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 ()

젖소들
젖소들
동물
개념
인간에 의하여 순화, 개량되어 사람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유용한 동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가축은 인간에 의하여 순화, 개량되어 사람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유용한 동물이다. 광의로는 포유류와 조류, 어류, 곤충류도 포함되지만 대체로 포유류와 조류만을 가리키며, 아주 협소하게는 조류도 가금으로 분리하고 포유류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가축의 종류는 동물분류학상의 종을 따라 분류하는데, 종 내에서도 외모와 특성이 동일한 종류의 집단을 품종이라 한다. 젖·고기·알·털 등 사육의 용도에 따라 유용종·육용종·난용종·모용종·겸용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전통시대에는 축산이 부업이었으나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 축산물 수요가 증가하여 축산은 주요 산업의 하나가 되었다.

정의
인간에 의하여 순화, 개량되어 사람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유용한 동물.
개관

넓은 의미로는 · 등의 포유류와 · 거위 등의 조류, 잉어 · 붕어 등의 어류, 누에 · 꿀벌 등의 곤충류도 포함되지만 보통 가축이라고 할 때에는 포유류 · 조류만을 가리킨다. 또 조류는 가금(家禽)이라 하여 제외하고, 포유류만을 좁은 의미의 가축이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가금 · 가축을 합리적으로 사육, 번식시켜 인간생활에 필요한 산물을 얻는 것을 축산이라 한다.

동물분류학상의 종(種)을 가축의 종류라고 하며, 외모와 특성이 동일한 종류의 집단을 품종이라고 한다. 또한 가축은 그 용도에 따라서 유용종(乳用種) · 육용종(肉用種) · 난용종(卵用種) · 모용종(毛用種) · 겸용종(兼用種)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떤 목적에 이용되는 비율이 그 전체 가치의 70% 이상일 경우를 말한다. 겸용종이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의 이용가치가 서로 비등할 경우를 말한다.

가축의 역사

야생동물이 인간에 의해서 순화되어 가축화된 것은 선사시대부터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가축들이 가축화된 것으로 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가축은 로서 약 1만 2천년 전에 이미 사육되었고, 소 · 말 · 돼지 · 면양 · 염소 등은 1만여 년 전에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재래종 소인 한우는 유럽원우와 인도원우의 혼혈에서 출발하여 1800∼20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다른 소의 품종과 교잡 없이 단일종으로 번식하여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은 고대의 부여 · 고구려 때부터 사육되어왔고, 돼지는 2000여 년 전 북방으로부터 유입되어 우리 민족의 원시조상인 읍루족에 의해서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면양은 기원전 150여 년경에 부여에서 사육하였으며, 산양은 우리나라에서는 염소라고도 하는데, 1000년경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처음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부여에서는 군사(軍事)가 있을 경우 소를 잡아서 그 발톱의 상태로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소의 발톱이 벌어진 경우는 흉조로 합쳐진 경우는 길조로 삼았다고 하며, 고구려에서는 제천행사 때 돼지를 잡아 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변한에서는 소와 말을 혼례식에 이용하였으며 마한에서는 순장에 이용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가축들은 사육 초기에는 주로 희생 · 순장 · 점술에 이용되었으며, 식용은 부차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족은 짐승을 기르는 데 능숙하고, 관직명으로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 가축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내용이나, 『위서』 고구려조에 유화가 알을 하나 낳았는데 부여왕이 이 알을 개에게 주었더니 먹지 않았고 돼지나 말 · 소에게 주어도 피하였다는 주몽의 탄생설화, 백마 · 백계(白鷄)와 관계있는 박혁거세 · 김알지의 탄생설화, 읍루족에게는 소 · 말이 있고 돼지를 즐겨 기른다는 기록, 제주도에서도 소와 돼지를 기르고 마한에서는 세미계(細尾鷄)가 난다는 기록 등은 우리나라 고대의 가축사육을 추측할 수 있는 사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목축을 권장하여 내륙 · 등에 소나 말을 사육하기 위한 국립 목장이 운영되었고, 공사(公私)의 제(祭)에 암컷을 쓰는 것을 금하였으며, 마정을 다스리는 사복시(司僕寺), 잡축(雜畜)을 기르는 전구서(典廐署), 제사용 희생을 맡는 장생서(掌牲署) 등의 직제가 있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 의하면 가축의 사육료식(飼育料式)도 있었는데, 이것은 일 년을 두 시기로 나누어 5월부터 9월까지를 청초절(靑草節),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를 황초절이라고 하며 가축 한 마리에 대한 매일의 · · 소금 등의 공급량을 규정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가축은 주로 전쟁과 운반 · 농경에 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가축은 주로 역용으로 사육되었으며, 유교의 사농공상 계급관념은 실학이나 실업을 천시하여 가축의 사육과 이용이 장려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까지도 가축사육은 농사를 짓기 위한 노동력의 확보, 군마의 육성, 그 부산물로 얻어지는 두엄 등을 이용하는 데 불과하다가 민족항일기에 이르러, 식민정책의 영향으로 외국가축의 도입, 관영목장의 경영, 일본인들에 의한 유우 · 면양 · 종마 등이 산업적으로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 광복을 전후한 사회혼란기에는 일본인 소유였던 젖소 · 종축을 비롯한 많은 가축이 도살되어 그 당시의 가축 수는 광복 전에 비하여 반으로 줄어들었다. 미군의 군정 실시 후 어느 정도 사회질서가 회복되면서 가축장려정책이 수립되었으나, 6 · 25전쟁으로 가축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에 제1차 축산부흥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1957년에는 남한에서 사육된 가축의 수가 광복 전의 남북한 전체 가축 수보다 많게 되었다. 1958년 제2차 축산부흥5개년계획으로 부업형태의 가축사육이 유축농업적(有畜農業的)인 형태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뒤 주로 미국으로부터 각종의 가축품종들이 도입되었는데, 특히 가금류와 중소가축의 도입이 활발하였다.

