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어린이날 행사
어린이날 행사
개념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을 가리키는 교육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어린이는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을 가리키는 교육용어이다.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에 방정환이 어린 아동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12~13세 미만 연령층을 어린이라 한다. 전통시대에 어린이는 장유유서라는 유교 윤리 속에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졌고, 특히 하층민 집안의 어린이일수록 노동과 가사를 담당하는 몫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이를 특수성 있는 독립 인격체로 보아 존중하고 보호·육성해야 한다는 운동이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아동 복지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정의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을 가리키는 교육용어.
개설

어린이라는 낱말의 뜻은 잘 알려져 있으나, 이 낱말이 가리키는 명칭이 다양하고 그 연령 범위도 다루는 분야와 문맥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그 명칭들과 연령 범위를 살펴본 다음, 한국문화권에서 어린이라는 대상에 투여되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린이에 대한 명칭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에 방정환(方定煥)이 어린 아동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우리나라 고유한 말의 늙은이 · 높은이 · 착한이라고 하는 낱말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라는 글자는 ‘높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분’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희승(李熙昇)이 엮은 『국어대사전』(1981)에 보면, “어린이란 어린아이를 높여서 부르는 말로서 나이가 어린 아이란 뜻이다. ”라고 적혀 있다. 어린이를 일컫는 말은 지방마다 약간씩 다른데, 예를 들면 함경도지방에서는 ‘어린아’ · ‘얼라’ 등으로, 전북도지방에서는 ‘어린놈’ · ‘어린애’ · ‘어린애기’ · ‘어린앳들’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와 동의어로 쓰이는 한자로는 소아(小兒) · 유아(幼兒) · 해아(孩兒) · 동치(童稚) · 영해(嬰孩) · 유몽(幼蒙) · 황구(黃口) · 해제(孩提) · 해제지동(孩提之童) 등이 있다.

어린이의 연령 범위

학자에 따라서는 어린이의 시기를 젖먹이 시기와 유아기를 거친 뒤 초등학교 학령기에 이르렀을 때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동복지법」에서는 어린이를 일컫는 아동의 연령 범위를 18세 미만인 자로 규정하고 있다. 아동의 신체적 · 심리적 발달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발달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0∼2세까지를 영아기, 3∼5세까지를 유아기, 6∼12, 13세까지, 즉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까지를 아동기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12, 13세 미만의 연령층을 통틀어 어린이라고 부르되, 다음에 기술할 항목에 따라 연령 범위를 세분할 필요가 있을 때는 발달심리학적 연령 구분에 따르기로 한다.

어린이관

어린이관이란 어린이의 본질이나 존재적 당위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를 말한다. 이러한 어린이관은 문화에 따라 다르며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이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어린이의 양육 및 교육, 처우 등을 결정하는 기초가 된다.

속담에 비친 어린이관

어린이와 관련된 전래 속담 속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어린이관이 상징적으로 비쳐지고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어린아이와 술 취한 사람은 바른 말만 한다(순진성과 단순성). ’, ‘어린아이 우물가에 둔 것 같다(미숙함과 위태로움). ’, ‘어린아이는 괴는 데로 간다(순응성). ’, ‘애들 보는 데는 찬물도 못 먹는다(호기심과 모방성). ’, ‘어린아이는 기를 탓이다(가소성). ’, ‘어린아이 예뻐 말고 겨드랑 밑이나 잡아 주랬다(조력 지도의 필요성). ’,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초기 형성의 중요성). ’ 등이다. 속담들의 상징적 의미를 간추려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린이를 순진, 단순, 미숙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단계로 생각하는 것이 특징이며, 순응성 · 모방성 · 가소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존재로 여기면서, 그들에 대한 조력과 지도가 발달의 초기 단계에 요구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어린이관의 시대적 변천

우리나라의 전통사회를 지배했던 유교윤리 중에서 어린이와 성인과의 관계에 대한 윤리의 핵심은 장유유서(長幼有序)였다. 장유유서란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순서가 있고 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가내(家內) 및 가외(家外), 즉 작고 큰 사회의 인간관계 서열과 질서를 바로잡는 윤리였으며, 이 윤리는 경(敬)과 애(愛)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즉, 연장자는 연소자를 사랑하되 연소자를 훈육하여 연장자를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 순서에서 앞설 것을 요구하였고, 연소자는 연장자에게 공경의 예로써 스스로 자신의 순서를 연장자 다음으로 정하였다. 이러한 장유유서의 개념이 확대, 심화되어 모든 일에서 연령의 고하를 따지게 되었고, 따라서 어린이는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도리로 강요되었으나, 어른은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어린이를 멸시하고 하대하였다. 이와 같은 유교적 풍토에서의 어린이는 어른의 종속물로 존재했을 뿐, 독립적인 인격과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을지언정, 공경(恭敬)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의 근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이전의 유교적 윤리도덕이 초래한 부작용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특히 장유유서의 윤리관으로 인한 어린이 멸시사상을 비판하고, 효도의 도덕관이 어린이에게 윤리적 예속화를 초래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비판을 주도했던 당시 잡지 『개벽(開闢)』의 기고 내용들을 보면, 전통사회에 만연했던 윤리적 억압의 배제를 주장하는 한편, 어린이의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적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어린이는 풀로 비기면 싹이오, 나무로 비기면 손인 것을 알쟈. ……한(限)업는 극(極)업는 보다 이상(以上)의 명일(明日)의 광명을 향하야 줄다름치는 자임을 알쟈. ……그들(어린이)을 떠나서는 우리에게 아모러한 희망도 광명도 업는 것을 깨닫쟈.”라고 부르짖고 있다(개벽 23호, 1923).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근대로 접어들면서 어린이관이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린이를 소극적 존재가 아닌 성장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나아가 미래 역할의 담당자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를 거쳐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풍토 및 윤리관과 가치관이 달라짐에 따라 어린이관에도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변화된 현대적 어린이관의 특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에는 어린이를 마치 축소된 성인으로 여겼으나 오늘날의 의학적 · 심리학적 지식을 근거로 어린이는 어디까지나 성인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둘째, 과거의 수동적 어린이관은 능동적 어린이관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즉, 어린이를 성인들의 일방적인 양육과 훈육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조되는 피조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기능하고 창조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자기 발전적 존재로 보기 시작하였다.

셋째, 과거에 고정관념적으로 성인들의 사고를 지배해 온, 어린이를 소유물로 여기는 관념에 비판을 가하면서 성인의 종속물로서의 어린이가 아니라 독립적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어린이란 무조건 멸시하거나 억압해도 무방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가정과 국가 장래의 흥망을 좌우할 내일의 역군으로서 우대하고 보호, 육성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어린이의 일상생활

어린이의 일상생활도 전통사회와 현대사회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신분 계급이 엄격하여 어린이들의 일상생활도 사회계층에 따라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양반 및 부유한 중인층 남자 어린이들의 일과를 살펴보면,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마치고 곧 집안어른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고, 아침식사 때까지 글공부를 하였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사랑채에서 글공부를 하거나 서당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 보통 점심 때까지는 일정한 휴식시간 없이 습자와 글공부를 하였다. 점심 후에 다시 글공부가 계속되고, 오후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이들은 겨우 귀가길에서나 놀 수 있었는데, 대개 들판이나 개울가에서 어울려 놀았다. 저녁식사 후에는 밤글이라 하여 주로 낮에 배운 것을 복습하였다. 때로 할아버지가 자기 가문의 긍지를 심어 주기 위해 선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빈한한 중인층이나 하류층의 남아들은 놀이와 일이 주된 일과였다. 아침식사 전에는 주로 소죽 끓이기, 가축 모이 주기, 마당 쓸기, 밭일 나갈 준비 등의 일을 하였다. 아침식사 후에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가거나 소 · 염소 등을 들로 몰고 나가 풀을 먹이거나 밭일을 거들었다. 점심 후의 일도 대개는 오전의 일과와 같은 일들이었으며, 저녁식사 후에는 새끼 꼬기 등과 같은 일들을 하였다. 이와 같이 일과의 대부분이 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거나 심부름을 갈 때가 친구들과 놀 수 있는 기회였다. 여아의 일과는 남아의 일과와는 전혀 달랐다. 여아의 경우에는 계급의 차이 없이 일 위주의 일과였다. 다만, 일의 내용이 계급과 가산(家産)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즉, 양반 및 부유한 중인층의 여아들은 방안 정리 · 바느질 · 수예 · 길쌈 · 음식 만들기 · 상차리기 등 주로 ‘앉아서 하는 일’들을 했고, 빈한한 중인층이나 하층의 여아들은 부엌일 · 물긷기 · 빨래 · 들일 · 나물캐기 · 뽕따기 등 주로 ‘서서 하는 일’들을 하였다.

전통사회의 어린이들은 이러한 일상생활의 계급적 차이를 체험하면서, 노동을 낮은 신분과 관련 지어 천시하는 사상을 은연중에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노동천시사상은 전통사회의 잔재로 아직도 한국인의 의식구조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되면서부터 어린이들의 일과는 전통사회의 것과는 달라졌다. 즉, 신분계급에 의한 엄격한 생활양식의 차이는 없어지고, 대신 어린이의 연령과 거주지역(도시 · 농촌)에 따른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연령이 달라도 그들의 일과에는 별 차이가 없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연령에 따라 일과가 상당히 다르다. 일과의 차이로 보아 대략 유치원(또는 유아원) 이전 시기와 유치원 시기, 초등학교 시기로 나누어진다. 지역적으로는 도시와 농촌 간에 또한 차이를 보인다.

