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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국가에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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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국가에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
영역닫기영역열기왕호의 변천
군왕(君王)·군주(君主)·주군(主君)·인군(人君)·왕(王)·왕자(王者)·나랏님·상감마마·황제 등으로 불렸다.
  1. 1. 초기국가시대의 왕·후
    우리나라에서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선진문헌(先秦文獻)을 살펴보면 고조선시대부터 후(侯) 또는 왕을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9∼8세기경의 사실을 기록한 『시경』 대아한혁편(大雅韓奕編)에 의하면 연(燕)나라 근처에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을 다스리는 한후(韓侯)가 있었다고 한다.
    이 후는 그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동이계(東夷系)인 한의 군장(君長)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지』 동이전에 나타나는 삼한의 신지(臣智)·험측(險側) 등과 마찬가지로 거수(渠帥)에 해당하는 지배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시 동예에는 불내예후(不耐濊侯), 옥저에는 옥저현후(沃沮縣侯)가 있었다.
    서기전 4세기경의 고조선에도 후와 왕을 칭한 기록이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조선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고조선이 철기문화의 수용을 바탕으로 연맹왕국을 형성하여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나라와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졌음을 뜻한다.
    또, 『사기』 조선전에는 서기전 194년 위만(衛滿)이 연나라로부터 망명해 오자 준왕이 박사 벼슬을 주고 변방을 지키게 했는데, 뒤에 위만이 도리어 조선을 공략해 준왕은 남쪽 한(韓) 땅으로 달아나 한왕을 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전 109년 한무제(漢武帝)가 위씨조선을 침공하자 내분이 일어나 우거왕은 암살당하고 결국 위씨조선은 멸망했다고 한다. 또, 북방의 부여왕과 남쪽의 마한 목지국(目支國)을 다스린 진왕(辰王)도 있다.
    그러나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존재이다. 단군왕검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桓雄)의 아들로서 고조선의 임금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단군왕검은 단군과 왕검의 복합어이다. 오늘날, 단군은 무당 혹은 하늘을 의미하는 몽고어의 ‘뎅그리(tengri)’, 그리고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는 ‘엄큼’ 혹은 ‘ᄅᆡᄀᆞᆷ·ᄋᆞᆯ감’의 대역어로서 임금의 뜻을 가진 말로 해석하고 있다. 즉,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정치적 수장의 구실을 겸하던 제정일치 시대의 군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단군왕검은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아들이라 하여 태양의 아들을 상징하듯이, 부여·고구려·백제 등 부여족 계통의 나라에서는 공통적으로 태양을 의미하는 ‘해’를 이름 앞에 붙여 호칭함으로써 해씨(解氏) 성이 나타났다.
  1. 2. 신라의 방언왕호
    신라는 초기에 고유한 왕호를 사용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제1대 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 제2대 남해를 차차웅(次次雄), 제3대 유리에서 제18대 실성까지 16왕을 이사금(尼斯今), 제19대 눌지에서 제22대 지증까지 4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와 약간 견해를 달리하여 유리에서 제16대 흘해까지 14왕을 이사금이라 칭하고, 내물에서 지증까지 6왕을 마립간으로 지칭하고 있다.
    거서간은 『삼국유사』에서 거슬한(居瑟邯)·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표기하고 있다. 간·한은 고구려의 가(加)와 마찬가지로 족장·군장·대인을 뜻하며, 한편 “진언왕(辰言王)”이라 하여 귀인(貴人) 또는 왕자(王者)의 존칭으로 해석하고 있다.
    거서간은 고구려·백제의 어라하(於羅瑕)·건길지(鞬吉支)와 비교되어 흥미를 끈다. 또, 백제의 왕비는 어륙(於陸)이라 하였다. 어라하(Wolaka)는 남하 이전의 고구려 지배층이 사용하던 왕호이고, 건길지(Kenkici)는 백제 토착인의 왕호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에 왕과 왕비에 대한 발음이 전하고 있는데, 어라하는 Orikoke, 건길지는 Konikisi 혹은 Kokisi, 어륙은 Oriku 또는 Oruku로 읽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무녕왕을 도왕(島王, Semakisi)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건길지의 일본대어(日本對語)인 Konikisi 혹은 Kokisi는 Kisi 앞에 Koni 또는 Ko라는 형태소가 붙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또 왕을 Kisi라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Kisi는 한자어로 백제에서는 길지(吉支), 일본에서는 길사(吉師)라고 표기하여 거서간과 같이 왕의 존칭으로 사용한 말이다. 또 건길지의 건은 ‘대(大)’를 의미하는 형태소이므로, 건길지는 왕의 격을 높여 일컫는 ‘대왕’의 뜻이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도 신라처럼 방언왕호가 있었던 것이다.
    차차웅은 자충(慈充)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김대문(金大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신라의 방언으로 무당[巫]과 같다고 하며, 남해가 무당이 되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세상사람들이 그를 외경하여 자충이라 했다 한다.
    이와 같이 차차웅 또는 자충이 무당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남해가 곧 제정일치 시대의 군장으로서 제사장의 임무를 겸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사금은 『삼국유사』에 이질금(尼叱今) 또는 치질금(齒叱今)으로도 쓴다고 했는데, 모두 ‘잇금’의 한자어이다. 김대문의 설을 인용한 『삼국사기』의 설명을 보면, 이사금은 방언으로 치리(齒理), 즉 잇금을 뜻한다고 한다.
    남해차차웅이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를 놓고 후계자를 선택할 때 유리가 잇금이 많다고 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그 뒤 김씨도 또한 일어나 박·석·김 3성이 연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순위를 정하여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사금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군장의 권위를 더 강하게 내세우고 정치체제를 집권화하기 시작한 것을 표시하는 왕호로 보인다. 전진왕 부견(符堅)이 신라사신 위두(衛頭)와 대화하면서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내물시대는 바로 이러한 변혁의 시대였으므로 『삼국유사』는 내물부터를 마립간시대로 잡았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김대문의 설을 채용하여 마립은 방언으로 궐(蹶)을 이르는데, 궐표는 자리를 따라 정하므로 왕궐이 위에 자리하고 신궐은 아래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궐 또는 궐표는 석차를 표시하는 표목(標木), 즉 말뚝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마립은 우리말의 두(頭), 즉 머리를 의미하는 종(宗)·동량(棟樑)·청(廳) 등의 뜻인 ‘마루’와 같으며, 간은 금(金)·감(監)과 같이 국어의 존장(尊長)을 의미하는 말이다.
    마립간은 바로 수석장(首席長) 또는 후세의 군장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上監)인 동시에, 중국식의 폐하·전하와 대응하는 존칭어로도 사용되었다.
    후세에 임금을 상감마루하(上監瑪樓下) 혹은 상감마마(上監嗎嗎)라고 하였는데, 이 마루하야말로 마립간의 유칭(遺稱)이며 마마는 마루하에서 변한 말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상감마마의 상감과 마마는 같은 뜻으로서 중복어라는 점이다. 마루하는 말루하(抹樓下)라고도 쓰는데, 이 말은 비단 군왕에 대하여서뿐만 아니라 존귀한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도 쓰여져, 노비가 그 주인을 마루하 또는 상전(上典)이라 불렀던 것이다.
    하인이 관인(官人)을 부른 존칭어에 대감마님(2품 이상)·영감마님(3품 이하)·나리마님이 있고, 귀부인을 단지 마님이라 부른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표현이다.
    『일본서기』나 최근에 알려진 금석문에 의하면 신라에는 ‘매금(寐錦)’이라는 칭호도 있었다고 한다. 또 후대의 발해에서는 ‘가독부(可毒夫)’라는 토착왕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1. 3. 중국식 왕호의 사용과 제왕연대력
    신라는 지증왕 때부터 고유왕호인 마립간을 버리고 정식으로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지증왕 때 마립간이라는 고유 왕호를 사용했으나 국력신장 및 왕권강화와 더불어 일련의 개혁정치를 시행하면서 군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신라, 왕호를 신라국왕이라 쓰기로 정하였다. 지증왕을 계승한 법흥왕은 불교식 왕호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는 초기에 방언왕호를 사용했는데, 『삼국사기』는 유교사관 내지 사대사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역사를 사실대로 적는다는 강한 의식의 발현으로 고유왕호를 원형대로 기록하였다.