1960년대에는 경제력과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축산물의 수요가 점차 늘어남으로써 사회적 · 국가적 차원에서 축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는 낙농 · 양계 부문에서 상업적인 축산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 뒤에도 한우육성과 비육, 낙농사업 등의 축산진흥정책이 계속적으로 수립되어 농가경제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기업적 · 전업적인 수준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가축의 종류

1.1. 한 우

한우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 의해서 순화, 개량되어온 재래품종으로 2천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육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김해조개무덤에서도 기원전 1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소의 유골이 발견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는 주로 농사를 짓는 데 이용되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싣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고구려에서 300년경에 소달구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나 416년 신라눌지왕이 소달구지를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는 것 등도 소가 역용(役用)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처음에 소는 시체를 나르는 데 이용되다가 물건을 운반하거나 농사에 쓰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지증왕 때인 498년에는 소로 농사를 짓는 것이 경주 일대의 농민에게 실용화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용 이외에 식용으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소는 매우 귀중한 짐승으로 옛날에는 소의 소유 정도에 따라 부유함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남의 소를 죽이거나 손상을 입힌 사람을 노비로 삼는 벌을 주어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소의 전염병이 유행하면 · 갈이를 사람이 대신하기도 하였으며, 소의 도살을 금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세조는 목장을 많이 만들었고 우경을 장려하였으며, 『양우법』이라는 책을 만들어 소의 이용과 증식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1.2. 육 우

육우가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된 것은 1909년으로, 당시 통감부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서 시험용으로 심멘탈(Simmental)종을 3두 들여왔으며, 오래 뒤인 1955년에 헤어포드(Hereford)종 · 쇼트혼(Shorthorn)종 및 애버딘앵거스(Aberdeen Angus)종 등 10여 마리를 시험용으로 도입한 바 있다. 그뒤 시험 및 비육용으로 본격적으로 들여온 것은 1960년 전후로서, 상기 품종을 비롯하여 브라만(Brahman)종 · 산타거르트루디스(Santa Gertrudis)종 · 브랭거스(Brangus)종 · 브라운스위스(Brown Swiss)종 등 300여 마리가 미국을 비롯한 몇 나라에서 도입되어 순종번식 또는 한우와의 교배에 의하여 비육용으로 사육되었지만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샤롤래이(Charolais)종의 경우에는 1980년을 전후로 하여 한우와의 교잡종 생산사업도 지역에 따라 실시되었다.

