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 송광사 ( )

불교
유적
국가유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지눌의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널리 알려진 사찰.
이칭
이칭
길상사(吉祥寺), 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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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순천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지눌의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신라 말에 창건되어 길상사라 하였으나, 고려 후기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결사를 개창한 이후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지눌 이후 16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부휴계의 종찰로 평가를 받았다. 19세기 이후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보 사찰로 불린다.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지눌의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널리 알려진 사찰.
개설

순천 송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19세기 이래 주1 · 주2 · 주3 삼보(三寶) 가운데 승보 사찰로 평가받고 있다. 즉 삼보 사찰은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불보 사찰 통도사, 고려 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법보 사찰 해인사, 그리고 16국사를 배출한 승보 사찰 송광사이다.

창건

순천 송광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송광사 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승평속지(昇平續誌)』 등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설화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말 전염병이 전국을 휘감고 있을 때 혜린(慧璘) 대사는 제자들을 데리고 수행할 곳을 찾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 돌부처를 만나 기도하던 7일째에 꿈속에서 돌부처가 나타나 “새로 절을 지어 중생을 구제하라.”라고 하였다. 대사가 길을 떠나려 하자 어떤 노승이 나타나 붉은 가사 1벌, 향나무 불상 1구, 불두골(佛頭骨) 1조각을 내놓고 “송광산이 성스러운 땅이니 그곳에 가서 중생을 구제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송광산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吉祥寺)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수선결사와 16국사

고려 인종 때에 석조(釋照)가 길상사를 중창하려고 장인을 모으고 나무를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뒤 1200년(신종 3)에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정착하여 결사(結社)를 조직하면서 길상사가 중창되었다. 지눌은 1182년(명종 12) 개경 보제선사(普濟禪寺)에서 개최된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동학 10여명과 함께 주4를 조직하기로 맹세한 바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는데, 1188년(명종 18)에 득재(得才)라는 주5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기를 간청함 따라 주6 45명과 함께 팔공산으로 가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1190년(명종 20)에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출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고 결사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1198년(신종 원년)에 지눌은 새로운 수행처를 향해 길을 떠났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거처를 옮겨 홀로 수행하다가 『대혜보각선사어록』의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攀緣)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라는 구절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다시 길을 떠나 1200년(신종 3)에 순천 송광산 길상사야말로 결사를 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여겨 정혜결사를 재조직하였다.

길상사의 정혜결사에 참여하는 대중이 늘어났고, 지눌은 결사의 사실을 개경에 있는 조정에 보고하였다. 1204년(희종 원년)에 조정에서는 결사의 명칭을 ‘정혜(定慧)’에서 ‘수선(修禪)’으로 바꾸도록 명하고, 주7 1벌과 함께 ‘수선사(修禪社)’라고 쓴 희종주8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 결사의 명칭을 바꾸도록 한 것은 인근 계족산(鷄足山)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정혜(결)사’와 ‘정혜사’가 혼동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결사의 명칭이 ‘정혜결사’에서 ‘수선결사’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정혜(定慧)’가 곧 ‘수선(修禪)’의 의미였기 때문에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의미의 차이는 없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산명과 사찰명도 바꾸도록 하여 송광산은 조계산으로, 길상사는 수선사로 고쳤다. 그리고 후대에 수선사는 다시 송광사로 바뀌었다.

지눌이 주9 수선사의 제2세 법주(法主)가 된 진각국사 혜심(11781234)무신정권의 귀의를 받아 수선사를 크게 성장시켰다. 조정에서는 지눌에게 국사의 시호를 내렸으며, 최고 실권자였던 최우(崔瑀)는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혜심에게 출가시켰다. 이후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려 말까지 16국사를 배출하였다. 16국사는 다음과 같다. ①보조국사 지눌, ②진각국사 혜심, ③청진국사 몽여(?1252), ④진명국사 혼원(11911271), ⑤원오국사 천영(12151286), ⑥원감국사 충지(12261293), ⑦자정국사 일인(미상), ⑧자각국사 도영(미상), ⑨담당국사(미상), ⑩혜감국사 만항(12491319), ⑪자원국사(미상), ⑫혜각국사 묘구(미상), ⑬각진국사 복구(12701355), ⑭정혜국사 복암(미상), ⑮홍진국사(미상), ⑯고봉국사 법장(13501428).