현대 도시지역의 유치원 이전 시기 어린이들(3세 미만)의 하루 일과는 주로 놀이이다. 요즈음에 와서는 텔레비전이 대량 보급됨으로써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는 주로 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이다. 이러한 경향은 도시와 농촌 간에 별 차이가 없지만, 놀이공간에서는 차이가 있다. 즉, 도시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놀이공간이 주로 집안이나 집 근처의 놀이터에 한정되고, 놀이기구는 대개 상품화된 것이다. 이에 비해 농촌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놀이공간이 집안보다는 주로 집 밖의 넓은 공간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시기(4, 5세)의 어린이들은 정규 교육에 의한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도시 어린이들은 하루의 반을 유치원에서 교사와 함께 교육프로그램에 의한 학습의 기회를 갖는다. 같은 도시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빈민지역의 어린이들은 유치원(또는 유아원) 교육을 받는 경우가 적다. 이 시기의 농촌 어린이들은 유아교육기관이 적으므로 주로 집 밖의 넓은 터나 들판에서 또래들과 어울려 논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만 6세 이후), 그들의 생활은 주로 학교를 주축으로 전개된다. 도시 어린이들의 경우, 아침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등교하여 오전의 전부와 오후의 일부 또는 전부를 학교에서 생활한다. 학교의 정규 수업이 끝나면 반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이나 근처의 놀이터에서 운동이나 놀이를 즐긴다.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학교의 어린이들은 부근의 전자오락실이나 만화가게에서 소일하는 경우도 있다. 농촌에서도 초등학교 시기에는 학교생활이 주축을 이루지만,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는 주로 학교 운동장이나 동네 어귀의 들판에서 논다.

어린이의 교육

태교

태교(胎敎)란 태 속에 있는 자녀를 교육하는 방법으로 임신부가 갖는, 태중에 있는 아기의 건전한 성장을 바라는 마음가짐과 행동들을 일컫는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본격적인 태교에 관한 저술서로는 사주당(師朱堂) 이씨가 과거에 단편적으로 기록, 전수되어 오던 것들을 집대성한 『태교신기(胎敎新記)』가 있다. 이 밖에도 『태교신기』 전에 씌어진 『규합총서(閨閤叢書)』허준(許浚)『동의보감(東醫寶鑑)』, 송시열(宋時烈)『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 이이(李珥)『성학집요(聖學輯要)』 등에서 태교를 강조한 부분을 볼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의 태교에 대한 사고는 어머니 태교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태교도 강조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아버지의 태교내용은 잉태 전의 심신 보전과 수양 및 절제에 관한 사항과, 잉태시에 지켜야 할 마음가짐과 신체적 수련, 잉태 후에 아버지로서 금욕해야 할 사항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태교는 태중에 있는 자녀의 지적 · 도덕적 · 신체적 발달에 영향을 주어, 나아가서는 가문의 흥망과도 관련된다는 것이 전통사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에서는 잉태를 양친의 공동 소관으로 인정하고 아버지의 태교도 강조했지만, 역시 상당한 비중은 어머니에게 두어 까다롭고 힘든 교육적 배려와 절제를 요구하였다.

유안진(柳岸津)의 연구에 따르면, 어머니의 태교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되어 있다.

① 잉태 후 몸 가까이 두고 보아야 할 것:귀인, 성현의 글, 관대, 좋은 향 등.

② 임부가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광대 · 병신, 음란한 것, 굿거리 등.

③ 삼가야 할 행동:남을 해치는 일, 탐욕 · 시기 · 희롱, 꾸짖는 일, 수다 · 곁눈질 등.

④ 임부로서 근신할 일:부부 동침 삼가, 과식하지 말 것, 찬 데나 더러운 데 앉지 말 것, 자세를 항상 바로 할 것, 몸을 상할 일이나 장소를 피할 것 등.

⑤ 음식 금기:날 것, 썩은 것, 빛이나 모양이 나쁜 것, 개 · 양 · 닭 · 말고기 등.

⑥ 먹으면 좋은 음식:잉어 · 소고기 · 보리밥 등.

⑦ 약물 금기:천웅 · 수은 · 녹향 · 계피 · 우황 · 대황 · 맥아 등.

이와 같이 어머니가 실천해야 할 태교는 임부의 정서 안정, 건강과 조섭,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내용 등으로 구체적인 생활상과 연관되어 있으나, 때로는 미신적이거나 주술적인 금기사항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통사회의 태교내용은 현대적 시각에서 보아도 과학성이 인정되는 것이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태내 발달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활발한데, 그 내용을 보면 주로 임신부의 영양상태나 약물 복용, 임신부의 정서상태 등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지금까지 연구된 태내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임부의 영양상태:임부의 영양상태는 태아의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영양 부족인 임부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모든 발달이 저조하며, 특히 신경계나 뇌의 발달이 뒤떨어진다.

② 임부의 약물 복용:과거에는 임부의 정서 안정이나 치료를 목적으로 신경안정제 같은 약을 처방해 주었으나, 1960년대부터 그 부작용이 밝혀져 사용이 금지되고 있다.

③ 임부의 정서상태:임부의 정서상태 역시 태아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즉, 정서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불안증세 혹은 임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임부는 그렇지 않은 임부에 비해 임신중 자연유산 · 조산 또는 난산 등을 하기 쉽고, 또 이들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많이 울거나 잠을 잘 안 자며 젖도 잘 안 먹는다는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 밖에도 임부의 흡연 · 음주 · 질병 등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영아 · 유아의 양육과 교육

어린이 가운데서도 아주 나이가 어린 영아와 유아의 경우는 양육과 교육을 나누어 논하기가 어려운데, 특히 유치원과 같은 유아교육시설이 없던 전통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여기에서는 이를 합쳐서 살펴보기로 하되,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의 양육과 교육을 나누어 기술하기로 한다.

전통사회의 영아 · 유아 교육

전통사회의 대가족제도에서 젊은 주부는 집안 살림살이에 바빴으며, 자녀 생산의 터울이 보통 1∼2세였으므로 어린아이를 혼자 돌볼 수 없었다. 대개는 젖을 먹일 때만 아기를 안아 볼 정도로 아기와의 접촉이 소원하였다. 그래서 집안 살림의 일선에서 물러난 할머니들이 어린 손자들의 양육과 교육을 맡게 되었다. 할머니는 손자의 배변 훈련, 옷입기, 식사 습관 및 예절, 또래들과 놀기, 형제간의 대인관계, 어른들에 대한 예절 등 일상생활 습관 및 행동양식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자장가 · 노래 · 옛날이야기 · 놀이 등을 통해서 지적 발달을 돕는 교사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통사회에서는 내외법(內外法)이 있어 아버지는 사랑채에서 기거했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 앞에서는 자기 아이를 귀여워해 주는 애정 표시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어릴 때의 아이들은 아버지와의 접촉이 더욱 적었다. 따라서 영아 · 유아 시기에 아버지의 교육적 역할은 거의 배제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영아 · 유아 교육

우리 사회가 근대화됨에 따라 가족제도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하면서 영아 · 유아의 양육과 교육방식도 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핵가족에서는 과거에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가족성원에게 분담되었던 어린아이의 양육과 교육이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핵가족화로 인하여 전통시대에는 어린아이의 양육과 교육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자녀교육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자녀와의 접촉 빈도나 영향력의 강도가 어머니에게 더 많이 놓여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영아의 양육방식에서도 과거의 전통사회와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진 차이점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배변 훈련이 훨씬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이들의 생활 및 놀이공간이 주로 가옥 외부, 즉 마당이나 들판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야외 어디에서나 자유로이 배변할 수 있었으나, 근대 가옥구조에서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자연히 변기나 화장실 사용이 강요되어 도시에 사는 중류 이상의 어린아이들은 배변과 청결에서 서구식의 보다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수유방식의 변화이다. 과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모유로 키웠다. 그러던 것이 요사이에는 여성의 사회 진출, 외모 및 미용에 관한 관심 등으로 인하여 우유로 양육되는 아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되고 있다.

또한 아이를 돌보는 일도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니라 가족 외의 대리모에게 맡기는 부분이 많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어머니가 직접 아이들의 옷을 지어 입혔으나 현대 가정에서는 거의 기성복을 사 입히고 있다. 밤에 잘 때도 전통사회에서는 어머니와 한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팔을 베고 품에 안겨 자던 것이 요즈음은 독립된 이불이나 침대에서 따로 자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영아 양육방식의 변화는 양육되는 어린이들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영아기(0∼2세경)를 지나 유아기(3∼5세경)에 접어들면, 벽지의 농어촌이나 도시의 빈민층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유아들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공적 교육시설의 하나인 유치원(또는 유아원)에 다니게 된다. 유치원은 유아의 교육에 치중하는 시설인 데 비해, 유아원은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을 위한 시설이므로 탁아기능과 교육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어린이를 위한 유치원이 처음 설립된 해는 1908년으로, 당시 관립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에 부속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98년 전국의 유치원 수는 8,973개이며 취원 연령은 만 4세였다. 교육내용을 발달 영역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체발달 영역:기본적인 감각기능과 운동기능을 기르게 하고 신체의 조화로운 발달을 이루게 한다.

