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

촌락
개념
사회 · 경제 · 정치 활동의 중심으로서, 수천 · 수만 명 이상의 인구가 집단거주하여 가옥이 밀집되어 있고 교통로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
내용 요약

도시는 사회·경제·정치 활동의 중심으로, 수천·수만 명 이상의 인구가 집단 거주하여 가옥이 밀집되고 교통로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정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세계의 도시는 신전의 도시에서 왕권의 도시, 봉건 영주와 사원의 도시, 상공인들의 도시로 바뀌다가, 산업혁명 후 공업 및 관리도시로 변화했다. 우리나라는 환웅의 신시 이래 풍수지리설의 영향 아래 도시가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 인구의 도시 집중이 시작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속되었고, 오늘날은 수도권 과밀화 현상으로 주택·교통·환경·범죄 등 많은 문제가 생겼다.

정의
사회 · 경제 · 정치 활동의 중심으로서, 수천 · 수만 명 이상의 인구가 집단거주하여 가옥이 밀집되어 있고 교통로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
개관

본래 도시라는 말에는 도읍(都邑), 곧 정치 또는 행정의 중심지라는 뜻과 시장(市場), 곧 경제의 중심지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도시는 이러한 말뜻에 적합한 것으로, 한성을 비롯하여 공주 · 대구 · 전주 · 평양 · 의주 등지는 정치적 · 행정적 중심지이자 전국적인 큰 장시(場市)의 소재지 또는 상거래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나라 도시의 두 가지 성격 중 정치나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우선이고 경제나 상거래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은 부차적이었으니, 이 점에서는 중국의 경우와 같다.

영어의 ‘city’, 불어의 ‘cité’가 모두 고대 로마의 ‘도시’ 또는 ‘로마시민권’이라는 뜻을 가진 ‘civitas’를 어원으로 하듯, 서구사회의 도시는 그리스시대의 도시국가 이후로 시민공동체 또는 시민적 경제활동 중심지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 서구의 도시는 외적에 대한 방어를 중요시하여 그 입지를 선정하거나 둘레에 성채를 쌓기 때문에, ―ford,―furt,―burg,―pur 등 요새(要塞)를 뜻하는 어미가 붙는 경우가 많다. 도시가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는 ① 많은 인구와 높은 인구밀도, ② 농업이 아닌 산업, ③ 도시적 경관, ④ 중심성 등을 들 수 있으나, 인구의 문제는 상대적인 것이므로 도리어 정보매체 · 교통 · 상공업 · 관리(管理) 등 각 기능의 중심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기원에 관하여 현대의 고고학자 칠드(Child,G.)는 “사람이 토지에 정착하여 도구를 이용한 농경을 시작한 것을 농업혁명이라 하는데, 이 농업혁명의 결과로 농산물의 잉여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 네 사람이 다섯 사람분의 식량을 생산하면 농경에서 해방된 한 사람은 학자 · 예술가 · 기술자 등 비농업적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수가 늘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활동여건이 좋은 중심 촌락에 모이게 되고, 여기서 계급과 국가가 생기고 따라서 도시도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도시혁명이라 하고, 도시혁명은 5천 년 내지 1만 년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형성된 기름진 초승달지대에 메소포타미아 도시문명이 탄생한 것은 서기전 3500년경으로 알려져 있고, 인더스강변의 인더스문명, 황하 유역의 은(殷) · 주(周) 문명, 그리고 나일강변의 이집트문명이 생긴 것도 모두 서기전 3000년 내지 2000년 전의 일이었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세계의 도시는 신전(神殿)의 도시로 시작되어 왕권의 도시, 봉건 영주와 사원(寺院)의 도시, 상공인들의 도시로 이어오다가, 산업혁명 이후에는 공업도시 · 관리도시(管理都市)로 기능과 구실이 변화해 왔다.

한편, 오늘날의 도시는 그 규모가 크게 분화되어 인구 1천만 명이 넘는 초대도시가 있는가 하면 5천 명 내외의 작은 도시도 허다하다. 또, 각각 다른 여건에 따라 양상이 다른 도시화과정을 밟아오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전세계는 선진 · 후진의 구별 없이 모두가 급격한 도시화시대, 도시문명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역사

고대

한반도에 있어서도 석기를 도구로 한 농경으로 잉여생산이 생기고, 토기를 구워 생활용구로 쓰게 되면서 도시가 싹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 권1에는 “ 환웅(桓雄)이……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정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니 이를 신시(神市)라 하고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농경 · 수명 · 질병 · 죄형(罪刑) · 윤리 등 인간 360여 가지 일을 다스렸다.”고 한 「단군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풍백 · 우사 · 운사 등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무속적 전문가들로 지배계급이 형성되고, 그들에 의하여 기상관측과 농경감독이 이루어졌으며, 의료와 법질서가 행해진 신전도시가 탄생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소박한 신전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석기로 농사를 짓던 신시라는 도시사회도 청동기문화시대로 내려오면서 차차 규모도 커지고, 예의와 윤리와 질서가 엄격한 계급사회로 옮아갔음은 『한서 漢書』 · 『후한서』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의 수송수단이나 정보매체는 하천이 중심이 되고 도로는 부수적이었으니, 고대도시는 예외없이 하천 유역에 형성되었다. 또, 한민족은 그 주류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였으므로 도시형성도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반도의 도시문명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중심으로 꽃피었으나, 삼한시대로 내려오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모두 78개라고 전해진 삼한의 작은 나라들은 오늘날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설명되고 있으나, 그 중 상당수는 도시국가였을 것이다. 즉, 산성 또는 읍성을 쌓고 왕후(王侯) · 제사(祭司) 등의 지배층과 농경에서 해방된 전사(戰士) · 수공업자 · 상인들이 독립된 단위로 모여 살았으며, 계급의 분화와 사회적 분업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청동 · 철 등 금속기나 토기의 제작에도 굴레를 사용하고, 농경에 말과 소를 부렸으며, 조직된 노동력을 이용하여 보를 막는 따위의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농산물의 잉여를 쌓아갔다.

마한백제국(伯濟國)백제가 되고, 진한사로국(斯盧國)신라가 되는 등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성읍국가들 중 어떤 것은 국도(國都)가 되고 어떤 것은 한 촌락으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삼한시대의 성읍국가 중 상당수는 오늘날 유수한 지방도시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완산국(完山國)이 전주가 되고, 금관가야국김해가 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삼국시대의 도시는 훨씬 더 발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권2 미추이사금 원년(262)조의 “7월 금성 서문에 화재가 나서 인가 100여 구(區)가 불탔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도시국가들 중 인구밀도가 꽤 높은 곳도 있었던 것 같다. 고구려 전기 400여 년간의 수도였던 집안(輯安)국내성(國內城:지금의 通溝)이 어떤 도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427년( 장수왕 15) 이후의 수도였던 평양이 얼마나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문명을 형성하였던가는 출토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인구의 규모나 생활상을 알아볼 기록은 거의 없다. 기원전 6년부터 거의 500년간이나 백제의 수도였던 광주(廣州)풍납동토성지(風納洞土城址)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고, 제2 · 제3의 수도였던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사비(泗沘:지금의 부여)의 도시 규모도 성곽이나 출토품을 통하여 추측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삼국시대 우리 나라 도시의 규모나 형태는 국내외의 여러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3에, 신라는 건국 21년(기원전 36) 왕경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이름하고, 이어서 101년(파사왕 22) 금성 동남쪽에 둘레 1,023보인 월성(月城)을 쌓아서 각각 왕의 거처로 삼았다는 기록과, 『구당서』 · 『신당서』의 「신라전」에 “왕의 거처를 금성이라 하였는데, 그 둘레는 8리이며 위병이 3천 명이었다.”는 기록에서 통일기 이전의 신라 수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 권1 진한조에 “신라 전성시의 경중(京中)은 17만8936호(戶) 1,360방(坊) 55리 35 금입택(金入宅)이었다.”고 하였고, 같은 책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郎望海寺條)에 “제49대 헌강대왕 때는 경사(京師)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하여 초가가 하나도 없고, 노래와 악기 소리가 길에서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중 17만8936호’에 대해서는 이의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삼국사기』 헌강왕 6년(880)조에도 “경도의 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노래와 악기소리가 계속되었다.” 내지 “민가는 기와로만 덮고 풀로 이지 않았으며 밥은 숯으로만 짓고 나무를 때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신라의 왕도가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였던가를 짐작하게 하며, 왕도 안은 방리제(坊里制)가 시행된 바둑판모양의 계획도시였음도 알 수 있다. 한편, 509년(지증왕 10) 동시(東市)를, 695년(효소왕 4) 남 · 서시의 양시를 두었다고 하여 시장이 제도화된 것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구체적 양태는 알 길이 없다.

고구려는 삼경제(三京制)로서 수도인 평양 외에도 국내성과 한성(漢城:지금의 載寧)을 두었으며, 전국을 5부로 나누어 지방장관과 이원(吏員)을 두었다고 하였다. 백제도 초기에는 22 담로(檐魯), 즉 22개의 고을을 두었다가 그 뒤 전국을 중 · 동 · 남 · 서 · 북의 5방(方)으로 나누고, 각 방에 방령(方領)이라는 지방장관을 두어 1천 명 정도의 군사를 배치하였다. 방 밑에는 각각 6∼10개의 군(郡)을 두고 각 군에 군장(郡將) 3인씩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들 방 · 군은 대개 지난날의 성읍들이 변화한 것이라 추측되나, 그 위치나 규모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양서(梁書)』 신라전에 통일 이전의 신라에도 국도(國都) 주변인 기내(畿內)에는 6 탁평(啄評), 기외에는 52개의 읍륵(邑勒)이 있다고 하였으나, 이 또한 그 위치나 규모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방도시들은 삼국시대의 이들 현읍(縣邑)에서 싹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의 경우, 통일 이후 687년(신문왕 7)에 완성된 구주(九州) 오소경(五小京)의 제도가 생긴 뒤부터 지방도시의 도시성은 뚜렷이 부각된다. 상주(尙州) · 양주(良州:지금의 梁山) · 강주(康州:지금의 晉州) · 한주(漢州:지금의 廣州) · 삭주(朔州:지금의 春川) · 웅주(熊州:지금의 公州) · 명주(溟州:지금의 江陵) · 전주(全州) · 무주(武州:지금의 光州) 등 구주와 금관(金官:지금의 金海) · 중원(中原:지금의 忠州) · 북원(北原:지금의 原州) · 서원(西原:지금의 淸州) · 남원(南原)의 오소경은 모두 수륙교통의 연결점이자 농경시대의 지방 중심지점이었다.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도 양주가 부산으로, 한주가 서울로 그 위치가 조금 바뀐 채 이어지고 있고, 특별한 예외도 있기는 하나, 거의 전부가 특별시 · 직할시를 포함한 도시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태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개국한 고려는 919년(태조 2) 송악(개성)으로 천도하였다. 그 뒤 1029년(현종 20) 둘레가 2만9700보인 나성(羅城:외성)을 완성하고, 성안을 5부 35방 344리로 구분하였으니 이것이 개경(開京)의 규모였다.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에서 “왕성의 규모가 비록 크기는 하나…… 지붕은 대개 풀로 이어 비바람을 가릴 정도이고, 부잣집은 기와로 이었으나 겨우 열에 한둘뿐이다.”라고 혹평하였지만, 왕성 안에 70구(區)의 절이 있다는 『송사(宋史)』 고려전의 기록들로 미루어 보면 그다지 초라한 서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또, 『고려사』 유승단전(兪升旦傳)에 의하면 1232년(고종 19) 강화 천도 직전 “경도의 호(戶)는 10만에 이르고…….”라 하였고,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조 때 개성부의 성내 민호는 13만이라.” 한 것을 보면 전성기에 개경의 인구는 10∼15만 정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여기에 관아 · 불사(佛寺) · 민가가 섞여 매우 조밀하게 모여 살았고, 시가 중심에는 장행랑(長行廊)이라는 상설 점포 외에 허시(墟市)라는 노점시장이 매일 개설되어 은병(銀甁) · 곡물 · 포목 등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지방도시 중 큰 것은 서경(평양) · 동경(경주) · 남경(한양)의 3경인데 각각 유수관(留守官)을 두었다. 특히, 서경은 태조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만대(萬代)나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라고 한 만큼 대대로 군사 및 정치상의 준(準) 수도로 중시되었다. 한편, 983년( 성종 2) 목(牧)이 된 양주 · 광주(廣州) · 충주 · 청주 · 공주 · 진주 · 상주 · 전주 · 나주 · 승주(순천) · 해주 · 황주 등 12개 고을은 모두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 읍들은 예외없이 지방교통의 요충이자 정보의 매개 및 물자의 집산지여서 삼국 · 통일신라 시대부터 요지가 되어 온 지방도시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1018년(현종 9) 이후 안북(安北:지금의 安州) · 안서(安西:지금의 海州) · 안동 · 안변의 4 도호부와, 광주(廣州) · 충주 · 청주 · 진주 · 상주 · 전주 · 나주 · 황주 등의 8목으로 계승되었다. 이상 3경 4도호부 8목의 수령은 이른바 계수관(界首官)으로서 다수의 군현을 직접 간접으로 통치, 관할하였으므로, 다수의 관리와 군졸을 휘하에 두게 되어 읍내의 도시성을 높였다.

