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

함안 말이산 고분군 / 도항리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 도항리 고분군
고대사
유적
사람의 시신을 매장한 시설물을 지칭하는 용어.
내용 요약

고분은 사람의 시신을 매장한 시설물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인간의 지능 발달과 함께 무덤의 기념물화가 시작되면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식의 무덤들이 만들어졌다. 무덤 중에서도 고대국가 형성 이후의 무덤을 고분이라 하여 역사를 연구하고 재구성하는 학술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고분에 대한 연구는 묘지와 그 분포, 봉토 및 묘역 시설, 매장주체시설 및 매장법, 껴묻거리(부장품) 등 4가지 요소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다.

정의
사람의 시신을 매장한 시설물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옛날 무덤 중에서도 역사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무덤만을 고분(古墳)으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모든 고분은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옛 무덤은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하에 시신을 매장하고 지상에 아무런 시설을 가하지 않은 것을 묘(墓)라고 하고, 반대로 지상에 흙을 쌓아 올려서 시설을 가한 것을 분(墳)이라고 하여 묘와 분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러나 현대는 양자를 모두 묘로 통일하여 호칭한다. 일본에서는 시신을 지하에 매장하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시설을 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분묘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고고학에서는 흙 또는 돌을 쌓아 올린 분구가 있고, 그 내부에 유해 매장을 위한 시설을 갖고 있는 시설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덤은 인간의 시신을 부패로부터 위생적으로 처리하려는 데서 발생하였다. 무덤의 역사는 후기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로 올라가는데, 그 당시는 지면을 파서 얕은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후 위에 흙을 덮었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서 무덤은 기념물화(記念物化) 하여 시설이 확대되고 견고하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종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인류의 출현 이후 무덤에 관한 자료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연구상 이 많은 자료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취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사시대의 무덤은 각 시대 연구에서 취급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경향이고, 고대국가(古代國家) 형성 이후(역사시대)에 속하는 무덤만을 고분이란 이름으로 다루게 되었다. 한국역사와 결부시켜서는 고조선(古朝鮮)시대부터 시작하여 삼한(三韓)시대 ·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 · 고려 · 조선시대까지 만들어진 무덤을 고분에 포함시켜 고고학적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고분의 구성요소

고분은 ①묘지(墓地)와 분포(分布), ②분구[墳丘: 봉토(封土)] 및 묘역시설(墓域施設), ③매장주체시설(埋葬主體施設) 및 장법(葬法), ④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 등 4개의 주요 요소로 구성된다.

묘지와 분포

고분이 점유한 토지를 묘지라고 하고, 묘지가 소재한 지역과 지점의 지형에서 다른 고분과 어떤 관계를 갖고 소재하는 현상을 고분의 분포라고 한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이후 인간은 주거지와는 별도로 씨족(氏族)의 묘지를 설정하였다. 역사시대에 들어 와서는 가족 공동묘지의 형태가 가장 보편적이었고, 통일신라 이후는 수장(首長) 등 권력자는 단독으로 설정하여, 왕릉(王陵)은 대개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석촌동고분군 · 송산리고분군 · 능산리고분군백제왕실 묘지의 좋은 예이다. 경주 황오동 · 경주 황남동 등지의 묘지에서도 가족단위의 공동묘지를 볼 수 있다. 그 외 가락동고분군 · 조양동고분군 · 노동동고분군 · 노서동고분군 · 고령 지산동고분군 · 함안 말이산고분군 등은 고분군(古墳群)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이며, 모두 혈연적 관계로 이루어진 최고 지배계층의 공동묘지이다.

지형상으로 보면,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고인돌(支石墓)돌덧널무덤(石槨墓)은 천변 낮은 언덕 위에 많이 만들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전기에는 하천변 또는 근거리의 평야지대를 선호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구릉상이나 산 중턱을 선호하였다. 백제의 전기 한성(漢城)에서는 평지에 주로 묘지를 설정하였으나 중기 이후 웅진(熊津) · 사비(泗沘) 시대에는 고구려와 같이 구릉 또는 산의 중턱 남사면에 묘지를 많이 조성하였다. 신라의 전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경주분지의 평지에 주로 묘를 축조하였고, 중고기(中古期)와 통일신라시대에서는 산 중턱 남사면에 축조하였다. 산 중턱 남사면을 선호한 것은 6세기경부터 이용하기 시작한 풍수지리사상(風水地理思想)의 영향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 필수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구릉의 정상부 능선상에 묘지를 점지하는 경우도 고령 지산동고분군 등 가야(加耶)지역에서 볼 수 있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구릉상에 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분구(봉토) 및 묘역시설

