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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陵園)

건축개념용어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과 왕세자·왕세자비 및 왕의 사친의 무덤인 ‘원’을 함께 일컫는 왕족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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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 중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 숭릉 전경
분야
건축
유형
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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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과 왕세자·왕세자비 및 왕의 사친의 무덤인 ‘원’을 함께 일컫는 왕족의 무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지위에 따라 장례의식 절차는 물론, 조성시설과 규모도 각기 달랐으나 능과 원은 모두 국휼(國恤)주 01)로 불리어도 큰 차이가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능원제도는 『사기』 정의인괄지지(正義引括地志)에 보면 이미 중국의 하대(夏代) 우왕 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초기에 석총(石塚)을 많이 썼는데, 특히 냇돌이 흔한 강가에서는 적석총(積石塚)을 많이 볼 수 있다. 땅 위에 냇돌을 방형(方形)으로 깔아 그 중심부에 머리를 동쪽으로 두도록[東枕] 목관을 놓고, 그 위에 단을 두면서 냇돌을 덮는다. 이것은 관대(棺臺)의 위치가 지표에서 올라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방형의 계단식 적석총으로서 가장 발달된 것이 장군총(將軍塚)이라고 불리는 광개토왕릉과 태왕릉(太王陵)이다. 장군총은 만주 집안현 통구지방(通溝地方)에 있는 큰 석총으로 잘 다듬은 화강석을 7단으로 쌓아 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한 변이 약 30m, 높이가 13.5m로 네 귀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제1단 각 변에는 봉토분(封土墳)의 호석(護石)과도 연관되는 자연석의 호석을 3개씩 세워놓고, 제3단의 상면을 바닥으로 한 방형의 석실에는 2개의 관대를 놓았으며 그 앞에는 연도(羨道)가 있다. 여기서 약 1㎞ 떨어진 곳에 광개토왕비가 있다. 이 능 앞에는 사당이 있었던 것 같은데 1946년 경주 호우총(壺杅塚)에서 발견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 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 好太王壺杅十)’이라고 쓰여 있는 명(銘)의 청동합(靑銅盒)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이 왕릉 서남쪽에 있는 태왕릉이나 통구평야 서쪽 끝에 있는 천추총(千秋塚)도 이와 비슷한 형식의 피라미드형 석총이며, 특히 태왕릉에서는 냇돌을 깐 묘역 주위에 낮은 흙담이 둘러져 있고 정면에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어 그 당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능의 형식으로 생각된다.
그 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구려의 봉토벽화고분, 즉 토총(土塚)은 중국의 봉토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고구려에 귀화하였다가 357년에 사망한 중국 장수의 무덤인 동수묘(冬壽墓, 안악제3호고분)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효시로, 남북으로 전실(前室)과 후실(後室)을 연결하고 전실 양측에는 작은 측실(側室)을 두고 있어, 지하궁전의 조성이라고 하는 중국 분묘제도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고 그 꾸밈이 왕릉에 버금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구려 고분의 특징인 모줄임천장[抹角藻井]을 사용하여 건축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고구려 봉토벽화고분은 그 발전 과정을 전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 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기에는 전실 양옆에 측실을 갖는 T자형의 평면을 가지게 되고, 중기에는 전실·후실로 간소화되며, 후기에는 단실의 현실(玄室, 後室)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 고분들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전혀 알 수 없어 능으로서의 자료로는 미흡한 감이 있다.
그러나 벽화고분은 석재로 조적(組積)한 지하구조로서 우리 나라 토목건축사상 중요할 뿐 아니라, 또 벽화에는 그 당시 쓰던 목조건축의 구조 일부가 나타나고 있어 건축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제 초기의 분묘는 서울 근교에서 발견되는 적석총과 일반 봉토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봉토분은 봉토 속에 석실을 만든 석실총과 토축으로 꾸민 토광묘(土壙墓)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상통하며, 『삼국사기』 개로왕조에 “욱리하에서 큰 돌을 취하여 곽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묻었다(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라고 한 것과 비교되는 고분이어서 왕릉일 것으로 추측되는 형식이다. 특히, 석실봉토분은 현실과 연도를 돌로 쌓아 만들고 그 위에 봉토를 한 것이다.