조선 전기

조선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1394년(태조 3) 10월이었고, 그 해 12월 정도전(鄭道傳)이 책임자가 되어 신도(新都)의 조영(造營)을 시작하였다. 한양은 8도의 중앙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남산 · 인왕산 · 낙산 등에 둘러싸여 있어 천연의 성곽을 이루고 한강수가 감싸고 흘러,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 산하금대(山河襟帶)의 승지이므로 일찍부터 왕도의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다.

한양이 한성부로 개칭된 것은 1395년으로, 이후 그 이름은 조선시대 말까지 사용되었다. 수도 조성계획의 기본근거는 풍수지리설과 『주례(周禮)』의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이었다.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지금의 北岳山)을 기점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성을 둘러싸고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지금의 南山)에서 연결시켜 도성의 규모를 정하였다.

주산을 배경으로 본궁인 경복궁을 앉히고, 부(副)주산 격인 응봉(鷹峯)을 배경으로 별궁인 창덕궁을 배치하였으며,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왼쪽인 창덕궁 앞에 종묘, 오른쪽인 인왕산 기슭에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전면에 육조(六曹)의 관아를, 북문인 신무문 밖에 시전(市廛)을 설치하였으나, 이 시전은 주산인 북악산에 너무 근접하여 있을 뿐 아니라, 시민의 주거와 멀어서 얼마 안 가서 폐지되었다.

동서가 긴 타원형의 도성 안 중간에 동서로 큰길을 내어 그 양끝에 동대문서대문을 세우고, 안산인 남산의 줄기와 백호인 인왕산의 줄기가 이어지는 지점에 남대문을 세웠으며, 남대문에서 동서로 난 큰길의 중심까지 남북으로 큰길을 내고, 그 맞닿은 곳에 종각을 세워 도심으로 삼은 외에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도 각각 동서 큰길에 연결되는 길을 내었다. 이것이 조선왕조 초기의 한성시가계획의 대강이었다.

시전의 배치를 살펴보면 1410년(태종 10) 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에, 곡물 · 잡화는 동부 연화동 입구, 남부 훈도방(薰陶坊), 서부 혜정교(惠政橋), 북부 안국방, 중부 광통방(廣通坊)에, 그리고 우마시장은 장통방 밑 개천에 각각 배치하였고, 여항소시(閭巷小市)는 소시민들이 거주하는 문전에서 거래하도록 하였다. 이들과 별도로 혜정교에서 창덕궁 입구까지에 좌우 행장 800여 칸의 시전이 개설된 것은 1412년의 일이었다.

한성에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된 것은 1395년 9월이었지만, 그 뒤 정변 · 천재(天災) 및 인력과 자재부족 등으로 인하여 공사에 차질이 겹쳐서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422년(세종 4)이었으니, 1394년에 착공한 지 28년 만의 일이었다. 도성 안 5부 59방(뒤에 49방이 됨)의 넓이는 약 17.8㎢이었고, 도성 밖 10리 안의 한성관할구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넓이는 약 250㎢ 정도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 윤4월 8일조에 ‘경성 5부 호(戶) 1만6921, 구(口) 10만3328, 성저십리 호 1,601, 구 6,044’라 하고, 『세종실록지리지』에 ‘5부 호 1만7015, 성저십리 호 1,779’라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 한성의 인구는 대체로 11만∼12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성 안의 토지는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주민의 가옥은 한성부가 신청을 받아 공지를 분양, 대여하였다. 『경국대전』의 기준을 보면, 대군(大君) · 공주(公主)는 30부(약 4,225㎡)로 가장 넓고, 서인(庶人)은 2부(약 282㎡)로 가장 좁게 계층에 따라 증감되었고, 주택의 규모도 엄격히 규제되었다. 심지어 좌향조차도 궁궐과 같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은 허용되지 않은 것 같다.

조선 전기의 지방도시도 고려 때의 그것과 같이 행정의 중심지로서, 곧 대읍(大邑)이었다. 건국 초인 1393년에 정하여 계수관을 둔 대읍은 계림(지금의 경주) · 안동 · 상주 · 진주 · 김해 · 경산(京山:지금의 성주) · 완산(지금의 전주) · 나주 · 광주(光州) · 광주(廣州) · 충주 · 청주 · 공주 · 수원 · 교주(交州, 交河) · 원주 · 회양 · 춘주(春州:지금의 춘천) · 강릉 · 삼척 · 황주 · 해주 · 한양 · 철원 · 연안 · 부평 등 25개 읍이었다.

그 뒤 지방행정기관은 대체로 1403년(태종 3)부터 세조 때까지 정비되었다. 이때 유수부(留守府)를 둔 읍은 개성 하나뿐이었고(뒤에 광주 · 화성 추가), 부윤(府尹)을 둔 읍은 경주 · 전주 · 평양(뒤에 함흥 · 의주 추가)의 셋, 대도호부를 둔 읍은 안동 · 창원 · 강릉 · 영변 · 영흥의 다섯이었으며, 목(牧)을 둔 읍은 양주 · 광주(廣州) · 연주 · 파주 · 충주 · 공주 · 청주 · 홍주 · 원주 · 황주 · 해주 · 나주 · 광주(光州) · 제주 · 상주 · 진주 · 성주 · 안주 · 정주 · 의주 등 20곳이었다.

이들 고을은 경역이 넓고 인구도 많았으며 교통의 요충에 위치하였으므로, 사람과 물자의 빈번한 교류에 따라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마련이었다. 더욱이, 고을의 격이 높아지면서 업무량이 늘어나자 그만큼 관아의 이속(吏屬) · 군졸 · 노비 등과 관아에 예속된 장인(匠人) · 객주 · 여각(旅閣) 등 상공인도 늘어나서 자연히 전산업형(前産業型) 도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조선 전기의 부 · 군 · 현 소재지 사이의 거리는 평균 80리 정도이었고, 대도호 · 목 소재지끼리는 대개 2일 내지 3일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로 분포되어 있으니, 모두가 정보 및 교통의 결절지(結節地)이었다. 특히, 15, 16세기 무렵부터는 각 지방도시마다 장시가 서게 되어 상업의 중심지까지 겸하게 되면서 지방도시의 기능은 더욱 다양해졌다. 따라서, 그러한 지방도시 주민의 상당수는 비농업(非農業) 또는 반농업적(半農業的)인 직업인이었으나, 아직도 전원적 · 비산업적 도시의 성격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조선 후기

조선왕조가 성립된 지 200년이 지나고 임진왜란 · 병자호란의 두 큰 병란을 겪고 난 뒤 도시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겹쳐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공업상의 변화이다. 종래의 관 공장(工匠) 중심의 독점적 수공업에서 독자적 사(私)공장들이 등장하여 경쟁적인 생산활동으로 양질의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상업상의 변화이다. 외국(주로 청나라)과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금속화폐의 유통과 장시의 보급 및 보부상의 활동 등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상업인구가 대폭 증가하고, 관인(官認) 시전(市廛)에 대한 사상(私商)들의 도전경쟁이 활발해져서 상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셋째,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 현상이다. 적자와 서자 및 양반과 상민의 신분질서가 문란해지고, 일부 지식층의 의식개혁이 일어나면서, 관리와 양반의 수탈 및 천재지변에 지친 농민들이 상인 또는 공장(工匠)으로 전업하였다.

우선 한성의 경우, 왜란과 호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나 17세기에 들어 궁궐을 중건 또는 창건하여 면모가 일신되고, 국내외 물품의 수급을 독점하여 번영한 육의전(六矣廛) 등의 관인상전, 송파(松坡) · 누원(樓院) 등에서 자생하여 활기를 띤 사상, 용산 · 마포 등 한강변에서 활개치던 경강상(京江商) 등 경쟁적 활약이 상공업을 크게 발달시켰다. 난리 뒤 4만 명 이하로까지 감소되었던 한성의 인구는 17세기 중엽인 1669년(현종 10) 20만에 육박하여 조선시대 말까지 지속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한성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도시에서도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개성 · 의주 · 평양 · 동래 등지에서는 청나라 또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이른바 송상(松商) · 만상(灣商) · 유상(柳商) · 내상(萊商)들이 활발한 장사를 벌였다. 또, 전주 · 대구 · 공주 · 해주 · 원주 · 함흥 등 감영(監營) 소재지 및 이에 준하는 충주 · 청주 · 상주 · 광주 · 나주 · 제주 · 진주 · 안주 등 대읍들이 굳건한 상업기반을 확보하고 있어, 단순한 행정도시만이 아니라 경제도시로서의 면모도 아울러 갖추어가고 있었다. 특히, 안성은 상공업으로, 강경과 원산은 장시 중심의 대규모 상거래를 통해 각각 특별한 행정적 기반 없이 순전한 경제도시로 번창한 예이다.

