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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숭례문 정면
서울 숭례문 정면
건축
개념
공간의 경계나 출입하는 곳에 설치한 건조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문은 공간의 경계나 출입하는 곳에 설치한 건조물이다. 동문·명문·문벌처럼 ‘같은 부류의 사람들’ 또는 ‘한 집단의 지체’를 뜻하는 넓은 의미도 있지만, 건축적 의미에서 문은 ‘하나의 공간적 영역을 이루는 경계와 그 영역에 이르기 위한 통로가 만나는 지점’을 말한다. 따라서 문은 독립 구조물이라기보다는 담·벽 등과 함께 존재하며 출입 기능을 담당한다. 종교건축과 묘사건축의 문들은 우주의 섭리와 선악을 지배하는 신들이 출입한다는 상징성을 띤다. 또 나제통문, 일주문, 개선문처럼 영역 표시나 기념용으로 세운 문들도 있다.

정의
공간의 경계나 출입하는 곳에 설치한 건조물.
개설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학교 출신을 동문이라 부르며, 유학자들을 일컬어 공문(孔門)이라 하는 등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명문(名門) · 문벌(門閥)이라고 할 때는 ‘한 집단의 지체’를 뜻하기도 하고, 등룡문(登龍門) · 취직문이라 할 때는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운 고비’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건축적 의미에서의 문의 개념은 ‘하나의 공간적 영역을 이루는 경계와 그 영역에 이르기 위한 통로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문이란 독립적인 구조물이라기보다는 담 · 벽 등의 경계요소와 병존할 때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만들어야만 그 방으로서 유용하다.”는 노자(老子)의 말에서도 방이라는 영역과 벽과 문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방의 안팎을 경계짓는 벽에 난 문을 방문이라고 한다면, 집의 안팎을 구획하는 담에 난 것을 대문이라 할 수 있다. 또, 마을의 경계에 세워진 문을 이문(里門)이라 하고, 더 나아가 도시의 경계를 형성하는 성벽에 난 것을 성문(城門)이라 한다. 따라서, 문의 성격과 명칭은 그것에 연속된 경계요소의 성격에 의하여 좌우됨을 알 수 있다.

문이란 문틀을 세우고 문짝을 단 것이 대부분이지만 꼭 이런 형식의 구조물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두 나라 사이의 국경에 있던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암벽을 뚫은 자연적인 동굴의 모양이고, 담양소쇄원(사적, 1983년 지정)의 오색문은 담장의 일부를 잘라놓음으로써 문의 기능을 한다. 또, 개선문(凱旋門) · 일주문(一柱門) 등은 문짝을 달지 않고도 그 구실을 다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고대건축에서는 문과 창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문을 “어떤 구역에 사람이 출입하기 위한 것”이라 정의하며, 집 또는 방에 출입하기 위한 것을 지게문[戶]이라 하였다.

‘門(문)’이라는 한자는 지게문이 두 짝 붙은 형상(兩戶形象)을 묘사한 상형문자이며, 원래는 지게문의 형상이었다가 규모가 커진 것을 문이라고 부른 것이다. 기능적으로 문은 출입을, 창은 채광을 목적으로 한 개구부(開口部)로서 모두 기둥 사이에 설치하는 구조이다.

고려시대까지의 건물만 해도 안동 봉정사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이 문과 창이 형태상 구별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조건축, 특히 조선시대 이후의 건축에서는 문과 창의 구별이 모호한 이른바 ‘이문대창현상(以門代窓現象)’ 이 보편적이었다.

정약용(丁若鏞)『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창은 좁고 작게 만들어 다만 햇볕을 받아들일 만하게 하고 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으니, 옛날의 창은 지금의 것과 같이 크지 않았다. ”고 하여 조선 후기에는 이미 창과 문, 창과 호, 문과 호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 · 호 · 창의 개념을 잘 정리한 이만영(李晩永)의 『재물보(才物譜)』에 의하면 문은 어떤 장소에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이며, 호는 한 짝이면 호, 두 짝이면 문, 창은 건물의 눈, 그리고 외호(外戶)는 대문이라고 구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문과 호, 외호가 모두 문으로 분류되나, 창과 호는 창호라 하여 분류함이 일반적이다.

문의 종류

건물평면 및 입면형태에 따른 분류

① 일주문(一柱門) : 보통 사찰입구에 세워지는 문으로, 출입을 제한하기보다는 사역(寺域)을 뜻하는 의미가 더 크다. 사찰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고대 가람에서는 일주문의 흔적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신성한 성역(聖域)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의를 지닌 기념물로서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예는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유구(遺構)로서, 구조는 통로와 직각이 되게 일직선상의 기둥 2개를 세워서 그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가로대고, 또 여기에 양쪽 기둥 위에서 十자형으로 짧은 창방과 평방을 짜 그 위에 출목수(出目數)가 많은 다포계(多包系) 공포(栱包)를 짜올려 도리와 서까래를 걸고 부연(副椽)을 올린 형식이다.

또, 기둥 앞뒤로는 보조기둥을 세우고 경우에 따라서 이 보조기둥 위에 다시 창방 · 평방을 걸고, 이 위에 다시 공포를 짜올려 지붕의 하중(荷重)을 분산시키는 방법도 사용된다. 범어사통도사의 일주문과 같이 평면으로 보아 횡으로 일직선상에 기둥 4개를 배열하여 중앙칸과 양쪽 협간을 만들어 3칸으로 짤 때도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 보통이지만 경우에 따라 쌍계사나 용문사의 일주문과 같이 팔작지붕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또, 기둥 아래는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돌기둥을 세우기도 한다.

일주문은 공포에 출목을 많이 두고 있어 포작(包作)이 화려하고 복잡한 데다, 용두(龍頭) 등의 조각과 금단청(錦丹靑)을 하여 출입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별세계로 들어서는 기분을 가지게 해 준다. 일주문에는 보통 문짝을 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② 일각문(一脚門) : 기둥을 2개만 두어 간단한 출입문으로 사용하거나, 궁전 · 양반집에서 협문(夾門)으로 사용하는 작은 문이다. 보통, 문원(門楥, 문설주) 기둥 밑에 짧게 빠져나온 신방목(信枋木 : 일각대문 기둥 밑에 가로 끼어댄 나무)을 받쳐놓고 그 위에는 기둥을 보강하도록 옆에 붙여세운 용지판(龍枝板 : 기둥 옆에 세워 대는 널)이 있고, 문지방과 상인방 위에는 창방을 걸고 이 창방 위에 직각 방향으로 각연(角椽)을 첨차형(檐遮形)으로 올리고 그 위에 개판(蓋板)을 얹은 다음 헛집을 짓고 보토(補土)를 올려 기와를 이어 지붕을 꾸민다.