공주시대의 고분으로는 석실묘와 전축분을 들 수 있다. 석실묘는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 부근에 있으며 현실의 평면은 각 변이 밖으로 약간씩 불룩하게 된 방형으로 남쪽 벽 동편에 치우쳐서 연도가 놓였다. 네 벽은 활석으로 쌓아올리다가 점차 안쪽으로 경사를 이루어 원형의 돔(dome)을 이루고 있고 그 표면에는 회를 발랐다.
같은 시대의 전축분은 중국의 남조(南朝)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이며 무령왕릉과 송산리6호분은 좋은 예이다. 이들은 조적방식이 비슷한 능으로 다같이 구릉을 파서 만들었으며 연화문(蓮花文)의 문양전을 써서 현실과 연도를 볼트식(volt式)으로 쌓았다. 그러나 6호분은 전벽 표면에 회를 발라 사신도(四神圖)를 그린 벽화고분이었음이 특이하다. 현실과 연도는 그 너비와 높이가 다르게, 즉 연도를 훨씬 작게 쌓았는데 연도는 역시 남쪽으로 나와 있고, 현실 안벽에는 북·동·서쪽에 등감(燈龕)이 있었는데 북벽에는 1개, 동벽·서벽에는 2개씩 있었고, 실제로 불을 붙였던 흔적과 단청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이 밑에는 전돌 모서리를 세모나게 깎아서 세워 붙박이창을 묘사한 창호가 한 군데씩 있었다.
바닥 북쪽으로는 시상대(屍床臺)를 약간 높여서 평평히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전을 깔았다. 머리는 연도 쪽을 향하여 남으로 두고 있으며 동쪽에는 왕, 서쪽에는 왕비가 안치되어 있었다. 또, 목관은 밤나무로 두께 6㎝ 정도로 짜 옻칠을 하였고 꽃무늬 원형머리를 한 관못이 여러 개 나왔다. 연도 중간쯤에는 진묘수(鎭墓獸)가 놓였고 그 밖에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전축분의 축조방법은 전돌의 길고 짧은 마구리에 연화문을 돋을새김하여 가로 뉘어서 3, 4단을 쌓고 세워서 1단을 쌓는 작업을 번갈아 하였고, 횡으로 보아 밑에서부터 안으로 약간씩 경사지게 쌓아올리다가 천장 부분에 가까워지면서는 홍예형(아치형)으로 마무리하였다. 또, 전축 밖에는 강회를 섞어 쌓은 봉토를 마련하였으며, 특히 무령왕릉에서는 남쪽 경사면에 호석을 쌓고 전실에서부터 밑으로 배수가 되도록 하고 배수로는 전돌을 써서 암거식(暗渠式)주 02)으로 시설하였다.
신라시대의 능으로서는 경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을 대표로 들 수 있는데, 금관이나 기타 장신구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왕릉으로 인정된다. 이들은 초기에는 평지에 봉토분으로 조성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가까이 오면서 점차 주위의 구릉지대로 옮겨지게 된다.
1973년과 1974년에 발굴되어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된 경주 155호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동 98호 남분·북분은 비천마(飛天馬)를 그린 말다래[障泥 : 말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린 도구], 금관 등 왕이 쓰던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왕릉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천마총은 봉분의 지름이 47m, 높이 12.7m의 적석목곽분으로, 발굴 뒤에 알려진 지하구조는 지표에 약 30㎝ 두께로 점토를 깔고 그 위에 냇돌을 얇게 깐 뒤 시상대를 만들어 목관과 부장품 궤(櫃)를 안치한 뒤에 주위를 냇돌로 반듯하게 쌓았다. 그 위로 목곽(4.2×6.6×2.1m)을 짜앉히고 목곽 위로는 지표에서 높이 7.5m 되는 규모가 되도록 냇돌 무더기를 덮고 다시 봉토를 올렸다. 황남동 98호 남분·북분도 이와 같은 구조형식의 적석목곽분이다.