② 정서발달 영역:자신과 주변 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자기의 느낌과 경험을 창의적으로 표현하게 한다.

③ 언어발달 영역:다른 사람의 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기초적인 언어기능을 갖게 한다.

④ 인지발달 영역:자연과 사회 현상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도우며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문제해결능력을 갖게 한다.

⑤ 사회성 발달 영역: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를 갖게 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예절과 규범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발달 영역별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되 교육시간은 3∼4시간을 기준으로 하며, 지역사회의 특성 및 유아의 발달 수준과 흥미, 기후, 계절, 과제의 특성 등을 고려하여 실정에 맞도록 조정할 수 있게 하였다. 유아교육을 위한 시설로는 이 밖에도 미술교실이나 피아노교실 같은 예능교육시설이 있는데, 이는 모두 사설기관이다. 유아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이 늘어남에 따라 가정의 교육기능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가고 있다. 즉, 현대 가정에서는 교육기능을 유아교육 전문기관에 이양하고 나머지 보호기능 및 관리기능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아동교육

아동기는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시기(만 6∼11, 12세경)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교육에서도 과거 전통사회와 현대사회 간에 차이가 뚜렷하므로 서술의 편의상 나누어 다루기로 한다.

전통사회의 아동교육

전통사회의 교육은 바로 유교교육이었으며, 이는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이 분화되지 않은 일종의 종합교육이었다. 그 내용은 ① 가문의 명예와 출세의 기반이 되는 문자교육, ② 개인이 사적인 생활에서 행해야 할 행실을 가르치는 품행교육, ③ 일상생활에서의 사회적 관계, 특히 대인관계에서 지켜야 할 역할을 가르치는 역할교육, ④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관 내지 철학을 가르치는 인간교육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특히 교육에서 남녀간의 차이가 심하였다.

남아교육

전통사회에서는 가문의 명예와 부귀영화가 아들의 과거 급제와 관직 등용에 달려 있었으므로 남아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당시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교육에 목적이 있었으므로, 교육의 핵심은 한문 독해력을 키우기 위한 문자교육이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에는 계층적인 제한이 있었다. 문자교육을 시작하는 시기는 정해진 일반적인 기준은 없었으나, 대개 집안의 존장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아이의 성숙도를 참작해서 결정하였다. 교육열이 높은 집안에서는 4∼5세경부터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는 문중이나 고을에서 학덕이 높은 분을 독훈장으로 모셔다가 글을 가르쳤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문장에 능통한 경우에는 직접 가르쳤으며,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는 아이를 서당에 보내서 글공부를 시켰다.

서당 생도의 연령은 보통 7∼8세부터 15∼16세였으나, 때로는 20∼25세 이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이가 조숙하거나 교육열이 높은 집안에서는 더 어린 나이에도 서당에 보냈다. 서당에 보내는 궁극적인 목적은 남아를 사학(四學)과 향교 또는 서원을 거쳐 성균관에 입학시키기 위한 준비교육에 있었으나, 대다수의 지방 서당에서는 한문 독해력을 키우고 유교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데 그쳤다. 서당에서 가르쳤던 과목은 강독(講讀) · 제술(製述) ·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글자를 읽어 그 뜻을 익히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처음에는 『천자문』을 읽힘으로써 글자의 모양과 뜻을 익히고, 다음에는 음독과 구독법을 배우고 난 뒤 한 문장의 대의를 배웠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독해력이 향상되면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책 읽는 것을 익혀 나갔다. 강독에 쓰인 교과서는 『천자문』 · 『동몽선습』 · 『명심보감』 · 『통감』 · 사서삼경 · 『사기』 · 『춘추』 · 『예기』 · 『근사록』 등이었다. 학습 진도는 대략 7∼8세에 『천자문』을 시작하여 15∼16세에 사서삼경을 마치는 것이 상례였다.

교육방법을 보면, 대체로 정해진 분량의 글을 완전히 암기할 때까지 되풀이하여 읽히는 방식으로 가르쳤으며, 학습 진도는 어린이의 학습 속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조절하는 개인 중심적 지도방법이었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읽히는 내용을 달리했는데, 여름에는 시(詩) · 율(律)과 같이 머리를 덜 쓰고 쉽게 흥미를 끄는 것을 읽혔으며, 봄 · 가을에는 『사기』나 옛글을, 겨울에는 경서를 읽혔다. 또한 놀이를 학습에 도입, 활용했는데, 예를 들면 종경도(從境圖)놀이 · 고을모듬 · 글대구 맞추기 · 조조잡기놀이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학습자료로 사용한 책의 내용들은 어린이의 연령에 비해 정도가 높고 난해한 것이어서, 의미론적으로 동화(同化)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압적인 암기방식을 교육방법으로 택했으며, 이러한 교육방식은 결과적으로 어린이의 논리적 사고의 성장을 저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당에서 가르쳤던 제술이란 시나 글을 짓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오언절구 · 칠언절구 · 사율십팔구 · 작문 등을 배웠다. 서당과 훈장의 품위에 따라 수준이 다른 문체를 배우게 되는데, 벽촌의 작은 서당에서는 제술을 제외하는 곳이 많았다. 습자는 붓글씨를 연습하는 일인데, 처음에는 해서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행서 · 초서를 배웠다. 그러나 서당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대개 해서를 익힌 뒤 행서를 배우게 될 정도이고, 초서까지 나가기는 어려웠다. 이와 같은 문자교육은 글의 내용을 통해 품행교육과 역할교육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던 것 같다.

먼저 품행교육 측면을 살펴보면, 어린이들이 『천자문』을 익히고 나면 주희(朱熹)가 쓴 『동몽수지(童蒙須知)』나 이이가 이를 개편한 『소아수지(小兒須知)』를 읽힘으로써 문자와 문장을 배우는 동시에 일상생활에서의 행동양식과 예의범절을 배우게 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 정조 때 실학자의 한 사람인 이덕무(李德懋)가 『동몽수지』 · 『소아수지』 · 『명심보감』 · 『소학』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69개의 교육 항목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내용들을 항목별로 보면, 의복 및 자세, 언어와 걸음걸이, 청소 및 청결, 식사, 학용품 사용, 위험에 대한 대비, 자연과 동물에 관한 것과 기타의 내용 등으로 되어 있다. 현대의 어린이교육과 비교한다면 전통사회의 품행교육은 그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나이 어린 어린이들이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기술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유교적 전통교육은 개인 생활에서의 수칙, 즉 품행에 대한 교육을 부과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회생활 속에서 지켜야 하는 수칙을 가르치는 역할교육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관련된 교본은 사서(四書)로서 여기에서는 오륜사상(五倫思想)이 근본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 남편에 대한 부인의 도리,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도리, 친구들간의 도리를 가르친 것이지만, 여기에서 붕우유신을 제외한 윤리도덕은 오로지 장자에 대한 수하자의 일방적인 공경과 순종을 강요하는 교육이었다. 이러한 윤리도덕관은 봉건적 가정 질서와 사회 및 국가 질서를 유지, 보존하는 데 이바지했을지라도 낮은 위치에 있던 어린이들에게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저해하는 윤리적 억압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아교육

앞에서 살펴본 남아교육에 비해 여아교육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소홀하였다. 즉, 전통사회에서는 독서라는 것이 여자에게 금기로 되어 있었던 만큼, 여아들이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거의 폐쇄되어 있었다. 중류계층이나 하류계층에서는 특히 더 심했으나, 상류계층에서는 다만 출가 후를 위한 예절학습과 서신 왕래의 필요를 고려해서 약간의 글공부를 시켰던 것 같다. 이 경우에도 여아에게는 한문을 가르치지 않고 언문(諺文)이라고 부르던 한글을 가르쳤다. 여아들은 대개 집에서 어머니나 고모 · 숙모 등에게 글을 배웠는데, 주로 함께 일을 하는 도중이나 잠시 쉬는 시간에 구전으로 배웠다. 전통사회에서 여아들은 서당에 갈 수 없었으므로 오빠나 동생이 예습과 복습을 하는 곁에서 이른바 ‘어깨 너머 공부’로 한문을 익히거나 남자 형제들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혼인 후에는 남편의 도움으로 글을 배운 경우가 간혹 있었던 것 같다.

1910∼1920년대 무렵에 와서는 여자 어린이들도 소수이기는 하나 서당에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여아들의 교육은 주로 가정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 수준은 보통 국문을 쓰는 정도였다. 간혹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에서는 『천자문』을 익히고 난 다음에 『명심보감』을 읽게 하고, 나아가 『소학』이나 『논어』까지 읽히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여자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집안에서 흔히 사용했던 교과서들로는 『언문』 · 『명심보감』 · 『내훈』 · 『규중요람』 ·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었고, 그 밖에 『열녀도』 · 『삼강행실』 · 『계녀서』 · 『여사서(女四書)』 · 『소학언해』 · 『여범』 · 『규합총서』 · 『태내신기』 · 『오륜가』 · 이야기책 · 가사류 · 편지글 등도 있었다.

남아교육과 여아교육을 비교해 보면, 여아교육이 소홀했다는 점 외에도, 남아교육은 문자교육에 치중했던 데 비해 여아교육은 품행교육과 역할교육에 치중했던 것을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여아의 품행교육이나 역할교육은 주로 출가 후에 필요한 일들을 미리 가르치는 것이었다. 즉, 여아교육의 핵심은 『내훈』이나 『계녀서』에 기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부덕(婦德) · 부언(婦言) · 부용(婦容) · 부공(婦功)이었다.

