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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演劇)

연극개념용어

 배우가 특정한 연희(演戱)의 장소에서 관객을 앞에 두고 극본 속의 인물로 분장하여 몸짓·동작·말로써 창출해 내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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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분야
연극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배우가 특정한 연희(演戱)의 장소에서 관객을 앞에 두고 극본 속의 인물로 분장하여 몸짓·동작·말로써 창출해 내는 예술.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연희자(演戱者) 또는 광대의 존재는 필수적이지만, 광대를 대신하는 인형(꼭두각시)을 사용할 수 있고 얼굴에 탈을 쓰고 인물을 가장하는 경우도 있다. 연희의 장소 또한 놀이판과 굿판에서 고정된 극장무대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일 수는 있으나, 특정한 장소의 개념은 연극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관객은 단순한 구경꾼에서 연희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나, 그들의 존재 없이 연극을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연극 형성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된다.
이상의 세 가지, 즉 배우·무대·관객을 연극의 기본요소로 보고 여기에다 극본을 추가하여 4대 요소라고 한다. 극본에는 즉흥적·유동적 성격의 매우 단순한 것에서부터 세계문학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극문학(劇文學)에 이르기까지 다양히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극본은 상연대본적 성격을 강조하는 연극성과 독립된 문학작품으로서의 존재를 과시하는 문학성의 두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시대와 나라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나 극본 또는 희곡이 개재됨으로써 연극이 폭넓게 문화적 내용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연극사에서 극문학(희곡)이 끼친 절대적 영향을 말해 주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성립 및 특성
  1. 1. 기원
    연극은 삶의 근원적·총체적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다. 문명 이전 상태에서 인간은 생존유지를 위하여 자연을 초자연화하는 지혜를 터득하였고,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하나의 거대한 감응(感應)체계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제의·주술·굿·놀이라고 부르는 여러 형태의 모방의식이 여기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렇듯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원시적 경험’은 축적과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종교·과학·예능 등 여러 가지 문화형태로 분화되었으며, 연극 또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원시연극은 일차적 충동, 즉 생존을 위한 근원적 활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원시 심성(原始心性)은 자연을 초자연화하여 모든 생물 및 무생물에 정령(精靈)을 부여하고자 하므로 인간은 공감과 조응(照應)의 세계를 확대해 나갔다.
    상징으로서의 물체가 생명과 활력을 얻게 됨에 따라 굿과 주술의 영험이 현실화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수렵 및 농경의식에서 입사식(入社式)·토테미즘·샤머니즘에 이르는 광범위한 제의적인 여러 형태가 바로 이러한 원시 충동에서 발생된 것이며, 거기에는 언제나 신비로운 힘을 부여받은 자가 제사장으로서의 특유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의 제사장이 근원적 의미의 배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제의에서 춤과 몸짓은 본질적 요소를 이루었고, 주문은 단순한 소리에서 꽤 복잡한 이야기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근원적인 극적 양태(樣態)를 지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제의적 행사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고유한 유희본능과 모방본능에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것이다.
    우리말의 노릇·놀음·놀이 등이 다 같은 어원으로 유희·휴식·가요의 뜻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연극을 뜻하는 여러 나라 고유의 낱말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바도 비슷하다. 또한 우리말의 ‘짓’은 모방작용이 내포된 동작을 뜻하며, 거기에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거리(토막·장면)를 나타내는 짓거리, 즉 연극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극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우리말의 ‘굿’을 보더라도 그 뜻에는 무당이 노래나 춤으로 신령에게 치성을 드리는 제의로서의 뜻과 아울러 여러 사람이 모여서 보는 구경거리, 즉 연극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굿거리에서 원시 신앙의 체계는 물론, 연극 또는 뒤에 다시 분화된 무용과 같은 예술이 싹텄다고 볼 수 있다.
  1. 2. 종류
    연극은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계연극의 큰 테두리 안에서 볼 때 연극은 다른 어떤 문화적 산물에 못지않게 역사적·지역적·민족적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양 연극사는 바탕이 되는 서구문명의 질서정연한 역사의식에 의거하여 시대에 따라 명확한 계기(繼起)를 기록하는 데 특색이 있다. 고대·중세·근세 그리고 근대·현대 등 역사적 시기 구분에 따라 연극은 일관된 흐름 속에서 생성,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그리스·로마)의 연극은 이미 비극과 희극이라는 양대 연극 장르에 의한 구분을 확정지어 온갖 법칙과 약속을 규정해 버렸다. 따라서 서양 연극은 이러한 구분(또는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소구분)에 의하지 않고는 그 형태를 이해할 수 없다.
    현대 연극처럼 시대적·문화적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그 구분을 거부하려는 노력조차 위의 전제 없이는 정의하기 힘든 형편이다. 또한 각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조류에 의한 분류, 예를 들면 고전주의 연극·낭만파 연극·리얼리즘 연극·표현파 연극 등도 서양문화의 총체적 맥락 속에서 이름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서양 이외 지역의 연극현상에 적용할 때는 어려움과 무리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한편 서양 연극의 이와 같은 통시적(通時的) 인식과는 반대로 우리의 연극을 포함한 아시아 연극은 공시적 문화현상(共時的文化現象)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역사 진행과정에서 새것에 의한 낡은 것의 극복이 아니라, 연극형태가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이 반드시 상호배제적이지 않다는 데 특색이 있다.
    따라서 아시아 연극은 낭만파 연극 다음의 리얼리즘 연극이라는 순서가 아니라 판소리가 있고, 또 그와 다른 형태의 가면극이 공존하고 있을 따름이고, 판소리가 창극(唱劇)으로 탈바꿈하였다고 하여 형태의 발전, 즉 ‘낡은 것’의 극복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 연극에서 14세기 후반에 형성된 ‘노(能)’나 17세기에 일어난 ‘가부키(歌舞伎)’가 지금도 그 형태를 보전하고 있는 것 역시 아시아 연극의 한 가지 특색을 말해 준다. 따라서 서양 연극의 종류·개념을 다른 지역의 연극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뛰어나게 명확한 정의를 내린 ‘비극’의 개념은 인도의 고전 산스크리트 연극의 비극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지난 1세기에 걸쳐 서구화의 억센 물결이 아시아에 밀어닥친 결과, 연극에도 전통과의 단절 양상이 두드러졌다.
    그 때문에 연극사의 기술(記述)은 완전히 양분되어 근대 이후는 대체로 화극(話劇) 중심의 신극(新劇)이라는 새로운 명칭 아래 서양 근대극의 종류와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한국 연극사 기술의 어려움은 바로 이러한 데에도 있다.
  1. 3. 특성
    흔히 연극을 두고 ‘종합예술’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은 연극이 문학·미술·음악·무용 등 인접 예술 분야와 여러모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희곡 (문학)·무대장치·조명·분장(미술) 등은 물론이고, 음악이나 무용은 그 기원에서나 공연예술로서의 상호친밀성 때문에 때로는 분리하기조차 곤란한 경우가 있다.
    이렇듯 많은 구성요소로 인해 연극을 종합예술이라고 할 때 그 미학적 순수성이 문제되기도 한다. 따라서 잡다한 구성요소의 무분별한 집합체가 아닌 총체적인 연관 속에서 연극을 하나의 ‘단원적(單元的) 앙상블’로 파악하는 관점이 요청된다.