18세기 중엽에 쓴 이중환(李重煥)『택리지』에 평양과 안주는 대청무역(對淸貿易)으로, 원주는 생선 · 소금 · 목재의 집산지로, 상주는 수륙교통이 결절하여 상거래에 편리한 곳으로, 그리고 전주는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한 곳이라는 등, 주로 경제적 이유를 들어 이러한 도시를 ‘대도회(大都會)’라 하였다. 다음, 원주 · 철원 · 대구 · 안성 · 강경 · 덕원부 · 원산촌은 ‘도회지’라 표현하였고, 이 밖에 충주는 명도(名都), 진주는 대읍, 광주(光州)는 명읍이라는 용어를 써서 각각 그 도시성을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 주요 도시의 인구수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호구총수(戶口總數)』가 있다. 이는 규장각에서 편찬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1789년(정조 13)의 호구수를 종합기록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한성, 즉 경조오부(京兆五部)가 18만9153명으로 가장 많고, 개성(4만9623명) · 충주(8만7331명) · 평양(10만7592명) · 대구(6만1477명) · 상주(7만497명) · 전주(7만2505명) · 의주(8만9970명) 등이 인구 4만∼10만대의 도시였다.

이 밖에 진주 · 해주 · 경성(鏡城) · 부산 · 길주 · 황주 · 공주 · 제주 · 정주(定州) · 안주 · 안동 · 경주 · 의성 · 동래 · 밀양 · 강화 · 나주 · 광주(光州) · 광주(廣州) · 청주 · 함흥 · 부여 · 양주 · 선천 등 49개의 부 · 읍이 5천 인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나타났다. 이들 도시인구의 총수는 57만여 명으로서 전국인구 740만 명의 약 7.8%이었다. 또, 당시 도시부의 인구밀도는 ㎢당 평균밀도가 185인에 달해 전국 인구밀도 33.5인에 비하여 상당한 고밀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주 · 청주 · 평양 · 나주 · 광주 · 함흥 등 도시의 인구밀도는 2천∼8천 인에까지 이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도시사회의 특징

조선시대 도시사회의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수도 한성을 비롯하여 지방도시 거의가 부 · 목 · 군 · 현청의 소재지인 읍으로서 행정의 거점이었으므로, 그 고을의 민호수와 농지의 대소에 따라 도시규모의 대소도 비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 병자호란의 두 난을 거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구의 증가, 장시의 확충, 상공업의 발달, 그리고 도시집중현상 등으로 도시사회는 점차 행정적 거점에서 경제적 거점으로 전환해 갔다. 그리하여 행정적 기능이 전혀 없는 경제적 도시취락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농본(農本)을 강조하고 상공을 천시하던 사회기풍과 쇄국정책 등의 제약요인 때문에 경제도시로서의 발전에는 자연히 한계가 있었다.

둘째, 한성은 물론이고 330여 개의 고을[邑]은 그 반수 이상이 읍성을 쌓았는데, 이 읍성은 주목적이 방위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관권의 과시수단도 되었고, 도시와 농촌을 갈라놓는 경계의 구실도 하였다. 이들 읍성 중 광양 · 함양의 예처럼 겨우 관아를 둘러싼 정도의 작은 읍성도 있었으나, 그 밖의 읍성들은 그 규모가 커 성내에 능히 수천 내지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성 안에는 관아와 관인 · 이속 · 군졸들, 관인시전 및 양반 · 지주들이 거주하였고, 성 밖에는 장시가 서고 상인 · 장인 · 빈농들이 각기 기능별로 모여 살았다.

셋째, 당시에도 도로 · 배수 · 청소 · 소방 · 야간통행금지 등의 도시제도가 나름대로 틀을 잡고 있었다. 특히, 1794년(정조 18)에 시작하여 2년 반 만에 완성한 신도시 화성(華城:지금의 수원성)은 조선 후기의 축성 및 도시설계의 집대성이었다.

넷째, 조선시대 지방도시의 인구규모는 2만을 최고로 5천에서 1만대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수는 중세기 서구의 도시인구에 비하여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특히, 한성의 20만 인구는 전산업형 도시인구 중에서는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동일한 연대에 이미 산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서구 도시들에 대비되는 조선시대 도시의 후진성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도시발달이 늦어진 데는 ① 지정학적으로 국토가 양(洋)의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로와 동떨어졌다는 점, ② 정책적으로 왕조 500년간에 철저한 쇄국주의를 폈다는 점, ③ 사상적으로 은둔적인 유교에 치중한 점, ④ 산업적으로 상공업을 억제하고 농업에 편중한 점, ⑤ 제도적으로 중앙집권에 치우쳐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발달하지 못한 점, ⑥ 임진왜란 · 병자호란의 두 큰 전란을 겪은 점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개항기

여기서 개항기라 함은 강화조약을 계기로 개국, 개항한 1876년부터 1910년 국권상실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의 우리 도시사회는 개항장 · 개시장(開市場)을 중심으로 크게 변화해 갔다. 동양 3국 중 제일 먼저 1842년에 개항, 개시한 중국 각지에는 80개의 개항장 · 개시장이 있었으며, 상해(上海) 등지에는 외국인 전용 거주구역인 조계(租界)가 설정되었다. 1859년에 개항한 일본에도 요코하마(橫濱) 등에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었다. 우리 나라의 개항장은 바로 일본이 서구 각국에서 배운 수법을 역수출하여 생겼는데,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우리나라의 개항장 · 개시장

도 시 명 설정시기 구 분 설 정 근 거 조계 · 거류지 설정여부
부 산 1876. 8.24. 개항장 조 · 일 수호조규 및 그 부록 일본 전관 거류지
원 산 1880. 5. 1.   청국 전관 조계
인 천 1883. 1. 1. 개항장 통상 및 조 · 영수호조약 일본 전관 거류지,
일본전관조계,
각국 공동 조계
한 성 1882. 개시장 조 · 중수륙무역장정 및 조 · 영수호조약 잡거지
용 산 1884.10. 6. 개시장 통상 및 일본공사와 조선정부간 왕복공문 잡거지
경 흥 1888. 8.20. 개시장 조 · 아육로통상장정 잡거지
목 포 1897. 10. 1. 개항장 외국사신들에게 통고 각국 공동 조계
진 남 포
군 산
성 진
1899. 5. 1. 개항장 외국사신들에게 통고 각국 공동 조계
마 산 각국 공동 조계, 일본 전관거류지, 러시아 조차지
평 양 1899.11.13. 개시장 주한사신단의 선언 잡거지
의 주 1904. 2.25. 개시장 한국정부의 선언 잡거지
용 암 포 1904. 3.23. 개항장 한국정부의 선언 잡거지
청 진 1908. 1. 7. 개항장 한국정부칙령 잡거지

1876년 우리 땅에 처음으로 개항장을 설치하게 하여 등장한 세력은 일본이었고, 뒤를 이어 중국은 1882년, 영국 · 미국 등 서구 각국은 1883년과 1884년에 걸쳐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위의 개항장 · 개시장 중 의주 · 용암포(龍巖浦)의 경우처럼 명목뿐인 개항장도 있었고, 부산 · 목포 · 군산 · 청진의 경우처럼 일본의 독무대인 예도 있었다. 우리땅에 있어서의 개항장 · 개시장의 역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된 청일 · 러일 · 영일 등 열강끼리의 각축전이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개국을 강요하던 당시부터 한반도를 그들의 지배 아래 둘 속셈으로 ① 부산 · 원산 · 인천에 설치된 그들 전관거류지의 경영에 전력을 기울였고, ② 그 밖의 개항장 · 개시장에서도 각국 공동조계 중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③ 조계 안팎의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사 모아서 개항장 · 개시장을 그들의 경제거점 및 군사침략의 교두보로 삼는 한편, ④ 개항장 · 개시장 이외 외국인의 거주 · 통상이 금지되어 있던 대구 · 함흥 · 전주 · 개성 · 수원 · 진주 · 밀양 · 김천 · 제주 · 해주 · 황주 등 내륙지방 도시에까지 침투하여 거주, 통상함으로써 일본 식민지화의 선봉으로 활약하였다.

개항장 · 개시장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각기 자기 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의 무역선과 정기선이 드나들면서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고, 1900년을 전후하여 경인선(인천∼노량진간 1899, 한강철교 1900), 경부선과 마산선(1905), 경의선(1906) 등 철도가 부설되어 지역 질서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1884년에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갑신정변으로 곧 혁파되었으나, 1895년에 재개된 근대적 우편제도는 단시일 안에 전국에 보급되었고, 1885년 한성∼인천, 한성∼평양간에 전신이 개통된 뒤 19세기 말까지 전국의 주요 도시간의 전신망이 거의 연결되었다. 1902년 한성에 가정전화가 가설되었고, 이듬해 인천 · 평양에까지 확대되었다. 석유로 불 밝히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1880년대 초부터의 일이었고, 1885년 무렵 경복궁에 전등이 가설된 뒤 한성(1900) · 인천(1906) · 부산(1910)에도 전등이 보급되었다. 한성에 자전거인력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4년 전후의 일이었고, 전차가 운행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이어온 8도 330여 군(郡)의 지방행정구역은 1895년 23부(府) 337군으로 바뀌었고, 이듬해 1수부(首府) 13도(道)로, 다시 1906년 일제 통감부(統監府)가 발족되면서 1수부 13도 11부 332군으로 개편되어 그 해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1876∼1910년에 걸친 개항기가 비록 짧기는 하였지만, 이 사이에 이 땅의 기존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로 개편되는 중대한 변혁이 일어났는데, 지역질서 내지 도시질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개편과정에서 먼저 나타난 현상으로 지방도시의 성쇠부침이 뚜렷해진 것을 들 수 있다.

외국자본, 특히 일본인들에 의하여 활발히 개발되고 있던 부산 · 원산 · 목포 · 군산 · 마산 · 진남포 등의 개항 신흥지들은 현저히 도시화해 간 데 비하여, 강화 · 광주(廣州) · 양주 · 홍주 · 상주 · 성주 · 경주 · 나주 · 원주 · 강릉 · 안주 · 정주 · 길주 등 주로 내륙의 옛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원 · 청주 · 공주 · 전주 · 광주(光州) · 대구 · 진주 · 해주 · 평양 · 의주 · 춘천 · 함흥 · 경성(鏡城) 등 13도의 도치(道治)에는 각급 재판소 · 경찰서 · 세무서 · 보통학교 · 사범학교 · 우편관서 · 전신전화국 등이 설치되어 행정도시로서 그 면모를 새로이 갖추어 갔다. 한편, 경부선 · 경의선 두 철도의 개통으로 대전 · 신안주(新安州) 등지에 새 도시가 싹트고, 김천 · 천안 · 개성 · 황주 등 일부 전통적 지방도시도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10년을 전후한 우리 나라 도시의 인구와 면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1907년 5월 20일 기준으로 대한제국 경무고문본부(警務顧問本部)가 실시한 『한국호구표』와 제2차 『통감부통계연보』에 실린 1907년 말 외국인 호구를 자료로 인구 1만인 이상의 17개 도시를 [표 2]로, 5,000∼1만인의 40개 도시를 [표 3]으로 정리한 것이다.

