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

정치
의식행사
일정한 조직 또는 집단이 대표자나 임원을 그 구성원 중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가 정해진 방법에 따라 자유의사로 선출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
내용 요약

선거는 일정한 조직 또는 집단이 대표자나 임원을 그 구성원 중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가 정해진 방법에 따라 자유의사로 선출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선거는 정치적 참여와 선택의 기능, 정치체제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정치적 안정과 통합을 이루는 기능 등을 수행하는 중요한 정치행위이다. 서구에서 발전해온 선거제도가 광복 이후 의회민주주의의 도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일거에 도입되면서 국민들은 다양한 선거 경험을 하였다. 선거제도가 올바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치문화의 성숙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

정의
일정한 조직 또는 집단이 대표자나 임원을 그 구성원 중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가 정해진 방법에 따라 자유의사로 선출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
개설

선거는 여러 종류의 집단 · 단체 내에서 이루어지지만, 정치적으로 근대민주주의국가가 대의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어, 그 대표를 선출하고 그 가운데 국민이 국정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주권행사의 방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다.

선거의 기능

선거는 일차적으로 대표나 임원을 선출하는 행위이지만, 그 과정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① 정치적 선택기능: 이것은 국민의 의사를 결정하는 기능으로, 정치지도자들을 선출하고 선출된 지도자들과 선택된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기능이다.

② 정치적 참여기능: 선거는 국민에게 정치참여의 기회와 통로를 제공하여 여러 형태의 정치참여 중 가장 일반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하도록 기능한다.

③ 지지기반 구축과 체제유지 기능: 선거는 정치체제의 지지기반 구축과 체제유지에 순기능과 역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기능은 몇 가지로 더 세분된다.

즉, 정치체제에 정통성을 부여, 확립, 유지하거나 거부하는 정통성 부여기능,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변화를 정치영역에서 흡수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도록 하는 정치적 안정기능, 투표행위를 통하여 정치체제에 일체감을 갖도록 하고 사회성원을 상호 결합시키는 정치적 통합기능, 정치체제에 대한 국민의 충성을 유지하도록 하고 확인하는 충성유지기능으로 나누어진다.

④ 연계유형기능: 이것은 투표자의 행태와 정부의 활동 사이에서 선거가 교량구실을 하는 기능으로서, 구체적으로 시민의 보호 · 정치사회화, 정치적 충원 및 훈련, 정치적 전달, 정치적 세속화기능, 합의와 갈등의 해결기능, 의식(儀式)기능, 의무로서의 투표기능 등이다. 선거가 수행하는 이 기능들은 항상 순기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역기능도 한다.

선거제도의 변천

선거가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 아래 중요한 정치참여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그 기원은 고대에까지 소급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성인남자에게만 참정권이 허용되어, 참정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비교적 적었으므로, 이들이 민회(民會)에서 국사를 결정하였다.

이때 의안의 결정은 보통 공개된 장소에서 거수로 결정되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환호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하였고, 위험인물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경우의 투표에서는 조개껍데기나 도편(陶片) 등을 이용하거나 흑백으로 간단히 구별되는 도장으로 비밀투표를 하는 등의 사례도 있었다.

고대의 직접민주주의에 이어 중세에서는 선거관행이 지방적 수준에서 존재하였다. 계서제(階序制)를 취하고 있는 교회 내의 제한된 소수유권자에 의한 선거관행이 존재하였으며, 신학과 정치학의 이론가들이 현실에 적합한 대의제도와 합의에 의한 정부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꾀하기도 하였다.

중세의 선거제도는 고대나 근대와는 달리 계산단위가 개인이 아닌 영주 · 도시 · 자치도시 등 지역적 단위체임이 특징적이지만, 중세의 사회구조가 선거제도와 적합하지 않아서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근대사회에 들어서서 사회경제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선거권의 확대가 이루어져 그에 따라 선거제도도 획기적으로 발전되었다.

즉, 절대군주제가 의회주의정치로 대체되고, 시민계급에 이어 대중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들을 통치과정에 끌어들이는 통치수단으로 선거권이 인정되었다.

이때 선거권은 사회적 권리이며, 또한 공적 의무가 되었다. 근대사회의 전개에 따라서 이루어진 대의민주정치제도의 발전은 선거에 있어 투표의 계산단위를 개인을 전제로 한 국민대표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 획기적인 특징이었다.

즉, 명령적 · 대리적 위임에 입각하는 계급대표나 단체대표에 입각한 중세의 신분적 의회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근대의회제도는, 첫째 국민전체의 일체성 · 동질성, 둘째 의회의 독립성 · 지고성(至高性) 및 의원의 엘리트성[選良]과 양심적 결정, 셋째 의회의 의사와 국민적 의사와의 동일성이 전제되어 성립하였다.

이렇게 대의제민주주의가 중요한 정치제도로 등장함에 따라 그 의회를 구성하는 대표의 선출행위인 선거권이 중요해졌고, 따라서 선거권은 양적으로 확대되고, 선거권의 행사는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왔다.

즉,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재산 · 납세액 · 수입 · 성별 등에 의한 제한선거로부터 모든 성년남녀에게 선거권이 부여되는 보통선거로, 등급별투표나 복수투표와 같은 불평등선거에서 평등선거로, 간접선거로부터 직접선거로, 공개선거로부터 비밀선거로 발전되었다. 선거제도의 발전은 오늘날 선거구 결정과 대표제 문제에까지 이르러 보다 합리적인 제도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까지도 기본문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자격을 어떻게 정하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이론적으로 야기되는 대표성의 문제로서 소 · 중 · 대선거구제와 같은 선거구의 결정문제 및 국민대표원리에 따른 다수대표제 · 소수대표제 · 비례대표제 · 직능대표제 등 대표제 문제, 그리고 선거절차에 관한 기술적인 문제로서 선거인명부 · 투표방법 · 선거운동 · 선거관리 · 선거소송 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보다 합리적인 제도와 운영이 모색되고 있다.

우리나라 선거 제도의 변천

광복 이후 의회민주주의의 도입과 더불어 서구의 근대적인 선거제도가 도입되었다. 따라서 대의정치에 바탕을 두고 보통 · 평등 · 비밀 · 직접 혹은 간접선거로서 선거제도가 확립되었으나, 선거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변천하였다.

여기에서는 국회의원 · 대통령 · 지방자치단체 · 통일주체국민회의 · 대통령선거인단의 선거제도가 어떻게 변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우리나라의 역대 국회의원선거제도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직접선거에 의한 소선거구제(단순다수 소선거구 1차 투표제)로 제헌국회부터 5대 국회( 참의원선거는 제외)까지, 그리고 13대 국회 이후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6대에서 8대 국회의 첫째 방식에 비례대표제를 가미한 혼합선거제도이다. 즉, 지역구와 전국구를 병용한 것으로서 6대 국회에서 8대 국회까지 사용하였다. 다만 이 기간 중에는 무소속의 입후보를 금지하였으며, 정당공천제를 법적 요건화한 점이 특기할 만하다.

세 번째는 유신헌법하의 제도로서 직접선거에 의해 지역구(1선거구에 2인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출신 의원을 전체 의원의 3분의 2만큼 선출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대통령이 추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방식이다.

네 번째는 제5공화국의 제도로서 제3공화국하에서의 전국구제도(의석배분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와 제4공화국에서의 중선거구지역 선거제를 혼합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제헌국회 이후 선거제도에 있어서의 중요한 점은 정당공천제의 법적 요건화, 무소속의 출마금지와 허용, 중선거구제의 채택 및 비례대표제의 도입과 혼용이다. 이것을 공화국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1공화국: 소선거구 단순다수 1차 투표제도를 일관되게 채택하였다. 이 선거제도는 가장 일반적이고 간편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결과가 불합리하게 나타나는 결함이 있다.

즉, 다수대표제의 원리와 유권자의 자기표유효화 본능에 의해서 제1당이 부당하게 과잉대표된다거나 또는 소수세력이 원내 다수당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사표(死票)의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인 인물이 전국적인 인물을 압도하고 국회의석을 차지하는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유권자의 절대다수가 지지하지 않은 입후보자라도 경우에 따라서는(특히 다수정당 난립하에서는) 합법적으로 당선될 수도 있다.

② 제2공화국: 양원제를 채택하여 민의원은 전통적인 소선거구 단순다수 1차 투표제로써, 참의원은 대선거구 제한연기제로써 충원하였다.

대선거구 제한연기제는 소선거구 또는 대선거구 단순다수 1차 투표제도와는 달리 다수파의 독점을 막을 수 있으며, 소수파에게 대표될 수 있는 기회를 터주는 한편 전국적인 인물이 지역적인 인물을 누르고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터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제2공화국에서만 시행되고 말았다.

③ 제3공화국: 선거제도의 변혁에 있어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타파한 시기로, 제6대 국회부터는 후보등록에 있어서 정당공천을 대통령선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적 요건으로 삼았으며, 무소속 입후보자의 출마를 법적으로 규제하였다.

거기에다 앞서 말한 제1 · 2공화국의 단순다수 소선거구 1차 투표제도에 전국구 비례대표제를 가미한 혼합선거제도를 창안, 채택하여 뒤의 제4 · 제5 · 제6공화국의 선거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형 비례대표제 자체의 변형이라는 점과 서독(지금의 통일 독일)식 혼합선거제의 변형도입이라는 점에서 서구식 원형과는 다른 것이었다.