일반적으로 봉토라고 하는 분구는 지하 또는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을 최종적으로 보호하고, 묘임을 표시하며, 규모와 장식으로서 피장자(被葬者)의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분구에는 흙무지[토묘(土墓)] 또는 돌무지[석묘(石墓)]의 두 종류가 있다. 매장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흙무지는 원시시대에는 지면을 겨우 덮은 정도[복토(覆土)]로 낮고 작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높아지는데, 정치적 권력과 결부되어 지배계급의 권위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분구의 규모가 사람의 키보다 높아 질 경우 고총고분(高塚古墳)이라고 하는데, 삼국시대에 절정에 달하였고, 이 시기는 절대왕권(絶對王權)과 관련이 깊다.

흙무지무덤의 높은 분구는 중국으로부터 낙랑(樂浪)을 통하여 들어 와서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시대에 성행하였고, 일부는 왜(倭)로 건너가 그곳 무덤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흙무지무덤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인데, 이 경우는 매장주체시설이 지상 묘단 위에 설치되며 나무덧널[木槨]과 돌무지가 특별히 장대하기 때문에 외부에 설치되는 분구는 자연히 거대하게 되었다. 황남대총(皇南大塚) · 천마총(天馬塚) 등은 좋은 예가 된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전기 통구(通溝)지방에서 크게 성행하는데, 이 형식은 백제 초기에 영향을 미쳐 석촌동에 다수 축조되었다. 신라에서는 순수 돌무지무덤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도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한정된 지역에서만 발견된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는 내부시설인 덧널의 외부에 돌무지가 쌓이고, 그 위에 흙무지가 올라가는 형식이다.

무덤무지의 재료와 함께 중요한 것은 무덤무지의 형상이고, 그 형상을 기준으로 하여 무덤의 종류를 분류한다. 분구 형상의 변천을 출현순서로 보면, 맨 먼저 출현한 형상은 지면 위에 낮은 보토(補土) 정도로서 평지보다 약간 높은 형상이었고, 이 형상이 점차 높아져서 분구가 형성되었다. 분구는 평면이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으로 된 두 형이 기본을 이룬다. 방형으로 된 분구는 피라밋(Pyramid)처럼 높이 올라갈수록 좁아지다가 맨 위를 평편하게 만들고, 이 형상을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 또는 방분(方墳)이라고 부른다. 다음 원형으로 된 분구는 쪽박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반구형상(半球形狀)인데 통상적으로 원형분구(圓形墳丘) 또는 원분(圓墳)이라고 부른다.

이 두 형식은 고대 중국에서 일찍 발생하여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고, 두 기본 형식이 변형되어 몇 가지의 다른 형상의 분구가 출현하게 되었다. 방분으로는 고구려 초기에 압록강 유역 통구에서 성행하였는데, 돌무지무덤과 흙무지무덤의 두 종류가 있다. 대형의 돌무지무덤은 계단식으로 축조한 것들도 있는데, 태왕릉(太王陵)은 3층, 장군총(將軍塚)은 7층 계단으로 되었다. 흙무지의 방분은 후기에는 기단부만 돌무지로 된 대형분구들이 평양지방에서 축조되었는데, 장군총 같은 계단식 돌무지무덤[階段式積石塚]의 형식이 흙무지무덤과 혼합되어 이루어진 형식이다.

원분에도 돌무지무덤과 흙무지무덤의 두 형식이 있다. 돌무지원분은 방분보다 소형이 대부분이고, 고구려 초기의 압록강 유역에서 다수 확인된다. 돌무지원분은 자연스러운 돌무지와 같은 단순한 돌쌓기에서 온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흙무지원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방분과 원분의 결합형식으로 원방형 흙무지무덤이 있다. 분구의 하단은 방형이고 상부는 원형으로 되어 있는 형식이다. 원방형 돌무지무덤은 아직 발견된 일이 없다.

