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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身分)

사회구조개념용어

 법적 지위나 사회적 통념에 따른 개인의 지위나 자격을 가리키는 사회학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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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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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법적 지위나 사회적 통념에 따른 개인의 지위나 자격을 가리키는 사회학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개관
사회적 불평등을 표현하는 개념은 신분 외에 계층과 계급 등이 있으나, 전통사회의 불평등은 대개 법적 제도로 규정되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러한 법적 제도는 신분에 따라서 개인의 정치적 출세는 물론 사회적 지위와 세세한 일상의 생활양식까지 강제로 규제하였다.
신분과 신분제도는 바로 국가권력에 의하여 결정, 창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지배층의 전유물(專有物)이었으며, 지배층의 권력은 근원적으로 경제력에 있었다. 따라서 신분이란 전통사회 계급의 법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전통사회는 노예제에서 농노제로 신분제도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현상을 동양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질적인 신분제도와 신분구조가 존재하였다. 예컨대 서구의 중세사회는 귀족제가 그 신분제의 특징이나, 동양의 경우는 관료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도의 경우는 종교적 제도에 의하여 신분이 규정되는 카스트가 있고,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반상제도가 존재하였다.
신분이 형성되는 요인은 시대와 사회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신분의 발생설은 재산의 차이가 계급을 발생케 하였다는 사유재산설, 힘이 있는 대씨족이 약소씨족을 정복한 결과로 생겼다는 정복설, 자본·자연·노동의 분배에 의한 산물이라는 경제원동력설, 분업의 산물이라는 분업설, 권력분배의 산물이라는 권력설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복설은 원시 또는 고대사회에서 신분형성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재산설과 경제원동력설은 중세 후에, 분업설은 현대사회의 주요한 신분결정의 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 전통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자기신분의 보호를 위한 신분내혼제와 신분세습제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신분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신분구조의 상층은 부족사회에서는 족장제가 전형적인 형태이고, 고대국가 형성기에 처음 등장한 귀족제는 고려 중기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말기에 뚜렷하게 나타난 관료제는 조선 말기까지 강력히 유지되었으며, 동시에 양반사회를 형성하였다. 양반사회 구조의 특징은 관료를 충원하는 양반과 중인, 그리고 생산에 종사하는 양인과 노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자가 전통사회의 소수의 지배신분을 형성하였고, 후자는 다수의 피지배신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분의 역계층화현상이 나타났다. 비록 구조적으로 역계층화현상이 일어나고 신분제도가 없어지지만, 전통적 신분의식은 일제강점기까지 통혼과 행동양식에 강력히 잔존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대의 신분제도
현재의 한민족과 연관을 맺고 있는 고대문화는 신석기문화로서, 신석기문화시대의 기본적인 사회단위는 씨족이었다. 씨족은 한 촌락에 거주하는 같은 혈연집단으로, 그 사회는 아직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이 발생하지 않은 단계였다. 또한 씨족에 지연으로 뭉쳐진 부족이 존재하였어도 씨족사회의 구성원리가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농업과 목축 등 생산경제단계에 돌입하여 사회적 잉여가 증가하고 스키토 시베리아계통의 청동기가 이입되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청동기를 생산하는 청동기문화단계에 도달하게 되자 사유재산과 계급의 발생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부족장 후예들은 특권층으로 성장하고, 부족간에도 우열이 생겨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발생하였다.
그러한 사회의 변화는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는 지석묘와 우세부족의 선민의식을 강조하는 신화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지석묘의 건축양식으로 볼 때 주인인 특권층의 권력은 세습된 것이며, 그렇다고 할 때 혈통이 가지고 있는 지위의 결정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특권층은 생산력의 기반이 확충된 단계에서 재화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였고, 금속제 무기로 전투력을 갖춘 무서운 전사단이었으며, 주술사적인 권위도 가지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이와 같은 특권층의 출현과 함께 일정한 지역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공동체 상호간의 대립과 항쟁으로 원초적인 국가가 성립하게 되었다. 국가의 등장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강화하고 법적 제도로 정착시켜 규정화하는 신분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가형태를 부족국가라고 한다.
이러한 단계의 국가로는 고조선·부여·예맥·진국 등을 들 수 있고, 특히 고조선은 가장 선진국가였다. 그 밖에도 삼한의 소국들도 이러한 단계의 국가였다.
이 단계를 넘어선 국가형태가 부족연맹체이다. 청동기문화의 난숙(爛熟)과 함께 철기문화의 이입(移入)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증대, 야철사업을 통한 부의 축적은 보다 큰 연맹체로 발전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연맹왕국의 예는 고조선·부여·가야 및 초기 삼국을 들 수 있다.
고조선은 이미 기원전 4세기에 통치자가 왕이라는 칭호를 쓸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고대국가 이전의 원초적인 국가 단계에서는 지배층들은 농민들이 살고 있는 일반 촌락과는 구별되는 성읍(城邑) 안에 살며 생산자들을 지배하였다.
중국 기록에는 삼한사회의 경우, 부족국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읍락을 국읍(國邑)이라고 표기하였다. 위만조선의 상(相)이나 경(卿)의 지위를 가진 자들도 지배자들일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대가(大加)·상가(相加), 삼한의 신지(臣智)·읍차(邑借), 사로국의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斯今) 역시 그러하다.
기본적으로 농업공동체의 촌락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농민은 중국인들이 하호(下戶)라고 부른 양인신분들이었다. 이 하호의 신분 지위가 노비냐 봉건적 예속민이냐, 또는 하호의 기록 자체가 잘못된 것이아닌가라는 논의가 있지만 양인신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러한 양인신분 외에 노비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고조선의 팔조금법(八條禁法) 중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고, 자속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낸다는 조항이 남아 있다. 다만 이 사료에 대하여 후대의 법 조항에서 유추한 것이라는 이견이 강력히 제기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계급이 발생하면 공동체 안의 사회 분화와 정복 등으로 노비가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고조선 사회가 중국과 겨룰 정도로 발전하였다면 이러한 법은 충분히 있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 고대국가는 노예제사회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현재 연구 수준에서는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는 전 인구의 50% 이상, 1세기의 중국에서는 10%, 통일신라에서는 0.54%의 노비만 있었다. 당시의 노비는 후대와 동일한 신분적 지위에 있었고, 오히려 더 가혹한 조건에 처해 있었다고 본다.
부여·고구려·옥저·가야에서는 순장이 행하여졌고, 신라에서는 6세기 초까지 순장 풍속이 남아 있었다. 순장자들은 왕의 측근도 있었겠지만, 노비가 더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비록 구체적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고대국가가 등장하기 전에 벌써 지배신분·양인신분·노비신분이 발생하였고, 원초적인 신분법적 제도도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고대사회의 신분제도는 고대국가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단계는 부족연맹체를 거친 뒤 성립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이다. 이 고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부족연맹체시대에 병합, 정복된 크고 작은 부족국가의 지배층이 수도로 이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속에 편입되었다.
그 때 국가체제에서 각 계층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세력과 지위에 상응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지위 결정의 기준이며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기본적인 운영원리가 바로 신분제도였다.
