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판본은 불교의 사찰에서 간행한 책이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각 사찰에서는 불교 경전과 고승의 저술 및 불교 신앙 의식에 필요한 책을 간행했다. 삼국시대에는 불교 교리의 유포를 위해 필사하여 책을 간행했는데 점차 인쇄의 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고려시대는 전란으로 많은 양의 판본이 소실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전적은 탑 또는 부처의 복장에 봉안되었던 판본이 대부분이다. 시대별로 간행사찰을 살펴보면 고려시대는 39개, 조선 전기는 141개, 조선 후기는 199개 사찰에서 간행한 판본이 전래되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각 사찰에서는 불교 경전과 고승의 저술 및 불교신앙 의식에 필요한 책을 간행하여 왔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는 일반의 시문집이나 『천자문』 · 『유합(類合)』 등도 간행하였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 교리의 유포를 위하여 처음에는 필사(筆寫)의 방법으로 하였으나, 불교 교리에 대한 종교적인 욕구가 증가되면서 인쇄의 방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인쇄가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967년 지정)이 발견되어 늦어도 8세기 중엽에는 목판인쇄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다라니경은 목판인쇄술의 성격을 완전하게 갖춘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로서 사찰에서 간행한 목판본이다. 그리고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대숭복사비명병서(大崇福寺碑銘竝序)」에 당나라 사신에게 신라의 산수를 읊은 시집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기에는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신라시대의 인쇄술이 그대로 계승되어 사찰중심으로 더욱 발달하였다. 이 시대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정착되어 사찰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불교 경전의 간행도 매우 성행하였다.
그러나 잦은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양의 판본이 소실되고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전적은 탑 또는 부처의 복장에 봉안되었던 판본이 대부분이며, 이로써 겨우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사찰판본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007년(고려 목종 10) 개성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來心密全身舍利寶印陀羅尼經)』이다.
이 다라니경은 975년에 간행된 중국의 오월판(吳越板)과 비교해 볼 때 판식이 다르고 글씨나 그림의 판각이 훨씬 정교하고 뛰어난 점 등에서 고려 초기의 우리나라 목판인쇄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문헌기록과 전래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 고려시대 사찰판은 다음과 같다. 문헌상으로는 현화사(玄化寺)에서 1020년(현종 11)부터 1022년 사이에 『대반야경(大般若經)』 · 『화엄경』 · 『금광명경(金光明經)』 ·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을 간행하였고, 김제 금산사(金山寺)에서 『법화현찬(法華玄贊)』 ·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32부 353권을 1083년(순종 1)부터 1097년(숙종 2) 사이에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125년(인종 3)에 세운 반야사(般若寺) 원경왕사비명(元景王師碑銘)에서 『석원사림(釋苑詞林)』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 원묘국사비명(圓妙國師碑銘)에 의하여 1237년(고종 24) 백련사에서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가 간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현존본으로는 13세기의 복각본인 『영가진각대사증도가』(보물, 1986년 지정)가 있는데, 권말의 간기(刊記)에 의하여 1089년(선종 6) 보제사(普濟寺)에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해 해인사에서는 『천태사교의』를 중각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1098년 이필선(李必先)의 시주로 간행된 『화엄경』 진본(晉本) 권37(국보, 1981년 지정)이 있는데, 이때 간행된 『화엄경』으로 진본 권4(보물, 1981년 지정), 진본 권28(보물, 1981년 지정), 주본(周本) 권66(보물, 1981년 지정), 주본 권17·52(보물, 1981년 지정), 정원본(貞元本) 권7(보물, 1981년 지정), 주본 권6(보물, 1981년 지정) 등이 있다.
이들 『화엄경』은 해인사에서 판각하였거나 지방사찰에서 나누어 판각한 것이다. 현재 해인사에는 바로 이 당시에 간행된 『화엄경』 목판이 전래되고 있는데 모두 54종이 남아 있으며 '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이라는 명칭으로 1982년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되었다.
부석사에도 고려시대 『화엄경』 목판 3종과 1250년에 간행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이 전래되고 있다. 수선사(修禪社) 곧 지금의 송광사에서는 1207년(희종 3)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1213년 『종경촬요(宗鏡撮要)』를 새겼음을 지눌(知訥)과 혜심(慧諶)의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296년(충렬왕 22) 제주 묘련사(妙蓮社)에서는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를 개판하였다. 그 권말에 '고려국제주묘련사봉선중수(高麗國濟州妙蓮社奉宣重修)'라 하여 국간(國刊)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인쇄기술면에서는 사찰본인 것이다.