    한편, 『삼국유사』도 고유왕호의 역사적 의미를 받아들여 왕력편(王曆篇)에서 방언왕호를 그대로 쓰고 있으나, 기이편(紀異篇)에서는 거서간 등을 왕으로 고쳐 쓰고 있다.
    이것은 하대에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 고유왕호를 중국식 왕호로 개서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는 『제왕연대력』이 방언왕호인 거서간 등을 모두 왕으로 바꾸어 쓴 것에 대하여 “혹시 그 말이 야비하여 족히 칭할 것이 못 된다는 까닭일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이 유교사관에 의하여 『제왕연대력』을 저술했다 해도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는 크게 다르다.
    김부식이 춘추필법에 의하여 방언왕호를 사실대로 기록한 것 등은 긍정적인 측면이지만, 지나치게 유교사관 내지 사대적 사고방식에 치우친 나머지 우리의 고유한 전통에 대해 애써 눈감으려 한 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최치원의 경우 『제왕연대력』에서 고유왕호를 버리고 중국식 왕호로 고쳐 쓴 점에서 유교사관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신라를 군자국(君子國)으로 보는 자존적 시각을 지니고 공·맹(孔孟)의 원시유교를 동경하는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그의 사관은 오히려 원초적 유교문화사관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제왕연대력』을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처럼 제(帝)·왕(王)의 연대력으로 풀이한다면 중국과 신라의 연대력, 즉 두 나라의 연대력을 합편한 것이 아닐까 한다.
    최치원은 신라를 중국의 번국(藩國)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왕연대력』을 저술할 때 중국제기(中國帝記)에 맞추어 신라왕기를 적으면서 양자의 기술적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중국식 왕호로 통일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치원의 경우는 후세의 『고려국사(高麗國史)』·『동국사략』·『동국통감』이 모두 철저한 유교사관에 의하여 신라의 방언왕호를 삭제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1. 4. 대왕
    『삼국사기』·『삼국유사』 및 당시의 금석문 등에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곳곳에 나타난다. 삼국이 연맹왕국 내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이 강화되어가는 시기에 대왕의 칭호가 등장하게 된다.
    고구려의 태조대왕·광개토대왕, 신라의 내물대왕·진흥대왕·태종대왕·문무대왕 등과 같이 국가에 공적이 많은 위대한 왕의 칭호로 사용하여 왕중왕(王中王)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의례상 왕 또는 사신이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상대방의 왕을 대왕이라 칭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왕비 또는 신민이 자국 왕을 존대하는 표시로 대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또 『삼국유사』를 보면, 하대의 왕 가운데서 원성·신무·경문·김부(金傳, 경순왕)를 대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오묘(五廟)에 봉사된 조목(祖穆)을 추증한 대왕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나, 김부는 신라의 마지막 왕이므로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고려태조가 김부의 숙부 억렴(億廉)의 딸을 취하여 욱(郁)을 낳았는데, 뒤에 욱의 아들 대량원군(大良院君)이 현종으로 즉위하여 부모를 추존할 적에 김부도 대왕으로 추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대왕이 왕중왕의 뜻으로 사용된 확실한 자료를 백제의 경우에서 찾아보면, 5세기에 정통 백제왕 이외에 왕·후 또는 좌현왕(左賢王)·우현왕 등의 칭호가 중국측 기록에 나타난다.
    즉 당시 백제에 정통 백제왕 이외에 왕·후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중국황제에게 이들의 임명을 요청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왕은 명실공히 백제의 왕중왕, 다시 말하면 백제대왕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무신왕 때 부여갈사왕(曷思王)의 종제(從弟)가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투항해 오자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고 성을 내려 낙씨(絡氏)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왕은 고구려왕의 지배를 받는 제후와 같은 존재이다.
    또, 동명왕 때 송양왕(松讓王)이 나라를 들어 항복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 유리왕이 다물후(多勿侯) 송양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왕·후도 백제왕이 임명한 왕·후와 성격이 동일한 것으로서, 고구려왕도 백제대왕처럼 당연히 고구려대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 5. 삼국시대의 묘호
    고구려는 20년(대무신왕 3) 3월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고, 백제는 18년(온조왕 36) 5월에 동명왕묘를 건립했으며, 신라는 6년(남해차차웅 3) 정월에 시조묘를 세워 4계절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라는 지증왕 때 시조강탄지(始祖降誕地)인 나을(那乙)에 신궁을 창립했고, 혜공왕 때에는 미추왕은 김성(金姓)의 시조가 된다고 하여, 또 태종대왕·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음으로 해서 모두 세세불천(世世不遷)의 신위(神位)로 삼고, 여기에 친묘(親廟) 2위를 합하여 처음으로 5묘를 제정했다고 한다.
    한편, 시조를 태조로 표기한 기록은 687년(신문왕 7) 2월 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대왕(文興大王)주 01)·태종대왕·문무대왕의 5위를 조묘(祖廟)에 치제함으로써 시조를 태조로 추봉한 데에서 볼 수 있다. 이 기록은 신라 5묘제가 사실상 신문왕대에 실시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태조의 명호는 진흥왕순수비 중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흥덕왕릉비단석(興德王陵碑斷石)에 의하면 흥덕왕은 성한태조(星漢太祖)의 24대손이라 하여 성한을 태조라고 하였다고 한다.
    위의 여러 곳에 나타나는 태조는 시조처럼 막연한 개념이 아니고 창업주라는 뚜렷한 조선의식(祖先意識)의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중대를 개창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은 이 태조를 의식하여 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추봉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보다 시대가 훨씬 앞선 진흥왕대에 이미 ‘태조의 업을 계승하여’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듯 명확·불변의 시조관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과, 소지·지증 마립간시대에 박혁거세의 시조묘와는 별도로 신궁이라는 김씨 시조묘를 건립한 것을 감안하면, 김씨왕조는 세습왕권을 한층 더 과시하기 위해 처음 왕위를 차지한 미추이사금을 신궁의 묘주로 정하고 격을 높여 태조로 묘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는 동명성왕과 온조왕을 시조라 하고, 또 두 나라가 같이 동명성왕의 묘를 세워 제사지낸 기록이 있지만 태조로 추봉하여 묘호를 올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가 미추이사금을 김씨시조로 받들어 묘호를 올리고 있는만큼, 고구려·백제도 시조에게 묘호를 진상하여 태조로 추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는 제6대 궁(宮)을 태조대왕이라 했는데, 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조대왕 때 고구려는 국세가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는 요동에 진출하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으며, 동쪽으로 옥저를 병합했고, 관제를 정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당시 궁은 왕실교체, 즉 왕실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교체되는 시기에 즉위하여 많은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시조처럼 태조대왕이라 추존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신라 김씨시조의 경우와 유사하여 흥미를 끈다.
    한편,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이주한 백제 왕실의 후예인 백제왕 인정(仁貞)이 백제의 태조를 도모왕(都慕王)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도모는 추모(鄒牟), 즉 주몽(朱蒙)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백제도 동명성왕에게 태조의 묘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그 뒤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진헌하여 당나라와 마찰을 빚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공멸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이 무리한 야욕을 드러내자 전쟁을 일으켜 끝내는 당군을 한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이 때문에 나당관계는 냉각기를 맞아 사신의 왕래가 크게 감소하였다. 신문왕은 재위 12년 동안 단 한 번 사신을 보냈고, 당은 책봉사를 포함하여 두 번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의 두 번째 사신은 692년(신문왕 12) 봄에 왔는데, 이 때 사신은 구두로 김춘추가 우리 문황제(文皇帝)와 같이 묘호를 태종이라 한 것은 매우 외람된 일이니 급히 고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신라는 선왕 춘추도 자못 현덕이 있고 김유신과 같은 양신을 얻어 삼한을 통일했으므로 그 공업이 크다며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표했다. 당나라는 이에 대해 그 뒤 아무 말이 없었다.
  1. 6. 고려시대의 왕호
    고려는 처음부터 중국과 같은 묘호를 사용하였다. 창업지주(創業之主)를 ‘태조’, 수성지군(守成之君)을 ‘종(宗)’으로 하였으니 이는 왕조의 자존의식과 권위를 충분히 발휘한 것이라 하겠다.
    왕이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朕)이라 했고, 왕명을 조(詔)·선지(宣旨), 왕위계승자는 태자라 칭하였다.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시호로서 대왕이라는 칭호도 사용하였다.
