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송하독서도 / 이명기
송하독서도 / 이명기
한문학
개념
심신을 수양하고 교양을 넓히기 위하여 책을 읽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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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독서는 심신을 수양하고 교양을 넓히기 위하여 책을 읽는 행위이다. 우리나라에서 독서문화가 꽃핀 것은 성리학이 들어온 후이다. 박지원은 “독서를 하면 사(士)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이다.”라고 하였다. 사대부들은 평소 유가경전과 시문, 사서(史書) 등을 읽으며 교양을 쌓다가, 기회가 닿으면 나아가 정치활동을 하였다. 조선 시대는 중국에서 많은 서적이 수입되고, 국가적 편찬사업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또한 집현전, 홍문관, 규장각 같은 도서관 시설을 설치하여 관료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의
심신을 수양하고 교양을 넓히기 위하여 책을 읽는 행위.
한국의 독서문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찍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였다. 집을 나가서는 천하의 뜻 있는 벗들과 사귀고, 집에 들어와서는 옛 성현들의 책을 읽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신라시대에 관리를 등용할 때에는 그 사람의 독서 범위와 수준을 헤아려 인재를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독서를 권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태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을 두어 경학(經學) · 문학 방면의 책을 강독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미 우수한 종이를 만들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드는 등의 인쇄술이 발달하여 많은 책들을 간행하였다. 성종 때는 수서원(修書院)을 창설하고 역사책을 등사하고 소장하게 하여 열람하도록 하였다. 개성에는 비서각(祕書閣)이라는 일종의 왕실도서관을 두어 수만 권의 책을 수집하고 보관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까지의 독서는 아직 귀족 · 관료 · 승려 등의 당시의 지배계층에 한정된 것이었다. 일반 사람들에까지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독서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성리학이 들어온 뒤이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 계층이 역사담당계층으로 성장해 간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르러서였다. 이 사대부들은 박지원(朴趾源)이 “독서를 하면 사(士)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이다.”라 지적한 바와 같이, 평소에는 유가 경전과 시문 · 사서(史書) 등을 읽으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기회가 닿으면 정치일선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이들 선비계층은 주업이 독서였고, 독서를 통해 그들의 덕행과 학식을 쌓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서문화는 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해서 우리 선인들이 읽던 책들은 유가서가 대종을 이룰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독서토론과 연구발표도 자연히 유가적 교육기관인 서당 · 서원 · 향교 · 성균관 등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조는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하고 역대의 임금들이 학문을 장려하였으므로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적이 수입되고, 국가적인 도서편찬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다. 민간에서도 수많은 문집들과 사서들이 간행되었다. 또한, 집현전 · 홍문관 · 규장각 같은 일종의 도서관시설이 설치되어 많은 문헌들을 수집, 정리, 보관하여 당시 관료지식인들이 열람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독서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조선 전기 사대부의 독서

고려 말에 등장해서 조선 초기에는 완전히 정치담당계층으로 성장한 양반사대부들은 대부분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양반사대부들은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독서를 통한 유가교양을 쌓으면서 관직으로 나갈 것을 꿈꾸었다. 그래서 양반사대부들은 유가의 교육목표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해서 먼저 『천자문』을 공부하였다. 그 다음에 유가에서 정한 독서 순서에 따라 『소학』을 비롯한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의 사서와 『시경』 · 『서경』 · 『주역』 · 『예기』 · 『춘추』의 오경, 『이정전서(二程全書)』 · 『주자대전』 · 『성리대전』 같은 성리학 서적을 공부하였고, 『자치통감』과 역대의 정사(正史) 및 우리나라에 관련된 역사서들을 읽었다.

양반사대부들 가운데에 관료 사장파(官僚詞章派) 지식인들은 젊을 때에는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공부에 몰두한다. 그리고 관계(官界)에 진출해서 실무를 맡게 되면 외교와 경국(經國)에 필요한 책들을 읽게 된다. 그래서 관료사장파 지식인들의 독서목적은 입신양명과 국가적 이익추구라는 실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독서가 모두 그러한 목적을 띤 것은 아니었다. 인재양성과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기능을 지니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례로서 우리는 세종 때의 사가독서(賜暇讀書)제를 들 수 있다. 세종 때에 행해지던 사가독서제는 인재를 기르고 문풍(文風)을 떨쳐 일으킬 목적으로 생겼다. 양반관료지식인 가운데에서 총명하고 젊은 문신들을 뽑아 여가를 주고, 국비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이다.

