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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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충도(8) /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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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개념
꽃과 풀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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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화훼화는 꽃과 풀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꽃과 풀을 새·그릇·벌레 등과 함께 그려 화조화·화훼초충화·기명화·절지화 등으로 부른다. 현재 고려 시대의 화훼화는 수덕사대웅전 벽화가 유일하다. 조선 시대에는 문헌에 나타난 화훼화가만 30여 명에 이르고 남아 있는 작품도 많다. 김정은 조선 시대 최초의 화훼화가로 꽃·새·길짐승 등을 잘 그려 「영모절지도」를 남겼다. 신사임당은 꽃·벌레·풀·포도·새·나비 등을 잘 그렸다. 그밖에 강세황, 남계우, 장승업 등도 화훼화를 남겼다. 우리나라 화훼화는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은은하게 그려졌다.

목차
정의
꽃과 풀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
내용

꽃과 풀을 새 · 그릇 · 채소 · 벌레 등과 함께 그림에 따라 화조화(花鳥畫) · 화훼초충화(花卉草蟲畫) · 기명화(器皿畫) · 절지화(折枝畫) ·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畫) · 채화(菜畫) · 소과화(蔬果畫) 등으로 부른다. 동양에서 꽃과 풀에 대한 노래는 2,500년 전의 『시경』에 이미 나온다. 그리고 2,000여 년 전의 한나라 때 고분 벽화에서는 꽃 그림을 볼 수 있다.

1,500여 년 전의 둔황벽화(敦煌壁畫)에는 많은 꽃 그림이 그려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의 최초의 화훼화가는 560년대의 진(陳)나라 학자 고야왕(顧野王)이라고 하므로 화훼화는 늦어도 6세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847년)와 『선화화보(宣和畫譜)』(1120년)에도 많은 화훼화가가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무렵의 화훼화는 인물화 · 산수화와 함께 화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화훼화가가 기록에 보인다. 하지만 신라시대에도 궁정 뜰에 아름다운 꽃과 풀을 가꾸고 새를 길렀다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장식용의 화훼화가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나라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꽃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우리 나라의 화훼화의 기원을 7세기부터 볼 수 있게 한다.

선진시대(先秦時代)부터 그려진 중국의 화훼화는 남북조시대에는 본격적인 화과(畫科)로 등장하였다. 오대(五代)의 서희(徐熙, 885∼995년?)와 황전(黃筌, 903∼968년)은 중국 화훼화의 두 조종(祖宗)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본격적인 화훼화법을 확립하였다. 남북조시대의 진나라 고야왕은 단청을 잘 하였다. 특히 풀과 나무(草木)를 잘 그렸는데 그의 「초충도」 한 폭은 선화어부(宣和御府)에 소장되기도 하였다.

고야왕보다 300년 뒤인 조광(刁光)은 본래 당나라 장안(長安)사람이었으나 촉(蜀)으로 피난 가서 30여 년간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돌 · 못 · 풀 · 대나무 · 고양이 · 토끼 · 새 · 공작 등을 잘 그렸다. 황전과 공숭(孔嵩) 두 화가가 그의 비결을 배워 대성하였다.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그의 그림에는 고하국총(高下菊叢)과 석안종류(石岸淙流) 등을 그린 화첩이 있다. 조광과 같은 무렵의 무구원(毋丘元)은 과실을 잘 그렸다.

이들보다 조금 뒤의 조창(趙昌)은 화려한 꽃과 풀을 그린 「세조도(歲朝圖)」를 남겼다. 남당(南唐, 937∼975년)의 서희는 담묵(淡墨)으로 야일(野逸)한 그림을 그렸다. 『선화화보』에 기록된 것만 하여도 259점이나 된다. 즉, 「석류도(石榴圖)」 · 「행화도(杏花圖)」 · 「백화도(百花圖)」 · 「옥당부귀도(玉堂富貴圖)」 등이다.