    왕건(王建)은 즉위 다음 해에 3대를 추증하여 증조고(曾祖考)를 시조원덕대왕(始祖元德大王), 할아버지를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 아버지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이라 한 바 있고, 그 후대 왕들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보이는 것처럼 시호를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또는 ‘혜종의공대왕(惠宗義恭大王)’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삼국시대 전기의 왕처럼 왕중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신민(臣民)이 일반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또는 시호로서 대왕이라 존칭한 것이다. 이 점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이 고려 전기에는 자주성이 강하여 태조 때에는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광종 때에는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 뒤에 ‘준풍(峻豊)’이라 건원하고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 그리고 왕을 ‘황제폐하(皇帝陛下)’라 칭하는 등 중국과 대등한 자주성을 표출하였다.
    인종 때에는 묘청(妙淸)·정지상(鄭知常) 등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금나라를 정벌하고 황제를 칭하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반대세력과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뒤이어 발생한 무신의 난으로 인해 무신들이 정권을 잡자 왕의 권위는 하락하게 되었다. 이후 몽고의 침입을 받아 30년 가까운 전쟁을 치른 끝에 무신정권은 몰락하고 개경환도가 이루어졌으나 고려의 왕은 몽고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274년(원종 15) 5월에는 태자 심(諶)주 02)과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공주(忽都魯揭里迷失公主)와의 사이에 혼인이 성립되어 두 왕실 사이에 이른바 장인과 사위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몽고의 간섭은 통상의 사대관계를 넘어서게 되었고 고려의 모든 정치가 몽고의 간섭과 절제를 받게 되었다.
    몽고의 간섭은 충렬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275년(충렬왕 1) 10월 몽고는 먼저 관제개혁을 강요하여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모든 관호를 제후(諸侯)의 용어로 고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종래 사용해 오던 조·선지·짐·사(赦)·주(奏)·폐하·태후·태자·절일(節日) 등의 용어를 교(敎)·왕지(王旨)·고(孤)·유(宥)·정(呈)·전하·대비·세자·생일로 개정하게 되었다. 묘호인 ‘종’도 모두 ‘왕’으로 고쳐 충렬왕·충선왕 등으로 격하한 것은 물론이다.
    심지어는 고종·원종으로 정했던 전전왕·전왕의 묘호를 뒤에 몽고의 압력으로 다시 충헌왕(忠憲王)·충경왕(忠敬王)으로 추시(追諡)하기도 하였다.
    이 때 대왕의 시호도 물론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충헌왕부터 충정왕까지 8대의 왕호에 ‘충(忠)’자가 붙은 것은 고려왕이 몽고황제의 한 제후로서, 또는 서랑(壻郎)으로서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한편 공민왕은 우왕 때 이인임(李仁任)이 집권하여 초기에 한동안 북원(北元)과의 관계가 호전되자 1377년(우왕 3) 2월 ‘효경대왕(孝敬大王)’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충자를 관(冠)하지 않은 것은 시대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라 하겠다.
    다음 해 6월부터 명나라와의 불편한 관계가 다소 풀리면서 실리외교라는 측면에서 같은 해 9월 명나라의 홍무(洪武)연호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관계는 좀처럼 해빙되지 못하다가 7년이 지난 138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우왕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전왕을 추시하여 공민왕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몽고간섭기 이전에 비록 오대·송·거란(요)·금에 저자세의 외교정책을 쓰면서 책봉을 받고 연호를 사용했지만, 강한 자주의식의 발현으로 중국고사에 따라 묘호를 정하고 짐·폐하·조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유교사관과 사대주의에 물든 사가(史家)들은 고려시대의 묘호를 왕으로, 짐을 여(予) 또는 고로, 조를 교로 개서하였다.
    이는 1395년(태조 4) 1월에 정도전 등이 편년체로 편찬한 『고려국사(高麗國史)』에서 비롯된다. 이 책은 그 뒤 여러 가지 모순이 지적되어 수 차례 개찬을 거듭한 끝에 1451년(문종 1) 8월 드디어 오늘날의 『고려사』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직서주의를 택하여 원종 이전은 『고려실록』의 원상을 회복했음에도 본기를 세가로 하고, 우왕·창왕을 반역전(叛逆傳)에 넣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1. 7. 조선시대의 왕호
    조선왕조는 고려 전기의 관례에 따라 말기까지 묘호와 시호를 사용했지만, 고려 후기의 몽고간섭기와 마찬가지로 짐·조·주·폐하·태자 등과 같은 자주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못하고 여(과인)·교·정·전하·세자 등의 용어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왕호 사용에 있어서 고려시대와는 몇 가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제2대 정종이 처음에 묘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한동안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만 사용하다가 1681년(숙종 7)에 가서야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종이 오랫동안 묘호를 받지 못한 것은 태종의 불만 때문이었다.
    1398년(태조 7)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노여움과 실의 끝에 세자를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소생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이방원(李芳遠)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적장(嫡長)을 세워야 한다고 사양하자, 결국 둘째 아들 이방과(李芳果)가 이 해 9월 부왕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이방원은 부득이 수긍은 하였지만 처음부터 불만이었던 것 같다.
    더욱이 1400년(정종 2) 정월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승리를 거두어 확고한 기반을 닦기는 했지만, 정종이 입적(立嫡)을 서두르지 않은 틈을 타서 이방간(李芳幹)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정종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하다.
    이방원은 결국 다음 달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그 뒤 9개월이나 지나서야 양위를 받았다. 여기에는 부왕의 작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는 이방원이 정종을 미워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된 듯하다.
    이방원은 이 해 11월 선위를 받아 태종으로 즉위하여 태조를 태상왕(太上王)으로 모심과 동시에 정종을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지극한 우애로써 대접한 것으로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으며, 내면적으로 계속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는 1419년(세종 1) 9월 정종이 죽었을 때 공정왕이라는 시호만 올렸을 뿐 묘호는 끝내 거부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것은 태종이 끝까지 정종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노산군·연산군·광해군처럼 군으로 호칭한 임금이 여럿 있는 것이다. 노산군(단종)은 정통 군주로서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자, 수양대군 일파의 갖은 협박과 공갈을 받아 2년 뒤 결국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공의온문태상왕(恭懿溫文太上王)’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6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사전에 모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 도중 살해됨으로써 정통 군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1698년(숙종 24) 복위되어 단종의 묘호를 추증받았다.
    다음으로 연산군·광해군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이며, 반정(反正)으로 축출되었다. 연산군은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성질이 난폭하여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거치며 많은 사류(士類)를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더욱이 갑자사화에서는 사류뿐만 아니라 모비(母妃) 윤씨의 사사사건(賜死事件)에 연루된 훈구대신과 그 계열의 많은 중진 관료를 참혹하게 죽였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무인 박원종(朴元宗), 문인 강희안(姜希顔) 등은 1506년(중종 1) 9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축출하고 이복동생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추대하였다. 연산군은 반정 직후에 강봉된 군호이다.
    그는 곧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 해 11월에 죽었다. 사후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장사지냈다. 연산군은 그 뒤 끝내 정통 군주의 자격을 회복하지 못했으므로 능묘는 물론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쇠진하고 후금(뒤의 청)이 흥기하고 있을 때 능란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국가호위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왕권 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북인의 전횡에 휘말려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참혹하게 죽였다.
    뿐만 아니라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장차 폐출하기까지 하려는 패륜행위를 자행하다가 서인의 쿠데타로 실각했으며 이어 인조가 즉위하였다.
    광해군 역시 연산군처럼 반정 후에 강봉된 군호이다. 그는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역시 왕자군의 예로써 장사지냈으나 폐출된 악군이라 하여 끝내 정통 군주의 자리는 회복하지 못하였다.
    셋째는 조자가 붙은 묘호를 가진 임금이 여럿 있는 점이다. 중국에도 창업주인 태조 외에 조자가 붙은 임금이 더러 있다. 원나라의 세조, 명나라의 성조(成祖), 청나라의 세조(世祖)·성조(聖祖) 등이 있지만 극히 드물다. 고려도 창업주인 태조에만 조자를 관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태조 외에 세조·선조(宣祖)·인조(仁祖)·영조(英祖)·정조(正祖)·순조(純祖) 등 무려 여섯 임금이나 조자가 붙은 묘호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처럼 큰 규모의 변란을 진압했거나 서정을 획기적으로 진흥하여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임금인 경우에 ‘조’자를 붙인 것 같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
    세조는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하고 이어 단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곧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큰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며, 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왕조를 견고하게 다짐으로써 세조라는 묘호를 얻은 것이다.