이러한 능의 형태는 7세기에 와서 전통이 바뀌기 시작하여, 문무왕의 능은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묻은 대왕암이라고 하는 해중릉(海中陵)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고신라시대의 왕릉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16기가 있고, 또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수중릉까지 13기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름이 붙은 왕릉이라 하여도 실제 그 왕들의 능이라고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초기의 왕릉들은 봉토 기부(基部)에 쌓은 호석이 대개는 자연석으로 봉토 속에 보이지 않게 쌓았는데, 이는 봉토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토목공사의 시초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왕릉으로서 최초인 무열왕릉은 봉토 주위에 자연석을 띄엄띄엄 세워놓고 있어 봉분 밖으로 호석이 노출되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고구려 장군총과도 비교된다.
이러한 자연석의 호석은 발전되면서 점차 가공석을 단을 지어 두르게 되고 다시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새긴 판석을 두르고 석난간을 두르게 되며, 이러한 것이 고려를 거쳐 조선에까지 계승되는 것이다.
즉, 신문왕의 능에서는 봉토의 하부 주위에 다듬은 장대석을 4단으로 축조하고 같은 간격을 두어 버팀기둥을 세우고 있다. 그보다 반세기 뒤인 성덕왕의 능에는 봉토 주위에 판석으로 호석을 세워 갑석(甲石)을 얹고 판석을 탱주(撑柱)로 고정시켰으며, 탱주는 다시 버팀주로 받치고 호석 앞에 원형 조각의 십이지상을 세웠으며, 다시 그 밖으로 석주를 여러 개 세워서 석난간을 만들고 있다.
또한, 봉토 정면에는 면석(面石)에 안상(眼象)을 새긴 상석(床石)을 놓았으며 능 네 귀에는 석사자를, 전방에는 문석인·무석인을 세웠다. 이러한 형식은 우리나라 봉토 왕릉 중에서 석인(石人)이나 석수(石獸)를 능 앞에 배치한 최초의 예이다. 거리를 두고 석비를 두었었으나 현재는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원성왕릉이라 추측되는 괘릉(掛陵)은 이러한 능의 형식이 가장 잘 갖추어진 예의 하나로, 봉토 주위에는 판석과 탱주를 맞추어 세운 호석이 있고 이 탱주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상을 돋을새김하였다. 호석 주위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그 사이에는 판석을 깔고 있다. 전면에는 상석, 훨씬 전방에는 석수와 문무석을 배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열은 중국 당나라 고종의 능인 건릉(乾陵)과 그 전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통일신라기 왕릉은 그 내부구조를 정식으로 발굴한 것이 없어 보고된 바 없으나,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전(傳)신덕왕릉의 내부가 도굴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능의 석실은 남쪽에 연도가 있고 각 변이 3m의 정방형이며, 벽은 수직으로 쌓아올리다가 위쪽에서 점점 좁아진 천장을 개석 한장으로 덮어 전면에 석회를 칠하였으며 연도 문 앞에는 판석문 2매가 세워져 있다.
내부에는 네 벽면에서 약간씩 떨어져 높이 35㎝ 정도의 시상대가 마련되고 그 바닥에는 판석 시상 2개가 거리를 두고 동서로 놓여 있다. 북쪽 벽과 동·서벽 일부에 병풍을 그린 듯한 긋기칠이 있으며 주(朱)·황(黃)·감청색 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통일신라기의 왕릉은 남향 석실봉토분으로, 외부에는 재래식으로 자연석을 두르거나 호석 및 십이지상을 두르고 능 앞에는 몇 개의 단으로 경사면을 만들고 석수·석인 등을 배열하였다.
고려의 왕릉은 개성 부근 산악지대에 분포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능의 소재가 확실한 것은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을 비롯한 19릉이다. 고려의 왕릉은 몽고의 침입과 도굴 및 조선시대의 개축 등을 거치면서 원형이 많이 변하였으나, 현릉·소릉과 칠릉군(七陵群)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고 믿어진다.
이들은 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아 좌청룡 우백호의 산맥이 능 뒤에서부터 좌우로 뻗어내리고 물은 능의 서쪽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지세를 택하여 소위 풍수도참사상에 의한 명당자리를 선택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중시된다.