1340년(충혜왕 1)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에서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만의사(萬義寺)에서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1341년 소백산 정각사(正覺寺)에서 『불조삼경(佛祖三經)』 등을 간행하였다. 이 『불조삼경』은 1361년(공민왕 10) 전주 원암사(圓巖寺)에서 중간되었다(보물, 1981-1 지정).
1370년 남원 귀정선사(歸正禪寺)에서 『육조법보단경』을, 1372년 안성 청룡사(靑龍寺)에서 『능엄경』(보물, 1981년 지정)을, 광명사(廣明寺) · 개천사(開天寺) · 굴산사(掘山寺) · 복암사(伏巖寺)에서는 공동으로 『전등록(傳燈錄)』을 개판해냈다. 이는 판조계종사(判曹溪宗事) 각운(覺雲)의 요청에 의하여 공민왕이 명하여 새긴 것이다.
1377년(우왕 3)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활자로 찍어내었다. 이것은 파리국립도서관에 권하(卷下)가 소장되어 있는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최근 흥덕사지(興德寺址)가 발굴되어 이곳에 인쇄박물관이 설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1378년 천녕(川寧) 취암사(鷲巖寺)에서 목판으로 중간한 것이 전래되고 있다.
이 밖에 같은 해 충주 청룡선사(靑龍禪寺)와 연회암(宴晦庵)에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과 『선림보훈』(보물, 1981년 지정)이, 그리고 1379년 『호법론』(보물, 1981년 지정), 1381년 『선종영가집』(보물, 1978년 지정)이 간행되었으며, 1387년 고달사(高達寺)에서 『대혜보각선사서』가 간행되었다.
고려시대 사찰판본으로 간행연도와 간행사찰이 확실한 것은 위와 같으며, 이 밖에 연대나 간행사찰 표시가 없는 것이 상당수 전래되고 있다. 세 차례의 대장경 판각이 이루어질 정도로 각 사찰에는 간행을 위한 인적 · 물적 능력이 축적되어 있었다.
이렇게 사찰판 간행이 성행하였던 것은 역시 상당한 지위의 시주자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시주는 거의가 개인이나 가족단위의 시주였음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판각은 사찰의 욕구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당시 사회지배계급인 귀족들의 참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사찰판의 장정은 전기는 대체로 권자본(卷子本)이었고, 중기 이후는 절첩본(折帖本)이 등장하여 말기까지 혼용되었다. 또한, 후기에 와서 선장본(線裝本)이 등장하였는데 송 · 원본(宋元本)의 복각본(覆刻本)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사찰판본은 역시 정치 ·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사회가 불안하던 고려 후기 판본보다 고려 전기 판본은 그 새김이 정밀하고 인쇄도 뛰어남을 볼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 사찰본은 독자적인 전래본과 송 · 원본의 복각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원본복각에 와서는 조잡한 편이다. 고려시대 사찰판본은 『화엄경』 간행이 가장 많았고, 이어 『금강경』 · 『법화경』 등 대승경전과 『육조법보단경』 등 한국과 중국 조사(祖師)들의 저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배불숭유 정책하에서도 각 사찰에서는 많은 양의 불서를 간행하였다. 이 시대의 불서간행은 대부분 고려본을 복각 또는 번각(飜刻)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왕이나 왕실에서 주관하거나 권문세족이 시주가 되어 간행된 것은 독자적으로 판하본(板下本)을 만들어 새긴 것이었다.
왕실에서 주관하여 간행한 것으로는 1401년(태종 1) 이성계(李成桂)가 태상왕으로 있으면서 신총(信聰)에게 명하여 간행한 대자(大字)의 『능엄경』(보물, 1984년 지정)이 있다. 태조는 또 1399년 거질의 대장경을 찍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배불숭유 정책을 펼치던 조선 건국 초기에 태조의 명으로 불경을 쓰고 간행한 것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그 뒤 왕실에서 간행된 것으로는 세종 말(1447∼1450)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과 세종과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수복을 위하여 간행된 『지장보살본원경』(보물, 1987년 지정)이 있다.
이것은 1469년(예종 1) 삼각산 도성암(道成庵)에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당시 일류 각수(刻手)를 동원하여 간행한 것이다(보물, 1988년 지정).