    선조와 인조는 두말할 것 없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공전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어렵게 사직을 수호하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명분이 좀 약하지만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당쟁을 약화시켰고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영종(英宗)으로 묘호를 정했다가, 1890년(고종 27)에 다시 영조로 추존되었다.
    정조는 영조보다 명분이 더 약한 것 같다. 즉위 전후에 벌어진 벽파의 책동을 제어하여 왕실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하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운(文運)을 크게 진작했으므로 영주로 꼽힐 만하다. 처음 정종이라는 묘호를 정했다가, 1899년 시호를 선황제(宣皇帝), 묘호를 정조로 추존하였다.
    순조는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평정한 공이 인정되어, 처음에는 순종(純宗)으로 묘호가 정해졌다가 1857년(철종 8) 8월 순조로 추존되고 1899년에 숙황제(肅皇帝)로 추증되었다. 이 밖에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추증왕호를 받은 왕자로 황제와 조자의 묘호를 받은 이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는 1899년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종(莊宗)으로 하였다가 다시 같은 해에 시호를 의황제(懿皇帝), 묘호를 장조(莊祖)로 추증하였다.
    순조의 효명세자(孝明世子)는 1834년(헌종 즉위년) 5월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익종(翼宗)으로 정했다가 1899년 다시 시호를 익황제(翼皇帝), 묘호를 문조(文祖)로 추증하였다.
    넷째는 대원군(大院君)의 호칭이다. 대원군은 방계 족친집에서 들어와 대통을 이은 임금의 사친(私親)에게 올린 존칭이다.
    역대왕조의 사례를 보면, 신라는 임금의 사친을 갈문왕(葛文王) 또는 대왕으로 추봉했고, 고려에서는 태조의 3대조를 각각 원덕대왕(元德大王)·경강대왕(景康大王)·위무대왕(威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성종은 사친 욱(旭)의 시호를 예성선경태왕(睿聖宣慶太王), 묘호를 대종(戴宗)으로, 현종은 사친 욱(郁)의 시호를 효목대왕(孝穆大王), 묘호를 안종(安宗)으로 추증하였다. 이후로는 방계에서 들어온 왕이 없다가 공양왕이 신종의 7대손으로서 대통을 계승하게 되자 4대를 추봉했으나 내용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조선왕조는 처음에 고려와 같이 4대조를 추증하여 목왕(穆王)·익왕(翼王)·도왕(度王)·환왕(桓王)이라 했다가 뒤에 각각 대왕이라 추존하고, 묘호를 목조·익조·도조·환조로 정했다.
    제9대 성종도 1471년(성종 2) 정월 생부인 세자 장(暲)을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했다가 1475년 2월에 다시 회간대왕(懷簡大王)으로 추시하고, 그 뒤 논란을 거듭한 끝에 그 해 12월 부묘(附廟)할 것을 결정하고 묘호를 덕종(德宗)이라 하였다.
    대원군이라는 호는 선조가 방계에서 대통을 계승하면서 사친 덕흥군(德興君)주 03)에게 과거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대왕의 시호를 버리고 대원군이라는 새로운 존호를 올림으로써 비로소 등장한다.
    다음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맏아들 능양군(綾陽君)이 즉위하자, 인조는 곧 생부를 대원군으로 추존했다가 1632년(인조 10) 5월 다시 개봉하여 시호를 효장대왕(孝章大王), 묘호를 원종(元宗)이라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대원군은 대왕보다 격이 떨어짐을 곧 알 수 있다. 앞서 선조가 굳이 선친에게 대원군을 추증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 다음이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주 04)이고, 마지막은 고종의 사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昰應)이다.
    그러나 역사상 대원군이라 하면 흥선대원군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대원군과는 달리 섭정으로서 막강한 정치적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성립될 당시 대원왕(大院王)의 존호를 받기도 하였다.
  1. 8. 대한제국과 황제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많은 이권이 열강에게 넘어가게 되자, 일반국민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민권의 확립을 위한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의 중심조직은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는 갑신정변 때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이 1895년 말 귀국하여 서구근대사상과 개혁사상을 가진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남궁억(南宮檍) 등과 함께 조직한 단체이다.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협회의 활동을 홍보하였다. 그들은 자주독립·자강혁신·자유민권 등 세 가지를 당면 목표로 내세워 활동을 전개하였다.
    자주독립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고, 자강혁신은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가지 내정을 개혁하자는 것이며, 자유민권은 서양의 근대 정치사상을 받아들여 국가의 자주독립과 부강의 기반은 국민의 권리 신장에 있다고 보고 인간의 기본권인 생존권과 재산권 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국민 참정권 운동을 전개하여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국민평등권, 국민주권론 등을 내세웠다. 독립협회의 활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1898년 10월 종로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이다.
    정부 고관들까지도 참석한 대규모의 집회에서 독립협회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채택하여 고종황제에게 건의, 그 시행을 약속받기까지 하는 성과를 올렸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하여 환궁을 요청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물 끓듯이 일어나자, 고종은 아관파천한 지 1년 만인 1897년 2월 드디어 경운궁(慶運宮)주 05)으로 돌아왔다.
    독립협회가 전개하고 있던 자주독립운동에 큰 자극을 받은 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대외에 선양하기 위하여 이 해 10월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갑오경장 때 대군주(大君主)라고 하였던 국왕의 칭호를 황제라 고쳤을 뿐만 아니라, 고려 후기 이전에 사용하던 선지·짐·사·주·폐하·태후·태자 등의 용어를 모두 회복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독립협회와 얽힌 이율배반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친러수구파는 독립협회의 과격한 정치운동을 못마땅하게 지켜 보다가, 1898년 12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다음 해 6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하여 황제의 전제권을 더욱 강화하는 복고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이 광무개혁이다. 이 개혁은 갑오경장과 을미개혁을 이은 세 번째의 근대적 개혁임에는 틀림없지만, 독립협회에서 주장한 입헌군주제 및 의회정치제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근대제국의 절대왕권체제를 도입한 것이었다.
    따라서 민권 신장의 조항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황제의 전제대권만 소상하게 밝히고 있어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임금의 권능과 그 상징성
  1. 1. 설화에 반영된 임금의 상징
    1. 1.1. 국조신화
      어느 나라 민족이나 다 신이(神異)한 개국설화를 가지고 있다. 시조를 인간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경이와 신비에 찬 존재로 부각시킨 것은 세계 모든 민족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국조신화의 대표적인 유형은 천강신화(天降神話)와 난생설화(卵生說話)이다. 우리 민족의 경우에도 단군·해모수(解慕漱) 설화는 천강신화이고, 주몽·박혁거세·탈해·수로설화 등은 난생설화이다.
      먼저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데, 단군왕검의 개국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단군은 하늘에서 태백산 밑으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연 환웅천왕의 아들이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와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여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 세상을 다스렸는데, 곰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보다 50년 뒤에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고, 다시 서울을 아사달(阿斯達)로 옮겨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러한 단군신화의 밑바닥에는 샤머니즘이 깊숙이 깔려 있다.
      단군의 할아버지는 하늘에 사는 천제인 환인이며, 따라서 그가 아버지 환웅천왕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천부인(天符印)은 천손으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부적이다.
      그런데 환인이라는 한자어는 원래 불교의 동방호법신(東方護法神)을 뜻하는 말이지만 우리말의 ‘하눌님’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환인은 하늘에 사는 광명신을 뜻하며, 태양숭배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곧 천상의 세계를 광명의 세계, 선신의 세계로 보는 샤머니즘의 우주관과 일치하고 있다.
