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

조선시대사
개념
도를 깨달은 자, 덕업이 있는 자, 성현의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 주며 의혹을 풀어 주는 자, 국왕이 자문할 수 있을 만큼 학식을 가진 자, 관아에서 앞서 근무했던 관직자,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 등을 칭하는 역사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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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선생은 도를 깨달은 자, 덕업이 있는 자, 성현의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 주며 의혹을 풀어 주는 자, 국왕이 자문할 수 있을 만큼 학식을 가진 자, 관아에서 앞서 근무했던 관직자,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 등을 일컫는 역사 용어이다. 외래 사상이 수용되기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삼국시대에 이르러서 용어의 사용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 또는 교육 기관과 관련하여 선생이 사용되었다. 근·현대에는 칭호의 남용과 비속화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교원으로서의 선생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정의
도를 깨달은 자, 덕업이 있는 자, 성현의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 주며 의혹을 풀어 주는 자, 국왕이 자문할 수 있을 만큼 학식을 가진 자, 관아에서 앞서 근무했던 관직자,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 등을 칭하는 역사 용어.
고대의 선생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신라의 백결선생(百結先生)과 강수선생(强首先生)이 선생으로 불렸다. 백결선생은 출신이 한미하고 가난하였으나, 거문고를 즐기며 세상사를 초연히 관조하며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백결선생’으로 칭했다. 강수육두품 출신으로 일찍부터 유학(儒學)을 익혀 실천했으며, 당에서 태종 무열왕에게 보낸 국서를 명쾌히 해석하자 왕이 ‘강수선생’이라 할 만하다고 칭찬하였고, 이후 신라의 문병(文柄: 문장을 주관하는 권한)을 관장하여 외교 문서를 작성하고 통일에도 기여하였다. 이로 보아 신라시대의 선생이란 뛰어난 학식을 갖추어 국왕의 자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나, 고결한 인품을 갖춘 재야의 인물을 높여 이르는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앞서 유교나 불교와 같은 외래 사상이 수용되기 전, 우리의 고유한 사상인 무교 신앙(巫敎信仰)이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기능했을 때에는 사무(師巫)라는 존재가 있었다. 이 사무는 미지의 세계를 예지하는 점복적(占卜的) 역할을 수행했고, 천변지이(天變地異)나 중요한 국사의 자문을 담당했다. 이들은 국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숭앙을 받았으니,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도 선생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후 불교가 전래되어 토착화하면서 고승들이 사무의 기능을 계승하여 국사(國師)로 책봉되어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통일신라의 효소왕혜통(惠通)이 국사로 책봉된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국사 책봉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가 덕행을 갖춘, 한 시대의 사표가 될 만한 존재들이었다.

삼국시대에 국가의 교육 기관이 설립되면서 여기에 속하여 교육 활동을 담당한 교수관들도 선생으로 지칭되었다. 한국 최초의 국가적인 유교 교육 기관은 고구려에서 372년(소수림왕 2)에 설립한 태학(太學)이다. 태학의 교수관으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 태학사(太學士) 등이 있었고, 모두 소형(小兄)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를 임명하였다. 백제에서도 유교 교육 기관이 있었다고 짐작되나, 명칭이나 설립 시기 등은 확인되지 않고,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교수관 명칭은 보인다. 신라는 682년(신문왕 2)에 설치한 국학의 장(長)으로 경(卿)을 두고, 그 아래에 소경(少卿) · 박사 · 조교(助敎) · 대사 · 사(史) 등의 관직이 있었는데, 대사와 사를 제외한 모두를 교수관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국가적 교육 기관에서 유학 교육을 담당한 교수관도 선생이었다.

고려시대의 선생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중앙 집권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정하여 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고승(高僧)을 왕사 · 국사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통하여 정신적 기반을 확립하려 하였다. 한편으로는 경주 출신의 육두품 계열(六頭品系列) 유학자들을 포섭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학식 있는 관리들을 육성하려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두 계통에서 나타난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① 불교 교단의 선생과 제자

태조 왕건(王建)은 즉위하기 전부터 승려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유명한 고승들을 자기의 측근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그들의 명성과 교화력을 이용하여 개경을 정치적 · 사상적 중심지로 구축하려 하였다. 고승들에게 왕권 강화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정권의 안정을 기도하였으며, 민중들의 소박하고 다양한 신앙을 불교로 귀일시켜 호국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이후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어 불교는 고려 말기까지 호국 종교로 존속하였고, 왕사 · 국사 제도가 채택되어 정신적인 지주로 설정되었다. 한편, 불교 교단의 효과적인 통제와 운영을 위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승정(僧政)을 관리하는 주무 관서로서 예부승록사(僧錄司)도 설립되었다.