고려시대를 통틀어 문헌에서 확인되는 국사 역임자 및 추봉자는 대략 60여 명이고, 그 가운데 무신난 이후에 36명 정도가 책봉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송광사에서 십여 명의 국사를 배출했다는 것은 송광사가 당대 최고의 사찰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문헌에 송광사의 수선사 출신으로 국사의 시호가 확인되는 승려는 11명이며, 일인 · 자원 · 묘구 · 홍진 · 법장 등 5명은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후기에 새로 조성된 16국사 진영에 포함되었다.

한편 고려 말 주10에 가서 임제종의 평산 처림(12791361)으로부터 깨달음의 경지를 인가받고 돌아온 나옹 혜근(13201376)이 왕사에 책봉된 1371년(공민왕 20) 송광사 주지로 임명받아 1373년(공민왕 22)까지 머물렀으며, 그 제자 환암 혼수(13201392)는 13731375년에 송광사 주지를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초기 송광사의 중창

순천 송광사는 조선 초기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고봉 법장은 1396년(태조 4) 남쪽으로 유행하다가 낙안군 금수(金藪, '순천 금둔사'로 추정)에 머물 때 꿈속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에 사찰을 짓는 것을 보고 이튿날 곧장 조계산 송광사로 가서 중창을 주11 그리고 1399년(정종 1) 궁궐에 가서 송광사 중창을 요청하여 임금으로부터 교지를 받았으며,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중인(中印) 선사가 법장 문도의 도움을 받아 송광사 중창을 마무리하여 90여 칸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법장은 국가로부터 국사의 시호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이때 중창한 공덕을 기려 조선 후기에 송광사에서 명예 국사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1406년(태종 6) 3월에 국가에서 불교 11개 종파 242사(寺)만을 국가 관리 사원으로 인정한 바 있었고, 세종은 1424년(세종 6) 4월에 불교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하고 관리 사원을 선종 18사, 교종 18사로 축소하였다. 이때 송광사는 선종 18사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해 10월에 송광사가 정종이 중창한 수륙사(水陸社)로서 중요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구례 화엄사(華嚴寺)를 대신하여 선종 18사에 포함되었다.

조선 후기 부휴계의 종찰(宗刹)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통합이 가속화되어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사상이 시대적 주12으로 정착하였고 선(禪) 중심의 교단으로 탈바꿈해 갔다. 불교계는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주13 주14의 법통(法統)을 중시하면서 청허계와 부휴계가 성립되었다. 청허계는 임진왜란 팔도도총섭이었던 청허 휴정(15201604)의 문도들이고, 부휴계는 병자호란 때 의 · 승병을 이끌었던 벽암 각성(15751660)의 스승인 부휴 선수(1543~1615)의 문도였다.

그런데 부휴계의 종찰이 바로 송광사였다. 송광사는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송광사 승려들이 중창을 위해 지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부휴 선수(1543~1615)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부휴 선수가 1609년(광해군 원년) 가을에 40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와서 송광사를 재건하면서, 송광사는 부휴 문도로 탈바꿈하여 부휴계의 종찰이 되었다.