      한편, 환웅천왕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와서 곡식·생명·질병 등을 주관하였다는 것은 무(巫)로서의 기능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의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군장 즉 정치적 통치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제정일치를 뜻한다. 이는 신라시대의 차차웅이 자충이라고도 하며 무당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제정일치시대의 제사장이자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주몽설화(또는 동명왕설화)는 중국의 『삼국지』·『후한서』 등을 비롯하여 우리의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이상국집』 등 여러 사서에 실려 있다. 수록된 설화의 공통적인 성격은 그가 천제의 아들이고, 알에서 태어났으며, 부여에서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설화의 구조적인 특징은 같으나 중국문헌이 동명을 부여설화, 주몽을 고구려설화로 나누어 보고 있는 데 반하여 우리 문헌은 한결같이 ‘동명왕 즉 주몽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명왕편」도 동명왕과 주몽왕이 동일인물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작성한 것이다. 「동명왕편」은 오언으로 이루어진 서사시로서, 영웅 동명왕의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히는 서장(序章), 동명왕의 출생으로부터 입국종말(立國終末)까지를 묘사한 본장, 그의 왕업을 계승한 유리왕의 즉위까지의 경로 및 작자의 소감을 부연한 종장 등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柳花)는 아버지인 하백(河伯)의 노여움을 사 우발수(優勃水) 기슭으로 귀양갔다가 부여왕 금와(金蛙)의 별실에 유폐되었다.
      거기에서 몸에 햇빛을 받아 큰 알을 낳으니 이 알에서 태어난 것이 주몽다. 주몽이 자라나 그 재능이 뛰어나매 부여 왕자들이 질투하여 죽이려고 하므로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새 나라를 건설하였다. 이가 동명왕이다.
      동명왕 다음에는 아들 유리가 등장한다. 유리는 부여에서 아비 없는 설움을 당하다가 고구려로 내려와 태자가 되고, 다음 해 주몽이 승천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의 건국기반을 다지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 건국설화의 결말은 위대한 승리자가 되어 수명을 온전히 누리며 온갖 영광을 차지하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서술한 시기는 12세기 말이다. 당시의 고려는 요·금 이래 이민족의 압력이 계속되고, 구귀족은 타도되었으나 초기무신들의 횡포한 정치가 암흑기를 이루어 국내 정세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규보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보고 동명왕본기에 실려 있는 설화를 삼복탐미한 끝에 동명왕의 본상을 영웅시로 재현함으로써, 자신이 설 곳을 민족에서 발견하고 민족의 권위를 통하여 민족의 전통과 유서(由緖)에 새로운 경지를 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지도(聖人之都)임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민족적 긍지와 저항정신을 잘 표현한 것이다.
      한편, 신라의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박혁거세와 김알지(金閼智)도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은 호랑이의 젖을 먹고 컸다고 한다. 또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그의 선대들이 백두산에서 내려왔으며, 삼한을 통일할 것을 점지받고 태어났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역시 「용비어천가」에서 천명을 받은 영웅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모두 신이한 존재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임금이 된 자들은 신성한 인물이고 그의 후손들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특별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1. 1.2. 왕즉불사상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4세기 후반이다. 우리나라에 수용된 불교의 특징은 북방불교로서 호국적 성격이 강한 점이다. 고구려·백제·신라에 전파된 불법은 모두 처음부터 국가 및 왕권과 강하게 결합하여, 국가불교로서의 체제를 갖추며 발전해 나갔다. ‘왕즉불(王卽佛)’이란 왕법과 불법이 일치한다는 호국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먼저 민간에 몰래 전파되면서 배타적인 원시신앙과 보수적인 귀족세력의 반발 때문에 100여 년간 박해를 받다가,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함으로써 공인되었다. 그 뒤 신라불교는 귀족불교 내지 왕실불교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왕즉불사상을 강하게 풍기는 왕실불교, 다시 말해서 국가불교로서의 획기적인 발전은 자장법사(慈藏法師)의 논법에 잘 나타나 있는데, 신라 호국의 영장(靈場)인 황룡사(皇龍寺)의 용을 호국룡으로 믿고 황룡사구층탑의 건축을 실현되게 하였다.
      또한 신라의 왕실을 석가의 출신 신분인 찰제리종(刹帝利種)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는 왕법과 불법을 일치시키려는 그의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중고시대의 여러 왕, 즉 법흥왕에서 진덕여왕까지를 불교왕명시대라고 부른다. 중고시대의 첫 임금인 법흥왕은 불법을 처음으로 일으킨 임금이라는 뜻으로 붙인 왕호이며, 법호(法號)를 법공(法空)이라 하였다.
      다음 왕인 진흥왕은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고, 또 이름을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라 하였는데 이는 사미(沙彌)를 뜻하는 말로, 음이 비슷한 다른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진지왕의 이름은 금륜(金輪) 혹은 사륜(舍輪)인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금륜·은륜·동륜·철륜 등의 네 바퀴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진평왕의 이름은 석가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白淨)이며, 왕비의 이름은 석가의 어머니 이름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따서 썼다.
      또, 선덕여왕의 왕호는 도리천(忉利天)을 주재하는 천자명(天子名)을 그대로 취했으며, 그 이름인 덕만(德曼)의 ‘만’자는 진덕여왕의 이름인 승만(勝曼)의 ‘만’과 같이 범어(梵語)로 여성을 의미한다. 승만은 불경에 나오는 승만부인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한편, 중고기 왕의 특수한 신분의 표시인 ‘진(眞)’자 역시 불경에서 나온 것으로, 법흥왕과 선덕여왕을 제외한 진흥왕·진지왕·진평왕·진덕여왕 등이 모두 진자가 붙은 왕호를 가진 것은 석가의 부모가 모두 진종(眞種)이어야 한다는 부모구진종(父母俱眞種)의 설화에서 채용한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왕실을 석가의 출신 신분인 찰제리종과 일치시킴으로써 국왕을 석가에 비겨 보려는 노력은 결국 석가의 권위를 빌려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었다고 한다. 경명왕 때 아찬(阿飡) 김률(金律)이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고려왕이 신에게 묻기를, 신라에 삼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른바 장육존상(丈六尊像)·9층탑(九層塔)·성대(聖帶)라 하는데 상과 탑은 남아 있는 줄 알지만 성대는 알 수 없으니 지금도 남아 있느냐고 물었으나 신은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듣고 군신에게 “성대는 어떠한 보물이냐?”고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황룡사에 90세가 넘은 중이 있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으니 보대(寶帶)는 진평왕이 펴시던 것인데, 대대로 전하여 지금 남고(南庫)에 보장(保藏)되어 있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창고를 열어 살펴보게 하였으나 볼 수 없었다. 다른 날 재계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옥(金玉)으로 장식되어 있고 길이가 매우 길어 보통사람은 띨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진평왕의 신장이 11척(尺)이나 되고 기골이 장대하여 내제석궁(內帝釋宮)의 돌계단을 밟아 한꺼번에 부러지게 할 정도였다고 한 것과 관련시킬 때, 옥대가 굉장히 길었다는 표현은 바로 왕의 비범한 성격과 신이의 자취를 부각시켜 고대적 왕권의 권위와 신비성을 나타내려고 한 의도로 보인다.
      또, 이러한 신라의 삼보가 불교왕명시대에 조성된 것은 불교의 호국적 신통력을 빌려 『삼국유사』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구려의 침범을 사전에 방지하는 위대한 힘을 부여하고자 한 것을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1. 2. 용비어천가의 상징성
    「용비어천가」는 조선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로써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글로 표기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서사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조선건국의 시조들을 찬양하고 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신화의 형태를 재현했으며, 이에 민간전승까지 받아들여서 신화적 배경을 확대하며 조상들이 영웅적인 투쟁을 거쳐 위대한 과업을 이룩하였음을 비쳐 오랜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해동육룡(海東六龍)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말은 곧 『주역』의 건괘(乾卦)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배경으로 삼아, 뜻을 마음대로 폈음과 함께 임금의 자리에 올랐음을 나타낸 것이다.
    고대의 건국서사시 이래로 영웅의 시련과 투쟁을 찬양하던 전승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태조의 할아버지 도조가 백룡의 부탁을 받고 백룡과 싸우던 흑룡을 한 살로 죽였다는 내용은, 신라 때의 거타지(居陁知)나 고려 건국시조 중 하나인 작제건(作帝建)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의 이야기를 재현한 것과 같다.
    그러나 구출하여 준 백룡의 딸을 데려와 아내로 삼았다는 말은 사라지고 자손이 잘 될 것이라는 예언이 등장한다. 특히 백룡의 부탁을 받고 예언을 들은 것이 모두 꿈속의 일이었다고 한 것은 영웅적 행위의 전승에 대한 설득력을 갖추면서 동시에 합리성을 잃지 않으려는 이중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태조가 남북의 외적과 싸워 나라를 구출한 활약상은 이 작품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이다. 태조는 고대의 영웅들처럼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이 뛰어난 무장이다.
