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씨

천마총 관모
천마총 관모
공예
개념
손을 써서 물건을 만드는 재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솜씨는 손을 써서 물건을 만드는 재주이다. 단순히 신체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까지 포괄한다. 기술·기량과 같은 뜻으로 쓰여 숙련된 상태의 역량을 가리키기도 한다. 솜씨는 의식주 전반에서 매우 중요하다. 회화·조각·건축 및 일상생활의 도구와 기물들, 바느질과 음식치레까지 모두 솜씨에 속한다. 그런데 개화기 이후 기계 기술이 발달하자 장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물려주지 않았다. 현재 많은 전업적 솜씨는 단절되고 일부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계 기술 속에서도 손의 가공 능력이 가진 미묘함은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정의
손을 써서 물건을 만드는 재주.
개설

단순히 신체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적 능력까지 포괄하는 용어이다. 솜씨라는 말은 우선 단순한 수공(手工) 그 자체를 뜻하겠으나, 일반적으로는 기술(技術) · 기량(技倆)과 같은 뜻으로 쓰여서 어느 만큼 숙련된 상태의 역량을 가리키기도 한다.

솜씨의 옛말은 ‘손씨’이다.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에서는 “그 겨집의 손ᄲᅵ과 ᄀᆞᆺ거ᄂᆞᆯ”이라 하였다. 즉, 손씨는 손놀림의 어떤 중요한 심지의 일컬음이요, 나아가 그것으로 얻어지는 요긴한 성과이다.

그러한 손재간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어느 사회, 어느 민족이나 다 공통성을 띤 것이다. 인간의 신체기관, 특히 손발의 일을 보완하고 확대시켜 발달한 것이 각종 도구(道具)의 형태와 구실이다. 일반적인 생리적 기능성으로만 발달한 도구일수록 공통된 형체로 한정되어 있게 마련인데, 그러나 그 성능면에서는 역시 우열의 차가 따르게 된다.

더구나 미개사회와 문명사회가 이루어 놓은 양상은 그 차이가 한층 현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구는 단순한 기능에 만족하지 않고 장식성을 수반한다. 도구나 기물을 만들 때에 우연히 생기는 문양은 소박한 상태의 원시적 장식에 속한다.

미개한 사회에서는 그러한 장식에 주력(呪力)을 부여하려 하지만, 인지(人智)의 발달에 따라 길상(吉祥)무늬와 같은 상징성, 삶의 즐거움을 나타내는 유희성, 혹은 교훈적 의미나 문학적 내용을 통하여 시각적인 뜻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

그 같은 기물과 장식의 문제를 ‘용(用)’과 ‘미(美)’라는 용어로 바꾸어 말한다면 그 두 가지 요소가 각기 별개로 결합되어서 하나의 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용’에는 ‘미’가 내포되는 것이고, ‘미’는 ‘용’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다만, 기물의 성질과 목적에 따라 용과 미의 비중이 다각도로 변모하게 되며, 유별나게 장식성을 높인 기물도 생기는 것이다. 장식성에 비중을 둔 기물일수록 씀씀이가 특별한 계층에 한정된다든가 개인적인 취향을 짙게 반영하므로 자연히 사치하게 여기게 된다.

그처럼 우리 사회 안에서도 오랜 역사를 통하여 여러 층의 기물이 있는 반면 전체적으로 한국인 나름의 슬기와 기호에 따라 다듬어진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활용품을 더욱 아름답게 가지려는 심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주로 본 솜씨의 풍토성

우리 나라의 고대어로는 솜씨라는 말보다 ‘셩녕’이라는 말을 훨씬 많이 썼다. ‘손씨’의 사용례가 극히 적은 데 비하면 ‘셩녕’은 16세기 이래의 여러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용어이다.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슈지치 셩녕을 잘ᄒᆞ고[好刺綉生活]”, 『정곡언해(正谷諺解)』 “공쟝이 셩녕을 브즈러니 ᄒᆞ면[工勤於技能則]”, 『신증유합(新增類合)』 “흘, 셩녕도(陶)” 등에서 보이듯이 대체로 생활이라든가 기능과 같은 한자어를 ‘셩녕’이라 대역하였다.

이미 15세기에 간행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공을 ‘셩녕바지’라 하였으므로 여기서 생활이나 기능과 같은 용어도 공장(工匠)의 하는 일에 포괄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셩녕’이라는 말은 조선 후기에 점차 소멸되어 일부 사투리 속에 흔적을 보일 뿐인데, 그것이 시대의 변모에 따른 공기(公技)의 변화를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우리 나라의 공기는 수공에 의존하여 왔다는 점이다. 20세기에 이르도록 기계화된 시설이 없이 간단한 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오로지 손을 놀려서 일하는 것, 즉 수공업의 형태를 벗어날 수 없는 단계가 지속되었다.

성녕이라는 옛말 속에 ‘생활한다’, ‘일한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함축되었듯이 일상적인 삶의 세간붙이를 장만하는 것이 곧 성녕이요 솜씨의 시작인 셈이다.