그리고 1470년(성종 1)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貞喜大王大妃)의 명으로 세조 · 예종 · 의경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새긴 『법화경』(보물, 1987-1 지정)이 있는데, 이는 1482년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외동딸 명숙공주(明淑公主)의 천도를 위하여 한 차례 찍어내었고, 또 1488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순숙공주(順淑公主)의 천도를 위해서 또 한 차례 찍어내는 등, 이 때 새긴 목판은 계속 죽은 이의 천도를 위하여 간행되었다.
왕실에서 간행한 책은 글씨나 새김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였음을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도 1474년 정희대왕대비에 의해서 간행된 『예념미타도량참법』(보물, 1988년 지정)이 뛰어났다.
이 판본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韓氏)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먼저 죽은 세종 · 소헌왕후 · 세조 · 의경왕 · 예종 등에 대한 추앙의 정을 잊을 수 없어 성임(成任)에게 명하여 판하본을 쓰게 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권말에 필자 · 화사(畵師) · 각수를 비롯하여 간행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 조선의 인쇄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1485년 인수대비에 의해서 『오대진언』(보물, 1984년 지정)이 판각되었다.
왕실에서 간행된 이러한 불서들은 독자적으로 판하본을 만들어 당대 일류의 기술진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인쇄술과 왕실의 불교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밖에 개인의 시주에 의하여 간행된 판본들로는 1399년(정종 1) 정천익(鄭天益) 등이 간행한 소자본(小字本)의 『묘법연화경』(보물, 1984년 지정)과 1405년(태종 5) 성달생(成達生) 형제가 필사하여 안심사(安心寺)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이 있다. 그리고 1424년(세종 6) 고산(高山) 안심사에서 간행한 『육경합부(六經合部)』도 성달생이 판하본을 쓴 것이다.
1440년 화악산(華岳山) 영제암(永濟庵)에서도 이 『육경합부』를 간행하였는데, 뒤에 인수대비에 의한 대대적인 불경 인출 때 이것도 포함되었다.
인수대비가 1472년 세조 · 예종 · 의경왕 · 인성대군의 극락왕생을 빌고 대왕대비와 왕 · 왕비의 수복을 빌기 위하여 조선 초기에 판각된 목판 가운데 뛰어난 것을 선택하여 각 사찰에서 찍어내고, 권말에는 김수온(金守溫)의 발문을 갑인소자(甲寅小字)로 인쇄하여 붙였다.
이 때 찍어낸 판본은 『법화경』 · 『능엄경』 · 『원각경(圓覺經)』 · 『주화엄경(註華嚴經)』 · 『유마경(維摩經)』 · 『참경(懺經)』 · 『심경(心經)』 · 『육경합부』 · 『범망경(梵網經)』 · 『지장경』 · 『약사경(藥師經)』 · 『은중경(恩重經)』 · 『법어(法語)』 · 『영가집』 · 『대장일람(大藏一覽)』 · 『남명증도가』 · 『금강천노해(金剛川老解)』 · 『능엄의해(楞嚴義解)』 · 『진실주집(眞實珠集)』 · 『중례문(中禮文)』 · 『지반문(志磐文)』 · 『결수문(結手文)』 · 『자기문(仔夔文』 ·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 ·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 『선문염송(禪門拈頌)』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 『용감수감(龍龕手鑑)』 · 『육도보설(六道普說)』 등 29종의 불서이다.
또, 1495년(연산군 1) 8종의 불서를 인출하였는데, 『법화경언해』 · 『능엄경언해』 · 『금강경육조해언해』 · 『심경언해』 · 『영가집언해』 · 『석보상절』 · 『금강경오가해』 · 『육경합부』 등인데 대부분 국역본인 점이 특징이다. 이때 『주화엄경』은 5부를 찍어냈으며 『육경합부』는 500부나 찍어내었다.
특히, 대비가 찍어낸 불서는 조선 초기 경전의 선호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후기 사찰에서 일반 시주자들에 의하여 간행된 것은 고승의 시문집을 제외하고는 고려본이나 조선 전기의 판본을 번각한 것이 대부분이고, 명나라 또는 청나라 간본의 번각도 상당수 보이고 있다.
사찰에는 특히 일류 각수(刻手)와 지공(紙工) 등 인적 능력이 갖추어져 있어,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면서 축적된 인쇄기술과 함께 인쇄에 필요한 먹 · 종이 · 목판이 주변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등, 목판인쇄를 위한 제반 여건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여기에다 진리의 유포라는 신앙적 자세가 가미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김에서부터 장정까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찰판은 관(官) 또는 일반 사가(私家)나 서원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치면서 한국 인쇄문화의 발전에 핵심적인 구실을 해왔다.