    태조는 종횡무진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했기 때문에 새 왕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가문서사시(家門敍事詩)가 민족서사시로 확대되고 왕조서사시가 민중서사시화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결국 태조는 탁월한 무술을 지닌 용장이며, 정치적 역량도 뛰어나고 인간적으로도 우애·겸양의 덕을 구비한 인물로 그려졌다.
    이에 따라 4대조는 주인공인 영웅 태조의 고귀한 혈통을 입증해 주는 역할을 하고, 태종 또한 주인공 태조의 훌륭한 자손으로 표현된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 창업의 천명성과 인물의 영웅성을 찬양하고 선양하기 위해 동명왕설화를 비롯하여 『고려사』의 작제건설화 등에 보이는 여러 전승적 화소(話素)들과 그 밖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차용하였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의 시대는 신화시대가 아닌 역사시대였고, 더욱이 조선왕조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유교사상을 표방했기 때문에 상고대적(上古代的)인 초월적이고 비현실적인 신성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그 시대정신에 알맞은 신화를 창조해야 했다.
    따라서 「용비어천가」는 모든 신성을 오직 하늘[天]에 두어 신화시대의 신화에서 신이성을 제거하고 신성성만을 용납했으며, 그럼으로써 역사시대의 합리적인 신화를 창출해 낼 수 있었다.
  1. 3. 연군문학
    역사상 임금과 관련된 문학작품은 많다. 우선 고구려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黃鳥歌)」가 있고, 가야의 수로왕과 관련된 「구지가(龜旨歌)」가 있으며, 백제의 무왕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서동요(薯童謠)」가 있다.
    그리고 신라에는 효성왕과 관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충(信忠)의 「원가(怨歌)」가 있고, 경덕왕의 청에 따라 충담사(忠談師)가 지은 「안민가(安民歌)」가 있으며, 김후직(金后稷)의 「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와 설총(薛聰)이 신문왕을 깨우치기 위해 지은 「풍왕서(諷王書)」 화왕계(花王戒)가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와 「벌곡조(伐谷鳥)」, 「정과정곡(鄭瓜亭曲)」 등이 있다. 「정과정곡」은 정서(鄭敍)가 귀양을 가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정서는 인종과 동서간이었는데, 인종에 이어서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종의 아우를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참소를 입어 1151년(의종 5) 고향인 동래로 귀양가게 되었다.
    의종은 정서에게 오늘 일은 조정 의론에 핍박되었으나 가서 있으면 마땅히 소환하겠다고 하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이에 정서는 소환 명령을 기다리다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지었다. 그 내용은 임금이 자신을 다시 불러줄 것을 청하는 것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임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산에 사는 접동새와 비슷하며, 자신의 죄는 임금이 알고 있는 것과 같지 않고 참소 당한 바가 허망함을 남은 달과 새벽 별이 알 것이며, 넋이라도 한데 가고 싶다고 하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따지며, 임금이 자기를 버린 것이 원망스럽다, 과도 허물도 천만 없다, 그 모두가 참소하는 무리의 말일 따름이니 사라지고 싶다, 그리고 임이 자기를 벌써 잊었는가 하고 묻고는 마음을 돌려 뒷받침해 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군문학은 더욱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 정철(鄭澈)의 작품이 유명하다. 16세기 중반 사림파가 집권세력으로 등장하여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할 때 서인에 속해 있던 정철은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지만, 한편 반대파에 몰려 파직·유배를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특히 1585년(선조 18)에 배척을 받고 2,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임금을 사모하는 간절한 사연을 담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이것은 자신을 버림받은 미인으로 의화(擬化)하여 임금을 사모하는 간절한 심정을 그린 작품이다. 정철은 자신을 천상백옥경, 즉 하늘에서 버림받아 하계로 내려온 여인에다 비유하여 버림받은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절실하게 하소연하는 형태로 표현하였다.
    특히 「사미인곡」은 두 여자의 대화로 시작되는데, 여인네들이 흔히 하는 푸념을 살려가며 사랑과 이별의 미묘한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작자의 편에서 보면 물론 임금을 사모하는 내용이지만, 표현 자체는 일반백성의 순박한 마음을 근거로 하여 노래한 것이어서 더욱 문학적 가치가 있다.
    한편, 임금을 사모하며 충성심을 나타낸 많은 시조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단종의 폐위를 애달파 하며 지은 사육신 이개(李塏)와 성삼문(成三問)의 시조, 단종을 영월에 유배하는 일을 맡았던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의 작품 등이 있다. 또, 유희춘(柳希春)이 선조에게 올린 「헌근가(獻芹歌)」와 정철의 시조도 유명하다.
    한편, 임금과 관련된 소설도 있는데,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은 왕이 장희빈에게 빠져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멀리한 것이 잘못임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지었다고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임금의 생활양식
임금이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곳은 궁궐이다. 궁이란 천자나 제왕·왕족들이 살던 규모가 큰 건물이고, 궐은 본래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했던 망루를 지칭하는 것으로, 임금이 살고 있던 건축물이 병존하고 있어서 궁궐이라 한다. 궁궐에는 정사(政事)를 위한 정무공간과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공간, 그리고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공간이 있다.
궁중에 상주하는 사람은 임금의 가족, 궁녀, 내시 들이다. 왕의 가족은 왕의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으로, 즉 왕비·대비·왕대비·대왕대비 등 현재 및 과거의 왕비들과 왕의 자손 및 그 배우자들이다. 단, 배우자는 왕위를 계승한 맏아들과 맏손자의 배우자에 한한다.
임금의 일상생활은 공사(公私)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러나 만민의 위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하므로 임금의 생활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사치하고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일찍 일어나서 글을 읽고 조반 전에 왕대비나 대왕대비 등에게 문안사를 보내며 자신도 아랫사람들로부터 온 문안사를 접견한다. 수라를 들고 나서는 외전에 나가 정사를 보며, 며칠에 한 번씩 신하들과 한자리에서 경서의 강의도 받는다.
저녁에 자리에 들 때에는 늦도록 독서를 하여야 한다. 임금이 내전에 있을 때는 안사랑을 쓰고 그 곁에는 내관과 시녀상궁, 대전상궁들이 모시고 있다. 신하를 대할 때에는 바깥사랑으로 나간다. 이 때 절대 혼자 만나지 않으며 반드시 사관(史官)과 함께 만난다.
버선은 한 켤레씩 갈아 신었으나 사복으로 입는 두루마기는 몇 조각을 기워서 입을 정도로 검소하여 모범이 되어야 하였다. 또, 궁중내에 적전(籍田)을 두고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임금은 자연물에 있어서 해[太陽]로서, 그리고 용이라는 가공의 동물로 상징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임금의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가 장식되었다.
그림의 하늘에 있는 붉은 해와 흰 달은 각각 왕과 왕비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산봉우리로 표현된 오봉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성스럽다는 곤륜산(崑崙山)으로, 역시 왕을 상징한다.
그리고 해·달·산·솔·물 등은 천계·지계·생물계의 영구한 생명력의 표상으로, 여러 신의 보호를 받아 자손만대까지 오래도록 번창하라는 국가관의 투영이며 왕실의 지고한 권위를 나타낸 것이다. 또, 궁궐에는 왕을 뜻하는 봉(鳳)과 왕비를 뜻하는 황(凰)을 그린 「봉황도」도 장식되었다.
한편, 임금은 일반신하들과는 복장을 달리하였다. 고구려의 왕복은 『당서(唐書)』 동이전에 따르면 “왕복은 오채복(五采服)이며 그 관은 금테를 두른 백라관(白羅冠)이고, 여기에 금테로 장식한 가죽띠를 띠었다.”고 하고,
백제의 왕복은 “대수자포(大수紫袍)에 청금고(靑錦袴)를 착용하고 소피대(素皮帶)를 띠었으며, 오혁리(烏革履)를 신었고 금위(金蘤)를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썼다.”고 한다. 신라는 문헌기록은 없으나 왕릉의 발굴에서 나온 유물을 볼 때 대단히 화려했던 것 같다.