    그렇게 할 때 연극은 몸짓과 춤 그리고 소리를 포함하는 배우의 예술이며, 연희자와 관객 사이의 특정한 약속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공동체적 경험의 표출이라는 인식이 성립된다.
    그리고 각자의 종족적 문화 특성에 뿌리박은 상징언어적 특성을 무용과 더불어 가장 예민하게 드러내 준다는 의미에서 연극은 민족적 전통과 사회습속에 밀착되어 있는 예술이다. 따라서 형태도 다양하거니와 주어진 연극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일률적인 척도를 적용하기 매우 힘든 것이 또한 연극의 특성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
  1. 1. 삼한시대의 연극
    한국 연극의 기원도 다른 여러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제의에서 찾을 수 있다. 3세기경 한반도 여러 부족의 생활상태를 기록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기타 중국 역사서의 단편적인 기록들에 따르면, 어느 부족사회에나 1년에 한두 차례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제천(祭天)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원시적인 연극, 즉 무의식극(無意識劇)이 이미 그 속에 싹트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춘추농경제, 가락의 희락(戱樂)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고대 제의의 실상은 현재 남아 있는 각종 동제(洞祭)의 민속에서 그 유풍을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때 연희되었던 가무백희도 현존하는 동제의 농악이나 각종 탈놀이·민속놀이 등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강릉의 단오굿과 관노(官奴) 탈놀이, 하회별신굿 탈놀이, 동해안 별신굿의 탈놀음 굿, 완도 장좌리(長佐里) 당제의 농악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 2.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연극
    1. 2.1. 고구려악
      고구려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일찍이 화북지방뿐만 아니라 이른바 새외민족(塞外民族)들의 여러 선진문화와의 접촉이 많았고, 낙랑문화를 비롯한 중국계·인도계·북방계 문화를 흡수하여 다시 신라와 백제로 전파하는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고구려악은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州)」 3종이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조에 기재되어 있을 뿐이나,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수(隋)나라의 7부기(七部伎)와 9부기, 그리고 당태종(唐太宗) 때의 10부기 가운데 하나로 고려기(高麗伎)가 들어 있다.
      또 『수서(隋書)』 음악지에는 「지서가(芝栖歌)」와 「가지서무(歌芝栖舞)」를 고구려악으로 들고 있으나 가무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고, 『문헌통고(文獻通考)』와 『구당서(舊唐書)』 음악지에는 고구려에 「괴뢰희(傀儡戱)」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는 5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까지 삼국악이 신라악·백제악·고구려악의 순으로 전해져서 병립하였으나, 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래악무를 정리할 때 삼국 및 발해의 악무를 우방악(右方樂), 일명 ‘고마가쿠(高麗樂)’라고 하여 고구려악을 삼국악의 총칭으로 썼고, 당나라 및 인도의 악무를 좌방악(左方樂), 일명 ‘당악(唐樂)’이라고 하였다.
      우방악, 즉 고마가쿠 24곡 중 일본제 악무라는 4곡을 제외한 20곡 중 12곡이 가면무악(假面舞樂)이다. 그 이름은 「신도리소[新鳥蘇]」·「고도리소[古鳥蘇]」·「신쇼도쿠[進走禿]」·「다이쇼도쿠[退走禿]」·「나소리[納曾利]」·「소리고[蘇利古]」·「곤론핫센[崑崙八仙]」·「고도쿠라쿠[胡德樂]」·「오닌데이[皇仁庭]」·「기도쿠[貴德]」·「아야기리[陵切]」·「지큐[地久]」 등이다.
      이 곡들은 삼국악과 발해악 그리고 서역악(西域樂)까지 집성한 것으로 당악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지만, 고구려악을 비롯한 삼국악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이 같은 문헌 외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잡기도(雜技圖)에서 고구려 산악(散樂)·백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악이 중국이나 일본에 삼국악을 대표하는 악무로 알려진 것은 일찍이 고유한 고구려악에 서역악을 비롯한 대륙의 선진 악무를 받아들여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고 고구려악으로 훌륭히 이룩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악(樂) 혹은 기(伎)라고 하는 것은 악(樂)·가(歌)·무(舞)가 하나로 종합되어 공연예술인 예능을 이룬 것을 뜻하며, 연극의 미분화상태를 총칭하는 것으로 좁은 의미의 음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 2.2. 백제악
      백제는 삼국 중에서 지리적으로 교통이 쉬웠던 중국의 남조(南朝)와 교류가 잦아 남조문화를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백제악으로 『고려사』 악지에서는 「선운산(禪雲山)」·「무등산(無等山)」·「방등산(方等山)」·「정읍(井邑)」·「지리산(智異山)」의 5종을 들고 있다.
      그러나 『수서』 동이전에는 「투호(投壺)」·「위기(圍碁)」·「저포(樗蒲)」·「악삭(握槊)」·「농주지희(弄珠之戱)」를 백제기로 들고 있는데, 농주는 신라오기(新羅五伎)의 「금환(金丸)」과 더불어 대륙에서 전래한 산악(散樂)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612년(무왕 13)에 백제 사람 미마지(味摩之)가 남중국인 오국(吳國)에서 배운 기악(伎樂)을 일본에 전했다고 한다.
      일본 악서 『교쿤쇼[敎訓抄]』에 의하면 기악은 지도(治道)·시시(獅子)·고코(吳公)·가루라(迦樓羅)·공고(金剛)·바라몬(婆羅門)·곤론(崑崙)·고조(吳女 혹은 五女)·리키시(力士)·다이코(太孤)·스이코(醉胡) 등이 등장하는 가면무용극으로 부처를 공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악은 조금 뒤늦게 일본에 전해진 부가쿠(舞樂)와 산가쿠 등에 제압되어 주로 사찰에서만 연희되었고 13, 14세기에 이르러 소멸되었으나, 일본 연극사에서 부가쿠·노가쿠(能樂)를 비롯한 각종 민속예능의 기반이 되었다.
      일본의 기악가면은 200여 개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은 이른바 깊숙한 눈과 우뚝 솟은 코를 지닌 호인형(胡人型)으로, 그 원류를 학자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하여 비단길(silk road)을 거쳐 중국 남부에 전해진 놀이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늘날 기악의 실체를 더 이상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백제의 기악은 사찰에서 신도들을 관객으로 하여 연희되던 가면무용극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연희일 뿐 아니라 후대 한국 가면극 형성의 모체가 된 것 중 하나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백제기악이 산대극과 동일한 기원을 가진 놀이라고 보기도 한다.
    1. 2.3. 신라악
      신라는 7세기 후반에 삼국을 통일하고 가야·백제·고구려의 악무를 함께 집성하여 신라악으로서 후대에 전한 것이 제일 많았다.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조에는 신라악으로 「동경(東京)」 2종과 「목주(木州)」·「여나산(余那山)」·「장한성(長漢城)」·「이견대(利見臺)」 등 6종이 수록되었고, 『증보문헌비고』 속악부에는 30여 곡이 수록되어 있다.
      팔관회(八關會)에서 연희되었다는 가무백희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남은 종목으로 「검무(劍舞)」·「무애무(無㝵舞)」·「처용무(處容舞)」·오기(五伎) 등을 들 수 있다.