이것은 이전의 시대 것보다 철저하고 정교한 법제였다. 그리고 공통 특성은 혈연적·족적인 유대에 뿌리를 둔다는 점으로, 원시 씨족제도 내지는 족장층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지 못 하였던 때문으로 생각한다.
삼국 모두 지배신분·양인신분·노비신분이 분명히 있었고, 신분제도도 엄존(儼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신분제도는 전모를 알 수 없고, 다만 그 편린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신분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신라의 골품제도를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이 제도는 골품, 즉 개인의 혈통의 존비에 따라서 정치적 출세는 물론, 혼인·의복·거마·장식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특권과 제약을 규정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전환하고 있던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법흥왕 7년(520) 율령을 반포할 때 이미 법제화된듯하며, 신라의 멸망 때까지 존속하였다.
골품제도는 처음에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왕경(王京)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별개의 체계를 이루다가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성골과 진골이라는 두 개의 골품과 6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8개의 신분층으로 나누어졌다.
성골과 진골은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층이었고, 관료체제에서도 각 관서와 군대의 우두머리까지 아무런 신분 제약 없이 승진할 수 있었다. 이들은 화백회의를 통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 지위와 공훈에 맞는 식읍 또는 녹읍 형식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사적 지배를 허용받았다.
이들보다 현격하게 처진 하위 신분이 6두품·5두품·4두품으로, 이들은 하급귀족으로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래도 6두품은 진골 다음 가는 신분으로서 득난(得難)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부의 차관급인 경(卿)이나 군대의 부사령관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또, 이들 중에는 유학자·승려·문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3두품에서 1두품의 두품들은 관료체제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서울에 살고 있던 양인신분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들은 또 평민·백성으로도 불렸다.
골품제도는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 신분제도였고, 지방민들은 아예 제외되었다. 대신 지방의 세력가·관리들에게는 관등제도상 외위(外位)를 설치하여 우대하였다. 그러나 외위 1등급인 악간(嶽干)이 경위(京位) 7등인 일길찬(一吉飡)에 비견되는 것으로 보아 지방민들은 상당히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귀족층 밑에는 양인신분이 있었다. 이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던 자영농민이었다. 국가는 이러한 자영농민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조세·공부·역을 부과하였으며, 특히 노동력 징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부세(賦稅)제도는 이미 6세기경에 확립되었고, 통일신라시대의 서원경(지금의 청주) 부근 촌락의 장적도 매우 세밀한 조세징수대장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대국민 통제력은 상당히 강력하고 발달한 것으로 신분 이동도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자신의 경작지를 상실하고 용인(傭人)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거나 노비가 되는 양인 농민들도 통일전쟁기 이후 종종 나타나고 있다.
극히 드물지만 군공 등으로 신분을 상승했던 사람도 있었다. 신라의 노비들도 역시 신분의 세습 외에 전쟁포로·형벌·채무 등으로 창출되었으며, 사원에도 무수한 노비가 바쳐졌다. 특히 향·소·부곡이라는 집단 천민거주지역도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 정복이나 직업의 귀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생산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신라 장적을 통해서 볼 때 아주 적은 수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재상가에 3,000명의 노비가 있었다는 기록은 부곡류의 천민집단, 식읍에 거주하는 백성들, 문객류의 사민(私民)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노비는 지방보다는 귀족이 거주하는 서울에 더 많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며, 이 노비들은 수공업이나 가내 잡역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려시대의 신분제도
신라 하대의 혼란상은 골품제도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구의 증가, 혈족 관념의 분화, 6두품과 지방세력의 불만 등을 고조시킨 협착한 부족사회 배경의 골품제도로는 더 이상 발전된 사회를 운영해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신라의 골품제도는 소멸되었다. 그러나 고려왕조도 골품제도를 대신하여 좀더 개방적이긴 해도 엄격한 신분제도를 마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신분제도는 크게 보면 양천제를 채택하면서 양인과 천인 각 내부에 다양하고 차등이 심한 계층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를 들면 중앙관료와 농민은 비록 양인의 범주에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여도 양자의 현실적 거리는 너무 현격하였기 때문에 과연 양천제라는 신분 범주가 유효한가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각 사회세력과 인구의 현실상의 실질 지위를 중심으로 신분층을 적출할 필요성이 생긴다.
고려왕조를 건국한 주체는 지방 호족들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신분제도는 자연히 호족을 지배신분으로 하고, 국민들을 일정한 국역체제에 편제시키는 방향을 취했다.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왕건(王建)을 위하여 공을 세운 호족은 새로운 귀족과 관료가 되었고, 거부하고 반역한 부류들은 도태되거나 천민으로 전락하여 섬에 유배되거나 역자(驛子)·진척(津尺)·천향민(賤鄕民)·부곡민(部曲民:수공업·목축업에 종사하는 천민)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전자는 그 공훈에 따라 태조공신 혹은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봉되어 새 왕조를 이끌어갈 지배세력으로 정착해갔는데, 그 수는 2,000여 명 내지는 3,200명 정도였다.
이들 모두가 고려왕조의 귀족이 된 것은 아니었고 정권투쟁에서 희생되기도 하였지만, 성종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관료와 귀족으로 변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려 전기의 귀족인 문벌귀족의 조상은 거의 모두 공신이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지배신분은 나말여초의 호족 후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호족들은 지방에서 이름 있는 세력들로서 중국식 성과 본관을 갖기 시작하였다. 940년(태조 23)의 공신등급책정과 토성분정(土姓分定)은 바로 호족 유공자들의 사회적·정치적 지위, 즉 고려왕조에서의 신분적 지위를 부여해 준 것과 동일한 조처로서 새로운 신분질서의 탄생이었다.
본관은 호족의 세력, 즉 지배촌락의 다소와 족단의 크기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므로 중앙귀족간의 구별, 출신지에 남아 있던 동족에 대한 우월감의 표시가 되었다. 또한 본관은 호적제도의 기능도 있어서 국가에서는 지방호족세력을 호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율적인 지방통치체제를 재편성하는 데 긴요하게 이용하였다.
이러한 귀족들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출신을 중시하고 가문과 문벌을 숭상하는 풍조가 발생하여 이른바 문벌귀족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가격(家格)도 생겨 폐쇄적인 사회 교제권과 통혼권이 형성되어 법제도와 함께 사회 통념의 신분제도가 정착하였다.
이러한 문벌귀족의 특권인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와 음서제(蔭敍制)가 11세기 중엽인 문종 때 만들어졌다. 바로 이 시기에 고려의 신분제도가 일단 완성된 것이다.
개인의 혈통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과거제도는 광종 때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 밖에 천거, 음서 및 남반과 잡로의 승전, 특별서임 등이 입관과 승진에 보다 강력한 작용을 하였다.
음서는 5품 이상 관료의 아들·손자·동생·사위·생질·조카를 간단한 시험을 거쳐 특별히 관리로 뽑던 제도였다. 비록 후기에는 음서의 규제가 3품 이상의 관료 아들로 그 범위가 축소되었으나, 고려 전 시기에 걸쳐 관료 충원에 크게 기여하였다.