비례대표제의 기본원리는 철저한 인격주의에 따라 국민을 있는 그대로 축소시켜 대의기구에 표출시키고자 하는 합리주의 정신이다. 따라서 사표도 방지하고 표값도 균등화하기 위하여 각 정당의 유효득표수에 비례하여 각 당에게 의석수를 배분하려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원리에 따르면, 소수당도 별로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게 되어 있다.

다당난립이나 그 촉진요인이 된다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다수대표제의 불합리성이나 소수대표제의 우연성을 극복하고 필연적으로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이 비례대표제의 장점이다.

그러나 제3공화국이 변형도입한 비례대표제는 도리어 의석을 비비례(非比例)로 배분함으로써, 제1당을 보호하고 소수당을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서독의 혼합선거제는 유권자가 소선거구(지역구) 입후보자와 비례대표 입후보자에게 각각 별도로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가 각각 갖고 있는 장단점을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제도이다.

즉, 소선거구제로 인하여 부당하게 희생되는 소수파와 전국적 인물을 구제하는 한편, 의회의 국민대표성과 원내 정파간의 경쟁성도 총의석수의 50%에 대한 비례대표제를 통하여 상대적으로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3공화국에서 도입한 변형된 서독식 혼합선거제는 지역구후보에게 던진 표가 전국적으로 당별로 집계되어 비례의석 배분의 기준이 되므로 부분적으로는 소선거구의 불합리성이 더욱 확대되는 경우도 생기며, 전국구후보는 국민의 심판대로부터 사각지대에 숨어버리는 현상이 생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의 공천이 입후보의 법률상의 요건이 된 사실과 아울러 비례대표제는 당지도층의 권한을 더 강화시켜주는 데 이바지하였고, 그 결과 국회의원의 당지도층에의 예속성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부터 본격화되어 제5대 국회로 이어진 정당공천제는 그 당시에는 다만 정치적인 요건이었을 뿐이었으나, 제6대 국회 이후 당의 공천제가 법률상의 요건이 됨으로써 누구라도 당명을 거역하거나 당권에 도전하면서 입후보할 수는 없게 되었다. 더욱이 무소속 입후보의 길마저 봉쇄된 상황에서 정치지망생의 생명은 오로지 당지도부의 수중에 있는 셈이었다.

또한 유권자가 지역구후보에게만 투표권을 행사할 뿐, 전국구후보에게는 별도로 의사표시조차 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더 그러한 현상을 부채질하였다고 볼 수 있다.

④ 제4공화국: 중선거구제 도입과 유정회제도(維政會制度)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한 선거구에서 2명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도는 거의 모든 선거구에서 제1당의 입후보자당선을 보장하고, 제2당의 당선 가능성도 결정적으로 높여줄 수 있는 일종의 여야밀월당선제도이다.

이 제도하에서는 여야가 백중지세를 보이게 되는데, 단기제를 채택함으로써 소수대표제의 원리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회의원 총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유정회제도를 창설하여 집권자가 원래 안정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또한, 제6대 이후 금지되었던 무소속 출마를 허용하여 결과적으로 지역구에서의 제1야당 후보표를 잠식할 소지를 열어 놓은 셈이다.

⑤ 제5공화국: 제3공화국 이후의 혼합선거제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제3공화국의 비례대표제와 제4공화국의 중선거구제를 혼합한 형태이다.

그러나 제5공화국이 택한 비례대표제의 의석배분방식은 매우 특이해서 지역선거구 총수에 해당하는 92명의 전국구의원 중 의석회득에 따라서 결정된 제1당에게 무조건 그 3분의 2인 61석을 배분하고, 나머지 31석은 제2당 이하의 정당에게 득표비율에 따라 비례대로 배분하도록 되어 있고, 군소정당은 비례제 의석배분에서 제외된다. 제5공화국 선거제도는 집권당이 언제나 원내 제1당이 된다는 낙관적인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약, 그 전망이 어긋나면 정국의 불안을 야기시킬 소지가 있다. 만일 지역구선거에서 야당이 단 1석이라도 더 얻으면 그 당이 전국구의석 61석을 차지하게 되면서 압도적인 다수당으로서 의회를 장악하게 되어 있어 집권당과 다수당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유사사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⑥ 제6공화국 노태우(盧泰愚) 정권: 제6공화국의 선거제도는 두 가지 점에서 제5공화국의 선거제도와 대비된다. 첫째는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변환하였다.

소선거구제를 채택함으로써 당선자 득표(winner-take-all)체계에 따른 사표(死票)의 부작용도 있으나 이는 전국구제도로 보완할 수도 있는 문제였으며, 오히려 한국선거사에서 보였던 중선거구제가 갖는 여야의 동반당선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높게 평가하여야 한다.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13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 동반당선이 갖는 불합리를 극복하고 여소야대정국을 형성하였다. 미국정치에서도 빈번히 논의되는 사항이지만 여소야대정국(또는 分割政府, divided government ; Cox and Kernell, 1991)은 민주주의의 실천경로로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이론적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제13대 선거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33.9%의 지지율로 양대 주요 야당인 통일민주당(23.8%)과 평화민주당(19.3%)의 지지율의 합보다 9.2%가 낮았다. 둘째로는 제5공화국에서 전체의석수의 1/3이던 전국구의석수가 제6공화국에서는 1/4로 줄었다.

특히 제5공화국에서는 지역구 선거에서 의석수가 제1위인 정당에게 전국구의석의 2/3를 배분하였으나 제6공화국에서는 지역구 선거에서 제1당인 과반수 이상 의석을 차지할 경우 의석수 비율에 따라 배분하며 제1당이 과반수 미만일 경우는 전국구 의석의 1/2을 배분하였다.

이러한 전국구의석수 배분제도의 변화는 과거 한국정치사에서 제1당이 갖는 과도한 프리미엄을 방지하여 보다 골고루 의석배분을 시도하려는 의도에서 상대적으로는 발전된 모습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국구 의석수가 올바로 계산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전국구의석수를 정당득표수(votes)에 따라 계산하지 않고 원래 유권자의 의도가 이미 한번 변환된 의석수(seats)에 따라 계산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제1여당이나 제1야당과 같은 큰 정당위주의 의석수 배분법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김영삼 정권의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1993년 7월 국회에서 정치관계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선거법, 지방자치법, 안기부법, 정치자금법 등 일련의 정치관련법에 대해 대폭적인 손질을 가해 1994년 3월 4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일명 통합선거법)이 통과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 통합선거법의 특이할 만한 점은 앞의 제6공화국의 전국구의석수 계산법의 불합리성을 구조적으로 극복하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의석수에 기초하여 전국구를 배분하지 않고 득표수에 따라 전국구를 배분함으로써 소선거구제하의 큰 정당들에게 생기는 과도한 프리미엄의 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한 단초를 제도적으로 보여주었다.

김대중(金大中) 정권: 김대중 정권의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김영삼 정권의 그것과 골격면에서 큰 차이는 없다. 단지 선거구 획정문제가 쟁점이 되자 2000년 2월 8일의 제210회 임시국회에서 지역구 253석 전국구 46석의 총299석의 의석수를 273석(지역구 227, 전국구 46)으로 26석을 감축하였다. 소선거구제와 1인1표 전국구 비례대표제는 유지되었으며, 그 동안 논란이 되어온 시민단체의 선거운동 허용문제와 관련, 선거법 87조를 개정, 후보자 등을 초청해 대담 및 토론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단체에 한해 선거기간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이날 본회의에서는 각종 선거의 비례대표 입후보 중 여성할당 30%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당법 개정안도 통과되었다.

⑨ 문재인 정권: 2019년 12월 27일, 국회는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선거제도를 도입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의 핵심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새로운 제도로서 50%만 반영하는 준연동형을 비례대표 47석에 모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 30석에만 적용하였다. 다시 말해, 비례대표 의석은 47석으로 정해져 있는데, 그 중 30석에만 준연동형 50%를 적용한다.

역대 대통령 선거제도

현재까지 제15대에 이르는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온 과정 속에서 제2 · 제3 · 제5 · 제6 · 제7 · 제13 · 제14 · 제15대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었고, 그 외는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다. 간선인 경우에는 국회(제1 · 제4대) · 통일주체국민회의(제8∼11대) 및 대통령선거인단(제12대)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것이 있었다. 이것을 공화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1공화국: 제헌헌법에서 대통령선거는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선거하여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투표로 당선자를 결정하는 간접선거제도였다.

그러나 1952년 2월 4일 국회에서 이승만의 재선을 위하여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대통령선거제도는 직선제로 바뀌고, 이에 따라 1952년 8월 5일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뒤 이 선거제도는 3선금지조항을 철폐한 4사5입(四捨五入) 개헌과 잇따른 3 · 15부정선거로 자유당정권이 붕괴되기까지 유효하였다.

② 제2공화국: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실시한 공화국으로, 이는 국회가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1960년 6월 11일 개헌을 단행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개정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며, 양원합동회의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투표로 선출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대통령선거제도가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환원됨을 의미하며, 1960년 8월 간접선거로써 윤보선(尹潽善)이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5 · 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불과 10개월밖에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③ 제3공화국: 대통령선거제도가 직선제로 바뀌게 되었지만, 제1공화국에서의 직선제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즉,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유효투표의 78.8%의 찬성 얻음)에 따라 통과된 헌법은 대통령선거에 관하여 누구나 반드시 소속정당의 추천을 받아 입후보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제6대부터는 부재자투표가 도입된 바 있다.