후촉(後蜀, 934∼965년)의 황전은 서희와는 달리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호화롭고 기교가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이것을 황가부귀체(黃家富貴體)로 부른다. 즉, 풍성하고 화려하면서 치밀하고 교묘한 화조화는 황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송(北宋)의 휘종(徽宗)은 단정하면서도 호화로운 화조화를 그렸다. 궁정의 작화 기관이었던 화원(畫院)을 완벽하게 정리 · 발전시켰던 그는 스스로 글씨와 그림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화훼화가 예술가의 창조적인 사의성(寫意性)보다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사실성(事實性)을 추구하게 된 것은 황전 · 최백(崔白) · 휘종 등으로 이어지는 200년 동안에 확립된 전통이라 하겠다. 이러한 부귀체는 서희로부터 비롯된 야일체(野逸體)를 압도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화훼화는 우리 나라나 일본의 화훼화보다 풍성 · 화려 · 치밀 · 교묘한, 즉 부려공교(富麗工巧)한 것이 특징이다. 남송 전선(錢選)의 모란도, 포섭(包燮)의 화훼도, 청나라 반공수(潘恭壽)와 조지겸(趙之謙)의 화훼도 등이 다 같은 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화훼화는 중국 화훼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중국의 화훼화처럼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섬세하지 않다. 오히려 소박하고 은근하여 우리 나라 회화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의 화훼화에는 연꽃 · 모란꽃 · 난초꽃 · 수선화 · 등꽃 · 매화 · 국화 · 석류 · 비파 · 해당화 · 수국 등이 많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화훼화에는 이밖에 부용꽃 · 치자꽃 · 양귀비꽃 · 자양화 · 진달래 · 벚꽃 · 패랭이꽃 · 맨드라미꽃 · 초롱꽃 · 부들 · 명아주 · 분꽃 · 봉선화 · 제비꽃 · 장다리꽃 · 민들레 · 씀바귀 등도 그려지고 있다. 즉, 야생화를 담채(淡彩)로써 몰골화법(沒骨畫法)으로 그렸다.

⑴ 삼국시대의 화훼화

삼국시대의 화훼화는 주로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 중에서 무용총(舞踊塚) · 연화총(蓮花塚) · 강서대묘(江西大墓) 등의 벽화에서 인동당초(忍冬唐草) · 연꽃 · 나무 · 풀 등을 볼 수 있다. 신라 고분 중에서는 순흥고령의 벽화 고분에서 연꽃을 볼 수 있다.

백제 고분에서도 연꽃을 볼 수 있다. 무령왕릉(武寧王陵) 출토 유물 가운데에서 볼 수 있는 연꽃 · 배꽃 · 패랭이꽃 · 마름 · 풀잎 · 물풀 · 수련 등은 삼국시대의 풀과 꽃이 어떠하였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선덕여왕에 관한 기록에 의해서도 신라의 궁정 작화 기관인 채전(彩典)에서는 장식화로서의 화훼화를 그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⑵ 고려시대의 화훼화

고려시대에는 화원(畫院)에 화원을 두고 인물화 · 불교화 · 유교화 · 산수화 · 경적화(經籍畫) · 사생화 등을 그렸는데, 사생화에는 화훼화가 포함되었다. 『고려사』에는 이령(李寧) · 최사훈(崔思訓) · 정홍진(鄭鴻進) · 이광필(李光弼) 등 많은 화가가 등장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화훼화는 수덕사대웅전벽화가 유일한 것이다. 연꽃 · 부용꽃 · 모란꽃 · 작약꽃 · 치자꽃 · 들국화 · 계두화 등을 볼 수 있다.

⑶ 조선시대의 화훼화

조선시대의 화훼화는 전대(前代)에 비해서 훨씬 활발하게 그려졌다. 문헌에 나타난 화훼화가만 하여도 30여 명에 이르고 있으며 남아 있는 작품도 많다. 특히 도화서(圖畫署)의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대대로 가법(家法)을 계승한 화가들이 많았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정경흠(鄭慶欽)을 비롯한 유승(維升) · 유점(維漸) · 유복(維復) 등의 정씨 집안, 장득만(張得萬)을 비롯한 경주(敬周) · 한종(漢宗) · 준량(駿良) 등의 장씨 집안이 있다.

강세황(姜世晃)을 비롯한 이오(彛五) · 진(溍) 등의 강씨 집안, 김응환(金應煥)을 비롯한 석신(碩臣) · 득신(得臣) · 양신(良臣) · 하종(夏鍾) · 순종(舜鍾) · 준영(準榮) 등의 김씨 집안, 조정규(趙廷奎)를 비롯한 석진(錫晉) · 광준(廣濬) 등의 조씨 집안 등도 포함된다. 이들은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는데, 좋은 화훼화도 많이 남겼다.