불교에서의 선생과 제자 관계는 상징적인 면에서 재가 신자(在家信者)와 관련되어 국사 · 왕사의 임명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실질적인 관계로는 불교 교단에서 승려와 승려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제 관계가 형성되었다. 승려는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불교 교단 내에서의 사제 관계는 재가 신자의 출가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출가는 불교 교단에서 사제 관계가 이루어지는 계기였고, 재가 신자와 승려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고려 사회는 불교가 국교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출가가 보편적으로 행해졌고, 불교 교단에서의 사제 관계도 종파의 유지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출가하여 행자(行子) 또는 동승(童僧)으로 사원의 집단 생활과 수학(修學) 등 신앙의 기초 과정을 익혀 익숙해진 뒤, 출가사(出家師) 밑에서 삭발하면 사미(沙彌) 또는 사미니(沙彌尼)로 불리었다. 이후 강원(講院)선원(禪院)에서의 수학과 신앙 생활을 거쳐 계법사(戒法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 또는 비구니(比丘尼)가 되면, 득도승(得度僧)으로 인정을 받았다. 구족계는 승려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춘 자로 공인해 주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계법사는 승려로서의 법정 보증인과 같았으므로 출가사보다는 사제 관계가 더 강했다. 구족계를 주는 곳을 계단(戒壇)이라고 하였고, 그것은 국가 관리하에 놓인 관단(官壇)에서만 이루어졌다. 이는 승려의 자격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승려의 자질을 높이며 통제하려고 한 국가의 정책으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수계를 받은 승려는 다른 사원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수양과 식견을 교유하고 심인(心印)을 받는 득도사(得度師)를 얻게 된다. 이후 몇 년 동안 수학하고, 교종(敎宗)선종(禪宗)의 예비 시험인 성선선(成禪選) 또는 총림(叢林)를 거쳐 승과(僧科)의 대선(大選)에 응시하게 된다. 승과의 실시는 유능한 전도자(傳道者)를 구한다는 의미가 컸다. 그래서 대선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교리나 수행상 깊은 지식이 필요할 정도로 고도의 수준이 요구되었다.

국가는 승려의 생애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출가 · 수계(受戒) · 승과 · 승계(僧階) · 승정(僧政)을 통제했다. 그리고 주지는 해당 종파의 추천을 받아 일반 관료와 같이 서경(署經)을 거쳐서 임명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지는 중요한 계기는 득도 과정이었다. 교종에서는 경론을 연구하여 터득한 지식을 강조하고, 득도를 내세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선종에서는 비문(碑文)이나 전기(傳記)에 강조될 정도로 득도 과정을 중요시하였다. 이에 선승(禪僧)의 득도사는 법맥(法脈)을 형성하면서 사제 상승(師弟相承)하여 후세에까지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직접 제자는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 또는 친승교훈자(親承敎訓者), 고승이 주관하는 불사(佛事)를 도와서 가계(加階)된 승려는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 또는 사양법화자(師揚法化者) · 보익군무자(補益軍務者), 다른 고승의 제자였으나 감화를 받아 제자로 된 승려는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 시봉(侍奉)한 승려는 봉시병문자(奉侍甁門者), 그리고 재가 신자 등으로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는 사제 관계가 매우 엄격하며, 고승은 교육이라는 실제적인 기능에 있어서 권위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불교 교단 안에서 사제 관계를 엄격히 구분하여 기록한 것은 불교가 종교로서 종파를 중심으로 형성,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계를 통제하려는 국가의 정책이 이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파악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 안에서 사제 관계는 매우 엄격하고 체계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② 고려 불교의 국사 · 왕사