④ 제4공화국: 1972년 11월 21일 이른바 유신개헌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함으로써 성립하였다. 이 개헌안에 따라서 제8대 대통령부터는 다시 간선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으나, 이것 역시 앞에서 실시하였던 방법과는 색다른 것이었다.

즉, 유신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없이 무기명으로 선출하고, 이때 당선자는 재적대의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또한, 제5대 이후 실시되었던 정당추천의 후보등록요건을 대의원 200명 이상의 추천장과 후보자 승낙서를 첨부하여 선거일 전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처에 등록함으로써 입후보 요건이 충족되도록 바꾸었고, 임기는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였다.

⑤ 제5공화국: 1980년 10월 22일에 실시되었던 국민투표로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확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제5공화국헌법에서는 대통령선거를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대통령후보자는 정당추천의 경우 소속정당의 추천장과 본인의 승낙서를 첨부하고, 대통령선거인단 추천의 경우 선거인 300명 이상 500명 이하의 추천장과 본인의 승낙서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재적 선거인단 과반수의 찬성으로 선출된다. 이를 제5∼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반드시 정당의 추천을 받아야만 후보등록을 할 수 있었던 사실과 비교해볼 때, 또 하나의 방향전환이라 하겠다.

그러나 제5공화국 말기에 들어서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아지자, 직선제 개헌이 여야합의로 이루어져 마침내 1987년 12월 16일 노태우(盧泰愚)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8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지방자치단체 선거제도

지방대의제 자치제도는 제헌헌법의 규정에 따라 보통선거에 의한 주민참여의 길을 열었고, 이에 따라서 지방자치제가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실시된 바 있으나, 그나마 5 · 16군사정변 이후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헌법상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적으로는 없어졌다. 그러므로 이 선거제도는 제1 · 2공화국에서 실시되었던 세 차례(1952 · 1956 · 1960년)의 선거제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의 선거로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이 그 해 12월 15일에 개정되고 이에 따라 1952년 4월 25일에 시 · 읍 · 면의원 선거가, 5월 10일에는 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여기에 적용된 선거조항을 보면, 지방자치단체의 집행기관 중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는 임명으로 취임하고, 시 · 읍 · 면장은 지방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는 한편, 주민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서울특별시 · 도의회 및 시 · 읍 · 면의회의원은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 뒤 1956년 2월 3일 지방자치법이 개정, 공포되었으며, 그 해 7월 8일 다시 개정되었다.

이것을 1952년에 적용되었던 선거조항과 비교하여보면, 시 · 읍 · 면장을 시 · 읍 · 면의회에서 간접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주민의 직선에 의해 선출하도록 바꾸었고, 서울특별시장 및 도지사는 그대로 임명제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1956년 8월 8일 시 · 읍 · 면장과 시 · 읍 · 면의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해 8월 13일 서울특별시 · 도의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뒤 1958년 12월 24일 자유당에 의해 각급 지방자치단체장을 모두 임명제로 바꾸는 개정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제3대 지방자치단체의 선거는 4 · 19혁명 이후 헌법개정을 거쳐 1960년 11월 1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모두 직선제로 다시 바뀌었다.

이에 따라 1960년 12월 12일 서울특별시 · 도의회의원선거, 12월 19일 시 · 읍 · 면의회의원선거, 12월 26일 시 · 읍 · 면장선거, 12월 29일 서울특별시장 및 도지사선거를 실시하였다.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제도

제4공화국과 더불어 탄생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온 국민의 총의에 의한 국민적 조직체로서 조국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이라는 명목하에, 그 대의원은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선거법」(1972.11.25.공포)으로 선출된 자로 구성되었다.

이 선거제도의 특징은 ①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를 혼용하여 1선거구에서 1명 내지 5명의 대의원을 선출할 수 있으며, ② 선거운동은 철저한 공영제로 하며, ③ 피선거권은 국회의원피선거권이 있는 30세 이상의 국민으로서 그 선거구에서 2년 이상 계속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거주조건을 갖추고, ④ 유권자 30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후보자가 되며, 특히 정치인(국회의원, 정당의 당원)의 입후보를 금지하고 있다.

이 선거법에 따라 1972년 12월 15일 초대 대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뒤 행정구역의 개편과 인구의 증가로 대의원선거구역을 1,630개에서 1,665개로 증가시키고, 의원정수를 2,359명에서 2,538명으로 증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 두 차례의 선거법개정을 한 뒤 6년 뒤인 1978년 5월 18일 제2대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였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제도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대통령선거인단제도는 제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1980년 12월 26일 새로 제정된 「대통령선거법」에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국민으로부터 대통령선거를 위임받게 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 방식으로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제도와 비교해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정당원의 출마를 허용하였고(그러나 국회의원, 국영기업체의 장, 차기 국회의원선거 출마자는 제한), 2년 이상의 거주요건을 6개월 이상으로 하였으며, 유권자 300명 이상의 추천을 200∼300명의 추천으로 한 점 등이다. 특히, 대통령선거 후 임기가 개시되면 선거인으로서 자격이 상실되는 시한적 신분으로 규정한 점이 특이하다.

우리나라 선거사와 결과분석

국회의원 선거

① 제1공화국: 광복 후 1947년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국기(國基)를 잡아가기 시작하여, 이승만을 필두로 하는 민족진영이 좌익세력을 누르고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단독정부수립이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여건의 성숙 속에서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마샬(Marshall,G.C.)은 1947년 9월 17일 제82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정식의제로 상정하여, 그 해 11월 14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파견안이 가결되었다.

1948년 2월 6일 유엔소총회의 ‘가능지역 내의 선거실시에 관한 권한’을 유엔한국위원단에게 부여하는 결의의 채택에 따라, 유엔한국위원단은 그 해 5월 10일 이내에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그 해 5월 10일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물론, 제헌국회의원선거는 미군정 당국이 선거의 준비와 집행을 담당하였으므로 이 선거에 적용된 선거법은, 대한민국국회에서 선거법을 제정할 때까지의 잠정법인 군정법령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법은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의하여 기초, 제정된 것이므로 한국인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선거는 정당의 성장발전이 초보적인 단계에서 치러졌고, 권력투쟁의 계기라기보다는 다분히 건국운동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뒤의 선거와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건국 당시 이승만에 협조하였던 한민당(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의 외면으로 그와 결별한 뒤 야당화되었으며, 제헌국회 말에는 이승만의 독주를 막으려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았으나 부결되었다. 그로부터 야당의 인기는 상승일로에 있었으므로 그 예기를 꺾기 위해서 이승만은 선거를 11월로 미루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제헌국회의 임기가 2년이었기 때문에 늦어도 1950년 5월 중에는 제2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열화 같은 여론 앞에 정부는 선거일을 5월 30일로 결정하였다.

제헌국회에서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에 연계된 전원이 체포, 구금되었고, 남북협상파의 거물이던 김구(金九)안두희(安斗熙)에 의하여 피살되고 북한과의 협상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자 중간파 혹은 협상파는 크게 후퇴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제헌의원선거에 불참하였던 남북협상파와 중간파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시행되었으며,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자주적 관리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시법(限時法)으로서 제정된 군정법령인 「국회의원선거법」이 폐기되고 우리의 제헌국회에서 1950년 4월 10일 새로이 제정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와 제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였으나 전국의 종합적인 결과를 집계하지 못한 채 그 해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관계자료가 불타거나 분실되어 선거결과에 대한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유동상태에 있던 기성정당에 대한 국민의 실망으로 무소속의원의 대거진출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정치지도자의 부침이라는 관점에서 민족주의좌파와 사회주의계 인사 등 중간파 지도자의 진출이 현저하였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제2대 국회는 1950년 6월 19일 소집, 개원되었으나 그 해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국회는 대전 · 대구 · 부산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2년 중에 실시될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선거방법에 대한 개헌파동이 야기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처음 초당적인 통치형태인 거국내각을 구성하였으나 민주당 등이 반발하며 야당세력이 결속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51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신당조직의 필요성을 발표, 이어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원내세력 판도로 보아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웠으므로, 그의 재선을 위해 정부는 대통령직선제 · 국무원불신임권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여,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으로 알려진 발췌개헌안을 1952년 7월 4일 통과시켰다.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국회는 양원제가 되었으므로 제3대 국회의원선거실시전에 선거법의 개정이 실현되어야 했다.

그러나 전시하의 당시 형편으로는 복잡한 양원제가 필요없고 당초 이승만이 양원제 개헌안을 내놓은 것 자체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실시하려는 정략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선거법으로 제3대 국회의원선거도 치렀던 것이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의 특징은 우리 선거사에 있어 처음으로 공천제를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즉, 여당인 자유당이 조직을 강화하여 의원후보자공천제를 채택하자, 그에 대응하여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도 의원공천제를 실시하였다. 제2대 국회 때의 발췌개헌과 제3대 국회 때의 4사5입개헌으로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제로 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참의원선거법의 제정이 요청되었고 정부에서도 여러 차례 양원의원 선거에 적용할 ‘국회의원선거법안’과 이를 분리한 ‘민의원의원선거법안’ 및 ‘참의원의원선거법안’을 제의하였으나 국회의 통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3대 국회의원 임기만료에 따른 총선거에 적용할 선거법의 개정이 절실히 요청되어, 야당은 1957년 5월 22일에, 여당인 자유당은 그 해 9월 24일에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안을 각각 제출하였다.

