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구산문 ()

불교
개념
중국 선종이 유입된 후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9개 산문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구산문.
이칭
이칭
구산문
내용 요약

선종구산문은 중국 선종이 유입된 후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9개 산문을 가리킨다. 구산문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기에 중앙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여 그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여 가는 분위기 속에서 선종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구산선문은 지방호족의 세력 기반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가지산문 건립에는 김언경 등이 관여하였고, 희양산문은 심충과 가은현의 장군인 희필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이외에도 동리산문, 사자산문, 성주산문, 사굴산문, 희양산문, 봉림산문, 수미산문 등이 건립되었다.

정의
중국 선종이 유입된 후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9개 산문을 가리키는 불교용어. 구산문.
선종의 종류

도의(道義)가지산문(迦知山門), 홍척(洪陟)실상산문(實相山門), 혜철(惠哲)동리산문(桐裏山門), 도윤(道允)사자산문(獅子山門), 낭혜(朗慧)성주산문(聖住山門), 범일(梵日)사굴산문(闍崛山門), 지증(智證)희양산문(曦陽山門), 현욱(玄昱)봉림산문(鳳林山門), 이엄(利嚴)수미산문(須彌山門)을 말한다.

선종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기원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전한 뒤 혜능(慧能) · 신수(神秀) 등에 의해 선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크게 대두되었다.

선종의 성립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여,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을 깨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外息諸緣], 깊숙한 산간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좌선을 행하였다. 절대적인 불타(佛陀)에 귀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불성의 개발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의식구조와 부합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선종의 유행은 지방호족이 대두되는 사회상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신라 중엽 무열왕계가 의도한 전제정치는 점차 귀족세력의 반발을 받으면서 실패로 기울게 되었다. 혜공왕대가 되면 족장으로 생각될 수 있는 96각간(角干)이 서로 다투는 속에, 왕은 난중에 살해되고, 전국이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권력쟁탈전에서 패배한 중앙귀족이 지방의 연고지에 내려와 지방호족으로 되어 갔다.

한편, 신라 중엽 이래로 촌(村)의 장에 불과한 촌주(村主)들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꾸준히 그 지위를 향상시켜 왔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그들은 하나 내지 수개의 성을 다스리는 지방의 토착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여 성주나 장군으로 자처하였다. 해상무역이라든가 그 밖의 수단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 지방에 강한 지반을 가졌을 뿐 아니라 지방 민중과 쉽게 결합할 수 있어서, 사회의 명망과 권세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라 말기에 중앙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여 그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여 가는 분위기 속에서, 선종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선사(禪師)들은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6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다. 나말여초의 선종 승려 가운데 30인 정도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절반 가량이 김씨(金氏)로 나타난다. 아마 김씨가 아닌 나머지는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고, 김씨라 하더라도 경주 출신이 아닌 선사들은 역시 6두품 이하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굴산사(崛山寺) 범일의 할아버지인 술원(述元)이 명주(溟州)도독을 지냈으며, 실상사 수철(秀澈)의 증조부는 소판(蘇判)을 지낸 진골이었다. 이들은 아마 할아버지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골이었으나, 낙향하여 6두품으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낭혜의 가계는 본래 진골이었으나, 그 아버지 범청(範淸)대에 6두품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다. 낭혜가 무열왕의 8대손이어서 7세대 동일 친족의 방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범청이 김헌창(金憲昌)의 난에 가담해 있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된 뒤 6두품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일찍 성립된 실상산문 건립에 선강태자(宣康太子)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와 같은 왕실세력이 관여하기도 했지만, 9산선문은 지방호족의 세력 기반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가지산문 건립에는 김언경(金彦卿) 등이 관여하였고, 희양산문심충(沈忠)과 가은현(加恩縣)의 장군인 희필(熙弼)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봉림산문 건립에는 진례성군사(進禮城軍事)인 김율희(金律熙)와 김해부 진례성군사 명의(明義)의 장군인 김인광(金仁匡) 등 가야계 김씨 세력이 관여하였으며, 수미산문 건립에는 왕건(王建) 및 그 외척인 황보씨(皇甫氏) 세력이 후원하고 있었다.