문신으로 하여금 서적을 열람하도록 해서 제왕의 고문에 응하게 하는 제도는 중국에도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총명하고 젊은 인재를 뽑아 그들에게 여가를 주고 글을 읽게 하여 뒷날에 크게 쓸 바탕을 갖추게 하는 제도는 세종 때에 처음으로 시행된 것이다. 사가독서제는 처음에는 자유로이 집에서 독서하는 시간을 가지거나 조용한 산사에 올라가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겼다. 성종 때에 이르러 도성 밖의 한가한 곳에 상설국가기구를 세워 유신 · 문관들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독서당(讀書堂)이다. 이 때에 이르러 이 사가독서제도는 크나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

성종 때에 용산 폐사(廢寺)에 독서당을 설치한 뒤로는 독서장소가 고정되었다. 이에 따라 독서저작(讀書著作)의 규례도 확립하게 되었다. 그 뒤에 독서당은 정업원(淨業院) · 두모포(豆毛浦) · 한강별영(漢江別營) 등지로 장소가 바뀌었다. 이 가운데에 특히 두모포, 즉 동호(東湖)의 독서당이 유명하였다. 독서당을 호당(湖堂)이라 칭한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양반사대부들 가운데에 사림 도학파 지식인들은 학문을 할 때에는 도에 뜻을 두고, 인격을 수양할 때에는 유가의 성인을 본받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독서를 할 때에도 성현의 뜻을 헤아리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성현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자연과 사물을 이해하고 사회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판단하려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李滉)은 “독서의 요체는 성현의 언행을 마음에 본받아서 조용히 찾고 가만히 익힌 뒤에라야, 비로소 학문을 진전시키는 공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바쁘게 넘어가고 예사로 외기만 할 뿐이라면, 이것은 장구(章句)를 들은 대로 말하는 나쁜 버릇에 불과하다. 비록 천 편을 다 외고 머리가 희도록 경(經)을 이야기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경전을 익숙하게 읽어 몸에 배도록 해야 하는데,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버리게 되어 마음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황은 독서의 방법으로 책을 익숙하도록 읽는 방법을 권하였다. 그래야만 마음에 남는 것이 있으며 흐뭇한 맛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를 돌아보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주자전서』를 들었다. 이황은 자기의 독서법을 따라서 스스로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고 글귀를 자세히 알았기에, 강론할 때에는 정확하게 이 책에 꼭꼭 들어맞아 마치 자기의 말을 외는 듯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서 이황은 주자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황과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를 빛낸 이이(李珥)는 도(道)에 들어가는 데는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없다.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데는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독서라고 하였다. 이것은 성현의 마음 쓴 자취와 선악의 본받을 만한 것과 경계할 만한 것이 모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무릇 독서를 하는 자는 반드시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무릎을 꿇고 바르게 앉아 삼가 공경하는 자세로 책을 대해야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극진히 하여 생각을 가려 정밀히 하며 숙독하고, 깊이 머금어 그 의미를 풀어내어 구절마다 반드시 그 실천할 방법을 구해야 된다고 하였다. 만일, 입으로만 읽고 마음으로 체득하지 못하고 몸으로 행하지도 못한다면 글은 저대로 글일 뿐이요, 또한 나는 나대로 나일 뿐으로 아무런 영향이나 이익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독서와 실천의 변증법적 통합을 강조하였다.

이이는 배우는 사람은 항상 마음을 잘 보존하여 외물이 이기지 못하게 해야 하며, 이치를 궁리하여 선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할 도가 앞에 있어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독서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자상히 일러주고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소학』을 읽어 부모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웃어른에게 순종해야 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하는 도리를 하나하나 자세히 음미하고 이것을 힘써 행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대학』을 읽어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하나하나 참으로 알아내어 이를 실천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논어』를 읽어서 인(仁)을 구한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학문의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를 하나하나 자세히 생각하여 깊이 깨달아야 한다.

