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은 창·활·총·덫·개 따위를 이용하여 야생의 새나 짐승을 잡는 생계 활동이다.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사냥과 채집에 의해 생존을 유지했다. 동굴 유적에서 동물 벽화는 풍족한 사냥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사냥은 일찍부터 귀족 계층의 오락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무질서한 남획을 금하기 위해 보호 조수나 사냥 금지 구역을 설정하고 있다. 사냥 도구는 주로 돌이나 뼈 등에서 활, 창, 작살 등으로 변화했다. 또 창이나 썰매, 덫, 함정, 섶, 그물, 매, 개를 이용한 사냥도 발달했다.
인류는 농경이나 목축을 알기 이전의 수백만 년 동안 사냥과 채집에 의해서 생존을 유지했으며, 오늘날에도 이를 중요 생활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편, 사냥은 일찍부터 왕후나 장상을 비롯한 귀족계층의 오락으로 행해졌으며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일반인들이 스포츠로 즐기고 있다. 사냥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될 뿐 아니라 사냥 대상의 동물도 다종다양하며, 사냥법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전기 구석기시대의 사냥도구는 주로 돌이나 뼈로 만든 간단한 것이었으나 이 시대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북경 주구점(周口店) 동굴에서 범 · 곰 · 이리 따위의 뼈가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큰 맹수도 잡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또 이때에는 여러 사람이 많은 짐승을 절벽으로 몰아 떨어뜨려서 대량으로 잡기도 하였다. 활 · 창 · 작살 따위의 연장은 전기 구석기 내지 중기 구석기시대에 들어와 널리 보급되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서부 유럽의 동굴 유적에서 매머드 · 순록 따위의 대형 동물뼈가 발견되어 어느 정도의 정주생활이 가능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동굴에서 함께 발견된 동물 벽화나 조각들은 풍족한 사냥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사냥은 사냥도구나 방법에 따라 창사냥 · 덫사냥 · 함정사냥 · 섶사냥 · 그물사냥 · 매사냥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창사냥은 창을 던지거나 찔러서 짐승을 잡는 사냥법이다.
창사냥에는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가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이르렀을 때 창을 던져 잡는 법, 썰매를 타고 산등성이에서 골짜기 쪽으로 짐승을 몰아 내려가면서 찔러 잡는 법, 굴 안의 짐승을 창으로 찔러서 끌어내는 법, 몰이꾼에게 짐승을 몰게 하고 창잡이는 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찔러서 잡는 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총포가 없던 예전에는 곰이나 멧돼지 따위의 맹수를 창으로 잡았다. 창사냥은 선창잡이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멧돼지나 곰은 첫 창으로 급소를 찌르지 못하면 오히려 사람에게 달려들기 때문이다. 멧돼지 사냥은 급소에 따라 삼창(三創)으로 나누는데, 능숙한 사냥꾼은 머리와 쇄골 사이를 일창에 찔러 넘어뜨릴 수 있다.
겨울잠을 자는 곰의 어린 것은 고목 둥치 밑이나 고목의 썩은 구멍 안에서 지내나, 큰곰은 토굴을 파거나 자연굴을 이용하며 입구는 반드시 북쪽에 낸다. 큰곰은 첫눈이 내릴 무렵에, 겨울을 지낼 굴을 미리 찾아 놓으며 두 번째 눈이 내릴 때 굴 속으로 들어간다.
사냥꾼들은 첫눈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곰의 발자국을 따라가서 굴의 위치를 알아둔다. 창꾼들이 굴 앞에서 크게 소리치면 곰은 기어나온다. 이때 선창잡이가 목과 어깨 사이를 찌름과 동시에 앞으로 넘어지는 몸짓으로 창을 젖힌다.
아무리 능숙한 사냥꾼이라도 창을 정면에서 찌르면 곰은 이를 받아서 옆으로 밀어 버리며 이렇게 할 겨를이 없을 때는 창을 두 손가락 사이에 잡아 끼우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창을 맞받아서 꺾어 버리고 사람에게 달려든다.
그러므로 일창으로 곰의 급소를 찔러 쓰러뜨리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지경을 맞게 되는 경우도 있다. 굴 속의 곰이 나오려 하지 않을 때는 굴 입구에 모닥불을 피우고 연기를 불어넣어 잡기도 한다.