이렇게 여야가 각각 제안한 법안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두 법안의 상정 심의에는 대단한 파란이 예상되어 여야는 여러 차례(1957.9.18.∼1957.11.9.)의 협상을 거듭한 끝에 여야단일안을 작성할 것을 합의하고 「민의원의원선거법」과 「참의원의원선거법」의 두 협상법안을 완성하였다. 이 법에 따라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5 · 2선거는 입후보자의 수가 종전보다 현저히 감소하고 특히 무소속의 진출이 억제되어, 자유 · 민주 두 정당을 축으로 하는 정당대결의 경향을 보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양당제도의 확립이라는 방향으로 정당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② 제2공화국:1960년의 3 · 15정 · 부통령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 · 19혁명으로 이승만독재와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었다. 이 정권의 붕괴 후 일부세력은 정 · 부통령의 직선을 주장하였으나, 국민의 압도적 여론은 구제도의 폐지와 1인독재의 재현을 방지하기 위한 내각책임제 정부형태에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회는 1960년 4월 26일에 열린 본회의의 결의에 따라 선정된 내각책임제 개헌안기초위원들이 민주당에서 당책으로 기초해 놓았던 안과 자유당의 혁신파에서 작성한 안을 중심으로 요강을 작성하였다. 그 뒤 각계각층의 인사를 초청하여 공청회를 개최하고, 국민의 여론을 들어 1960년 5월 11일 개헌안을 제안하였다.

영국식 정부형태를 모방하고 민권을 대폭 신장한 이 개정안이 30일간의 공고기간을 거쳐 1960년 6월 15일 국회를 통과하자, 정부는 그 날로 개정헌법을 공포하였다. 선개헌 후선거의 원칙이 성립되자, 국회는 곧 민 · 참의원의 선거를 전제로 「국회의원선거법」의 개정을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제5대 국회의원선거는 1960년 7월 29일, 민의원 4년, 참의원 6년(첫 선거 때만 반수를 3년으로 해서 3년마다 그 반씩을 개선하도록 하였다) 임기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③ 제3공화국:제2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발생하여 제2공화국과 함께 제5대 민의원과 제1대 참의원은 불과 1년도 못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박정희(朴正熙)가 이끄는 군사정부는 1963년에 민정이양을 하기 위하여 내각책임제의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하고, 정당정치를 구현하는 헌법개정안을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시키고, 그 해 12월 26일 개정헌법을 공포하였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는 헌법공포일로부터 1년 이내에 실시하여야 한다는 이 헌법부칙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선거를, 그 해 11월 26일에 국회의원선거를 각각 실시하였다. 이에 앞서 군사정부에서는 이 선거에 적용할 「대통령선거법」과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하여 1963년 1월 16일에 공포하였다.

이러한 일정 속에서 혁명으로 일시 금지되었던 정치활동이 1963년 1월 1일을 기해서 재개되자, 그 해 2월 26일 민주공화당이 처음 창당된 데 이어, 민정당 · 민주당 · 국민의 당이 창당되어, 정당법상의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정당은 의외로 난립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당에 의한 후보자 공천만을 인정한 「국회의원선거법」 때문이었다.

12개 정당이 난립하였던 11월 26일의 총선거는 여당의 원내 안정세력확보와 야당의 대통령선거에서의 패배설욕전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1967년 5월 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가 끝나자 그 해 5월 8일 제7대 국회의원선거의 공고로 각 당은 국회의원선거 체제정비에 착수하였다. 그 달 16일 등록이 마감되기 전까지 여야는 몇 가지 문제를 놓고 논전을 폈다.

그 하나는, 정부가 그 달 9일 「대통령선거법」 및 「국회의원선거법」의 두 시행령을 개정하여 대통령과 국무위원 등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였다. 야당측은 이러한 개정은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헌법정신과 「국회의원선거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67년 5월 13일 국무위원의 선거운동은 「국회의원선거법」에 위배되므로 불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써, 이 논의는 의외로 정부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로 옮겨졌다.

이러한 논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5월 21일 정당의 대표자인 대통령은 「국회의원선거법」상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선거공고가 있던 그 해 5월 8일 정부는 대통령후보였던 서민호(徐珉濠, 대중당) · 오재영(吳在泳, 통한당)과 신민당원 장준하(張俊河)를 구속하였다. 이들이 대통령선거시 특정후보 박정희를 신랄히 공격하였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인데, 선거기간 동안에는 구속하지 않다가 선거가 끝나자 구속하였던 사실이다. 이들은 6 · 8국회의원선거가 시작되기 전 그 해 5월 31일에 석방, 국회의원선거를 치렀다.

또 다른 정치문제는 여야 다같이 공천문제에 따르는 파동이었다. 공천제는 여당에게는 논공행상적이었고, 야당에게는 자금조달원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렇게 하여 그 해 6월 8일 선거는 실시되었다.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군소정당은 불과 1석밖에 획득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지역적인 편차를 보이며, 선거법상의 수많은 금지규정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였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관권개입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를 전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야당(신민당)과 일부분에 걸친 부정이라는 여당(민주공화당)의 주장이 맞서 6 · 8선거후유증을 유발시켰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여야는 숱한 협상 끝에 이른바 ‘보장입법’을 마련, 1968년 12월 29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보장입법은 「대통령선거법」 · 「국회의원선거법」 · 「선거관리위원회법」 · 「정당법」 및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등 5개 선거관계법이었다. 또 1969년 9월 14일 3선개헌의 처리과정과 그 해 10월 17일 국민투표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문제로 여야대립은 국회운영의 공백을 초래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국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1969년 11월 하순부터 막후교섭으로 진행되어온 여야총무회담에서 선거제도개선이 국회운영의 정상화의 관건으로 대두, 여야는 협상선거법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1970년 12월 17일 선거관계법의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그 해 12월 22일 공포되었다. 이를 제2의 협상선거법이라고 한다.

이 선거법으로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로, 여당인 공화당은 안정세력을 확보하고 야당인 신민당은 의석의 과반수에 접근하여 균형 있는 원내 의석분포를 보인 것이 특징이다.

④ 제4공화국(유신체제):1972년 10월 17일 대통령의 비상사태특별선언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금지되었으며, 해산된 국회기능을 수행할 비상국무회의가 설치되었다.

그 해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했으며, 이에 대한 국민투표가 그 해 11월 21일 실시되었고, 91.5%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유신헌법이 확정되어 그 해 12월 27일 이를 공포하였다.

이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고, 국회의원선거는 헌법시행 6월 이내에 실시한다는 이 헌법의 부칙으로 인해 「국회의원선거법」을 그 해 12월 30일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2월 9일 제9대 국회의원선거일이 공고된 뒤, 그 해 2월 14일 후보등록을 마감하여, 2월 27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또한 그 해 3월 5일 대통령의 일괄추천에 의하여 그 해 3월 7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임기 3년의 국회의원을 찬성투표로 당선을 결정하여 3분의 1을 선출함으로써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종결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출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이 제9대 국회의원선거의 특징이기도 하다.

1973년 유신체제로 처음 선출된 제9대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1979년 3월 11일에 만료된다. 또 1978년도는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제8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해로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와 제9대 대통령선거 및 제10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선거의 해이며 6년간의 유신1기가 마무리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야는 제10대 국회의원선거를 1년여 남겨 놓은 1977년 정기국회에서 정치의안인 선거관계법 개정문제를 놓고, 그 해 11월 10일부터 5인회담과 10인중진회담을 번갈아 열어 20일간의 협상 끝에 타결된 「국회의원선거법」 중 개정안을 1977년 12월 17일 국회에서 의결, 12월 31일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1978년 12월 12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뒤 10 · 26사태와 5 · 17군사쿠데타 등을 거쳐 제5공화국의 기틀이 된 헌법이 공포, 발효됨에 따라 그 규정에 의거하여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 「국회의원선거법」 · 「대통령선거법」 등의 사회개혁을 위한 제반 입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기존정당은 모두 해체되고, 정치활동의 부분적 해제조치를 통하여 일부 구정치인과 신인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정계개편이 이루어져 민주정의당 · 민주한국당 · 한국국민당 등이 창당되어 총선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⑤ 제5공화국:제5공화국 출범을 위한 마지막 정치일정인 제11대 국회의원의 총선거일(1981.3.25.)이 1981년 3월 5일 공고됨에 따라 민정 · 민한 · 국민을 비롯한 각 정당이 국회의원후보공천을 끝내고 선거전에 들어갔다.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276명을 선발하는 3 · 25총선은 평균 78.4%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민주정의당이 압승하였으며, 기타 정당들은 예상보다 저조한 의석확보에 그쳤다.

제12대 국회의원선거는 1985년 1월 23일 공고되어, 그 해 2월 12일 실시되었다. 전국구 92인, 지역구 184인을 선출하는 제12대 총선에는 전국구 71명, 지역구 440명이 입후보하였다. 한편, 전국구의석 배분에서는 민주정의당이 61석, 신한민주당이 17석, 민주한국당이 9석, 한국국민당이 5석을 배분받았다.