      「검무」는 일명 「황창무(黃昌舞)」라고 하며, 그 유래는 『동경잡기(東京雜記)』와 『증보문헌비고』에 신라의 황창랑이라는 7세 소년이 검무를 빙자하여 백제왕을 죽이고 백제인들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신라 사람들이 슬피 여겨 그 모습을 본뜬 탈을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검무를 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창은 관창(官昌)의 와전일 것이며, 실재한 소년용사 관창의 사실(史實)과 관련하여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검무」는 단순한 전투모의무이나 용검술의 묘기를 보이는 등의 검무가 아니고 가면을 쓰고 좀더 연극성을 띤 가면동자무검희(假面童子舞劍戱)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 기원을 두었다는 이 동자검무는 조선시대 김만중(金萬重)의 「관황창무(觀黃昌舞)」라는 시에 보면, 이때에는 이미 여기검무(女妓劍舞)로 탈을 쓰지 않고 추었음을 알 수 있다.
      「검무」는 이렇게 민간에서 전승되다가 조선 순조 때 비로소 궁중정재(宮中呈才)로 되었고, 기생에 의하여 조선 말까지 전승되었다고 한다.
      궁중에 들어와서도 탈은 없고 칼도 무구화(舞具化)된 검기(劍器)를 사용하였으며, 전립(戰笠)·전복(戰服)·전대(戰帶)를 착용하고 검기를 들지만 무태(舞態)는 무무(武舞)로서의 씩씩함보다 여무의 곱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바뀌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진주검무(晋州劍舞)」가 좋은 예이다.
      「무애무」의 유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원효(元曉)와 관련시킨 연기설화가 있으나, 『고려사』와 『악학궤범』에는 「무애무」가 서역에서 유래되었고 불가어(佛家語)를 많이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또 호로박 상부에 금방울을 달고 밑에는 여러 가지 색의 비단 헝겊을 단 무애를 흔들면서 추는 춤을 설명하고 있으나, 이미 불도교화(佛道敎化)의 취지에서 벗어나 오락화한 여기(女妓)의 향악무(鄕樂舞)로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애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무원(舞員)이 12명으로 늘었으며, 춤을 추는 도중에 부르던 불가(佛家)의 가사도 왕가의 번영을 송축하는 노래로 바뀌었다. 궁중뿐만 아니라 사찰에서도 다분히 유흥적인 춤이었음을 『세종실록』 16년 8월조 등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처용무」는 그 기원을 신라에 두고 고려를 거쳐 다시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는데, 구나무(驅儺舞)로써 처용탈을 쓰고 추며 궁중에서 잡귀를 쫓는 나례(儺禮)의 중심이 되는 의식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궁중의 연락무(宴樂舞)로서 고려시대에는 고관들이나 심지어 국왕까지도 「처용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외국 사신의 접대연에서도 추었던 가면정재무이다.
      또, 고려의 「처용무」는 산대잡극의 중심 놀이 중의 하나였다. 「처용무」는 고려말에는 2인무였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정리되고, 『악학궤범』에 보이는 대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로, 즉, 학무와 연화대무 및 처용무가 종합된 가무극이 되었다. 「처용무」는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 전하며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오기라 함은 신라말 최치원(崔致遠)의 절구시 「향악잡영오수 鄕樂雜詠五首」에서 읊은 다섯 가지 놀이, 즉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를 말한다.
      이 놀이들은 신라 고유의 놀이, 즉 향악이라고 읊었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중국과 서역에서 전해진 산악(散樂)과 백희에서 영향받은 삼국악을 종합한 놀이들임을 알 수 있다.
      「금환」은 곡예의 하나로 고구려와 백제의 「농주지희」와 같은 것이며, 또 가야의 「보기(寶伎)」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산악의 ‘공 여러 개 던지기[弄丸]’, ‘칼 던지기[丸劍]’, ‘비수 여러 개 던지기[跳匕丸]’ 등에 해당하는 놀이이며, 금칠한 공을 여러 개 던져 받는 놀이이다.
      「월전」은 서역 우전국(于闐國:지금의 Khotan지방)에서 전해진 탈놀이의 일종으로 생각되며, 최치원의 시구로 보아 호인형(胡人型)의 탈을 쓴 배우들이 구경꾼들을 웃기는 흉내내기놀이이며, 경희극(輕喜劇)과 같은 것으로 추측된다.
      「대면」은 당대(唐代) 오기의 하나인 대면희(代面戱)와 일본에 전하는 부가쿠의 란료오(蘭陵王)와도 비교되는 가면무로 귀신을 쫓는 구나무의 일종이다.
      「속독」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Tashkent)와 사마르칸트(Samarkand)에 있었던 소그드(Sogd) 제국에서 전래한 건무(健舞)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전하는 고마가쿠 중의 쇼도쿠(走禿)는 이 「속독」의 전사(轉寫)일 것이며, 최치원의 시구로 보아 그 탈은 호모형(胡貌型)의 색다른 탈이며, 춤 곡은 빠른 속도였다고 추정된다.
      「산예」는 오기 중에서 그 유래를 직접 말해 주는 사자춤이다. 사자춤은 인도 특유의 동물의장무(動物擬裝舞)로서 서역과 동방의 여러 나라에 퍼지고, 중국과 한국·일본에 지금도 전해 오는 춤이다.
      현존하는 민속사자춤으로는 「북청사자놀음」이 있고, 「봉산탈춤」과 오광대·야류(野遊) 등에 각각 사자춤과장이 전한다. 이와 같이 신라악은 안으로는 서역악·중국악 등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고구려악·백제악·가야악을 흡수, 집성하여 후세에 전하였고, 밖으로는 성당(盛唐)과 만당(晩唐)의 대륙문화와 접촉하면서 당시 획기적인 존재였던 당악을 받아들이고 유라시아를 덮은 국제성과 세계성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1. 3. 고려시대의 연극
    1. 3.1. 산대잡극
      고려의 국가적인 제전으로는 팔관회와 연등회(燃燈會)를 들 수 있는데, 정월 대보름(나중에는 2월)에 행하던 연등회는 불사(佛事)의 제전이요, 한겨울(음력 11월)에 행하던 팔관회는 토속신에 대한 제전으로, 대상이 다를 뿐 그 의식절차면에서 보면 다같이 등불을 찬란히 밝히고 채붕(彩棚)을 설치하고, 주과(酒果)와 음악과 가무백희로 대축연을 베풀고, 제불(諸佛)과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전이었다.
      『고려사』 예지(禮志)에 보면 팔관회의 백희가무 내용은 국선 화랑도들이 담당하였던 가악무인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놀이·봉황무·코끼리놀이 등 동물로 분장한 탈놀이와 수레놀이·뱃놀이와 같은 산악잡희였는데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라고 하였다.
      여기서 채붕이라 함은 오색 비단장막을 늘어뜨린 다락으로, 나무로 단(段)을 엮어 만든 일종의 장식무대라고 할 수 있는데, 산형 또는 산과 같이 높은 채붕을 산붕(山棚) 또는 산대(山臺)라고도 불렀다.
      이색(李穡)의 시 「산대잡극」은 고려의 가무백희를 집약하여 읊었는데, 봉래산(蓬萊山) 같은 채붕을 시설하고, 헌선도(獻仙桃) 무악과 속악(俗樂)을 울리고, 「처용무」를 추며, 백희의 하나인 장대타기를 보여주고, 번개같이 번쩍이는 불꽃놀이를 하였음을 묘사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이러한 산대잡극은 연등회와 팔관회 외에도 왕의 행행(行幸)이나 원나라로부터의 환국잔치, 그 밖에 연락환오(宴樂歡娛)로, 또는 개선장군의 환영잔치 등에도 상연되었다.