따라서 고려사회가 관료제 사회라는 주장에 대한 아주 좋은 반박자료가 되고 있으며, 그 논쟁과정에서 음서의 면모가 더욱 자세히 밝혀지기도 하였다.
음서의 기회는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것이 아니라 한 해에도 여러 명에게 혜택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관료제 자체도 거의 신분제의 원리에 입각하여 운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분적 특권제도는 여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앙통치체제 전반에 걸친 것이기도 하였다.
삼성육부체제도 소수의 문관 2품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도록 짜여 있었고, 실제 운영도 그렇게 행하여졌다. 교육제도·과거응시자격도 신분의 제한이 있었고, 특히 음서 못지않게 특이한 것이 공음전시과였다. 따라서 고려 귀족들은 적어도 국가에 반역하지 않는 한 그들의 경제적 부와 정치적 지위를 자자손손에게 물려 줄 수 있었다.
중앙관료나 문벌귀족보다는 신분 지위가 한 단계 아래에 있었던 지배신분으로 향리가 있었다. 중앙에 진출한 귀족가문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호족의 후손이 많았던 반면에, 지방사회에 그대로 남아 지방행정을 담당하였던 향리층의 조상은 소호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중앙관료와 향리층이 혈통상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향리들은 토착세력으로서 부계뿐만 아니라 같은 향리층인 모계·처계까지 포함된 강한 씨족적 유대와 공고한 경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어느 정도의 학문적 소양도 갖추고 있어서 행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력자들이었다.
고려왕조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지만, 제도와 집권력 자체는 미비하고 약한 편이었다. 이러한 세력을 가진 향리들은 읍사(邑司)를 구성하여 지방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중앙정부에서 향직을 받았다.
또한 외역군(外役軍)의 지휘자 지위를 차지하고 군역을 통하여 중앙권력과 결합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종과 현종은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향리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향리 세력을 약화시키고 지방행정의 보조로 고정시키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향리의 정원은 주군의 인구에 따라 결정되고, 명칭도 전래의 토착 세력임을 보여주는 당대등과 같은 것 대신에 중국식 호장(戶長)을 쓰게 되었으며, 그 밖에 공복(公服)의 제정, 임면과 승진이 제한되었다. 이것은 동시에 향리신분의 제도적 확정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향리들은 그 이전의 강한 독자성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강한 세력을 가지고 지방사회를 다스렸으므로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도 향리의 도움이 없으면 행정이 어려웠다.
향리는 신분제도 안에서 이직(吏職)으로서 세습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경로로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특히 호장·부호장과 같은 상급 향리들은 향공(鄕貢)·상경유학·기인·시위·선군(選軍) 등의 길로 중앙의 문무관리와 이서(吏胥)가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응시자격이 있어 과거를 통하여 지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향리 신분은 적어도 무신란 전까지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상위에 속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신란 후, 향리들이 더욱 활발히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과 함께 향리의 신분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향리신분의 이원화는 고려말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고, 결국 조선왕조의 건국을 낳았던 것이다.
일반 양인 대부분은 농민으로 자신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던 자작농, 개인이나 국가에서 토지를 빌려 경작하던 병작농이었고, 신분은 양인이면서도 관청 소속의 토지를 강제로 경작하던 농민층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에 전조(田租)·공납·역(役)을 바쳐야 할 의무를 가졌으나, 국가와 사회 내에서 지배층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지도 못한 피지배층이었다.
국가권력은 호적제도로 전 국민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역 또한 호적에 근거하여 부과되었다. 바로 이 역이 그 사람의 신분적 지위와 동일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양인 호적에는 직역(職域)이 명시되지 않는 예가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백정, 백성, 서인으로 불린 것 같다.
그렇다고 양인에게 역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직역은 의무병인 하급군인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호적상 직역을 특별히 명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양인들은 대개 20세가 되면 노동부대인 주현군(州縣軍)에 소속되어 장기간 복무해야 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여정(餘丁)으로 군인의 가계를 경제적으로 도와야 하였다.
간혹 고급군인으로 출세하는 자가 나왔지만 극히 소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항은 신분층이 확연하게 구분되었다는 점이다. 호적상 직역을 밝히지 않아도 행정에 지장이 없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미 신분층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는 실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대국민 지배력이 상당히 강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국역체계에서 제외되는 빈곤층, 용인(庸人) 등도 있었겠지만, 모든 양인은 일단 국가에 의하여 파악되었다. 이에 따라 역이 부과되었다는 사실은 신분 결정과 유지에 끼치는 국가권력의 강대한 힘을 말해준다.
고려의 지방행정제도는 신분적 위계의 성격을 아주 강했다. 주현과 속현, 향·소·부곡, 반역으로 인한 천향(賤鄕), 공훈 등으로 인한 귀향(貴鄕)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다.
지역의 격에 따라 역이 불균하였다는 것도 바로 주민집단이 전체로서 국가지배의 대상이 되었고, 신분결정도 혈통이라는 개인적 요소 외에 지연의 요소가 가미되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국가가 국민을 개별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였지만, 한계가 있어 국민 일부를 공동체 관계에 의하여 지배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지방행정제도의 성격은 무신난을 전후로 점차 개선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 건국 후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일반 양인 상층에는 촌락의 우두머리인 촌장(村長)과 촌정(村正)이 있었다.
이들은 향리가 중앙권력과 연결을 가지는 데 비하여 중앙권력과 절연된 채 향리의 지휘와 통제 아래에 있었다. 따라서 신분도 일반 양민과 같을 수밖에 없었다.
또 양인 농민은 재생산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몰락하여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용인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자기 신분을 포기하고 노비가 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특히, 귀족들이 대토지겸병을 하자 강제로 노비가 되는 자 외에도 스스로 귀족세력에 기대어 노비가 되는 자도 많이 나왔다. 그것은 양인 농민과 노비가 경제적·사회적 처지가 비슷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양인 농민의 대량 몰락은 결국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을 가져왔다.
무신난은 고려 신분제도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문벌귀족층에 속하지 못 하던 하급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말미암아 문벌귀족체제는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
대신 새로운 세력들이 귀족으로 변신하였으며, 노비신분 출신자들도 무인정권의 최고집정자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권력층의 교체는 사회 전면에 파급되어 농민 반란과 노비의 신분 탈피운동이 빈번히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세력들은 지방출신의 능문능리(能文能吏)들이었다. 이들은 지방 상급 향리출신들이 많았고, 과거 등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로를 거쳐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문과보다는 잡과, 문반보다는 무반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중앙의 사족가문이 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비록 자신은 당당한 중앙관원이 될 수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의 진출은 특히 13세기 말부터 아주 활발하였으며, 뒤에 이들이 신흥사대부라고 불린 신흥세력의 조상이 되었다.
또한 고려 말에는 홍건적이나 왜구와 같은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앙정부가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 대가로 정부가 이들에게 베풀었던 것은 산관(散官)과 같은 허직(虛職)이었다.