2 · 12총선의 특징은 정통야당을 계승한 신한민주당이 창당한 지 한달 만에 선거에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당의 지위에 오르고, 뒤에 민주한국당 소속의원을 대거 영입하여 양당제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역대 국회의원선거결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투표율이다. 일반적으로 투표율이 정치참여도 측정의 주요 지수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환경변수가 정치참여에 중요하게 작용하므로, 투표율로 정치참여를 측정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무후무하게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고 유권자의 투표에 대한 정치적 효율감이 가장 충만하였던 제5대 민의원선거시 투표율이 겨우 84.3%이었음을 보면, 자유당하의 90% 이상의 투표율은 자발적 정치참여의 지수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제6대에서 제12대에 이르는 지역별 투표율을 볼 때 제주도 · 충청북도 · 강원도가 교대로 전국 최고투표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서울 · 인천은 한결같이 최하위의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권이 정치적 무지 내지 무관심에서도 비롯되지만, 정치에 대한 혐오 · 불신 및 비효율감 등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제헌국회 이후에 계속 하강세를 보여온 투표율이 제10대 이후 다시 상승세를 타서 제12대의 경우는 84.6%로 4 · 19혁명 직후의 제5대 국회를 육박하고 있다. 그 원인은 흔히 입후보자수의 폭증과 높은 경쟁률 및 열띤 정치참여 등의 필연적 결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제6 · 제7대의 그것과 비교하였을 때 반드시 그것만이라고 할 수 없는 면도 있다.

입후보자에 대한 당선자 비율을 보면, 제2대 선거가 10.5:1로 가장 경쟁률이 치열하였는데, 이는 제헌국회의원선거시 불참하였던 남북협상파와 일부 중간계열의 참여로 인한 현상이다. 이 선거에서 후보자를 낸 정당 단체만 해도 40개였고 이 중 단 1명의 후보자를 낸 정당과 단체가 무려 18개였다는 점에서 당시 정당 및 단체의 난립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경쟁률은 낮아지는 추세를 보여서 제12대에는 약 2.4:1의 안정된 배율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제13대 선거에서 경쟁률이 4.7:1로 급증하였는데, 이는 야당의 분열로 인하여 초래된 현상이다. 그리고 제10대 국회까지는 후보자를 낸 정당의 숫자가 각각 줄어들다가 제11대 이후 역류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역대 국회의 정당별 득표율을 보면, 제7대 국회에서 민주공화당이 50.6%, 신한민주당이 32.7%로서 제1당과 제2당의 득표차가 17.9%이었다. 그러다가 제8대에서는 4.3%의 격차를, 제9대에서는 6.1%의 격차를, 그리고 제10대에서 민주공화당과 신한민주당의 격차가 1.1%의 역조현상을 보임으로써 민주공화당 유신정권의 적신호를 보인 바 있다.

그런데 제11대에 와서는 민정당과 민주한국당의 격차가 14.1%로 다시 벌어졌다. 이는 유신체제 후 제5공화국의 체제변혁적 작업결과와 새로운 선거제도의 메카니즘의 상관관계 속에서 풀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12대 국회는 민주정의당이 35.2%를 득표한 데 비해 신한민주당 · 민주한국당의 야당권이 각각 29.3%, 19.7%로서 도합 49%를 얻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⑥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제6공화국에서 있었던 선거는 제13대 국회의원선거와 제14대 국회의원선거였다. 제13대 국회에서 민주정의당이 33.9%, 야당인 통일민주당 · 평화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이 각각 23.8%, 19.3%, 15.6%를 얻어 제1당과 제2당의 득표차가 10.1%로 벌어졌으나, 이는 야당단일화 실패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한편, 13대의 경우 나타나는 특징은 득표율에서 앞선 통일민주당이 59석의 의석밖에 차지하지 못하여 70석을 차지한 평화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3당으로 전락한 점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여촌야도’의 투표경향이 제11대 국회에 한해서 ‘여촌여도’의 현상으로 나타났으나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제12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제14대 국회의원선거의 경우는 삼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이 38.5%, 민주당 29.2%, 통일국민당 17.4%를 얻었다. 역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기복은 있었다지만, 득표율과 도시화율의 상관관계(즉, 여촌야도 현상:여당이 농촌에서 높은 지지를 얻고 야당은 도시에서 높은 지지를 얻는 현상)는 14대 선거에서도 대체적으로 나타났음을 이 당시의 경험적 분석들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하여 여촌야도의 현상은 약화되었다. 이는 대도시 및 중소도시의 선거구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여당이 비록 농촌에서 높은 지지를 받더라도 도시에서 저조한 지지를 상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촌야도는 이제 더 이상 여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적다.

⑦ 김영삼 정권:김영삼 정권하에서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시기적으로 국회의원선거가 제1차 4대 지방선거(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회의원, 기초의회의원) 이후에 실시되었다.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지역주의 구도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 선거였다. 여당인 신한국당이 34.5%, 새정치국민회의가 25.3%, 그리고 자유민주연합이 얻은 16.2%의 지지율은 각각 영남 · 호남, 그리고 충청을 기반으로 한 지지율이었다.

이러한 지역주의라는 정치문화적 정향은 제도적으로 국회의원선거에서의 소선거구제와 맞물려 있어 더욱 확고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⑧ 김대중 정권 : 2000년 4월 13일에 치른 제16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이 38.9%, 새천년민주당이 35.8%, 자유민주연합 9.8%, 민국당이 3.6%를 얻었다. 정당별 의석분포는 한나라 133석, 새천년민주당 115석, 자유민주연합 17석으로 한나라당이 원내제1당을 확보하였다.

지역구도는 계속되었고, 양당제가 정착되었다. 시민운동단체의 낙선운동이 이슈가 되었으며, 선거 후에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2001년 공동여당의 한 축인 자유민주연합이 공조를 파기하여 정국은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전환되었고, 2001년 10월25일의 재 · 보선에서 한나라당이 모두 당선시켜, 과반에서 1석이 부족한 136석을 확보하였다.

끝으로, 역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사회적 배경을 편의상 연령 · 학력 · 직업에 따라 살펴보면, 연령별 분포는 대체로 35세에서 55세까지의 인사가 주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체제가 지속되면 될수록 국회의원의 고령화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보수적인 경향과 과두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제1 · 제2대는 국회의 형성 초기이므로 논외로 하고, 제3대부터 제5대까지는 평균연령이 높아지다가 제6대에 낮아지고, 제10대까지 다시 높아지다가, 제11대에 다시 낮아진 뒤 제12대에 다시 상승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개혁 초기의 강경한 변혁입법이 점차 온건 · 보수화되는 현상과 연령분포의 상승현상이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학력별 분포의 경우는 일관해서 고학력화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헌국회에서 제4대 국회에 이르는 동안의 중학교졸업 이하의 학력은 30∼40%선을 상회한 바 있으나 제8대 이후에는 0.5% 안팎이다.

반면에 대학교졸업의 경우는 제헌부터 제5대 국회까지는 40%선에 머무르던 것이 제6대 국회 이후 60%선, 그리고 제10대 국회 이후로는 90%선을 상회(제13대는 92.4%)하고 있으며, 특히 제9대 이후로는 대학원 졸업도 40%선에 이르고 있다.

교육의 기회가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때, 의원충원의 편재성은 한국의회의 보수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의 하나로 해석될 수도 있다.

끝으로 직업별 분포를 보면, 초기에는 농업과 무직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후기(제6대 이후)로 갈수록 직업정치인과 무직이 증가되는 현상을 나타낸다.

초기에 농업출신이 많았던 것은 일제치하에 농촌에 묻혀 있거나 생계를 그 곳에 의존하였던 잠재 엘리트들이 광복과 함께 정치적 수평선 위로 올랐기 때문이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드는 것은 도시화 · 공업화 등의 사회변화 요인과 정치의 직업화현상이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반면 정치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직업정치인제도가 확립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동시에 입법엘리트의 순환 내지 사회의 상향적 이동이 그만큼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제12대 국회는 정치인출신이 전체의 79.7%이며, 지역구 184명만 보면 재선 이상이 143명으로 77.8%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은 제13대로 올수록 대체로 정당배경을 가지고 있는 대졸 이상의 전문적 지식의 소유자로서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주로 40대의 보수 · 중도적 정치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제14대와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지속되었다. 제14대를 보면 대졸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가 92.9%였으며, 제15대의 경우는 93.6%에 이르렀다. 직업은 제14대의 경우 80.6%였으며, 제15대의 경우 77.5%, 제16대 지역구 당선자의 경우 76%로서 고학력 직업정치인의 입법 엘리트 현상이 제도화되어가고 있다.

대통령 선거

① 제1공화국:1948년 5월 31일 처음으로 소집된 제헌국회는 곧 대한민국수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당초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하였으나, 건국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헌법기초위원들은 이승만의 뜻에 따라 대통령책임제로 헌법의 틀을 바꾸었고, 그 해 6월 23일 국회본회의에서 이를 상정, 통과시킨 뒤에 당시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7월 17일 이 헌법을 서명,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헌법」은 발효되었다.

새 헌법에 따라 「정부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회는 그 해 7월 20일 초대 대통령부통령의 간접선거에 들어갔다. 재적의원 198인 중 출석의원 196인에 의하여 무기명투표로 시행한 결과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통령선거에 있어서는 제1차 투표 결과 당선자가 없어 최고득표자인 2인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한 결과 이시영(李始榮)이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사임함으로써 1951년 5월 16일 제2대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3차 결선투표까지 거친 끝에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김성수(金性洙)가 근소한 차로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초대 대통령의 임기만료를 8개월 여 앞둔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에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발췌개헌을 통하여 대통령 · 부통령간접선거는 직접선거로 전환되었다. 또 직접선거의 절차법으로서 「대통령 · 부통령선거법」이 제정, 공포되어 그 해 8월 5일 제2대 대통령 · 제3대 부통령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고하였다.