국사 · 왕사가 제도로 성립된 것은 고려 초기였다. 신라말 불교계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면서, 새로운 종교로서 선종이 호족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분립 현상을 나타내었다. 호족들을 통합하여 고려를 세운 왕건은 신라시대부터 존재하던 국사에다 왕사를 함께 두어서, 자신의 불교에 대한 보호를 과시하고 이를 제도화하였다. 고려의 국사 · 왕사는 모든 시기에 걸쳐서 각 1인씩 책봉되었다. 이 중에는 생존 시에 책봉된 경우도 있고, 사후에 추봉한 경우도 있다. 국사는 일반 백성을 포함하는 국가적인 선생이라는 의미이고, 왕사는 왕의 선생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국사는 중생의 부모로, 왕사는 국왕의 스승으로 비유되었다. 국사를 왕사보다 우위에 둔 것은 민중이 국왕보다 우선한다는 뜻이다. 이는 모든 민중이 불교 신자였던 고려가 민의를 받들어 왕도 정치를 편다는 전통적인 동양의 정치 사상을 불교와 결합시킨 것이다. 또한 국사 · 왕사의 책봉을 통하여 국왕 자신을 교권 밑에 두어, 교권과 통치권자의 갈등을 피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였다.

국사나 왕사가 민심 수습을 위한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책봉 의식은 매우 엄숙하게 행해졌다. 왕이 상부(相府)의 자문에 따라 국사 · 왕사를 선정했고, 책봉된 이들은 초승계적(超僧階的)인 위치에 두어졌다. 책봉될 국사 · 왕사가 선정되면 5품 이상의 관인(官人)처럼 낭사(郎舍)서경을 거쳐야만 했다. 이어서 고승이 주지하는 사원에 조서(詔書)를 가진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책봉 수락을 청하는 서신지례(書紳之禮)를 행하였다. 이때, 왕의 간곡한 뜻을 찬앙지정(鑽仰之情)이라 하고, 고승이 세 차례 사양하는 예를 삼반지례(三反之禮)라 하였다. 국사 · 왕사에 책봉된 고승이 지나가는 주군(州郡)에서는 성인을 맞이하는 의식을 구경하는 인파로 길이 메워졌다. 이것은 교화가 보편화된 민중과의 일체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고승이 개경에 도착하면 국왕은 스스로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국사 · 왕사는 왕이 엄격하게 제자의 예를 행할 정도로 권위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고려 전기에는 아직 승정과 관련된 실질적인 기능은 가지지 못하였다. 민중과 국왕의 부모나 스승이라는 관념에서 교화를 위한 상징적인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국사나 왕사에 책봉되더라도 자신이 주지로 있던 사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죽은 뒤에 추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국사 · 왕사의 임명은 불교에 대한 국가 정책이 자연히 반영되었고, 국사 · 왕사의 책봉을 통하여 당시 불교계의 교세에 대한 판도를 이해할 수도 있었다.

고려 전기에 상징적인 기능을 지닌 국사 · 왕사가 고려 후기에는 승통(僧統)으로 개칭되고, 성격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충선왕 이후에는 서경을 거쳐 승정이 이루어지던 전기의 제도가 변질되어 몽고와 결탁한 왕실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뒤이어 국사 · 왕사에게 승정이 위임되어 세속과의 이해 관계가 커지면서, 종파 간의 이해를 둘러싼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이 점차 가속화되면서 불교계의 세력도 약화되어 갔다. 따라서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불교의 구실도 점차 권위를 상실했고, 국사 · 왕사의 상징적인 기능도 약화되었다. 성리학적 교양을 지닌 신진사대부들의 공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어 숭유억불 정책이 수립되면서 국사 · 왕사도 폐지되고 말았다.

③ 교육 기관과 유학(儒學)의 선생

고려는 중앙 정치 제도의 정비에 따라 풍화(風化)의 근본인 교육 기관도 정비되었다. 성종 대의 국자감 설치에 이어 인종 대에는 경사육학제(京師六學制)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교수관으로 국자좨주(國子祭酒) · 국자사업(國子司業) · 국자박사(國子博士) · 사문조교(四門助敎) 등이 두어졌다. 관학의 발전과 함께 사학(私學)도 발전하였다. 최충(崔冲)문헌공도(文獻公徒)를 비롯하여 12사학이 존재했고, 여기에도 학관(學官)이 있었다. 이들 각급 교육 기관의 교수관들은 교육이 왕화(王化)의 근본이라 하여 학덕을 겸비하고 노성(老成)한 인물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들은 사(師) 곧 스승이나 선생이라고 불렸다.

