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점차 그 모습을 정비하기 시작한 향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이루었다. 향시는 전술한 바와 같이 크게 매일 열리는 상설시와 아침저녁으로 열리는 조석시, 그리고 일정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로 나뉜다.
정기시에는 2일장·3일장·5일장·10일장·15일장·연시(年市) 등이 있었으나 가장 보편적인 것은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5일장이었다.
대부분의 향시는 거래되는 상품의 종류에 제한이 없는 ‘보통시장’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특정의 상품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특수시장’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이런 것으로는 가축만을 거래하는 가축시장, 어류만을 다루는 어물시장, 곡물만을 매매하는 곡물시장, 장작·석탄과 같은 땔감을 공급하는 시탄시장(柴炭市場) 등이 있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대구와 전주 그리고 원주 등지에서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렸던 약령시(藥令市)였다.
상설시장의 발달이 지방에서는 극히 미약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향시는 대부분 정기시장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보통시장으로서의 5일장과 특수시장으로서의 약령시가 정기시로서의 당시의 향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정기시장이 언제부터 5일장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라도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장문(場門)이라는 향시가 열렸다는 신숙주(申叔舟)의 주장을 5일장의 시초로 본다면, 이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신빙성 없는 추측일 뿐이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다른 형태의 정기시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여 오다가 점차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여 5일장의 형태를 취하였다고 여겨지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였는지는 앞으로의 연구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교역의 중심지이고 산물의 집산지이며 정보교환 등 단위지역사회의 핵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5일장을 비롯한 정기시는 경제적이고 경제 외적인 다양한 요인들에 의하여 발생하고 변화한다. 그 중 큰 요인들만 꼽아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교통이 불편하고 인구가 널리 분산되어 살고 있던 전통사회에서는 전업적 상인이 상설의 점포를 운영하며 소기의 이윤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수요가 존재하는 지역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상인은 취급상품에 대한 수요를 확대시키기 위하여 인접한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둘째, 생산자이며 동시에 판매자가 대부분인 분업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에 이동하지 않고 한 시장에만 상품을 공급할 때에도 일정한 주기로 열리는 장이 유리하였다. 왜냐하면 생산과 판매를 효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위의 첫째 요인으로부터 쉽게 추론할 수 있듯이 소비자들에게도 필요한 물품의 구입을 위해서 가까운 마을 주변의 장터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장이 더욱 편리할 수 있다.
만약 정기시가 아니고 상설시만 존재한다면 당시의 낮은 수요를 감안할 때 하루에 왕복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지역을 그 상권으로 포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사회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위정자들이 시장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상업을 장려하며 화폐의 통용을 촉진할 때에는 정기시도 발전할 수 있지만 농본주의적 시대사상만 고루하게 고집하며 향시 속에서 오직 ‘이고기리 사본지폐(以賈其利 捨本之弊)’밖에 찾을 수 없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게 된다.
이 외에도 과중한 조세와 부역의 부담 그리고 관리들의 수탈도 떠돌이 장사꾼들을 양산하여 정기시의 양적 확산을 초래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정기시는 결국 인구의 증가, 교통 및 수송수단의 발달, 분업에 따른 생산성의 증가 등을 통하여 성립하고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5일이라는 시간과 30리 내지 60리라는 공간이 체계화되어 5일장이 성립되었을 것이다.
5일장은 조선 중엽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5일장의 지리적 분포를 보면 대체로 하루에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30리 내지 60리의 간격을 유지하며 전국에 벌집모양으로 흩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정한 수의 시장을 전국에 빈틈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분포하는 방법은 벌집모양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변형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지역적 특수성이 고려된 결과이다.
모든 5일장의 경제적·사회적 기능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시장의 거래액, 그 시장에 의존하는 인구 또는 촌락의 수, 그리고 교통·수송수단 등과 관련하여 각 시장의 수평적이고 수직적 기능관계가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근 촌락의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열리는 가장 낮은 단계의 장을 ‘소시장’이라 한다. 반면에 ‘지방중심시장’은 가장 높은 단계의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며 도매업을 겸한다.
이들 지방중심시장은 지방의 집산물을 대도시에 공급하고 다른 지방의 물품을 소시장에 분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중간시장’은 소시장과 지방중심시장의 중간에 해당한다. 상급 및 하급 시장과는 수직적 거래를 수행하며 인접한 동종시장과는 수평적 거래를 유지한다.