그 가운데 검교(檢校)·동정(同正)과 같이 이전부터 있었던 허직 외에도 1354년(공민왕 3) 처음으로 만들어진 첨설직(添設職)이 가장 많이 남발되었다.
이와 같은 직을 받은 지방의 유력자에는 상급 향리들이 많았다. 이들은 산관을 받고 중앙군대 내지는 관직에 복무함으로써 중앙권력과 탄탄한 연결고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이야말로 신흥사대부들의 지지세력이며, 신분적 모태로서 조선왕조의 지배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상급 향리 내지는 재지품관(在地品官)만 신분 상승했던 것이 아니라, 일반 양인이나 그 이하의 신분층에서도 군공이나 납속, 또는 주도세력의 측근이 됨으로써 지배신분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향리출신들이 대거 중앙에 진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 후기 이래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개간과 농업생산기술의 혁신을 통한 생산력 증대와 농업경영의 쇄신을 주도하였던 지방의 중소지주들이 바로 지방의 향리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토지겸병·압량위천(壓良爲賤) 및 과도한 수탈을 자행하던 권문세가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이러한 중소지주의 중앙정계 진출은 축적된 힘의 발현이며, 조선왕조의 개국은 대지주인 권문세가에 대한 정치적 투쟁의 승리였다.
이와 같은 고려 후기 이래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신분제도의 문란은 일반 양인과 노비와도 관련이 깊었다. 권문세가들은 계속 대토지겸병을 하며 양인 농민을 농장의 전호나 노비로 부리며 과도하게 수탈하였고, 국가 세금을 불법으로 포탈하였다.
그리하여 농민의 생활은 비참해지고, 국가의 재정은 파탄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국가는 일반 농민들을 더욱 착취할 수밖에 없었고, 침해받은 농민들은 농장의 전호와 노비로 전락하였다. 또한 국가와 농장 주인의 수탈 아래 있었던 백성 중에는 생활기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자도 많았다.
따라서 고려 말에는 농민의 광범위한 유망(流亡)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신분 전락과 이동은 국역체제의 붕괴만이 아니라 신분제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루어진 사회경제 변화와 성리학적 신분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마자 직면한 신분 재편성문제는 지배신분의 이원화와 양인신분의 확대로 해결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즉, 지배층인 양반의 배타적·신분적 우위의 확보, 중인신분의 창출과 고정화, 국역을 부담할 양인층의 확대, 노비신분의 확정을 시급히 시행하여야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 후기 이래 지배층이 비대해졌기 때문에 집권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비대해진 지배층을 축소,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때까지 실직(實職)이든 산직이든 간에 문무양반의 관직을 받은 바 있는 자들만 상급지배신분으로 인정하였다. 반면에 향리 가운데 여전히 지방에 머물고 있었던 색리층(色吏層)·기관층(記官層)과 같은 하급 향리층을 비롯하여 중앙관청의 서리와 기술관·군교·역리 들은 하급지배신분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양반들은 천인의 피가 섞였거나 첩에게서 난 소생들을 서얼로 과감하게 도태시켰다. 이렇게 형성된 하급지배신분은 중인으로 양반과는 현격히 다른 신분 지위를 감수해야 했고, 신분 상승의 기회는 거의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인들의 임무도 성리학적 관념에 의하여 비하되고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실무행정·기술·업무 보조 등에 국한되고 말았다.
국가정책의 결정 및 경제적 부, 사회적 위세 등은 상급지배신분인 양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의무가 되었다. 또한 양반 집권자들은 국가의 공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 기반이 되는 양인을 늘리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정책의 중요한 내용으로는 노비변정사업, 승려의 환속, 신량역천층의 설정, 신백정의 양인화 등을 들 수 있다. 정책 수행과정에서 조세와 역의 부담자를 증가시키기 위하여는 천인신분보다는 양인신분의 확대가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일천즉천(一賤則賤)과 같은 전통적인 원칙을 일시적으로 깨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단 규정된 양인과 천인의 신분은 엄하게 준수토록 해서 명분으로 지탱되는 사회질서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국가와 지배층의 물질적 기초를 확고하게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양인의 수가 대폭 늘어나고, 그 지위도 보다 안정되고 향상되었다.
조선왕조의 신분제도의 완성시기와 종류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 하고 있다. 먼저 신분 완성시기에 관한 여러 학설을 보면, 15세기설·16세기설·17세기설이 있고, 종류에 대하여도 4종·3종·2종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학설들이 정리되기 위하여는 신분의 개념과 각 신분의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연구가 더욱 축적되어야 한다. 특히 하나의 신분이 범주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실제 어떤 속성이 어느 정도 드러나야 하는가 하는 일종의 신분결정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통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심도 있게 연구를 해야 하지만, 일단 조선시대의 신분을 양반·중인·양인·노비로 이해하려고 한다.
양반은 경제적으로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조선왕조를 운영해온 최고의 지배신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양반은 단지 관례상의 문반과 무반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은 그 가족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의 신분이다.
이들은 생산에는 전혀 종사하지 않고, 오직 예비관료 내지는 유학자의 소양과 자질을 닦던 신분이었다. 전통사회의 신분은 법적 제도와 사회 통념으로 결정되므로 양반 자격의 기준도 그 점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는 양반지주층의 계급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세워진 국가로서 각종 법률로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규정하였다. 또한 국가체제는 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였기 때문에 관료로서 국가권력에 참여하지 못 하면 일단 지배층에서 탈락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가권력과 완전히 절연하고 자신의 사적 지배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지배신분을 획득하고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국가의 지배층 충원제도인 과거에 합격하거나 음서를 받는 것이 필요했다.
음서는 2·3품 이상의 양반 고급관료의 자제를 간단한 시험을 거쳐 임용하는 특권 관료 충원제도였다. 그러나 고려의 그것과 비교하면 수혜범위가 좁혀졌을 뿐 아니라, 음서출신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면하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서는 여전히 관료 등용의 중요한 통로였고, 중국에도 없는 대가제(代加制)가 마련되어 고급 양반관료의 특권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문무 과거는 이와 같은 개인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사회 속성을 가진 음서와는 달리, 개인 능력을 절대 평가기준으로 삼고 있던 제도였다. 또한 과거는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관료 충원제도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관료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도 응시자격과 입격 후 임용에는 신분 차별이 있었다.
향리·범죄자·서얼자손 등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비록 양인에 대한 응시제한이 법제에서 보이지 않지만 양인이 양반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사회경제적·교육적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과거 합격 자체는 관리후보자 자격 인정에 불과하였으므로 모든 합격자에게 관직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출세가 보장되고 권세가 있던 청요직(淸要職)을 얻는 데는 신분 배경이 필요하였다.
예를 들면, 평안도 출신 과거합격자는 다수였으나 실제 임용된 관리와 고급관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사회가 고려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신분을 중시하는 귀족제 성격이 약했다고 해도 양반 신분의 특권은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신분의 차등은 관료 충원제도뿐 아니라 관료체제 자체에도 해당되었다. 관계(官階)에는 당상·당하·참상·참하의 구별이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각 신분의 한품서용이 있었다.