그러므로 초기 단계의 공기는 단순한 수공이요, 다분히 원시사회의 수공과 상통하는 점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점차 주업 이외의 작업으로 분리되고 나아가 전업적인 수공업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공기라는 것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인간 공통의 것일지라도 그 결과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각 민족이 살고 있는 고장의 풍토와 종교, 생활양식으로서의 의식주 및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자재의 조건에 따라 현격한 격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보가 어둡고 교통이 불편하였던 시대일수록 그 지역성 · 민족성은 한결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곧 민족예술이라 일컬어지는 문화의 양상이 그것이다. 민족예술은 소수의 특수층에서만 찾아지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고, 민중의 생활과 광범하게 밀착된 관계에서 그 기본 성격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바꾸어 말하면 그러한 관계일 때에 그 민족의 감각과 의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가 만든 것이냐 하는 문제보다는 그것을 누가 사용하느냐 하는 사용자의 소임에 대하여 민족예술에서 중요시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물론, 솜씨를 언급함에 있어서는 민족예술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그 풍토의 여건이 민중의 삶 속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그러면 한국인의 솜씨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풍토에서 우러난 것인지 의식주에 관한 문제부터 살펴보자.

주생활에 나타난 솜씨

주택의 경우, 한국인은 가장 흔하고 다루기 쉬우면서 야무진 목재인 소나무로 짓는 목조건물을 일찍부터 발달시켰다. 굳이 벽돌집을 지을 필요가 없었고 도리어 우리 산야의 조건으로서는 운송상의 불편이 더 컸을 것이다.

겨울에는 온돌을 데워 난방하고 여름에는 마루에서 시원하게 지냄으로써 필연적으로 평좌식(平坐式)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중국식의 벽로(壁爐)나 일본식의 이로리(실내 중앙의 화덕불)가 생겨나지 않았다.

한반도의 기후는 온돌 중심의 주거방식에 적당하게 건조한 편이어서 어느 민족이나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필수적 가구조차 갖추지 않았다. 즉, 침대와 의자가 발달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목침을 비롯한 베개가 다채롭게 발달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또한, 목조건물의 주거공간이 넓지 못한 까닭에 거기에 비치하는 각종 가구 역시 목제품 위주로 마련하였고, 자잘한 기물도 겉치레가 과다하지 않도록 자제하였다.

식생활에 나타난 솜씨

우리의 음식은 밥 · 국과 여러 가지 반찬을 갖추어서 먹는다. 그 음식 중에는 발효식품과 물기 있는 것이 적지 않은 까닭에 크고작은 그릇의 종류가 많고 대체로 뚜껑을 덮어 놓게 되어 있다. 더구나 제기(祭器)는 평소의 그릇붙이들과는 달라서 매우 오랜 옛 격식까지 갖추어 지켜지고 있다.

서양사람들의 식기가 오로지 접시와 컵뿐인데 비하면 동양, 특히 우리의 식기는 주발 · 대접 · 보시기 · 접시 · 종지 · 합 · 잔 · 주전자 · 병 · 푼주 · 양념항아리 등 각양각색이다.

고대에는 칠기(漆器)청동기를 귀하게 여겼고, 고려 이래로 도자기가 발달하면서 여름에는 사기그릇을 쓰고 겨울에는 놋그릇을 즐겨 사용하였다.

반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유기가 발달되지 않았다. 일본의 식기류는 칠기가 많은 데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 칠기는 불가(佛家)와 제기의 경우에만 한정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차나무가 귀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화강암 지대의 수질 좋고 계류(谿流)가 넉넉한 국토에서 숭늉 · 식혜 · 수정과 등을 일상음료수로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술을 잘 담그되 포도주 같은 것이 발달하지 못한 것도 그러한 퐁토성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식기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반(小盤)이다. 한국인은 평좌식인데다 1인1반제(一人一盤制)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어느 민족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독특한 발달을 한 것이다.

잔치 때의 대원반(大圓盤)에는 작은 곁상이 딸리고, 주안상에서 약반(藥盤)에 이르기까지 수반류(手盤類)도 여러 가지이다. 일반 밥상의 생김새도 서울을 중심한 기호지방의 것과 영남 · 호남 · 해서 · 관서지방의 것이 각기 다른 형태로 되어 있어서 우리 나라의 소반이야말로 목공예 연구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할 만하다.