고려의 왕복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일상복으로는 오사고모(烏紗高帽)에 착수상포(窄袖緗袍)를 입고 금벽(金碧)으로 간수(間繡)한 자라늑건(紫羅勒巾)을 띠었다.
나라의 관원과 사민(士民)이 모였을 때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었다.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을 쓰고 규(圭)를 들었다. 중국사신이 오면 자라공복(紫羅公服)에 옥대를 띠고 상홀(象笏)을 들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복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어서 조근봉사지복(朝覲奉祀之服)인 면복(冕服)과 수배신조현지복(受陪臣朝見之服)인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 그리고 일상복인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가 있으며, 국난을 당하여서는 전립(戰笠)에 융복(戎服)을 입기도 하였다.
특히, 임금은 자신을 상징하는 관인인 용 모양의 옥새를 사용하였다. 이 옥새를 보관하는 함을 뒤웅이라고 한다. 왕위를 계승할 때에는 옥새를 인수받음으로써 왕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임금의 정치적 권한과 책임
삼국시대의 왕은 동방전제군주의 기본적인 특징을 유지하면서 절대권을 행사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는 한편 견제와 제약이 필연적으로 뒤따랐으며,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임금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왕의 교체 양상을 살펴보면 천재천변이 매우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이는 고대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국인에 의하여 강제로 폐위되거나 핍박으로 자살한 임금도 있다. 재위 중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었거나 포악한 정치로 사람을 많이 죽인 임금이 그 예이다.
폭군 내지 악군이 이에 속하며, 영주나 성군은 그 반대개념이다. 영주나 성군은 일반적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국력을 크게 신장하고, 백성을 아끼고 돌보며, 국운을 크게 일으킨 임금을 가리킨다.
  1. 1. 고구려
    고구려의 폭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본왕은 그 사람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여 국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왕이 날로 포학을 더하여 매양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에는 베개로 삼아 혹 움직이든지 하면 용서하지 아니하고,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쏘았다. 그리하여 시위하던 두로(杜魯)가 참다못해 왕을 시해하였다.
    또, 차대왕은 위인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하여 전왕의 충신 고복장(高福章)과 태조왕의 원자 막근(莫勤)을 죽였다. 이에 그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뒤에 명림답부(明臨答夫)는 백성이 왕의 포학을 견디지 못함을 보고 왕을 시해하였다.
    봉상왕은 숙부 달가(達賈)가 큰 공업을 세워 백성들의 존경을 받자 그를 의심하여 죽이고, 아우 돌고(咄固)도 딴마음이 있다 하여 죽였다.
    한편, 사치를 좋아하여 궁실을 증축하면서 15세 이상의 남녀를 역부(役夫)로 징발하니 백성들의 괴로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에 창조리(倉助利)가 공사의 중지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폐위되어 자살하였다.
    한편, 고구려시대 영주로는 태조왕·소수림왕·광개토왕·영양왕 등이 있다. 먼저 태조왕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 94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국세를 크게 일으켜, 서북쪽으로 요동에 진출하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으며, 동남쪽으로는 동예·동옥저를 병합하였다. 또한 관제를 정하여 고대국가로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어질고 현명하여 내치에 힘쓰며 백성을 잘 보살폈다.
    특히,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조에 “국인이 사모하여 따르고, 용감하고 장대해짐에 미쳐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고 한 것은 그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이 존경하여 따랐으며, 국력을 신장하여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또, 왕이 꿈을 꾸고 이를 고복장이 해몽할 때 “지금 대왕께서는 나라를 내 집과 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내 아들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조그만 변리가 있다 할지라도 무엇을 걱정하리요.”라고 대답한 것에서도 태조왕의 인자한 정치를 엿볼 수 있다.
    소수림왕은 전왕 고국원왕이 백제의 침공을 받아 전사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몸이 장대하고 웅략이 있었으며, 고구려인의 강인한 기질을 잘 활용하여 정열적으로 국력회복과 왕권신장에 힘써 국가를 재건하였다.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하여 자제를 교육했으며, 이듬 해에는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웅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임금으로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을 꼽을 수 있다. 광개토왕은 과감한 정복사업을 벌여 고구려의 영토를 광대하게 확장함으로써 다음대의 장수왕이 고구려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수왕은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북위와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남조의 동진·송·남제에도 계속 사신을 보내 대립된 두 세력을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펴나감으로써 요동·요서방면의 안정을 꾀했다. 이어 남하정책을 써서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쪽의 백제와 신라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특히 475년 9월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목베었다. 그리하여 장수왕 말년에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국가체제가 완비되어 중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마지막의 영주로는 영양왕을 들 수 있다. 영양왕 전대의 고구려에서는 왕위계승 분쟁이 일어나 왕권이 동요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연합세력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영양왕은 제세안민(濟世安民)을 임무로 삼아 국력을 회복시켜 나갔다.
    이렇게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중국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수나라 양제(煬帝)가 침공해 왔을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의 활약에 힘입어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양왕은 600년(영양왕 11)에는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신집(新集)』을 편찬하게 하는 등 영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 2. 백제
    백제의 영주로는 고이왕과 근초고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이왕은 영토를 확장하고 외부세력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민생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특히 260년(고이왕 27) 정월에는 6좌평(佐平)과 16관등을 제정하고, 관리의 복색을 정했으며, 법을 제정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등 국가체제를 완비하였다.
    근초고왕은 국가 발전 단계상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체모가 기위(奇偉)하고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고 한 것처럼 위대한 정복군주였다.
    그의 치하에서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충청·전라도의 전부와 낙동강 중류지역, 그리고 강원·황해도 일부까지의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69년(근초고왕 24)경 남쪽으로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멸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진출하고, 마한을 정복하기 직전 동쪽으로 낙동강 유역에 진출하여 가야의 여러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북쪽으로는 옛 대방군 땅으로 진출하여 371년 겨울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크게 위용을 떨쳤다.
    이처럼 국력이 신장됨에 따라 서쪽으로는 중국 동진(東晋)과 외교를 맺고, 남쪽으로는 왜와 통하여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이에 더하여 『서기(書記)』를 편찬하고, 일본에 학자를 파견하여 학문과 문화를 전수하는 등 백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주로 일컬어질 만한 치적을 남겼다.
    한편, 백제에서 악군 내지 폭군으로서 대표적인 임금은 의자왕을 들 수 있다. 의자왕은 즉위 초에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와 벌인 전투에서의 잇따른 승리에 대한 자만심과 내부적인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가혹한 탄압정치를 행하고, 점차 환락에 빠져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 사치로운 생활에 빠졌다.
    이에 대하여 성충(成忠)이 극간을 하자 그를 옥에 가두는 등 직신(直臣)을 버리고 요부의 말을 믿으며 전형적인 폭군의 행위를 일삼다가 결국 백제는 멸망당한 후 당나라로 잡혀갔다.
  1. 3. 신라
    신라시대의 성군으로는 내물마립간·진흥왕·태종무열왕을 꼽을 수 있고, 폭군은 진지왕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는 내물의 왕호를 이사금이라 본 데 대하여 『삼국유사』는 마립간이라 보고 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내물은 미추이사금의 김씨왕계가 세습으로 가는 김씨왕조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치하에서 신라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고 정치와 외교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점에 주목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고대국가의 시작이라고까지 보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가 마립간의 방언왕호를 내물에서 비롯한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군장의 권위와 고대국가의 집권체제적 요소를 더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내물 때 마립간시대가 시작되어 왕권이 강화되고 정치적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에 신라 사신 위두(衛頭)가 전진왕 부견과 교환한 말 가운데 잘 나타난다.
    즉, 부견이 위두에게 “경(卿)의 말에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묻자, 위두가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 변화와 명호 변혁과 동일한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한 것을 보아도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내물마립간시대에 신라는 국력이 괄목할 만큼 신장하여 고구려 사신을 따라 전진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국제적 위치를 크게 부각시켰다.
    말갈과 왜의 빈번한 침범 때문에 곤경에 부닥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 때마다 이를 잘 물리쳤으며, 또 광개토왕비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고구려의 원조를 받아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후환을 없애기도 하였다.
    한편, 내물마립간은 『삼국유사』에 눌지마립간이 술회한 말 중에 “옛적에 나의 성고(聖考)주 06)는 정성으로 민사(民事)에 힘썼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 많은 선정을 펴 선군의 업적을 남겼다.