문헌과 유작으로 보아 조선시대 최초의 화훼화가는 김정(金淨)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꽃 · 새 · 길짐승 등을 잘 그렸는데 「영모절지도」 등을 남겼다. 이암(李巖)은 꽃 · 벌레 · 풀 · 나무 · 길짐승 등을 잘 그렸다. 그의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를 보면 중국 화조 영모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구도 · 화법 · 채색 등이 복잡하고 화려하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꽃 · 벌레 · 풀 · 포도 · 새 · 나비 등을 잘 그렸다. 여러 폭이 남아 있는 그의 초충도를 보면 여성의 섬세함이 있는 대신에 생동감이 부족한 것 같다. 김현성(金玄成)도 꽃 · 나비 · 새 등을 그렸는데 「화조도」와 「화접도(花蝶圖)」를 각각 한 폭씩 남겼다. 이신흠(李信欽)은 『초충도화첩』을 남겼는데 꽃 · 벌 · 나비 · 잠자리 · 개구리 · 풀 등이 화폭에 가득하다. 전충효(全忠孝, 17세기)는 영모와 절지에 능숙하였는데 「괴석초충도」를 남겼다.

김인관(金仁寬, 17세기)은 풀 · 꽃 · 물고기 · 게 · 벌레 등을 잘 그렸는데 12폭으로 된 「초충도」와 「어해도(魚蟹圖)」를 남겼다. 이 무렵까지는 명나라 때까지의 중국 그림도 많이 들어왔고, 맹영광(孟永光) 같은 중국 화가도 서울에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화과의 그림을 그렸던 만큼 서울 화단에는 중국 화풍으로 그린 그림이 많았다. 즉, 이 무렵까지를 조선 전기로 본다면 화훼화에서도 중국 화훼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부터는 한국적인 화훼화가 그려졌다. 구도는 비교적 단순해지고 꽃과 풀도 우리 나라에서 많이 자라는 것을 주로 그렸다. 심정주(沈廷冑, 1678-1750)심사정(沈師正)의 아버지로 포도 · 꽃 · 풀 · 길짐승 · 산수 등을 잘 그렸다. 심사정은 원체화풍(院體畫風)을 충실히 따른 화가이다. 그의 화훼초충도와 화수초충도(花樹草蟲圖)에서는 중국적인 냄새가 난다.

강세황(姜世晃)은 원근법과 음영법 등 근대적인 화법을 응용한 화훼도를 남겼다. 「향원익청도(香遠益淸圖)」는 대작의 순수한 화훼도라고 할 수 있다. 연꽃과 풀이 대담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출되었다. 그의 「화훼도」 한 폭이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있다. 최북(崔北)은 대담하고 솔직한 화훼화를 그렸는데, 「홍청도(紅菁圖)」는 그의 호쾌한 성격과 화풍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신사열(辛師說, 18세기)은 화훼와 초충에 능하였는데 「수선도」 등을 남겼다. 신한평(申漢枰)신윤복(申潤福)의 아버지로서 화원이었다. 산수화와 화훼화를 맑고 아담하면서도 고매하게 잘 그렸고, 「묵모란도」 등을 남겼다. 장한종(張漢宗)은 장씨 집안에서는 화훼와 어해를 제일 잘 그려 널리 알려진 화원이었다. 그림을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아들 준량(駿良)도 부업(父業)과 가풍(家風)을 이었다.

김양기(金良驥)김홍도(金弘道)의 아들로, 「화산비금도(花山飛禽圖)」와 같이 특이한 구도로 한국적인 정서를 나타낸 화조도를 여러 폭 남겼다. 허련(許鍊)은 산수와 인물 외에 파초 · 모란 · 노송 등도 그렸고, 「채과도」 · 「묵모란화병(墨牡丹畫屛)」 등을 남겼다. 신명연(申命衍)신위(申緯)의 아들로 모란 · 벚꽃 · 새 · 등꽃 등을 잘 그렸으나 생동감이 부족한 도식적인 그림이라 하겠다.