    1. 3.2. 나희
      가례(嘉禮)인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채붕을 시설하고 가무백희를 하였던 것과는 달리 흉례(凶禮)인 나례에서는 채붕을 시설하지는 않았지만, 이색의 시 「구나행(驅儺行)」의 내용으로 보아 역시 가무백희가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사(唱詞)와 아이 초라니(儺者의 하나)들이 제각기 탈을 쓰고 귀신을 쫓는 의식을 거행하고 의식이 끝나면 제2부로서 여러 악공(樂工)들이 입장하여 차례로 가무백희를 상연하였다.
      오방귀무(五方鬼舞)와 같은 제무(祭舞), 불 삼키기[吐火]와 같은 곡예, 서역 호인의 탈놀이, 화교(華僑)의 답교(踏橋)놀이, 「처용무」 그리고 백수무(百獸舞)들이 펼쳐지는데, 곡예와 답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탈춤이나 탈놀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고려사』에서 고려시대의 탈놀이로 생각되는 것을 추려 보면 호한잡희(胡漢雜戱)·가면인잡희·걸호희(乞胡戱)·당인희(唐人戱) 등이 있는데, 고려시대 탈놀이의 등장인물은 다양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 3.3. 조희
      이 밖에 가무만이 아니고 재담이 중심이 된 놀이로 우리 나라의 화극적(話劇的) 전통의 출발을 보여준 것이 조희(調戱)이다. 그 예로 『고려사』에 보면 1010년(현종 1)에 나라를 위하여 죽은 하공진(河拱辰)을 기리는 하공진놀이나 공민왕 때 권세가의 수탈상을 놀이로써 거리에서 보여주었다는 우희(優戱)는 말을 주된 표현수단으로 하는 독연(獨演)이었다고 짐작이 된다.
      또 이 같은 독연형태가 아니고 여러 사람에 의한 놀이로는 1165년(의종 19) 4월에 좌우번(左右番)의 내시들이 경연으로 채붕을 설치하고, 잡기로서 이국인(異國人)들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보여준 공물바치기놀이가 있다.
    1. 3.4. 재인·광대
      고려의 연희문화에 미친 외국의 영향을 생각하게 하는 예는 문종 때 송(宋)나라에서 교방악(敎坊樂)을, 1116년(예종 11)에는 대성아악(大晟雅樂)을 수입하여 고려악을 정비하였으며, 1117년에는 왕이 남경(南京)에 갔을 때 거란 투화인들이 거란 가무잡희를 보여주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다.
      또한, 의종 때까지도 안국기(安國伎)·고창기(高昌伎)·천축기(天竺伎) 등 서역악이 존속되었다는 것도 『고려사』에서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뒤로는 원나라를 통한 유라시아 대륙문화와의 직접 교류가 늘었으며, 1283년 (충렬왕 9)에는 원나라의 남녀 창우(倡優)가 고려를 방문해 백희를 연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의 악공과 배우들은 태악서(太樂署)·관현방(管絃房) 또는 교방에 소속되었는데, 의종 때의 기록을 보면 영가산대(迎駕山臺)에는 교방악관(敎坊樂官) 100인, 안국기인(安國伎人) 40인, 잡극기인(雜劇伎人) 160인이 동원되고 있다.
      이 잡극기인이 『고려사』에서 악관과 구별하여 영관(伶官)이라고 기록된 우인 또는 창우를 말하며, 산대잡극 등 연극 행사를 전담하였던 직업 배우의 일단으로 보인다. 이들 외에도 상당수의 악공과 배우들이 민간에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민간의 경제적인 뒷바라지도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로 충분하였던 것 같다.
      고려에서 배우를 광대라고 부른 기록은 『고려사』 열전(列傳) 전영보조(全英甫條)에 처음으로 보이고, 최이조(崔怡條)에는 재인이라는 말이 보이며 광대와 재인을 동일하게 다루고 있다.
      배우를 광대와 재인이라고 부른 외에 송나라의 손목(孫穆)이 쓴 『계림유사(鷄林遺事)』에 보면 배우[倡]를 수작(水作), 즉 무자이라고 한다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수작은 수척(水尺)을 가리키는 말로 일명 양수척(揚水尺)이라고도 하고, 고려말에는 화척(禾尺), 조선시대에 와서는 백정(白丁)이라고 하던 유랑민 집단을 가리키던 말이다.
      그들은 고리장[柳器匠]·도살·육상(肉商) 등을 직업으로 삼았고, 『고려사』 열전 최충헌조(崔忠獻條)에 유기장 집에서 기녀가 나왔다는 말은 양수척과 창우와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고려사』의 여러 대목에서 당시의 관리들이 직업 배우들을 모방하여 여러 가지 놀이를 하였던 기록이 보이는데, 1236년(고종 23)에는 복야(僕射) 송경인(宋景仁)이 내전잔치에서 처용희를 잘하였고, 1288년(충렬왕 14) 세자 생일잔치에는 상장군 정인경(鄭仁卿)이 주유희(侏儒戱)를 하였고, 장군 간홍(簡弘)은 창우희를 하여 왕이 손뼉을 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들은 직업 배우가 고려사회에서 널리 일반화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 4. 조선시대의 연극
    1. 4.1. 산대나희
      척불숭유 정책을 쓴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의식은 그대로 계승되지 않았으나 산대잡극과 나례는 계승되어 더욱 성행하였다.
      특히 나례는 고려 예종 이후 점차 구역(驅疫)보다 잡희부(雜戱部)가 확대되어 나희(儺戱)로 인식되었는데, 조선에 와서는 나례도감(儺禮都監) 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이 이를 관장함에 따라 산대잡희·산대나례·나희 등으로 명칭의 혼용이 보인다.
      또한 계동나례의(季冬儺禮儀) 때와 임금의 부묘환궁(祔廟還宮) 때, 종묘친제(宗廟親祭) 때, 그리고 알성(謁聖) 때와 그 밖의 각종 행행 때에 거행되었고, 또 중국사신 영접 때, 안태(安胎) 때, 진풍정(進豐呈) 때, 내농작(內農作) 때, 신임 감사 영접 때, 그리고 각종 연락환오(宴樂歡娛) 등에 광범위하게 쓰여졌다.
      『문종실록』 즉위년(1450) 6월조에 보면 나례를 규식지희(規式之戱)·소학지희(笑謔之戱)·음악(音樂)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1488년(성종 19) 3월에 방문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는 그가 본 산대나례의 내용 중 토화(吐火), 곰놀이 등 동물가장무[魚龍之戱], 무동(舞童)·근두(筋斗)·줄타기[踏索]·죽마(竹馬) 등을 규식지희라 하고, 성현(成俔)의 「관나시(觀儺詩)」에는 춤과 농환(弄丸)·줄타기·괴뢰희·솟대놀이[長竿戱] 등을 나례에 등장하는 잡희로 읊고 있다.