창에는 외발창 · 쌍발창 · 세발창 등이 있으며, 사냥감에 따라 같은 종류의 창이라도 날의 모양이나 길이가 다른 것을 쓴다. 창사냥이 짐승과 대결하여 쓰러뜨리는 직접적인 사냥법인 데 반해, 덫사냥은 덫을 놓아 잡는 간접적인 사냥법이다.
따라서 덫은 인류가 먹이를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했던 채집수렵 경제단계를 벗어나 농경에 의한 정착생활이 시작된 뒤에 더욱 활발하게 사용된 사냥법이다.
덫의 종류는 짐승의 목이나 발을 옭아매어 잡는 코류(類), 틀을 짜놓아 이에 치이게 하여 잡는 틀류, 쇠붙이로 만든 간단한 장치를 짐승이 다니는 길에 숨겨 놓았다가 발목을 죄어 잡는 착기류 따위가 있다.
코류에는 올무 · 물코 · 지게코 · 하늘코 · 낚시코가 있고, 틀류에는 통방이 · 벼락틀 · 가루택이 · 투대 · 낭투 · 엎덮이 · 매덮이 · 광지덮 등이 있으며, 착기류에는 찰코 · 창애가 있다.
올무는 칡이나 삼끈 또는 철사로 둥글게 지은 고리를 굵은 작대기에 잡아매어 짐승이 다니는 길에 놓으면 목이나 발이 걸려든다. 겨울철에 토끼를 비롯해서 노루와 멧돼지도 잡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참새 · 꿩 · 오리 사냥에도 이것을 쓴다.
오리올무는 무논의 미꾸라지 따위를 잡아먹으려고 내려앉는 오리를 잡기 위한 것으로 벼를 거두고 나서 이듬해 2월 초(음력)까지 사냥한다. 무논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대꼬챙이를 꽂은 다음 갱심으로 지름 10㎝ 정도의 올무를 지어서 꼬챙이에 꽂으며 바닥에는 오리가 차고 날지 못하도록 돌을 달아 둔다.
이 올무는 낮에 장치했다가 밤이 깊으면 거두어들인다. 오리는 석양 무렵에 많이 내려앉는데, 이때 사람은 숨어서 오리떼가 올무가 있는 쪽으로 몰려들도록 휘파람을 불거나 인기척을 내어 유도한다.
전라남도 [고흥지방에서는 올무 20개를 한 벌이라고 하며, 한 사람이 보통 다섯 벌을 장치, 하룻밤에 다섯 마리를 잡는다. 오리올무는 저수지 바닥에도 놓아서 잡는데, 물 깊이 1m쯤 되는 곳에 박아 두면 자맥질하던 오리가 걸려든다.
물코는 올무처럼 둥근 고리로 물이 빠르게 흐르는 계곡이나 물이 많이 괴어 있는 곳에 장치한다. 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물길을 가로질러 나무토막을 걸쳐 놓고 나무 중간에 짧은 말뚝 두 개를 세운 뒤, 이 위의 한 끝에 돌을 달아맨 코를 얹어 둔다.
물을 싫어하는 짐승이 이 나무를 타고 건너가려다가 목이 코에 걸리면 목을 흔들게 되고 이에 따라 나무토막과 함께 물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물이 괸 곳에서는 다람쥐나 족제비를 잡는다.
지게코는 덫의 모양이 지게를 닮았다. 짐승이 다니는 길가의 큰 나무에 기름한 구멍을 내고 이에 한 끝을 고정시킨 후리채를 걸어 둔다. 그리고 이 후리채를 휘어서 줄을 매고 구멍 안으로 뽑아서 말뚝과 받침대로 잡아매며, 코는 나무 옆에 박은 말뚝 사이에 지게 세장처럼 끼워 둔다.
지나가던 짐승이 코를 건드리면 후리채가 퉁겨 나가는 동시에 목이나 발이 코에 얽혀 든다. 하늘코는 짐승이 잘 다니는 길가의 참나무나 물푸레나무 가지를 억지로 휘어서 그 끝에 철사 고리를 달아 말뚝에 살짝 걸쳐 둔 것이다. 짐승이 고리를 건드리면 나무가 펴지면서 목이나 다리를 옭아 공중에 달아 올린다. 하늘코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함정코는 함정에 빠진 짐승의 발목을 코에 꿰어 잡는 덫이다. 짐승이 잘 다니는 길 양편에 나뭇가지 따위를 쌓아 두고 가운데만 틔어 놓으며 길 복판에 굵은 통나무를 가로 놓아서 걸어가던 짐승이 일단 이 위에 올라섰다가 내려가도록 한다.