다음에는 『맹자』를 읽어서 의리를 맑게 분별한다. 그리고 인욕(人慾)을 막는다.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는 설을 하나하나 밝게 살펴서 이를 넓혀 가득히 채워서 완전하게 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중용』을 읽어서 성정의 덕과 미루어 헤아리는 공력과 위육(位育)의 묘를 하나하나 음미하여 그 뜻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시경』을 읽어서 성정의 그릇됨과 올바름과 선악을 가려 표창하고 경계함을 하나하나 깊이 생각하여 감동하고 분발함으로써 이를 징계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예경』을 읽어서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에 하나하나 그 이치를 깊이 생각하여 서는 바가 있어야 한다. 다음에는 『서경』을 읽어서 요 · 순 임금과 우왕 · 탕왕 · 문왕 · 무왕이 천하를 다스린 대경륜과 큰 법에 하나하나 요령을 얻고 그 근본을 소급해서 구할 것이다. 다음에는 『주역』을 읽어서 길흉 · 존망 · 진퇴 · 성쇠의 기미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음미하여 연구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춘추』를 읽어서 성인이 착한 것은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벌하여 어떤 이는 억누르고 어떤 이는 드높여 준 은근한 말과 심오한 뜻을 하나하나 정밀히 연구하여 간절히 깨달아야 한다.

이상과 같이 오서(五書)와 오경을 돌려가면서 널리 읽음으로써 사리를 깨달으면 의리가 나날이 밝아질 것이요, 남송 때의 선현들이 지은 『근사록(近思錄)』 · 『가례』 · 『심경(心經)』 · 『이정전서』 · 『주자대전』 · 『주자어류(朱子語類)』와 같은 성리학 관계서적들을 틈틈이 정독하여 의리가 항상 내 마음을 적시고 끊임없이 주입되도록 한다. 남은 힘으로는 역사를 읽어 고금의 역사적 사건의 변천을 통달하여 식견을 기를 것이요, 잠시라도 이단이나 잡되고 옳지 못한 서적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이는 이황과 독서의 방법이 같다. 독서는 책 한 권을 선택하면 숙독하여 뜻을 모두 알아 통달하여 의심이 없게 한다. 그 뒤에 다른 책으로 바꿔 읽을 것이요, 다독에만 힘을 써서 이것저것 바삐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정독과 숙독의 독서법을 권하고 있다.

도학주의형의 독서관과 입신양명형의 독서관이 섞여 있던 조선 전기의 독서에 있어 가장 강조된 책은 『소학』이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성리학의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학』은 군현마다 상설되어 있는 향교나 서울의 성균관 같은 정부교육기관에서 필수적인 교과서로 쓰여졌다. 『소학』은 이와 같이 정부교육기관에서만 강조된 것이 아니고, 사설교육기관에서도 양반사대부들에 의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교과목이 되었다.

『소학』이 공립 및 사립의 교육기관에서 함께 필수교과목이 된 것은 『소학』의 교육을 통해 백성들을 성리학적 이념으로 교화시킴으로써 당시의 봉건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주자의 『소학』은 12세기 지주전호제(地主田戶制)를 기축으로 한 남송(南宋)의 사대부사회에 적합한 교과서로 편찬된 것이었다. 조선 양반지배층도 주자학사상에 입각해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소학』을 통한 사회교화를 구상하고 실천해 갔던 것이다.