의생활에 나타난 솜씨

의생활에서도 한국적인 제약은 마찬가지이다. 예로부터 서민의 주된 옷감은 삼베이며, 반대로 지배계층은 명주를 비롯한 비단을 입었다. 이 두 가지 옷감은 동양문명과 더불어 일찍부터 자생적으로 개발되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용맹한 기마민족인데다가 큰 산을 끼고 있는 우리 나라는 좋은 짐승을 사냥해서 가죽을 해외로 공무역(公貿易)할 정도였으므로 가죽이 방한복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물론,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처럼 양을 기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카펫은 짜지 않았지만 소털 같은 것을 압착한 담요류는 이미 신라 때부터 만들어졌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만 재배되는 모시목화는 고려 이후 성행되었지만 그들 직물의 성격상 대중적으로 보급할 옷감이 아니었다. 모시는 비단보다도 더 손이 가는 귀한 것이고, 무명은 쌀과 함께 조선시대의 화폐 구실을 하였던 만큼 비록 민간 제품일지라도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되는 관수품(官需品)에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옷감에는 신분상의 귀천이 따르게 마련이었고, 계절의 춥고 더운 것을 좇아 알맞은 옷감을 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쾌적한 직물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옷감 문제는 의생활 가운데 가장 기초적 재료 부분의 제품에 불과하거니와 나아가서 여러 가지 복식 및 장신구 또한 우리만의 독특한 특성을 나타낸다.

우선 치마 저고리 · 바지 저고리가 우리의 독특한 것이고, 망건의 유례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자급자족체제의 솜씨와 수련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그 풍토에서 우러나 시각상으로 나타나는 문화의 전부를 솜씨라고 할 것이다. 회화 · 조각 · 건축은 물론, 일상생활에 소용되는 도구와 기물, 심지어 바느질과 음식치레까지가 모두 솜씨에 속한다.

오늘날의 세분된 분류 방식에서는 다소 이론이 없지 않으나 옛날로 소급할수록 모두 솜씨의 테두리 안의 것이다. 옷을 지어 입는 것이나 음식을 차리는 것이나 손끝의 재간 아닌 것이 없다.

더구나 요즈음과 같이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는 때일수록 그 모든 것들이 각기 대등한 위치에서 대중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요한 구실을 맡아 하고 있다. 그동안 창작이다 순수다 하는 예술의 경우일수록 개성(個性)을 한층 우위에 놓고 평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순수창작품만이 개별적인 특성을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자체가 개별성을 띤 것이기 때문에 솜씨의 정도가 높은 것일수록 개성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우리 나라 전래의 사회처럼 폐쇄적인 농촌 구조에서는 솜씨가 차차 어느 한쪽으로 굳어지기 쉽다. 가령 초원을 내닫던 유목민족 시절이라면 훨씬 유동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였겠지만, 농업사회 속에 갇혀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하는 습관을 오래 지속하다 보면 개별화가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솜씨로써 표출된 내용 역시 지역적 · 개인적인 격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장맛을 보면 그 가문을 안다.’는 속담이 있다. 곧, 가정마다 독특한 장맛이 있고 그 장맛을 통하여 그 가정의 음식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음식에 있어서 은 단순히 간을 맞추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반찬의 맛을 내는 기본이 되기 때문에 장을 보관해 두는 장독대까지도 신성시하였다. 장독대는 햇빛이 잘 들고 정갈한 곳이어야 하고, 또 부정을 타면 안 되는 것으로 우리의 어머니들은 끔찍하게 여겨 왔다.

이러한 사고의 밑바닥에는 장에 대한 외경(畏敬)에 가까운 정성이 깔려 있으며, 그만큼 좋은 장맛을 내기가 까다롭고 조심스럽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메주를 띄워서 장을 담가 달일 때까지 일련의 발효 과정에서 자칫하면 변질되기 쉬운 까닭에 좋은 장맛은 주부의 긍지가 될 만하고 가문의 자부로 삼을만 하였던 것이다.

같은 발효식품인 김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장김치는 겨울 동안 반찬의 주축이기 때문에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김치 맛 역시 가정마다 조금씩 다른 데가 있고 재료와 보존법 또한 가정마다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대를 물리는 비전(秘傳)이 있었다.

굳이 남에게 숨기거나 하는 비법이 아니라 그 가정나름으로 오랜 기간 익숙해진 입맛이요 솜씨인 것이다. 그 밖에도 젓갈 · 식혜 · 술 등 발효식품이 다양한데, 그 모든 것들이 저마다 다를수록 진미로 여기며 현대의 공장화되는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것이 자랑거리가 된다.

생활방식과 생활경제가 자급자족의 형태로 영위되던 시대에는 이미 주어진 재료를 어떻게 선용하느냐 하는 점에 솜씨의 역량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억지로 꾸미려 해서 격차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순리로서 빚어지는 여건에 기인한다.

일정한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교재가 있어서 참고하였던 것도 아니다. 오로지 주위에서 보고 듣고 시키는 일을 해 내면서 익힌 솜씨일 따름이다.

눈을 팔다가 꾸지람을 듣고 혹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체득한 것, 말하자면 긴 역사를 통한 경험방(經驗方)이다. 물론 자체 개발 이외에도 외부로부터 들어온 요소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떠한 외래의 것이든 자기에게 알맞게 수용하는 지혜가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북방의 통로가 훤히 열렸던 고대에는 외부세계와의 물산 교역과 기술 도입이 쉬웠다. 그러나 고려 이후에는 현저하게 위축되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으로 제한된 여건 속에서, 부족한 대로 삶을 영위하는 지혜는 자연스럽게 터득된 것일는지 모른다.