    진흥왕은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지만 섭정을 맡은 태후 법흥왕비가 이사부(異斯夫)로 병부령(兵部令)을 삼고 중외의 병마권을 맡김으로써 보정(輔政)이 잘 이루어져, 정국의 안정과 왕권의 강화를 이룩하고 『국사』를 편찬하는 등 국력을 신장시켰다.
    또한 법흥왕 때 공인한 불교를 전제왕권의 강화와 국력 신장에 효율적으로 결부시켜 호국불교로 정착되게 하였으며, 자장에 의하여 다져진 찰제리종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통하여 신성왕권의 권위를 제고함으로써 불교왕명시대를 확실히 굳혔다.
    뿐만 아니라 553년(진흥왕 14)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 세 사람으로 하여금 가야인 우륵(于勒)에게 금법(琴法)·가법(歌法)·무법(舞法)을 배우게 함으로써 가야금을 후세에 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진흥왕의 업적으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위대한 정복군주로서 신라의 국가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즉 551년 신라는 그 동안 닦은 국력을 기반으로 하여 본격적인 북진정책을 쓰는 한편,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탈취했다. 이 때 한강상류역의 10군은 신라가 점유하고 하류역의 6군은 백제가 차지하였다.
    신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중국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2년 뒤 다시 백제를 기습공격하여 한강 유역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이로써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확보하고, 동북쪽으로 멀리 오늘날의 함경남도까지 진출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
    백제 성왕은 이에 격분하여 552년 7월 대가야와 합세하여 신라를 직접 공격해 왔으나 도리어 관산성(管山城)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는 뒤이어 그 여세를 몰아 562년 9월 대가야를 병합하였다.
    이와 같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진흥왕은 기념으로 전국을 순수하여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한편 화랑제도를 정비하여 임금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견고한 조직체로 발전시켜 막강한 군사력을 배양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태종무열왕은 삼국통일을 수행한 뛰어난 영주이다. 선덕여왕 말년에 비담(毗曇)의 난이 일어나자 김유신(金庾信)과 협력하여 이를 진압하고 정치·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651년(진덕여왕 5) 2월에는 정치개혁을 주동하여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관료적 성격의 관부를 설치하였다. 곧이어 진덕여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신라상대는 막을 내리고 전제왕권적인 중대가 시작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정리하여 율령을 보강하였다. 이처럼 전제왕권을 강화한 다음에는 삼국통일을 위한 백제·고구려 병합전쟁을 벌였다. 이를 위해 외교를 펼쳐 당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하고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다.
    뒤를 이어 즉위한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세력을 쫓아냄으로써 반도통일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림으로써 태종무열왕계를 확립했다.
    『삼국사기』에서 태종무열왕은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 제세(濟世)의 뜻이 있었다.”고 하고, 또 문무왕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한 것처럼 두 왕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영주로서 추앙받고 있다.
    한편,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으로는 진지왕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정사가 어지럽고 주색에 빠져 음란하여 나라사람들이 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도한 짓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화녀와 비형랑설화」에 미루어 추측할 때 여염집의 예쁜 여자까지도 간음하려고 한 것을 보면 왕은 주색에 빠져 음란한 짓을 많이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 왕위에서 쫓겨난 듯하다.
  1. 4. 고려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유학의 보급과 더불어 전제군주가 곧 악군 내지 폭군으로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예는 전대에 이미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임금이 태봉의 궁예(弓裔)이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의 사서에서는 궁예를 우리 역사상 대표적인 폭군으로서 마치 정신광란자인 양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너무나 강력한 전제정치를 행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고려왕조가 세워진 뒤 왕조 성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후대의 사가들이 유교적인 입장에서 사실보다 과장한 면도 있지 않을까 한다.
    고려시대에 있어 서로 연관이 있는 선군과 악군의 대표적인 예는 태조와 광종이다. 이들에 대한 평은 최승로(崔承老)가 982년(성종 1) 6월에 성종에게 올린 시무책(時務策)의 5조정적평(五朝政績評)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최승로는 태조를 유교를 숭상한 비전제적인 선군으로 평하고 광종은 전제군주인 악군으로 평하면서, 성종에게 태조의 정치사상을 체득하여 선군의 자질을 갖추어 유교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를 실현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즉, 최승로는 태조의 군주로서의 위대성을 예찬하면서 군주는 마땅히 신하들을 예로써 잘 접대하여 공경하고, 현인을 등용하여 사악한 자를 주저없이 제거하고 인덕과 예양(禮讓)을 겸비하여 넓은 포용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태조는 바로 이에 부합되는 선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하였다.
    이처럼 선군의 모범을 태조의 치적에서 찾으려고 한 것과는 반대로, 광종의 치세를 암흑과 공포에 싸인 시대라고 혹평하고 성종에게 광종과 같은 폭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절실하게 호소하고 있다.
    고려시대 성군으로서 유명한 임금은 성종이다. 성종은 태조가 창업한 고려를 공고하게 다진 수성군주로 유명하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28조를 받아들여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중국 당·송제에 따라 중앙 및 지방관제를 크게 정비하는 한편, 군사·교육·경제 등 제반 제도를 아울러 개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권농, 수령지침서의 공포, 수령의 청렴, 백성의 구휼에 남다른 배려를 기울여 선정을 베품으로써 최승로가 간절히 권유한 태조의 이상적인 선정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악군으로 유명한 임금은 충혜왕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유교적인 입장에서 충혜왕을 전제주의적 악군의 표본으로 보았다. 『고려사』에서는 악군으로서의 충혜왕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총평하고 있다.
    “왕의 성품이 유협(游俠)하여 주색을 좋아하고 놀이와 사냥에 빠지며 황음하기 도(度)가 없어 사람들의 처첩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끌어들여 후궁이 거의 100여 인이나 되었다.
    재리에는 아주 적은 것도 분석하여 항상 경영하기를 일삼으니, 군소(群少)들이 다투어 계획을 올려 사람의 토전과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속하게 하고 양마로 내구(內廄)를 채웠으며, 포목을 회회가(回回家)에게 주어 그 이익을 취하여 소를 잡아 날마다 고기 15근을 바치게 하였다.
    신궁의 역에는 깃대를 벌여 세우며 북을 설치하여 놓고 몸소 담에 올라 독려하였다. 궁전이 이룩되매 칠을 제도에서 징수하고, 단확(丹艧)을 운반하되 기한이 뒤진 자에게는 포목으로 수배를 징수하니, 관리는 이로 인하여 간사하게 되고 백성은 근심하고 원망하였다. 군소는 뜻을 얻고 충직은 배척되어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죄받을까 두려워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1. 5. 조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는 달리 유불 교체라는 정치적·사상적 변혁기에 처하여 유학이 착실히 정착되고 토착화되는 시대였던만큼, 영주(선군)와 악군(폭군)의 성격에 있어 전 시대와는 많이 다른 점이 있다.
    유교적 정치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3권, 즉 군권(君權)·신권(臣權)·민권(民權)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 3권이 조화를 잘 이루면 정치의 안정을 찾게 되지만, 조화가 깨지면 큰 옥사가 일어나고 반란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정치적 격동기에 나온 악군(폭군)은 반정으로 축출된 임금으로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들 수 있고, 전제군주의 대표적인 존재는 태종과 세조이며, 영주(선군)로는 세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태종은 신왕조의 기반을 다지며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유불 교체를 이룩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기는 했지만, 전제군주적 성격이 강하여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옥, 심온(沈溫)의 옥 등 많은 옥사를 일으킨 바 있다.
    한편, 세조는 왕위에 야심을 품고 단종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황보 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사육신사건 등으로 많은 신료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창업주임을 표방하며 전제정치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이 두 임금은 전제군주라고는 할 수 있어도 악군이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한편,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악군 내지 폭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글 창제, 과학기술 육성, 영토 확장 등을 통해 민족문화의 창제·발달에 노력한 세종은 신왕조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여러 가지 업적과 철저한 애민사상으로 보아 우리 역사상 대표적인 영주 또는 성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탕평책을 실시하고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예부흥을 이룩한 정조 역시 대표적인 영주라고 하겠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金春秋의 아버지 金龍春
주02
뒤에 충렬왕
주03
중종의 일곱째 아들
주04
思悼世子의 손
주05
지금의 덕수궁
주06
내물마립간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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