『소학』은 경신(敬身)이라고 하는 정신과 행위의 함양을 통해서 인격의 완성자인 성인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 수신을 위한 책이다. 그런데 『소학』에서는 그러한 인격의 완성자인 성인군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우선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어버이와 웃어른을 받들고 공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 행동규범으로는 상하의 차서(次序) 질서를 강조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주어진다. 이와 같이 『소학』은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무한정한 헌신을 요구하는 윤리적인 지침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봉건지배층들에 의해 사회교화의 필수적인 교과서로 채택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당시의 양반지배층들은 『소학』 교육을 통해서 당시 집권체제의 강화와 봉건신분제의 정착하고 봉건적인 생산관계인 지주전호제의 확립을 이룩함으로써 조선봉건사회체제를 옹호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 전기의 독서에서 『소학』이 강조된 이유이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독서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조선조 주자학자들의 보편주의적인 학문경향과는 대비되는 실천적 학문을 추구하였다. 그들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자세는 기존의 양반사대부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독서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시대에 와서 독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제기된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당시까지 양반사대부와 그 자제들의 공부하는 방향이 과거급제를 목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사회나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시와 부(賦) 위주의 사장지학(詞章之學)으로 흘러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조선조 성리학자들이 그들의 관념적 사상체계인 주자학에 너무 집착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상과 학문들에 대해서는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독서범위가 좁아지게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하듯 현실적 적합성을 잃어버리고 실속은 없고 범위마저 좁아진 독서 경향에 대해서 실학자들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박지원은 “요즈음 부지런히 독서한다는 사람들은 거친 안목으로 내용 없는 글들을 뒤적인다. 이것은 이른바 술찌꺼기를 먹고 취하려는 자들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라고 개탄하였다.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도 글의 뜻과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바로 과거공부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담성명(高談性命)하면서 이기(理氣)만 따지고 앉아 있는 당시의 성리학은 참된 학문을 해치는 것이라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오학론(五學論)」에서 온 세상을 거느리고 온 천하를 몰아서 광대와 연극 놀음을 하는 것이 과거(科擧)의 학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리공담에 빠져 조그만 문제를 잡고 서로 싸우기만 하는 성리학을 비판하였다. 실학자들은 선비가 독서를 해서 이론을 탐구한 결과가 자기의 입신출세나 명예 같은 자기욕망의 충족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혜택이 사해에 미치고 그 공이 만세에 드리워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박지원은 독서는 문술(文術)을 풍부하게 하거나 명예를 날리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실용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독서를 하면서도 실용할 줄을 모르면 참된 강학이 아니며, 강학에서 귀하게 여기는 점은 바로 이 실용에 있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경전에 대한 공부를 하여 밑바탕을 단단히 다진 뒤에, 옛날의 역사책을 두루 읽어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는 이유의 근원을 알아야 하고, 또 반드시 실용학문에 뜻을 두어서 옛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하였던 글들을 즐겨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글을 읽을 때에 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모든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만물을 번성하도록 해야겠다는 뜻을 가져야만이 올바른 독서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실학자들의 독서관은 실학자 개개인의 사상적 입장이나 인간적 체질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실천적 문제의식―“백성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윤택하게 한다. 그 혜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공덕이 만세에 끼치도록 한다.”(박지원), “만민을 윤택하게 한다. 그리고 만물을 기른다.”(정약용)―을 가진 실용지학을 하여야 된다는 점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실용적인 독서를 강조한 실학자들의 독서관을 조선 초기 관료사장파 지식인의 입신양명형 독서관과 조선 중기 사림도학파 지식인의 도학주의형 독서관과 대비하였다. 실학자의 독서관은 당시의 역사적 과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서를 한다는 의미에서 문제해결형의 독서관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실학자들은 자연히 역사상 인물 가운데에 그 때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적절한 대응력을 가진 실용지학을 한 사람들을 주목하였다. 박지원은 실용지학을 한 사람을 ‘독서를 잘한 사람[善讀書者]’이라고 불렀다. 박지원이 말하는 선독서자는 보통 책을 잘 읽는다고 하는 사람인 소리를 잘 내거나 구두를 잘 찍거나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천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글을 쓴 사람의 고심한 자취를 읽을 줄 알고, 거기에서 얻은 지혜를 현실에 응용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독서는 인간의 제일가는 청사(淸事)라고 한 정약용은 훌륭한 독서를 위해서는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자기의 문제의식과 주견이 확실히 정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책을 읽어도 뜻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아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독서를 할 때는 먼저 자기의 근기(根基)를 세울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맨 먼저 강조하였다. 그리고 나서 독서를 할 때에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 내리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천 편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여 정독법을 시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정약용은 귀양지 강진에서 자기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무릇 독서라는 것은 도중에 뜻을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넓게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을 파헤쳐 글의 전체를 설명할 수 있어야 된다.”라고 하면서 정독법을 강조하였다. 날마다 이러한 방법으로 책을 읽는다면 곁들여 수백 가지의 책을 뒤적이게 된다. 이렇게 읽어야 읽는 책의 의리를 밝게 꿰뚫어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서 『사기(史記)』의 자객전(刺客傳)을 읽을 때에 ‘조취도(祖就道)’라는 글을 보면, 조(祖)의 뜻은 무엇이며 그러한 제사에 꼭 조를 써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자서(字書)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자서에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다른 책을 들추어 그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였는가를 고찰해 보고, 그 근본된 뜻만 아니라 지엽적인 뜻도 철하여 놓으며, 『통전(通典)』이나 『통지(通志)』 · 『통고(通考)』 등의 책에서 조제(祖祭)의 용례를 살펴서 정리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에는 조제에 대해서 아주 모르던 사람이 그 내력까지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비록 큰 선비라 할지라도 조제 한 가지에 대해서는 그 사람보다 더 잘 알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박지원은 독서할 때는 먼저 사의(私意)를 버리고 광명정대한 마음과 함께 진리 앞에 겸허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독서의 방법으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독서를 할 때는 반드시 과정을 정하여놓고 하는 것이 좋다.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시간만 끄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많이 읽으려고 탐내거나 빨리 읽으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공부할 양을 정하여 놓고 날로 미쳐 익히면, 뜻이 정(精)해지고 의(義)가 밝아지며, 음(音)이 농(濃)해지고 의(意)가 익혀져서 자연히 외워지게 되는데, 이것이 독서의 차제(차례)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이러한 자기의 독서관을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하였다. 「허생전」이 바로 그것이다. 허생은 백성을 이롭게 하고 혜택을 사해에 미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십년 기약으로 집중적인 공부를 하려고 하였는데,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칠년 만에 책을 덮고 일어난 뒤에, 안성제주도에서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도적들을 구제하여 무인공도에 이상국을 세우려고 하였던 인물이다. 바로 이 허생은 박지원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문제해결형의 독서인이다.