가령, 산간 화전민들은 벼농사도 안 되고 집 지을 연장조차 신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틀집에 너와지붕을 얹었다. 또, 화전민들은 먼 거리에서 옹기독을 사올 수 없기 때문에 피나무독과 채독으로써 저장용기를 삼았다.

우리 나라는 벼농사 중심의 농본국(農本國)이어서 초가가 발달하였고, 제주도에서는 볏짚을 얻기 어려워 띠풀로 지붕을 이었다. 만약 우리 나라에 도자기의 태토(胎土)가 마땅하지 못해서 청자 · 백자가 구워지지 않았더라면 유리제품이 훨씬 발달하였을 것이다.

분명히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유리를 다루는 기술이 도입되어 있었는데 그 뒤 자취를 감추어 버린 이유가 어디 있을까? 우리 나라에서도 중국과 같은 진귀한 옥(玉)이 산출되었더라면 그 동안 옥공예를 다채롭게 전개시킬 구실이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국외로부터의 수입품에 의존하여야 하는 처지여서 도리어 엄격한 규제품목으로 묶여 있었다. 반대로 고대에는 중요 수출품목에 들어 있던 금 · 은이 뒷날에는 수탈 대상 제1호로 변하여 수난을 가중시킨 까닭에 아예 정책적으로 채금(採金)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고대에 탁월하였던 금세공(金細工) 기술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보잘것없이 몰락해 버렸다. 빈번히 외침을 당하였던 지난 1,000년간 한국인은 극심한 곤경을 견디어 냈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쫓겨가 있으면서 『대장경(大藏經)』을 새겨 찍어내는 대역사를 벌인 것은 예외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어려운 고비마다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끈기가 있었다.

가령 한국인에게 가장 요긴한 무기의 하나인 각궁(角弓)은, 그 재료로 물소뿔[黑角]이 쓰이는데, 이것은 동남아로부터의 수입품이었다. 각궁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발달되지 않은 북방민족 특유의 제품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므로 활에 필요한 황소를 기르느라 고심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보인다.

이른바 백각궁(白角弓)이라 하여 해서지방의 특산으로 지목되었던 산물이다. 또,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화백자(靑華白磁)에 필요한 회청안료(回靑顔料)를 얻기 어려워지자 주로 국내에서 쉽게 얻어지는 철사(鐵砂)를 가지고 백자에 그림을 그려 좋은 성과를 보았다.

물론, 회청만큼 고운 선이 그어지지 않았지만 철화가 가지는 독특한 회화적 운치를 살려 낸 수작들이 적지 않다. 조선 후기의 백자가 청나라의 울긋불긋한 극채색 자기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러한 자제와 주체의식의 발현으로 해석된다.

도자기뿐만 아니라 칠기에 있어도 매우 호화로운 중국의 척홍(剔紅)을 왕실에서조차 가져다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민족의 독자성을 상실하거나 뒤바꾸는 일은 결코 없었다.

넉넉할 때는 넉넉하게, 귀할 때는 아끼거나 대체하여 활용하는 솜씨가 대견하였고 전통을 연면히 이어 격식을 지켜 왔다. 곧, 단일민족으로서의 단일문화를 지켜 왔음은 한국인의 독자적 문화의식이요, 조형감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귀족적인 솜씨와 대중적인 솜씨

한국인의 솜씨는 동아문화권(東亞文化圈)을 형성하는 중국 및 일본과 분리하여 생각하기에는 곤란한 상호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부터 중국의 선진문화가 우리 나라와 일본으로 확산되었고, 학문과 종교를 비롯하여 여러 방면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문화권을 이룩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나라는 민족이 다르고 풍토가 다르며 역사가 달라서 민족문화가 서로 대조적인 방향으로 유도되어 왔다. 대국적인 관점에서는 세 나라가 다른 지역문화권보다 공통성이 많고 또 높은 심미적 성격을 띤 것이 사실이지만 실생활을 통하여 이루어 놓은 양상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중국에서 일어난 유교문화는 오히려 우리 나라에 더 짙게 남아 있고, 고대 한국문화의 잔영은 일본에서 찾아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다수민족의 복합문화에 견주어 본다면 우리 나라와 일본은 변화가 적고 선이 가늘다.

“중국인은 유연하나 강인하고, 일본인은 치밀하고 절제적인 데 비하여, 한국인은 약간 경쾌하다.”고 지적한 문화사가(文化史家)가 있다. 중국문화는 규모의 크기와 과장으로 인하여 장중한 편이고, 일본문화는 다분히 직선적 · 근시안적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문화는 다소 성글지만 구수하고 인정미가 있다. 한국인이 만들어 낸 미술품은 눈앞에 바싹 다가 놓고 완상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전체에 어우러지는 분위기로 접하는 편이 운치가 있다.