남계우(南啓宇)는 꽃과 나비를 잘 그려 ‘남나비’라고도 하였다. 치밀하고 사실적이며 아름다운 그림들이었으나 신기(神氣)가 부족한 것이 약점이었다. 이한철(李漢喆)은 갖가지 그림을 두루 다 잘 그렸는데, 절묘한 절지화를 잘 그리기도 하였다. 김수철(金秀哲)은 산수와 절지를 잘 그렸다. 고법(古法)을 따르지 않고 거친 독필(禿筆)로 독창적인 화법을 응용하였다. 즉, 거칠고 대담하여 신선한 맛을 주며, 「자양화도(紫陽花圖)」 · 「국화도(菊花圖)」 · 「계관화도(鷄冠花圖)」 · 「하화도(荷花圖)」 등이 있다.

윤오진(尹五鎭, 1819∼1883년)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채색을 써서 우아한 화훼화를 그렸는데 10여 폭의 화훼도를 남겼다. 전기(田琦)는 8폭의 화훼도를 남겼다. 홍세섭(洪世燮)은 그리고자 하는 주제를 화폭의 가운데로 모으는 등 구도가 참신한 「영모절지도」를 10여 폭 남기고, 독창성이 강한 화훼절지도를 그린 화가였다.

장승업(張承業)은 뛰어난 화기(畫技)를 보여준 화가로서, 여러 폭의 화훼도와 기명절지도를 남겼다. 많은 작가의 기명도나 절지도가 그렇듯이 장승업의 그림도 화가의 심상(心象)을 표출한 창작품이라기보다는 낡은 전통과 구습에 젖은 권문세가의 요청에 의한 그림으로 형식과 장식에 빠진 그림이다. 「백물도(百物圖)」 등 많은 그림을 남겼다.

양기훈(楊基薰, 1843∼1917년 이후)은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畫) 「화훼어해병(花卉魚蟹屛)」(8폭) 등이 대표작이다. 조석진(趙錫晉)은 단아하고 빼어난 <기명절지도>를 그렸다. 물론 창조성이 결여되고 타성에 젖은 이른바 전통 화법에 의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안중식(安中植)은 조석진과 함께 예술 활동을 하였는데, 「기명절지도」(10폭병풍) · 「천향부귀도(天香富貴圖)」 등을 그렸다.

⑷ 현대의 화훼화

조선시대의 마지막 화가가 조석진 · 안중식 등이라면 현대 화가는 그들의 제자들로서 20세기에 활동한 화가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들의 화훼화나 기명절지도 역시 스승의 세계를 벗어나는 그림은 되지 못하였다고 하겠다. 김용진(金容鎭)문인화를 활달하게 그렸는데 청 말의 오창석(吳昌碩)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한 그림을 그렸다. 이도영(李道榮)은 대담성과 패기는 모자랐으나 깨끗하고 잘 정제된 기명절지도를 그렸다.

허백련(許百鍊)의 「사계군방도(四季群芳圖)」 같은 것은 본격적인 화훼도라 하겠는데, 그는 꽃 그림을 많이 그리지는 않았다. 김은호(金殷鎬)는 극세극채색(極細極彩色)으로 화려하고 섬세한 화훼화를 그렸는데, 낭세령(郎世寧)의 사생화풍(寫生畫風)을 따른 듯하다.

이한복(李漢福)은 꽃 · 새 · 그릇 · 풀 등을 고매한 필치로 그렸다. 그의 「초엽와우도(蕉葉蝸牛圖)」는 특이한 그림이라 하겠다. 장우성(張遇聖)은 화풍을 여러 번 바꾸면서도 꾸준히 화훼화를 그렸다. 그는 새로운 조형 감각을 추구하면서 현대의 화훼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화훼화는 꽃과 풀을 사실적으로 충실히, 그리고 아름답게 그리기 위해 사실적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점차 문인화가 발달함에 따라 중국과 우리나라의 화훼화도 사의화(寫意化)가 진행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의 회훼화는 구륵전채법보다는 몰골담채법(沒骨淡彩法)을 써 소박하고 은은하게 그려졌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한국 고유의 들꽃(野生花)을 많이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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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강남문인들의 원예취미와 화훼화」(유순영,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논문, 2018)
「추일계의 소산화보와 화훼화론 연구」(박도래, 『미술사연구』26호, 2012)
「청말 조지겸의 화훼화와 그 영향」(오지영, 『미술사학연구』261, 2009)
「진경시대 화훼영모」(강관식, 『간송문화』61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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