일각문은 그 규모가 작아서 보통 대문이나 정문으로 쓰이지 않고, 집뜰의 공간을 구분해줄 때 담장에 연결하여 협문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③ 사주문(四柱門) : 기둥을 4개 세워 만든 문의 총칭으로, 민가에서 정문으로 이용되지만 후문 또는 측문 등으로도 사용된다. 문짝은 외부 기둥에 달며, 지붕은 맞배지붕 또는 팔작지붕으로 기와를 얹은 예가 많지만, 민가에서는 경우에 따라 짚을 올리기도 한다.

④ 평삼문(平三門) : 솟을삼문과 함께 정면으로 보아 3칸의 문을 의미하는데, 지붕의 형태에 따라 중간칸의 지붕을 양 옆칸의 것보다 높게 하여 꾸민 3칸문을 ‘솟을삼문’이라 하고, 지붕이 다같이 평평하게 된 3칸문을 ‘평삼문’이라 한다. 따라서, 솟을삼문은 지붕의 높이부터 중앙칸에 속하여 있는 것과 옆칸에 속하여 있는 것이 서로 다르다.

평삼문이나 솟을삼문의 지붕은 보통 맞배지붕으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며, 특히 솟을삼문은 측면으로 보아 박공널이 2단으로 보이게 된다. 또, 솟을삼문의 경우 문짝의 크기도 중앙칸의 것과 옆칸의 것이 차이가 뚜렷하지만 평삼문의 경우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평삼문이나 솟을삼문은 종묘재실 · 사당 등에 많이 사용되어 중앙칸은 신도(神道)로, 협간은 제주(祭主)들의 출입구로 이용된다.

⑤ 3칸문 : 정면 3칸의 문으로, 특히 궁궐의 정문이나 성곽의 누문(樓門) 등에 중층(重層)으로 세워져 평삼문과는 다소 성격이 다른 문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⑥ 4칸문과 5칸문 : 4칸문은 사찰의 문으로 현존하는 예는 아직 보고된 적이 없지만, 황룡사의 3차 가람 때 중문을 4칸으로 세웠음이 발굴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것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의 중문이 유일하게 4칸문인 것과 함께 주목을 끌고 있다.

또, 5칸문의 대표적인 예로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출입은 양 옆칸을 제외하고 중앙의 3칸만을 사용하고 있다. 사찰의 중문일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양 옆칸에 인왕상(仁王像)을 안치하여 출입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⑦ 중층문(重層門) : 궁궐이나 사찰에 많이 사용되었다. 궁궐이나 성곽의 문인 경우 밑의 층은 물론이고 2층 위에도 창마다 두꺼운 널판문을 달아 유사시에 이 위에서 방어를 하며 전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중층문 중에는 누문과 홍예문(虹霓門)이 있는데, 누문은 주로 궁궐의 내외부의 문이나 지방의 향교 등 사가(私家)에서 많이 쓰였고, 홍예문은 성곽이나 정궁의 외곽문 등에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는 밑의 홍예층까지 합하여 3중으로 된 문이 많이 있으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예를 별로 볼 수 없다.

기능에 따른 분류

① 성문(城門) : 도성(都城) · 산성(山城) · 읍성(邑城) 등에 속하여 있는 모든 문을 말한다.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이 남아 있고 그 이전 것은 유적만 남아 있다. 그 중 서울 한양도성(사적, 1963년 지정)은 도성의 좋은 예로서 동서남북 사방에 문이 있는데, 동쪽에는 동대문, 서쪽에는 서대문, 남쪽에는 남대문, 북쪽에는 숙정문(肅靖門)이 있고, 다시 그 사이인 동북쪽에 혜화문,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 동남쪽에 광희문,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이라 하여 모두 8개의 크고 작은 문이 있다.

북문인 숙정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예 위에 목조문루(木造門樓)를 올린 중층문의 성격을 취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동대문과 남대문은 목조문루가 중층을 이루고 있어 밑에서부터 3중층문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동대문은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두른 점이 특이하다. 또, 남대문은 조선 초기 다포양식의 문으로서 가장 귀중한 자료의 하나이다.

서울성곽 외에 도성문의 좋은 예는 정조 때 세워진 수원 화성(사적, 1963년 지정)의 문으로 남쪽에 팔달문(八達門), 북쪽에 장안문(長安門)이 있는데, 밑에는 돌로 된 홍예 위에 중층의 누문을 올려서 남대문 · 동대문과 같이 세웠고, 또 문밖에는 전축(甎築)의 옹성을 쌓았는데 옹성은 평면형태가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이 옹성 가운데는 옹성문을 두고 있으며, 이 위에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과 오성지(五星池)가 있음이 특징이다.

이들 성문은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같이 다포양식의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모두 5칸문루를 가진 큰 규모의 성문이다. 또, 동문으로 창룡문(蒼龍門)이 있고 서문으로 화서문(華西門)이 있는데, 이들은 돌로 된 홍예 위에 단층의 목조루를 올려세운 문이다.

여기에도 옹성이 둘러져 있다. 이 성에는 이 밖에도 암문(暗門)이 있어 성내 출입의 편리와 전략적 기능을 겸하고 있으며, 하천에는 수문(水門)을 돌홍예로 잘 쌓아놓고 있다.

이상의 예로 보아 도성에는 4대문을 사방에 두는 것이 기본이며, 필요에 따라 사이에 샛문이나 암문을 두었고, 도성이 석성(石城)인 경우 주요 성문은 돌홍예를 쌓아 목조루의 구조를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홍예구(虹霓口)에는 두꺼운 널판문을 달고 경우에 따라 외부에는 철갑편(鐵甲片)을 붙여놓아 적의 화살이나 총탄에 견디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문을 철갑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성도 도성의 경우와 같이 4방문을 두었는데, 일반적으로 산세가 험하거나 공사조건이 좋지 않아 도성이나 읍성보다 문의 규모나 조성기술이 떨어지는 예가 많다.

산성의 예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것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문의 실존유구는 거의 조선시대의 것이다. 석성의 경우 거의가 돌홍예를 짜 목조루를 올리든지 또는 일반적으로 누 없는 암문을 만들고 있다.