성종은 986년(고려 성종 5) 지방의 12목에 경학박사 등의 교수관을 파견하기 위한 하교(下敎)에서 “주나라는 이교(二膠: 주대의 대학, 곧 동교(東膠)와 서교(西膠))를 세워 선생을 택하여 토론하고, 국자(國子: 공경대부의 자제)에 명하여 배우고 익히게 하니, 군신 부자가 모두 애교(愛敎)의 풍(風)을 알고, 예악시서(禮樂詩書)가 족히 경륜(經綸)의 업(業)을 일으킬 수 있었다.”라고 하였듯이 유교 교육 기관의 선생을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학의 경우 학문적 능력은 있으나 입사(入仕)하지 못한 인물을 교관으로 뽑았다. 그런데 교수관을 무엇이라고 지칭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선배의 경우는 선유(先儒)라 했고, 개인적인 호의에 따라 서간이나 묘지명에서 선생이라는 칭호를 쓰는 사례도 있다.

불교에서 국사 · 왕사로 선발된 고승들이 국왕의 스승으로 불리며 우대된 것처럼, 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유학자도 왕의 스승인 사부로 임명되었다. 대표적으로 현종 대의 최항(崔沆), 예종 대의 곽여(郭輿), 충숙왕 대의 안규(安珪) · 왕삼석(王三錫) · 윤신걸(尹莘傑), 충숙왕 대의 민사평(閔思平) 등을 들 수 있다. 곽여의 경우 “중사(中使)를 시켜 불러서 금중(禁中)의 순복전(純福殿)에 살게 하고 선생이라 불렀으며, 항상 좌우에 시종하게 하였다.”고 한 기록에서 사부를 선생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사부로서 국왕에게 선생이라고 불린 인물들은 대개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왕권이 실추된 원나라 지배하에서는 왕삼석과 같이 폐행(嬖幸) 출신도 없지 않았다. 또한 과거를 통하여 고시관인 좌주(座主)와 급제자인 문생(門生) 사이에도 사제 관계가 성립하여 부자 · 형제의 유대를 가지면서 학벌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돈독한 사이는 정치적 진출까지 좌우하여 상서방(尙書榜) · 처사방(處士榜)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았다.

④ 선생의 다양한 사용과 의미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선생이라는 칭호가 더욱 많이 사용되었다. 당시의 문집과 묘지명에 나오는 용례를 보면, 한 관부에서 앞서 재임했던 인물, 산림에 은거하여 관작이 없으면서 학덕을 겸비한 처사, 교유 사이이나 학문적으로 성취한 인물, 학문과 지조가 있는 선비, 좌주 및 학문적 전수 관계에 있는 스승 등을 ‘선생’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들 선생의 칭호는 부르는 사람의 기호에 많이 좌우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의 선생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한 성리학은 조선의 개창 이후 국시의 하나로 되면서 보급, 정착되어 갔다. 각급 교육 기관을 통한 성리학의 교육도 활발해졌다. 그리고 성리학에 대한 인식이 깊이 이루어지면서 이를 직접 실천하는 인물들도 배출되었다. 이에 따라 풍부한 성리학적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물들을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다. 또 성리학의 전수 과정에서 형성된 강인한 학통을 바탕으로, 그 제자 문인들이 스승을 선생으로 존칭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선생은 한 관부에 앞서 재임했던 인물들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성리학적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에 대한 존칭이었다. 또 이들이 각급 교육 기관을 통하여 성리학을 교육했으므로, 각급 교육 기관의 교수관을 제자 문인들이 높여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선생은 각종 교육 활동의 장을 통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국왕 · 세자의 교육과 선생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은 최고의 지배자인 국왕부터 성리학에 대한 조예를 지녀야 했다. 이에 따라 국왕에게 성리학적 소양과 실천 의지를 심어 주기 위한 경연(經筵)과 미래의 국왕이 되기위한 준비 중에 있는 세자를 교육하기 위한 서연(書筵)이라는 교육의 장이 마련되었다. 경연을 담당한 관원들은 대체로 학덕을 겸비한 그 시대의 사표(師表)로서의 선생이 많았다. 그들은 국왕의 스승으로 자처하여 군주의 도덕적 의무와 바른 처신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일반 정사에 관한 조언도 많이 하였다. 선생은 사명감도 투철하여 군주를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의도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오랜 기간 왕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국왕 또한 선생의 의견을 경청하고, 선생의 비판을 가납(嘉納)하였다. 이러한 소임으로 인하여 경연관을 겸하는 홍문관직은 청환(淸宦)으로 인식되었다. 또 자연스럽게 국왕과 자주 접촉하면서 정치적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정치적 기능이 증대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사제 관계 이전에 군신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육의 성과를 명확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세자는 차기 왕위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군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교육이 중시되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侍講院)의 교수관은 덕망이 높은 연로한 선비[기유숙덕(耆儒宿德)]나 행실이 단정한 인물, 곧 선생 중에서 선발하였다. 이들은 세자와 기거를 같이 하다시피 하여 학문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까지도 지도하였다. 따라서 군신 관계에 앞서 사제 관계가 먼저 이루어졌다. 교수 방법은 강의와 배송(背誦)이 주가 되었고, 종신토록 잊지 않고 실천하도록 다독을 시키기도 하였다. 다음 날 배울 부분은 미리 알려주어 예습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복습도 중시하여 새로운 내용의 강의에 앞서 의문점을 함께 토론하고 완전히 이해시켰다. 이와 같이 중대한 임무를 지닌 세자 교육이었기에 교육이 중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교수관은 복상(服喪) · 의식 · 제례 및 공회(公會)에 불참해도 되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조선시대의 국왕 및 세자 교육은 학덕을 겸비한 선생이 성리학적 이념을 주지시키고 그 실천 의지를 함양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교 사회인 조선 왕조 자체도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선생을 존중하고 우대하였다.

