이 현재 전하고 있다. 이 『마경초집언해』는 『신편집성마의방』과 명나라의 마사문(馬師問)이 편술한 『마경대전(馬經大全)』을 초집(抄集)하여 일반에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해로써 간행하였다.

이상의 수의방서 이외에도 1634년에 명나라 마사문의 『마경대전』을 『신각참보침의마경대전(新刻參補針醫馬經大全)』이라는 서명으로 1634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중간할 때 부록으로 함께 간행하였다.

중국 안주(安州) 수의 유본원형(喩本元亨)이 수집한 『도상수황우경대전(圖像水黃牛經大全)』도 초본(抄本)으로서 산림경제가(山林經濟家)들에게 널리 애용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간행한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잡방(雜方) 중에도 양마(養馬) · 상마(相馬) · 치마(治馬) 등의 경험방들이 십여 조에 걸쳐 소개되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의 목양편과 『고사신서(攷事新書)』의 목양문에도 양우 · 양마 · 양양 · 양계 · 양어 · 양봉 · 양학(養鶴) · 양록(養鹿) · 양야금(養野禽) 등의 목으로 나누어 각 수(獸) · 어(魚) · 금(禽)들의 목양에 필요한 사양법과 역질의 치방(治方)들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로써 수의학적 지식이 수의전문가들 이외에 산림경제가들이 알아야 되는 상식의 하나로도 널리 보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1864년(고종 1)에는 이전의 수의학 전통이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는 수의의 행정제도가 전면적으로 새로 개편되었는데, 그와 함께 수의학 교육도 서양 수의학을 중심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수의학의 행정제도는 내부관제(內部官制) 중의 위생과에서 가축들의 역병(疫病) 예방 및 치료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그 밖에 내부 직할 병원인 광제원(廣濟院)에서도 수축(獸畜)들의 병독을 검사하는 일을 맡아 왔다. 1909년에는 법령으로 「도수규칙(屠獸規則)」을 반포하여 수축들의 도살에 관한 규정들을 엄격하게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농부 · 상부 · 공부에서는 「수출우검역법(輸出牛檢疫法)」을 반포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축우들의 우역(牛疫) · 탄저(炭疽) 및 유행성아구창 등에 대한 검사규정을 실시하였다.

군부(軍部)에서는 1900년에 포병대대를 설치하면서 군의관 이외에 1 · 2 · 3등의 수의들을 따로 배치하였으며, 1904년에는 군무국(軍務局) 안의 기병과(騎兵課)에 수의부(獸醫部)를 따로 설치하고 군마의 위생 · 목양 · 공급 · 증발 · 제철(蹄鐵) 등 모든 업무들을 관장하였다. 때로는 수의를 양성하는 수의학교를 임시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수의학 교육은 군무국 기병과에서 임시로 실시하여 왔으나, 그 뒤에 관립 수원농림학교(官立水原農林學校)에 수의과를 따로 설치하고 수의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에는 1년 기한으로 수의속성과(獸醫速成科)를 설치하여 수의를 임시로 양성해 오다가 얼마 뒤에 중단되었다. 1910년 8월 이후에는 한말의 수의학에 관한 모든 제도들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다가, 1915년 8월에 처음으로 「수역예방령(獸疫豫防令)」을 제정,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소 · 말 · 양 · 산양 · 돼지 · 개 등에 관한 우역 · 탄저 · 기종저(氣腫疽) · 비저(鼻疽) 및 피저(皮疽) · 유행성아구창 · 돈콜레라[豚虎列刺] · 돈라스역[豚羅斯疫] · 광견병 등을 예방하고자 한 것이다.