능역은 남북으로 긴(18×36m) 장방형 구역에 돌담은 동·서·북 3면으로 두르고 능 앞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네 개의 층을 두고 단이 낮아져 최상단에는 능과 석상·망주석(望柱石), 제2단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사이에 두고 문석인을 세웠으며, 제3단에는 무석인을, 제4단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능비(陵碑)를 세웠다. 능의 봉분 높이는 3∼5m, 지름은 6∼9m 정도로 그 하부는 신라 왕릉에서처럼 면석과 십이지상의 호석을 둘렀고 그 밖으로 돌난간과 석수가 배치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의 능인 현릉(玄陵)과 노국공주의 능인 정릉(正陵)은 동서로 긴 장방형 구역에 서쪽에는 현릉, 동쪽에는 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두 능에는 십이지상과 호석·돌난간이 각각 둘려져 있고 그 안 모퉁이에 석호(石虎)가 놓이고 능과 능 사이 앞뒤로 석양(石羊), 능 앞 좌우에는 망주석이 1기씩, 또 각 능 앞 중앙부에 석상이 1개씩 놓여 있다.
제2단과 제3단은 각기 윗단보다 약 1∼2m가 낮아지는데 장명등과 문석인·무석인을 양쪽에 배열하였고, 제4단은 경사면을 훨씬 내려와서 석단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현궁 내부에서는 벽화가 확인되었다고 하므로 석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종의 능인 지릉(智陵)도 도굴된 뒤 밝혀진 바로는 벽을 장대석으로 쌓고 위에 판석 3매로 덮개를 덮었으며, 바닥은 전을 깔고 현실의 남쪽 중앙은 입구를 만들어 그 앞을 판석으로 막아놓았다. 여기에도 벽과 천장에 회칠을 하였고 천장에는 성신도(星辰圖)를 그렸던 것이 확인되었다. 벽에는 상부에 간격을 두어 걸고리를 박았으므로 그림을 걸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상과 같이 고려의 왕릉은 석실의 벽화고분이었고, 봉분 외부도 신라의 전통을 받아 호석과 난간석·석인·석수 등을 배열해 놓고 있으나, 망주석과 장명등·정자각 등의 새로운 요소도 갖추게 되어 조선시대로 계승되게 된다.
조선시대의 능원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능·원·묘로 구분하여 조성하였는데, 이들은 그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예로는 능 40기, 원 13기, 묘 52기가 있으며, 북한에 10기의 능이 있다.
그러나 이 능들은 시대에 따라 택지(擇地)의 지역이 정하여져 집중된 것이 아니라, 상(喪)을 당하면 그때마다 상지관(相地官)을 보내어 능지를 선택하였는데, 그것은 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성빈기간(成殯期間)을 5개월에서 3개월까지 잡았으므로 가능하였다.
왕릉의 택지는 고려시대부터 성행하여 온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많은 논란을 겪었고, 또 한번 조성한 능이라도 새로운 설이 나와 불길하다 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등 폐단도 적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 이래 왕릉 중 13기가 천장(遷葬)되었는데 이 중 8기는 풍수설에 의거하여 불길하다는 이유였고, 인조 때 조성된 장릉(長陵)의 경우 5대 81년간 천장에 대한 논란을 거듭하여 결국 영조대에 천장을 하였다 한다.
또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은 원래 건원릉 서쪽 강(岡)에 있었던 것을 인조 8년 원주목사 심명세(沈命世)가 “목릉불길 차유수기(穆陵不吉 且有水氣)”라 상소하여 건원릉 제2강으로 옮겼는데 먼저 능을 파고 현궁(玄宮, 玄室)을 열어보니 물기가 없어 모두 분개하였다고 한다.
능의 위치는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궁이 들어설 땅의 토질까지 중시하여 흙에 윤이 나고 물기가 없으며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고 다섯 가지 색을 내고 고와야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능역의 택지조성은 국상이 있을 때마다 엄격한 이론과 번거로움이 따랐으며 택지가 된 뒤에도 일정한 구역 안의 개인재산과 묘까지도 모두 철거되는 변을 당하는 등 그 폐단이 컸다.
조선 초기 능의 형식은 대체로 고려의 형식을 따라 현궁을 지하석실로 하고 그 앞에 부장품을 위한 석실 곁방을 내어 지었으며 석실의 덮개석 주위 평지 주변에는 호석을 둘렀다. 그런데 이 호석은 지대석 위에 우석(隅石)을 놓고 사이사이에 면석 12기를 세웠으며 그 위에 만석(滿石, 甲石)을 얹은 뒤 모서리마다 인석(引石)을 놓고 있다.