5일장은(1·6)·(2·7)·(3·8)·(4·9)·(5·10)의 다섯 가지 형태로 열린다. 가령 (1·6)장은 1일·6일·11일·16일·21일·26일 열리는 장을 말한다.
인접해 있는 다른 장터를 연이어 돌며 상품을 팔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인데 어느 한 지역의 개시일은 불변이 아니라 위에 서술한 시장발달의 제반 요인이 변함에 따라 시대적으로 바뀌어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를 1830년경의 오늘날 충청북도 지방의 5일장을 예로 들어 나타내 보면 [그림 2]와 같이 된다. 벌집모양으로 서로 연결된 이 지역의 5일장들은 큰 두 개의 상권으로 나뉘어 있고, 각 상권의 중심지, 즉 지방중심시장은 청주와 충주이다.
두 개의 지방중심시장을 둘러싸고 여러 개의 중간시장들이 발달해 있는데, 예를 든다면 제천·단양·진천·음성·괴산 그리고 보은 등의 시장이다.
이들 지방중심시장과 중간시장의 주위에는 매포·연풍·부강 등과 같은 다수의 소시장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중간시장들이 청주와 충주의 장처럼 (2·7)형태로 열리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지방중심시장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예는 1830년경의 시장을 가장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의 예규지(倪圭志)에 따른 것이다. 예규지의 팔역장시조(八域場市條)에는 모두 1,052개의 정기시장의 개시횟수, 개시일 그리고 중간시장까지의 거리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1830년경의 지역별 정기시장
개시횟수\지 역 |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 함경도 |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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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장 | ― | 3 | 1 | ― | ― | ― | ― | ―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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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 | 93 | 146 | 159 | 243 | 51 | 79 | 92 | 42 | 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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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장 | ― | 6 | 28 | 25 | ― | 24 | 42 | ― |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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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장 | ― | 3 | ― | ― | ― | 6 | 9 | ―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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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93 | 158 | 188 | 268 | 51 | 109 | 143 | 42 | 1,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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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장이 전체 지방시장의 86%를 차지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에 가장 많은 수의 장이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1]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충청북도 지방에서와 같이 읍 이상의 행정구역에서 열리는 중간시장들의 32% 정도가 (2·7)형태를 취한다는 점이 눈에 뜨이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임원경제지』보다 20여 년 앞서 편찬된 『만기요람』에도 8도에 걸쳐 모두 1,061개의 장이 서고 있다고 간단히 부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각 지역의 가장 큰 장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에서는 광주의 사평장(沙坪場)과 송파장(松坡場), 안성읍내장(安城邑內場), 교하공릉장(交河恭陵場), 충청도의 은진강경장(恩津江景場)과 직산덕평장(稷山德坪場), 전라도의 전주읍내장과 남원읍내장, 강원도의 평창대화장(平昌大化場), 황해도의 토산비천장(兎山飛川場)과 황주읍내장, 봉산은파장(鳳山銀波場), 경상도의 창원마산포장, 평안도의 박천진두장(博川津頭場), 함경도의 덕원원산장(德源元山場) 등이 가장 큰 장들이었다고 한다.
19세기 초의 위와 같은 상황은 큰 변함없이 조선시대 끝까지 지속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19세기 말엽, 즉 고종시대에 작성된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의 시적고(市糴考)에도 수와 분포에 있어서 유의한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장시상태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향시를 무대로 크게 활약한 상인들은 행상(行商)인 부상(負商)과 보상(褓商) 그리고 좌상(坐商)으로서 객주(客主)와 거간(居間) 등이었다. 보부상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보상과 부상은 원래 서로 다른 단체를 형성하고 있던 행상조합으로 1883년(고종 20) 정부에서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고 두 상단을 합쳐서 군국아문에 부속시킨 다음부터 보부상이라 통칭되었다.
그들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전성을 이룬 것은 조선시대였다. 전성기에는 단원 수가 100만을 넘었고 1,000을 헤아리는 지부가 있었다고 한다.
보부상의 중심세력은 개성상인이었다. 고려가 망한 뒤에 개성의 양반후예들은 당시의 말업인 상업에 투신하여 강한 단결력과 뛰어난 경영능력으로 이름난 개성상인이 되었고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 또는 ‘사개부기(四介簿記)’는 서양보다 앞선 복식부기로서 일찍부터 합리적 경영방식을 추구한 개성상인들의 노력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영수완뿐만 아니라 자유시민적 기질까지 지녔던 보부상들이었지만 새시대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외래상인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떠나야만 하였다.