공주의 공산성(사적, 1963년 지정)이나 경주 월성(月城) 등 발굴에 의하여 밝혀진 백제 · 신라의 토성은 홍예가 아니고 목조누문이어서 고구려 벽화고분에 보이는 성곽도(城廓圖)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산성으로서 현재 성문이 남아 있는 예는 남한산성(사적, 1963년 지정) · 강화산성(사적, 1964년 지정) · 문경 관문성(關門城) · 공주 공산성 등이 있지만, 목조누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읍성의 경우도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있다. 현존 유구인 해미읍성(海美邑城) · 고창읍성(高敞邑城) 등의 유적에서 볼 수 있고, 또 조선시대에 그려진 성곽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중 경주읍성은 현재 유구로는 성곽 일부만 남아 있고 조선 말기에 그려진 성곽도에는 사방에 4문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는 돌홍예를 짜 그 위에 목조누문을 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해미읍성도 4방에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진남문(鎭南門)만이 남아 있다. 이 문은 외부에 홍예를 두르고 내부에는 방형의 출입구를 돌로 짜 문짝을 달게 되어 있어 내외에 홍예를 짠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예는 다른 산성에서도 가끔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명 · 청대의 궁전 오문(午門)의 예로 반원호형(半圓弧形)의 홍예 대신 방형의 홍예를 틀고 있는데 이 방형의 홍예는 예로부터 대륙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의 중층의 홍예성문은 그 내측의 양옆에 문루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마련하고 있으며, 위에서는 무사석(武沙石)에 맞추어 여장을 둘러쌓고 양측 계단이 닿는 부분, 출입하는 협문을 목조 또는 전축으로 만들어 판문을 단다.

누바닥은 중앙부에는 마루를 2중으로 깔아 그 밑이 바로 돌로 쌓은 홍예의 내부널판자가 되도록 하고 있고, 이 널판자에는 밑에서 용틀임의 그림을 단청으로 그려 문의 위엄을 더 한층 높여 주고 있다.

또, 여장 안으로 들어오는 빗물을 내보내기 위하여 홍예석 위쪽 양옆에는 석루조(石漏槽 : 돌로 만든 홈통)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② 대문(大門)과 정문(正門) :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양택(陽宅)을 조성하는 데 있어 주실(主室)의 위치는 물론, 대문의 방향과 위치도 중요하게 여겨, 향(向)을 8괘(八卦)로 나누어 주실의 향과 관련시켜 이에 따라 좋고 나쁨을 말하고 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상택지(相宅志)에 보면 북 · 남 · 동 · 동남쪽에 주실을 둔 집은 북서 · 남서 · 북동 · 서쪽에 대문 두기를 꺼리고, 북서 · 남서 · 북동 · 서쪽에 주실을 둔 집은 북 · 남 · 동 · 동남쪽에 대문 두기를 꺼려서 이를 범하면 흉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대문의 방향은 물론 중문의 위치와 방향도 임의로 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다만, 고대 궁궐과 사찰의 배치에서 문의 향과 위치는 당시 일정한 양식으로 발전된 배치에 따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건축에서 대문과 정문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나, 엄밀히 구분한다면 대문은 출입에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제일 큰 외문을 의미하고, 정문은 그 건물의 정면, 즉, 앞면에 위치한 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각(殿閣)과 같이 앞면에 문이 여러 개 있어 출입한다면 정문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대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즉 대문은 집과 뜰을 사이에 두고 드나드는 큰 문이고, 정문은 뜰을 두지 않고도 건물 정면에 딸려 있는 것을 지칭한다.

③ 중문(中門) : 사찰에서 회랑(廻廊)과 연결되는 문으로, 여기에는 보통 인왕상을 봉안하여 불국토(佛國土)로 들어가는 수문장의 구실을 하게 한다. 그러나 요즈음 보통 금강문(金剛門) · 천왕문(天王門) 등이 중문의 기능을 가진다.

특히, 근대의 사찰에서는 사천왕문을 세우는 것이 유행하여 정면 3칸문을 하는데 중앙칸에만 문짝을 달아 출입하게 하고, 양 협간은 외벽을 치고 내부에는 중앙을 향하여 양측에 사천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다만, 법주사에는 사천왕문 앞에 금강문을 두어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봉안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또, 해탈문(解脫門)이나 불이문(不二門)도 중문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

④ 홍살문[紅箭門]: 어떤 경역(境域)을 상징하는 문으로서 보통 사당과 능(陵) · 묘(墓) · 원(園) 앞에 세우는데, 그 위치와 방향은 풍수도참사상의 영향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래 홍살문의 상징적 의미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있었던 석궐(石闕)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석궐이란 중국의 군주(君主) · 제현(諸賢) · 태수(太守) 등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그 거처와 고을에 세워졌던 것인데, 이것이 차차 묘 앞에 세우는 석조각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홍살문은 참도(參道) 양쪽에 구멍난 초석을 놓고 높은 나무기둥을 세워서 그 위에 가로대를 상하 인방(引枋)과 같이 가로질러 기둥에 꿰고, 여기에 수직재(垂直材)인 홍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는데 중앙에는 태극문양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구조에 붉은 석간주(石間硃) 칠을 한 것이 바로 홍살문이다.

이와 비슷한 구조와 용도를 지닌 것으로서 일본의 ‘도리이(鳥居)’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일본의 신사(神社) 앞에 놓은 상징적인 문이다. 또, 인도에는 ‘토라나(torana)’, 중국에는 ‘패루(牌樓)’라는 것이 있어 비슷한 상징적 기능이 있으나, 이들이 서로 상관되는지는 확실한 정설이 없다.

정문(旌門) : 충신이나 효자 ·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이다. 우리나라의 정문으로는 임경업(林慶業)의 정문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송지겸(宋之謙)의 효자문을 비롯하여, 정면 1칸에서 3칸까지 많은 예가 남아 있다. 정문에는 보통 당사자에 관한 편액(扁額)을 걸어둔다.

⑥ 객사문(客舍門) : 궐패(闕牌 : 闕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 패)를 모시고 어명을 받아 출장온 관리들이 잠시 머무르는 건물의 정문을 말한다. 객사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강릉객사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柱心包) 맞배지붕의 구조를 가지는 3문형식을 취하고 있다.