조선시대에 각 사찰에서 간행된 내용을 현재 공공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에서 간행연대와 장소가 확실한 것만 조사한 결과 총 296개 사찰에서 간행한 952종의 판본이 전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연대순으로 보면, 고려시대 25종, 1400년대 70종, 1500년대 311종, 1600년대 316종, 1700년대 165종, 1800년대 51종, 1900년대 14종이다. 간행 연대별로 보면, 1500년대와 1600년대가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많은 양이 불타버린 것을 감안한다면 1500년대도 활발히 간행되었던 시기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판각된 사찰판본은 『법화경』인데 128회에 걸쳐 판각되었다. 목판은 판각을 한번 해놓으면 판이 불타버리거나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찍어낼 수 있으므로 오늘날의 출판횟수와 비교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 밖에 많이 판각된 경전은 『금강경』 ·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 『지장경』 · 『아미타경』 ·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등의 순서이다. 그런데 이들 경전은 지역이나 연대에 따라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간행된 것이 아니라, 간행공덕을 위한 신앙행위로 사찰마다 경쟁하듯 간행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경전의 간행내용을 보면 『금강경』은 전체 간행횟수에 비해서 각 시대에 걸쳐 골고루 간행되었으나, 『법화경』은 시대별 편차가 큰 것을 볼 수 있다. 『법화경』의 간행횟수가 120회를 훨씬 넘고 있음은 『법화경』이 경전간행공덕을 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법화경』 간행은 간행발(刊行跋)에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독송이나 교리연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간행공덕을 쌓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600년대가 이러한 『법화경』 간행공덕 신앙이 가장 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부모은중경』도 시대별로 고른 간행분포를 보이고 있어, 각 시대를 거치면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지장보살본원경』은 『예수시왕생칠경』과 더불어 명부(冥府)를 관장하고 있는 시왕신앙과 결부되어 각 시대에서 골고루 간행되었다.
그리고 『육경합부』는 『금강경』 · 『화엄경』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 『능엄신주』 · 『아미타경』 · 『관세음보살예문』 ·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등 대승경전 가운데서 독송용으로 뽑은 내용인데 대부분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다.
이에 비해서 『아미타경』은 조선 중 · 후기에 많이 간행되었고,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이나 『천지팔양신주경』같은 위경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되었음도 이 당시의 신앙경향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미타경』과 더불어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의 등장은 말기에 만일회(萬日會)와 같은 미타정토신앙의 유행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나 『범음집(梵音集)』이 조선 후기에 등장하고 있음을 보아 조선 전기에 비해서 의식(儀式)쪽에 치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찰판본은 각 시대의 신앙 유형과 간행 당시의 문화 전반에 걸친 역량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시대별로 간행사찰을 살펴보면 고려시대는 39개의 사찰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 판본이 희귀하고 또 현전하는 판본도 간행사찰의 표시가 없는 것이 많아 현존본과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찰 수이다.
조선 전기는 141개 사찰, 조선 후기는 199개 사찰에서 간행한 판본이 전래되고 있다. 이 중에서 순천 송광사와 합천 해인사는 고려시대와 조선 전 · 후기에 걸쳐 판본이 모두 전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두 사찰의 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단일사찰의 판본으로는 순천 송광사판본이 모두 39종으로 가장 많이 전래되고 있으며, 그 다음이 묘향산 보현사의 판본이 32종 전래되고 있다.
현재까지 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사찰은 남한에서만 모두 70개 사찰에서 841종 3만 1781판을 소장하고 있다. 사찰판본은 판각 당시 사찰이나 시대에 따라 선호도가 달랐기 때문에 간행내용이 달랐고, 또한 간행횟수가 『법화경』처럼 많은 것에서부터 일반승려의 시문집처럼 단 한번에 그친 판본도 있다.
사찰판본은 간행 당시의 해당사찰의 성격과 시대별 신앙 경향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또한, 책끝에 간행기록과 화주(化主) · 시주질(施主帙) · 각수 등 간행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기 때문에 인쇄발달과정을 연구하는 데 기본자료가 된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사찰은 판목(板木) · 종이 · 먹 · 각수 · 연판(鍊板) · 인출장(印出匠) 등 인적 · 물적 자원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인쇄문화의 요람지 구실을 하면서 각 시대의 문화를 주도해왔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는 사찰판본은 간행 당시 문화적인 역량이 함축되어 있는 문화유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