이것을 일컬어 ‘자연스럽다’ 혹은 ‘소박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솜씨는 지나치게 무겁거나 깔끔하게 다듬어진 것이 아니다. 다소는 미흡한 것이 어설프지 않게 수용된 데 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미술사에서 아름다움을 예시할 때 신라시대의 석굴암과 다보탑의 구조미, 고려시대 청자매병의 귀족성, 그리고 조선시대 백자항아리의 넉넉하고 담박함을 든다.

이들 예시에는 언뜻 상반된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단지 시대적 흐름을 단적으로 표상한 지적일 따름이며, 한국미술사 전체의 맥락에서 세부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한 테두리 안에 놓고 보면 모두 서로 관련된 한국적 조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어느 시대에는 어느 분야가 도입되거나 한껏 발전되었다든지, 혹은 대중사회 속에 토착화되거나 쇠퇴과정을 겪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한국미술의 본질적인 조형감각에 변화를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다보탑이나 청자매병 · 백자항아리의 조형은 사실 고도로 세련된 미술품으로서 한국미의 본보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석조(石造) 미술품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 시대의 뛰어난 지혜들이 특별히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여 역량을 발휘한 종합예술품이다.

이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 참여하였다기보다는 극소수의 정예 기술자가 종합적인 지혜를 구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을 다루는 석공(石工)만이 아니라 조각을 위한 기본적 데생력, 건축을 위한 구조역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종교적으로 필수적인 의궤(儀軌) 등에 자상한 도편수(都片手)가 있어 지휘, 감독하였을 것이다.

일본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 담징(曇徵)은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다. 종이도 뜨고 붓을 만들고 먹과 채색까지 자작한, 일괄 공정에 두루 능통한 고도의 솜씨를 갖추고 있었다.

백제의 박사 왕인(王仁) 역시 제지(製紙)기술이 상당하였다고 하며, 아마 황룡사(皇龍寺) 벽화를 그린 솔거(率居)도 그러하였는지 모른다. 고대에 있어서 고도의 솜씨는 그 시대의 지혜의 정상이요 총체였다.

울산의 선사시대 암각화를 보면, 정확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력이 감탄스럽다. 불충분한 연장으로 두드려 쪼아서 물고기와 짐승, 그리고 춤추는 사람 등을 능숙하게 처리한 솜씨에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청동기시대의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역시 터럭같이 가는 줄무늬를 주조한 솜씨가 신비한 경지를 자아낸다.

고대문명에 소급할수록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신비 속의 수수께끼가 산견되는데, 그것은 눈에 드러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지혜를 도외시한 데에서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을 펼쳐 내는 지혜가 무한하듯이, 고대의 기술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그런대로 풍요로웠던 당시 생활의 슬기가 조그마한 기술의 암시를 통하여 간단히 해명될 수도 있다.

고대사회에서 상당한 기술에 속하는 것은 소수인만이 주도하였을 것이고, 그 제품을 누리는 사용자도 특별한 소수 계층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분화되고 또 새 기술이 도입됨에 따라 특정한 솜씨의 독점이 무너진다. 기술 전문집단이 뚜렷이 두각을 드러내 보이는 『삼국사기』 잡지(雜志) 직관조(職官條)에서는 기술 내용의 제시가 그다지 명백하지 않다.

그런데 『고려사』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지적이 나타나고, 조선시대 경공장(京工匠)에 이르러서는 국가적으로 중요시하는 수공업의 거의 전부를 세분하여 나열하였다. 금석 · 도자 · 옥석 · 목칠 · 모피 · 염색 · 인쇄 · 무구 · 건축 등 각 분야에 걸쳐 129종에 이르는데, 내부적으로는 기술상의 차등도 있었을 것이다.

경공장에 명시된 석공은 통일신라 이전의 석공처럼 사회적인 대우를 못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일의 범위도 건축상 부수 작업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미 고려시대에는 석조미술의 쇠퇴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배계급들은 비록 전대부터의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하더라도 과거처럼 돌부처 · 돌탑을 깎기보다는 불화(佛畫)불경(佛經) 제작에 더 열성을 보였다. 그 대신 돌부처와 돌탑은 현저히 대중화현상을 띠어 의궤에 엄격하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천진스러움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고려청자도 애초에는 귀족들을 위한 특수공예로서 각광을 받았다. 과거 귀족들의 식기류는 서민용의 토기 · 목기와는 달리 금은기 · 칠기 · 청동기에 의존하였는데, 새로운 청자의 출현은 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2세기를 전성기로 하여 불가피하게 쇠퇴과정을 걸었고,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백자도 초기에는 귀족 위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으나 도자기술의 보편화에 따라 곧 대중문화화되었다. 분원(分院)과 무수한 지방 가마는 시차는 있었지만 대중 속에 무르익은 생활감정과 미적 안목을 스스럼없이 표출한 것이다.

물론, 솜씨는 소수 귀족계층을 위주로 하는 것과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된 것이 있다. 시대와 지역사회의 여건으로 미루어 전자는 대개 고답적인 것이 되고, 후자는 자연히 저급한 것에 속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대중화됨으로써 일단 기본적인 생활용구로 정착된 뒤에는 반드시 저급한 것으로만 쇠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부득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 이상 시대적 변모는 덜하게 되며, 도리어 도식화된다든지 혹은 가식없는 조형양식에 안주하게 된다.