② 관학 교육과 선생

성균관 · 사부학당 · 향교의 교수관은 조선 초기의 관학 체제 정비에 힘입어 학문의 진흥 및 관리 양성에 주력하였다. 관학 소속의 교수관은 학내 생활의 사습(士習)에 불미한 사태가 발생하면 적절한 조처와 징계를 가하여 건전한 학풍 조성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학의 교수관은 관직자로서 자주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직(寒職)으로 여겨 부임하기를 꺼리기도 했다. 따라서 유능한 교수관 확보는 쉽지 않았다. 특히 지방의 향교는 부임하기를 더욱 회피하였기에 조정에서는 유능한 교수관의 선임과 확보에 부심하였다. 교수관의 특별한 자격 기준은 별도로 없었지만, 흔히 경학에 밝고 행실이 선한[경명행수(經明行修)] 명사(名士)나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는 중망이 있는[정학중망(精學重望)] 유신(儒臣)을 발탁하여 자급(資級)을 막론하고 교수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우대책으로 우수한 교수관에게 미곡(米穀)이나 음식물을 하사하거나, 녹봉 또는 품계를 올려주기도 하였으며, 관학의 유생들도 우수한 선생을 사유(師儒)로 추대하거나 유임을 청하기도 하였다. 또 지방으로 돌아간 선생의 소환 · 복직을 청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하여 학생들의 존사 정신(尊師精神)을 읽을 수 있다. 향교의 교수관은 유생의 훈도 이외에 향촌의 도덕적 향풍을 수립하는 일에도 노력하였다. 예컨대, 향약(鄕約)을 솔선수범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향사례(鄕射禮)와 같은 의식을 통하여 향풍 순화(鄕風醇化)에도 진력했다. 관학의 교수관들은 직접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했으므로, 성균관의 유생들이나 향교의 교생들로부터 선생으로 불렸다. 또한 교수관 자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명행수지사(經明行修之士)를 요구했으므로 학덕을 겸비한 선생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③ 사학 교육과 선생

왕도 정치 및 향촌 자치를 이상으로 표방하고 중앙 정계로 진출한 사림파는 군주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경학(經學)의 능력에 힘입어 경연 등에 많이 진출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와의 갈등으로 빚어진 사화를 거치면서 많은 사림파가 타격을 입고 향촌으로 낙향하였다. 이들은 향촌에 은거하면서 서재(書齋)나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교육의 장으로 삼으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서원 건립이 확산되면서 성균관 · 향교 등의 관학은 쇠퇴일로를 걸었고, 교육의 주도권은 서원에게 넘어갔다.