박지원의 선배로 자연과학에 정통하였던 홍대용(洪大容)은,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밀하게 외워야 한다고 하였다. 음독에 착오가 없이 한 뒤에야 비로소 산표(算表)를 세우면서 30∼40번을 거듭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초학자들에게는 기송(記誦)의 방법을 권하고 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기운이 떨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큰 소리로 읽어서는 안 되고, 마음이 딴 곳으로 갈 염려가 있으므로 눈을 딴 데로 돌려서는 안 되며, 정신이 흩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몸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글을 욀 때에는 착란하지 말고, 중복하지 말며, 너무 빠르거나 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독서를 다 하고 나서는 내 할 일은 다했다고 날뛰어서는 안 되고, 책 속에 있는 내용을 현실에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독서의 목적이 바로 진리를 밝혀 일에 적용하고 실천하려는 것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대용은 이와 같이 진실로 알고 행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지(知) · 행(行) 두 가지 일은 진실로 어느 한 쪽도 버릴 수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아는 것에서 그칠 뿐이며 실천에 힘쓰지는 않는다고 당시의 관념적 · 사변적인 지적 풍토를 개탄하고 있다.

문제해결형의 실천적 독서관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실학자들이 추천한 책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약용이 읽으라고 권한 책들은 대체로 두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 몸을 갈고 닦는 데에 필요한 책들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책들이다.

먼저 수기(修己)를 위한 책들로는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의 사서와 『시경』 · 『서경』 · 『주역』 · 『예기』 · 『춘추』 · 『악기(樂記)』의 육경을 들고 있다. 정약용은 사람이 천하와 국가를 위해서 일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수기지학(修己之學)의 요체인 경전을 읽어서 밑바탕을 튼튼히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통한 수행은 사회활동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올바른 사회참여를 위한 준비작업이라는 것을 자각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세상을 바로잡는 데에 필요한 책들로는 우리 민족이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책과 우리 나라의 옛 문헌과 문집같이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도움이 되는 책을 추천하고 있다. 역사책들로는 『삼국사기』 · 『고려사』 · 『여지승람』 · 『국조보감(國朝寶鑑)』 · 『징비록(懲毖錄)』 · 『연려실기술』 등을 들고, 옛 문헌과 문집류로는 『퇴계집』 · 『율곡집』 · 『서애집』 · 『백사집』 · 『이충무공전서』 · 『반계수록』 · 『성호사설』 · 『해동명신록』 · 『조야수언(朝野粹言)』 · 『일찬(日纂)』 ·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들고 있다.