이 한품서용에 해당되지 않고 고급관료인 당상관에 오를 수 있던 신분은 오직 양반밖에 없었다. 또한 무반 우위라든지, 토관계(土官階)와 잡직계(雜職階)의 설치도 문인인 양반의 신분적 우월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반은 국역체제에서도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노비를 제외한 전 신분에 신역(身役)을 부과하고 있었다. 양반의 특권인 관직 취임도 일종의 직역이었다.
성년 남자는 직역이 없으면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군역이 양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여기서도 특전을 받고 있었다.
양반으로서 면역받는 자는 현직 관리 외에도 성균관·향교·사학(四學)의 유생, 2품 이상 고위관직 경력자 등이 포함되었다. 초기에는 양반들은 수전패(受田牌)·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오위(五衛) 등 서반특수직(西班特殊職)에 입속하여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을 받음으로써 군역과 사환(仕宦)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고, 특수군 경력은 그대로 인정받아 수령까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성종 이후에는 아예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 특권신분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군역을 진다는 것은 양반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양반과 양인의 명분을 크게 흐리는 것이고, 양반신분을 포기하는 것과 동일하였다.
그리고 양반은 본래 지주층으로서 크고 작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관리로서 국가에 복무할 경우에는 봉록 외에도 품계에 따라 일정한 수조지(收租地)를 받고 있었다. 양반관리가 아닌 서리·향리·일반군인들은 과전법상으로 수조지분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양반은 경제적 기반을 국가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더욱 많은 토지를 겸병(兼倂)해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가 법적 제도로 관료의 특권을 보장하였으므로 그 특권을 향유하기 위하여는 관료가 되어야 하였고, 지배 엘리트인 고급 문반관료가 될 수 있었던 신분은 양반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관직이 이렇게 양반신분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통로였다고 해도 신분으로서의 양반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양반신분 속성 중에는 관직 외에도 사회 통념, 즉 일정지역인의 의식상에 설정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에 해당되어야 하는 것이 많이 있었다. 우선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 문벌(門閥), 지벌(地閥)이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이야말로 사회적 관계가 분화되지 않고 단순한 사회에서는 개인에 대한 평가의 제일차적인 척도이다. 개인이 혈연과 지연에 몰입되어 있었으므로 생소한 개인의 면모는 이미 잘 알려진 혈연과 지연에 의해 우선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양반신분이더라도 문벌과 지벌의 명성과 사회 인식에 따라 국반(國班)과 향반(鄕班) 등으로 나누어졌다. 어떠한 양반과 사회적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양반신분의 판별기준은 확실하고 철저하게 설정되어 일반 사회 통념으로 굳어갔다. 이러한 양반의 자격요건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현조(顯祖)의 존재이다.
직계조상 중에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만한 인물이 전혀 없는 양반은 상상할 수 없다. 양반은 양반으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전통과 지위를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업적을 이룩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과 그러한 사람들의 후손만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전통과 지위란 관계진출·학행·혼인·가풍 등을 말한다. 그렇다고 현조의 존재가 모든 후손에게 영구히 후광을 비춰 주는 것은 아니다. 그 현조의 역사적 비중에 따라 그리고 혈연 거리에 따라 현조의 유택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세거지(世居地)가 없는 양반가문은 있을 수가 없다. 여러 대에 걸쳐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특히 동족부락을 형성하고 그곳과 주변의 양반과 혼인·교유 등의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양반 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더라도 자신의 가문을 인정받기 위하여 외가나 처가, 또는 토지와 노비가 있는 곳을 택하였다.
이렇게 향촌사회에서 유력한 양반가문으로 인정받게 되면 남원의 둔덕 이씨, 노봉 최씨, 안터 안씨, 뒷내 노씨의 경우처럼 본래의 본관보다는 세거지를 많이 썼다. 서울의 경우 외척세도가였던 안동 김씨들은 장동 김씨로 불렸다.
이러한 개인과 가문을 양반으로 인정해 주는 사회통념상의 조건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시대에 따라 그 중요성도 변하였다.
중앙관리들이 별로 많지 않던 조선 전기에는 재지품관들이 가장 소망하던 혼인대상은 중앙의 고위관리 가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유배를 당한 사람이나 그 동족도 선망의 혼인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실제로 그 혼인을 통하여 가문을 세운 예가 많다.
그리고 성리학이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가자 양반 조건으로 성리학적 소양과 그 성취도가 중요시되었다. 예를 들면 경상도에서는 이황(李滉)의 자손, 충청도에서는 송시열(宋時烈)·김장생(金長生)·윤증(尹拯)의 자손이 최고의 혼인대상으로 꼽혔을 만큼 사회적 위세가 대단하였다.
기타 문집·족보·비석·서원 등도 주요한 과시거리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경제행위로서 양반이라면 토지와 노비와 같은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지만, 소유재산의 규모보다도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양반신분에는 더욱 중요하였다.
비록, 재산이 엄청나다고 할지라도 손님접대에 소홀하거나 굶주린 마을의 농민을 진휼하지 않으면 양반으로 존경받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회통념은 전기보다는 후기의 양반상에 더 가까운 것이며, 후기에 더욱 그런 쪽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도 물론 양반이 몸소 가사노동을 하거나 하면 천시받기도 했지만, 양반신분의 결정은 기본적으로 사회통념보다도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조에서 세조에 이르는 왕들은 강력한 전제 왕권을 행사하였다. 왕권이란 의인화된 국가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왕들은 국가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신분제도를 좀더 개방적으로 확정하고 운영하려고 하였다.
기득권을 독점적으로 누리려는 일부 관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측근으로서 신분이 미천한 사람, 양인·향리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과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이나 공신의 천첩 자손 등은 왕의 결단과 지지로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예가 많았다.
이것은 개별 사례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국가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실제로 국가와 양반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한 노비종모법과 종부법의 대결과정에서도 국가의 신분결정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전까지는 신분제도의 확정기로서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신분의 결정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정치적으로는 사림파가 중앙정계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사족과 향리의 가계가 확연히 분리되고 문중이 형성되었으며, 상속과 제사와 같은 사회구조와 관련된 풍속조차 변하게 되었다.
더구나 양반인구의 증가와 당쟁 때문에 관직 획득이 전보다 수월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는 양반신분은 법적 제도 외에도 굳건한 사회적 통념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정치적으로 몰락하던 경상도지역에서는 재지양반에 의한 향촌지배가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됨에 따라, 재지양반이 중앙권력에 덜 의존하여도 될 사회경제적 기초가 확립되었다.
양반신분에 관한 이상의 내용을 줄여 말하면, 양반은 지주계급인 동시에 관료층이며, 국가의 법적 제도에 의하여 신분적 특권을 보장받은 지배신분이었다.
또 이들은 일정한 사회적 여러 조건을 구비하여야 양반신분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양반집권자들은 지배신분의 이원화를 단행하면서 향리를 양반과 구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우선 향리의 과거 응시 자격을 제한하였고, 일정한 기준에 의해 이미 양반관료가 된 자들까지 향리로 환원시켰다. 또한 중앙집권력 강화 정책에 의해서도 향리의 세력과 신분적 지위가 약화되어 갔다. 외역전(外役田)의 혁파,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의 제정, 유향소(留鄕所)의 설치 등이 그 방법이었다.