[표 2] 인구 1만이상의 17개 도시

도시(범역)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구미인
한성부(용산 포함)
부산(부산면 · 사중면 · 사하면)
평양(성내 · 내천면 · 외천면)
인천(부내면 · 다소면)
개성(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제주(중면)
원산(원산항)
함흥(읍내)
해주(주내면)
경성(오촌사)
전주(부내)
통영(현 충무, 진남군 동면 · 가좌면)
대구(동상면 · 서상면)
마산(창원부 외서면)
진주(성내면 · 성외면)
삼랑진(밀양군 하동면)
충주(읍내 · 남변 · 북변)
218,225
39,743
31,576
27,896
27,701
16,686
14,845
13,707
13,327
12,839
12,617
12,485
12,150
11,881
11,139
11,060
10,561
199,325
23,478
26,181
14,993
26,261
16,572
10,341
12,840
13,074
12,104
12,198
12,037
9,638
8,582
10,633
11,060
10,561
16,643
16,040
4,843
11,467
1,309
113
4,225
857
240
※735
386
442
2,468
3,219
502
-
-
2,132
197
503
1,373
118
-
247
6
13
-
21
6
36
78
-
-
-
125
28
49
63
13
1
32
4
-
-
12
-
8
2
4
-
-
498,438 429,878 63,489 4,730 341
주: 鏡城에는 羅南洞 거주 일본인 158인 포함.

[표3]인구 5천∼1만의 40개 도시 지역

도시(범역)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구미인
경기 수원(읍내 · 남부면 · 북부면) 6,738 6,458 274 2 4
강원 원주(부내면) 5,061 5,061 - - -
철원(내변면) 5,076 5,076 - - -
이천(伊川, 동읍면 · 하읍면) 5,185 5,175 10 - -
충북 청주(북주내면 · 동주내면 · 남주내면) 6,925 6,925 - - -
제천(현우면 · 현좌면) 5,253 5,253 - - -
충남 공주(부내면 · 남부면) 6,805 6,539 194 64 8
전북 남원(읍내) 7,799 7,740 59 - -
전남 광주(성내 · 공수방 · 기례방 · 부동방) 5,432 5,039 387 - 6
목포(무안군 부내면) 7,347 4,396 2,873 72 6
경북 상주(내동면 · 내남면 · 내북면) 9,551 9,455 96 - -
경주(부내면) 8,553 8,494 59 - -
김천(김산군 내면 · 김천면) 7,872 7,450 397 25 -
안동(부내) 5,792 5,754 38 - -
예천(동 · 서 · 남 · 북 읍내면) 6,103 6,090 13 - -
성주(용산면 · 남산면 · 본아면) 5,396 5,382 14 - -
의성(남부면 · 북부면) 7,186 7,178 8 - -
경남 동래(동래면 수면) 8,548 8,355 193 - -
구포(동래군 좌이면) 5,310 5,156 154 - -
사상(沙上, 동래군 사상면) 5,241 5,241 - - -
창원(부내면) 5,964 5,805 159 - -
밀양(부내면) 8,205 7,827 374 4 -
울산(상부내면) 6,369 6,210 158 1 -
병영(兵營, 울산군 내상면) 5,521 5,516 5 - -
삼천포(사천군 문선면 · 수남면) 5,730 5,662 68 - -
고성(동읍면 · 서읍면) 7,724 7,643 81 - -
남해(읍내) 5,891 5,878 13 - -
거제(서부면) 5,071 5,057 14 - -
하동(덕양면) 5,422 5,392 30 - -
황해 배천(白川, 동촌면 · 서촌면) 5,500 5,500 - - -
봉산(동선방) 5,083 4,776 307 - -
황주(제안방) 6,326 5,936 383 7 -
평남 진남포(삼화항 항내) 9,269 6,367 2,729 170 3
개천(价川, 읍내 · 군서면) 5,718 5,703 15 - -
평북 의주(주내면) 5,658 5,443 188 27 -
박천(군내면) 5,403 5,378 25 - -
철산(고성면) 5,423 5,414 7 2 -
함남 북청(읍내) 6,521 6,337 184 - -
함북 성진(학성면) 8,840 8,492 336 6 6
명천(하우사) 6,976 6,965 11 - -

그리고 이상 57개 도시를 대상으로 1918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편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따라 도시부의 면적을 계산(한성부만은 1907년 당시의 면적)하여 이를 기초로 도시의 인구밀도를 [표 4]와 같이 얻어내었다.

[표 4]57개 도시 인구수 및 인구밀도표 (1907)

도시 인구 면적(㎢) 인구밀도
한성 218,225 250.61 871
부산 39,743 33.56 1,184
평양 31,576 6.50 4,858
인천 27,896 6.35 4,390
개성 27,701 13.99 1,980
청주 16,686 254.76 65
원산 14,845 6.74 2,203
함흥 13,707 2.38 5,759
해주 13,327 10.89 1,224
경성 12,839 373.05 34
전주 12,617 2.14 5,896
통영 12,485 5.93 2,105
대구 12,150 7.23 1,680
마산 11,881 9.78 1,215
진주 11,139 8.56 1,301
삼랑진 11,060 78.54 121
충주 10,561 91.35 116
수원 6,738 3.15 2,142
원주 5,061 38.42 132
철원 5,076 45.93 111
이천(伊川) 5,185 119.08 44
청주 6,925 0.82 8,445
제천 5,253 56.82 92
공주 6,805 2.16 3,150
남원 7,799 14.00 557
광주 5,432 2.14 2,538
목포 7,347 2.41 3,949
상주 9,551 89.93 106
경주 8,553 37.00 231
김천 7,872 4.49 1,753
안동 5,792 44.53 130
예천 6,103 41.15 148
성주 5,396 37.12 145
의성 7,186 69.19 104
동래 8,548 61.68 139
구포 5,310 47.32 112
사상(沙上) 5,241 38.22 137
창원 5,964 29.55 202
밀양 8,205 28.96 283
울산 6,369 40.75 156
병영(兵營) 5,521 30.63 180
삼천포 5,730 35.94 159
고성 7,724 32.11 240
남해 5,891 22.18 266
거제 5,071 22.67 224
하동 5,422 29.58 183
배천(白川) 5,500 51.37 107
봉산 5,083 62.69 81
황주 6,326 41.27 153
진남포 9,269 10.86 854
개천(价川) 5,718 59.70 96
의주 5,658 3.82 1,481
박천 5,403 46.47 116
철산 5,423 35.31 154
북청 6,521 79.74 82
성진 8,840 9.19 962
명천 6,976 108.73 64
756,225 2,699.44 280

이 세 개의 [표]를 통하여 새로 개항장이 된 부산 · 인천 · 원산 · 마산 · 목포 · 진남포 · 성진 등과, 경부선 연선인 대구 · 수원 · 김천 · 구포 · 삼랑진 · 밀양 등, 그리고 일본세력의 침투가 많은 경상남도지방의 도시화가 현저함을 알 수 있다. 개성 · 원주 · 충주 · 청주 · 전주 · 남원 · 상주 · 안동 · 해주 · 의주 · 함흥 · 경성 등 전통적인 도시의 인구규모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에도 청주 · 전주 · 함흥 · 평양 · 인천 · 목포 · 공주 등지의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29일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개항장제도를 폐지하고 식민지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지방제도 개정에 착수하여 1914년 4월 1일부터 시행에 옮겼다. 그들은 거의가 과거에 개항장 · 개시장으로서 일본인이 많이 거류하였고, 통감부시대에 일본 이사청(理事廳)을 두었던 경성(京城) · 인천 · 군산 · 목포 · 대구 · 부산 · 마산 · 평양 · 진남포 · 신의주 · 원산 · 청진의 12개 도시지역을 기초행정단위인 부(府)로 정하고(성진만은 면으로), 종래의 12부 317군을 220군으로 줄였으며, 4,336면을 2,521면으로 줄이는 동시에 종전의 부 · 군청소재지인 읍을 모두 면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에는 우리 국토를 반봉건적인 농업생산지로 영구히 머무르게 하여 그들의 식량공급지로 삼으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따라서, 이미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며 많은 부동산을 침탈하여 사실상 일본화한 곳만 도시, 곧 부로 정하여 집중 개발하고, 나머지 지역은 단순한 농산물생산지로만 묶어두려 하였던 것이니, 회사령을 제정하여 회사설립을 허가제로 억제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3 · 1운동을 계기로 종전의 무단강압정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방향을 바꾼 총독부는 회사령 폐지, 관리와 교원의 제복 · 착검(着劍)의 폐지, 태형(笞刑)을 벌금형으로 바꾸는 등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1920년 7월 29일자로 면제(面制)를 개정하여 수원 · 개성 · 영등포 · 청주 · 공주 · 대전 · 강경 · 조치원 · 전주 · 익산 · 광주(光州) · 김천 · 포항 · 진주 · 진해 · 통영(지금의 충무) · 춘천 · 해주 · 겸이포(지금의 송림) · 의주 · 함흥 · 나남 · 성진 · 회령의 24개 면을 ‘지정면(指定面)’으로 하였다. 전국 2,500여 개의 면 가운데서 비교적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재력도 넉넉하며 도시형태를 갖추었다는 데 그 지정이유가 있었다.

이들 지정면을 기능별로 분류하면 ① 도청소재지가 청주 · 공주 · 전주 · 광주(光州) · 진주 · 해주 · 춘천 · 의주 · 함흥 등 9개, ② 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요충이 대전 · 조치원 · 익산 · 김천 · 회령 등 5개, ③ 철도 연선이면서 상업의 중심지가 수원 · 개성 · 강경 등 3개, ④ 포항 · 통영은 어항으로 크게 발전한 곳, ⑤ 진해 · 나남은 일본의 대규모 군사기지, ⑥ 영등포는 경성(서울)의 관문, ⑦ 성진은 개항장이었던 곳, ⑧ 겸이포는 대규모 공장지대였다. 그러나 위와 비슷한 여건을 갖춘 전통적 지방도읍 중 지정에서 빠진 곳이 있었는데, 충주 · 천안 · 남원 · 나주 · 경주 · 안동 · 상주 · 동래 · 밀양 · 사리원 등이 그 예이다.