정약용은 유학의 기본서인 『주자전서』와 『사기』 · 『십칠사(十七史)』 · 『두공부집(杜工部集)』 · 『좌전(左傳)』 등과 같은 중국의 중요문헌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 전기 사대부들이 책이라고 하면 으레 중국 책만을 들먹이는 것에 비하여 정약용은 우리나라의 역사책과 문헌을 중요시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양반사대부들이 우리나라의 문헌과 역사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박학다식을 자랑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중국의 고사와 시구를 인용하는 것은 큰 병통이고 비루한 문풍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그 당시의 조선현실이라는 주체적 입장에 서서 모든 문제를 인식하였다. 우리나라의 책들을 반드시 읽어야 하며, 시를 쓸 때에도 중국의 고사나 시구만을 인용하지 말고 우리나라의 사서나 문집에서 사실을 뽑아내고 각 지방의 특색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해야 좋은 시가 나온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시를 즐겨 짓겠다고 선언하였다. 독서를 하더라도 우리나라 책들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바로 민족주체사상의 발로라고 하겠다.

한글의 보급과 소설독자층의 확대

15세기 세종 때에 이루어진 한글의 창제는 우리 문화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한글은 우리나라 독서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글의 창제와 보급으로, 양반사대부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한자문화와 함께 일반 백성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한글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 악장 · 시조 · 가사 같은 한글 시가문학이 꽃피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와서는 한글로 쓰여진 기행문 · 일기 · 편지 · 소설 등이 잇달아 나와 산문문학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렇게 다양하게 전개된 한글문학 가운데에 독서문화의 발전과 독자층의 확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소설이었다. 약 600여 종을 헤아리는 국문소설의 등장은 지금까지 사대부계층에 국한되었던 독자층을 일반 서민과 부녀자들에까지 확대하는 데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소설시대의 개막은 물론 도시의 성립과 시장경제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경제적 · 시간적 여유의 창출 등과 같은 사회적 · 경제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18세기 이후에는 소설이 단지 개인적으로 읽히기만 한 것이 아니고 돈을 받고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정에는 책을 빌려주고 먹고사는 세책가(貰冊家)가 등장하였다. 서울 · 안성 · 전주 같은 도시에서는 방각본소설(坊刻本小說)을 찍어 내어 차츰 늘어나는 독자의 수요에 응하기도 하였다.

직업적인 이야기꾼들도 등장하였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전기수(傳奇叟)는 중심가에서 정기적으로 많은 청중을 모아 놓고 「심청전」 · 「숙향전」 · 「소대성전」 · 「설인귀전」 같은 소설을 읽었다. 요긴한 대목에 이르면 사람들이 돈을 던져주는 것을 기다렸다가 뒤를 이어 읽었다고 한다. 이덕무가 지은 「은애전」에는, 종로 담뱃가게에서 전기수가 소설을 낭독하는데 영웅이 가장 실의한 대목에 이르자 어떤 남자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품고 낭독자를 칼로 찔러 죽인 일이 있다고 적혀있다. 이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소설 낭독이 빈번히 행하여졌으며, 그것이 당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세책(貰冊)이라 해서 돈을 주고 책을 빌려다 읽는 방식은 서울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한 여성 독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부녀자들이 집안일을 버려두고 길쌈을 게을리 하면서 소설을 빌려다 읽느라고 패물을 팔고 빚을 내어 가산을 기울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이 어느 정도 읽혀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세책가에는 독자의 수요에 맞추어 많은 소설책을 비치하였다. 그리고 재미나는 소설은 수십 권 이상의 장편으로 만들도록 작가를 주선하기도 하였다.

방각본소설의 출현은 주로 도시에 국한되었던 소설 독자를 지방의 서민계층에까지 확산시키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5일만에 서는 시골장터에는 으레 소설을 비롯한 서적을 파는 책장수들이 있었다. 일반 서민들은 비싼 값을 치르지 않고서도 방각본을 통하여 새로운 오락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방각본소설은 이와 같이 상업성을 띠었기에 인기가 있을 만한 작품을 택해 다소 축약을 하면서 개작을 하는 것이 많았다. 이러한 상업적인 출판을 통해 소설은 도시에서부터 전국 방방곡곡으로 쉽게 보급될 수 있었다.