배흘림이 뚜렷한 기둥과 헛첨차가 있는 주심포작(柱心包作)은 아름다운 고려시대의 문을 대표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출입은 중앙칸과 협간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두 짝의 판문이 세 군데에 달려 있는데, 문의 양식과 규모로 보아 아주 큰 객사터의 정문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⑦ 암문(暗門)과 수구문(水口門) : 암문은 성문 중 하나로 문루를 올리지 않고 문의 크기도 겨우 1기(騎)가 드나들 수 있거나 병사 1인이 출입할 수 있게 한 작은 문이다. 적에게 노출되지 않게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수구문은 성벽이 하천을 가로지를 때 성벽 밑에 물이 흐르도록 해주는 시설로, 수원성곽의 화홍문(華虹門)은 7칸의 홍예석을 쌓은 좋은 예이다. 이 수문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철책을 한 예가 많다.

⑧ 아문(衙門) : 지방관아의 정문이다.

문의 구조와 재료에 따른 분류

① 돌홍예문 : 기저부(基底部)에 큰 돌을 받쳐놓고 그 위에 수직으로 가공석을 쌓아올리다가 이 위에 이맛돌을 원호(圓弧)의 곡선을 따라 홍예를 틀게 되는데, 이 홍예 구조는 위에서 실리는 하중이 양쪽으로 분산되어 재축(材軸) 방향으로만 작용하므로 구조상으로 안전하다. 홍예는 석재뿐 아니라 수원성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벽돌로 쌓기도 한다.

홍예문에는 외부측 홍예의 안쪽으로 두꺼운 판문이나 철갑문을 달아 여닫게 하는데, 여기에서는 문지도리(문짝을 달고 회전축이 되어 여닫게 하는 장부)에 확금(確金 : 구멍이 있는 쇠) · 화금(靴金 : 대문짝 아래 돌촉에 씌우는 쇠)을 씌워 문이 잘 여닫게 하며, 문띠장에는 외부로 국화동자정(菊花童子釘)을 박아 단단히 고정시킨다.

또, 안으로는 문빗장을 각목으로 단단히 걸도록 한다. 내외의 홍예석 좌우에는 무사석을 올려쌓아 수문을 세우는 기단의 기능을 가진다.

② 널판문 : 널로 짜 만든 문으로, 그 용도에 따라 많은 종류가 있지만, 대체로 출입을 위한 널판문과 창으로 쓰이는 널판문이 있다. 출입을 위한 널판문은 보통 민가에서 볼 수 있는 대문으로 대부분 안으로 열리게 되어 있으며, 널판의 한쪽 귀를 깎아 지도리를 만들어 둔테에 끼우거나 하여 문짝을 달도록 만든다.

또, 보통 빗장은 내부에서도 걸리도록 부착하지만, 부엌문 등은 경우에 따라 바깥으로 열리게 하여 내부공간을 되도록 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빗장도 외부에서 달기도 한다.

③ 철갑문 : 널판문을 두껍게 하여 그 외부에 철갑편을 갑옷 짜듯 잇고 못으로 고정시켜 적의 탄환을 막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성문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전주 풍남문(豊南門)이 대표적이다.

④ 사립문 : 시골집의 울타리문으로 사용되는 문으로 싸리나무나 대나무를 엮어 만든다. 뜰안이 들여다보이게끔 엮는데 초가와 아주 조화를 이룬다.

⑤ 석판문(石板門) : 불탑(佛塔)의 감실(龕室)이나 석총(石塚) 등에 사용되는 문이다.

역사적 변천

우리나라 건축물의 대부분이 목조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유구를 통해서는 조선시대와 일부 고려시대의 문형식만 알 수 있을 뿐, 그 이전의 역사는 발굴된 건물터나 고분벽화 · 가형토기 등의 유물 또는 약간의 기록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학계의 복원을 거쳐 고증된 서울 암사동수혈주거지(岩寺洞竪穴住居址)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원초적인 문의 흔적을 보여준다. 집 가운데 기둥을 하나 박고 서까래를 걸친 원추형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출입구 부분만은 서까래를 잘라 땅에 닿지 않게 하고, 출입구는 별도의 작은 차양을 달아 집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다.

이 시대의 유적들은 대부분 출입구의 방향이 수혈의 남쪽이나 남서쪽 사이에 만들어져 차광의 용도를 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200여개가 발굴되어 그 윤곽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시대는 이른바 반수혈주거(半竪穴住居)가 나타나게 되어 지붕처마가 땅에서 올라온 원시적인 벽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수혈의 내부에서 주거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시설로 계단 또는 경사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 “토실을 만들어 마치 무덤 같아 보이고 그 위로 문을 달았다.”라는 기록이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의 “거처는 초옥으로 만들었는데, 토실의 형태가 마치 무덤과 같으며 문은 위에 달았다(居處作草屋 土室形如塚 其戶在上).”라는 기록으로 보아 출입 시설의 흔적이 없는 주거지도 돌 또는 목조의 작은 계단을 설치하여 외부 지표면으로 출입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문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 · 가야의 집모양토기를 통하여 윤곽을 알 수 있다. 고구려시대의 용강대묘(龍岡大墓) · 요동성총(遼東城塚) · 약수리고분(藥水里古墳) 등 벽화에 성곽도가 그려져 있어 당시의 성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용강대묘의 성곽도 중앙에 중층누각이 그려져 있고, 아래층 정면 4칸 중 중앙 2칸에는 출입용 문을, 양 옆칸에는 상부에 작은 창을 두어 창과 문이 구별되어 있다.

요동성총의 것은 성문과 망루가 그려져 있는데 성안에 있는 불탑과 유사한 3층 건물이 주목된다. 1층벽 5칸 중 가운데 1칸을 채색하여 출입문을 표시하였다. 약수리고분에 그려진 성곽은 토성으로 추정되며, 성문을 성 위에 세우지 않고 지표상에 직접 세운 중층누문으로 2칸의 소규모이다.

또, 통구제12호분(通溝十二號墳) · 안악제1호분(安岳第一號墳) 등에는 큰 저택의 전각도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지붕모양 · 기둥머리 · 도리들과 함께 여러 개의 문과 문설주를 자세히 묘사하여,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문을 대단히 중요한 건축요소로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악제1호분의 것은 훼손이 심하여 전체를 잘 알 수 없으나, 담 가운데 큰 대문채가 있고 두짝 문을 달아 안으로 열게 되어 있어 조선시대 주택의 대문과 흡사하게 보인다.

이 밖에도 특이한 고분벽화로는 마선구제1호분(麻線溝第一號墳)의 창고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 높은 다락집 형태의 귀틀집 구조로 정면에 방패모양으로 생긴 문이 두 개 그려져 있다. 이상, 고구려벽화의 몇 가지 예에서 이미 문이라는 건축요소가 건축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이 상당히 높아, 다른 부분보다 정밀하고 뚜렷이 묘사된 점을 알 수 있다.