여기에서 부덕이라 함은 재질이나 총명보다는 밝고 조용하고 수절정제(守節整齊)하여 몸가짐이 좋고 부끄러움을 가릴 줄 알아 움직임과 멈춤에 법도가 있는 것이라 했으며, 부언은 말을 잘 하는 것보다는 가려서 하되 나쁜 말과 남이 싫어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부용은 얼굴의 꾸밈이 좋고 몸에 때가 묻지 않도록 목욕을 하고 옷을 깨끗이 입는 것이며, 부공은 재주보다 길쌈에 힘쓰고 술과 음식을 정하게 만들어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 중 부공에 속하는 교훈은 역할교육에 해당되나, 부덕 · 부용 · 부언은 품행교육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항목별로 살펴보면 식사에 관련된 예절, 남녀 유별에 관한 사항, 언행, 남의 집 방문시 지켜야 할 예절 등이었다. 양반가에서는 이러한 교훈들이 책을 통해 여자 어린이들에게 전수되었으나 중류계층 이하의 일반 가정에서는 부모나 조부모들이 여아의 일상적인 행동거지에 주의를 줌으로써 품행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전통사회에서 여아의 품행교육은 언행의 정숙함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행동양식은 모두 성인적 규범에 적합하도록 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아교육에서 품행교육보다 더 강조되었던 것은 역할교육이었다. 즉, 딸로서의 역할, 며느리로서의 역할, 아내로서의 역할,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그 내용이었다. 딸로서의 역할은 남아와 마찬가지로 효(孝)가 그 기본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를 익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기거했으므로 어머니의 일을 돕는 일이 주된 것이었다. 그리고 며느리로서의 역할은 출가 후를 대비한 예행연습이었는데, 여아는 출가 후의 시집살이가 아무리 혹독해도 친정 가문을 위해 그것을 견뎌내도록 교육되었다. 아내로서의 역할은 남편에 대한 공경과 순종의 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남편의 외도나 축첩에 대해서도 투기해서는 안 되며, 남편 섬기는 일을 남편의 사후까지도 확대시켜 수절하도록 가르쳤다. 다음으로 배우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인데, 이의 역할 중 가장 강조된 것이 자녀교육이었다. 자녀의 허물과 잘못은 어머니의 양육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 어머니로서의 기본 자세를 가르치는 것 외에 태교, 출산, 육아, 자녀의 혼사, 며느리 거느리는 법을 가르쳤고, 노후에 자식 따르는 도리를 가르쳤다.

결국, 여아의 역할교육은 친정 부모와 시부모, 그리고 문중의 어른들과 이웃 어른을 포함한 윗사람에 대한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핵심이었다. 윗사람을 섬기는 도리는 기본적으로 남아교육과 다를 바가 없으나, 남아에게는 역할의 태도면을 강조한 데 비해 여자 어린이들에게는 역할의 기능면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아의 역할교육에서는 남성에 대한 순종을 강조함으로써 일찍부터 남성의 편의에 적합하게 훈육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개관한 전통사회의 아동교육에서 그 특징을 요약해 보면, ① 계급 제한적인 차별교육이었다는 점, ② 아동의 현재의 능력과 요구에 토대를 둔 아동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성인 중심의 교육이었다는 점, ③ 남녀간에 극심한 차별이 있는 불평등교육이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의 아동교육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이행되면서 아동교육은 과거의 가정중심교육에서 학교중심교육으로 변모되었다. 만 6세의 아동부터 취학하는 초등학교 교육은 1950년대에 의무교육화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계급 및 성별에 따른 차별교육이 법적으로 불식되었다. 교육내용으로 보면, 과거의 유교적 교육이 사람의 몸가짐과 도리를 강조한 인간교육에 치중한 데 비해, 현대의 교육은 지식교육으로 그 중점이 옮겨지면서 상대적으로 인간 교육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과거 인간 교육으로서의 전통적 교육은 문자교육 · 품성교육 · 역할교육이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고 있는 통합교육이었다고 하면, 지식 습득이 우선되고 있는 현대적 교육은 지식 분화에 따라 교과목이 구분, 독립되는 분리교육으로 바뀌고 있다. 이에 대하여, 현대사회의 아동교육에서는 과거에 없던 책이나 라디오 · 텔레비전 등의 매스미디어(mass media)인 비공식적 교육매체에 의한 교육적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아동을 위한 교육제도의 효시는 1895년(고종 32)에 공포된 「소학교령」으로, 당시 서당의 취학 연령인 8세 이상 15세까지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면서 여아들도 취학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1906년에 공포된 「보통학교령」으로 대치되면서 수업연한을 4년으로 하고, 만8세부터 12세까지를 학령으로 하되 14세까지도 입학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다시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조선교육령」의 일부를 개정하여 6년을 보통학교의 기본 수업연한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4년까지 줄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교육내용은 형식상으로는 서당의 교육과 차이가 있었으나, 내용상으로는 일부 교과(예를 들면, 체조)를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당교육과 별 차이가 없었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 학령 아동의 65% 이상이 보통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점에서 광복 전까지의 아동교육은 전통적 가치 기준에 의한 사고와 생활태도 등이 당시 아동교육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보인다. 1941년에 보통학교라는 명칭이 국민학교로 개칭되었으며, 광복 당시의 취학률은 64%였다. 그 뒤 의무교육정책이 활발히 추진되어 1955년에는 90% 이상의 취학률을 나타냈으며, 현재는 적령 아동의 100%가 의무교육을 받고 있다.

현대 아동교육의 내용은 1981년에 제정된 「국민학교교육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교육목표 · 편제 · 운영계획 및 지도 지침의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의 교육목표는 ‘학습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 능력을 가지며, 전인적 성장에 필요한 자질을 기르는 데’ 있는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교육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① 보건과 안전에 대한 기초 지식과 기능을 습득하고 건강한 신체를 갖게 한다.

② 아름다움을 즐기며 이를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을 갖게 한다.

③ 일상생활에 필요한 언어와 수리적 사고의 기본 능력을 갖게 한다.

④ 자연과 사회의 이해를 위한 초보적인 지식을 획득하며, 지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⑤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정직과 성실로써 생활하는 자율적인 태도의 기초를 습득하게 한다.

⑥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예절과 질서를 지키는 생활습관을 갖게 하도록 한다.

초등학교의 교육과정은 교과활동과 특별활동으로 나누어 편성하고, 교과는 도덕 · 국어 · 산수 · 사회 · 자연 · 체육 · 음악 · 미술 · 실과의 9개로 편성하되, 교과의 시간은 교과간의 연관성과 어린이의 발달 단계를 고려하여 저학년에서는 교과간의 통합을 원칙으로 하고, 고학년에서는 본과를 원칙으로 하여 배당하도록 되어 있다. 특별활동은 어린이회 · 클럽활동 · 학교 행사의 3개 영역으로 편성하도록 되어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이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아동의 심신 발달, 지역사회의 실정, 학교의 특수성에 알맞도록 교육과정의 운영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저학년에서의 교과 통합운영은 교과간의 내용 및 활동의 통합성을 고려하여 그 연계가 조화 있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하며, 도덕 및 국민정신, 언어생활, 건강과 안전, 환경교육 등은 교과활동과 특별활동, 그리고 다른 교육활동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도록 하되, 특히 기본적인 생활습관 형성에 유의하도록 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동 지도를 위한 문교부(현 교육부) 지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교과간 및 교과와 특별활동 상호간의 관련성, 학년간 및 학교 급별간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일관성 있는 지도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② 초등학교의 전 과정을 통하여 읽기 · 쓰기 · 셈하기 지도를 철저히 하여 기초 학습능력을 신장시키도록 한다.

③ 지엽적이고 단순한 사실의 기억보다는 탐구적인 활동을 통하여 개념 및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새로운 사태에 적용하는 기회를 많이 갖게 한다.

④ 생각이나 느낌을 말이나 글 또는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는 기회를 많이 갖게 한다.

⑤ 가정 학습 과제의 내용과 분량은 학생의 능력과 흥미를 고려하여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게 적절히 제시하도록 한다.

⑥ 교과용 도서는 지역사회, 학교의 실정과 학생의 수준에 알맞도록 재구성하여 활용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학교장의 재량으로 별도 단원을 설정하여 운영할 수 있다.

⑦ 수업 효과를 올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다양하게 활용하도록 한다.

⑧ 학습부진 아동 및 심신장애 아동의 지도에서는 이들 학생의 실태를 고려하여 적절한 지도가 이루어지도록 한다고 되어 있다.

학습 부진 아동을 위해서는 1974년부터 각 초등학교에 특수학급을 설치하고 있다. 이 학급은 입학 후 1∼2학년이 경과하는 동안 특수한 심신장애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학습 속도가 늦어 일반 학생의 학습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수교육을 전공한 특수교사가 이 학급에 배치되어 있다. 1998년에 초등학교의 특수학급은 전국에 2,977개가 있었으며, 취학 아동은 2만165명이었다.

심신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시설로는 맹학교 · 농학교 · 지체장애학교 · 정신박약학교 등이 있다. 맹학교는 1998년에 전국에 13개가 있었으며, 초등학교 과정의 학생수는 1,348명이었다. 맹학교의 일반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① 전인적인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신체적 · 지적 · 정서적 · 사회적 제 측면을 개발하고, 이들의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② 잠재적 능력을 개발하여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게 한다.