이에 따라 전 향리의 80% 정도가 토착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향리는 지방관의 수족과 다름없게 되었고, 심지어는 향리의 역에서 도망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래도 향리들은 이전 토호의 실력과 실무행정 담당자의 권세로, 비록 양반에게는 제압을 당하였지만 양인과 노비 등 일반 주민에게는 여전히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향촌사회에서의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중간적인 것으로, 서울의 기술관인 중인들과는 관직·혈연·교유·혼인의 면에서는 소원하였지만 양반과 양인의 중간에 있다는 공통점으로 중인신분에 포함될 수 있었다.
사실, 중간 신분으로서의 향리와 기술관은 직역의 세습, 신분내혼제, 관청 근접 지역 내 거주, 이기타산적이며 깔끔한 사고방식 등의 면에서 서로 유사한 점을 많이 공유했고, 다른 신분과도 분명히 구별될 수 있었다. 중앙 아전인 서리들도 향리와 마찬가지로 양반과 구별되었다.
이들도 고려시대에는 양반으로 상승하는 길이 넓었고, 봉록과 토지까지도 지급받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였다. 과전법상의 과전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진급을 하는 데도 양반보다 근무 일수가 더욱 많아야 했고 그나마 체아직(遞兒職)이었기 때문에 봉록도 형편없었고 승진의 기회도 좁았다.
즉, 다른 중인처럼 한품서용(限品敍用)에 해당되어 승진이 막혔다. 또한 서리와 함께 중앙관서에서 기술을 담당하는 의관·역관·산관·율관·음양관 등도 15세기 후반부터 점차 양반과 다른 신분이 되었다.
이들 신분의 특징은 17세기에 이르러 소수의 명문 기술관 가문이 잡과를 석권함으로써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얼자손들도 역시 금고되어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고, 제사·입양·상속에서 적자손에 비하여 많은 차별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제한 규정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반사회에서 서얼자손을 더욱 차별하게 된 것은 성리학적 관념 때문이었다.
서얼은 다른 중인신분과 마찬가지로 자기들끼리의 혼인·교유·학맥·동족부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서얼은 본래 양반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다른 중인신분과는 다른 면도 많았고, 서얼들 사이에도 다양한 분자가 뒤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서얼은 군역을 부담하여야 하였는데, 지역과 가문에 따라서는 군역을 면탈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다른 양반적손들과 대립하는 서얼가문도 적지 않았다. 반면 한미한 양반의 서얼인 자는 일반 양인보다 못 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양반과 다름이 없었지만 법적 제도와 사회 통념상 차별을 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양인은 상인·백성·평민으로 불린 신분이었다. 양인이라는 용어는 삼국시대에는 별로 쓰이지 않던 중국에서 차용한 신분개념의 단어이다. 양인은 노비와 함께 사회 재생산을 담당한 피지배계급이었다.
그들은 소농민경영자 또는 전호이거나 각종 수공업자와 상인이었다. 양인의 신분관계도 역시 국가권력과 밀접하다. 양인은 국가의 조세와 공물 외에도 신역을 부담하였다. 양반집권자들은 양민확대정책을 꾸준하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는데, 양인이야말로 국가의 물질적·무력적 기초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반의 개인적 계급이익을 위해 약간의 사유지와 노비를 제외한 토지와 인민은 국가권력의 관할로 이양시키는 데 힘을 합쳤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들지 못한 양인은 국가 유지에 필요한 물질과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국역체제가 바로 물질과 노동력의 수탈체제인 것이다. 결국 개인에게 부과되는 국역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졌다. 자영 소농민이나 전호와 같은 생산인구이면서 무예와 학문이 없는 자는 국역에서 양반처럼 특혜를 받을 수가 없었다. 특히 군역은 국역 중에서도 신분과 관련이 깊었다.
법률적으로는 양반과 양인은 똑같이 군역을 부담하여야 했지만, 양반과 양인의 병종은 신분에 따라 분명히 구별되었다. 양인의 병종은 양반이 입속되지 않던 별패(別牌)·시위(侍衛)·영진군(營鎭軍)·수성군(守城軍)·기선군(騎船軍)·수군 등이었으며, 정병(正兵)으로 복무하지 않으면 봉족(奉足)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여말선초에는 신분구조가 아직 유동적이었고 고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인 상층에서는 한량(閑良)에 속하거나 갑사·별시위 등에 선발되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는 자도 나왔다. 그러나 일단 신분제도가 확정되자 일부 특수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반 병종은 양인만의 것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양반과 양인의 신분 구별은 군역을 부담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쉽게 알 수 있었다. 양인이 교대로 일정기간 복무를 하는 부병제적 군사제도가 붕괴된 뒤에도 양인의 군역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신분 규정을 법적 제도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신분의 역사적 실체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의 신분제는 양반과 양인을 신분적으로 차별하는 법제가 없으므로 양천제이며, 그 단적인 예는 전기 과거에 급제한 양인 출신이 20여 명이나 된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20여 명이 모두 양인 출신인가라는 실증적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소수인 그들 존재의 의미는 고려 후기와 말기의 획득적 신분단계의 신진사대부세력이 새 왕조에 들어와 귀속적 신분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그 고착성이 미진한 상태에서 생긴 부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양반과 양인의 신분적 차등을 부정하기 위하여는 수군으로 군역을 치른 자 가운데 양반신분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물론, 양인이 양반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 두절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양인이 양반신분의 조건을 갖추기가 어렵고, 설사 갖춘다고 하더라도 양반으로 인정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국가 차원의 법제적 구속보다 주변 사람들의 사회 통념을 극복하기가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양인보다 더 아래 신분이었던 노비는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물적 재산처럼 매매·상속·저당·증여가 가능하던 최하층 계급이었다. 노비는 소유자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의 직업·예속도·사회적 지위 등에서 차이가 약간 있었다.
공노비는 국가의 기관에 소속되어 번을 나눠 뽑아서 각종 잡역이나 수공업품 제조에 종사하거나 신공(身貢)을 바쳤다. 사노비는 개인에게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강한 예속을 받았고, 주로 가사노동은 가내노비가 농업노동은 외거노비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 특히 주인과 멀리 떨어져 살고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던 외거노비는 주인에 대한 의무는 신공밖에 없었으므로 오히려 여타의 노비보다 자유로운 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이 자신을 매매하면 그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가내노비와 같았다. 노비는 소유자가 국가이든 개인이든 간에 소유자의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였다.
공적 기관인 국가의 관서는 노비의 소유관계에서는 마치 사인(私人)과 같이 공노비를 착취하려고 하였고, 양반들은 천한 가사노동과 농업경영을 위하여 노비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사노비의 주인 신분이 반드시 양반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양인도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고, 드물고 특별한 경우지만 노비도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노비에 관한 법률은 소유주의 소유권 및 처분권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국가는 노비소유주인 양반의 공동이익 실현기구였으므로 노비신분의 판정·매매·혼인·신공·입역·형벌 및 노비재산의 귀속 등에 관련된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만큼 노비의 신분적 지위는 열악하였고, 상승의 기회는 거의 두절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노비소유주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노비를 그곳 관리의 도움을 받아 관리하던 예가 많았는데, 이것은 거의 관행이었던 것 같다. 노비의 법적·신분적 지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형법이었다.