한편 전방후원분이란 형식의 복합형 분구의 형식이 있다. 분구의 한 부분은 방형의 제단이고, 다른 한쪽은 원형의 분구가 결합된 형식인데, 삼한시대[청동기 만기(晩期)]에서 소위 거석분묘군(巨石墳墓群)에서 더러 발견된 일이 있다. 이 형식으로 수량이 가장 다수인 것은 삼국시대 중 · 후기(5∼6세기) 남해안과 영산강 유역에서 십 수기가 확인된 바 있다. 일본에서는 전방부(前方部)와 후원부(後圓部) 양 쪽에 매장시설이 축조된 것들도 상당수 있다. 전방후원분에도 돌무지로 된 고분도 상당수 있다. 한반도의 마산 · 합천 · 진안 등지의 고인돌군[支石墓群] 지대에서 발견된 것들은 돌무지도 있고 흙무지도 있다고 한다. 이 형식의 분구는 전기의 것은 자라모양이 많고 중기 이후의 형상은 장고(杖鼓)모양이 대부분이다.

또한, 두 개의 분구가 결합되거나 연결되어 하나의 분구를 이룬 것으로 표주박형무지(표형분瓢形墳) 또는 쌍분(雙墳)이라고 하는 형식이 신라 전기에 유행하여 경주지방과 낙동강 동부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이 형식의 고분은 1분구1묘곽(一墳丘一墓廓)의 단장(單葬)을 고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분구를 연결하여 가족합장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분구의 표면을 변형하거나 시설물을 가한 분구도 있다. 삼국시대의 흙무지무덤의 하단부 둘레에 돌담식으로 축대를 쌓은 호석(護石)이 있다. 이 시설은 분구 내의 묘단의 외면이 노출된 것인데 분구 전체의 기초가 되며 분구의 흙을 흘러내리지 않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 시설은 삼국시대에서는 보편적이었고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들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조선시대에는 별도의 장대석축으로 된 보호석대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것으로 경주의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병풍석(屛風石)이 있는데, 외면을 판석형으로 다듬고, 많은 경우 그 표면에 십이지상(十二支像: 十二支神像)을 양각하였다. 그 중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경우는 병풍석 밖으로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전신상(全身像)을 조각하여 수립(竪立)하였고, 경주 김유신묘(金庾信墓) · 괘릉(掛陵) · 경덕왕릉(景德王陵) 등은 판석면에 양각한 형식이다.

고분의 분구가 단축(段築)으로 되어 있는 고분은 통구의 장군총 등 고구려의 전기 고분에서 다수 보이고, 한반도 내에서는 석촌동3호분 등 백제고분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일본의 고분에서는 3단 또는 5단의 단축이 보편화되어 있다.

분구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구역을 묘역이라 하고, 묘역 안에 부대시설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묘역시설은 단독묘 단위로 설치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가족묘지에서는 수기의 묘를 포함하여 묘역을 설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묘역시설 중에서 가장 일찍 출현한 것이 주구(周溝) 또는 주호(周濠)라는 것으로 분구 주위에 도랑을 파고 물을 담아 두어 외부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삼한시대의 묘로 알려진 주1에서 처음 출현하였고, 그 후로는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볼 수 있다. 석촌동3호분에서도 발견된 바 있고, 최근에는 영산강 유역의 고분에서 다수 확인되었다. 주구가 가장 뚜렷하고 규모가 큰 것으로는 전방후원분에서 나타나는데, 도랑보다 훨씬 커서 작은 호수를 이룬 것도 있다.