③ 보유 감관으로 능숙하게 읽고 쓰고 셈할 수 있도록 한다.

④ 보유 감관으로 의식주 생활과 독립 보행을 할 수 있도록 한다.

⑤ 정신적 및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습관 및 태도를 기른다.

⑥ 신체적 제약에서 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⑦ 자기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알고 남의 인격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른다.

⑧ 모든 생활 영역에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태도와 기능을 기른다.

⑨ 공익을 위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협동하는 정신을 기른다.

⑩ 사회가 요구하는 직업에 대한 건실한 태도를 기르며 맹인에게 적합한 직업적 기능을 습득시킨다.

이러한 교육목표하에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과정의 경우, 교과 · 생활 훈련 및 특별활동의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편성되어 있으며, 교과는 도덕 · 국어 · 사회 · 산수 · 자연 · 체육 · 음악 · 미술 및 실과의 9개 교과로 편성되어 있다. 맹아는 잔존 시력보다 시각 이외의 감각을 이용하여 학습하므로 이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서는 시각자료를 시각 이외의 감각자료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 교과의 학습내용을 분석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내야 할 것이며, 또한 점차 타자기를 비롯해서 쓰기와 읽기 도구를 비치해야 하고, 녹음기를 비롯한 듣기에 의한 학습용구를 비치해야 한다. 현재 이러한 시설을 충분히 갖춘 학교는 거의 없다.

농학교는 1998년에 전국에 17개가 있었으며, 초등학교 과정의 학생수는 2,837명이었다. 농학교의 일반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① 청각 장애를 고려한 신체적 · 정서적 · 사회적 · 지적 등 여러 측면의 조화적 발달 도모.

② 청능 · 독화 · 발어 · 감각훈련 등 기타 기능 장애 극복을 위한 학습지도.

③ 언어 장애로 인한 지도방법의 제한성을 고려한 학년간의 연계성과 교과간의 관련성 유지.

④ 개성과 소질 신장, 자활과 자립능력 배양.

⑤ 어린이의 특성과 요구 및 지역사회의 실정을 감안한 학습내용 정선 등.

이러한 교육목표하에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과정의 경우, 도덕 · 국어 · 사회 · 산수 · 자연 · 체육 · 음악 · 미술 및 실과의 9개 교과와 특별활동으로 편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농아교육은 1960년대까지 주로 수화법(手話法)을 이용하되 지문자(指文字)를 함께 쓰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구화법(口話法)에 의한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으며, 이 구화법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보청기 착용이나 청능훈련을 필수요건으로 농학교교육에 도입하게 되었다. 근년에 와서 청각법 · 구화법 · 수화법 · 지문자 등을 병용하는 방법인 토털 커뮤니케이션(total communication)이 소개되고 있으나 아직 실제 교육현장에는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

지체장애학교는 1987년에 전국에 15개가 있었으며, 초등학교 과정에 있는 학생수는 2,873명이었다. 지체장애학교의 교육과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으므로 이들 학교의 현재 운영실태를 참고하여 그 교육과정을 알아보면, 주로 일반학교 교육과정을 적용하고 있으며, 지적 수준이 낮고 장애의 정도가 심한 어린이들의 특성이나 개인 차를 고려하여 개별 교육과정을 작성한 특수교육 과정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체장애학교의 대다수는 초등학교 과정에 치중하고 있는데, 지적 능력이 정상인 지체장애 아동에게는 일반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준용하여 지도하고 있으며, 저능과 신체장애가 심한 뇌성마비 아동에게는 개인 차를 고려한 개별 과정을 작성하여 지도하고 있다. 지체장애 아동에게는 전문의의 진단에 따라 신체기능을 향상시키는 교육을 해야 하며, 신체의 특성에 맞게 학습에 필요한 보조도구를 제작해야 하는데, 현재의 시설로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정신박약학교는 1998년에 전국에 73개가 있었으며, 초등학교 과정에 있는 학생수는 1만6198명이다. 정신박약학교의 교육과정은 주로 일반학교 교육과정을 적용하고 있으며, 지적 수준이 낮고 장애의 정도가 심한 어린이들의 특성이나 개인 차를 고려하여 개별 교육과정을 작성한 특수교육 과정으로 되어 있다. 중학교 교육과정 이상을 설치, 운영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대개 일반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준용하고 있으며, 의료재활시간을 별도로 배당하여 치료를 하고 있다. 이들 학교에서는 지능이 정상인 아동에게는 일반 교육과정을 적용하는 일반학급과 지능이 지체되어 있는 중복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급을 두고 있는데, 일반학급의 어린이들에게는 집단지도방법을 사용하고 특수학급의 어린이들에게는 개별지도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정신박약학교의 교육과정은 문교부가 1974년에 공포한 「특수학교 교육과정」 중 정신박약아 초등부 교육과정에 근거하여 실시하고 있으며, 장애의 정도가 심한 아동에게는 학교 실정에 따라 재구성하여 실시하고 있다. 중고등부의 교육과정은 아직 제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학교 나름대로 연구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직업 과정이 전체 시간수의 50∼60%를 차지하고 있다. 교육 가능 정신박약아를 위한 교과서가 문교부의 사용 승인을 받아 현재 사용되고 있는데, 이 교과서는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에서 개발한 것으로 문교부가 제정, 공포한 교육과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 교과서의 특징은 학년을 무시하고 아동의 능력에 맞게 내용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각종 학교에는 교장이 한 명씩 있고, 교감은 학교의 규모에 따라 한 명 또는 두 명씩 있으며, 각 학급에는 담임교사가 한 명씩 있다. 학과수업은 45분을 원칙으로 하며, 체조시간을 제외하고는 대개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다. 자연 관찰 및 현장 시찰을 할 수 있는 야외 수업이나 현장 견학은 매우 드물고 소풍과 운동회는 봄 또는 가을에 한두 번씩 있다. 학습에서의 수업은 담임교사 한 사람이 한 학급을 1년 동안 전담하여 전 과목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다. 한 교사가 담당하는 학생수가 38명이기 때문에 하루에 학생과 개별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적지만, 보통 1년 단위로 한 반을 계속 맡게 되므로 담임교사의 영향은 직접 · 간접적으로 매우 크게 작용하게 된다.

수업방법은 주로 주입식 수업방법을 취하고 있으며, 학습 진도는 정해진 교과서를 한 학기에 마치도록 되어 있다. 한 반의 학생수가 많으므로 학습 진도에 개인 차가 있어도 개별 지도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반면, 수시로 시험을 치르게 해서 성적을 평가하므로 학생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경쟁이 강요되고 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는 국정교과서에 한정되어 있어 교육내용은 획일적일 수밖에 없다. 학교에 따라서는 도서실에 각 학과목의 참고서, 동화 및 아동소설, 과학도서 등을 구비해 놓고 정규 과목 이외의 독서를 권장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장서 수가 불충분하고 아동들의 이용도도 비교적 낮다.

교과학습 이외에 특별활동에 속하는 클럽활동을 통해서는 주로 체조 및 예능학습 기회가 주어지며, 어린이회를 통해서는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함양하기 위한 학습으로 회의의 진행 · 토의방법 · 발표기술 등을 익히고,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학교행사를 통해서는 정서 순화 · 체력 단련 · 협동정신 · 레크리에이션 방법 등을 습득하는 기회가 제공된다. 학교형태가 아닌 아동교육 시설로는 미술학원 · 피아노학원 · 무용학원 · 주산학원 · 태권도학원 등이 있으며, 특수아동을 위한 소수의 치료 · 교육시설도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학교교육이 양적 · 질적으로 증대하여 가정교육은 상대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자녀에 대한 가정의 교육기능은 대부분 학교에 위탁되어 있고, 가정에서는 교육기능의 일부로서 학교교육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한편, 양육 및 보호기능이 주가 되어 아동의 기본적인 생활습관 · 성격 및 가치관 형성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가정의 교육기능 중 지식교육과 관련되는 부분에서는 다만 학교 공부의 예습 · 복습을 돌보아 주거나 독려하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고 있다. 오늘날의 가정에서는 과거의 전통사회와는 달리 아버지가 집 밖의 직장에서 일하여 집에서 자녀와 접촉하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아버지의 교육적 영향은 줄어들고, 대신 어머니의 영향이 증대되고 있다.

어린이 보호 및 복지

아동복지란 특수한 장애를 가진 아동은 물론 모든 아동들이 가족 및 사회의 일원으로 육체적 · 정신적으로 건전하게 성장, 발달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나 사회복지, 서비스 분야에 있는 공사단체와 기관들이 협력하여 아동의 복지에 필요한 사업을 계획하며 실행에 옮기는 조직적인 활동을 말한다. 어린이의 보호 및 복지를 위한 시설과 제도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모든 어린이를 포함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불우어린이를 위한 경우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어린이를 위한 보호 및 복지

보호를 요하는 어린이와 일반 정상 아동 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이들의 보호 및 복지를 위한 것으로는 어린이날「어린이헌장」 · 「아동복지법」 등이 있다. 어린이날은 새 세대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에 대한 사회적 · 국가적 여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그들의 건전한 성장과 장래를 축복하는 날이다. 그 기원은 20세기 초반에 일기 시작했는데, 전통사회에서의 어린이들에 대한 윤리적 억압을 비판하면서 어린이도 성인과 동일한 인격체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해 오던 당시의 선각적인 지식인들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어린이날 제정에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19년 3 · 1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도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인바, 1923년 3월에 방정환을 비롯한 서울천도교소년회 및 색동회가 주동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이는 1939년에 일제의 억압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부활되어, 1946년 국가의 정규 법령에 의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게 되었다.