송광사를 부휴계의 종찰로 그 위상을 확립시킨 승려는 백암 성총(16311700)이었다. 성총은 벽암 각성의 법통을 계승한 취미 수초(15901668)의 제자로서 부휴계의 주15이었다. 그는 1678년 홍문관 수찬 조종저(1631~1690)에게 비문을 받아 「송광사사원 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를 세웠다. 그 사적비에서, 조계산 송광사는 동방제일의 도량으로 십여 명의 국사를 포함하여 많은 명승을 배출하였고, 근래 부휴가 벽암에게 법을 전하고 벽암이 취미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이들이 보조의 유풍을 드날리니 고려시대에 비해 더욱 성대하다고 하였다. 이후 송광사는 선원(禪院)강원(講院)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송광사에서 조선 후기에 간행한 불서가 48종에 이른다. 이는 전국적으로 단일 사찰에서 가장 많은 불서를 간행한 것이었다.

왕실 원당(願堂)의 지정

송광사는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약 150년간의 기간 동안 3차례에 걸쳐 가족의 안녕과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지정한 사찰인 왕실 원당에 지정되었다. 1755년(영조 31)에 설치된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원당(毓祥宮願堂), 1886년(고종 23) 고종 · 명성황후 · 세자(후일 순종)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설치한 축성전(祝聖殿), 1903년에 고종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기념해 설치한 성수전(聖壽殿)이 그것이다. 육상궁원당은 약 50여년 뒤인 1803년에 담양 용흥사로 이전되었다. 왕실 원당인 축성전은 1909년(융희 3)에 폐지되었고, 성수전은 1908년(융희 2)에 폐지되었다. 그런데 1957년 10월 성수전 앞에 있던 관음전이 퇴락하여 철거할 때 관세음보살을 성수전으로 이안하고 전각 이름을 관음전이라고 하였다. 성수전으로 지정되었던 그 관음전은 지금도 남아 있다.

승보사찰의 성립

삼보사찰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1828년에 지은 「연천옹유산록」이다. 여기에서 홍석주는 “불가에서 말하기를, 동국의 사찰에 삼보가 있으니, 통도사에는 부처님 두골(頭骨)이 있으므로 승보라 하고, 해인사에는 대장경이 있으므로 법보라 하고, 이 사찰(송광사)은 승보라 하는데 보조 이후 16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늦어도 19세기 초에 ‘송광사 = 승보사찰’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근현대의 송광사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불교계를 대표하여 1908년에 설립된 원종(圓宗)이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점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 조약을 맺자, 이에 반발하여 한용운 · 박한영 · 진진응 등의 승려들이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 모여 새롭게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임제종을 설립하였다. 이때 임제종을 지지하였던 송광사의 금명 보정(1861~1930)조계종 정통론과 보조종조론을 적극 주장하면서 많은 저술을 집필하였다. 그가 1920년에 쓴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의 서문에는 ‘지눌이 선종과 교종까지 아우르는 선교통합의 종(宗)으로 조계종을 개창하였다’고 주장하고, 지눌의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유풍을 부휴계가 계승하였음을 강조하였다.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에 설월(雪月)과 율암(栗庵)은 용화당(龍華堂)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明星閣)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寺監庫) · 장탄문(墻坦門)을 신축, 종각을 증축하였다. 그런데 1948년 여수 순천 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주16 토벌을 위하여 국군이 작전상 절 주변의 나무를 베자, 공비들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절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부터 금당(錦堂)과 취봉(翠峰)이 5년 동안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들을 중수하였다. 1969년에는 조계총림(曺溪叢林)으로 지정되었다. 총림(叢林)이란 선원 · 강원 · 율원 · 염불원 중 3개 이상을 갖춘 종합수행 도량을 의미한다. 조계총림이 된 송광사는 초대 방장이었던 구산이 당시 주지 현호에게 부탁하여 맡기며 중창불사를 시작하였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람 배치와 문화유산

가람배치 및 당우

조계산 송광사 · 선암사 일원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고, 순천 송광사 일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대사찰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쪽 방향으로 지어져 있다.

한국전쟁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法界圖)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大房)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法性寮) · 해청당(海淸堂) · 행해당(行解堂)과 서쪽의 문수전(文殊殿) · 임경당 · 도성당(道成堂)을 이른다. 동쪽 입구에서부터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배치된 가람의 모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청량각(淸凉閣) · 일주문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주17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였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주18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이다.