그 외 묘역내 시설로서는 상석(床石) · 묘비(墓碑) · 석인상(石人像) · 석수상(石獸像) 등이 있다. 상석은 분구 앞에 설치하는 제사용(祭祀用) 시설인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무열왕릉(武烈王陵)에서 볼 수 있다. 초기의 것은 간단하게 긴 돌을 가로 놓아 석단(石壇)을 만들었으나 통일기(統一期)에 들어서면 잘 다듬은 넓은 판석 1매를 돌로 괴어 상(床)을 만들었다. 가장 좋은 예는 괘릉에서 볼 수 있다. 묘비는 피장자의 생전 업적 등을 기록한 석비(石碑)를 말한다. 가장 오래된 묘비는 무열왕릉의 전방 우측에 있는 비석이고, 현재는 귀부(龜趺)이수(螭首)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은 없어졌다. 분구 앞의 묘비와는 달리 신도비(神道碑)라는 비석을 따로 수립하는데, 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며 분구와는 몇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고, 통구의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 묘에 많다. 석인상(문인상 · 무인상)은 분구 전정(前庭)에 세우는데, 피장자를 모시는 역할을 한다. 석수는 묘를 보호하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많은 경우 석사자상(石獅子像)을 설치한다. 상석 · 묘비 · 석인상 · 석수상 등이 가장 잘 구비되어 있는 고분은 신라의 성덕왕릉 · 괘릉 · 경덕왕릉 등이다.

매장주체시설 및 장법(葬法)

매장주체시설은 무덤의 핵심부분으로서 대개는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설치하며, 예외적으로 지상에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삼국시대의 토축묘(土築墓)라고 하는 분구묘(墳丘墓)의 일종은 분구 중에 움무덤 · 옹관장(甕棺葬) · 토장(土葬) · 숯장[부탄장(敷炭葬)] · 목판장(木板葬) 등의 형식으로 몇 구의 시신을 매장[多葬]하기도 하였는데, 한성시기의 백제초기 고분 중에서 가락동2호분 · 석촌동고분군 등과 영산강 유역에서 그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또 고구려의 고분과 신라 전기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도 지상에 구축한 매장주체이다.

또 매장주체시설에 시신을 격납하는 방법에 따라 수혈식(竪穴式)과 횡혈식(橫穴式)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움무덤에서 출발하여 돌널무덤 · 돌덧널무덤 등이 되었고,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돌방무덤 · 벽돌무덤이 있다. 횡혈식은 수혈식에서 발전하였는데, 건축술의 도움으로 무덤 안을 넓히고 출입구를 만들어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던 가족합장을 충족하게 되었다.

인류가 고안한 최초의 매장시설은 움을 기본으로 하여 움에 돌이나 나무 또는 벽돌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구조물을 만들었다. 구덩이의 내부 둘레에 막돌[괴석(塊石)]로 돌벽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돌덧널무덤이 신석기시대 이후 돌이 많은 지대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한편 시신을 나무널에 넣어 움 안에 안치한 나무널무덤이 나무가 많은 지역에서 전통이 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판돌을 사용하여 나무 관을 모방한 돌널무덤도 만들었다.

돌덧널무덤과 나무널무덤을 기본으로 하여 시대가 내려가면서 구덩이를 크고 깊게 파고, 그 안에 돌 · 나무 · 벽돌 등 재료를 사용하여 몇 가지의 방무덤을 만들었다. 제일 흔한 형식으로서 돌을 쌓아 방처럼 만든 무덤이 있는데 이런 형식을 돌방무덤이라 하고,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다음은 통나무나 판자를 사용하여 방처럼 만든 덧널무덤이 낙랑시대와 삼국시대 전기에 유행하였다. 또 중국 한대(漢代)에는 돌방무덤에서 돌 대신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벽돌무덤이 유행하였는데, 역시 낙랑을 통하여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한때 성행하였다. 그 후 백제의 웅진시대(熊津時代)에는 중국의 남조(南朝)로부터 벽돌무덤 형식이 들어와서 왕실무덤으로 애용되어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武寧王陵)이 유존한다.