「어린이헌장」은 어린이의 복지 증진을 위해 국가 · 사회 · 가정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기본적인 요건을 조문화한 것으로, 1957년 한국동화작가협회가 초안한 것을 기초로 하여 그 해 5월 5일에 전문 9개 항으로 된 헌장을 공포하였다. 그 뒤 30여 년 동안 사용되어 오다가 1988년 5월 어린이날을 맞아 시대 감각에 적합하도록 11개 항으로 개정하였다. 「어린이헌장」은 1957년에 처음으로 제정 · 공포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의 그 이념적 기반은 이보다 훨씬 앞선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초반에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 하나의 예로, 기진(奇○)의 글 「개벽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 가운데, 어린이의 인격적 존엄성을 인정할 것을 주창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조항을 제시한 것은 실로 현재 「어린이헌장」의 정신적인 모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언어에 있어 어린이를 경대(敬待)하자. …… 우리는 어린이의 인격을 인(認)하는 표시로서 먼저 언어에서 경대해야 한다. 둘째, 의복 · 음식 · 거처 및 기타 일상생활의 범백(凡百)에 있어 어린의 존재를 꼭 어른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다시 경제적으로 그의 생활의 평안을 보장하야, 첫째로 그들에게 상당한 의식(衣食)을 주어 자체가 영양 불량의 폐에 빠짐이 업게 하며, 둘째로 유소년의 노동을 금하고 일체로 취학의 기회를 엇게 할 일이라.”

「아동복지법」은 우리나라 3대 사회복지 서비스업인 「아동복지법」 · 「심신장애자복지법」 · 「노인복지법」 중의 하나로, 전문 39조와 부칙 3조로 되어 있다. 「아동복지법」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① 어린이의 보호양육에 대한 국민적 책임에 관한 내용, ② 어린이날 규정, ③ 아동복지를 위한 기관 및 인원, 시설설비에 관한 내용, ④ 아동의 보호조처에 관한 내용, ⑤ 아동에 관한 금지행위, ⑥ 아동복지시설의 인가 및 취소에 관한 내용, ⑦ 아동복지시설에 대한 비용 및 여타의 보조에 관한 내용, ⑧ 규정 위반시의 벌칙에 관한 내용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아동복지법」의 목적은 아동이 건전하게 출생하여 행복하고 건강하게 육성되도록 그 복지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아동복지시설의 설치가 행정청의 임의 재량에 맡겨져 있고, 이들 시설에 대한 비용 보조 등이 ‘∼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어 있어서 의무 규정이 아닌 점에서 실효성이 제한적이다.

불우어린이를 위한 보호시설

불우어린이를 위한 보호시설의 종류로는 영아 수용시설 · 육아 수용시설 · 심신장애자 수용시설 · 부랑아 수용시설 등이 있다. 영아 수용시설인 영아원은 6세 미만의 고아 · 기아 · 미아가 된 불우 영아 · 유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1995년 말에는 전국에 36개 소가 있었으며, 이들 시설에서 2,118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육아 수용시설인 육아원은 6세 이상 18세 미만의 고아 · 기아 · 미아가 된 불우아동 및 청소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1995년 말에 전국에 174개 소가 있었으며, 이들 시설에서 6,529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부랑아 수용시설은 보호자의 곁을 떠나서 일정한 주소나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동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1995년 말에 전국에 9개 소가 있었으며, 이들 시설에서 2,193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특수 어린이를 위한 복지제도

특수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는 「특수교육진흥법」 · 「특수교육진흥법시행령」 · 「특수교육진흥법시행규칙」 · 「심신장애자복지법」 등이 있다.

「특수교육진흥법」은 1977년에 법률로 공포되었으며, 시청각장애자 등 심신장애자에 대한 특수교육을 진흥하여 그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능에 관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사회생활에 기여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수교육진흥법시행령」은 「특수교육진흥법」의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정하기 위해 1978년에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었고, 「특수교육진흥법시행규칙」은 1978년에 문교부령으로 제정되었다. 이 규칙의 주요 내용은 특수교육 대상자의 판별, 점자도서관의 시설 · 설비 기준 및 등록, 교육을 위한 시설 설비, 직업 보도와 훈련에 필요한 설비 기준, 특수교육 요원의 자격 취득을 위한 이수과목 및 자격 검정과 합격 기준, 자격 검정의 구비서류 및 요원 임명에 관한 세칙을 담고 있다.

「심신장애자복지법」은 1981년에 법률로 제정되었으며, 이는 심신장애 발생의 예방과 심신장애자의 재활 및 보호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정함으로써 심신장애자의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한 법이다. 전문 32조 부칙 2조로 되어 있는 이 법의 주요 내용은, 심신장애자의 존엄과 가치, 자립에 대한 노력, 국가 등의 책임 및 심신장애자 복지지도원에 관한 내용이 있고, 복지조처에 관한 내용으로는 심신장애자의 지도계발 · 조사 · 재활 상담 및 입소 등의 조처, 보장구의 교부, 고용 촉진, 시설의 우선 이용, 편의시설, 부양 수당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어린이를 위한 작품

전통사회를 포함한 그 이전의 시대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양식을 특별히 갖춘 예술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러한 양식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반문학 속에, 특히 기록문화보다는 구비문학적 전통 속에 그 자취와 계보를 남기고 있다. 동화문학적 원형으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단군신화가 될 것이며, 고구려의 「고주몽신화」나 신라의 시조신화들(박혁거세 · 석탈해 · 김알지 신화), 가락국의 「수로왕신화」, 제주도의 「삼성시조신화」 등이 동화문학적 원형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이 밖에도 전래동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헌상의 작품으로는 신라에서 구전되던 「방이설화」 · 「귀토설화」 등과 고구려에서 구전되던 것으로 알려진 온달설화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전래동화는 『삼국유사』 · 『삼국사기』, 혹은 설화집 『신라수이전』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완전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여서 전래동화의 구체적인 모습과 작품적 특성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설화적 소설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전래동화의 소설화 경향에 힘입어 『콩쥐팥쥐전』 · 『별주부전』 · 『흥부전』 등의 동화적 기록이 이루어졌으나 이는 전래동화의 성인소설적 재구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요나 동시 문학은 민요와 그 구분이 명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구전 또는 정착되어오다가 근대에 오면서 일반문학에서 전래동요의 모습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문헌상 최초의 동요문학적 원형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강림신화에 삽입되어 전하는 「구지가」와 삼국시대의 「서동요」「해가」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다. 그 밖에 문헌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고전의 동요작품으로는 신라의 「계림요」, 백제의 「완산요」, 고려의 「만수산요」 등과 조선의 「남산요」를 거쳐 조선 말기의 「녹두새」 · 「파랑새요」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전래동요들은 영조 · 정조 이후 소설의 발달에 힘입어 소설 속에 삽입되어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옹고집전』에 있는 「자장가」, 『심청전』의 「자장가」, 『흥부전』의 「달거리」 · 「구구풀이」, 『춘향전』의 「한글풀이」 등의 전래동요들이 전해지고 있다.

고전의 아동문학이 현대와 다른 점으로는 고전작품들이 아동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고 일반문학 속에 포함시켰다는 점과, 또한 기록문학으로서의 아동을 위한 작품이 정리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흐름은 최남선(崔南善)이 아동 잡지로서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소년』을 창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년』지가 비록 ‘상투를 틀고 쪽진 청춘 남녀’를 대상으로 했지만(윤석중, 1962), 그 내용과 정신에 있어 어린이를 위한 잡지로서 최초의 본을 보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첫째 ‘새로 발생하는 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1910), 둘째 그 내용이 소년 및 어린이들이 읽을거리 일색이었다는 점, 셋째 잡지 이름을 『소년』이라 칭하여 청소년 및 그 이하의 연령층을 포함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 당시의 성인 위주적 사회 전통으로 볼 때 그 대상이 소년 및 어린이를 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어린이에 대한 태도의 획기적인 진보라고 평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년』지의 내용을 보면, 현대의 동시 · 동요 · 동화에 해당되는 내용들이며(예를 들어, 동요 계통으로는 우리의 운동장 · 바둑이 · 남잡이가 저잡이, 동화 계통으로는 센둥이 검둥이 등), 또한 외국의 어린이 소설을 번역한 것들도 있었다(예를 들어, 이솝이야기 · 로빈슨 크루소).