제2대 대통령과 제3대 부통령은 이승만과 함태영(咸台永)이 각각 당선되었다. 제3대 대통령 · 제4대 부통령선거는 1956년 5월 15일 실시되었으며, 선거법은 제2대 정 · 부통령선거법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張勉)이 각각 당선되었다.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실시되어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李起鵬)이 각각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우리의 선거사상 악명높은 부정선거로 4 · 19혁명을 유발하게 한 원인이 되었고 결국 1960년 4월 26일 국회 결의에 따라 무효가 되었다.

② 제2공화국: 허정(許政) 과도정부의 관리하에 이루어진 1960년 7월 29일 총선결과 최초로 민 · 참의원이 구성된 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하의 간선제 대통령선거는 그 해 8월 12일 민 · 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실시되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헌법상 규정되었으며, 대통령선거도 “대통령은 양원합동회의에서 선거하고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투표를 얻어 당선된다. 제1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제2차 투표를 행하고 제2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재석의원 과반수의 투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는 헌법규정에 의하였다. 선거 결과는 윤보선이 압도적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③ 제3공화국:2년 동안의 헌정중단상태에 종지부를 찍은 제3공화국 수립작업은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정치활동이 재개됨으로써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1962년 12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그 해 12월 26일 공포된 개정헌법에 의하여 내각책임제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중심제로 환원되었으며, 대통령의 선거도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로 변경되어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전 정치상황의 특징은, 첫째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과 그에 따른 진통, 둘째 당시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의 민정불참선언(2 · 27선언), 셋째 박정희의 민정불참 번의와 민주공화당의 총재 및 대통령후보지명수락, 넷째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의 창당 등이었다.

선거전은 실질적으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의 대결이었다. 특히, 그 대결은 박정희후보의 사상에 대하여 윤보선후보가 전주 유세를 시작으로 이의를 제기한, 이른바 사상논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앞서의 선거가 공명선거논쟁으로 크게 붐볐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0 · 15선거는 철저하게 사상논쟁으로 시종하였던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46.6%를 얻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국회의원선거법」의 개정과 함께 「대통령선거법」도 개정하여 1966년 12월 14일 공포하였다.

이 개정선거법에 따라 1967년 5월 3일 실시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51.4%를 얻어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를 2년 앞두고 조국근대화의 계속적인 추진을 위한 인물이라는 명분으로 박정희에게 3선을 허용하기 위한 헌법개정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1969년 7월 25일 “개헌문제를 통해 나와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라고 선언하고 민주공화당이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해줄 것을 희망하였다.

박정희는 특별담화에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면 나와 정부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하고, 부결되면 국민의 불신임으로 간주하여 즉각 물러서겠다.”는 태도를 밝혔다.

이와 같은 박정희의 담화에 따라, 현직 대통령으로 하여금 3차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그 밖에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을 허용하며, 대통령탄핵소추에 있어 국회의 의결능력을 높여 대통령의 권위를 보호하는 조처를 강구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제출되었다.

그 해 9월 9일 국회특별회의실에서 통과된 뒤 곧이어 헌법절차에 따라 그 해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가결, 확정되었다. 이로써 대통령의 3차 연임의 길이 트이고, 민주공화당은 1971년의 양대 선거체제로 들어갔다. 이에 야당인 신민당은 1970년 1월 26일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유진산(柳珍山)을 당수로 선출, 3선개헌 이후 6개월간의 국회등원 거부투쟁에 종지부를 찍고 원내투쟁으로 전략을 바꾸어 제73회 임시국회에 등원, 정부와 여당에 대한 공세를 벌였다.

이와 같이 선거채비를 정비한 여야는 1970년 12월 정기국회 종료를 며칠 앞두고 국민투표 이후 1년간 끌어오던 선거관계법개정협상에 합의를 보았다. 이리하여 제7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선거법」과 「대통령선거법」이 두 차례의 개정을 보게 되었다.

이 개정선거법으로 1971년 4월 27일 실시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53.2%를 얻어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후보를 누르고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④ 제4공화국(유신체제):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선언에 따라 그 해 11월 21일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유신헌법에 의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그 해 12월 15일 실시되었다.

한편,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실시되기에 앞서 동 대의원 선거법과 이 법의 시행령 및 통일주체국민회의법을 공포하였다.

제8대 대통령선거를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집회가 그 해 12월 23일로 공고되어 후보등록 마감날인 그 해 12월 22일 곽상훈(郭尙勳) 등 515명의 대의원은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후보로 추천하였고, 선거 결과 재적대의원 전원인 재석 2,359명 중에서 박정희 후보가 2,357표, 무효 2표로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2년 12월 17일 대통령취임식을 시발로 유신체제 제1기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상황은 유신헌법의 반민주성을 들어 야당을 중심으로 한 일부 사회인사 및 학생들에 의한 개헌투쟁이 격화되었다(1974년 1월 8일 개헌주장 등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하였다). 이에 대해서 박정희는 1975년 1월 22일 특별담화를 발표 “현행헌법에 대한 찬반과 정부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선언하였으며, 그 해 2월 1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 결과는 부정 · 불법투개표의 시비를 남겨 놓은 채 유신헌법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나타났다. 이에 박정희는 북한공산체제와 극한적인 대치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유신체제는 변경할 수 없으며, 이를 더욱 견고히 구축하겠다는 소신을 밝히면서 강력하게 시정을 펴왔다(1975년 5월 13일 개헌주장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

이에 대한 끈질긴 반체제인사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제8대 대통령의 6년간의 임기만료까지 유신체제는 그대로 지속되었고 1978년 7월 6일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재적대의원 2,581명 중 2,578명이 참석하여 무효 1표를 제외한 찬성으로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대여강경노선을 주장해오던 김영삼(金泳三)이 야당인 신민당총재로 선출됨에 따라 여러 해 동안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하여 금기사항이었던 개헌투쟁의 재연, YH사건, 신민당의 가처분사건, 국회에서의 김영삼의원의 제명, 이에 따른 부산 · 마산의 사태 및 이로 인한 이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의 선포 등, 정국은 혼란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0 · 26사태가 발생하여 당시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가 헌법의 규정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취임,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유신체제로 대표되는 제4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등장하였다.

과도정부의 정치일정공약에 따라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단독입후보한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최규하는 당선 다음날 국무회의의결을 거쳐 긴급조치 제9호를 그 해 12월 8일 0시를 기하여 해제함으로써 기존 유신체제로부터 탈피, 새로운 정치체제를 모색하기 위한 첫 움직임을 보였다.

정국의 불안과 혼미 속에 5 · 17계엄조치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1980년 5월 31일 설치되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위기극복과 함께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규하는 취임 9개월 만인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국보위상임위원장인 전두환(全斗煥)이 예편하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서 절대 다수표를 얻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9월 1일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⑤ 제5공화국:정부는 헌법개정심의회를 통한 개헌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80년 9월 9일 개헌시안을 확정하여 같은 달 29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이를 대통령이 발의하였다. 이 개헌안이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를 거쳐 같은 달 27일 공포됨으로써 제5공화국 출범의 기틀이 되었다.

제12대 대통령선거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으로 1981년 2월 25일 이루어져, 선거인단의 90.2%에 해당하는 4,755표를 얻은 전두환후보가 당선되어, 그 해 3월 3일 취임하였다.

⑥ 제6공화국 노태우(盧泰愚) 정권:1987년 대통령선거 직선제 개헌으로 인하여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하여 한국사회가 이른바 절차적 의미에서 민주화과정을 밟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 선거의 정치적인 의미가 증대되는 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노태우 후보는 8,282,738표(36.6%)의 유효득표를 기록하면서 야권분열에 따른 김영삼(6,337,581)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⑦ 김영삼(金泳三) 정권:제14대 대통령선거의 특이할 만한 점은 경제문제를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성공한 기업가 정주영(鄭周永)이 출마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은 그 동안 군사정권아래서 야당의 정권도전이 민주화요구 문제와 같은 ‘스타일 이슈(style issue:추상적, 상징적인 수준의 이슈)’에 치중되어 왔는데, 제14대 대선에서 기업가 정주영의 출마는 야당의 선거쟁점에 경제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이른바 ‘포지션 이슈(position issue:구체적인 수준의 이슈)’가 선거에 등장하였다.

이는 한국선거에서도 서구 선진 민주주의사회에서의 유권자의 투표행위인 ‘경제투표(economic voting)’의 가능성을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보여주었으나 정주영의 경제대통령으로의 바람몰이는 김영삼 · 김대중에 이은 3등후보가 됨으로써 좌절되었다.

⑧ 김대중(金大中) 정권:1997년 12월 18일에 행해진 제15대 대통령선거는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여당과 야당의 정권교체라는 의미있는 선거였다. 한국민들은 국가자존까지 위태롭게 한 김영삼 정부의 경제실정과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에 분노하면서 야당후보인 김대중을 선택하여 헌정사상 50여 년만에 처음으로 야당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되었다.

비록 김대중후보의 승리가 여당분열(이회창후보와 이인제후보)과 지역구도가 맞물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 당시 부동표에 대한 경험적 분석은 여당의 이회창후보가 부동표공략에 실패하였으며, 그 실패한 원인이 궁극적으로 한국민은 결국 변화를 택하는 길만이 경제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며 나아가 안정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 대통령 선거의 투표 결과를 분석해 보면, 7번 실시한 간선제의 경우는 투표율이 매우 높지만, 6번 실시한 직선제의 경우는 현저하게 낮아지는 현상을 보인다. 더욱이 직선제의 경우, 초기에는 높았으나 점차로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대도시의 투표율 역시 동일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제13대의 경우 투표율이 다시 급증하였다. 또한, 당선자 득표율의 경우, 직선제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당선된 것은 이승만후보로 74.6%의 득표율을 기록한 제2대 대통령선거의 경우인 데 반하여 가장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 것은 노태우후보로 36.6%를 얻은 제13대 대통령선거의 경우였다.