돌이나 나무 또는 벽돌로 만든 방모양의 돌방무덤 · 나무덧널무덤 · 벽돌무덤 등에서는 여러 시신을 한 묘혈(墓穴)에 묻기 위하여 방의 넓이를 확대하고 천정을 높게 만들고, 무덤방의 앞에서 시신을 격납하는 방식인 앞트기식[橫口式]과 통로[연도(羨道)]가 딸린 굴식[橫穴式]이 역시 중국 동한(東漢)시대로부터 들어와서 삼국시대 이후 크게 성행하였다. 매장주체시설이 방 모양으로 생긴 무덤에서는 시신을 넣는 보호구로서 모두 나무 널을 사용하는데, 신분에 따라 안널 · 중간널 · 바깥널 등 이중삼중의 널[삼중관(三重棺)]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돌방무덤을 축조하는 재료는 막돌[塊石]과 견칫돌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견칫돌은 깬돌[割石]로 만들고, 돌벽의 하부를 구성하는 기석(基石)은 큰 깬돌로 하는 경우와 막돌 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하였다. 방이나 통로의 천정에 사용하는 덮개돌은 주로 자연 판상석을 사용하였다. 벽돌무덤의 재료는 흙을 빚어 고온에 구운 벽돌을 사용하는데, 민무늬벽돌[무문전(無紋塼)]도 있지만 벽돌 표면에 무늬를 새긴 무늬벽돌(문양전紋樣塼)도 사용한다. 무늬벽돌에는 송산리6호분에 사용한 것과 같은 오수전(五銖錢)무늬벽돌과 무령왕릉에 사용한 연화문(蓮花文)벽돌이 있다.

돌방무덤을 구성한 부위와 시설에는 벽체, 천정, 바닥시설, 배수로시설, 관대(棺臺), 현문시설(玄門施設), 통로[羨道]와 막음벽[폐쇄석벽(閉塞石壁)] 등이 있다. 방벽은 4벽으로 형성되고 하단의 기석은 대형석을 사용하고 벽상하면서 점차 소형의 돌을 사용하여 벽면의 면적을 올라가면서 좁히고,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어서 틈을 메꾸는 방식으로 하고, 맨 위는 최종적으로 판상석을 올려 천정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동서남북의 벽이 만나는 귀퉁이에는 긴 돌을 건너 끼워서 각을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견고성을 높이는 방식을 채용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돌방에서는 말각조정식(抹角藻井式)이라 하여 귀퉁이를 가로지르는 다듬[치석(治石)]은 장대석을 놓아 사각형의 평면을 만들고 그 위는 다시 귀퉁이를 죽여 올라가는 방식으로 3∼5단까지 축조하는 방식이 성행하였다. 돌벽과 천정은 모두 회를 두껍게 발라 마무리하였다.

고구려의 토묘의 대다수(약 90기 이상) 고분과 백제의 송산리6호분 · 능산리동하총에는 4면벽에 벽화를 그렸다. 바닥시설은 잔자갈을 10여cm 두께로 깔거나 손바닥 크기의 판상석을 깔았다. 능산리고분군에서는 다듬은 넓은 판석을 깔았다. 바닥시설의 하부에는 대개의 경우 물이 빠지도록 배수로시설을 가한다. 능산리고분군의 중하총의 경우는 배수로 단면이 V자형이 되게 파고 그 안에 맨 아래는 모래, 그 위는 잔자갈을 채우고 모전석(模塼石)으로 덮었다. 소형 무덤은 도랑에 밤돌[율석(栗石)]을 채우기도 하였다. 송산리6호분과 무령왕릉에서는 배수로도 벽돌을 4∼5겹 겹쳐 쌓아 배수로를 18m 정도 만들었다.

관대는 시신을 안치하는 받침대를 말하는데, 시상(屍床)이라고도 한다. 주먹 크기의 자갈과 흙을 섞어 쌓아 단을 만들기도 하고, 백제의 판상석조 돌방에서는 잘 다듬은 판돌 1매를 길이로 놓아 개별관대(個別棺臺)를 마련하였는데, 이 경우는 관대가 곧 바닥시설이 된다. 고구려에 있어 돌방의 경우는 현문을 들어서면 가로로 통로를 남겨 놓고 방의 바닥 전면을 높게 돌로 쌓아 넓은 대를 마련하였다. 이런 방식을 전면관대(全面棺臺)라고 하고, 무령왕릉에서는 벽돌로 쌓은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현문시설(玄門施設)은 통로의 안쪽 끝과 주검방[玄室] 입구에 문 시설을 가구(架構)하는 것이다. 바닥에 긴 장대석을 반쯤 묻어 문지방석(門地枋石)을 놓고, 그 위 양쪽에 문기둥[문주(門柱)]을 세우고, 문미석(門楣石)을 올려놓아 문틀을 만들고, 판석으로 된 문짝[석비(石扉)] 또는 나무로 된 문짝[목비(木扉)]을 달았다.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에서는 나무문을 단 것으로 추측된다. 돌방의 현문시설은 낙랑의 벽돌무덤을 통해 동한에서 들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막음벽은 통로의 바깥쪽 끝부분에 설치하여 무덤 입구를 차단하는 시설로 견칫돌을 쌓아 올려서 무덤의 통로를 막는 시설이다. 무령왕릉에서는 벽돌벽을 쌓아서 입구를 막았다.