이 『소년』지를 효시로 하여 이른바 어린이를 위한 잡지로 출현한 것이 『붉은 저고리』(1911) · 『아이들 보이』(1913) · 『새별』(1913) 등이었다. 이미 『소년』지를 통해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려 했던 시도가 이들 잡지를 통해서 더 구체화되었는데, 특히 『아이들 보이』와 『새별』은 순한글을 사용하였다. 이 당시 이광수(李光洙)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보다는 성인을 대상으로 하여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1919년의 3 · 1운동을 계기로 정치 · 사회 · 문화 일반에 걸친 커다란 전환점이 마련되면서 아동에 대한 인식도 성인과의 종적인 관계에서 횡적인 개념으로 확립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이때부터 방정환을 주축으로 한 제반 활동에 힘입어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차차 성인과 대등한 인격적인 존재로 어린이를 인식시키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어린이』(1923) · 『신소년』(1923) 등의 어린이 잡지 등에 다수의 동요 · 동화 작가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어린이를 위한 작품도 필연적으로 풍성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저연령층의 어린이를 포함한 어린이를 위한 작품활동 및 문화활동을 시작한 이는 방정환이었다. 그는 1921년 겨울에 세계 명작동화들을 번역하여 『사랑의 선물』을 출간하고, 이 무렵을 전후하여 『개벽』 등의 잡지와 신문 등에 논문이나 창작을 발표하거나 아동극대회 · 동화구연대회 등을 개최하여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어린이를 위하는 방정환의 마음이 다음의 글에 나타나 있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만들었읍니다.”(「사랑의 선물」 서문 중에서, 1922), “애녀석, 어린애, 아해놈이라는 말을 없애 버리고 늙은이 · 젊은이란 말과 같이 어린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의 일이요, 어린이의 보육, 어린이의 정신지도에 유의하여 여러 가지 노력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의 일입니다.”(어린이 76).

이러한 방정환의 노력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갖게 하고, 이것을 모태로 1923년에 어린이날을 거국적으로 제정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의 활동은 1923년에 창립한 「색동회」의 활동과 함께 유기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920년대의 어린이를 위한 작가 및 작품들을 살펴보면, 먼저 동화 계통에서는 방정환의 『왕자와 제비』(번역동화), 마해송(馬海松)의 『바위나라와 아기별』 · 『어머님의 선물』 등이 있었으며, 동요 부분에서는 방정환의 「형제별」, 윤극영(尹克榮)「반달」 · 「설날」 · 「할미꽃」, 이원수(李元壽)「고향의 봄」, 한정동(韓晶東)「따오기」 · 「갈잎피리」, 서덕출(徐德出)의 「봄편지」 등이 나타나 지금까지도 읽히거나 애창되고 있다.

이 밖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 아동극 분야가 있는데, 이 분야에서는 특히 정인섭(鄭寅燮)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개작 동극 「백설공주」와 창작 동극 「솔나무」 · 「허수아비」 · 「맹꽁이」 등을 통하여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발전과 이것을 계발하기 위한 아동교육론을 주장하였다. 그 밖의 아동극 작품으로는 방정환의 「노래 주머니」, 윤석중(尹石重)의 「올빼미의 눈」, 신고송의 「요술모자」, 마해송의 「장님과 코끼리」와 번역극 「콩이 삶아질 때까지」 등이 있었으며, 동요극으로는 윤극영 작곡, 박팔양 작사의 「여름 파랑새를 찾아서」가 있다.

1920년대의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방정환 중심의 주관적 동심주의활동이라고 칭하면, 1930년대에 와서는 이 경향을 유지하는 활동과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프로적 영향하에 활동하는 일군의 사회적 현실주의 활동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향은 둘 사이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 교훈주의 · 감상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어린이를 위한 활동은 1937년 2월의 일제에 의한 일어 상용 강제 및 1939년 10월 일제의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 1940년 2월의 창씨개명제도, 8월의 『조선일보』 · 『동아일보』 강제 폐간 등의 민족문화 탄압을 거치면서 아동을 위한 작품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당시 어린이를 위한 작품활동의 무대로는 아동 잡지 계통과 신문 등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동 잡지 계통으로는 『아이생활』 · 『가톨릭 소년』 · 『소년』 · 『빛(성가정)』 등이 있었으며, 신문 계통으로는 『소년조선일보』 및 당시의 일간신문 문예란 등이 있었다. 1930년대부터 광복 전까지 활동한 작가와 작품을 살펴보면, 동화 부분에서 강소천의 「돌멩이」 · 「토끼삼형제」, 김영일의 「풀잎 안경」 · 「하늘나라」, 이구조의 동화집 『까치집』, 노양은의 동화집 『날아다니는 사람』 등이 있었다.

동시 부문에서는 한정동의 「제비야」, 이원수의 「나무 간 언니」 · 「찔레꽃」 · 「보오야 넨네요」 · 「양말 사러 가는 길」, 강소천의 「지도」 · 「호박꽃과 반딧불」 · 「까치야」 · 「닭」 · 「호박」, 박목월의 「통딱딱 · 통짝짝」 · 「꽃가마」 · 「토끼길」 · 「봄바람」 · 「아버지와 나」 · 「해바라기와 면장님」 · 「코끼리야」, 김태오의 「해야 해야 붉은 해야」 · 「강남 제비야」, 윤석중의 「한개 두개 세개」 · 「먼길」 · 「쌍무지개」, 김영일의 「꽃냄새」 · 「다람쥐」 · 「애기별」 · 「꿩」 · 「달밤」 등이 있었다.

이 시대에는 특히 동요에서 많은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윤석중의 「밤 세톨 굽다가」 · 「짝짝꿍」 · 「밤 한톨이 데굴」 · 「봄 나들이」 · 「두고 두고 별르는 날」, 윤복진의 「산길」 · 「기차가 달려오네」 · 「진달래」 · 「애기 참새」 · 「봄나비 한쌍」, 이정구의 「외딴집」, 목일신의 「누가 누가 잠자나」 · 「자전거」, 박경종의 「왜가리」 · 「둥글다」 등이 있었다. 아동극 부문에서는 연성흠의 「사자와 호랑이」, 정인섭의 「체기통」, 최경화의 「모기와 거미」, 번역극으로는 「파랑새」가 있었다.

어린이를 위한 작품활동은 일제강점기에 주권 회복을 위한 민족주의적 활동을 1945년 광복을 계기로 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아동문학이 갖추어야 할 문제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6 · 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5년여 동안은 좌우익의 극한적 대립으로 빚어진 혼미 속에서 주권 회복에 따른 아동을 위한 문화운동이 문학운동보다 더 강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출판을 통한 전대의 정리와 결산이 시도되었으며, 율문 중심에서 산문 중심으로의 이행과 아동소설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아동문학이 태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광복 이전의 작품들을 정리 혹은 개작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들이 상당수 있었다. 동요 · 동시집으로는 윤석중의 『초생달』 · 『굴렁쇠』, 박목월의 『동시집』 · 『초록별』, 이원수의 『종달새』, 김영일의 『다람쥐』 등이 있었으며, 동화집으로는 마해송의 『토끼와 원숭이』(1931년에 일부 발표한 것을 1946년에 완결하여 출간), 이원수의 『봄잔치』 등이 있었고, 아동소설 계통으로는 주요섭의 『웅철이의 모험』, 방기환의 『누나를 찾아서』 · 『꽃필 때까지』, 최병화의 『희망의 꽃다발』 · 『꽃피는 고향』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외국의 명작 동화를 번역, 출간한 작품들로 『이솝이야기』 · 『로빈슨 크루소』 · 『걸리버 여행기』 · 『그림없는 그림책』 · 『사랑의 학교』 · 『프란더스의 개』 · 『15소년』 · 『베니스의 상인』 · 『장발장』 · 『성냥파는 소녀』 등이 있었다.

이러한 단행본 외에 아동 잡지로 나타난 대표적인 것들로 『소학생』 · 『소년』 · 『어린이』 · 『아동』 · 『새싹』 등이 있었다. 이들 아동 잡지를 통해 활동한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면, 동요 부문에서는 이원수의 「달밤」, 윤석중의 「어깨너머 공부」 · 「우리 동무」 등이 있었고, 동시 부문에서는 박목월의 「땅감」 · 「바다」 · 「눈오는 밤 잠오는 밤」, 이원수의 「밤중에」 · 「바람에게」, 윤석중의 「우리집 돌담」, 박화목의 「창」 · 「초롱불」 · 「도라지꽃」 · 「호박꽃 초롱」 · 「발자욱」, 김영일의 「비 그친 하늘」 · 「구름」 등이 있었다. 동화 및 아동소설 부문에서는 김요섭의 『연』 · 『나뭇잎과 보리씨』 · 『아기와 별』 · 『은행잎 편지』 · 『늙은 나무의 노래』 · 『별하나 나하나』, 이원수의 『숲속 나라』, 김내성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의 작품이 있었다. 한편, 아동극 부문에서는 함세덕의 「닭과 아이들」, 이촌일의 「봄이 올 때까지」 등이 있었다.