예컨대 양반인 노비소유주는 관청의 허가를 얻어 노비를 죽일 수 있었지만, 노비가 양반을 구타하면 강상죄에 적용되어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와 같으며, 노비는 항상 공손하여야 한다고 양반들은 말하였다.
양반노비주들은 노비 경영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노비세전법을 만들고 그것을 불변의 원칙으로 전제한 뒤, 노비 신분의 판정과 소유관계를 결정하는 종모법과 종부법을 시행하였다.
국가는 양인을 늘리기 위하여 종부법을, 개인 소유주는 종모법을 소망했다. 따라서 양자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에 따라 이 두 법이 빈번히 교체되었다.
그렇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개인 소유주들은 양천교혼(良賤交婚)의 법까지 어겨가면서 노비 증식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소생이 확실하게 자신의 소유가 되는 양부(良夫)와 자기 비의 혼인을 아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그렇지 않은 양녀(良女)와 자기 노의 혼인은 법 그대로 엄중히 막았다.
이와 같은 노비의 법적·현실적 위치 때문에 노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말하는 동물’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노비는 동물처럼 어미만 알고 아비는 모른다는 근거로 종모법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비는 노보다 더욱 열악한 처지를 감수해야 하였다. 또한 비는 비록 도망을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별로 없었으므로 구속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비는 중요한 재산 증식 수단이 되었고, 따라서 비 중에는 아버지가 다른 경우가 많았으며, 성 도덕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족구조가 모계적인 면도 두드러졌다. 노비는 매매가 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였기 때문에 족적 기반을 형성한다는 자체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후기에 들어서 외거노비의 경우는 그것이 가능하기도 하여 신분 상승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분적 지위에서 기본적으로 생성된 노비의 생활양식은 유교적 가치에서 보면 비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노비는 자연히 혹심한 사회적 천대를 면할 수 없었다.
양인 중에 빈곤층은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일도 많았지만, 비부(婢夫)나 고공(雇工)이 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노비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더구나 양반은 당장 아사할 지경에 처했더라도 노비가 될 수는 없었다.
생존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사회적 삶은 끝난 것이며, 조상과 자손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분제도, 그 중에서도 노비제도가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가를 말해 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후기의 신분 변화
조선 후기 신분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호적과 양안을 주요 자료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연구는 김용섭(金容燮)·정석종(鄭奭鍾)·한영국(韓榮國)·최재석(崔在錫)·김영모(金泳謨)·김석희(金錫禧)·박용숙(朴容淑)·시카다(四方博)·소머빌(SomerVille,J.N.)·와그너(Wagner,E.W.) 등이 행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신분구조는 17세기 말까지 소수의 양반과 다수의 상민·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말기로 올수록 신분구조가 변화되어 다수의 양반과 소수의 상민·천민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시카다의 대구부 호적조사에 의하면, 1760년에 9.2%의 양반호가 1858년에는 70.3%로 급격히 증가했고, 53.7%의 상민호가 28.2%로 감소하고 있다. 또한 37.1%의 노비가 1.5%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리고 김영모 조사에 의하면, 1684년에 4.6%의 양반호가 1870년에는 0.8%로 감소했고, 준양반호는 14.8%에서 41.7%로 증가했으며, 중인호는 3.0%에서 16.6%로 증가했고, 양인호는 17.4%에서 4.7%로 감소했으며, 천양은 7.4%에서 11.2%로 증가하였으며, 천인은 10.3%에서 10.8%로, 그리고 노비는 37.6%에서 2.2%로 격감하였다.
이것을 보면 168년 동안 급속한 양반의 증가와, 상민노비의 감소현상에서 특히 상민의 양반화와 노비의 상민화를 생각할 수 있다. 소머빌의 울산부 호적조사에서도 1729년에 유학(幼學, 10.4%)과 향반(14.5%)이 1804년에는 34.0%로 증가했고, 중간계급도 같은 기간에 11.8%에서 15.7%로 약간 증가했다.
그러나 상민은 같은 기간에 47.2%에서 48.0%로 거의 증가하지 않았으며, 노비는 26.5%에서 0.5%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모의 조사에 의하면 1684년에서 1885년간의 신분변화가 양반은 3.0%에서 1.0%로 감소하고, 준양반은 2.2%에서 37.4%로, 중인은 0.4%에서 32.1%로 증가하고, 양인은 34.4%에서 12.2%로 감소되고, 천양은 1.3%에서 7.7%로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노비는 46.0%에서 0.1%로 감소하였다. 단성현(丹城縣)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여기에서 상민과 중간계급의 구성비가 거의 변화하지 않고 유학·향반과 노비의 경우는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신분의 상승이동을 의미한다.
호적상으로 밝혀진 이와 같은 사실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요즘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즉, 조선 후기 신분의 상승적 이동이 농촌과 도시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만, 과연 호적조사에서 나타난 신분변화와 마찬가지로 사회계층적 지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실제 호구상으로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호적대장에 누락자가 많았기 때문에 표본의 타당성이 문제가 되고, 호적으로 직역과 신분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호적상에 그러한 변화가 존재한다면 실제는 그 이전에 신분 해체가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신분제도가 응시·입사·징세·군역에서도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 하였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용된 양반·상민·노비의 신분개념이 사회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개념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적조사에 의해 신분구조를 파악한 결과, 양반의 증가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대부분인데, 과연 호적에서 나타난 유학=양반=지배계급의 등식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대구부의 호적에 나타난 유학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면서 전통 교육을 이수한 상민, 즉 피지배계급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의 일부(부농)는 군관·향리·업무(業武) 등과 함께 중간층을 형성하는 것 같다.
필자의 분류개념에 의해 대구부의 신분구조를 재측정했더니 지배계급인 양반호는 전체의 5% 내외이고 중간계급은 20% 정도이며, 나머지는 하층계급에 속하였다.
이러한 신분구조 변화의 요인을 일본인 학자는 인구의 자연 증가나 사회적 부패라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피지배계급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계급의식의 발전이 그들의 신분상승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뼈대를 이루는 신분제도와 구조의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실학자와 개화세력이 나올 수 있었고 농민혁명도 터질 수 있었으며, 근대지향의 진보적 교지(敎旨)와 갑오개혁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제도가 허구가 된 실정에서 봉건체제의 유지는 불가능한 것이고, 이것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경우에 안팎의 도전을 받는 것이다.
그러한 도전 형태를 민란·화적·동학군 및 군국기무처의 개혁 요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갑오개혁 중에 나온 신분 개혁 내용은 봉건 신분체제를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제도적 개혁이었다.
비록 그러한 신분 개혁이 즉시 실현되지는 못 하였지만, 반상제도와 문벌귀천 및 노비제도의 철폐, 그리고 과부재혼·면천 등은 근대 신분질서를 형성하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신분이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존립하기 어려우면 자연히 이미 형성된 계급 개념이 새로운 인간관계, 즉 사회관계를 측정하는 척도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다.