보령김인문(金仁問)주1로서, 그 후손인 김흔(金昕)의 세력 근거지였으며, 그가 성주사를 건립하고 낭혜를 머물게끔 하였다. 김주원(金周元)계 세력을 배경으로 실제로 강릉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왕순식(王順式, 혹은 王荀息)사굴산문을 후원하고 있었다.

9산선문의 선사들은 때때로 왕실의 부름을 받고 이에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실과의 관련보다 지방호족과의 연계에 더 유의하였다. 경문왕의 부름에 응한 낭혜나 대통(大通) · 지증 등이 왕실에 계속 머물지 않고 산문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그 뒤의 부름에는 아예 응하지도 않았다.

선종의 규모

선종산문의 규모는 대단히 크다. 『성주사사적(聖住寺事蹟)』에 의하면, 성주사는 불전 80칸, 행랑 800여 칸, 수각(水閣) 7칸, 고사(庫舍) 50여 칸으로 무려 1,000칸에 이르는 거대한 사찰이었다.

사자산문 징효(澄曉)보인탑비(寶印塔碑) 건립에는 강릉 · 원주 · 죽산 · 공주 · 제천 · 진천 · 예천 등의 지방 세력과 촌주가 동원되었다. 즉, 사자산문의 세력은 강원도 일대는 물론 멀리 충청도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가지산문의 후원자인 김언경은 사재로 철 2,500근을 내어 노사나불(盧舍那佛) 1구를 주조하고는, 망수리(望水里) 남리댁(南里宅)으로부터 금 160푼[分]과 조(租) 2,000곡(斛)을 공출하여 그것을 장식하였다.

선종사원은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872년(경문왕 12)에 세워진 동리산의 혜철대사비문에 의하면, 당시 태안사(泰安寺)에는 2,939석 4두 2승(升) 5합(合)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으며, 전답이 494결 39부(負)였고, 좌지(坐地)가 3결, 하원대(下院代)가 4결 72부, 시지(柴地)가 143결, 염분(鹽盆)이 43결이며, 그 밖에 노(奴)가 10인, 비(婢)가 13인, 복전(福田)이 40인이었다고 한다.

희양산문의 토지는 동리산문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 지증대사비문에 의하면, 지증은 희양산문을 개창(開創)하기에 앞서, 864년(경문왕 4)에 단의장옹주가 자신의 수봉지인 토지와 노비를 사원에 기증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장(莊) 12구(區), 토지 500결을 이 절에 희사하였다.

그리고 희양산문에 딸린 막대한 토지는 12개 소의 장사(莊舍)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당시 사원에 딸린 장원은 여러 개의 장사로 나뉘어 분산되어 있었다.

성주산문의 토지는 이보다 더 많았지만, 다른 산문의 토지도 아마 이와 비슷하였다. 나말여초에 운문선사(雲門禪寺)는 왕건으로부터 500결의 토지를 받았는데, 거기에 딸린 장생표가 동가서현(東嘉西峴) · 서북매현(西北買峴) · 남아니재(南阿尼岾) 등 11개 지역에 있었으므로, 그 토지는 11개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장원에 딸린 장사를 경영하는 데는 소속 승려를 지장(知莊)으로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삼국유사』 3권 낙산이대성조(洛山二大聖條)에 의하면, 경기도 풍덕이거나 아니면 영월에 있었다고 추측되는 세달사(世達寺)의 장사가 강릉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승려 조신(調信)을 지장으로 파견하여 경영하였다.

선종사원에는 많은 문도(門徒)가 거주하고 있었다. 성주산문의 경우 낭혜의 이름있는 제자가 2,000인이나 되었으며, 여엄(麗嚴)의 제자가 500인, 현휘(玄暉)의 제자가 300인이나 되었다.