짐승이 내려서는 지점에 함정을 마련하며, 이 안에 코를 감추어 둔다. 낚시코는 다람쥐 사냥에 쓴다. 낚싯대 끝에 코를 매어 두고 다람쥐 뒤로 돌아가서 코를 살며시 내리면 무엇이나 목에 걸어 매는 습성인 다람쥐는 제 목에 이것을 걸어 맨다.
통방이는 사냥감에 따라 곤줄박이통방이 · 곰통방이 · 새매통방이 · 멧새통방이 · 족제비통방이라고 부른다. 새매통방이는 산에서 생매를 잡기 위한 것이다. 싸리로 비닐하우스 모양의 틀을 짜고(높이 30㎝, 너비 30㎝) 이 위에 그물(코의 지름 4㎝)을 덮은 다음, 가운데 위쪽에 올무를 걸어 둔다.
올무는 가장 길고 가는 깃인 수탉의 장치와 베실 두 겹을 하나로 비벼 꼬아서 만든다. 수탉의 장치는 구부리기 쉬우면서도 탄력이 강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통방이를 새매의 눈에 잘 띌 만한 높은 산 언덕이나 평평한 바위 위에 얹어 두면 매가 미끼로 넣어 둔 통방이 안의 참새를 채려고 달려드는데, 이때 발이 올무에 걸린다.
멧새통방이의 구조는 곤줄박이의 그것과 같으나 크기는 높이 50㎝, 지름 30㎝ 정도로 만든다. 안에는 조 이삭을 매달아 두며 눈이 많이 쌓인 들에 놓아야 멧새를 많이 잡을 수 있다.
곰통방이는 통나무로 짠 큰 궤 위에 후리채를 걸고 안쪽에는 디딜발을 장치한 것이다. 미끼를 탐낸 곰이 이것을 밟으면 후리채가 벗겨지는 동시에 앞문이 닫힌다. 통방이 위에는 큰 돌을 많이 얹어서 곰이 요동을 쳐도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이것으로 멧돼지도 잡는다.
벼락틀은 곰덫 · 곰덕 · 덧틀이라고도 한다. 지름 20㎝, 길이 4m쯤 되는 굵은 통나무 20여 개를 뗏목처럼 엮어 60° 가량 기울어지도록 참나무 활대로 버텨 놓고 틀 위에는 돌을 얹어 둔다. 짐승이 미끼를 건드려서 활대가 벗겨지면 틀은 벼락처럼 한순간에 무너진다.
벼락틀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온 것으로 곰뿐만 아니라 멧돼지도 잡는다. 가루택이는 짐승이 다니는 길 좌우를 막고 가운데만을 틔어 놓은 곳에 설치한다. 길 옆의 나뭇가지를 강제로 휘어서 말뚝에 걸쳐 두며 그 끝에는 낫이나 칼을 매어 놓는다.
좁은 길로 빠져 나가려던 짐승이 줄을 건드리면 나뭇가지가 벗겨지면서 낫이나 칼이 몸을 깊이 찌른다. 투대는 짐승이 다니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갈수록 좁게 쳐놓은 바자울이다. 울 끝은 굵은 통나무로 막고 한 끝은 코에 걸어서 공중에 매달아 둔다.
짐승이 좁은 목으로 빠져 나가려고 몸을 흔들면 코에 걸려 있던 통나무가 떨어져 덮친다. 낭투는 벼랑 사이에 걸어 놓은 통나무의 말뚝에 의지하여 덮목을 세운 것이다. 덮목의 한쪽은 후리채에 걸고 길 양쪽에 작은 말뚝을 나란히 박아서 짐승이 가운데로 걸어가도록 한다. 짐승이 활대를 건드리면 덮목이 떨어져 덮친다.
엎덮이는 너비 30㎝, 길이 1m 정도의 자리 중간에 활을 장치하고 미끼를 꿴 덮이를 걸어 놓은 장치이다. 새가 먹이를 건드리면 활이 퉁겨지면서 덮이에 치인다. 매덮이는 매두피라고도 한다. 매가 미끼를 챌 때 위에서 떨어져서 덮치도록 만든 장치이다.