1.3. 젖소

우리나라는 우유를 마시는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젖소 사육이 발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우유를 마시는 풍속은 적어도 고려 말 충렬왕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우유를 바치기 위해서 서울에 유우소(乳牛所)라는 목장을 설치하였고, 여기서 지방의 착유소(搾乳所)를 감독하기도 하였다. 중종 때의 영의정 성희안(成希顔)의 상계(上啓)에 의하면, 우유는 귀중한 영양제 · 약제로서 왕실에서만 이용한 식품이나, 지방의 고위관리들도 비공식적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방관원들의 진상 구실로 인하여 농가의 비유우(泌乳牛)가 강제로 매매되는 풍습이 생겨서, 농민들이 비유우 사육을 기피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동국세시기』에도 낙죽(우유로 쑨 죽)을 만들어 국왕에게 진상하였고, 기로소(耆老所)에서는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역임한 중신 가운데 일흔 살이 넘은 사람에게도 낙죽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낙죽을 이용하던 풍습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일부에서는 재래종 소를 젖소로 삼아, 이로부터 생산된 우유를 5백 년 이상 음용해 왔으나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주로 재배작물에 의존하여 왔고, 송아지가 먹는 젖을 빼앗아 식용으로 하는 것은 유교의 인(仁)사상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시험장으로 1884년에 설립된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의 책임자로 있던 최경석(崔景錫)이 미국으로부터 다른 가축들과 함께 저지(Jersey)종 2두를 들여와 기른 것이 국내 젖소사육의 효시로 인정된다. 그 뒤 1902년에 당시 대한제국 농상공부의 기사로 근무하던 프랑스인 쇼트(Short)가 홀스타인(Holstein)종 20마리를 들여오면서 시험사육이 본격화 되었는데, 1907년에는 권업모범장에서 소의 개량을 목적으로 에어셔(Ayrshire)종 3두가 도입되었고, 이어 홀스타인종과 저지(Jersey)종이 추가 도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마리수는 많지 않지만 건지(Guernsey)종과 브라운스위스(Brown Swiss)종도 해방 후인 1957년에 더 들어왔다. 그 뒤 가장 높은 산유능력을 가진 품종으로 홀스타인 흑백종이 지금까지 국내 주품종으로 사육되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가축 생산은 마산(馬産)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정도로 말은 일찍부터 군사용이나 교통수단으로 중요한 가축으로 간주되어 왔다. 역사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 말의 사육 기원은 기원전 108년, 즉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의 재래마는 전부 소형마로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의 유입에 따른 타르판(Tarpan)계의 중형마가 시초가 되어 북방의 몽고마나 아랍 계통의 영향을 받으면서 내려와 정착된 우리 고유품종이다.