신라 전기에는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형식을 왕실과 귀족층에서 애용하였는데, 구덩이를 크게 파고 구덩이벽에 기대어 돌을 쌓고 그 안에 원목(原木)으로 나무덧널을 상자형으로 크게 짜서 설치하고 외면에 돌무지를 쌓는다. 나무덧널 안에는 나무널을 안치하였다. 경주에 있는 대형묘의 경우는 지하에 구덩이를 파지 않고, 지면에 1∼2m 정도의 기초단[묘단(墓壇)]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덧널과 돌무지를 쌓는데, 이 형식은 동양에서는 오직 신라에서만 성행한 특징적인 구조이다. 시신을 보호하는 도구로서 나무널이 일차적인 것이라면 나무덧널과 돌덧널, 돌방무덤에서 돌벽과 벽돌무덤에서 벽돌벽은 모두 이차적인 가구라고 할 수 있다. 널과 덧널가구는 신분에 따라 규모와 장식을 가해서 차별화 하였다.

무덤을 만들게 되는 원인인 시신의 처리방법[장법(葬法)]에는 ①시신을 그대로 지하에 묻는 시체장(屍體葬), ②시신을 불에 태우고 남은 골회(骨灰)만을 매장하는 화장(火葬)이 있다. 시체장에는 시신의 상태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으로 죽은 상태대로 곧고 바르게 뉘어 묻기[앙와신전장(仰臥伸展葬)], 시신의 사지(四肢)를 구부려서 묻기[굴신장(屈身葬)], 사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뼈만 추려서 항아리나 독에 넣어 묻기[옹관장(甕棺葬)], 그 외 숯을 깔고 그 위에 시신을 놓는 숯장, 나무판만을 깔고 그 위에 시신을 놓는 부판장(敷板葬) 등의 장법이 있다. 그리고 시신을 부패하기 전에 묻는 일차장(一次葬), 화장 혹은 육탈(肉脫) 후 취골(取骨) 등 중간단계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매장하는 이차장(二次葬)이라는 용어도 있다. 또 시신에 목관 · 석관 · 옹관 · 호관(壺棺) 등 보호장구(保護葬具)를 사용하지 않고, 바로 시신만을 지하에 매장하는 방법을 토장이라고 한다. 토장이 가장 원초적이고, 모든 장법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떤 장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무덤의 위치 · 구조 · 규모 등이 달라진다.

묘지의 지형은 묘의 방향과 침향(枕向: 시신의 두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풍수지리사상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현무(玄武)방향인 북침(北寢)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무령왕릉에서만은 묘문이 남향이면서 피장자도 남침(南寢)을 하여 같은 방향을 취하였다. 이 점은 송산리의 묘지는 북쪽에 금강이 서류(西流)하여 현무의 맥을 차단하고, 진정한 현무의 맥은 오히려 멀리 남쪽에서 오는 형국이기 때문에 남문 남침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주의 전기 돌무지덧널무덤들은 동향이 많다. 동향이 많은 것은 종족 이동의 방향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껴묻거리(부장품)

껴묻거리는 무덤에 시신을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품을 말한다. 고분에 껴묻거리를 함께 묻는 습관 인간이 사후세계에서도 생전과 같이 생활한다고 믿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갖추는 데서 연유하였다. 이 습관은 중기 구석기시대 무덤에서부터 나타나는 아주 오래된 장례 풍속이다. 중기 구석기시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지방의 테시크-타시(Teshik-Tash)의 동굴유적)나 신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에는 수량이 대단히 적다. 그것은 당시 실생활에 사용하는 도구나 용기가 발달하지 않은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철기시대로 내려오면 껴묻거리는 갑자기 수량이 많아지고 종류도 매우 다양해진다. 고대국가가 성립되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세력이 증대함에 따라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로 껴묻거리도 호화롭게 발전한다.