이들 호석 외면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지대석 외면에는 복련(覆蓮)을, 우석에는 구름무늬를, 면석에는 중앙에 십이지신과 주변에 구름무늬를, 만석의 바깥 하부에는 앙련(仰蓮)을 새겼으며, 인석 외단에는 모란이나 규화(葵花)의 무늬를 넣은 뒤 이 위에는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다시 그 주위에 석난간을 두르는데, 이 난간과 호석 사이에는 박석(簙石)을 바깥쪽으로 경사지게 깔아 배수와 보강을 겸하도록 하였다. 난간석 밖에는 동·서·북 3면에 높이 3, 4척의 담장을 쌓았으며, 담장 안에 석양 넷을 동서로 나누어 세우고 석호 넷은 북쪽에 둘, 동·서의 석양 사이에 하나씩 두어 봉분 밖을 향하게 하고 있다.
능 앞에는 석상을, 좌우로 망주석을 하나씩 세웠고 그 앞으로 한 단을 낮추어 중앙에 장명등을 세웠으며 이 앞 양쪽에 문석인 각각 하나씩과 석마(石馬) 한 필씩 세웠고, 다시 한 단을 낮춘 곳에 무석인 한 쌍과 석마 한 필씩 세웠다. 석실 정남 산기슭에는 정자각을 조성하고 뒤쪽 적당한 곳에 예감(瘞坎)을 만들었으며, 그 동쪽에는 비각을 세우고 남쪽에는 고방(庫房)을 두었으며 재방(齋房)은 그 밑으로 두었다. 이상은 『국조오례의』에 제정된 능제의 개략이다.
『국조오례통편』에 실린 영조 때의 제도에는 능 주변의 석물들과 정자각·비각 등의 시설배치는 그대로 하고, 다만 현실을 회격(灰隔)주 03)으로 하였으며 그 밖에 퇴광(退壙)주 04)을 두었는데, 능 주위에도 호석을 생략하고 석난간만을 두른 형식이다.
이렇게 하여 건원릉 이후 정종·태종·세종·문종·덕종과 그 비의 능은 모두 석실을 만들어 모시고 있으나, 광릉(光陵)은 세조의 유언대로 최초로 회격으로 만들어졌으며 호석을 생략하였다. 호석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에서부터 다시 쓰이다가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천장할 때부터는 아주 없어져서 쓰이지 않게 되었다.
또 면석 중앙에 수수인신(獸首人身)의 십이방위신을 두었던 것을 광릉에서는 이 십이방위신을 그대로 석난간 동자석주에 옮겨 새겼고, 천장된 영릉(英陵)에는 문자로 바꾸어 동자석주에 새겼다. 그 뒤에도 이러한 형식이 쓰이다가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부터는 십이간방(甲·乙·丙·丁……)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난간동자석주나 만석·인석 등에 십이지와 함께 사용되어 24방위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배치상으로 볼 때 몇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왕이나 왕비 어느 한 쪽만을 매장한 단릉(單陵), 둘째 왕과 왕비의 능을 같은 소구릉에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 셋째 정자각 좌우로 두 개의 소구릉에 1능씩 두는 형식, 넷째 부부를 같은 봉토하에 합장하는 형식 등이다. 특히 둘째 형식의 경우 같은 곡장(曲墻) 안에 두 능을 나란히 두어 석상을 제외하고는 석물의 배열을 단릉에서와 같이 한다.
능의 침향(枕向), 즉 시신의 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두었느냐 하는 것은 민족·지방·종교 등에 따라 각각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동쪽이나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예가 많았는데,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5, 6세기부터 중국 한대의 석실묘와 더불어 북침(北枕)하는 것을 영향받았으며, 신라는 통일기로 넘어가면서 동침에서 북침으로 바뀌어간다. 이것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조선의 능에서 대부분 북침을 하고 있음은 『국조오례의』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국상
주02
지하에 매설한 인공의 수로
주03
회다짐
주04
부장품을 두는 壙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장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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