『삼국지』에는 진한 사람들이 말을 탔다는 기록이 있고, 350년경의 고구려 벽화 중에는 말이 수레를 끄는 그림이 있으며, 신라 문무왕 9년에는 전국에 174개 소의 목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군용이나 교통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의 재래마는 부여의 명마(名馬)와 과하마(果下馬), 고구려의 삼척마(三尺馬), 예(濊)와 백제의 과하마처럼 왜소한 품종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 · 만주 등을 거쳐 유입된 호마(胡馬)와 재래종인 향마가 있었다고 한다. 또, 1273년 고려 원종 이후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서역마와 재래마가 교잡되어 제주도말이 생겼는데, 조선시대에 본토 또는 북방에서 수입된 말에 의하여 혈액이 혼합되면서 오랜 시일에 걸쳐 체격이 왜소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이 123개 소가 있어 군용, 궁실의 식용, 수렵과 통신 등에 이용하였으나 농경에는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목장도 없어졌다가 민족항일기 이후 일본군에 의해서 대형의 개량종이 증가하게 되었고 농업에도 이용하게 되었다. 1915년 강원도 회양군 난곡에 목장을 설치하여 사육, 번식시킴과 함께 좋은 말을 개량하기도 하였으며, 함경북도 경원에서는 종마목장을 세워 군용말을 생산하였다. 1920년에는 우리의 재래종에 일본산을 교배하여 ‘신조선종’이라는 품종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에는 말젖이 갈증 해소에 좋다고 되어 있으나, 말고기의 식용은 대중화되어 있지 않고, 내장을 이용한 기록도 없다. 다만 말고기의 포(脯)는 옛날 일부층에서 이용하였다고 한다.

돼지

우리나라 재래종 돼지의 조상은 멧돼지이다. 고대 부여에서는 추운 겨울에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고 추위를 이겨내는 방법을 이용하였다고 하며, 여러 제천의식에서도 돼지를 제물로 사용한 다음 식용으로 하였다 한다. 백제에는 다른 식육과 함께 돼지고기를 다루는 육부(肉部)가 있었고, 신라에는 육전(肉典)이 있었으며, 섬에 돼지를 놓아 기르면서 필요할 때마다 잡아서 이용하였다. 고구려시대에는 소형종 만주돼지가 유입되어 전국으로 퍼졌다. 조선시대 세조는 돼지를 많이 기르도록 한 관리에게 포상을 하면서 장려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재래종 돼지는 주둥이가 길고 뾰족한 특징이 있어 화전민들은 땅속에 남아 있는 식물의 뿌리를 캐내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래종은 체격이 작고 산육량이 적어서 1900년대에 외국의 종돈을 도입하여 개량종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순수한 재래종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의 선조들은 돼지고기를 식용으로 하는 이외에 해열 · 해독 등 약용으로 이용하였고, 담석(膽石)은 저황(猪黃)이라 하여 피설사[血泄瀉]를 그치게 하는 데 이용하였으며, 기름은 발모제 · 귀병치료제 등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풍(風)을 일으킨다 하여 모든 질병에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국내에 처음으로 개량종의 돼지가 들어온 것은 1903년의 일로 당시 함경도에 도입된 요크셔종(Yorkshire)에 이어 1905년에 수차례에 걸쳐 버크셔종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해방 전까지 종래의 재래돈과 이들 간의 교잡종이 보급 사육되다가, 해방후에는 주로 버크셔종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듀록저지(Duroc Jersey)종과 햄프셔(Hampshgire)종이 들어왔고, 그 뒤 폴란드차이나(Poland China)종 · 체스터화이트(Chester White)종 등이 외국선교재단 등을 통하여 도입되었다.

1960년대에는 랜드레이스(Landrace)종, 요크셔(Yoshire)종을 비롯한 우수한 개량돈이 종돈(種豚)으로 다수 도입되었고, 1970년대에 들어와 대규모의 돼지육종 및 비육사업이 증가하면서 미국 · 유럽 · 일본을 비롯한 각국에서 우량종돈이 많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비육돈(肥育豚)으로 사육되는 것들은 대부분 이들의 품종간 교배에 의한 이원(二元) 또는 삼원(三元)교배종들이다.

면양

고대 부여에서 주로 희생용으로 이용하였으나 농가에서 사육된 기록은 없다. 백제에서는 육부에서 면양고기를 다루었고, 신라에서는 양모를 이용하기 위해서 이를 다루었던 모전(毛典)이라는 행정관서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는 지금의 서울 마장동에 면양목장이 설치되어 여기서 생산된 털가죽 · 양모 등을 황실에서 이용하였으나, 산업적인 이용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면양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09년으로, 당시 일본으로부터 람부이에메리노(Rambouillet Merino)종과 슈롭셔(Shropshire)종이 도입되었다. 1912년에는 만주에서 몽고면양이 들어와 사육되었는데, 성적이 양호하여 강원도 평강에 목양장(牧羊場)을 설치하고 두 차례에 걸쳐 176두의 면양을 시험 사육하였으며, 1919년부터는 메리노(Merino)종과 교잡시험도 실시하였다.