가지산문 체증(體證)의 문인으로 영혜(英惠) 등 800여 인이 있었고, 진공(眞空)의 제자가 400여 인 정도 되었다. 실상산문 흥척의 문도에 1,000여 인이 있었고, 수철의 문인도 수백 인이었다. 봉림산문 심희(審希)의 문인에 500인이 있었고, 찬유(璨幽)의 제자가 500인이었다.

동리산 혜철의 제자는 수백 인이었다. 사자산 절중의 제자에 1,000인이 있었고, 행적(行寂)의 문인으로 500인이 있었다. 적게는 수백 인에서 많으면 2,000인에 이르기까지의 선종산문에 소속된 문도들은, 상인이나 유망 농민은 물론, 심지어 군적(群賊)의 무리까지를 포용하고 있었다.

신라 말기의 동란기에는 곳곳에 군적의 무리들이 있었고, 이들이 당시 비교적 부유한 사원을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낭혜 · 현휘 · 도헌 · 절중 · 윤다(允多)의 비문에는, 이들 각각의 산문에 군적이 침입해 왔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그 중 남포(藍浦)의 군적이 성주산문에 처들어왔으나, 낭혜의 설법으로 100인이 출가하여 도를 얻게 되었다.

군적의 무리가 산문 세력으로 흡수되는 데에는 산문 자체가 무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밀양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고 있던 보양(寶壤)의 전략에 따라, 왕건은 청도지방에서 후백제 세력을 크게 물리치고 있다. 보양은 운문종(雲門宗) 계통의 선승이었는데, 전략을 겸비하고 있는 것은 선종사원 자체의 무력을 통솔하기 위해서였다.

선종의 역사

가지산문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馬祖, 道一)의 제자인 서당(西堂, 智藏)의 법을 받아,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진전사(陳田寺)에 머물렀다.

이때에는 교학(敎學) 불교가 성하여 세상이 경전의 가르침에 젖어 있었으므로, 무위(無爲)한 선종은 허탄하다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산림에 은거하고 말았다.

도의는 화엄의 4종 법계와 55 선지식(善知識)의 행포법문(行布法門) 외에 따로 조사선도(祖師禪道)를 설하였는데, 화엄의 4종법계를 손안에 든 법계라 하고, 55선지식의 행포법을 냇물 중의 포말이라고 하였다. 그는 법을 염거(廉居)에게 전하였다.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법을 체징에게 전하였다.

체징은 837년(희강왕 2) 중국에 들어갔다가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무주의 황학사(黃壑寺)에 머물다가, 859년(헌안왕 3)에 의 청으로 보림사(寶林寺)에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김언경 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원세력이 커지고, 가지산사로 사액을 받아 가지산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으로는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음과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남[心足意興] 등이 설해졌다.

그의 제자에 형미(逈微) · 영혜 등이 보이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는 형미이다. 형미는 891년에 중국에 들어가 운거(雲居, 道膺)의 법을 받아 905년(효공왕 9)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건의 귀의를 받아 같이 왕경으로 왔다가 궁예에게 피살되었다.

한편, 도의의 법맥을 이어받지는 않았지만, 진공설악산 진전사에 들러 도의의 영탑(靈塔)을 배알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므로, 가지산문과 연결된다. 그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침[無師自悟]을 주장하면서 교학불교를 부정하였다.

실상산문

9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된 것은 실상산문이다. 개조 홍척의 자세한 행적은 알기 어렵다. 그도 중국 서당의 법을 얻어 826년(흥덕왕 6)에 귀국하였는데, 선강태자의 도움을 받았다.

지증대사비문에 의하면 “정(靜)하였을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 무위의 이익됨은 다투지 않고 이긴다.”라고 하였듯이, 홍척의 선풍은 무위하여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운찬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남종선을 받아 왔다고는 하더라도,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의 제자에 편운(片雲)과 수철이 있는데, 수철도 역시 단의장옹주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 9산선문 중 실상산문이 왕실과 가장 밀착되었던 듯한 인상을 준다.