가야시대의 가형(家形)토기는 맞배지붕집 형태로 정면 가운데 두짝 문을, 양옆에는 살창을 새겨 넣었는데, 오른쪽은 위아래 두개의 살창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부엌 부분에 환기용 창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신라의 가형토기는 측면 박공쪽에 출입문을 뚫은 것이 주목된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불감모양의 토기 역시 측면 부분에 출입구를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모든 목조건축의 개구부가 건물의 길이 방향으로 나 있어 긴 쪽을 정면으로 삼고 있는 데 비하여, 신라 가형토기의 출입구 방향은 측면에 해당되는 쪽에 나 있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야 창호와 정문의 방향성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33 옥사조(屋舍條)에 통일신라시대의 신분별 가옥 제한사항으로 문에 대한 규제항이 보인다. 즉, “ 6두품(六頭品)은……중문(中門)과 사방문(四方門)을 설치할 수 없고, 5두품 이하 일반백성은 대문과 사방문을 만들 수 없다.”고 하여, 문의 존재유무가 계층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문이란 2층 누문으로 해석되며, 사방문은 집의 네 방향에 세우는 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계층에 따라 대문의 설치여부를 규정하는 현상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상류주택에는 대문채가 있으나 일반 서민주택에는 간이대문을 설치하거나 아예 없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건축양식과 문

성곽과 궁궐의 문

동양의 고대 도시의 구성원리를 규범화한 문헌으로는 『주례(周禮)』에 실린 고공기(考工記)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도성의 영역을 정전법(井田法 : 井자 모양의 格字形으로 도시 영역을 나누는 방법)을 이용하여 9등분하고 가운데 가구(街區)에 궁궐을 두었다.

또, 도성 안에 동서로 9개, 남북으로 9개의 도로를 만들어 동서남북 4방에 각 3개의 성문들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이상적인 도시와 성곽의 개념이 삼례도(三禮圖)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성문의 형상은 성벽 부분에 3개의 석축 홍예문을 쌓고 그 위에 초루(譙樓)라 부르는 문루를 세우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역대 중국 · 우리나라 · 일본의 고대 도시가 『주례』의 규범대로 완벽히 구성된 예는 없다. 다만, 정전법에 따른 격자형 가로구성의 흔적과 성곽의 4방에 성문을 세우는 원리, 성문의 형태 등은 『주례』의 규범을 따르고 있다.

성곽에서는 성문이 가장 중요한 구조물이다. 성문의 위치에 따라 도시의 가로체계가 구성되고 성문의 견고함에 비례하여 성곽의 방호능력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고을 중 성곽이 있는 읍성의 수는 110개(輿地圖書의 통계에 따름.)에 이르나 모두가 같은 유형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읍성의 구성이 한양성(漢陽城)의 예를 따랐기 때문에 한양성을 대표적인 전형으로 삼을 수 있다.

한양성은 동서로 난 주도로인 종로를 주축으로 삼고 지금의 광교를 중심으로 한 부도로를 남북축으로 삼았다. 각 도로와 성곽이 만나는 끝부분에 성문을 낸 것이 이른바 4대문으로 남에 숭례문, 동에 흥인문, 서에 돈의문, 북에 숙정문을 두었다. 이 중 북문은 경복궁 후원 산속에 위치하여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 주술적인 의미가 다분한 상징적인 문이어서 암문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머지 3대문은 모두 홍예문의 육축(陸築) 위에 중층누문을 올린 형태이고, 홍예 부분에는 두꺼운 널문[板門]을 달고 안쪽에서 큰 장군목(將軍木 : 문 안에서 가로지르는 큰 빗장)을 질렀다.

문루 부분의 벽에는 살문[箭門]을 달아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방어의 목적이 큰 성문들은 철갑문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동대문 · 팔달문 · 장안문, 고창읍성의 북문 등에는 성문 밖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둘러 이중의 방어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보통, 읍성의 규모에는 2∼4개의 성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도성인 한양의 경우 4대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다. 4소문은 모두 홍예를 튼 육축 위에 단층누문을 세워 중층누문의 4대문과 구별되었다. 총 8개의 성문 가운데 현재는 동대문 · 남대문 · 북문과 서소문인 창의문만 보존되어 있다.

궁궐의 제도 역시 고대부터 중요시되어 여러 가지로 규범화되었다. 그중 ≪예기≫에 규정된 것을 보면 대궐 주위에는 9개의 문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노전(路殿 : 궁궐 내에서 가장 중요한 政殿)을 중심으로 노문(路門) · 응문(應門) · 치문(雉門) · 고문(庫門) · 비문(扉門)의 5궁궐문과 도성의 성문(城門) · 근교문(近郊門) · 원교문(遠郊門) · 관문(關門)을 두어, ‘구문(九門)’ 또는 ‘구금(九禁)’ · ‘구중심처(九重深處)’ 등의 표현이 곧 궁궐을 뜻하게 되었다.

궁궐 건축에서는 무엇보다 보안기능과 공간의 위계성 · 계층성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문제(門制)에 대한 규범이 그만큼 엄격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5대궁(五大宮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은 『예기』를 완전히 따르고 있지는 않다.

정궁인 경복궁을 보면 근정전에 이르기까지 치문인 광화문, 응문인 홍례문(弘禮門), 노문인 근정문(勤政門)을 두어 삼문제(三門制)를 택하였다. 나머지 궁궐들의 구성도 경복궁의 예를 따라 치문으로 돈화문 · 홍화문(弘化門) · 흥화문(興化門)을 두고, 노문으로 인정문(仁政門) · 명정문(明政門) · 숭정문(崇政門)을 두었다.

각 문의 명칭은 통일된 규범을 따랐으나, 문의 규모나 형식은 각 궁궐의 격에 따라 서로 달랐다. 정궁인 경복궁의 광화문은 3개의 홍예를 튼 육축 위에 중층누각을 세웠으나, 창덕궁의 돈화문은 5칸 중층누문으로, 창경궁의 홍화문은 3칸 중층누문으로 만들었고, 행궁(行宮)인 경희궁은 3칸 단층문으로 그 격을 달리하였다.

현재 고려시대 이전의 궁궐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정궁인 연경궁(延慶宮)의 대문인 승평문(昇平門)의 형식이 광화문과 유사하게 묘사되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공공건축의 문

공공건축물인 관아 · 객사 · 서원 · 향교의 문형식도 일정한 규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삼문형식으로 되어 있어 가운데칸의 문은 신령만이 출입하는 상징적인 문이며, 일상적인 출입은 양 옆문을 이용하도록 되었다.