보부상들이 각 장시와 소비자들을 직접 연결시키는 유통과정의 최종단계에서 활약하였다면 객주는 생산자 또는 다른 상인과 장시를 연결시키는 유통과정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객주는 객상(客商)의 주인이기 때문에 장터를 중심으로 좌정하고 위탁매매, 금융, 보관, 운송 및 여숙(旅宿)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객주의 업무가 이렇게 다양하기 때문에 객주의 유형도 또한 여러 가지였다. 물상객주(物商客主)·보행객주(步行客主)·환전객주(換錢客主)·만상객주(彎商客主) 외에도 넓은 창고와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주로 한강 연안의 각 포구에서 곡물·소금·어물 등을 취급하던 여각(旅閣)이라는 큰 객주도 있었다.
객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발달해 왔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경향의 각 시장에서 그 기능을 계속하고 있다.
보부상과 객주 외에도 거간들의 활약이 볼 만하였다. 거간은 상인들 상호간은 물론 생산자에서 소비자에 이르는 온갖 유통과정의 중간에 개재하여 거래를 매개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세한 거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거래에 거간이 개입하는 것이 당시의 상관습이었기 때문에 객주는 거간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거간의 종류도 다양하였다. 내거간·외거간·동사거간(同事居間)·노력거간, 감고(監考)와 같은 미곡거간, 가쾌(家儈)뿐만 아니라 육의전 등에서 손님을 끌던 여리꾼[列立軍] 같은 거간도 있었다.
『각전기사 各廛記事』에 시전상인을 괴롭히는 난매(亂賣)의 주역으로 수없이 등장하는 중도아(中都兒)도 거간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오늘날도 번성하고 있는 복덕방에서 거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약령시는 조선시대의 특수시장을 대표한다. 약령시 이외에도 소, 땔감, 김장감, 생선, 곡물 등을 전문적으로 거래하거나, 효종 연간에 궁궐 주변에서 왕실의 특정 용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설치한 궁시(宮市) 또는 조기나 고등어 그리고 멸치 등의 어획기에 서남해역의 섬에서 열렸던 파시(波市) 등과 같은 특수시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특수시장은 보통시장에 부설된 것이었거나 짧은 기간만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나 연륜에서 약령시와 견줄 만한 것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약령시가 언제부터 왜 서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약령시 중의 으뜸인 대구약령시는 1658년(효종 9) 경상감영 안의 객사(客舍) 주변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는 약재의 생산이 풍부하였고 또한 한의학의 발달이 뛰어났던 관계로 약재의 거래가 산지 근처의 집산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거래가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오다가 효종 연간에 들어오면서 대동법의 부분적 실시와 함께 국내외의 약재에 대한 수요가 크게 일어나 그 체계적 공급을 위하여 약령시가 개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613년(광해군 5)에 간행된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東醫寶鑑』이 1659년(효종 10) 경상감영에서 영영본(嶺營本)으로 재간된 사실도 약령시의 출발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약령시는 대구 외에도 원주·전주·공주·진주·청주·충주 등지에서 한동안 열린 적이 있다. 그러나 큰 약령시로는 대구와 원주 그리고 전주의 것을 쳤고 그 중에서도 대구약령시가 가장 컸다.
모두 봄과 가을 두 번 열리는 정기시로 개시는 먼저 원주에서 시작하여 다음에 대구에서 열리고 전주에서 끝나는 것이 순서였다.
대구약령시는 갑오경장 때까지는 춘시가 음력 2월 3일 개시하여 18일에 철시하고 추시는 10월 3일부터 18일까지 보름간씩 열리던 것이 그 이후로는 봄·가을의 적당한 때에 약 30일간 열리는 습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효종 연간에 창시된 이래 대구약령시는 발전을 거듭하였다. 경상감영이 대구에 정착하고 1679년(숙종 5) 경상도에도 드디어 대동법이 시행되기 시작하자 더욱 번창하였다. 격동의 조선 말기에도 번영을 계속했던 대구약령시는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된 이후에도 기복은 없지 않았지만 한동안 존속하였다.
서양의술이 전래되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등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애국지사의 자금조달과 은신처로서 민족혼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으나 1940년의 추시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민족시장으로서의 약령시가 전시하에서도 성시를 이루자 두려움을 느낀 일제가 1941년 이른바 「국가총동원법」을 발동하여 약령시를 폐쇄하였기 때문이다.
광복 후 다각적인 재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년 1월에 개시된 1948년도의 추시가 대구약령시의 역사적 대미(大尾)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