건축의 경우, 사찰 건물은 신라 · 고려 · 조선시대에 걸쳐 결구상(結構上) 거의 변화가 없으며 단지 세부의 첨삭이 있었을 따름이다. 도구나 민가는 20세기에 이르도록 답습 상태를 지속해 왔다.

마찬가지로 그 집안에 놓이는 민구(民具)의 경우에도 오랜 기간 가장 쓸모 있게 활용되던 수장가구인 궤와 고리가 드물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수장구의 내력을 더듬어 보면 맨 처음 고리에서 · 반닫이 · 장롱의 형태로 차차 발전하여 왔는데, 그러한 여러 가지 수장구들이 그때그때 새 가구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함께 병존하면서 서로 보완 작용을 하게 된다.

재량 많은 한민족의 솜씨

한반도에는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중앙아시아로부터 말을 타고 초원을 질러서 동쪽으로 옮아온 탁월한 솜씨의 자취가 역연하다. 이때 청동기는 중국 은(殷) · 주(周)시대의 중국 유물과는 다른 북방민족 특유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출토된 개개 유물들의 규모나 수량은 얼마 안 되는 것일지라도 정교한 만듦새와 조형감각이 훌륭하고 또 원류를 더듬어 밝히는 데 손색이 없다. 다뉴세문경을 비롯하여 검파모양의 청동기, 농경문동기(農耕文銅器), 호랑이 혹은 말모양의 혁대고리 등이 다 그러한 예의 유물들이다.

한대(漢代) 이후 철기문화와 더불어 유입된 중국 문명의 영향으로 이른바 고분시대를 형성하고 고분벽화라는 색다른 채색화의 솜씨를 남겼다. 크게 변혁된 문화의 양상을 보이는 이들 벽화는 한(漢) · 당(唐) 벽화의 영향이 짙고 그 중에도 고구려 것이 더 그러하다.

회벽 위에 채색그림을 그리는 이 벽화의 유습은 고려시대까지 계승되었으나 조선시대 고분에서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다.

고려 고분벽화는 고구려 벽화만큼 다채롭지 못하거니와, 같은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 지역의 고분벽화 역시 훨씬 간략화되어 고작 수호신상 같은 핵심 주제를 그렸을 뿐이다.

그런데 한 · 당문화와의 접촉이 현저히 확인되는 삼국시대 고분은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기조, 즉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솜씨에 있어서는 이른바 북방식이라 일컫는 비중국적인 묘제를 전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8세기에 있었던 한 사건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신라 전성기의 경덕왕은 도성내 여러 관서의 이름을 당제(唐制)대로 고쳤는데 다음 혜공왕 때에 종전대로 환원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그에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아마도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이 거세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선진문화를 수용하되 자기 본연의 체통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각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이 가진 솜씨 내지 문화의 독자성에 대해서는 삼국시대의 장신구와 토기 등에서 한층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금관의 일반적 입식(笠飾)조우관(鳥羽冠)이나 수지관(樹枝冠)은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유물에서 유형이 발견되는데, 신라와 백제 · 고구려에서는 그러한 원시적인 관형식을 재치있게 도안화하여 독자적인 형태로 가다듬어 냈다.

귀고리와 목걸이 또는 허리띠 수식(垂飾) 또한 독자적인 형태를 나타내며, 특히 곱은옥[曲玉]은 우리 나라에서 자생한 것이 아닌가 하여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옥이 귀하기 때문에 비취에 한하지 않고 마노 · 벽옥 · 수정 · 유리 · 곱돌 등 다양한 돌붙이를 이용하여 만든 것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패물로서만이 아니라 벽사(辟邪)나 기원(祈願)의 주술적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기 좋은 패물로서의 기능이라면 원두곡미(圓頭曲尾)의 모양으로 다듬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도 그 곱은옥들은 어떠한 틀에 박힌 형식에 얽매였던 것은 아닌 듯하며, 어떠한 것은 반달에 가깝고 또 어떠한 것은 등에 혹을 붙여 만들기도 하였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솜씨를 언급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분야는 불교미술이다. 불교미술품은 화재와 기타 재난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긴 세월의 시련을 감내할 수 있는 자재의 유물만이 유존할 따름이다. 이러한 현존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석탑이다.

그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조형품으로서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 왔다. 또한 전국에 현존하는 1,000여기의 탑 가운데 99%가 석조 유물이다. 그러나 불교가 처음 전래한 4세기 후반부터 약 200년간에 세워진 탑은 유존하는 것이 없다. 그 무렵에는 중국의 다층누각(多層樓閣)형식을 본떠 목탑을 세웠는데, 거듭된 여러 가지 재난 때문에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양질의 화강석이 얼마든지 있는 우리 나라의 자연조건에 착안하여 독자적으로 개발한 양식이 석탑이다.