지방행정관청인 관아의 대문은 아문(衙門)이라 하여 중층의 누문형식으로 건축하였다. 아래층은 통행에 쓰이도록 판문을 달았지만 위층은 벽을 막지 않아 누각과 같이 통행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충청남도 아산의 옛 온양현 아문, 부산의 망미루(望美樓) 등이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중앙관리들의 숙소로 쓰이도록 각 지방에 세웠던 객사의 대문은 객사문이라 부른다. 현존하는 예는 많지 않으나 강릉 임영관 삼문(국보, 1962년 지정)은 고려 말기의 것으로 전형적인 것이다. 평삼문 형식으로 강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2열로 세워 그 가운데 판문을 달았다.

평안남도의 성천 동명관(東明館)의 구성은 대문과 중문을 거쳐 객사건물에 이르게 되어 있다. 대문인 외문은 강릉 객사문과 같은 평삼문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 형식이 객사문의 주류를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형식은 안동도호부의 객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동읍도(安東邑圖)」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객사 외문에 제남루(濟南樓)라는 중층누문이 있고, 중문은 내삼문(內三門)이라는 평삼문으로 그려졌다. 제남루의 형상은 아문과 유사하다.

향교 건축은 교육 영역인 명륜당(明倫堂)과 제례 영역인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각 영역 앞에 삼문을 두어 바깥 것을 외신문(外神門, 또는 外三門), 안의 것을 내신문(內神門, 또는 內三門)이라 한다.

특히, 대성전의 삼문은 극히 신성한 문으로 여겨 제례 때만 개방하고, 가운데 문은 신문이라 하여 혼령만이 출입하며 일반사람들은 양 옆문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모양은 삼문 가운데 지붕이 높은 솟을삼문 형식과 지붕 높이가 같은 평삼문 형식이 쓰였다.

보통 묘사(廟祠)의 문은 향교의 삼문과 유사하다. 공통적으로 문짝에 붉은 단청을 바탕으로 칠하고 커다란 태극무늬를 그려넣는다. 동양철학의 궁극적인 도형을 그림으로써 사당건축의 내면적 의미, 즉 조상에 대한 영원한 숭배를 상징한다.

서원의 대문은 누문형식이 일반적이다. 위층 부분은 서원의 안마당과 연결되어 선비들의 학문토론이나 경치를 즐기는 유희장으로 이용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누문 앞에 다시 삼문을 세워 대문으로 삼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서원의 건축형식과 향교 건축형식이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 영향을 주며 유사하게 발전하여, 몇몇 향교의 바깥대문이 누형식으로 되기도 하였다.

사찰의 문

고려 이전의 고대 사찰은 중국의 가람배치법의 영향으로 바깥쪽에는 대문인 남문을, 회랑을 둘러 만든 중심 영역에는 중문을 두었다. 이 형식은 특별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궁궐의 형식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말기에 전래된 선종(禪宗)은 사찰건축의 규범을 변화시켰고, 사찰이 산속으로 들어감에 따라 지형에 맞도록 좀더 한국적이고 다양한 배치형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종교건축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 갖가지 형식의 선문(禪門)들이다. 선문은 절의 경계부터 중심되는 전각에 이르기까지의 통로에 세워지는데, 크게 산문(山門)과 신장문(神將門)으로 구분된다. 이 문들은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적 측면보다는 종교적이고 공간적인 의미가 우선한다.

산문은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위치에 세워지며 흔히 일주문 형식이 많고, 절의 명칭을 새긴 현판을 건다. 일주문이라는 명칭은 기둥이 한 줄인 된 까닭에 유래하였지만, 불교적으로는 한 마음[一心]을 가지고 수도 교화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주문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승려의 수도생활 지침이나 신도에 대한 종교적 교훈들을 담고 있다.

신장문은 인도 재래의 각종 신상(神像)들을 모신 문들로, 원래는 독립된 전각들이었으나 고려시대 이후 문의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천왕문 · 불이문 · 해탈문 · 봉황문 · 금강문 · 법왕문 · 안양문 등 절에 따라 무수히 많은 문들이 있으나, 크게는 천왕문과 금강문으로 나눌 수 있다.

천왕문은 사천왕의 상을 앉힌 곳으로 정면 3칸의 가운데칸을 통로로 쓰고 양 옆칸은 밖으로 벽을 막아 사천왕상을 봉안한다. 금강문도 같은 형식이지만 금강역사상을 안치하는 것이 다르다.

이들 신장문은 사찰 안의 모든 악귀를 물리쳐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만든다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여러 문들을 지남으로써 영역의 깊이감을 주고 종교적 감동을 고양시키는 구실을 한다.

다른 여러 명칭의 문들은 천왕문이나 금강문에 붙여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해탈문은 세상에서 반복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불이문은 8만4000의 법문 중 제1의 법문이라는 뜻이다.

신장상을 모시지 않고 문 자체로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선문들도 있다. 흔히, 안양문이나 자하문이라고 하는데, 이들 문 안쪽 영역이 불국토를 상징하며 이 문들은 불국토로 들어가는 입구를 의미한다.

주택과 문

집주인의 계층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대문들이 나타나며 대문이 없는 집도 많다. 소농계층의 집들은 울타리만 있거나 울타리조차 없는 집들도 있다.

제주도의 민가에는 대문이 없고 식구들의 출입만 표시하는 정랑이라는 것이 있다. 입구 양쪽에 두 개의 정랑돌을 세우고 구멍을 뚫어 거기에 두 개의 정랑목을 걸쳐둠으로써 대문의 구실을 한다.

정랑목 두 개가 모두 내려져 있으면 집안에 사람이 있으니 들어와도 좋다는 표시이고, 하나만 걸쳐져 있으면 잠깐 외출하였다는 표시이며, 두 개 모두 걸쳐져 있으면 멀리 외출하였다는 뜻이다.

대문이 있는 집도 그 재료와 모양이 여러 가지이다. 하층계층의 농가에는 삽작문 · 겨릅문과 같이 여러 종류의 나뭇가지를 발모양으로 엮은 간이문을 단다. 중류계층의 집에는 담장에 1칸문만 세운 평대문이 많고, 상류주택에는 행랑채 등 문간채를 만들고 그 중 1칸에 평대문이나 솟을대문을 세웠다.

솟을대문이란 원래는 초헌 · 사인교 · 가마 · 말 등이 드나들 수 있도록 부속건물보다 대문의 지붕을 높인 것이지만, 점차 권세 있고 부유한 집의 상징적 · 과시적 의미로 변하여왔다.