서원의 선생은 그 지방에서 학덕을 겸비한 인물로 선발하였다. 이들은 선현을 봉사하며 향촌 자제 교육에 주력하였다. 또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고 인격적인 감화를 교육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향하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본받기에 힘썼다. 이같은 선생의 전인적인 감화의 힘은 올바른 사론(士論)의 함양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서원으로 하여금 향약을 통한 사회 교화의 구심점이 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에 대한 존경과 예절은 매우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④ 산림(山林)의 등장과 선생

조선은 16세기말 이후 이학 지상주의 시대(理學至上主義時代)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성리학으로 무장한 학덕을 겸비한 인물이 선생으로 중시되고 대우를 받으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여 등장한 것이 산림이다.

산림은 때로는 정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포부를 펴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향촌에 은둔하여 서재나 서원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향약의 실시 등을 통하여 향촌 교화에도 힘썼다. 이들 중에는 학덕이 뛰어난 인물이 많았으므로 국가의 징소(徵召)를 받아 군주나 세자의 교육을 맡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특히, 국가는 산림만을 위한 산림직을 신설한 적도 있었다. 교육 기관인 성균관의 좨주 · 사업(司業)이라든지, 세자시강원찬선(贊善) · 진선(進善) · 자의(諮議) 등이 그것이다. 산림만이 보임될 수 있고 적임자가 없을 때에는 비워두는 산림직의 신설은 조선 후기의 산림에 대한 예우가 각별했음을 보여 준다. 이밖에도 상규(常規)에 벗어난 예우를 많이 받았으니, 찬선은 세자와 마주칠 때 서로 읍례(揖禮)하는 우대를 받았고, 서연(書筵)에 나갈 때에는 모든 관료들의 제일 앞자리에 앉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산림은 징소 과정에서도 파격적인 대우가 많았다. 상경이나 하향할 때 식물을 하사함은 물론, 머무를 집을 수선해 주는가 하면, 가교(駕轎)를 내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산림이 유림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사표가 되었기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당시의 과거는 제술에 치중하고 경학을 소홀히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문과 급제자라 하더라도 경연 · 서연 등에서 경전을 강론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경학에 밝은 산림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산림 또한 경연 · 서연에 관심이 커서 지치(至治) 내지는 군주의 도리에 대하여 많은 진언을 하였다. 그런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꺼리게 되는 경향이 강해졌고, 따라서 중앙에서의 산림의 실질적인 역할도 차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유림의 사표(師表)요 종장(宗匠)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의미는 계속 남아 국가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⑤ 실학자의 선생관

조선 후기에 사림을 정신적으로 영도하는 기로숙덕의 인물들이 산림으로 추앙받고, 또 그들이 한 시대의 사표로서 선생으로 존칭되면서 선생은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한 학덕을 겸비한 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폐단이 드러나고 양반 지배층들이 산림을 하나의 축으로 지속적인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전개하자, 이 같은 선생의 의미에 대하여 한계가 드러났다. 유림의 지도자를 상징하던 산림의 의미가 점차 변질되고, 관계에 진출하지 못한 인물들이 자칭 타칭으로 산림을 사칭하면서 그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선생도 이와 비슷한 권위의 하락 현상을 나타냈다.

이 시기 실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일부의 지식인들에게는 가식적인 성리학자에 대한 비판 · 조소와 더불어, 성리학적 소양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을 오히려 선생으로 존칭하는 새로운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박지원(朴趾源)은 한문 소설인 『호질(虎叱)』을 통하여 북곽선생(北郭先生)이라는 표리부동하고 허위에 가득찬 성리학자를 고발하였고,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는 비록 무식하고 천한 직업을 가지기는 했을지언정 하는 일에 만족하고 나름대로 덕을 갖춘 엄행수(嚴行首)를 ‘예덕선생’으로 높여 불렀다. 이러한 인식은 심각하게 노정된 사회적 모순을 간과한 채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 정쟁을 일삼던 성리학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할 진정한 사표로서의 선생의 출현을 갈망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선생에 대한 새로운 존숭 관념도 일어나, 이익(李瀷)은 군사부(君師父) 일치를 들어 『의례(儀禮)』에 빠져 있는 사복(師服)의 설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 말기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해이해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유교적 정통 사상의 재정립과 함께 선생에 대한 관념도 복고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적 윤리 도덕의 실천에 앞장서고 학문적 기반이 확고한 인물만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또,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되자 이에 대항하면서 전통적인 질서의 유지에 앞장섰던 인물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근 · 현대의 선생