그러나 간선제의 경우는 거의 100%에 가까운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 당시 한국정치체제의 성격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나타내준다.

처음으로 직선제가 실시되었던 제2 · 제3 · 제4(무효화)대 대통령선거의 경우, 당선자의 득표율이 높았던 것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더불어 자유롭지 못하였던 선거분위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제5 · 제6 · 제7대 대통령직선제가 치열한 선거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도리어 낮았고 또 당선자의 득표율이 차점자와 비교해서 근소한 차이였다는 사실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특히, 제5대 대통령선거부터 입후보자는 반드시 소속정당의 추천을 받도록 함으로써 무소속 출마가 없어지자 선거전은 실제상 여당후보자와 제1야당 후보자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제5대선거의 경우 5명의 입후보자가 출마하여 경쟁하였으나 사실상의 선거전은 민주공화당과 민정당의 각축전으로 박정희후보가 윤보선후보를 470만2640표(46.6%) 대 454만6614표(45.1%)의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뒤 제6 · 제7대 선거에서도 역시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당선자와 차점자의 차이는 거의 10% 내외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지방간 투표성향의 차이로 제5대 선거(1963)시에는 여야의 지지도 분포현상이 남북으로 갈라져 나타난 데 반하여, 제6대(1967) · 제7대(1971) 선거시에는 동서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13대 선거에서는 이 같이 여야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대신 자기 지방출신의 후보자를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음으로 간선제의 경우를 보면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국회의원에 의해 실시된 초대와 제4대의 경우로서 각각 재적의원의 91.8%, 80.4%의 득표율로 이승만과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둘째는 제8대에서 제11대에 이르는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서 단일입후보자(박정희)에게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표를 던진 바 있다. 이는 그 당시의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분위기 속에서 구성되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1981년 2월 25일에 실시한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제12대 선거이다. 여기서는 제8대 이후 처음으로 4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였으나 선거인단 자격에 정당원의 출마가 허용된 상황이었고, 선거인단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였으므로 이들에 의한 투표 결과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지방자치단체 선거

지방자치단체의 선거는 1952 · 1956 · 1960년의 세 차례에 걸쳐서 시행하였다.

① 1952년시행 지방자치단체의 선거:제헌헌법의 규정에 따라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이 그 해 12월 15일자로 개정되고, 1950년 12월에 지방자치를 위한 선거를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1950년 6월 25일 6 · 25전쟁이 일어나 선거가 연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방자치단체의 선거가 실시된 것은 1952년 4월 25일 및 5월 10일이었다.

이 선거도 6 · 25전쟁으로 인하여 전선에 인접한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경기도와 강원도 및 계엄령이 선포된 일부지역에서는 실시되지 못하였다.

1952년 4월 25일의 시의회선거에 있어서는 전국 19개 시 중 17개 시에서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결과는 무소속이 의원정수 378명 중 45.5%인 172명, 자유당이 30.1%인 114명, 대한청년단이 40명, 국민회가 29명, 민주국민당이 7명, 대한노동자총연맹이 5명, 국민당이 2명, 기타가 9명의 순이었다.

읍의회선거에 있어서는 전국 75개 읍 중 72개 읍에서 선거를 실시한 결과 무소속이 의원정수 1,115명의 38.5%인 430명, 자유당이 24.5%인 274명, 대한청년단이 229명, 국민회가 155명, 민주국민당이 7명, 대한노동자총연맹이 6명, 기타가 14명의 순이었다.

면의회의원선거에 있어서는 전국 1,448개 면 중 1,308개 면에서 선거를 실시한 결과 무소속이 총당선자수 1만6051명의 42.8%인 6,867명, 자유당이 25.3%인 4,056명, 대한청년단이 2,574명, 국민회가 2,437명, 민주국민당이 21명, 국민당이 16명, 대한노동자총연맹이 12명, 기타가 68명이었고, 정원에서 15명이 미달이었다.

② 1956년 시행 지방자치단체선거:1952년에 실시한 지방자치단체의회의원선거에 따라 구성된 지방의회의원의 임기 4년이 만료되는 총선거에 대비하여 1956년 2월 13일 「지방자치법」이 개정, 공포되어 그 해 7월 8일 다시 그 일부가 개정되어 그 해 8월 8일 시 · 읍 · 면장과 시 · 읍 · 면의회의원선거를, 그 해 8월 13일에는 서울특별시 · 도의회의원선거를 각각 실시하였다.

서울특별시와 9개 도 중 서울특별시 · 경기도 · 강원도를 제외한 7개 도에서 실시한 선거결과 자유당이 의원정수 306명의 48%인 147명, 무소속이 85명, 대한청년단이 34명, 국민회가 32명, 민주국민당이 4명, 대한노동자총연맹이 2명, 기타가 2명의 순이었다.

③ 1960년 시행 시 · 읍 · 면장선거:1960년에 시행할 예정이던 지방자치단체의 선거에 대비하기 위하여 1958년 12월 24일 각급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임명제로 하는 「지방자치법」 중 개정법률안이 자유당에 의하여 국회를 통과하게 되고, 그 해 12월 26일 공포되어 임기만료에 의한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임명제로 되었으나, 각급 지방의회의원은 대체로 1960년 8월에야 그 임기가 종료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법에 의한 선거는 4 · 19혁명 이후 헌법이 개정되어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지방자치법」의 개정을 보게 되었다. 1960년 11월 1일 새로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그 해 12월 12일 서울특별시 · 도의회의원선거를, 12월 19일 시 · 읍 · 면의회의원선거를, 12월 26일 시 · 읍 · 면장선거를, 12월 29일 서울특별시장 · 도지사선거를 각각 실시하였다.

1960년 12월 12일의 서울특별시 · 도의회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이 의원정수 487명의 44%에 해당하는 216명이었고, 민주당이 40%에 195명, 신민당이 70명, 사회대중당이 2명, 기타가 4명의 당선자를 각각 내었다.

1960년 12월 19일의 시의회선거는 전국 26개 시에서 실시되었는데, 무소속이 의원정수 420명의 56.7%에 해당하는 238명, 민주당이 30.7%에 129명, 신민당이 45명, 기타가 8명의 당선자를 각각 내었다. 시 · 읍 · 면장 선거는 1956년도에, 서울특별시장 · 도지사선거는 1960년도에 각각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서울특별시장 · 도지사 · 시 · 읍 · 면장선거의 순으로 투표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것은 지방의회의원선거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정당의 영향은 시 · 읍 · 면장의 경우는 그 영향력이 약해 무소속출신의 점유율이 높은 데 비해,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의 경우는 여당의 비율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④ 시 · 군 · 구 및 시 · 도 의회의원선거:1991년에 실시된 의회의원선거에서는 전체적으로 여당인 민자당의 승리로 끝났다. 여당은 전체 시 · 도 의원 중 65%에 해당하는 564명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3당합당 직후인 1991년 6월의 광역의회의원선거는 58.9%의 저조한 투표율을 나타냈는데, 그 원인을 알기 위한 당시의 전국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2%가 ‘정치불신’이라고 지적하였다.

⑤ 제1회 4대 전국동시 지방선거:1991년에 치러졌던 지방선거는 지방의회의원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미완성의 지방자치선거였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선을 통한 선거혁명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1994년 여 · 야의 합의에 의한 통합선거법인 「공직 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지방의원뿐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도 주민들의 손에 의해 선출되도록 규정하였으며, 이 법에 의해 1995년 6월 27일에 제1회 4대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지방행정구조가 중앙집권적 경향에서 벗어나 지방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자율권을 확대시키는 의미에서 지역간의 경쟁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제1회 4대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하여 한국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인 지방자치제도가 외형적으로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⑥ 제2회 4대 전국동시 지방선거:1998년 6월 4일 실시된 제2회 4대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시기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심각한 경제위기와 변화에 대한 책임론, 그리고 여소야대의 정국에 대한 중앙의 정계개편의 길목이라는 의미에서 지방선거가 지방자치발전을 위한 의제설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단순히 중앙정치의 대리전이라는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분명한 것은 후보자 공천이 중앙에서 결정됨으로써 향후 지방자치와 중앙정치의 건전한 방향을 위해서 우려가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의 특징적인 현상은 유권자의 선거 무관심으로서 투표율이 역대 선거사상 두번째로 낮은 52.6%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대도시에서의 투표율이 크게 하락하여(광역시에서 20% 안팎, 도에서는 10% 전후) 한국 선거 행태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투표참여의 도저촌고(都低村高)현상이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다만, 광역단체장 선거의 경합이 치열하였던 울산 · 제주 · 강원과 기초단체장 선거경합이 치열하였던 전남 · 충북 지역은 상대적으로 높은 투표율을 보이고 있어 선거경쟁과 투표율간의 비례적 상관관계를 상정해 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는 영남-한나라당, 호남-국민회의, 충청-자민련의 지역구도에 의한 당선현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지역단위 16곳 모두에서 광역장의 의회다수 정당이 일치되는 지방자치 1당 지배현상을 보이고 있음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 차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선거

제4공화국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선거는 두 차례 실시되었다. 유신헌법규정에 따라 1972년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할 대의원선거를 위하여 그 선거법과 시행령을 공포하였다. 이틀 후인 11월 27일, 초대 대의원선거를 그 해 12월 15일 실시하기로 공고하여 선거가 실시되었다.