또, 신라에서는 초기에 중국식 전탑(塼塔)을 그대로 도입해 보았으나 역시 와질(瓦質)이 풍우에 시달려 허물어지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멀지 않아 석탑으로 개체하였다.

석탑은 처음에는 목조건축을 하듯 판석을 여러 조각 모아 붙여서 축조하였는데, 그 표본적 유적이 익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이다. 그러한 방식은 목탑의 날렵한 감각을 유지시키는 데는 그런대로 알맞은 공법이지만 아무래도 도괴의 우려와 복원 작업상의 난점 때문에 아예 커다란 돌덩이로 견고하게 조성하는 풍조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신라 정형의 삼층석탑 양식은 이미 목탑이나 전탑이 지닌 다층누각의 조형이 아니다. 오로지 인멸 안 되는 신앙물을 조성해 놓으려는 의도에 치우쳐 단조롭게 도식화된 것이다.

신라 동종(銅鐘)은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한국종의 특색을 이룩한 또 다른 하나의 예가 된다. 8세기에 주조된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鐘)이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이전에 어떠한 동종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현존하는 유물로서는 어떻게 그러한 양식이 갑자기 유행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범종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멀리 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고, 고대 악기라는 관점에서는 당대(唐代) 종과 동일한 계통에서 성형된 것이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치는 한국종은 형태 · 음향 · 장식의장 등에 일대 혁신을 가한 것이다.

구리에다 주로 석(錫)을 합금하면서 금은을 다소 첨가한 점이라든가, 구연부의 입술이 턱지지 않도록 넓히는 대신 종신의 어깨를 얇게 하여 공명의 효과를 높이고 용통(甬筒)으로 반향의 숨통을 뚫어 놓았다.

당좌(撞座)는 장식성 이전에 타종의 정확한 위치를 지시하기 위한 것이고, 유곽(乳廓)은 자칫 취약하기 쉬운 어깨 부분의 보강대(補强帶)로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종은 시각적인 조형물이기 전에 악기로서의 기능이 소중하고 거기에 아로새긴 무늬들은 장식을 겸하여 부수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앞서 예시한 신라 전성기의 종들은 첨성대의 그것처럼 아담하고 선도 곱다.

이때의 솜씨는 확실히 질을 존중하는 문화적 소산으로, 양산하는 문화 이전의 단계이다. 흔히 소수 귀족층 위주의 제품이라든가 일정한 의궤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는 종교적 기물들은 규범과 선례 때문에 자유로운 창의가 잘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앞의 것에 준하여 모방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자칫 선례에 미치지 못하는 조잡한 것을 만들거나 형식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고려 후기의 동종이 신라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종이 지닌 합리적인 이치를 무시하고 형식만 따른 데서 생기는 어설픔 때문이다.

고려 석탑이 삼국시대 석탑만큼 단정하지도 수려하지도 못한 것은 허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때 원대(元代) 석탑의 영향 등 다층의 이형석탑(異形石塔)들이 세워지지만 한결같이 생동감을 못 주는 모방에서 정체되고 말았다. 솜씨가 빛나는 성과를 거두는 것은 이치에 맞게 발전되고 변혁이 인정되는 시기이다.

엄격한 규범과 금제(禁制)에 사로잡히지 않고 개별성이 존중되는 여건 속에서 비로소 좋은 솜씨가 재량껏 펼쳐지게 된다. 한국인의 솜씨, 나아가서는 한국문화의 풍토가 중국이나 일본처럼 위압적이거나 직선적이지 않은 것은 단일민족에 의한 단일국가가 오래 지속되어 온 점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며, 그래서 정치적 지배자와 사회적 지도계층들의 생각에 상당히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끝없는 사치심과 과분한 욕심에서는 결코 한국의 선비문화와 같은 아량과 대범함이 생겨날 수 없는 일이다. 고려의 청자와 나전칠기(螺鈿漆器) 혹은 금은세공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석구석에 허술함이 감추어져 있다. 빈틈없고 경직된 상태의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틀만 지켜지고 상당히 융통성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나라 악기들을 보면 더욱 그러한 융통성을 느끼게 한다. 가야금 · 거문고의 왼손법, 즉 떨리는 소리, 구르는 소리, 휘어내리는 소리 등 현(絃)의 놀림이 탄주자의 역량에 맡겨져 있고, 퉁소 · 젓대 · 당소 · 피리 같은 것도 역시 부는 사람의 솜씨가 크게 작용한다.

그것이 바로 동양 악기의 맺고 푸는 묘미이지만 특히 우리 나라의 악기는 중국과 일본의 리듬보다도 표현이 짙고 굵어서 예술적 감흥이 크다.

조선시대의 솜씨가 앞시대보다 더 너그럽고 잔꾀 없이 소박하다고 여기는 것은 선비문화의 구체적인 발현에 기인한다. 선비는 학덕을 쌓아 일반대중 속에서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해 온 한국사회 특유의 정신적 · 실천적 지도층이다. 흔히 선비정신 · 선비기질이라는 말로 통하듯이 그들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바로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념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사회를 움직이는 지식인으로서 모범이며 실천자인 선비의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계승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다만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이 조선시대에 결정적으로 확립되었을 따름이다.