동리산문

서당의 법을 받아 개창했던 나머지 하나는 동리산문이다. 개조 혜철은 839년(신무왕 1)에 중국에서 돌아와서 태안사를 건립하여 거주하였는데,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문성왕이 그에게 나라를 다스릴 시책을 묻자 봉사(封事) 몇 조를 올렸는데, 그것이 모두 시정의 급무라고 하였다. 혜철의 제자로는 도선(道詵)이 있었다.

도선은 태안사에 머물지 않고 광양에 옥룡사(玉龍寺)를 다시 건립하였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도선의 행적은 신비에 쌓여 있는 면이 많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런데 도선은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설을 제창함으로써, 왕건이 고려국가를 건설하여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이념을 제공하였다고 주장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 사실이나, 당시의 모든 풍수지리설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지방을 명당이라 함으로써 지방호족 세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지방호족은 저마다의 풍수지리설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지방호족 세력을 정당화하는 면에서 그것은 선종과 통하는 점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선종과는 달리 서로 배타적이어서, 한 지방이 국토의 중심인 명당으로 되면 다른 지방은 중심이 될 수 없게 된다. 왕건이 고려국가를 건설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개성지방의 풍수지리만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선의 제자인 경보(慶甫)는 892년(진성왕 6)에 중국에 들어가 동산(洞山)의 제자인 광인(匡仁)의 법을 받았고, 921년(경명왕 5)에 견훤의 도움을 받고 귀국하여, 전주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고 있다.

이때 그는 분명히 견훤에게 유리한 풍수지리설을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 도선 계통의 풍수지리가 일찍부터 개성 중심이었다는 데 대하여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다.

936년에 경보가 왕건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왕건과 연결되는 것은 아마 뒤에 다시 백계산(白鷄山) 옥룡사로 이주하고 난 뒤였으며, 어쩌면 견훤의 귀순 전까지는 왕건과 연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자산문

사자산문은 도윤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도윤은 825년(헌덕왕 17)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南泉, 普願)의 법을 받아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였다. 한때 풍악(楓嶽)에 거주하면서 경문왕의 귀의를 받았으나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峯寺)로 이주하였다.

그의 제자에 절중(折中)이 있는데, 사자산 선사 석운(釋雲)의 청으로 흥녕선원(興寧禪院)에 머물게 되면서, 헌강왕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사자산문으로 크게 발족되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절중의 제자에 경유(慶猷) · 여종(如宗) 등이 있다.

성주산문

성주산문은 낭혜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낭혜는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麻谷, 寶徹)의 법을 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고는, 같은 무열왕계의 후손으로서 남포지역의 호족인 김헌과 결합하여 성주산문을 열었다.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그의 선종사상인 ‘무설토론(無舌土論)’이 전한다. 유설토(有舌土)가 불토(佛土)인 응기문(應機門)으로 교문이라면, 무설토는 조토(祖土)인 정전문(正傳門)으로 선문이다.

교학이 마치 백관이 모두 그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여 일이 처리되는 것에 비유한다면, 선학은 천자가 말없이 묘당(廟堂)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만 있어도 천하가 안정되는 것에 비유하여, 교문보다도 선문이 우월하다고 한다.

나말여초에 성주산문이 가장 번창하여 낭혜의 제자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여엄 · 대통 · 심광 · 자인(慈忍) · 영원(靈源)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대통은 856년에 중국에 들어가 앙산(仰山, 澄虛)의 법을 받고 866년(경문왕 1)에 귀국하여, 충주 월광사(月光寺)에 거주하였다. 월광사는 무열왕계 후손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도증(道證)이 창건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성주산문과 연결된 절이다.

여엄은 중국에 들어가 운거(雲居)의 법을 받아 709년(효광왕 13)에 귀국하면서, 강훤(康萱) 및 왕건과 연결되었다. 낭혜의 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자는 심광인데, 그에 대해서는 자세한 행적을 알기 힘들다.