    1. 4.2. 소학지희
      이러한 규식지희 외에 잡희, 창우희 또는 배우희(俳優戱)라고 불리던 소학지희도 나례에서 광대들에 의하여 놀아졌다. 『세조실록』 10년(1464) 12월조에 보면 나례 때 축역우인(逐疫優人)이 잡희를 통하여 탐관과 청백리의 모습, 민간의 생활상을 자상문답(自相問答)으로 연출하였다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5년(1499) 12월에 공결(孔潔)이라는 배우가 이신(李紳)의 「민농시(悶農詩)」를 읊고 3강령 8조목(三綱領八條目)을 논하는 등 무례하였으므로, 60대의 매를 때리고 관노(官奴)인 역졸로 예속시켰다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12월에도 공길(孔吉)이라는 배우가 노유희(老儒戱)를 놀던 중 불경한 말을 했으므로 역시 매를 때리고 유배시켰다고 하였다. 또한 『중종실록』 22년(1527) 12월조에는 나례 때 정재인(呈才人)들이 민간의 질고(疾苦)와 구황 절차(救荒節次) 등을 놀이로써 연출한 기록도 보인다.
      이 밖에도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우인귀석(優人貴石)의 시사(時事)를 풍자한 놀이, 동윤(洞允)의 꽃을 찾는 나비의 놀이, 상소놀이 등이 소개되어 있고, 중종 때 사람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무세포(巫稅布)놀이와 정평부사(定平府使) 말 안장 사는 놀이가 소개되었다.
      필자 미상의 『지양만록(芝陽漫錄)』에는 도목정사(都目政事)놀이가 각각 소개되어 있으며, 안정복(安鼎福)의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에는 등과자(登科者)들이 낙으로 삼는 선비놀이[儒戱]를 소개하였다.
      이상 몇 가지 예들에서 볼 수 있는 15, 16세기 소학지희의 전개는 이 시기에 이미 연극을 재담으로써 이끌어가는 화극적(話劇的)인 놀이가 더욱 성하였고, 그것도 독연형태만이 아니라 다수의 등장인물에 의한 연희도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잡극들은 궁중나례 때나 세시에 공연되었으며, 이 소학지희가 더 강화된 것이 고려시대에 비하여 조선시대 나희가 갖는 특색이라 할 수 있다.
    1. 4.3. 재인·광대
      조선시대의 연희문화는 기녀와 악공, 그리고 재인과 광대들이 주로 맡아 왔고, 나례나 사신영접과 기타의 나례도감이 주관하는 공의(公儀)를 끼고 내려왔지만, 관가에 매인 교방 기녀나 악공은 별도로 하고 그 밖의 우인(優人)들은 행사 때에만 선출되어 상경하였다.
      그들은 평소에는 떼를 지어 경향 각지를 다니며 각종 민속연희를 공연하고 보수인 행하(行下)를 받거나, 혹은 호조에서 발급한 도서(圖書)를 가지고 전국의 관아나 사찰을 돌면서 걸량(乞糧)이라고 하여 비용을 벌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쳐 조정의 악공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그 수가 많이 줄어들고, 응급책으로 재인과 광대를 각 고을에서 징발하고 봉상(捧上)하는 일이 많아지자 이에 수응하기 위하여 각 고을의 재인청(才人廳)을 중심으로 전국 규모로 무계(巫契)가 조직되었다.
      천민이며 단골무당의 남편인 고을의 재인·광대는 관비인 기생이 속하여 있는 장악청(掌樂廳)과 함께 각 고을의 재인청에 소속되어, 원님의 행차에 동원되어 선두에서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연주하고 유연(遊宴)에는 각종 소리와 놀이를 연출하였다.
      이 고을의 재인청이 모여 각 도에 대방(大房)을 두고, 그 밑에 여러 소임을 두어 팔도의 도청(都廳)이 전국적으로 모여 팔도도대방(八道都大房)·팔도도산주(八道都山主)·도집강(都執綱)·도장무(都掌務) 등 여러 소임을 두고, 지방의 향연과 서울의 모든 연예 행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이후에는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보이는 바와 같이 이들 광대·재인은 판소리를 하는 광대와 줄타기·땅재주 등을 하는 재인으로 분업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아의 행사, 사대부들의 과거급제 때의 유가(遊街)·도문(到門)·영친(榮親)·소분(掃墳)·문희연(聞喜宴), 회갑연 등의 하연(賀筵), 농산어촌·장터·사찰에서 각종 민속연예를 연출해왔다.
      그들은 이렇게 양반관료들의 비호를 받고 시중의 공상인(工商人)들과 농어촌 백성들의 오락에 대한 요구에 응해 왔으나, 시장과 도시가 발달하지 못하고 중산층의 형성도 없었으며, 또한 선비들이 자신들의 유학적 견지에서 항상 연예를 비난하는데다, 지나친 중앙집권적인 행정체제 때문에 끝내 극장 하나도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그들이 근대 연극의 배우로서 성장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 가계에서 많은 사당패들이 나왔고, 사당패는 나중에 굿중패 또는 남사당이라고 불리던 유랑연예인의 하나로 조선 후기 이래 1920년대까지도 우리 나라 농어촌과 장터를 돌아다니며 민중오락을 제공해 왔다.
      그들의 주요 공연내용은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이)·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재인·광대들의 이른바 가무백희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예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1. 4.4. 판소리
      판소리는 소리와 아니리로 구성된 특수한 극시(劇詩)로서 고수의 추임새와 함께 소리, 아니리, 발림(너름새)과 춤으로 연출되는 독연형태의 광대극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광대들의 구전에 의하면 하한담(河漢譚)과 최선달(崔先達) 등의 선구자들에 의하여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개척되고, 다시 19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동안 하나의 장르로 정립되었다.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에는 이미 열두마당의 고정된 레퍼터리를 갖기에 이르렀다. 즉, 「춘향가」·「화용도(華容道)」·「박타령」·「강릉매화가」·「가루지기타령」·「왈자타령(曰字打令)」·「심청가」·「배비장타령」·「옹고집타령」·「가짜 신선타령」·「토끼타령」·「장끼타령」 등이다.
      판소리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많은 명창들이 나타나 완전한 짜임새를 가진 노래와 아니리, 율문과 산문으로 짜여진 독특한 극시(드라마)로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구비문학에 지나지 않았던 판소리 사설은 신재효(申在孝)가 나타나 근 30년 동안 진력하여, 전래하는 판소리 열두마당을 여섯마당(춘향가·심청가·토별가·박타령·적벽가·변강쇠가)의 극본으로 재정리함으로써 부동문학에서 고정문학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 중 신재효의 「변강쇠가」를 제외한 5가(歌)가 현재 판소리의 고전으로 불리고 있다. 또 판소리의 명칭은 재래에 타령·극가(劇歌)·구극(舊劇)·창극(唱劇)·국극(國劇) 등 여러 가지로 불렸으나, 그 중 창극(구극·국극)은 1908년 이인직(李人稙)의 원각사(圓覺社) 무대에서 주로 김창환(金昌煥) 등이 활약하여 배역과 분창이 생긴 뒤, 1933년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의 공연에 이르는 동안 이루어진 것이며, 조선 말기까지의 독연형태는 그대로 판소리라고 불러 창극과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 4.5. 민속극
      현전하는 대표 민속극은 가면극과 인형극이다. 가면극은 경기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경상남도지방의 「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수영야류(水營野遊)」·「동래야류(東萊野遊)」, 경상북도지방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함경남도지방의 「북청사자놀음」이 있고 인형극으로는 「꼭두각시놀음」이 있는데 모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그 전수에 힘쓰고 있다.