① 선생 호칭의 남용과 비속화

조선 말기, 개화기는 한국 교육의 근대화가 급진적으로 진행된 시기였다. 비록 그 시기는 짧았지만, 전통과 개혁, 보수와 진보라는 갈등, 그리고 이민족에 의한 간섭과 도전을 받는 속에서 전통적인 유교적 봉건 교육이 근대 교육으로 개편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선생의 역할도 종래와는 다른 측면으로 변화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교육 정책과 종래의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한학 교육 등에 반대하고,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을 계발하고 국기(國基)를 굳히고자 하였다. 1895년(고종 32) 고종은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에서 “독서나 습자(習字)로 옛 사람의 찌꺼기를 줍기에 몰두하여 시세의 대국(大局)에 눈이 어두운 자는 비록 그 문장이 고금을 능가할지라도 서생에 지나지 못하리라.”라고 밝혔다. 정부에서는 여기에 힘입어 근대적 학교 설립을 위한 학교 관제와 규칙을 공포하였다.

기독교계 선교사들은 사립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서양식 교육 제도를 처음 소개하였다. 서양인 교사들은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소개, 전수하여 일제 식민지화에 대항하는 항일 구국 운동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사립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계몽 · 민족 교육 · 항일 사상 등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직접 자신이 세운 학교의 교사로서 학생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교육 활동을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 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학교는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애국자 집단이었다.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을 제정하여 사학을 탄압하고, 우리 민족의 우민화(愚民化) · 친일화 교육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근대적 교육이 보편화되어 가면서 교사의 양적 증가가 요청되었다. 이리하여 초등학교의 교사 양성 학교로서 1895년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전문적인 교사의 양성이 전근대 사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한성사범학교에서는 정신 단련 · 덕조마려(德操磨勵)[끊임 없이 굳은 절개를 갈고 닦음] · 애국 및 질서를 지키며 건강한 신체를 지닌 교사를 길러 내어, 근대 학교에 맞는 새로운 교사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일부 교사의 성격은 교육을 통하여 식민지화를 촉진하는 존재로 굴절되었다. 근대적 교육의 일반 민중에게로의 광범위한 침투 · 확산과 함께 선생이라는 칭호도 보편화되어, 각급 근대적 교육 기관의 교사들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학덕과 인격을 겸비한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서의 선생이 남용되는 추세를 가져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통치에 대항하여 국권 회복을 위하여 활동을 한 인물들이 선생이라 불리면서 추앙을 받았다. 교육 활동에 투신한 인물은 물론, 민족의 사표로서 학덕을 갖춘 인물들도 선생이라 불리었다.

선생이라는 용어에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분위기의 연장 속에서 광복 이후에도 선생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그 뒤 점차 범위가 좁아지면서 선생은 곧 교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말 개화기에 근대 학교가 나타나면서 ‘가르치는 사람’을 교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반적으로 교사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제 선생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을 특정적으로 지칭한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윗사람을 부르는 말과 혼용되기도 하였다. 선생이라는 용어가 모든 교사에게 붙여지는 높임말이자, 지식이나 인격 면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여졌다. 그러나 근래에는 일반 사회에서도 사교적인 용어로 쓰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가리키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변질되어 이 용어의 본의인 존중의 뜻이 희박해지게 되었다.

② 교원으로서의 선생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놓던 전통 사회에서 물질적 가치를 편향적으로 추구하는 현대 산업 사회로 시대가 바뀜에 따라, 선생도 존경받는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지닌 직업인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교원으로서의 선생은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문성이란 그가 가르치는 분야에서 요청하는 수준의 지식을 전수하여, 피교육자가 사회에 별 지장 없이 적응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는 지적인 면에서는 제도적으로 정해져 있는 교과 내용을 성실히 전달하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사회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융통성과 창의력을 지닌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기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생 자신이 먼저 창의력과 미래 지향적 안목과 전망적 자세를 지니고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규격화 · 획일화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사회가 이같은 노력을 쉽사리 용납하지 않더라도 선생은 거기에서 멈출 수 없다. 어떠한 지식이든 그것을 전수하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과 방법이 필요하다. 교육이란 근본적으로 피교육자를 설득하여 교육자인 선생이 설정한 요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술 · 방법이 새로운 지식을 전수하는 수단으로 적합하지 못하다면,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개혁 또한 선생들의 강인한 의지와 그 의지의 결집에 의하여 교육 현장에서, 그리고 제도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선생이 지니는 전문인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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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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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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