심광의 제자인 현휘는 906년(효공왕 10)에 중국에 들어가, 도건(道乾, 아마 道虔)의 법을 받아 922년(태조 7)에 귀국하였는데, 왕건의 귀의를 받아 국사에 봉해졌고 충주 정토사에 거주하였다. 그는 “진공(眞空)은 상이 없으며, 실제는 절언(絶言)이다.”라고 하였으며, 특히 선종의 입장에서 화엄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가졌다.

사굴산문

사굴산문은 범일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범일은 831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鹽官, 齊安)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하였다.

그는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라 하였는데,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침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그 뒤 진귀대사(眞歸大師)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라고 하여,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에 행적 · 개청 · 신의(信義) 등이 있었다.

행적은 87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石霜, 慶諸)의 법을 받아 85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김해부의 소충자 · 소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915년에 신덕왕의 요청으로 실제사(實際寺)에 거주하였는데, 이 절은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일심(一心)을 강조하는 사상 경향을 가져, “일심을 보존하라.”든가 “한 번 지켜 잃지 말라.”고 하였다.

개청은 범일 문하에 있다가 889년(진성왕 3)에 강릉 보현사(普賢寺)에 거주하였는데, 이때 명주군사 왕순식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 뒤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한편, 범일의 문인인 신의가 오대산 자장의 구거(舊居)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보면, 사굴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희양산문

희양산문의 개창자는 지증이다. 지증은 9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켰다. 일찍이 신라의 법랑(法郎)은 중국 4조 쌍봉(雙峰)의 법맥을 받아 와서 신행(信行)에게 전하였고, 그는 다시 준범(遵範)에게, 준범은 다시 혜은(惠隱)에게 전하였다. 지증은 혜은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긍양대사(兢讓大師)의 비문에 의하면 지증은 마조의 제자인 신감(神監)의 법을 받아 온 혜소(慧昭, 雙谿)의 법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지증이 생시에 혜소와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 현재로서는 자세히 밝히기 힘들다. 그는 심충의 청으로 희양산에 거주하면서, 다른 선문들과는 달리 태사공의 문구를 인용하는 등 유학에 밝았고, 6이(異)와 6시(是)를 제창하였다.

6이는 선승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데, 탄생 · 금기 · 출가 및 율계와 훈계 등을 받는 특이함을 말한다. 6시는 불사의 당연성을 나타내는데, 대체로 왕실의 청을 거절하면서 단월 세력과 연결되는 면과 사원경제의 당연성을 말한다. 그의 제자에 양부(楊孚)가 있으나 행적이 자세하지 않고, 양부의 제자에 긍양이 있다.

그는 90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의 제자인 도연(道緣, 谷山)의 법을 받아 924년(태조 7)에 귀국하였으며,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그 뒤 그는 혜종 · 정종 · 광종의 귀의를 계속 받으면서 왕정을 돕기도 하였다.

신라 말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회양산문은 적당의 침입을 받아 폐허가 되었는데, 긍양이 이를 재건하였다. 선풍으로 그는 10개(十介)의 선자(禪子)가 동급제(同及第)라고 하였다.

긍양의 제자에 형초(逈超)가 있으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제자에 지종(智宗)이 있다. 지종은 고려 광종 때 중국 연수(延壽)의 문하에 들어가 주2을 받아 왔다.

봉림산문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현욱이다. 현욱은 824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章敬, 懷暉)의 법을 받아 837년(희강왕 2)에 귀국한 뒤, 경문왕의 청으로 혜목산(慧目山)의 고달사(高達寺)에 거주하였다. 그의 제자에 심희가 있다.

심희는 진성여왕의 청을 거절하고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김율희와 김인광 등과 연결되어 봉림사를 열었고, 곧이어 왕건과 연결되어 918년에는 고려왕실에 나가기도 하였다.

심희의 제자에 찬유가 있다. 그는 892년에 중국에 들어가, 무학(無學)의 제자인 대동(大同, 子祥)의 법을 받아 921년(태조 4)에 귀국하고, 왕건의 청으로 혜목산에 거처하였다. 그도 일심을 강조하여 “동일한 진성(眞性)이 일심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고, 천태사상에 접하기도 하였다.