광복 후 5년 동안의 아동을 위한 작품활동은 6 · 25전쟁이라는 비운으로 인하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즉, 대중적 · 통속적 아동소설 혹은 소년소설이 중추를 이루게 되었으며, 어린이를 위한 순수한 본격 작품은 일부 소수의 작가들에 의해서만 제한된 범위에서 지속되어 나갔다. 이 시기에 출현한 아동 잡지로는 『소년세계』 · 『새벗』 · 『어린이 다이제스트』 · 『파랑새』 등의 월간 아동지가 있었으며, 그 밖에 일간지의 소년판 및 주간 『소년한국일보』 등이 있었다. 이 시대의 아동물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특색은 상업주의적인 목적 아래 명랑물 · 탐정물 혹은 순정물 등의 만화가 점차 그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발표된 어린이를 위한 작품들 중 단행본으로 나온 것을 보면, 동시집으로는 김영일의 『다람쥐』, 서정봉의 『반딧불』, 여운교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종택의 『새싹의 노래』 등이 있었으며, 동요집으로는 윤석중의 『아침까지』, 서덕출의 『봄편지』, 김영일의 『소년 기마대』, 홍은순의 『전시 노래 모음』, 박목월의 『현대 명작 동요선』 등이 있었다. 동화집으로는 강소천의 『조그마한 사진첩』 · 『꽃신』 · 『꿈을 찍는 사진관』, 마해송의 『떡배 단배』 · 『모래알 고금』, 김요섭의 『오 멀고 먼 나라여』, 박화목의 『부엉이와 할아버지』, 최병화의 『즐거운 자장가』, 최태호의 『아름다운 이야기』, 김송의 『귀여운 어린이』, 홍은순의 『은방울』, 이종환의 『갈매기의 노래』, 염상섭의 『채석장의 소년』 등이 있었으며, 번역동화집으로는 『왕자와 거지』 · 『알프스의 소녀』 등이 있었다. 또한 아동극집으로는 홍은표의 「찢어진 우산」, 금수현 · 이주연의 「학생극집」, 주평의 「파랑새의 죽음」 · 「숲속의 꽃신」 등이 있었다.

단행본 외에 정기간행물이나 신문 등에 발표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동화 및 아동소설 계통으로는 강소천의 『교실에 피는 우정』 · 『새벽종』 · 『무지개』 · 『인형의 꿈』, 장수철의 『꽃무늬』 · 『아침노을 저녁노을』, 이원수의 『달나라의 어린이』 · 『참새 잡던 시절』, 김요섭의 『은하수』 · 『나비를 잡는 마을』 · 『사랑의 나무』 · 『무지개와 시인』, 방기환의 『구두 닦는 골목』 · 『웃지 않는 아이』, 이종환의 『하늘은 푸르다야』, 황순원의 『산골 아이』 · 『소나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외국 동화를 번역한 작품으로는 『아버지를 찾으러』 · 『은빛 연어』 · 『날으는 가방』 · 『인어 아가씨』 · 『밤비』 · 『피이터 팬』 · 『맥베스』 · 『검둥이 톰아저씨』 · 『그림동화』 · 『별얘기』 등이 있었다.

또 동시 · 동요 계통으로는 윤석중의 「아침해」, 김영일의 「달팽이」, 박두진의 「마을과 눈과 등불과 별」, 어효선의 「이른봄」 ·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최계락의 「저녁노을」 · 「하늘과 구름과 바람」 · 「달밤」, 이종기의 「봄」 · 「금붕어」 등이 있었다. 아동극 부문의 작품으로는 유치진의 「까치의 죽음」 · 「사육신」, 김진수의 「바람을 잡아먹는 아이들」 · 「뒷골목의 예수」, 홍은표의 「달나라 옥토끼」, 최태호의 「걸레」, 강소천의 「꽃과 나비」, 방기환의 「봄이 오면」 등이 있었다.

이런 1950년대의 경향은 1960년의 4 · 19혁명을 계기로 문학계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역사의식에 대한 자각 및 문학의 주체성과 리얼리즘 정신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인하여 어린이를 위한 작품활동도 이전까지의 비예술성, 저급성, 작가의 어린이에 대한 안이한 의식 등에 대한 반성의식과 함께 그것을 개조하려는 노력이 대두되었다. 예를 들면, 동시 부문에서는 형상화된 시로서의 동시가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동화 및 아동소설 부문에서는 이에 관한 재인식을 통하여 소설적 골격을 든든히 다진 아동문학으로서의 동화와 아동소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어린이를 위한 이전 시대의 작품을 정리하거나 해외 명작물을 선집이나 전집의 형태로 출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어 대표작가들의 작품선집으로 『한국아동문학독본』 · 『한국아동문학전집』 등이 있었고, 개인 작품 전집류로는 『강소천아동문학전집』 · 『소파아동문학전집』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 해외 명작 선집류로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 · 『안델센동화선집』 · 『그림동화선집』 등이 있었다.

1960년대 이후의 어린이를 위한 작품활동의 무대는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린이 잡지류나 일간지의 소년판 혹은 소년 일간지 등이었으나, 특기할 만한 것은 아동문학 전문지의 간행으로, 예를 들어 『아동문학』 · 『횃불』 · 『아동문학사상』 등이 있었다. 이 시대에 나타난 어린이를 위한 정기간행물로는, 1950년대부터 나오던 『새벗』을 비롯하여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새소년』 · 『소년세계』 · 『어깨동무』 · 『소년중앙』 · 『소년경향』 및 복간된 『가톨릭 소년』 등이 있었다. 일간지로는 『소년한국일보』 · 『소년동아일보』 · 『소년조선일보』 등이 이 시대에 창간되어 어린이를 위한 작품에 지면을 할애하였다.

어린이를 위한 작품들 중 단행본으로 나온 것들을 보면, 동시집으로는 동시인동인회의 『창경원 동물들』 · 『숲속의 별』, 신현득의 『바다는 한 숟갈씩』, 조유로의 『봄동산 꽃동산』 등이 있었다. 또한 동화나 아동소설집으로는 김요섭의 『날아다니는 코끼리』, 이영희의 『꽃씨와 태양』, 신지식의 『바람과 금잔화』, 최효섭의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 · 『시계탑의 열두 형제』, 손춘익의 『천사와 꼽추』, 김성도의 『색동』 · 『복조리』 · 『별똥』, 이원수의 『보리가 패면』, 이주홍의 『섬에서 온 아이』, 최인학의 『케이블카』 · 『벌판을 달리는 아이』 · 『노래하는 꽃씨』, 이영호의 『배냇소 누렁이』, 황영애의 『구멍가게집 세남매』, 유영희의 『풍선을 탄 아이』 등이 있었다. 단행본 외에 정기간행물이나 신문 등에 발표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동시로는 신현득의 「빨갛고 예쁘고 달콤한 것이」, 유강환의 「가을이 간 자리」 · 「아이와 우체통」, 조유로의 「개나리」, 이석현의 「술래잡기 꽁꽁」 · 「메아리의 집」, 박경용의 「이슬의 나라」, 이종기의 「하늘과 땅의 사랑」, 석용원의 「거울」등이 있었다.

동화 및 아동소설로는 마해송의 『꽃씨와 눈사람』 · 『생각하는 아버지』 · 『학자들이 지은 집』, 강소천의 『나는 겁장이다』 · 『토끼들한테 들은 이야기』, 이주홍의 『쫓겨온 살찐이』 · 『꽃이 된 소녀』 · 『청개구리』 · 『정만서 무전여행기』, 이원수의 『장난감과 토끼 삼형제』 · 『종다리와 보리밭』 · 『들불』 · 『시크라멘과 주고받은 이야기』, 김요섭의 『앵무새』 · 『바람개비』 · 『옛날 어느 마을의 봄』 · 『날아다니는 코끼리』, 이영희의 『봄이 천천히 오는 까닭』 · 『하얀 배가 된 아파트』 · 『현미경 속의 밤』 · 『꽃씨와 태양』 · 『별님네 전화번호』, 신지식의 『비둘기의 추억』 · 『편지』 · 『바람과 금잔화』 · 『가을 요정』 · 『꽃초롱 이야기』, 유여촌의 『바람을 그리는 아이』, 김성도의 『생각하는 시계』 · 『임금님과 캬라멜』, 손춘익의 『시인과 귀뚜라미』 · 『시골버스』, 장욱순의 『달 따는 소년들』 · 『날아간 두루미』, 최효섭의 『임금님의 마라톤 경주』, 황영애의 『지네와 고깔모자』 · 『슬기와 아리의 이야기』, 윤사섭의 『우리는 즐거워』 · 『돌이와 넝마주이』, 차원재의 『밀집모자』 · 『호박떡』 · 『종이때기 할아버지』, 박홍근의 『눈동자는 파래도』, 김동리의 『꽃』, 황순원의 『골목안 아이』 등이 있었다.

아동극 부문에서는 기존 아동극 작품을 총괄하여 수록한 『한국아동문학전집』(12권)이 있었으며, 장수철의 「아름다운 약속」, 주평의 「나비를 따라간 소년」 · 「날나리 아저씨」 · 「밤나뭇골의 영수」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태교신기(胎敎新記)』
『동의보감(東醫寶鑑)』
『규합총서(閨閤叢書)』
『계녀서(戒女書)』
『여사서(女四書)』
『동몽선습(童蒙先習)』
『교육통계연보』(교육부, 1998)
『보건복지통계연보』(보건복지부, 1996)
『청소년백서』(국무총리행정조정실 청소년대책위원회, 1986)
『문교통계연보』(문교부, 1985)
『한국교육연감』(대한교육연합회, 1985)
『아동복지론』(장인협,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4)
『육아론』(류안진, 정음사, 1982)
『유치원교육과정』(문교부, 1982)
『유치원·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 교육과정개정안에 관한 종합세미나 보고서』(한국교육개발원, 1981)
『특수교육백서』(문교부, 1981)
『한국교육삼십년』(문교부, 1980)
『한국전통사회의 유아교육』(류안진, 정음사, 1980)
『아동복지』(구자헌, 한국사회복지연구소, 1968)
「전통적생활세계와 아동생활」(서봉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논총』 82-6,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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