여지껏의 신분 개념은 관직과 혈통 및 토지 소유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갑오개혁 이후에는 점차 직업, 특히 토지 소유관계가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실 19세기 우리 나라의 신분 또는 계층구조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갑오개혁 이후에 사회변화와 신분변화가 대단히 심하였고, 동시에 계층 평가의 요인도 급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호적이나 양안(量案) 및 다른 자료에 의한 계층 측정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후의 자료나 단편적인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영역닫기영역열기신분 소멸과 의식의 잔존
조선 후기 신분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호적과 양안을 주요 자료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연구는 김용섭(金容燮)·정석종(鄭奭鍾)·한영국(韓榮國)·최재석(崔在錫)·김영모(金泳謨)·김석희(金錫禧)·박용숙(朴容淑)·시카다(四方博)·소머빌(SomerVille,J.N.)·와그너(Wagner,E.W.) 등이 행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신분구조는 17세기 말까지 소수의 양반과 다수의 상민·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말기로 올수록 신분구조가 변화되어 다수의 양반과 소수의 상민·천민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시카다의 대구부 호적조사에 의하면, 1760년에 9.2%의 양반호가 1858년에는 70.3%로 급격히 증가했고, 53.7%의 상민호가 28.2%로 감소하고 있다. 또한 37.1%의 노비가 1.5%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리고 김영모 조사에 의하면, 1684년에 4.6%의 양반호가 1870년에는 0.8%로 감소했고, 준양반호는 14.8%에서 41.7%로 증가했으며, 중인호는 3.0%에서 16.6%로 증가했고, 양인호는 17.4%에서 4.7%로 감소했으며, 천양은 7.4%에서 11.2%로 증가하였으며, 천인은 10.3%에서 10.8%로, 그리고 노비는 37.6%에서 2.2%로 격감하였다.
이것을 보면 168년 동안 급속한 양반의 증가와, 상민노비의 감소현상에서 특히 상민의 양반화와 노비의 상민화를 생각할 수 있다. 소머빌의 울산부 호적조사에서도 1729년에 유학(幼學, 10.4%)과 향반(14.5%)이 1804년에는 34.0%로 증가했고, 중간계급도 같은 기간에 11.8%에서 15.7%로 약간 증가했다.
그러나 상민은 같은 기간에 47.2%에서 48.0%로 거의 증가하지 않았으며, 노비는 26.5%에서 0.5%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모의 조사에 의하면 1684년에서 1885년간의 신분변화가 양반은 3.0%에서 1.0%로 감소하고, 준양반은 2.2%에서 37.4%로, 중인은 0.4%에서 32.1%로 증가하고, 양인은 34.4%에서 12.2%로 감소되고, 천양은 1.3%에서 7.7%로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노비는 46.0%에서 0.1%로 감소하였다. 단성현(丹城縣)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여기에서 상민과 중간계급의 구성비가 거의 변화하지 않고 유학·향반과 노비의 경우는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신분의 상승이동을 의미한다.
호적상으로 밝혀진 이와 같은 사실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요즘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즉, 조선 후기 신분의 상승적 이동이 농촌과 도시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만, 과연 호적조사에서 나타난 신분변화와 마찬가지로 사회계층적 지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실제 호구상으로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호적대장에 누락자가 많았기 때문에 표본의 타당성이 문제가 되고, 호적으로 직역과 신분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호적상에 그러한 변화가 존재한다면 실제는 그 이전에 신분 해체가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신분제도가 응시·입사·징세·군역에서도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 하였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용된 양반·상민·노비의 신분개념이 사회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개념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적조사에 의해 신분구조를 파악한 결과, 양반의 증가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대부분인데, 과연 호적에서 나타난 유학=양반=지배계급의 등식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대구부의 호적에 나타난 유학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면서 전통 교육을 이수한 상민, 즉 피지배계급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의 일부(부농)는 군관·향리·업무(業武) 등과 함께 중간층을 형성하는 것 같다.
필자의 분류개념에 의해 대구부의 신분구조를 재측정했더니 지배계급인 양반호는 전체의 5% 내외이고 중간계급은 20% 정도이며, 나머지는 하층계급에 속하였다.
이러한 신분구조 변화의 요인을 일본인 학자는 인구의 자연 증가나 사회적 부패라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피지배계급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계급의식의 발전이 그들의 신분상승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뼈대를 이루는 신분제도와 구조의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실학자와 개화세력이 나올 수 있었고 농민혁명도 터질 수 있었으며, 근대지향의 진보적 교지(敎旨)와 갑오개혁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제도가 허구가 된 실정에서 봉건체제의 유지는 불가능한 것이고, 이것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경우에 안팎의 도전을 받는 것이다.
그러한 도전 형태를 민란·화적·동학군 및 군국기무처의 개혁 요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갑오개혁 중에 나온 신분 개혁 내용은 봉건 신분체제를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제도적 개혁이었다.
비록 그러한 신분 개혁이 즉시 실현되지는 못 하였지만, 반상제도와 문벌귀천 및 노비제도의 철폐, 그리고 과부재혼·면천 등은 근대 신분질서를 형성하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신분이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존립하기 어려우면 자연히 이미 형성된 계급 개념이 새로운 인간관계, 즉 사회관계를 측정하는 척도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다.
여지껏의 신분 개념은 관직과 혈통 및 토지 소유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갑오개혁 이후에는 점차 직업, 특히 토지 소유관계가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실 19세기 우리 나라의 신분 또는 계층구조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갑오개혁 이후에 사회변화와 신분변화가 대단히 심하였고, 동시에 계층 평가의 요인도 급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의 호적이나 양안(量案) 및 다른 자료에 의한 계층 측정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후의 자료나 단편적인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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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사회사연구  (허흥식, 일조각,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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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이수건, 일조각,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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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회사연구  (송준호, 일조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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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사회신분제의 붕괴」(정석종,『19세기의 한국사회,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1972)

  • 「1∼3세기의 민(民)의 존재 양태에 대한 일고찰」(홍승기,『역사학보』 63,1974)

  • 「십팔·십구세기 대구지역의 사회변화에 관한 일시론」(한영국,『조선학보』 80,1976)

  • 「조선후기 향리신분변동여부고」(최승희,『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지식산업사,1983)

  • 「조선후기 향안(鄕案)의 성격변화와 재지사족」(김인걸,『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지식산업사,1983)

  • 「갑오농민전쟁의 주체세력과 사회변동」(신용하,『한국사연구』 50·51합집,1985)

  • 「1894년의 사회신분제의 폐지」(신용하,『규장각』 9,1985)

  • 「조선후기 中人(중인)에 대하여(한영우,『한국학보』 45,1986)

  • 「조선시대 노비의 신분적 지위」(이성무,『한국사학』 9,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7)

  • Social Stratification in Seven-teenth Century Korea(Wagner,E.W.,Occasional Papers on Korea No.1,1972)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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