대문의 모습뿐 아니라 구조수법도 상류계층으로 갈수록 튼튼해지고 그 폐쇄도가 높아진다. 문지방도 높아져 대갓집의 높은 문지방에는 수레나 초헌 등이 잘 드나들 수 있도록 바퀴자국을 따라 홈을 파기도 하였다.

상류주택 내부에는 위치에 따라 기능이 다른 여러 문들이 서게 된다. 대문 안채와 사랑채의 경계인 중문은 주인이나 손님들이 사용하는 문이다.

하인과 아녀자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샛문인 편문(便門)은 담장에 붙은 독립구조물로 4기둥을 세워 문간을 만든다. 뒷산이나 채마밭으로 빠지는 협문은 담장 사이에 문틀을 고정시킨 일각문이 대부분이다.

이 중 중문은 안채에 이르는 중요한 문으로 외부인은 물론, 집안식구까지도 남녀구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끔 내외담 또는 면벽(面壁)을 설치하여 사랑채에서 곧바로 안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대문에는 집주인의 이름을 적은 문패를 달기도 한다. 이는 광무(光武)연간에 실시된 문패법에 의하여 일반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풍습이다.

그 이전에는 정려(旌閭)와 같이 충신 · 효자 · 열녀에게 내려진 것들을 달았다. 붉은색 바탕의 홍패(紅牌)나 파란색 바탕의 청패(靑牌)가 있어 거기에 표창된 내용을 적었는데, 이는 가문의 큰 영광으로 대대로 보존되었다.

집이름[堂號]을 단 집도 있다. 당호는 주로 사랑채에 걸지만 경상북도 청도의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1979년 지정)은 대문간 위에 달았다.

조선시대는 대문과 길의 관계, 대문의 위치와 방위가 집의 길흉을 좌우한다고 믿어서 풍수지리설과 결합된 규범들을 중요시하였다.

『산림경제』의 조문잡법(造門雜法)에는 대문을 세울 때 지켜야 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 즉, “문이 작고 집이 크면 재산이 는다.”, “대문과 중문은 일직선 위에 배치하지 않는 것이 좋다.”, “동북으로 문을 내면 기괴한 일이 많다.”, “문설주를 밤나무로 만들면 도둑이 들지 않는다.” 등으로 상세히 규정하였다.

또,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조옥잡기(造屋雜忌)에는 “부엌과 대문이 마주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고, 장문잡기(裝門雜忌)에는 대문을 세울 때 피해야 할 금기사항으로, 대문 입구에 물 웅덩이가 있거나 곧은 길이 직접 문에 닿는 것, 문짝이 담보다 높은 것 등은 모두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러한 풍수설과 금기사항들은 일제강점기 초기의 『민택삼요(民宅三要)』에서 집대성되었다. 이 책은 주택 배치의 규범을 체계적으로 이론화시켰고, 음양오행사상과 『주역』 등을 그 이론적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택의 중요한 세 부분은 대문 · 안방 · 부엌이고 문을 중심으로 방과 부엌의 위치와 방위를 결정한다고 보아, 주택의 유형을 동서 4유형씩 8유형으로 나눈 팔택론(八宅論)을 전개하여 좋은 집과 나쁜 집을 그림을 그려 설명하였다.

문의 상징성

출입의 기능 자체보다는 사찰의 일주문처럼 건물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개선문처럼 무엇을 기념하는 것 또는 주술적인 의미, 안녕수복을 비는 기복적인 의미에서 세운 문들이 많다. 종교건축과 묘사건축의 문들은 사람의 출입뿐 아니라, 우주의 섭리와 선악을 지배하는 신들이 출입한다는 상징성을 띤다.

또, 일반 가정집에서도 대문을 통하여 행복과 불행까지 출입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문에 관한 여러 민속과 풍습이 생겨났다. 관혼상제 때 중요한 의식이 문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세시풍습의 많은 부분이 문에 관련되어 있다.

효자 · 충신 ·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정려문을 내리며, 하사된 집안에서는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겨 집 앞에 세우고 대대로 기념한다.

정려문은 홍살문과 같이 붉은 단청을 하며, 홍살문은 경건한 곳의 상징으로 능묘 · 서원 · 향교 등 성현의 혼령을 모신 곳 어귀에 세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오면 부잣집 솟을대문 위에도 홍살을 약식으로 붙이기도 하는데, 이는 과시와 허욕의 상징이다.

이런 기념문 외에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뜻으로 세웠던 영은문(迎恩門)이 있다. 이 문은 일주문형식이었고,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지은 독립문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여 서구식으로 세웠다.

현대에 와서는 기념문의 종류가 더욱 많아져 부산 유엔묘지의 정문이나 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조형물도 문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문과 의례

주희(朱熹)의 『가례』는 조선조 사대부의 관혼상제에 관한 의례를 지배해 왔다. 이 책의 까다로운 여러 의식 중 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만도 상당히 많아 문이 의례의 훌륭한 소도구가 된다.

혼례 중 신랑이 신부집에 가 신부를 맞이하는 절차를 친영(親迎)이라 하는데, 친영 때 신부 어머니와 여러 식구들이 신부집의 중문까지 신부를 보내 주면, 중문 밖에서 신랑이 맞이하게 된다. 중문을 나서는 행위가 곧 출가를 뜻한다.

상례 절차는 임종에 가까울 때부터 시작한다. 우선, 임종은 북쪽문 밑에서 맞이해야 한다. 상주가 거처하는 곳을 상차(喪次)라 하는데 중문을 경계로 안쪽에는 여자들의 상차를, 바깥쪽에는 남자들의 상차를 차린다.

이 때 대문에 조등(弔燈)을 달아 상가임을 알린다. 상여를 내가는 발인 때 맏상주는 비를 들고 대문에서 앞으로 내저으며 잡귀를 쫓아야 한다. 상여가 집을 떠나면 화로를 대문 밖에서 뒤집어엎어 깨뜨려 죽은 이한테 묻었던 잡귀를 쫓는 의식을 가진다. 지방에 따라서는 문화(門火)라 하여 대문 앞에 불을 지피기도 한다.

제례조(祭禮條)에는 사당을 꾸미는 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당은 최소 3칸으로 만들며 가운데칸에 문을 내어 중문으로 삼고, 칸마다 4비문(扉門)을 만들어 이를 여닫아 분합(分闔)이라 한다.