회사령 철폐, 관세제도 개정 등에 따라 일본 자본의 한반도 진출이 자유로워진 1920년 이후 이 땅에도 서서히 공업화의 기운이 일어나 한인노동자의 수가 늘어나는 한편, 3 · 1운동 이후 교육 · 산업에 대한 자각이 적극화, 진취화하면서 현저한 이농(離農)향도현상(向都現象)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종래의 부면제(府面制)로는 주민통제가 어렵다고 판단한 총독부는 1930년 12월 1일 지방행정제도를 개혁, 부 · 읍 · 면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미 있던 12부에 개성 · 함흥의 2개 지정면을 승격시켜 14부로 하고, 나머지 지정면 22개를 모두 읍으로 개편하되, 새로 충주 · 천안 · 정주(井州) · 여수 · 제주 · 경주 · 정주(定州) · 선천 · 강계 · 강릉 · 철원 · 북청 · 웅기 등 19개 면을 승격시켜 41개 읍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제도를 개혁한 1930년 10월 1일에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 부 · 읍의 인구는 193만3062명으로, 전국 인구 2105만8305명의 9.2%이었다.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 1930년대에 이르러 한반도를 종래의 식량 및 원료공급지 · 공산품판매시장으로부터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바꾸어갔다. 당시 이 땅에는 「공장법」이 시행되지 않아 노동력의 착취가 무제한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한 일본 자본의 대거 진출로 방적 · 시멘트 · 제분 · 제지 등 경공업공장이 여러 도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청진 · 나진 · 웅기 등의 항만은 일본 본토에서 만주대륙으로 통하는 최단거리라는 이른바 ‘북선(北鮮)루트’ 이론에 따라 1933∼1934년 무렵부터 북한지역 4개 도에 중화학공장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37년의 「중요산업통제령」의 시행과 중일전쟁의 발발로 군수공업 중심의 경제체제 재편성이 강행되었으며, 군사수송능력의 증강을 위한 교통 · 통신 시설 확충 등의 요인이 겹쳐 값싼 노동력이 도시로 집중되면서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1935년 대전 · 전주 · 광주(光州)가, 1936년 이후로 나진(1936) · 해주(1938) · 진주(1939)가 각각 읍에서 부로 승격되었다. 이리하여 1940년의 인구조사에 나타난 부의 인구는 1930년 당시의 배가 넘는 281만8460명에 이르렀고, 이 중 경성(서울)은 93만 명, 부산은 30만 명에 육박하였으며, 읍의 수도 1940년 말 80개로 크게 늘어났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0년대 후반기부터 신사참배 · 창씨개명 등 온갖 극단적 시책을 강행하던 일제는 1941년 12월 마침내 미국 · 영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생활에 내핍과 복종만 강요되었다. 따라서, 경제부문도 전시체제로 개편되어 식량의 강제공출과 배급제, 각 가정의 금속기물의 공출, 제한송전 또는 단전, 강제근로동원 등으로 우리 나라 전체는 결핍과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대개의 큰 도시는 공습대책의 일환으로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져 주택은 강제철거되면서도 어떤 도시에는 군수품의 생산 · 수송 등을 위하여 사람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941년부터 광복 때까지 5년 동안 성진(1941)과 흥남(1944)이 부로 승격되고, 약 40개의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광복일인 1945년 8월 15일 당시 22부에 123읍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수행을 위하여 남은 자원을 파악하려고 1944년 5월 1일을 기준으로 자원조사를 실시하였는데 22개 부의 인구 합계는 355만5246명으로 전국 총 인구 2591만7881명에 대한 비율은 13.7%이었다. 여기에 123개 읍의 인구 합계 약 264만8000명을 합한 부 · 읍 인구가 전체인구의 23.9%에 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강점 2년 뒤인 1912년 10월 훈령으로 전국 주요 도시의 시가지구획개정에 인가를 받도록 하여 가로(街路)의 길이 · 너비 등의 통일을 기하는 한편, 부령(府令) 11호 「시가지건축취체규칙」을 제정하여 용도지구지정(用途地區指定)과 건축규제를 실시하였다. 1934년 6월 다시 「조선시가지계획령」을 발하여 1934년 나진 시가지계획을 시작으로 1941년까지 경성(서울) · 부산 · 평양 · 대구 등 모두 37개 도시의 시가지계획과 경인지구(京仁地區)의 지역계획을 수립,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들은 중일전쟁에 이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거의 실시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상수도시설은 1880년의 부산상수도가 처음이었고 서울에서는 1908년에 준공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두 79개의 부 · 읍에 상수도가 시설되었으나, 급수능력이 적어 대다수의 도시민은 생활용수를 우물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전등은 1935년까지 부 · 읍에 전화사업(電化事業)이 완료되어 사용되었으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후 철저한 제한송전으로 램프나 호롱불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주택은 공급이 급격한 수요를 따르지 못한 데다가 총독부의 주택정책이 일본인 위주였으므로 한국인의 거주사정은 매우 나빠서 주요 도시에서까지 ‘토막집’이라는 불량 가건물이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현대

광복 당시 우리 땅에는 22부 123읍이 있었음은 위에 적은 바와 같다. 그 중 38선 이남에는 서울 · 부산 · 인천 · 대구 · 광주 · 대전 · 개성 · 목포 · 전주 · 군산 · 마산 · 진주 등 12개의 부와 76개의 읍이 있었다. 광복 후 남한에 거주하던 70여만 명의 일본인(군인 24만 포함)이 떠난 대신, 일본 · 중국 등 외지에서 살던 동포 120만 명이 돌아오고, 공산체제를 반대한 북한주민 약 48만 명이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도시에 흩어져 정착하였다.

이와 함께 권력과 부(富)와 자유를 찾아, 또는 교육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모여드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좌우익 사상대립에 사회적 불안을 느낀 사람들, 농지개혁으로 생활기반을 잃은 농촌의 지주층들도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후 처음 실시한 1949년 5월 1일의 인구조사에서 전국의 인구는 2018만9000명이었고, 서울시의 인구는 144만6000명이었으며, 14개 부의 인구 합계는 202만8000명으로서 시 · 부 인구 대 총인구 비율은 17.2%, 또 73개 읍의 인구 합계는 191만3000명으로서 시 · 부 · 읍 인구 대 전국 인구 비율은 26.7%에 이르렀다.

6 · 25전쟁의 3년 동안 99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8만 동의 주택피해, 전국 20개 시청 중 15개의 청사가 피해를 입었고, 국내 전체 제조업체의 70%에 달하는 4,673개의 공장이 전재(戰災)로 인해 가동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전재의 피해에도 지역차가 있어 시골보다 도시의 피해가 훨씬 컸고, 특히 서울 · 인천 · 천안 · 대전 · 김천 · 진주 · 춘천 · 원주 · 포항 · 평택 · 왜관 · 성주 · 하동 등 격전지는 도시 전체가 거의 파괴되다시피 하였다. 전화를 피하고자 많은 도시인이 농촌으로 피난가고, 인민군의 남진에 따라 시골사람들 중에서도 대구 · 부산 등지로 피난가는 사람이 많아서, 일시적이나마 이러한 도시 · 농촌 사이의 많은 교류가 휴전 후 도시 지향의 심리적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한때 압록강변까지 전진하였던 국군이 후퇴할 때 200만 명에 가까운 북한주민이 따라서 월남하여 주로 서울 · 부산 · 인천 · 대구 · 대전 · 춘천 · 원주 등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고, 군대생활을 통하여 도시생활을 경험한 시골 젊은이들이 제대 후 도시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광복 후 부쩍 늘어난 고등학교 · 대학 등 고급학교를 찾아 시골학생이 도시로 몰리고,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그대로 도시에 눌러 살게 되는 일까지 겹쳐 도시화의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리하여 1955년의 센서스에서 전국의 시 인구는 528만1000명, 읍 인구는 179만1000명이었는데, 1960년의 센서스에서는 시 인구 699만7000명, 읍 인구 225만9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원래 공업이 부진한 데다가 약간 남아 있던 생산시설마저 파괴된 탓으로 일자리는 없는데 인구만 집중되어, 1950년대 후반기의 우리 나라 도시화는 이른바 ‘고용기회를 웃도는 인구의 집중’이라는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 도시화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따라서, 원조물자 · 구호물자의 판매 · 소비를 통한 제3차산업에의 과잉종사를 일으키는 한편, 서울 · 부산 · 인천 등지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판잣집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 지식과 의지만 가지고 도시로 몰려온 젊은이들에게 취업의 기회는 없고, 부정부패와 퇴폐풍조만이 가득 찼으니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마침내 4 · 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제3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시행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1962∼1966년의 제1차, 1967∼1971년의 제2차로 이어져 갔다. 이에 따라 1960∼1964년 사이에 매년 5.5%를 기록하던 경제성장률이 1965∼1969년의 5년간은 연평균 11.7%로 뛰어오르고, 특히 제조업 분야의 성장률은 1960년대 전반기의 9.4%에서 후반기에는 22.6%라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급격한 공업화에는 이미 도시에 집중된 인구가 거대한 소비시장을 이루었던 점이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 공업화는 동시에 새로운 인구를 도시로 유도하기도 하여 1970년의 센서스에서는 시 인구의 합계가 1270만7000명, 읍 인구의 합계가 280만 명으로, 시 · 읍 인구의 합계 1550만9000명은 전국인구 3088만2000명의 50.2%가 되어 마침내 도시인구율이 50%선을 넘어섰다.

개발도상국의 도시화과정에서 항상 문제되는 것은 인구가 몇 개의 대도시로 편중 집중되는 현상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1961∼1970년의 10년간 대도시집중현상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주요 도시의 인구수는 1960년과 1970년 사이에 서울이 244만 명에서 553만 명으로, 부산이 166만 명에서 187만 명으로, 대구가 67만 명에서 108만 명으로 늘어났고, 인천 · 광주 · 대구도 50∼70%가 증가되었다. 그 결과 이들 대도시는 새로운 주택지 조성과 도로의 신설 · 확장 등 급증하는 인구수용대책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와 같은 공공개발사업은 동시에 민간의 개발의욕을 자극하여 서울의 경우 1966년 6∼9층의 건물이 111동, 10층 이상이 18동밖에 없었으나, 1970년 6∼9층이 487동, 10층 이상이 122동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대도시의 확장과 고층화에도 불구하고 1950년 이후의 인구과잉집중은 심각한 주택난을 초래하여 서울을 비롯한 부산 · 인천 등지마다 판잣집과 같은 불량 무허가주택이 난립하였다. 서울의 경우 1966년 13만7000동, 1970년 6월 18만8000동의 무허가건물이 있었고, 봉천 · 구로 · 시흥 · 상계 · 미아 등 지역에는 대규모의 빈민촌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기의 급속한 개발은 졸속개발을 수반하기도 하여, 서울특별시가 세운 400동의 서민아파트 중 마포 와우산 기슭의 와우아파트 1동이 1970년 4월 8일에 무너져 사망 33명, 중상 19명의 인명피해를 낸 와우아파트붕괴참사가 있었고, 1971년 8월 광주(廣州) 대단지에서는 난동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1971년 말 167명의 사망자를 낸 대연각(大然閣)호텔, 1972년 말 사망 51명, 부상 76명을 낸 시민회관, 1974년 11월 사망자 88명을 낸 대왕(大旺)코너 등의 대형화재를 낸 건축물들은 모두 1960년대 후반기에 건설 또는 준공된 것들이었다.

1970년대의 도시화를 유도한 큰 요인 중의 하나는 고속도로망 형성이었다. 1969년 7월 경인선, 1970년 7월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전국의 일일생활권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어 1973년 11월 호남 · 남해선, 1975년 10월 영동 · 동해선, 1977년 12월 구마선이 개통되면서 전국토에 고속도로망이 형성되어 도시간 이동의 시간적 거리를 대폭 단축시키고 직접생활권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뿐 아니라 경제개발 · 지역개발에 엄청난 촉진효과를 거둔 동시에 “도시에의 인구집중은 송출지(送出地)로부터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라벤슈타인(Ravenstein)의 법칙에 따라 지방인구의 가속적인 대도시 집중과 지역간 인구이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반면, 통과지나 경유지의 중소도시들은 인구가 감소되는 결과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한편,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추진된 울산 공업단지가 기대하였던 성과를 거두자, 이에 따라 고도의 경제성장에 기여함과 아울러 인구와 산업의 대도시 과밀집중을 막는 방안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공업단지가 조성된 것도 1970년대 도시화의 한 특징이었다. 1969년 7월 구미, 1970년 9월 포항, 1974년 여천, 1977년 반월 등 공업단지가 각각 기공되었으며, 이 밖에 인천 · 성남 · 안성 · 춘천 · 원주 · 강릉 · 청주 · 충주 · 대전 · 천안 · 전주 · 군산 · 정읍 · 광주 · 목포 · 나주 · 순천 · 대구 · 오산 · 온산 · 양산 · 부산 등지에 대소규모 공업단지가 조성, 가동되어 많은 인력을 흡수하였다.