본래 선비는 제정일치시대의 지배층에 속하였으나, 뒷날에는 점차 향촌의 서민들 사이에 묻혀 민족의 가치관으로 돋보였고, 때로는 민중의 편에 서서 불의와 맞서 싸우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청빈하되 비굴함이 없어야 했고, 그러한 생활철학이 실생활의 주거공간이나 가재집기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미술, 특히 공예를 설명할 때 가식 없는 소박함을 먼저 지적하는 연유는 바로 그 저변에 선비정신의 미관(美觀)을 깔고 우러나는 것임을 전제한 말이다. 그러한 미적 감각은 소신이 분명하고 격조 높은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러한 안목으로 의장(意匠)된 조선시대의 세간들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감각에도 여유있게 잘 어울리는 것이다.

전통적인 솜씨의 단절문제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한 경공장(京工匠)과 지방관청에 예속된 외공장(外工匠)이 있어 국가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직접 충당하였다. 이밖에도 각 지방으로부터 공물로 거두어들이는 물산이 있으므로 경공장 · 외공장만이 기술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들 장인이 비교적 높은 기능을 가진 전문적 기술집단의 총체임에는 틀림없다.

그중 중요한 직종은 경공장에 속해 있어서 129종이나 되고, 외공장의 경우에는 거의 경공장과 중복되는 27종에 한하였다. 15세기에 조선왕조가 『경국대전』을 반포할 당초에는 그 총인원이 3,511인으로 명시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는 4,450인으로 증원되었고, 19세기 말 고종 때에는 5,411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조선시대 말기는 공장(工匠)의 관리체제가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문란한 시기여서, 증원된 숫자가 바로 그 집단의 확대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사회사상과 경제가 국민 전체에게 검소함을 숭상하도록 조장하였던 것도 기술이 그 이상 혁신되지 못하도록 막았던 한 이유가 된다.

조선왕조 500년간 장인의 숫자에는 다소 증폭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폐쇄적인 사회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북학의(北學議)』에서 지나친 검소 풍조가 국력 내지 산업을 쇠퇴시켰다고 개탄하였다.

즉,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지 않으므로 비단 짜는 기계가 없어지고 여공(女功)도 쇠하여졌으며, 풍악을 숭상하지 않으므로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이 고르지 못하다. 물이 새어드는 선박을 타고, 물에 씻지 않은 말을 타며, 삐뚤어진 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먼지가 풀썩거리는 방에 거처하므로 공장과 목축과 옹기장수의 일이 망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조선시대의 유교적 윤리관은 사대부 중심의 철저한 신분사회를 구현한 까닭에 상대적으로 장인들은 사회적 신분이 한층 격하되는 결과가 되었다. 장인들은 관부에 종신토록 예속되는 처지여서 자신의 수준이나 작업량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함은 물론 그들의 기술 자체에 열등의식이 잠재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에는 좋은 솜씨일수록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중요 직종에 한하여 그나마 벼슬이 주어졌으나, 조선시대에는 아무런 대우도, 자유로운 활동도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솜씨 그 자체보다는 장인이라는 신분상의 천시, 아무리 일해도 부를 누릴 수 없는 한계, 새로이 대두된 서구 문물에 대한 동경, 이러한 여건을 뛰어넘기 위하여 개화 이후 맨 먼저 일대 탈바꿈을 시도한 계층이 바로 장인들이었다.

우선 장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은폐하고 새 출발하기 위하여 종래 일하던 고장으로부터 탈출하였고, 이제까지 종사해 온 기술을 지속하거나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며, 가능한 한 낯선 땅에서 새 직업을 찾았다.

왕조의 몰락과 일본의 통치, 그리고 광복과 6·25 등 거듭되는 역사의 소용돌이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산업기술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요인이 되었다. 음식이나 바느질 같은 가정 안의 일반적인 솜씨는 그런대로 이어지고 있지만, 남성의 전업적인 솜씨는 단절된 것이 많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조차 수공예의 기능으로서는 소멸 직전의 상태에 있다.

이러한 전통의 단절 현상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너무 판이하며, 그로 말미암아 한국문화의 저변을 밝히려는 기초연구에도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이 문제에 관하여 미온적이며 근래 관심의 표명이 조금씩 나타날 뿐이다. 물론 전통이라고 해서 불변의 것일 수 없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기술이다.

그러나 전래의 솜씨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할 때 문화창조의 기반이 허약해짐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한국기술사의 여러 분야에 생긴 공백도 채울 길이 없게 된다. 아무리 기계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손의 가공 능력이 가진 미묘한 변화를 외면할 수 없는 일이므로 솜씨에 대한 좀더 인간적인 접근을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희구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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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6)
『한국의 목공예』(이종석, 열화당,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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