수미산문

9산선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이다. 이엄은 896년 중국에 들어가, 청원(靑原, 行思)의 법맥을 이은 운거의 법을 받아 911년(효공왕 15)에 귀국하였다. 그는 처음 김해부 지군부사인 소율희의 도움을 받았으나, 뒤에 왕건의 소청으로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 거주하였다.

광조사는 왕건 및 그의 외척 세력인 황보씨 세력의 후원으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엄의 재가(在家) 제자로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왕유(王儒) · 이척량(李陟良) 등 전직과 현직 고관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여엄 · 경유 · 형미 등 4인은 모두 운거의 법을 받아와 왕건과 연결되고 있어서, 당시에 이들을 4무외사(四無畏士)라고 불렀다.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당시 고려의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이엄은 “왕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에 처광(處光)과 도인(道忍) 등이 있으나 모두 그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기타 산문

9산선문 외에 혜소는 도의나 홍척과 비슷한 시기에, 하동의 쌍계사(雙磎寺)에서 산문을 이루어 번창하고 있었다. 혜소는 804년에 중국에 들어가, 신감의 법을 받아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였으며, 어산범패(魚山梵唄)를 전하였다. 특히, 쌍계사에는 6조의 영당(影堂)이 있는데, 신라 김대비혜능의 머리를 취해 오는 연기설화와 연고되어 있다.

고려 왕건의 선대 세력과 연결을 가진 순지(順之)는 오관산(五冠山) 서운사(瑞雲寺)에서 위앙선풍을 펴고 있었다. 그는 4대8상 · 양대4상 · 4대5상 등의 상론(相論)과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 · 삼편실제론(三遍實際論) 등의 선종사상을 남겼다.

왕건과 연결된 보양청도의 운문사에서 산문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의 선풍은 운문종 계통이었다. 이들 외에도 9산선문 중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산문을 이루고 있었던 자들이 많았다.

선종의 경향

나말여초 선종사상의 경향은 진성여왕을 전후하여 크게 변하고 있다. 진성여왕 이전의 그것은 개인주의적이었고, 왕실과 지방호족의 쌍방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성여왕 이후가 되면, 그것은 왕실과 결별하면서 점차 지방호족과 연결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후삼국 정립기가 되면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인 면보다 ‘외화(外化)’에 비중을 두었고, 따라서 지방의 대호족이 주위의 군소 지방 세력을 포섭동화하는 것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의 경향은 왕건이 고려국가를 건설하여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어, 교선일치사상이 등장되어 갔다. 고려 초의 교선일치사상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는 경향과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전자에 속한 자로 현휘를 들 수 있으며, 광종대의 법안종사상은 이러한 경향과 맥락이 닿을 수 있다. 후자에 속한 자로는 탄문(坦文)을 들 수 있다. →선종(禪宗)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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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선종구산파의 성립-최치원의 사산비명을 중심으로-」(최병헌, 『한국사연구』 7,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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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말선초선종의 사회적성격」(최병헌, 『사학연구』 25, 1975)
「요오선사순지(了悟禪師順之)의 선사상」(김두진, 『역사학보』 65, 1975)
「신라시대의 선사상」(한기두, 『한국불교학』 1, 1975)
「신라말 김해지방의 호족세력과 선종」(최병헌, 『한국사론』4,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78)
「신라하대 굴산문(掘山門)의 형성과 그 사상」(김두진, 『성곡론총』 17, 1986)
「라말려초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성립과 그 사상」(김두진, 『동방학지』 57, 1988)
주석
주1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주2

중국의 문익 선사의 종지(宗旨)를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 종파. 우리나라에는 10세기 무렵에 지종에 의하여 전래되었다. 화엄종과 선종을 융합한 것으로 화엄종이 왕성했던 고려 초기에도 수용되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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