1970년대 도시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72년 말에서 1973년 말에 걸쳐 일어난 제1차 유류파동, 1978년 말에서 1979년에 걸친 제2차 유류파동이었다. 이 두 차례의 충격으로 우리 나라의 경제는 고도성장에서 저성장으로 전환하였고, 이에 맞추어 도시정책도 종전까지의 개발 · 확대 일변도에서 개발 · 보전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실을 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전국 주요 도시 주변 5,397㎢에 광역의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한 것은 도시의 무질서한 평면확대를 방지하는 시책이었고, 하수처리장 · 위생처리장 · 도시가스사업 등은 도시시설의 내실화를 위한 조처들이었다.

두 차례의 유류파동으로 국내외 경기가 침체, 위축되고 울산 · 포항 · 구미 · 여천 등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공업단지에서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도 서울 · 부산 · 대구 등 거대도시로의 인구집중은 계속 강세를 보여 개발의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서울에는 영동 · 잠실 지구에 1000만 평의 대규모 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었으며, 서울역∼청량리 간 9.5㎞의 지하철과 98.6㎞의 수도권전철이 개통된 것은 1974년 8월이었다. 여의도 · 영동 · 잠실 지구에 고층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대도시의 땅값이 폭등하여 사회문제화한 것도 1970년대의 일이었다.

1975년의 센서스 결과에 의하면 읍을 포함한 도시인구의 총수는 2053만6000명으로 전국 인구 3744만9000명의 69.4%에 이르렀다. 1971∼1975년의 도시화는 1960년대 후반기로부터 이어온 공업화와 그에 따른 고도의 경제성장의 결과이며, 1976∼1980년에 일어난 도시인구율 10.2% 증가는 그 사이 도시, 특히 공업단지가 소재한 지방도시의 인구집중 결과였다. 또한 1979년 5월부터 53개의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이전에는 농촌인구였던 부분이 도시인구로 집계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 조처로 47개의 군청소재지 면이 읍으로 승격됨으로써 전국의 군청소재지는 모두 읍 이상의 도시가 되었다.

광복 이후 청주 · 춘천은 미군정하인 1946년에, 이리는 1947년에 부로 승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49년 7월에 개정된 「지방자치법」으로 부를 시로 바꾸고, 같은 해 수원 · 여수 · 순천 · 포항 · 김천을 시로 승격시켰다. 6 · 25전쟁 후 서울 · 부산에 인구집중이 현저하여 1962년 서울을 국무총리 직속의 특별시로, 부산을 정부 직할로 개편하였다.

1955년 이후 연도별 시 승격상황은 다음과 같다. 1955년 제주 · 강릉 · 경주 · 충무 · 원주 · 진해, 1956년 충주 · 삼천포, 1962년 울산, 1963년 의정부 · 천안 · 안동 · 속초, 1973년 안양 · 성남 · 부천, 1978년 구미, 1980년 동해 · 창원 · 제천 · 영주, 1981년 광명 · 송탄 · 동두천 · 태백 · 정주(井州) · 남원 · 금성(錦城) · 영천 · 김해 · 서귀포가 각각 읍에서 시로 승격되고, 대구와 인천이 직할시가 되었다. 그 결과 1985년 1월 1일 현재 우리 나라에는 특별시 1개, 직할시 3개, 시 46개, 읍 187개가 있다.

[표 5]도시농촌별 인구 추세 (단위 : 1천명)

연도\구분 전국인구 도시인구(읍포함) 농촌인구
1949 20,189 5,487 26.7% 14,702 73.3%
1955 21,526 7,072 32.9% 14,454 67.0%
1960 24,989 9,256 37.5% 15,733 63.0%
1966 29,193 12,463 42.7% 16,730 57.3%
1970 31,466 15,729 50.2% 15,654 49.8%
1975 34,709 20,536 59.2% 14,173 40.8%
1980 37,449 25,982 69.4% 11,467 30.6%

[표 6]25년간 도시규모별 인구추세 (단위 : 1천명)

연도\구분 전국인구 서울인구 6대도시인구 (서울포함) 전시인구 읍인구
1955 21,526 1,575 3,825 5,281 1,791
1960 24,989 2,445 5,131 6,997 2,259
1966 29,209 3,805 7,331 9,810 2,653
1970 31,446 5,433 9,874 12,929 2,800
1975 34,709 6,889 12,568 16,794 3,742
1980 37,449 8,367 15,598 21,441 4,542

[표 5]은 1949∼1980년의 도시와 농촌의 인구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1949년 26.7%, 1955년 32.9%밖에 안 되던 도시인구율이 1970년 50%, 1975년 59%, 1980년 69.4%에 이르렀다. [표 6]은 6 · 25전쟁 후인 1955∼1980년까지 25년간의 도시규모별 인구증가추세를 알기 위한 표이다. [표 6]을 통하여 1956∼1980년간의 전국 인구증가가 1592만3000명인 데 비하여, 시부(市部)의 증가수는 1616만 명으로 101.5%가 시부에서 늘었고 군부(郡部)에서는 그만큼 절대수가 줄었으며, 시부 가운데서도 서울 ·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의 6대 도시에서 전국 증가수의 73.9%가 늘었고, 특히 서울에서만 706만 명이 늘어 전국 증가총수의 44.4%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는 1966년까지는 농촌지역에도 인구가 점점 늘어 농촌노동력의 과잉이 우려되었는데,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7년부터는 전반적으로 감소현상이 일어났다. 1981년 7월 현재의 지방행정구역을 기준으로 1967∼1980년간에 전국 139개군에서 321만4000명의 인구가 감소되고, 경기도 · 제주도의 21개 군을 제외한 7개 도 118개 군의 감소수는 336만2000명으로서 군평균 21%의 감소를 나타냄으로써 심각한 인구과소지역(人口過疎地域) · 낙후지역의 문제를 낳았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도시화는 또 한번 크게 변화한다. 그 첫 번째 요인이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이었다. 이른바 3저 현상(저환율 · 저국제금리 · 저석유가격)으로 한국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1980년에 1인당 GNP가 1,600달러였던 것이 1985년에 2천달러, 1988년 4천달러로 급성장 됨으로써 인구의 도시집중, 그것도 대도시집중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1986년 11월에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하였고 이어 1989년 1월에는 대전시도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인이 1986년의 아시아게임,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였다. 이 두 차례의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서울과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 그리고 요트경기 등이 개최된 부산에 대규모 투자가 전개되었다. 도심부재개발, 불량지구 재개발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서울 한강변의 올림픽도로, 올림픽대교 등을 위시하여 많은 교통시설의 신설 · 확장 · 재정비가 실시되었다.

세 번째의 요인이 1980년의 주택 500만호 건설, 1988년부터 시작된 주택 200만호 건설이었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 의해 주장된 500만호 건설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그 부산물로 1980년 12월에 「택지개발촉진법」이라는 법률이 제정 · 공포되었으며 서울시내의 개포지구 · 고덕지구 · 상계지구 · 중계지구 · 목동지구 등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낳게 하였다. 위 5대 지구의 면적합계는 2천평방미터가 넘어 세계의 도시개발사상에 유래가 없는 대규모였다. 주택 200만호 건설은 1988년부터 1992년까지의 5년간에 전개된 사업이었으며 서울근교에 분당 · 일산 · 중동 · 평촌 · 산본 등 5개의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되어 수도권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된다.

86 · 88 양대행사와 주택 500만호 · 200만호가 추진된 과정에서 서울과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엄청난 인구증가가 계속되었다. 서울의 인구수는 올림픽이 개최된 88년에 1천만명을 넘어 1992년에는 1,100만에 육박하게 되었다. 또 서울 · 인천 · 경기도 인구수는 1990년에 1,858만으로 전국인구수(4천 287만명)의 43.4%에 달하게 되었고 1995년에는 수도권 인구수가 2천만명을 넘어 전국인구수의 44.4%에 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울 및 수도권에의 인구집중은 전 국토에 점하는 서울에의 1극집중이라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전 국토면적중 겨우 0.6%의 면적밖에 안 되는 서울에 전국인구수의 24.5%, 국민총생산(GNP)의 3분의 1이상, 금융기관 여 · 수신고의 각각 3분의 2이상, 종합소득세(신고분)의 40%이상, 법인세의 70%이상, 의사수 · 자동차 등록대수의 각각 40%이상이라는 엄청난 다집적 현상을 낳게 되었다.

네 번째 요인은 1991년부터 다시 시작된 지방자치였다. 이 지방자치의 시행으로 도시재정의 확대, 지역별 개발정책, 지역이기주의 등으로 모든 도시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직할시라는 명칭이 광역시로 바뀌는 것은 1995년부터의 일이고 1997년에는 울산시도 광역시로 승격한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이하게 된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의 도시현상을 총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서울과 서울을 둘러싼 수도권의 비대화 현상.

둘째 서울특별시 및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 · 울산 등 6대 광역시에의 인구집중현상. 1995년 현재로 서울의 인구수 1천 23만, 부산 389만, 대구 248만, 인천 236만, 광주 130만, 대전 130만, 울산 100만으로써 위 7대도시 인구수 합계가 2,256만 명으로 전국인구수(4,598만명)의 49%에 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 대도시에 바로 인접한 도시권 인구수를 합하면 전국 인구수의 거의 6.70%가 이들 대도시권에 집중하고 있다.

셋째 도시군 형성의 현상. 서울과 수도권, 부산 · 대구를 중심으로 한 부산 · 대구 도시권, 이렇게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집단현상 외에도 전국에 걸쳐 여러개의 도시군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에서부터 고찰하면 속초 · 강릉 · 동해 · 삼척 도시권, 포항 · 경주 · 울산 · 부산으로 연결되는 도시군, 마산 · 창원 · 진해권, 진주 · 사천 · 통영권, 광양 · 여천 · 여수 · 순천권, 광주 · 나주 · 목포권, 전주 · 익산 · 군산권 등, 전국을 여러개의 도시 군으로 분류할수 있게 되었다.