      이들 가면극 중 「하회별신굿탈놀이」와 「북청사자놀음」을 제외한 나머지 10여 종목과 「꼭두각시놀음」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극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다. 그 구성은 크게 파계승놀이, 양반과 말뚝이 놀이, 영감과 할미 놀이 등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더 자세히 나누면 ① 벽사(辟邪)의 의식무와 굿, ② 파계승에 대한 풍자, ③ 양반에 대한 모욕, ④ 남녀의 대립과 갈등, ⑤ 서민생활의 실상 등을 보여주는 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가면극의 연출형태는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거기에 몸짓과 재담(대사)이 따르는 연극적 부분으로 구성, 상연된다.
      이들 산대도감 계통극이 오늘날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것은 대체로 1634년(인조 12) 이후 산대극이 공의로서 상연되는 일이 점차 폐지되고 광대들에 대한 뒷바라지가 민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게 되면서 민속극화된 뒤부터라고 추정된다.
      신재효의 「춘향가」동창본에는 확실히 양반과장이라고 생각되는 놀이가 나와 있다. 연희자들의 구전에 따르면 대부분 200년 전 혹은 300년 전부터 이 놀이들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판소리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며 숙종조에 해당된다.
      ‘산대도감극’이라는 명칭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전기에 나례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나례도감이나 산대도감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전승된 산대도감 계통극은 고려 말이나 조선 전기에 공연된 산대잡극이나 산대나례희와 같지 않으므로 이제까지 그 발생이나 극의 형성에 대하여 여러 논의가 있어 왔다.
      이들 논의 중에서 크게 나누어서 ① 농경의례기원설(農耕儀禮起源說), 혹은 서낭굿기원설, ② 기악과의 동일기원설, ③ 산대희설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대조적인 것은 기악과의 동일기원설과 서낭굿기원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토착적인 고유 탈놀이에 대륙에서 전래된 산악백희와, 특히 백제기악 같은 불교의식무의 영향을 받아 오늘의 산대도감극이 형성되었음을 설명하는 기원설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선행 예능(先行藝能)의 영향 속에서 특히 나례의 규식지희와 더불어 상연되던 희학지사(戱謔之事), 즉 소학지희 속에서 오늘의 산대도감 계통극 드라마가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남사당놀이의 중심은 「꼭두각시놀음」, 일명 「박첨지놀음」 혹은 「홍동지놀음」이라고 불리던 인형극이다.
      우리 나라의 인형극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있었으며, 그것은 중국을 거치거나 혹은 직접 북방에서 수입된 서역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이 놀이극본이 형성된 시기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 후기 서민문학의 대두와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졌으며, 역시 산대도감 계통극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내용은 가면극과 마찬가지로 ① 파계승에 대한 풍자(이 주제는 가면극보다는 약하다), ② 일부처첩(一夫妻妾)의 삼각관계와 서민층의 생활상, ③ 양반의 횡포와 형식도덕에 대한 폭로와 조롱, ④ 내세의 명복을 비는 불교 귀의 등을 7∼10막으로 나누어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 인형극의 연출형식이나 인형조종법 등은 중국이나 일본과 동일하다. 우리 나라의 인형 조종법은 중국인형의 이른바 현사괴뢰(懸絲傀儡)·주선괴뢰(走線傀儡)·장두괴뢰(杖頭傀儡)·포대괴뢰(布袋傀儡, 혹은 指頭) 등을 모두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 밖에 1920년대 초까지 음력 사월초파일에 성하였던 그림자인형극 「만석중놀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찰에도 전해지지 않는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반, 개화기의 연희는 당시의 국내 신문이나 외국인들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궁중에서와 고관들은 가동무기(歌童舞妓)의 기악(妓樂)과 광대의 판소리를 연락(宴樂)에 사용하였다.
      민간에서는 광대의 판소리와 재인들의 줄타기·땅재주·기타의 곡예와 꼭두각시놀음, 무동놀이, 산두놀이[山臺都監劇], 청나라 사람의 기예와 곰놀이, 일본 사람의 희원(戱猿)·희견(戱犬)과 왜창나희라고 불리던 일본인 배우들의 놀이가 흥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02년 12월 우리 나라 최초의 옥내 상설극장이요 황실극장격인 협률사(協律社)가 개장되어 신극사(新劇史)의 첫장이 열리게 되었다.
  1. 5. 현대의 연극
    1. 5.1. 극장의 설립과 신연극 운동
      우리 나라 현대극을 설명할 때 반드시 극장의 설립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고전극이 야외 마당놀음 형식의 민속연극이었다가 개화기 이후 옥내무대가 설치된 뒤에야 비로소 근대적 성격의 연극이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최초로 설립된 연극장은 1902년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 경축식을 위하여 개설한 황실극장격인 협률사였다. 협률사는 전국의 명인·명창·무희 등 170여 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구성하였다.
      김창환을 대표로 한 전속단체 내에는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강용환(姜龍煥)·허금파(許錦波) 등 최고의 명인과 명창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다.
      당초 황실의 경축식을 위하여 연습하던 이들은 여러 사정으로 그것이 흐지부지되자 협률사를 일반 관람장으로 바꾸었다. 그로부터 풍기상의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고, 결국 이필화(李苾和)의 상소에 따라 3년 반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던 협률사는 1908년 7월에 원각사라는 민간 대여 극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원각사는 이동백을 단장으로 하여 남자 40명, 여자 24명 등 모두 64명의 전속단원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명인·명창들이었다. 이들은 개화기 신문물의 추세에 맞추어 판소리를 대화창으로 바꾸어 공연하다가 완전히 분창하여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재래의 판소리보다 새롭다 하여 신연극(新演劇)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1908년 11월에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신연극이라 하여 원각사에서 크게 공연하였다.
      「은세계」에 대해서는 창극으로 인정하여 신극의 기점으로 볼 수 없다는 측과 신극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엇갈려 창극인지 신(파)극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원각사는 창극의 발상지로서 2년여 동안 중요한 구실을 한 극장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 5.2. 초기의 신파극
      신파극이 일본에서 유입되면서 원각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창극운동은 지방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신파극이 메워갔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일본 거류민이 서울을 중심으로 15만 명 가량 들어와 살았다.
      그들이 수좌(壽座) 등 극장을 세우면서 대판(大阪)의 신파극단들이 흘러 들어와 일본인을 상대로 연극공연을 가졌고, 거기서 한국인 임성구(林聖九)가 신파극을 익혀서 1911년 12월 최초의 극단 혁신단(革新團)을 발족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윤백남(尹白南)의 문수성(文秀星), 이기세(李基世)의 유일단(唯一團) 등 10여 개의 극단들이 생겨남으로써 신파극시대를 열게 되었다.
      감상주의적인 신파극이 대중들에게 쉽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연극인들이 일본 작품을 한국식으로 번안하여 무대에 올린 데다가 나라를 잃은 답답한 상황에서 눈물의 공감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장한몽(長恨夢)」이니, 「불여귀(不如歸)」니, 「쌍옥루(雙玉淚)」 등의 작품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가정 비극이 주류를 이루었고, 일본 작품의 번안이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계몽주의를 내거는 등 다분히 공리주의적인 연극관을 가진 듯 했지만 실제로는 극히 전근대적인 감정의 표출에 그쳤다. 이러한 의리·인정, 고부간의 갈등과 천박한 사랑 등은 대중의 근대적 자각과 시민의식 형성에 극히 해로운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과거 일본인들이 봉건적 상황에서 흘리던 눈물을 우리 나라에 그대로 전염시키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에 일본 신파극의 전형적 가정 비극이라 할 「금색야차(金色夜叉)」를 「장한몽」(조중환)으로 번안할 때 원작과는 달리 두 주인공을 재회시킨 경우는 매우 한국적이었지만, 점차 일본 정서에 빠져 들어감으로써 한국인의 심성을 변질시켰던 것이다.