이 예방령은 각 수역들의 특수성에 따라 그 병들의 예방과 접종에 필요한 예방액 · 진단액 · 면역혈청의 주사 또는 수역 유행 지방의 방역 및 소독방법들이 반드시 의무적으로 실시되도록 규정하였다. 또 방역을 전담하기 위하여 경찰수의(警察獸醫)를 따로 두었는데, 때에 따라서는 임시로 육군수의나 그 밖의 전문수의들을 경찰수의 촉탁으로 위촉시켜 수역의 방역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1915년 7월에는 법령으로 「이출우검역규칙(移出牛檢疫規則)」을 반포하여 식용에 이용할 목적으로 이출하는 축우들의 검역규정을 강화하여 이출하기 전에 18∼20일 동안 억류해 두면서 병독의 오염에 대한 예방과 소독들을 엄밀히 실시하게 하였다. 1937년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수의축산과(獸醫畜産科)를 설치하고 전문수의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8월에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에 따라 수원농과대학에 수의학과와 축산학과가 농과대학의 수의학부로 출발하였으며, 1953년 4월에 서울대학교의 수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74년에 예과(豫科) 2년의 과정을 두는 6년제 대학으로 한때 개편되었으나 1976년부터 예과과정을 폐지하고 다시 4년제 수의과대학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수의학 분야의 세분화된 교과과목과 기초학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8년 신입생부터는 2년의 예과과정을 두는 6년제 대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국립 수의학 교육기관으로는 서울대학교의 수의과대학을 비롯하여 경북대학교 · 경상대학교 · 전북대학교 · 전남대학교 · 충북대학교 · 충남대학교 · 강원대학교 · 제주대학교에 수의과대학이 있다. 사립으로는 건국대학교에 수의과대학이 있다. 이들 10개 수의학 교육기관은 다변화되고 있는 수의학 연구와 전문수의사들 양성에 힘쓰고 있다.

최근의 수의학 분야는 과거에 소 · 말, 그리고 돼지 등 대 · 중 동물 위주의 방역이나 질병예방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최근에는 그 범위가 점차 넓어져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즉, 가축의 대상도 대 · 중동물 이외에 개 · 고양이 등 애완동물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지고, 그에 따라 가축이나 애완동물에서 전파될 수 있는 인수공통전염병(人獸共通傳染病)에 대한 업무가 대폭 강화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소비자들의 안전축산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어 축산물의 안전성에 대한 업무가 대폭 증가함에 따라 지금까지 보건복지부와 농림부에 이원화되어 있던 축산식품 관리업무를 지난 1998년 6월 14일부로 농림부로 일원화함으로써 수의사들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이 막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의 분야의 축산식품 관리업무가 농림부로 일원화됨에 따라 새롭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98년 8월 1일자로 정부의 조직개편에 발맞추어 이전에 수출입 동물 및 축산물의 검역검사를 담당하던 국립동물검역소와 국내 가축질병 방역과 그와 연관된 연구업무를 담당하던 국립수의과학연구소가 통합, 국립수의과학검역원으로 탄생하였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기초 과학을 비롯하여 국내질병 방역 · 검역, 그리고 축산식품 안전성 확보를 위한 축산물검사 등 모든 기술개발과 행정서비스를 책임지고 수행할 수의 분야의 유일한 국가기관이다.

또한 이러한 행정 · 제도적으로 국가의 정책을 입안하기 위한 국가 정책 부서로는 농림부 축산국에 축산위생과를 두어 수의업무 전반에 대한 행정업무와 가축들의 위생과 방역 등을 관장하고 있으며, 방역 · 검역 · 축산물위생 · 수의 분야 등으로 구분하여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군(軍)에서는 의무감실에 수의병과를 두어 수의관으로 하여금 군의 식품위생 · 환경위생 · 군용동물의 질병예방 및 진료 등을 전담하게 하고 있다.

현재 수의학의 학술연구단체로는 대한수의학회(大韓獸醫學會) · 한국임상수의학회(韓國臨床獸醫學會) · 한국수의공중보건학회(韓國獸醫公衆保健學會) · 한국실험동물학회(韓國實驗動物學會) 등이 설립되어 있어 수의학 분야의 전반적인 학술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수의사들의 학술창달과 권익신장 및 복지향상을 목적으로 사단법인 대한수의사회(大韓獸醫師會)를 설립하여 전국 각 시도에 지부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이 현재 우리나라 수의학 분야는 국가경제 발전에 발맞추어 최근 급신장하고 있는 축산업 및 수산업과 함께 동물의 보건과 환경위생 및 각종 질병의 예방과 진료는 물론 특히 인수공통전염병의 예방과 진료를 담당함으로써 동물식품의 위생검사와 더불어 사람의 보건증진과 방역에도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축산업과 수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주례(周禮)』
『일본서기(日本書紀)』
『한국의학사』(김두종, 탐구당, 1979)
『서울대학교삼십년사』(서울대학교,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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