이것은 매의 눈에 잘 띌 만한 산꼭대기에 설치하는 것이 좋다. 광지덮은 광주리를 비스듬히 괴어놓은 장치이다. 참새가 미끼를 먹으러 모여들 때 이에 잡아맨 줄을 당겨서 가둔다.
찰코는 찌깨덫 · 찌깨틀 · 착기라고도 한다. 쇠붙이로 만들며 짐승이 다니는 길에 묻어 둔다. 이 가운데를 밟으면 틀 양쪽에 걸려 있던 말굽 모양의 출렁쇠가 퉁겨 나와 짐승의 발을 잡는다.
창애에는 참새창애 · 꿩창애가 있으며, 노루나 너구리를 잡는 것은 음창애라고 한다. 참새창애는 나뭇가지를 억지로 휘어서 고패를 끼운 다음, 한쪽이 팬 숟갈에 걸어 둔 것으로 참새가 미끼를 건드리면 나뭇가지가 펴지면서 목을 친다.
꿩창애는 주로 물푸레나무로 만든 타원형의 틀 가운데 가로대를 박고 이에 의지하여 용수철을 걸쳐 놓은 것이다. 꿩이 미끼로 달아 놓은 콩을 건드리면 용수철이 튀어서 꿩의 목이나 발을 덮친다. 이것은 꿩이 잘 모여드는 콩밭 가에 설치하며, 나뭇잎 따위를 쌓아서 위장한다.
음창애는 길이 50㎝, 지름 4㎝쯤 되는 나무 두개를 너비 30㎝ 정도로 나란히 놓고 이를 기둥삼아 짧은 작대기를 가로로 촘촘하게 놓고 엮는다. 이 기둥은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묶으며, 위쪽에는 지게 작대기를 세장에 걸치듯이 짧은 나무로 받쳐 놓는다.
그리고 좌우 양쪽에 돌을 쌓아서 틀을 고정시키며 숟갈처럼 생긴 나무, 곧 숟갈대의 한 끝에 미끼를 꿰어 두고, 틀 안에 끈을 달아 숟갈대를 팽팽하게 바로 세운다. 짐승이 미끼를 건드리면 숟갈대 끈이 벗겨지면서 틀이 내려앉는다.
함정 사냥은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구덩이를 파서 돼지 · 노루 · 들꿩 따위를 가두어 잡는 사냥법이다. 멧돼지 함정은 능선 가까이 있는 감자밭 부근에 마련하며,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게 파는 것이 좋다(깊이 2∼3m, 바닥 너비 2.5m).
그리고 함정의 아가리는 풀과 나뭇잎 따위로 덮어 둔다. 돼지는 주둥이로 함정의 벽을 헐고 그 흙으로 함정을 메워서 달아나기도 하므로 바닥에 끝을 날카롭게 깎은 참나무 여러 개를 박아 두는 것이 좋다. 함정 바닥을 아가리보다 넓게 파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짐승을 사로잡으려고 할 때는 함정의 중간에 그물을 쳐두기도 한다. 섶사냥은 섶을 태운 연기를 피해서 굴 밖으로 나오는 짐승을 잡는 사냥법이다. 이 방법으로는 너구리 · 오소리 · 살쾡이 · 족제비 따위를 잡는다. 섶에 유황이나 고춧가루를 섞으면 더욱 효과적이다.
그물사냥은 물고기를 잡듯이 그물을 쳐서 새나 짐승을 잡는 사냥법이다. 토끼그물은 칡으로 뜨며(너비 1.5m, 길이 15∼20m) 산등성이에 쳐두고 밑에서 몰아 잡는다. 토끼는 높이 뛰지 못하므로 모두 그물에 걸린다.
평안북도에서는 피나무 껍질이나 삼끈으로 긴 포대기 모양의 그물을 떠서 짐승이 숨어 있는 굴 아가리에 쳐두기도 하는데, 이를 호망이라고 한다. 이 망의 주둥이에 끈을 꿰어서 짐승이 망 안으로 들어가면 주머니처럼 졸라맨다.