방각본은 특히 전주에서 많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전라도 지방에서 불리던 「춘향가」 · 「심청가」 · 「흥부가」 · 「수궁가」 · 「적벽가」등의 판소리를 쉽게 문자로 정착시켜 방각본소설로 출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에 많이 읽히던 소설로는 「홍길동전」 · 「임진록」 · 「임경업전」 · 「박씨전」 · 「조웅전」 · 「유충렬전」 같은 영웅소설류와 여성독자들의 인기를 모았던 「숙향전」 · 「구운몽」 · 「사씨남정기」 · 「창선감의록」 같은 규방소설류, 「춘향전」 · 「흥부전」 · 「심청전」 같은 판소리계소설을 들 수 있다.

방각본으로 출간된 횟수나 이본의 수를 근거로 해서 인기순위를 매긴다면 19세기까지는 「조웅전」이 「춘향전」을 앞질렀다. 「조웅전」은 자칭 천자로 나선 간신을 무찌르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면서 자기의 고난까지 원천적으로 해결하기에 이르는 파란곡절이 광범위한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조웅이 영웅으로서의 투지를 품고 걸객처럼 다닐 때에 장소저와 인연을 맺은 사건은 애정소설도 쉽사리 미치지 못할 농도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사랑하는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활자본이 등장한 뒤에는 「춘향전」이 단연 제일의 인기소설이 되었다. 춘향과 이도령 사이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 춘향으로 대표되는 민중과 변학도로 대표되는 탐학한 양반관료와의 대립, 신분적 제약과 인간적 해방을 위한 투쟁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에서 비롯하는 긴장과 판소리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해학에서 오는 웃음 사이에서 당시의 민중들은 울고 웃었다. 그들은 춘향에게는 격려를, 변학도에게는 신랄한 비판을 보냈던 것이다.

소설들의 보급과 독서는 필연적으로 양반사대부 위주의 한문독서문화의 폐쇄성을 깨뜨렸다. 그리고 독자층을 일반 민중으로까지 확대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중세적인 봉건문화를 마감하고 근대적인 시민문화를 여는 디딤돌 구실을 하였다고 하겠다.

근대 이후의 독서생활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근대적 신문의 창간과 활자출판문화의 발달은 우리들의 독서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 책을 만들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목판출판시대에서 본격적인 금속활자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신소설을 비롯한 역사 · 전기류들과 교과서, 각종 잡지, 일반서적 등이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1896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어 근대적인 시민문화를 꽃피웠다. 순한글로 간행된 『독립신문』은 표기법을 가능한 대로 통일하였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띄어쓰기를 실천하였다. 『독립신문』은 창간사에 한문을 쓰지 않고 국문으로 한 목적은 백사를 상하귀천이 다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구절을 떼어 쓴 것은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고 쉽게 볼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쇄매체의 등장은 참된 의미의 시민독서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주었다.

19세기 후반은 한문문화와 국문문화가 섞여 있던 과도기로서 출판물들은 국문과 한문이 혼용되고 있었다. 소수의 유식한 독자를 상대로 한 신문과 잡지는 국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소설류를 비롯해서 일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들은 순국문으로 쓰여졌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부녀자들을 위한 잡지는 국문이었다. 국한문으로 내던 『대한매일신보』도 독자 확장을 위해서 1907년부터는 순국문판을 내기도 하였다. 국한문을 사용하던 역사류와 전기류의 단행본도 애국계몽의 효과를 확대하기 위해서 순국문판을 다시 내었다.

개화기시대의 독서경향은 당시의 역사적 과제가 어떻게 하면 봉건사회를 근대화하고 차츰 늘어나는 열강의 침략 위협 속에서 민족을 보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자연히 봉건의식의 타파, 새로운 교육과 신생활의 강조, 민족의식의 고취와 같은 애국계몽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민족항일기에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사상적 탄압 때문에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의식을 일깨우던 책들과 항일독립운동가의 글은 공식적으로 출판되거나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소의신편(昭義新編)』 · 『월남망국사』, 신채호(申采浩)『을지문덕』, 박은식(朴殷植)『한국통사(韓國痛史)』, 한용운(韓龍雲)『님의 침묵』 등과 같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일체의 책은 금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널리 읽혔다. 그리고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다.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일보사에서 벌인 문자보급 운동과 동아일보사에서 벌인 브나로드운동(Vnarod運動)은 문맹퇴치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李光洙)『흙』심훈(沈熏)『상록수』, 그리고 『조선일보』에 연재된 홍명희(洪命憙)『임꺽정』등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일제강점기의 농촌계몽 운동과 사회운동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식민지 상황 속에서 당시의 각급 학교에는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그 독서회에서는 애국계몽적인 소설에서부터 공산주의서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자기들의 역사적 사명감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이론적인 무장을 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다. 1930년을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독서회사건들은 당시 항일학생운동의 추이와 함께 당시의 독서경향이 어떠하였는지를 웅변적으로 말하여주는 것이다.