그뒤 조선총독부는 1934년 뉴질랜드에서 개량된 코리데일(Corriedale)종을 도입하여 주 면양품종으로 정하고 군수용 의류의 원료공급을 위해 본격적인 남면북양(南棉北羊) 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400∼500마리의 면양을 도입하여 개량증식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경에는 전국에 4만5000여 두에 달하는 면양이 있었지만, 요마비(腰痲痺) 등의 질병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해방 당시 남한에는 8,000여 두의 면양이 종양장(種羊場)과 농가에서 사육되었는데, 1년 후에는 2,700두 정도로 크게 감소하였고, 또 6 · 25전쟁으로 숫자는 더욱 격감하여 1954년에는 600여 두에 불과하였다. 그 뒤 1961년과 1966년에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코리데일 500두와 롬니종(Romney) 415두 그리고 미국산 메리노종(American Merino)종이 도입된 바 있다.

국내 양모의 수요가 모두 수입 양모에 의해 충족되는 상황에서 면양의 수는 날로 감소하고 있으며, 일부 칭기스칸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지방의 식당에서 소수 개별사육되거나, 연구기관에서 소수 실험용으로 사육되는 정도이며, 코리데일종의 혈통이 가장 많다.

산양

재래산양은 조선 초기에는 제물용과 육용 등으로 이용되다가, 1500년경 돼지가 제물로 이용되면서 주로 보신용 · 약용으로 이용되었다. 재래산양은 염소라고 불리며, 일찍이 중국 남부해안의 것이 한반도 서남지방 또는 북부를 경유하여 유입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사육 기원은 기록상으로 삼한시대 말경인 약 2000년 전으로 추정되며, 조선 초기에만 하여도 제물용과 육용, 보신제용으로 길러졌다고 한다.

재래산양은 체구가 비교적 작고 뿔이 있으며, 본래 백색종과 흑색종이 있었으나, 근래에는 흑색종, 즉 흑염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재래산양은 산유량이 적어 양젖을 이용할 수는 없으나, 튼튼하여 기르기 쉽고 연중 번식이 가능할 뿐 아니라, 쌍태율(雙胎率)도 높다. 특히 요마비(腰痲痺)에 대한 저항력이 강할 뿐 아니라 거친 조사료의 이용성이 높기 때문에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야생 초자원을 활용하여 동물성 식량을 생산하기에 매우 적합하며, 특히 분뇨배설로 인한 환경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친환경 축종이다.

『동의보감』을 보면, 염소고기는 허로(虛勞)를 보하며, 간과 쓸개는 눈을 맑게 하고, 콩팥은 보양(補陽), 피(血)는 중풍, 척추골은 요통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젖산양[乳山羊]은 재래종은 없고 거의 모두가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개량종인데, 1903년에 일본에서 스위스 자아넨(Swiss Saanen)종을 들여온 것을 시초로 하여 해방 이후 알파인(Alpine)종 · 토겐부르그(Togenburg)종 · 누비안(Nubian)종 등이 도입되어, 현재까지 자아넨종이 주종으로 양젖을 생산하여 왔다.

토끼

우리나라에서 집토끼가 사육된 것은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수입된 이후부터로 보아야 한다. 광복 이전에 수입된 토끼의 품종은 뉴질랜드화이트(New Zealand White)종 · 친칠라(Chinchilla)종 · 벨지안(Belgian)종 · 일본백색(Japanese White)종 · 렉스(Rex)종 등이다. 그 뒤 196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나 일본 등지로부터 융용대형종으로 플레미쉬자이안트(Flemish Giant)종 · 롭이어(Rop Ear)종과, 중형종인 캘리포니아(Califonia)종, 그리고 모용종으로 앙고라(Angora)종이 국립종축장 등의 기관이나 민간단체를 통해 수입되어 생산 분양됨으로써 전국에 널리 보급 사육되어 왔다.