또한, 초대 대의원의 임기가 1978년 6월 30일 종료되게 되어 있어, 제2대 선거가 그 이전에 이루어져야 하였다. 따라서, 1978년 4월 29일 국무회의의 심의를 통하여 선거일이 공고된 뒤, 적법한 절차를 밟아 그 해 5월 18일 제2대 대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두 차례 실시된 대의원선거를 비교해보면, 연령면에서는 초대의 경우 36∼40세 사이가 빈도가 높은 데 비하여, 제2대는 41∼45세가 빈도가 높고, 무투표당선율이 초대의 경우 225명인 데 비하여, 제2대는 332명이었다. 그러나 학력은 대졸이 두 번 다 40%선을 넘었고, 농림업이 대체로 많았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1980년 2월 11일 새로 개정된 선거법에 의하여 실시된 대통령선거인단 선거는 전국 1,905개 선거구에서 5,278명의 선거인을 뽑는데 9,284명의 후보가 등록하여 평균 1.8: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선거결과는 민정당이 전체의 69.5%인 3,667명을 당선시켜 전두환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확실하게 하였으며, 무소속이 21.4%로 1,132명을, 민주한국당이 411명, 국민당이 49명, 민권당이 19명을 각각 당선시켰다.

이 가운데 무투표당선자는 113선거구에서 288명이었다. 또한, 선거인단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의 40대 남성으로 농업과 상업이 30% 이상을 차지하였다.

1987년 이후 유권자의 직접선거방식

대통령제를 정의할 때 필연적인 한 가지는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에 따른 대중선거(popular election)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선거가 반드시 직접선거(direct election)일 필요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경우 대통령을 선거인단이 뽑기 때문에 간접선거방식이나 이는 선거제도 이전에 연방제도라는 제도의 상위체계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각 주(州)별로 유권자들의 합의를 존중하기 때문에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것이며, 선거인단은 궁극적으로 대중들에 의한 직접선거에 의하기 때문에 선거인단제도가 직접선거의 정신을 해친다고 보지는 않는다.

앞서서 지적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유신체제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실시되었던 대통령 간접선거방식은 분명히 국민의 의사를 묻는 대중선거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정권획득이나 연장의 수단일 뿐이었다. 한국의 정치문화적 맥락에서도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에 의해서 뽑는다는 것은 한국민의 정치문화와 역행하는 경향이 강하다.

1998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회의원선거제도의 개정논의에서도 완전한 비례대표제가 아닌 소선거구 병행제도로서 독일식 명부제도(list system)를 도입하려는 것도 국회의원의 일부는 적어도 유권자의 의사에 따라서 직접선거방식으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한국민의 정치문화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8년 현재 대통령제 국가이며 대통령을 국민의 의사에 따라 직접선거를 거친다는 것은 변경할 수 없는 명제인 듯하다.

단, 지역구도하에서 40%도 안 되는 지지를 얻은 대통령이 탄생하여(36.6%의 노태우 대통령) 국민의 합의(consensus)에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단순다수득표제(plurality system)가 아닌 프랑스식의 과반수 2차 선거제도(즉, Second Ballet System 또는 Majoritarian system)를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그 동안 실시된 선거를 통해 분석된 우리나라의 선거행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우리나라에서는 투표율이 곧 정치참여의 수준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참여가 구조적으로 이원화되어 있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투표율은 외국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면서도 그 밖의 참여형태, 즉 정치토론이나 선거운동, 사회적 · 정치적 단체활동 및 공무원이나 국회의원과의 대화 등의 정치참여는 매우 낮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계의 최근 조사보고에 의하면, 젊고 교육수준이 높고 고소득자이며 도시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이 연만하고 교육수준이 낮고 저소득자이며 농촌에 거주하는 유권자들보다 정치참여의식은 높으나 투표의사는 도리어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투표의사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는 정치참여의식뿐만 아니라, 현존 정치에 대해서 희망적인가 절망적인가 하는 유권자의 평가와 함께 그들이 투표행위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효능감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도시에서 나타나는 높은 기권율은 정치의식은 있으되 정치참여를 거부하는 ‘현대적 무관심’, 즉 기존 정치제도에 대한 불신 · 혐오 및 냉소주의 등의 정치적 비효능감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선진외국의 경우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이라 하겠다.

둘째로 우리나라의 경우 준봉(遵奉:관례나 명령을 좇아서 받듦)투표경향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의 소산으로서 유권자 자신의 의사에 따라 투표하기보다는 자기보다 높은 권위체의 의사와 지시에 따라 투표의사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관권 · 소속기관장 · 가장 및 문중 등의 장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까지도 매우 크며, 이는 혈연 · 지연 등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향토문화의 상합 속에서 더욱 가중된다.

세번째로 지역주의적 투표경향이다. 즉, 도시와 농촌간의 투표행태에 격차가 나타나는가 하면, 지리적 조건에 따라 표가 분산 또는 집중되는 특징 있는 유형을 보여왔다. 예컨대, ‘여촌야도’ · ‘남북현상’ · ‘동서현상’이 그것이다.

여촌야도현상은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왔던 일반화된 유형으로 도시인의 비판적 성향, 농촌인의 보다 높은 준봉성, 농촌지역에의 관권침투 용이성 등이 그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리하여 제6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여야간의 당선자현황을 보면, 대도시는 제11대 선거만 제외하고는 모두 야당이 우세한 결과를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제5 · 6 · 7대 대통령선거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제3공화국 후기(제6대 대통령선거 · 제8대 국회의원선거)로 접어들면서 점차 퇴색하여 다른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제5대 대통령선거(1963.10.5.)에서는 서천과 울산을 연결하는 이북과 이남으로 표가 나누어진 남북현상을, 제6대 대통령선거(1967.5.3.) 때는 여야의 득표가 영남과 호남으로 나누어진 동서현상을 나타냈는데, 이것은 그러한 예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과거 여당 지지의 강원도 · 충청남북도 · 경기도가 야당적 색채를 띠게 된 반면, 야당의 ‘표밭’으로 일컬어오던 영남 · 호남이 여당권으로 역전되었음을 의미한다.

표의 ‘남북현상’은 후보자간(윤보선후보와 박정희후보)의 사상논쟁이 호남표마저도 박정희후보에게 기울어지게 하였고, 다시 박정희후보의 영남과의 지연이 이에 가세된 것이다. 그리고 표의 ‘동서현상’은 수혜관계의 지역별 격차, 공화당정권의 중공경농정책, 입후보자의 대조적 지연배경이 표밭을 양분하였던 것으로 풀이되지만, 제7대에 가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 제13대 대통령선거 이후로는 여야를 불문하고 자기 지방출신의 후보자를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노태우-민주정의당-대구 · 경북, 김영삼-통일민주당-부산 · 경남, 김대중-평화민주당-광주 · 전남북, 김종필-신민주공화당-충남의 도식이 그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도 김영삼-민자당-경상남북도, 김대중-국민회의-광주 · 전남북, 정주영-국민당-강원도의 지역구도가 이어졌으며,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도 김대중-국민회의-광주 · 전남북, 이회창-한나라당-경상도의 구도가 이어졌다.

김종필(金鍾泌)의 지역기반인 충청도의 표가 김대중 · 김종필(DJP)연합의 여파로 김대중 지지로 이어졌으나, 한나라당에서 이인제가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나옴으로써 경상도의 표는 이회창과 이인제로 나뉘어지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지역감정과 연관시켜볼 때 국민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끝으로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선거를 치르면서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수준이 상당히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난 제12대 국회의원총선거 후에 『동아일보』가 실시한 전국청장년 사회의식여론조사(1985.4.1.)를 보면, 후보자의 경력(41%)과 정당(32%)을 재력 · 출신지 · 친분관계 · 선물공세 등보다 중시한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정치학회산하 한국선거연구회가 실시한 제15대 대통령선거 설문조사(1997.12.18.∼12.20.)에서도 나타난 바 유권자들은 인물 · 국정수행능력(49.1%)을 후보자선택에 가장 큰 고려사항으로 꼽았다.

평가

우리는 건국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려 16차례의 국회의원선거, 아홉 차례의 대통령직접선거, 네 차례의 통일주체국민회의선거, 한 차례의 대통령선거인단선거, 그 밖에 지방의회의원선거 등 실로 다양한 선거와 투표경험을 쌓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권개입, 투개표상의 부정, 타락선거 · 선심공세 등 권력과 금력이 개재된 불법과 허위의 풍토는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의 선거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선거에 임하는 정부 · 입후보자 · 국민의 마음가짐, 즉 그들 모두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의 민주화와 근대화가 선행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합리적인 선거제도를 창안하고 높은 투표율을 기록해도 그 실효를 거둘 수가 없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 충실한 청지기의 자세로, 국민은 권리 위에 잠자지 않고 일어나 감시하는 권위 있는 주인의 책임의식으로, 그리고 입후보자는 주인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을 받는 겸허한 자세로 서로 어우러질 때 이 땅의 선거문화는 참으로 민주정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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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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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ded Government(Gary Cox and Samuel Kernell., Boulder, CO:Westview Pres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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