1945년 8 · 15광복과 함께 민족항일기에 금서로 묶였던 책들이 풀렸다. 현대적 인쇄시설을 갖춘 출판사들이 등장함에 따라 각종 잡지와 단행본들의 출판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였다. 국 · 공립도서관과 각급 학교의 부설도서관들이 설립됨으로써 일반인들의 독서생활과 학생과 지식인들의 연구활동은 한결 편리하게 되었다.

4.19의거 이후에 민족주의정신의 고양에 따라 우리의 한문고전들이 민족문화추진회를 비롯한 한국학관계 출판사의 기획으로 대대적으로 국역되고 출판되어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국내외의 지적 관심을 충족시켜주었다. 국사학과 국문학관계 연구서적들의 출판은 한국학바람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국학관계 도서의 번역 · 출판과 1970년대 들어 활발해진 제3세계 국가들의 서적에 대한 번역소개는 주로 미국일본 등의 도서들을 번역하고 출판하여 문화적인 편식현상을 보여왔던 기존의 독서풍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으로써 균형있는 독서문화를 형성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도서출판과 함께 각급 학교와 한국자유교양협회와 같은 단체에서는 좋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주선하였다. 교양도서목록을 간행해서 독서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독후감을 현상모집하는 등의 독서운동을 벌이고 있다. 대학교에서는 산업사회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습득과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폭넓은 교양을 습득하게 하고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을 위하여 재학 중에 동서고금의 고전 100권을 읽도록 권장한다.

근래의 독서문화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대형서점의 출현과 지하철독서의 보편화이다. 홍수처럼 엄청나게 간행되는 각종 서적들을 전시하고 판매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소규모공간으로는 너무 불편한 점이 많아 도심 곳곳에 대형서점들이 등장하여 급증하는 독자의 수요에 부응하고 있다. 이들 대형서점은 ‘거리의 도서관’과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지하철시대의 개막은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어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간단한 책들을 펴보고 있다. 이에 따라 출판사들은 다투어 지하철에서 읽기에 알맞은 책들을 간행하고 있다. 그리고 지하철문고도 등장하고 있다.

독서인구의 저변확대와 함께 독서경향도 종래의 소설 위주의 독서에서 역사 · 철학 · 경제 · 사회 · 자연 · 여가생활 등 다방면에 걸친 독서로 다변화되고 있다. 특히 사회과학도서들에 대한 독자층의 성장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최근에 와서 우리 현대인들의 독서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고 독서경향도 기능적인 데로 치우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시대가 문자매체시대로부터 영상매체시대로 넘어가는 문명사적인 전환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와닿는 영상매체물들을 즐기는 요즈음의 생활경향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책보다는 텔레비젼이나 비디오 컴퓨터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을 읽더라도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실용서를 찾게 되는 등의 독서계가 일대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영상매체 시대에서도 재미있고 알찬 인문교양서들이 꾸준히 출판되고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현대인들이 영상매체를 통해 재미와 실용적인 정보를 쉽게 얻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교양서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급격한 시대변화와 다양해져만 가는 삶의 양식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의 가치관의 혼란과 정서함양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독서도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고 남의 경험과 지혜를 통해서 우리가 살 길을 암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우리가 학문과 인격을 동시에 갖추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 가운데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과 인격적 만남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저자와 깊은 정신적 교감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창조적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자기를 가다듬고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지혜를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는 이와 같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상처를 받고 자아를 상실한 채로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방향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과목에도 ‘독서’가 들어가 있으며 독서교육의 필요성이 이 영상매체시대에도 더욱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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