그물로는 오리를 잡기도 한다. 오리가 날아드는 냇가에 너비 3m, 길이 10m쯤 되는 그물을 땅에서 2m 정도의 높이에 치며 그물 바깥쪽에는 불을 밝혀 둔다. 오리들이 그물 주위에 모여들었을 때 사람이 갑자기 뛰어들면서 작대기 따위로 물을 후려치면 놀란 오리들은 불빛이 있는 쪽으로 달아나려다가 그물에 걸린다.
이 밖에 두 개의 작대기에 잡아맨 그물을 오리떼 위에 휘덮어서 잡기도 한다. 오소리나 너구리가 숨어 있는 굴 주위에 그물을 치는 방법도 있다. 이때에는 긴 꼬챙이로 굴 속을 들쑤셔서 짐승들이 견디지 못하고 굴 밖으로 나오도록 해서 잡는다. 한 굴에는 보통 10여 마리의 너구리나 오소리가 들어 있다.
매사냥은 길들인 매로 꿩이나 토끼 따위를 잡는 사냥법이다. 인도 기원설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기원전 2000년쯤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1200년쯤부터, 그리고 서부유럽에서는 4세기에 행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도 이를 즐겼으며, 북한지방에서 나는 해동청(海東靑)은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었다.
매사냥은 왕이나 귀족층 사이에서 유행되었으며, 고려 충렬왕 때는 매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두고 원나라에서 전문가를 초빙하였다. 조선 연산군 때는 이 기관이 좌우응방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이에 딸린 인원이 500여 명에 이르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일반인의 매사냥은 법률로 이를 막아 널리 퍼지지 못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야 서민들도 이를 즐길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를 허가제도로 제한하기는 했으나 남자의 으뜸가는 놀이 가운데 하나로 널리 행해졌다.
매사냥에는 매를 기르고 부리는 수알치와 잔솔밭에 숨은 꿩을 날리는 5, 6명의 털이꾼, 매나 꿩이 날아간 방향을 알려 주는 배꾼이 한 동아리가 된다. 매에는 햇새끼인 보라매와 산에서 야생하는 산진이, 그리고 어린 새끼를 붙잡아서 길들인 수진이 등 세 종류가 있으며, 생매는 두피라는 틀을 놓거나 그물을 쳐서 잡았다.
길들인 매는 사고 팔기도 했는데, 1930년대에는 쌀 대여섯 가마의 값을 쳤으며 사냥에 뛰어난 매는 황소 한 마리와도 바꾸었다. 꿩은 총으로 잡은 ‘불치’보다 매가 잡은 ‘매치’를 더 알아 주었다.
사냥감을 나누는 방법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사냥을 주동한 이의 인품에도 크게 좌우된다. 매사냥의 경우 강원도 평창에서는 수알치(매사육자)가 약간 더 가지며 인제에서는 매몫(사육에 든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를 고루 나눈다.
정선에서는 창으로 멧돼지를 잡았을 때, 사람 수대로 균등하게 나누나 선질꾼(선창잡이)이 부상을 입으면 쓸개를 그에게 주어 치료비에 보태도록 한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짐승에 치명상을 입힌 이에게 사냥감에 따라 특정 부위를 떼어 주며 수렵채집민들은 사냥 참가 여부에 관계없이 공동체 전원에게 고루 분배한다.
한편, 시베리아에서는 해안으로 올라온 고래나 죽은 곰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고래 수염이나 곰의 가죽을 차지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사냥을 안전하게 마치고 또 많은 짐승을 잡으려면 신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의례를 베풀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사냥 당일 이른 새벽에 닭 · 개 · 새 따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손 없는 방향에 제물을 차리고 산신제를 지낸다. 제물로는 삼색과일 · 미역 · 사탕 · 술을 마련하며 소지(燒紙)를 올리면서 “일 장 소지라도 만 장 소지로 알고 받으십시오.” 하는 축원을 외운다.
또 경상북도 금릉이나 강원도 홍천군에서는 길들인 매로 처음 사냥을 나갈 때 한지에 북어를 동여서 서낭에 걸쳐 놓고 “사냥이나 잘하게 해주소서 수리와 저광이 되게 해주소서.”하며 빈다. 짐승의 주인은 산신이라고 믿어 잡은 동물의 일부를 바치는 의례를 지내기도 한다.