    1. 5.3. 현대 연극의 태동
      이상과 같이 1910년대를 풍미하였던 일본 직수입의 신파극도 3·1운동을 전후하여 급속히 쇠퇴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는데, 그 하나가 신파극 자체가 대중예술로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으며, 다른 한 가지는 광범위한 국민적 자각에 따라 전근대적 정서의 유물인 신파극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파 연극인들은 최후의 자구책인 연쇄극이 실패한 뒤 지방으로 유랑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일본에서 근대 문예를 공부한 유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서구 근대극을 직수입하는 한편, 사실주의 연극을 시도하였다. 1920년대 초의 동우회(同友會)·형설회(螢雪會)·갈돕회 등 학생순회극 운동이 그 한 예이다.
      그들은 방학을 이용해 제한적으로 활동했는데, 이때의 기수가 극작가 김우진(金祐鎭)이었다. 그는 그 뒤에도 계속하여 서양의 현대극을 소개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우리 나라 최초로 표현주의작품을 쓰는 등 눈부신 활동을 벌이다가 1926년에 자살함으로써 실험적 연극운동이 주저앉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토월회(土月會, 1927년 7월 설립) 같은 의식있는 극단이 생겨나 1920년대의 연극계는 그런대로 활기가 있었다. 또한 동경에서 문학과 연극을 공부하다가 귀국한 박승희(朴勝喜)·이서구(李瑞求) 등은 토월회를 통하여 사실주의 연극을 시도하였다. 이들의 연극은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연기 등에서 종래의 신파극보다는 월등히 진보되었다.
      창작극도 점차 무대에 올려지기 시작하였고, 순수 극작가도 하나둘 생겨났다. 이러한 토월회 연극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현철(玄哲)의 배우양성도 한몫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1924년에 설립되었던 조선배우학교(朝鮮俳優學校)에서 몇 사람의 배우를 키워냈던 것이다.
      그런데 토월회는 곧 상업주의 연극으로 흘렀고, 사실주의보다는 낭만주의 운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나마도 1920년대 말에 접어들어 쇠퇴하였고 곧이어 본격적인 신극운동단체인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1931년 설립)가 등장하였다.
      유치진(柳致眞)·서항석(徐恒錫)·이헌구(李軒九) 등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가 주류를 이루는 12명의 젊은 문예인들이 서구근대극 수용을 통한 신극 수립을 내걸고 연극단체를 발족시킨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드는 신파극단들과 프롤레타리아 연극단체들 틈에서 진정한 현대극 창조를 내건 극예술연구회는 연극인 양성과 상업극 정화, 대중 계몽, 정통적·근대적 공연 등을 실천하여 이 땅에 굳건한 연극사의 토대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유치진·김진수(金鎭壽)·이광래(李光來)·함세덕(咸世德) 등 전문적 극작가를 양성한 것도 바로 극예술연구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극예술연구회도 일제의 탄압으로 1939년에 해체당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기에 서양의 유명한 극작가들이 많이 소개되어 우리 연극이 상업극의 좁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 5.4. 상업극의 번창과 국민연극
      그렇다고 상업극이 위축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제의 탄압으로 본격적인 신극운동은 급속히 몰락한 반면, 상업극인 신파만은 더욱 번성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30년대는 신파극이 들어온 지 20여 년이 넘어 토착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숙련된 배우들이 많았고 임선규(林仙圭) 같은 전문적 극작가들이 여러 사람 등장한 데다가 동양극장(東洋劇場, 1935년 설립)이라는 신파 전용극장이 생겨남으로써 대중적인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가령 이들의 주요 레퍼토리라고 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든지 「어머니의 힘」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생 주인공의 화류비련극 또는 가정비극이 주류였고, 시대극도 그러한 유형이었다. 이는 동시대 극예술연구회의 레퍼토리인 「토막(土幕)」이나 「소」 등 저항적 리얼리즘극과는 상반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대중이란 항상 고통스러울 때는 현실 도피를 하려고 하는데, 당시의 신파극이 그러한 도피처 구실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양극장은 대중연극의 중심지로서 연극전문극장의 가능성과 연극의 기업화를 입증하였다.
      이 시기에는 동양극장의 전속단 외에도 중앙무대(中央舞臺) 등 20여 개의 극단들이 활동하였고, 극예술연구회를 이끌었던 유치진·서항석 등도 1941년에 현대극장(現代劇場)이라는 대중성향의 극단을 발족시켰다. 대중극이 찬란한 시대를 맞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순수연극이 그만큼 위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제는 순수연극을 없애는 대신 통속적인 상업극만을 부추켰다. 게다가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군국주의의 팽창에 따른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총독부는 아시아 병탄을 합리화하고 촉진하는 이른바 국민연극(國民演劇)이라는 것을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유치진·함세덕(咸世德)·송영(宋影) 등 극작가들에게 어용극을 쓰게 하고 일본어극을 강요함으로써 암흑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때에는 순수극이 위축되고 저질 상업극이 번창하였으며 악극(樂劇)까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말 신파의 막간에서 발생한 악극은 배구자악극단(裵龜子樂劇團)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단체를 양산시켰다.
    1. 5.5. 광복과 연극계의 변화
      광복과 함께 연극계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광복 후의 첫 연극행동은 8월 20일의 전국연극인대회였다. 이로부터 좌익 연극인들이 연극계를 어지럽히기 시작하였다. 일오극장(一五劇場)·혁명극장 등 좌익극단들이 먼저 생겨났고, 송영·박영호(朴英鎬) 등이 프로연극동맹을 만들어 조직적 연극활동을 펴나갔다. 그들은 연극을 마르크스·레닌사상을 전달하는 사상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에 미군정청에서는 강력한 규제로 맞섰고 대중도 그들의 설익은 이념극을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때에 민예(民藝)·전선(全線), 그리고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 등의 우익민족진영 극단이 탄생됨으로써 좌익연극을 밀어낼 수가 있었다.
      연극계가 좌우익으로 분열되어 격심한 갈등을 겪는 동안에 황금좌(黃金座)·청춘극장(靑春劇場) 등의 상업극단들이 크게 활약을 하였다. 악극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해랑(李海浪)·김동원(金東園) 등의 젊은 연극인들은 유치진의 후원을 받아 견실하게 신극활동을 전개해갔다.
      미군정청의 세법개정으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민족극 정립에 나선 극단이 극예술협회였다. 다행히 1950년에 국립극장(國立劇場)이 설립됨으로써 민족극이 기반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어지러웠던 광복 후의 연극계가 극좌파의 월북으로 정돈되는 상태에서 국립극장이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치진을 초대 극장장으로 맞은 국립극장은 극협을 전속으로 끌어들여 신협(新協)을 만들었다. 4월 30일부터 유치진의 「원술랑(元述郎)」으로 개관공연을 가졌는데, 관객이 6만여 명이나 몰려드는 등 연극의 르네상스가 전개되는 듯 하였다.