넷째 전국토의 도시화 현상. 지난날 도시라는 개념은 농촌과 대비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도시 · 농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농촌은 도시의 외연일 뿐이며 도시와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그와 같은 현상을 가속화한 것은 1996년 3월 1일부터 실시된 시 · 군 통합정책이었다. 종전에는 읍이 시로 승격하면 종전의 군 행정구역에서 독립되었는데 이 정책의 시행으로 시가 군을 흡수하게 된 것이다. 즉 시라는 행정구역안에 읍 · 면이 공존하는 도농일체가 시행된 것이다. 이 때를 계기로 많은 시의 명칭도 바뀌게 된다. 전북 이리시가 익산시가 되고 경남 충무시가 통영시, 삼천포시가 사천시가 되었다. 즉 이리시 ·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익산시가 되었고 충무시 · 통영군이 합치면서 통영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도농일체의 체제와 함께 전국민의 생활양식도 일체화된다. 종전에는 분명히 도시적생활 · 농촌적생활에 구분이 있었다. 그러나 교통 · 통신 · 정보매체의 발달로 농촌적 생활양식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린다. 농업과 비농업이라는 차이는 있으되 농촌적 생활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이다. 모든 농촌에도 자가용 승용차와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동시에 보급된 것이다. 전국이 1일생활권에서 동시생활권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20세기 인류문명이 도달한 위대한 성과였다.

21세기의 도시사회는 과연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인구의 노령화, 소자화(少子化) 및 전국인구의 절대수 감소, 농업인구의 격감 등의 요인과 전국토의 고속전철망 건설 등으로 지역질서가 크게 바뀌어지는 한편 수도권의 범위확대, 수도권과 동남권(포항 · 경주 · 울산 · 부산 · 진주 · 여수 · 목포)에의 양극화현상,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도시가 연결되는 세계도시화현상(ecumenopolis)도 전망되고 있다.

우리나라 도시의 생태학적 특징

전통시대 우리 나라 도시의 생태적 특징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도시의 형성과정에 풍수지리설이 크게 작용한 점이다. 즉, 도시의 입지적 선택, 주거지역 선택 등 도시 내부구조의 형성과정에 풍수지리설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양 도읍지 선택이 그 예로서 궁궐의 위치, 성곽과 사대문 · 도로 · 주택지의 선정이 모두 풍수지리설의 기본원칙 안에서 짜여진 것임을 볼 수 있다.

둘째, 도시의 내부구조 형성에 자연환경과 종교적 요인보다는 정치 · 행정적 요인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즉, 행정기관이 위치한 지역이 도시의 중심지가 되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가지 기능적 사회지역이 형성되었다. 행정부의 청사를 중심으로 관리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고, 그 다음 관리들의 생활필수품 공급을 위한 시장 및 상가, 수공업지역, 공노의 주거지역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부구조의 형성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어서, 유교문화권의 특이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전개된 급작스러운 도시화과정은 전통적인 우리 나라 도시의 생태학적 구조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새로운 생태학적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 우리 나라 도시는 줄곧 인구의 집중화와 집권화의 단계에 있었으며, 1980년대 초반에도 분산이나 분권화의 경향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보다 넓은 국가적 차원과 대도시 중심의 지역사회 구조는 상당히 체계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1983년 12월 정부의 수정5차5개년계획 가운데 국토발전계획을 보면 수도권의 인구 및 기능분산과 아울러 지방중심도시의 개발을 꾀하고 있다. 대구 · 대전 · 광주를 성장거점도시로 육성시키고, 그 밖의 지방도시에 공업을 육성함으로써 지역적 체계를 확립하는 동시에 국가 전체를 체계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계획의 기본동기는 대도시에의 지나친 인구집중과 기능의 집권화를 인위적으로 분산시키려는 노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치 · 교육 · 문화 등의 지방분산이 우선되지 않는 한 인구의 지방분산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우리 나라 도시의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도시공동체의 급격한 기능분화와 공간적 확장 내지 재배치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의 생태학적 변천과정을 구미의 도시와 비교하여 특기할 만한 사실들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아직도 우리 나라의 도시들은 생태학적 과정에서 집중화와 집권화과정에 있기 때문에 도시의 모든 기능이 중심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도시의 종주화현상(宗主化現象, primacy)이 국가의 모든 기능을 서울에 집중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인구도 서울에 집중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② 1970년대 이후 창원 · 구미 · 포항 · 울산 등의 많은 신생도시가 정책적인 결과에 의하여 건설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도시생태구조가 인위적인 도시정책과 인공구조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위적 환경구성은 자연질서의 기본원칙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결국 공동체의 기본적 통합에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된다.

③ 구미(歐美)의 경우 공업지역은 주로 외곽 특정지역에 완전 분리되어 있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 아직 많은 소규모 공장들이 주거지역이나 상업지역 등에 흩어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의 기능적 분화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④ 구미의 경우 상업지역은 주거지역의 중심에 대규모 상가의 형태로 집단화하거나 사업중심구역에 백화점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우리 나라의 경우 소규모 상점들이 중심에서 주변에 이르는 큰길 가에 늘어서 있거나 재래의 5일장 형식으로 된 지역별 시장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서울의 동대문시장부산의 국제시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나라 상업지역분화의 또 하나의 특성은 구미의 경우에서처럼 상업지역이 주택 및 서비스지역과 분리되는 대신, 도시 중심의 인구 및 기능의 집중과 교통수단의 미발달로 인하여 상가 내에서 상품 품목별 지역분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울의 경우 골동품은 인사동, 서적은 청계천 6가, 포목은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 한약은 종로 2 · 3가 등으로 지역적 분화현상을 보인다.

⑤ 구미의 도시에서 호텔 · 식당 등 서비스업체는 주로 도시 중심이나 유동지역 그리고 고속도로 진입로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 도시의 경우 호텔이 주로 도시중심 부근에 흩어져 있으며, 소형 여관과 식당들은 철도역 주변에 밀집하여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도시간의 상호작용이 구미의 도시만큼 빈번하지 않으며, 서울과 부산 · 대구 · 대전을 제외하고는 서비스지역의 분화현상도 뚜렷하지 않다.

⑥ 우리 나라 도시의 주거지역 특성을 살펴보면 구미의 도시생태와 현저한 차이점을 보인다. 구미의 도시에서는 주거지역의 분리현상이 뚜렷한데, 이러한 분리현상은 도시공동체의 구성원이 다양한 문화적 · 인종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도시기능이 극도로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도시 중심에는 주로 하층계급의 유색인종들이 거주하며 중상층 이상은 교외에 거주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와 반대로 중산층 이상이 도심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농촌에서 이주해온 저소득층의 주민들이 도시 주변에 정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우 중산층 거주지에 유색인종이나 저소득층이 함께 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우리 나라의 도시에는 아직도 주거지역의 분화가 엄격하지 않아서 상하계층이 혼합된 형태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의 중산층 주민의 도시집중화현상은 자가용 보급의 한계점과 교육 및 문화적 집중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⑦ 구미의 경우 경제적 지위와 인종적 배경으로 도시 중심에 슬럼화현상이 나타나며, 슬럼지역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빈곤문화를 형성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경제적 지위가 구미 슬럼지역 주민들과 비슷하더라도 구미에서와 같은 슬럼화현상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60∼1970년대 급격한 도시화과정에서 도시 외곽지대에 무허가촌이 많이 형성되어 구미의 슬럼과 비슷한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무허가촌 주민들은 기존 도시주민들과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구미와 같은 빈곤문화를 형성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성취동기가 강하여 현재의 주거지는 단지 계층 이동의 임시 거처 구실을 할 따름이다.

⑧ 주거지역의 과밀현상과 대단위 아파트지역의 출현이다. 모든 도시에는 기능이 집권화되어 있어 중심지역의 토지가격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극도로 높으며 인구도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거지역에는 정원이 없는 가옥들만이 밀집되어 있고, 밀집된 주택에는 많은 가구가 입주하여 주거생활의 과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주거지역 과밀은 정신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인간관계를 유발시켜 근린관계 형성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밀집된 주택지역은 물리적 근린집단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웃간의 상호작용에 의한 근린집단의 형성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주거지역 과밀의 원인은 급격한 인구의 도시집중과 주택공급의 부족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정부는 1970년대부터 도시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하여 대단위 아파트단지의 조성을 장려해 왔으며, 결과적으로 짧은 기간에 많은 아파트단지가 주요 도시에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아파트지역이 출현하게 된 기본동기는 도시공간의 한계성이라는 물리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아파트단지의 입지적 선택과 구성내용은 인위적인 것이다.

특히,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는 고유의 주택형태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주거형태이며, 주택구조는 한두 사람의 아파트 설계자가 수백 또는 수천 세대의 주택을 비슷한 구조로 설계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파트건설업체의 설계가 입주자의 경제적 · 사회적 지위를 결정지어 동질적인 사회지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만일,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중류층이거나 하층계급으로 동질화되면 도시의 계층분화를 심화시켜서 도시공동체의 통합에 문제점을 야기시킬 수 있다.

도시인의 생활양식

도시인들의 사회관계는 농촌주민의 사회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도시는 이질적인 개인들이 모여 사는 비교적 크고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도시생활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의 익명성은 도시인들의 사회관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사람들과의 접촉은 많지만 깊은 관계를 맺는 경우는 드물다. 즉, 도시의 개인들은 농촌지역에서 보는 것과 같은 밀접한 개인관계를 아주 소수의 사람하고만 유지할 뿐 대부분의 관계는 이익과 편의에 의하여 맺어진다. 혈연이나 지연에 의하여 연결된 사람들로부터 개인은 덜 구속받으며,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과 계산에 의하여 관계가 이루어진다.

서구지역에서는 점진적인 변화에 의하여 도시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시의 시민으로서 지역 공동체의식이 매우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우리 나라 도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공동체의식이 그리 강하지 못하다. 현재 도시민들 중에 도시에서 태어난 인구보다는 농촌지역에서 태어난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따라서 도시인들이 가지는 의식은 전통적인 농촌의 가치관에서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치관의 보수성이 최근 급격한 도시화과정 속에서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 내의 산업구조의 변화와 생활양식의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보다 급격하기 때문에 그만큼 도시 내에서 상실감을 느끼는 계층이 많다.

우선 도시인들은 거주지의 이동횟수가 잦다. 이는 직업상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는 도시 내 잦은 사회적 · 경제적 이동에 의하기도 한다. 급격한 도시의 팽창으로 확장되어 가는 도시영역과 부동산의 가격유동이 그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밖에 자녀교육의 편의를 위하여, 더 나은 교통 요충지를 위하여 이동을 한다. 이렇게 자주 거주지를 바꾸기 때문에 지역에 기반을 둔 지속적 인간관계는 유지되기가 힘들다. 이웃관계는 잠시 거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설정되며, 특히 인구이동이 심한 아파트단지 내에서는 인사 없이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행정적으로 장려되는 반상회모임으로 명목상의 이웃관계가 유지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시적 상황에서는 이차적 관계가 더 주도적이다. 즉, 물리적 접촉은 다수인들과 하고 있지만 긴밀한 사회적 접촉은 드물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회관계는 일시적이며 표면적인 차원에서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시인은 이러한 사회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자신들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도시에서 직장과 가정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직장 내에서 세분된 전문인 · 기능인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며, 직무를 떠나서는 전혀 다른 유형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일과 오락은 농촌지역에서보다 훨씬 더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휴식과 오락의 중요성이 크다. 이러한 도시인의 필요성에 따라 오락기관 · 유흥업소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직무 후의 오락은 가정과 직장과의 괴리로 인하여 각 개인단위로 이루어지며, 선진국의 경우와 같이 가족단위의 오락이나 휴식은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서는 가족단위의 휴식을 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도시의 가족은 대부분 핵가족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는 도시인의 개인주의적 성향, 거주환경 · 직장관계에 의하여 점차 증가하고 있다. 자녀수도 농촌에 비하여 훨씬 적어 소가족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가족 규모상의 축소에 힘입어 도시인들의 사회적 · 공간적 빠른 이동이 가능해졌다. 즉, 개인과 가족은 각 영역에서 가장 경제적 이득이 되는 곳으로 재빨리 이동할 수 있다.