토모(兎毛)가 대부분 수입되고 모피 역시 수요가 줄어들면서 양토는 이제 토육(兎肉) 생산을 위주로 남아 있으며, 1999년 현재의 통계에 의하면, 국내 기후와 사양 여건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뉴질랜드화이트종을 중심으로 약 26만 수 정도가 육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가축으로 기르는 닭은 동남아시아의 들닭을 순화시킨 것이라고 하며, 이것이 약 2천년 전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문헌 『후한서』의 한전(韓傳)에는 꼬리가 다섯 자나 되는 장미계(長尾鷄)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삼국지』의 한전에도 꼬리가 다섯자 남짓한 세미계(細尾鷄)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에는 제사용으로 소 · 말 대신에 닭 · 돼지 · 오리 등 작은 가축을 제사에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일본의 사신들이 선물로 가지고 돌아간 것 중에는 흑봉두계(黑蓬頭鷄) · 가상계(呵相鷄) 등의 희귀한 닭들이 있었다고 한다. 1973년 경주천마총(天馬塚)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340여 년경의 것으로 밝혀진 달걀껍질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털과 뼈가 검은 오골계(烏骨鷄)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는데, 『동의보감』에는 다음과 같은 약용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암컷의 오골계고기는 부녀의 안태(安胎) · 산후허약, 피는 복통 · 골절, 창자는 오줌싸개 또는 갈증 해소 · 이뇨(利尿) 등에 쓰인다. 또, 수컷의 오골계고기는 안태 · 보허(補虛), 피는 이롱증(耳聾症) 등에 쓰이며, 간은 기음제(起陰制)로 이용한다. 그 밖에 누런 암탉, 붉은 수탉, 흰 수탉 등은 보양(補陽) · 이뇨 · 갈증 해소 · 단독(丹毒)치료 등에 이용된다. 그리고 닭과 인삼을 함께 넣어 곤 것을 삼계탕이라 하여 보신용으로 이용한다.

종래에 사육되었던 우리 토종닭의 특징을 보면, 단벼슬[單冠]에 깃털색은 다양하고, 체구는 작으나 취소성(就巢性)이 강하여 부화 육추(育雛)를 잘하며, 연간 80∼120개의 알을 낳는데, 알은 가볍고 맛도 좋은 편이 아니지만 고기의 맛은 좋으며, 또 날개가 강하여 날기를 잘하고 방사하기에 적당한 품종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토종닭은 개량종의 도입과 함께 거의 모습을 감추어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며, 최근에 일부 유사 혈통의 것을 중국 연변 등지에서 도입하여 재래계의 복원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현재 사육되고 있는 닭의 대부분은 외국에서 들어온 실용계(實用鷄)인데, 개량계는 1903년 처음으로 플리머드록(Plymouth Rock)종 · 나고야(Nagoya)종 및 백색 레그혼(White Leghorn)종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으며, 그 뒤 로드아일랜드레드(Rhode Island Red)종을 포함하여 4가지 품종이 해방 전까지 전국적으로 사육되어 왔다. 그러나 사육기술이나 사료의 부적합 등으로 인하여 개량종으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다가 6 · 25전쟁이 끝나고 미국에서 레그혼종과 뉴햄프셔(New Hampshire)종의 종란(種卵)이 수입되어 원종계를 보존하고 선발육종을 통하여 우수한 개량의 보급이 확대되었다.

그 뒤 계란과 계육의 소비가 증가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부터는 이러한 순종보다 품종간 또는 계통간 교배종이 도입되거나 자체 개량에 의하여 여러 가지 명칭으로 많이 보급되어, 산란계로서 바브콕(Babcock) · 세이바(Shaver) · 하버드(Hubbard) · 하이섹스(Hisex) · 마니나(Manina) 등이, 육용계로서는 마니커(Manika) · 하버드 · 아버에이커(Arbor Acres) · 하이브로(Hibro) · 코브(Cobb) 등이 있으며, 난육 겸용으로 갈색데칼브(Brown Dekalb) · 갈색마니나 · 갈색바브콕 등이 보급되었다.