금릉에서는 꿩을 처음으로 잡았을 때 땅에 침을 뱉고 꿩의 혀를 빼서 가시나무에 걸어 놓은 다음 “생키 긴상하나이다(산꿩 진상합니다). 본산 산신령이나 어느 산신이나 안 위하리까 이산 저산 양산 각산 지산 산신령님네 수알치 몰이꾼이나 나무도리대서 펄펄 뛰게 점지하고 꿩을 날러거든(날리거든) 매 버렁 밑으로 펄펄 날라들게 점지해 주소서.” 하고 읊조린다. 죽은 짐승의 영혼이나 그의 수호신으로부터 화를 입지 않으려고 사냥꾼은 자기 탓이 아니라는 발뺌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슬피 우는 시늉도 한다.
전라남도에서는 올무에 걸린 노루가 울 때 올무꾼은 그 앞에 가서 자기 소리로 땅 하는 총소리를 낸다. 이렇게 하면 그 노루는 총에 맞은 것이 되므로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여긴다. 한편, 알타이족은 곰을 잡으면 “할아버지 할머니 어째서 돌아가셨나요.”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슬피 운다.
조선 말기에 사냥꾼이 범을 잡으면 그 고을의 산신령을 해쳤다는 죄목을 씌워서 매를 세 차례 때리는 형식을 취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관습이라고 하겠다. 사냥꾼들은 안전한 사냥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켰다. 해산을 한 집에는 매를 절대로 가지고 가지 않는다.
매가 해산할 때 흘린 피를 보면 죽어 버리며 해산한 마을을 지나치기만 해도 멀리 달아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가 새끼를 낳은 집 주인도 사냥에 나서는 것을 막았다.
시베리아에서는 부정을 막기 위해 사냥할 때 일상어 대신 특별한 말을 쓰기도 했는데, 가령 “사냥 가자.” 하는 말을 “집 뒤에 가자.”라고 하거나 곰을 ‘아저씨’나 ‘아주머니’로 부른 것이 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범을 바로 부르지 않고 ‘산신령’이나 ‘산군(山君)’이라고 불렀다.
사냥도구로는 창이나 활 또는 총포 외에 썰매와 설피도 큰 몫을 하였다. 이것은 겨울철에 오랫동안 짐승의 뒤를 밟거나 깊은 눈 속에서 재빨리 움직이는 데 매우 편리한 기구들이다. 썰매는 스키를 닮았으며 길이 1m, 너비 12㎝, 두께 5㎝ 정도이다.
발은 앞부리만 고정시키고 뒤꿈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좌우 회전이나 제동 동작을 취한다. 이것을 신으면 잡목 숲 속에서도 움직이기 쉬워서 짐승을 추적하는 데 매우 편리하다. 썰매의 재료로는 눈이 들러붙지 않는 벚나무가 가장 좋다.
설피는 신발 위에 덧신는 것으로 이를 신으면 눈이 아무리 깊어도 빠지지 않으며 비탈진 곳에서도 미끄러지는 일이 없다. 모양은 대체로 타원형이며 위아래 두 곳에 다래덩굴을 가로 매어 바탕으로 삼는다. 10년쯤 자란 다래덩굴이나 물푸레나무 또는 노가지나무를 뜨거운 물에 담가서 천천히 힘을 주어 가며 구부려서 모양을 잡는다.
겨울철에 등산하는 이들이 스키를 쓰기 어려운 곳에서 이것을 신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참나무로 깎은 발톱을 양바닥에 끼운다. 일본의 구주지방이나 극지방의 에스키모들도 이것을 많이 이용한다.
사냥총에는 주로 날짐승을 쏘는 산탄총과 들짐승 사냥에만 쓰는 라이플총의 두 가지가 있으며, 총신의 수에 따라 단신총 · 쌍발총 · 연발총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사냥에는 개의 역할이 매우 뛰어나서 첫째가 개요, 둘째가 다리요, 셋째가 총이라고까지 이른다.
개는 직접 짐승을 물어서 잡기도 하지만 총포 사냥에서는 숨어 있는 짐승을 찾아내거나 달아나는 짐승을 따라가거나 죽은 짐승을 물어 오는 등의 구실을 한다. 꿩 따위의 날짐승을 사냥할 때는 개가 냄새로 이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조용히 다가가서 감시하며, 이와 같은 움직임을 눈여겨본 사냥꾼이 신호를 보내면 갑자기 달려들어 날린다.