자신의 이기적 실리추구와 함께 타인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은 도시인의 인간관계에서 자주 나타난다. 주변의 낯선 타인과의 대화가 용이하지 않고, 다양한 개인의 이질성에 민첩하게 적응하기 위하여 고정관념에 따라 대인관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도시에서는 개인성은 높지만 개인으로서 평가받지는 못하고 있다. 개인들은 범주화된 다수로서만 중요성을 지닌다. 따라서, 개인들은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각자의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집단과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이해집단들은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농촌지역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전인적인 관계가 맺어지기는 힘들다.

많은 경우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조건에 의하여 구성원들이 형성되어 계층화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집단의 예로는 등산 · 낚시 등의 동호인집단이나 자선단체 · 자원봉사자단체 · 정당 · 소비자단체 등이 있다. 개인의 필요에 따라 참여하는 기능집단을 보조하는 이해집단도 파생될 수 있다. 학부형간 친목회, 동년배 주부들간의 친목계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이들은 약화된 도시인들의 동료의식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충하고 있다.

그 밖에도 친척들간에 친목을 위한 계, 학교 동창회, 동족집단의 모임인 화수회 등도 도시지역에서 매우 활발하다. 이는 도시인들이 상실한 일차적 사회관계의 회복을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들에서도 도시인들은 개인의 경제적 이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회 · 경제적 출세를 위하여 이러한 모임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모임에서도 각자의 위치를 과시하고 계산하는 도시인의 이기주의가 작용하고 있다.

도시적 이질성으로부터 벗어나 인격적 · 개인적 관계로 유지하기란 쉽지가 않다. 타인에 대한 평가는 순간적이며 표면적인 기준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도시인들은 농촌지역 사람보다 외부적 조건에 민감하다. 시각적 상품이나 예술이 도시지역에서 발달하게 되며, 다수인에게 자신을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인구집중 속에서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려는 시도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다수인들의 경향은 대중매개체에 의하여 형성, 조장, 전파되고 있으며, 도시문화에서 신문 · 라디오 ·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개체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대중매체를 통한 광고에 의한 소비촉진과 찰나적이며 향락적인 문화전파가 이루어지고, 타인들과의 인격적 교류가 드문 현대 도시인들은 대중매체를 통하여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대중매체로 소개되는 생활양식은 도시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도시는 대중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 표준화된 소비유형은 대량생산된 상품의 유통과 함께 도시인의 보편화 ·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더구나, 모든 대중매체의 정보중심이 서울에 집중되어 서울의 문화가 다른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통신시설의 발달에 따라 서구문명이 쉴새없이 소개되고 있는 곳이 도시, 그 중에도 서울이다.

현재 서울에는 서구의 최신유행과 생활유형을 받아들여 생활하는 층이 세계주의적 추세에 발맞추어 존재하고 있으며, 세계 어느 대도시와 비교해도 차이가 없는 건물과 상업 · 사업지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같은 도시 내에서도 가장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 우리 나라 도시성의 주요한 특징은 경제에서 이중구조가 존재하는 바와 같이, 문화에서도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신시설을 갖춘 주택 · 아파트 · 슈퍼마켓과 함께 전통적 시장 · 가옥 · 구멍가게 등이 섞여 있다. 서구적 이념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농촌으로부터 아주 최근에 이주한 이주민들은 비교적 전통적 가치관을 견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규모화된 기업 · 행정의 관료화 · 합리화와 함께, 전통적 가치관 중 관료주의와 병행될 수 있는 권위주의 체제가 여전히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급격한 도시화의 속도와 함께 도시화가 지나치게 중앙집권적 성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도시의 이러한 문화적 이중성은 개인에게 가치관의 혼란과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도시민은 책임감 있는 사회의식이나 가치관을 지니기보다는 극히 이기주의화될 가능성이 많으며, 특히 새로운 도시적 가치관을 수용할 때 야기될 수 있는 인간 소외감에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들이 생겨 도시 내 병리현상의 일부를 만들고 있다.

도시문제

급격한 도시화의 진행과 더불어 인구 · 기능이 도시로 집중하였으나 그에 대한 대책이 적절하게 뒤따르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각종의 문제. 즉 도시문제가 실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가 전개되면서부터였다. 18세기말부터 시작한 산업혁명을 거치는 동안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각국에서 도시의 공업화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빈부격차 · 질병 · 불결 · 주택부족 등 각종문제가 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후 생산력의 급증과 대량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선진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 아프리카 · 라틴아메리카 등 개발도상국 · 후진국에서도 도시문제가 발생하였으므로 전 세계적으로 그 심각성이 가중되었다. 도시문제에는 인구문제 · 주택문제 · 교통문제 · 환경문제 · 방재문제 및 도시특유의 매춘 · 범죄 · 마약중독 · 정신병과 같은 병리현상 등 해결을 요하는 많은 문제가 있다.

도시문제는 많은 나라에 공통적인 문제가 있는가하면 어느 특정국가 · 특정도시에서만 그 절실성이 더 강한 문제가 있다. 또 어느 한 국가의 도시문제에도 시대에 따라 그 절실성 · 심각성의 경중에 변화가 있게된다. 1960∼80년대까지 한국의 대도시인 서울 · 부산에서는 주택부족과 무허가불량주택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고 다음이 교통문제였다. 그러나 주택 200만호 건설에 성공한 1990년대 이후, 그리고 지하철 건설이 활발히 추진된 뒤부터는 환경문제 · 범죄문제 등이 더 심각한 도시문제로 대두되었다. 각 도시문제의 추이를 고찰하면 아래와 같다.

  1. 주택문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은 1966년이었고 67년부터 제2차 5개년 계획에 들어간다. 그런데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은 그 당연한 결과로 대량인구의 도시집중, 심각한 주택부족과 무허가불량주택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하였다. 주택문제는 1960년대 중반이후 1980년대 말까지 서울을 비롯한 부산 · 대구 · 인천 등 대도시와 안양 · 부천 등 수도권 중소도시에서 심각하게 대두된 문제였다. 인구집중과 더불어 가구분화현상 즉 핵가족화도 진행되어 주택은 지어도 지어도 부족하였고 서울의 영동 · 잠실 등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어도 택지부족 문제가 끊이지를 않았다.

한국전쟁 후부터 생겨난 무허가불량건물도 해가 거듭할수록 증가하여 1966년에 13만동, 1970년에는 18만 동으로 집계되었다. 택지부족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시는 구획정리수법을 통하여 1960∼80년대 말까지에 모두 3,220만평이상, 여의도의 38개 분에 해당하는 대량의 택지를 조성하였으며 1980년 이후는 택지개발촉진법을 제정 공포하여 서울의 개포 · 고덕 · 상계 · 중계 · 목동 등 5개의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했었다.

이어 제6공화국 정부는 이른바 주택 200만호 건설에 착수하여 1988∼92년에 걸쳐 서울시내에서 40만호,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90만호, 전국에 모두 214만호의 주택을 건설하였으며 분당 · 일산 · 평촌 · 산본 · 중동의 5개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무허가건물 정리를 위해서는 1970년의 와우아파트사건, 1971년에 광주대단지 사건 등을 겪었으나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불량지구재개발로 해결의 근본책이 되었다. 20세기를 보내는 현재의 시점에서도 주택문제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나 그렇다할지라도 60∼80년대처럼 절박한 문제는 아니게 되었으며 그 심각성은 종식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 교통문제

가정과 직장, 쇼핑 · 레크레이션 · 관광 등을 위해 사람은 이동해야 하고 특히 대량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의 이동문제는 항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시작한 자동차교통은 통근 · 통학교통난(차내의 혼잡) · 노면교통난 · 주차난 · 취차(取車)난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통근 · 통학교통난과 취차난은 차량수를 널리면 해결되는 문제이고 노면교통난 · 주차난은 차량이 증가하면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자동차교통난은 본질적으로 영원히 해결이 될 수 없는 이율배반적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의 교통문제는 만원버스에 시달려야 하는 통근 · 통학교통난이 그 주된 문제였다. 그러나 1974년에 서울 지하철 제1호선이 개통된 후 제2∼8호선까지가 계속 건설되고 부산 · 대구 · 인천에도 지하철 개통을 보았으며 또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증가한 개인승용차 때문에 현재의 교통난은 노면혼잡이 원인인 노면교통난과 주차난이 그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국토가 협소하여 넓고 긴 도로를 확보하는 데에 한계를 지니는 한국의 경우 모든 도시는 근원적으로 개인승용차 부적격지역인 숙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교통문제의 해결은 버스 · 전철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일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환경문제

도시인구의 급증과 과밀, 에너지소비량 증대, 자동차 배기가스, 각종 화학물질 사용, 생활 · 산업오수(汚水), 각종폐기물, 산성(酸性)비 등으로 환경문제는 실로 심각한 경지에 있으며 비단 도시문제 · 국내문제일 뿐 아니라 범 지구적인 문제가 되어있다. 서울의 환경악화가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의 일이며 자동차 배기가스와 무연탄 연료에 의한 대기오염, 그리고 생활 · 산업오수로 한강의 수질이 현저히 악화된 때문이었다. 청계천에 하수처리장을 건설한 것이 1970년부터의 일이고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를 시작한 것도 1970년부터의 일이며 도시가스 보급으로 무연탄연료사용을 전환한 것도 70년대 초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기오염도 · 수질오염도는 점점 더 심화하였으며 생태계의 파괴로 인류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되는 범 세계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보건사회부 외청으로 환경청이 신설된 것은 1980년 초부터의 일이고 1990년에 환경처로 승격되었다가 1994년에 환경부로 승격되었으며 현재 환경부의 지휘아래 전국적 · 국제적인 환경쟁화가 추진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라는 대기오염, 생태계를 파괴하는 수질오염, 각종 폐기물의 증가, 소음 · 진동 · 악취 등등 환경문제는 이제 세계인류가 공유하는 십자가가 되었으며 전 세계인의 자각, 노력으로 수 십년 앞을 내다보는 장구한 개선 · 쟁화가 추진되어야 하게 되었다.

  1. 범죄문제

대도시가 지니는 익명성(匿名性), 향락성, 무절제성, 대중성에 다가 음주 · 흡연 · 마약 · 매춘 · 빈부격차 등의 요인이 겹쳐 대도시는 각종범죄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다. 소년범죄 · 학교폭력, 각종 경제사범, 외국인범죄, 강도 · 살인 등 흉악범의 문제, 집단폭력배의 문제 등등 오늘날의 도시범죄는 그 수법이 복잡다기하고 흉악도도 가중되어 가고 있다. 학교내 폭력추방이라든가 집단폭력배 단속이라든가 하는 일과성 대책이 아닌, 전국적 정신교화 등의 장구한 대책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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