또, 계절마다 지내는 사시제(四時祭)는 깨끗이 청소된 정침에서 지내며, 조상 혼을 부르는 참신(參神)부터 여러 절차가 진행된다. 그중 혼령이 음식을 드는 유식(侑食) 때 방 밖에서 문을 닫고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 혼령이 나가도록 하는 절차를 합문 · 계문(啓門)이라 하여, 문을 통하여서 혼령이 드나든다고 믿었다.

문에 관한 민속

집 안에 잡귀가 대문을 통하여 들어온다는 인식 때문에 유독 주술적인 벽사(辟邪) 풍습이 많고, 그 밖에도 복을 비는 기복과 통과의례 · 민속놀이들이 전한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郎望海寺條)에 가장 오래된 벽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역신(疫神)이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을 시험하였다가 처용의 도량에 감복하여, 그 뒤 어느 집이나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이면 전염병의 피해를 면하게 하겠다고 맹세하였다는 내용이다.

또, 비형랑(鼻荊郎)의 벽사에 관한 기록도 전하는데, 서라벌에서 못된 장난을 치던 도깨비들을 비형랑이 소탕한 뒤, 집집마다 비형랑의 시를 적어 문에 붙이니 악신들이 접근하지 못하였다는 설화이다. 이 풍습은 고려 때까지 성하였다고 하는데,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룩한 왕의 아들 비형랑이 집에 머물도다. 모든 귀신을 쫓아버리니 여기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성현(成俔)『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이와 같은 벽사풍습은 크게 성행하여 설날과 정월보름 때 대문 · 벽장문 등에 호랑이 · 닭 · 처용, 무장한 장수, 보물을 가진 여자 등의 그림을 붙였다 한다.

지금도 강원도 내륙지방에서는 정초에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붙은 매그림을 붙이기도 하고, 전라도지방에서는 가시돋친 나뭇가지나 둥근 체를 걸어 놓기도 한다.

금줄(禁줄, 또는 人줄)도 벽사풍습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아이를 낳은 집 대문간에 삼칠일 동안 왼새끼를 꼬아 걸어둠으로써 출생을 알리는 동시에 잡인의 출입과 악귀의 부정을 막는다.

이 때 남자아이를 낳으면 숯과 빨간 고추를 달고, 여자아이인 경우 숯 · 창호지 · 솔가지를 달아 신생아의 성별을 알리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대문간에 황토를 뿌리기도 하고, 부잣집에서는 집의 앞뒷문 앞에 미역국 · 밥 · 떡을 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대접하기도 한다.

기복 풍습은 행복과 건강이 문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민속이다. 입춘 때 대문이나 벽에 붙이는 입춘방(立春榜, 또는 立春帖, 春帖子)의 글귀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집주인에 따라 다양한 글귀가 나붙게 된다.

모두 건강과 평화 ·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이며, 이 중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등의 글귀는 모든 복이 문으로 들어온다는 믿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통과의례는 가끔 굿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서울지방의 지노귀새남굿에는 죽음의 통과의례가 문을 배경으로 표현된다. 이 굿의 무대는 12개의 가시문을 세우고 가시문마다 무녀(巫女)가 지옥을 지키는 명부수문신(冥府守門神) 역으로 지켜 서 있으며, 우두머리 무당이 그 가시문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각 문을 통과할 때마다 생전의 죄과를 문초받으며 수문신들에게 뇌물을 써야 한다.

영계에 이르는 과정은 이처럼 어렵고 이 고난의 과정을 살아 있는 유족들이 대신함으로써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것이다. 내세의 구조가 12개의 문으로 이루어졌다는 상징성이 부각된다.

문에 관련된 민속놀이로는 지신밟기를 들 수 있다. 풍물잡이들이 마을 주산에 제를 올리고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을 눌러주는 놀이이다. 집 대문 앞에서 마당놀이를 한 뒤, 대문 · 마당 · 대청 · 방 · 부엌 · 뒷간 등을 거쳐 다시 대문으로 돌아오는 순서를 밟는다. 놀이의 시작과 끝을 대문에서 벌이는 의미는 집안의 모든 길흉화복이 대문의 소임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문학에 나타난 문의 상징성

가사 · 시조 · 경전 · 구비문학 등에 가끔 문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문 자체에 대한 묘사보다는 문의 여러 속성들, 즉 폐쇄성, 사용자를 뜻하는 대표성, 안전함 등이 다른 것의 상징과 비유로 사용됨이 일반적이다.

흔히 쓰는 관용어구들에서도 여러 비유가 나타난다. 대성황을 뜻하는 ‘문전성시(門前盛市)’, 손님을 즉시 영접한다는 뜻의 ‘문불정빈(門不停賓)’, 도둑 없는 태평성대는 ‘문불야관(門不夜關)’으로 비유된다.

정철(鄭澈)「관동별곡」 중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어전에 배알하고 물러나오는 광경에서도 문의 비유적 사용을 볼 수 있다. 즉, “연추문(延秋門) 드리ᄃᆞ라 경회남문(慶會南門) ᄇᆞ라보며 하직고 믈너나니 옥절(玉節)이 알ᄑᆡ셨다. ”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연추문은 전체 경복궁의 은유이며, 경회남문은 임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대종교의 경전인 『회삼경(會三經)』 세 가닥[三妄]항에는 “마음은 집과 같고, 기운은 문과 같고, 몸은 그릇과 같나니(心猶宅氣猶門身猶器)”라 하여 문터가 고르고 평탄해야 하듯, 기운을 투명하게 하여 어둡고 그윽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흉가라 하는 집은……문을 닫고 열지 않는” 집이라고 하는 등 인간의 기운을 문에 비유하였다.

구전되어 오는 각 지방의 상여노래(輓歌, 또는 香頭歌)에서도 집의 대문과 죽음과의 상징이 잘 나타난다.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열두대문 들어가니 무섭기도 그지없고”, “의복벗어 인정쓰고 열두대문 들어서니”, “저승문전 당도하니 문지기놈 하는말이” 등으로 이승과 저승이 문 하나를 경계로 지척에 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또, 내세의 구조가 열두대문으로 구성되어 각 대문을 통과하는 여행이 바로 저승에 이르는 과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사례편람』(이재)
『화성성역의궤』
『임원경제지』
『民宅三要』(孫瑜憲, 竹訥窩, 1928)
『회삼경』(서일)
『한국의 민속』(김성배, 집문당, 1980)
『한국목조건축』(김정기, 일지사, 1982)
『한국의 살림집』(신영훈, 열화당, 1983)
집필자
김봉렬·장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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