척주각(滌珠閣) · 세월각(洗月閣) · 우화각(羽化閣)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2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 · 세월각이라 쓰여있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주19 주20의 관욕처(灌浴處)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이다. 영가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주21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 · 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걸려 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천왕문 · 해탈문(解脫門) · 대장전(大藏殿) · 종고루(鐘鼓樓) · 법왕문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천왕문은 1609년(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년(숙종 44)에 중수하였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또 100여년이 지난 1806년(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재 건물의 크기는 4방 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 · 잡지 · 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화재 때 이곳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 두었고, 가사(袈裟)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 버렸다.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 · 운판 · 목어 · 홍고(弘鼓) 등 4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인 사물(四物)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다.

대웅보전 · 설법전 · 수선사

대웅보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1구(軀)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아(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 · 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臺上)의 건물들로 설법전 · 수선사 등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재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 · 측면 4칸의 건물이다.

상사당(上舍堂) · 하사당(下舍堂) · 응진전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크게 구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 · 하사당 · 향적전(香積殿) · 응진전 · 성수전(聖壽殿) · 산신각 · 진여문 · 청운당 · 백운당 · 설법전 · 차안당(遮眼堂) · 조사당 · 국사전 · 진영당(眞影堂) 등이 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나란히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湛堂)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주22 일명 삼일암(三日庵)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하사당은 특수한 건물로 건축 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년(인조 1)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다.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後佛幀畵)는 1724년(경종 4) 화승 의겸(義謙)이 그린 것이며, 오른쪽의 주23는 1725년, 왼쪽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回眼)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爐殿)의 화목을 적재하여 두는 향적전이 있다.

국사전 · 진영각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국사전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慈蔭堂)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 불교의 증인들이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楓巖影閣)이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풍암의 문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전 · 영산전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순천 송광사 영산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제작되었고, 화승은 의겸(義謙)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조성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관음전 · 지장전 · 화엄전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옆에는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인조 19)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佛)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 · 월조헌(月照軒)이 있다. 이 불조전은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었고 1905년과 1946년에 중수하였다.

지정 문화유산

송광사에 소장된 20,000여 점의 유물 가운데 국가 문화유산이 33점이고 시도 문화유산이 10점이다. 국가 문화유산은 국보 4점, 보물 28점, 천연기념물 1점이다. 시도 문화유산은 유형 문화유산 7점, 기념물 1점, 등록 문화유산 2점이다.

국보는 「목조 삼존불감」(제42호), 「혜심고신제서」(제43호), 「국사전」(제56호), 「화엄경변상도」(제314호)이다.

보물은 「대반열반경소」(제90호), 「경질」(제134호), 「경패」(제175호), 「금동 요령」(제176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제204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제207호), 「하사당」(제263호), 「약사전」(제302호), 「영산전」(제303호), 「고려고문서-수선사형지기」(제572-1호), 「고려고문서-노비문서」(제572-2호), 「십육조사진영」(제1043호), 「응진당 석가모니 후불탱 · 십육나한탱」(제1367호), 「영산전 후불탱 · 팔상탱」(제1368호), 「티베트문 법지」(제1376호), 「소조 사천왕상」(제1467호), 「소조 사천왕상 복장유물」(제1468호), 「목조 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 16나한상 일괄」(제1549호), 「목조 관음보살 좌상 및 복장유물」(제1660호)](E0069184), 「목조 관음보살 좌상 복장전적」(제1661호),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제1909호), 「계초심학인문(언해) 목판」(제1910호), 「인천안목 목판」(제1911호), 「종경촬요 목판」(제1912호), 「청량답순종심요법문 목판」(제1913호), 「천지명양수륙잡문 목판」(제1914호)이다.

천연기념물은 「천자암 쌍향수」(제88호)이다.