한편, 맹수사냥을 할 때는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어 짖어서 사냥꾼으로 하여금 짐승의 달아나는 방향을 짐작하게 하여 이에 대비하는 여유를 준다. 그리고 달아나는 짐승을 며칠이고 계속 뒤따라가서 마침내 잡게 하는 것도 사냥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숲 속에 숨은 꿩이나 메추라기 따위를 알려 주는 개로는 포인터 · 잉글리시세터 · 골든세터를 치며, 숲 속의 사슴과 토끼 따위를 몰아내는 일에는 하운드계의 바이마라나 · 저먼쇼트헤어 등이 능숙하다.
한편, 총에 맞은 짐승을 운반해 오는 데는 라블라들레트리버 · 체스피크베이 · 아메리카워터스파니엘 등이 뛰어나며, 에아델테리어 · 불테리어 따위는 멧돼지나 곰에게 달려들어 넘어뜨리거나 사냥꾼이 도착할 때까지 이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세차게 짖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냥에 이용된 우리나라의 개로는 북한의 개마고원 부근인 풍산지방산인 대형의 풍산개와 거제도 및 제주도의 중형 토종개 그리고 소형의 진돗개를 손꼽았다. 풍산개는 몸집이 클 뿐만 아니라 성질이 사나워서 맹수사냥에 적합하며, 특히 추위를 타지 않는 장점이 있다.
털은 희고 길며 눈 · 코 · 발톱은 검다. 민족항일기부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멸종 단계에 있다.
거제 및 제주도의 중형 토종개는 달음질이 뛰어나서 멧돼지 · 노루 · 오소리 · 여우 · 너구리 사냥에 유리하다. 어깨 높이는 55㎝쯤이며, 털은 흑색 내지 회색이다. 이것도 현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진돗개는 냄새를 잘 맡으며 체구에 비해 성질이 매우 사나워서 너구리 · 오소리 · 토끼 · 노루 등을 잘 잡는다. 어깨 높이는 40㎝ 정도로 매우 작으며 털은 황갈색이고 발톱은 발 한가운데에 한 개가 있을 뿐이다. 짧은 꼬리는 왼편으로 동그랗게 말리며, 귀는 정삼각형에 가깝다.
이 개도 민족항일기부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우리 정부에서도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해 오고 있다.
스포츠로서의 사냥은 왕이나 귀족계층에 의해 일찍부터 행해졌는데, 앞에서 설명한 매사냥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그리스의 귀족들은 사냥을 매우 즐겼으며,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자인 키루스 2세(기원전 600?∼529)는 4개 도시의 세금을 사냥 비용에 써버릴 정도로 이에 몰두하였다.
또 고대 이집트의 귀족들은 활이나 창 그리고 그물과 같은 사냥구 외에 사자까지도 길들여서 사냥에 내세웠으며, 로마제국의 귀족들도 이에 열중하였다. 중세에 들어와서는 왕후나 장상들 사이에 개와 말을 이용한 사슴과 멧돼지 사냥이 유행했으며, 특히 멧돼지 사냥은 중세 초기에 왕족이나 귀족을 환영하기 위한 행사로도 베풀어졌다. 그리고 18, 19세기에는 사냥개인 그레이하운드에 의한 토끼 및 수달 사냥이 널리 행해졌다.
사냥을 일반 대중이 스포츠로 즐기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의 일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제국의 봉건왕조가 몰락함에 따라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사냥권과 사냥터가 일반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근세 스포츠로서의 사냥은 총기의 개량과 우수한 사냥개의 출현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다. 1556년 독일에서 산탄총이 나오면서 사냥기술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1870년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클레이 사격은 오늘날의 클레이 사격경기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로서 사냥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초기에 서양의 총포가 수입되면서부터였으나 경제적 여유를 지닌 일부 계층 사람들의 오락 정도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스포츠로서의 사냥이 일반에까지 보급되고 이에 따라 무질서한 남획이 극도에 달하여 일부 사냥감은 적정 서식밀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에서는 야생 조수의 보호 증식을 위해 1972년 8월부터 1981년 12월 말까지의 10년간을 금렵기간으로 정한 바 있으며 해마다 10월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는 사냥을 금한다. 한편 조수 보호 및 수렵에 관한 법률을 제정 · 공포하였으며 보호 조수를 지정하고 금렵구도 설정하는 등 조수 보호에 적극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