      광복 직후의 작품경향대로 시대극을 공연하여 대중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두 달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 국립극장은 물론, 연극계의 기반 전체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국립극장은 명목상 대구로 피난갔고, 전속이었던 신협은 사설화되어 부산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사변 중에도 신협은 피난지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하는 등 활발하게 움직였고, 국립극장도 대구에서 다시 문을 열었으나 활동은 미약하였다.
    1. 5.6. 동란 뒤의 현대 연극
      사변이 끝난 뒤에 국립극장이 환도하고 신협도 다시 국립극장에 흡수되었으나 곧 이탈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 신협은 연극계를 이끄는 대표적 극단으로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미국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그런데 신협의 독무대에 소장연극인들이 도전하고 나왔다. 즉, 1956년에 김경옥(金京鈺) 등 30대 연극인들이 현대극 양식 창조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작극회(制作劇會)를 창단하였던 것이다. 마침 소극장인 원각사가 을지로 입구에 생겨났기 때문에 제작극회의 활동을 촉진시켰고 몇 개의 작은 극단도 생겨났다.
      그러나 원각사가 2년 만에 소실(燒失)됨으로써 군소극단들의 활동은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전후에 몇 명의 신예극작가를 배출하였고 국립극장에서 극작가를 등단시키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원각사에서 일기 시작한 열기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각 대학극 출신들이 실험극장(實驗劇場)을 탄생시킨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1960년 11월에 이오네스코의 「수업」으로 창립공연을 하고 힘찬 출발을 가졌다. 실험극장이 탄생된 1년 반 뒤에 유치진은 연극 중흥을 내걸고 현대시설의 드라마센터를 건립하였다. 따라서 드라마센터에는 연극엘리트가 모두 모이게 되었다.
      이해랑의 신협계, 김동훈(金東勳) 등의 실험극장계, 해외파, 방송영화계 등이 총망라되었다. 그러나 드라마센터의 연극 중흥의 꿈은 관객이 없는 까닭에 몇 달 만에 무산되었다. 따라서 극단들이 다시 정비되고 또 동인제 조직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는 국립극장 무대에서 10여 개의 극단들이 봄·가을 공연을 하였다. 극작가로서는 임희재(任熙宰)·차범석(車凡錫)·이근삼(李根三)·하유상(河有祥) 등이 크게 활약하였고, 우리 나라 희곡의 기본적 주제라 할 전통과 근대의 갈등과 사회비판의 작품이 많았다.
      그리고 오태석(吳泰錫)·노경식(盧炅植) 등 10여 명의 신진작가들이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의 연극은 전쟁의 여파를 톡톡히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관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때에 정부에서는 문예진흥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하였고 연극계에 변화의 조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 5.7. 연극의 양적 팽창과 전통의 모색
      우선 정부는 장충동에 국립극장을 신축하는 한편, 연극인회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극작가와 극단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극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기존의 10여 개 극단들도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소극장도 까페떼아트르와 함께 몇 개 더 생겨났다.
      명동의 국립극장 무대를 잃은 극단들은 자연히 소극장 중심으로 공연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 무렵 실험극장 소극장에서 영국 작품인 「에쿠우스」(피터 셰퍼 작)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1년 가까운 최장기 공연에 소극장으로서는 관객도 최대로 동원하였다.
      실험극장의 「에쿠우스」공연은 관객 확대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웬만한 공연에는 관객이 몰려들었다. 그 동안 순수예술에 대한 갈증을 느껴오던 젊은이들이 연극으로 몰린 것이다. 극단이 자꾸 생겨났고, 극단들은 다투어 외국 현대극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관객들은 점차 미숙한 번역극에 식상하였다. 1970년대의 경제호황도 베트남전 종결과 함께 서서히 수그러들었고, 1979년 10·26사태 이후 정부의 교육·사회 개혁에 따라 대학생 관객이 대폭 줄어들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경제불황으로 연극계는 좀처럼 일어서지를 못하였다.
      1977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연극제도 창작극을 조금 확대하였을 뿐 연극을 근본적으로 진흥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전통극에 대한 관심과 전통의 현대 수용을 통한 새로운 민족극 모색의 열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때 성하였던 마당극도 일련의 전통극의 현대적 계승이고 사회풍자를 도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전통의 현대 수용을 통한 새로운 민족극 도모는 서양극 답습의 신극운동에 대한 자체 반성이고, 또 극복의 몸부림이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서양의 아방가르드 연극 실험 이상으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연극활동의 여러 가지 장애는 1981년 「공연법」이 개정되면서 부분적으로 제거된 것도 있었다. 그 하나가 소극장 개설 및 극단 조직의 자유로움이다. 따라서 1982년부터는 소극장과 극단들이 급속하게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동숭동 일대와 신촌에는 소극장가가 형성될 정도로 단 몇 년 사이에 40여 개 가까운 소극장들이 생겨났다.
      극단 조직이 단순한 신고제로 바뀌면서 갑자기 수십 개의 극단이 생겨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연극계가 매우 풍성해 보였다. 또한, 소극장과 극단은 지방에서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지방도시에서 소극장과 극단이 갑자기 늘어나게 된 것은 「공연법」의 개정보다도 1983년부터 시작된 전국지방연극제의 영향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중앙과 지방의 연극이 커다란 양적 팽창을 보여주었지만 질적으로는 눈에 띌 만큼 발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양적 팽창에 비하여 질적으로는 답보 내지 퇴보의 조짐도 보여주었다.
      저질작품이 많았던 것이 그 한 예인데, 얼마 되지 않는 연극인들이 핵분열을 한 데다가 소극장 중심으로 공연활동이 전개되다 보니 졸속으로 제작된 소품들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주체적 실험극이라 할 수 있는 마당극은 대학가와 공장지대를 배경으로 하여 반체제 정치운동의 성격을 띠고 힘차게 뿌리를 내렸고 고정관객도 적잖이 확보하였다.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층이 관객의 대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정치극과 다른 전통적인 연극이 역시 우리 연극의 주된 맥을 이루면서 다양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표현방식의 다양성에서 그 특징이 나타났다. 가령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는 정통적인 연극을 비롯하여 뮤지컬·노래극, 현대적인 인형극, 그리고 서양식의 실험극 등이 다양하게 각종 무대를 수놓은 것이다.
      더욱이 1986년의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연극의 국제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 1980년대 연극의 괄목할 만한 현상이었는데,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수반하기도 하였다. 즉, 민주화와 함께 북방정책도 나왔고 정부의 개방화시책에 따라 표현의 자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서울올림픽 문예축전에 초청된 동구권 연극이 탈이데올로기의 고급예술을 보여줌으로써 이데올로기 중독증에 걸려 있다시피 한 남북한 연극인을 자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정부의 뚜렷하면서도 확고한 연극정책이 없는 데다가 인적 자원의 빈곤 등으로 인해서 연극계는 여전히 침체와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연극이 특히 불황에서 허덕이게 된 것은 기업의 후원 못지않게 연극인들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다.
      즉, 연극인들이 기량을 쌓으려는 노력도 없고 열정도 부족하며 다만 상업주의에만 마음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뮤지컬이 연극공연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정극을 추구하는 극단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국립극단과 두세 극단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직업극단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영세한 극단들은 항상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따라서 작품다운 작품을 못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즘 연극계의 가장 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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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여석기|이두현|류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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