역사상 가장 귀중한 껴묻거리가 많았던 시대는 삼국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의 한대 이후의 매장사상(埋葬思想)의 영향도 다분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껴묻거리를 호화롭고 다양하게 부장하는 습관을 후장(厚葬)이라고 하고, 반대로 빈약하고 적게 묻는 습관을 박장(薄葬)이라고 하는데, 박장의 경우는 불교의 영향도 크게 미쳤다. 또 명기(明器)라고 하여 실물을 대신하여 작게 만든 물건을 무덤에 부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중국의 경우 은대(殷代)부터 나타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선시대에 도자기 종류의 명기를 많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껴묻거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특징을 나타낸다.

껴묻거리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복장에는 매장을 위한 수의(壽衣)가 있고, 장신구류에는 관모(冠帽)류, 목걸이(경식頸飾), 귀걸이(이식耳飾), 허리띠장식(과대銙帶), 가락지(지환指環), 팔지(천釧) 등이 있고, 별도로 동경(銅鏡)이 있다. 무구류에는 칼종류(도검刀劍), 창모(槍矛), 갑옷이 있다. 마구류에는 마안구(馬鞍具), 마면(馬面) 마갑(馬甲), 말발걸이(등자鐙子), 행엽(杏葉), 마령(馬鈴), 마탁(馬鐸) 등 말장식품으로 많은 종류가 있다. 생활용기류에는 저장과 운반용의 항아리, 독, 병이 있고, 식기종류로 대접, 접시, 높은굽접시(고배高杯), 발(鉢), 종지(완盌)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도구류에는 도끼 · 끌 · 낫 · 꺽쇠 · 못 등과 솥 · 다리미 · 초두(鐎斗) 같은 생활용구도 부장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돌널무덤에서는 마제석기(磨製石器) 몇 개와 약간의 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 간혹 붉은간토기(홍도紅陶)가 발견되기도 하나 수량은 아주 적은 편이다. 마제석기 중에는 석검(石劍)과 석촉(石鏃)이 대표적이다. 무문토기편은 주로 매장시설의 내부보다 밖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의식(祭祀) 행사 후에 일부러 깨서 매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와 철기는 극히 희귀한데, 청동기시대 말기에 속하는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비파형동검편(琵琶形銅劍片) 또는 철제검(鐵製劍)이 발견되기도 한다. 고흥 운대리 고인돌의 비파형단검편(琵琶形短劍片)과 부여 송국리의 돌널무덤의 비파형동검은 잘 알려져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삼국 · 고려시대 고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껴묻거리의 하나로 치는 동경은 얼굴을 비추는 화장도구이면서 신성(神聖)한 보기(寶器)이기도 하고 주술적(呪術的) 의미도 함께 갖고 있는데, 중국과 일본에 비해 수량이 적은 편이다.

초기철기시대의 껴묻거리로는 철제무기류, 철제도구류, 화폐류, 동경류, 마구류 등과 토기류가 많아진다. 삼국시대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종류와 수량이 부장되었는데, 앞에서 말한 모든 종류의 껴묻거리가 부장되었다. 경주의 황남대총 등 대형고분에는 2∼3만개가 넘는 유물이 부장되었고, 무령왕릉에서는 3천여 개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순금제 · 은제 · 동제 · 철제 · 옥류 등 고가의 미술품이 부장되었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경우는 토기를 중심으로 한 제사용 용기 등은 시신이 들어가는 현실의 머리맡 발치께, 그렇지 않으면 시신곽 밖의 근거리 공지에 부곽(副槨)이라고 하는 껴묻거리 전용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 신라 · 가야지역 무덤의 시신이나 관 밑에 덩이쇠(鐵鋌) 수십 개∼수백 개씩 깔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는 불교의 영향으로 껴묻거리는 점차 적어지고, 고려시대에는 더욱 적어져서 약간의 도검류와 토기 · 자기류가 부장되어 전체적으로 빈약한 감을 준다. 무령왕릉을 비롯한 백제시대 무덤에서는 더러 중국 도자기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순수하게 매장할 목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하여 무덤에만 부장한 것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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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1

초기철기시대 구덩이로 된 매장주체부 주위에 일정한 형태의 도랑(周溝)을 파 돌린 무덤.    바로가기

집필자
강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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