시도 유형 문화유산은 「금강저」(제22호), 「삼청교 및 우화각」(제59호), 「보조국사비」(제91호), 「진영당」(제97호), 「응진당」(제254호), 「보조국사 감로탑」(제256호), 「감로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유물」(제334호)이다. 시도 기념물은 「흑토기와 · 전 도요지」(제31호)이다. 시도 등록 문화유산은 「사료집성」(제633호), 「송광사사고」(제634호)이다.

산내암자

기록에 의하면 조계산에는 모두 16개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8곳이 남아 있다. 광원암, 불일암(자정암지), 감로암, 부도암, 천자암, 인월암(판와암지), 탑전, 오도암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암자로는 보조암지, 청진암지, 묘적암지, 은적암지, 상암지, 하암지, 북암지, 상선암지, 상염불암지, 하염불암지, 실상암지, 조계암지, 목우암지, 인월정사, 신평리의 암자 터 등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단행본

이능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신문관, 1918)
임석진,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지(大乘禪宗曹溪山松廣寺誌)』 (송광사, 1965)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조선총독부, 1919)
『조계산송광사사고(曹溪山松廣寺史庫)』 (아세아문화사, 1977)

논문

김경집, 「금명 보정의 전통 인식과 교화 활동」 (『보조사상』 64, 보조사상연구원, 2022)
이철헌, 「나옹혜근과 송광사」 (『보조사상』 43, 보조사상연구원, 2015)
이종수, 「18세기 불교계의 동향과 송광사의 위상」 (『보조사상』 45, 보조사상연구원, 2016)
탁효정, 「19세기 불교계 동향과 송광사의 위상 」(『보조사상』 45, 보조사상연구원, 2016)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https://www.heritage.go.kr)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순천문화대전(http://suncheon.grandculture.net/suncheon)
주석
주1

삼보(三寶)의 하나로, 석가모니불과 모든 부처를 높여 이르는 말. 부처는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또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므로 세상의 귀중한 보배와 같다 하여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샘

주2

삼보(三寶)의 하나. 깊고 오묘한 불교의 진리를 적은 불경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샘

주3

삼보(三寶)의 하나.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샘

주4

고려 무신 정권기에, 지눌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일으킨 불교계의 정화 운동. 종래의 불교계가 세속화된 것에 대한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하였으며,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우리말샘

주5

참선하는 승려. 우리말샘

주6

함께 도를 닦는 벗. 우리말샘

주7

산천, 초목, 인물, 글자 따위를 금실로 가득 수놓은 가사. 우리말샘

주8

임금이 손수 글씨를 씀. 또는 그 글씨. 우리말샘

주9

승려가 죽다. 우리말샘

주10

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몽고, 티베트를 영유하여 몽고 지상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신분제를 세웠으나 1368년에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봉기로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1

신이나 부처에게 소원을 빌다. 우리말샘

주12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 우리말샘

주13

인정하여 허가하다. 우리말샘

주14

스승이 제자에게 학예를 이어 전함. 우리말샘

주15

정통의 혈통에서 정통으로 이어받음. 우리말샘

주16

공산당의 유격대. 중국에서, 국민 정부 시대에 공산당의 지도 아래 활동하던 게릴라를 비적(匪賊)이라고 욕하며 부르던 데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17

양쪽 끝은 처지고 가운데는 높여서 무지개처럼 만든 둥근 다리. 우리말샘

주18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 공덕을 베풀어 주는 근본이라 하여 이렇게 이른다. 우리말샘

주19

불가에서, 정오가 되기 전에 식사를 하는 때. 우리말샘

주20

육체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되는 정신적 실체. 우리말샘

주21

예를 갖추는 의미로 인사차 방문하다. 우리말샘

주22

불도의 진리를 깨닫다. 우리말샘

주23

부처, 보살, 성현들을 그려서 벽에 거는 그림. 우리말샘

집필자
이종수(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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