거위

『고려사』에는 1038년에 거위 · 오리 등이 사육되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이들은 중국대륙을 거쳐 들어와서 약 9백년 전에 사육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거위는 가축이라기보다는 애완용이거나 집을 지키는 경계용으로 상류사회에서만 길렀다. 거위가 도둑을 막는다는 속성 때문인지는 모르나 액귀나 병귀를 막는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어서, 염병이 퍼지면 거위가 병귀를 막아 준다는 믿음 때문에 거위알 값이 올라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거위를 식용을 목적으로 사육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고려 충숙왕 때에는 닭 · 오리 · 거위 등을 제사용으로 쓰도록 권장하였다고 한다. 거위의 속털은 보온작용이 있어서 침구류 · 방한복 등에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조상들은 거위기름을 굳혀서 부인들의 화장품으로 이용하였으며, 흰 거위고기는 해열 · 해독에 이용하고, 거위의 쓸개는 동양화의 물감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고약으로 만들어 치질약으로 쓰기도 하였다.

현황과 전망

우리나라는 국토와 농경지의 면적이 좁기 때문에 축산물을 이용하기 위하여 가축을 사육할 만한 여유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토지 소모적인 축산보다는 토지 절약적인 농작물 경작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주곡생산을 위한 경종농업(耕種農業)이 주가 되어 왔고, 가축을 사육, 이용하는 축산은 부업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식생활양식의 개선, 국민소득인구의 증가, 교육수준의 향상 등에 따른 문화와 경제가 발전함으로써 축산물의 수요가 점차 증가하게 되어 주요 가축의 사육도 비례하여 증가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세계화의 바람으로 우루과이라운드, WTO에 이르는 협상이 타결을 보게 되자, 구미 선진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축산물의 수입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러 장차 국내 가축의 수적 변화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최근에 특히 염려되는 현상은 세계화와 함께 생축이나 사료, 정액 등 각종 축산 관련물의 교역이 광역화되면서, 재래가축이 혼혈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사육동물들도 종전에 없었던 각종 질환, 예를 들어 구제역(口蹄疫) 같은 법정전염병 등에 감염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우 · 육우

한우는 역육(役肉) 겸용으로서 1970년만 하더라도 한우의 농경부담률은 98%로 농경에 주역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농업의 기계화로 동력 경운기 등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한우의 역용(役用) 가치는 1990년대 들어 10% 미만으로 크게 줄었고, 이제는 육전용우(肉專用牛)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2000년 동안 역용우로서 유전적으로 고정이 되어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우는 제대로 비육을 하여 체중 600㎏ 이상에서 도축을 할 경우에는, 외국산 육우를 능가하는 고급육을 만드는 유전적 소질을 보유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육용을 목적으로 한 한우사육의 증가는 경영형태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즉, 사육두수는 증가하였으나 사육농가수가 감소함으로써 호당 사육규모가 점차 커져 1990년대 들어와서는 부업으로 5두 이상을 기르는 농가와 20두 이상을 사육하는 전업 또는 500두 이상을 사육하는 기업규모의 농가도 점점 증가하여 왔다.

한편, 쇠고기 소비가 증가하면서 1970년대 초부터는 외국으로부터 육용 개량품종들이 도입되기 시작하여, 1980년까지 부족한 공급량을 충당하기 위한 도입육유의 사육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사육환경의 차이, 사육방법 및 기술상의 부적합 등으로 인하여 도입우 입식 농가에서는 질병이나 생산능력 저하 등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며, 특히 번식우 사육의 경우에는 수태율이 낮고, 한우 암소와의 교배에서는 태아가 커서 난산이 발생하는 등 여러 문제점들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결국 1980년을 고비로 해외로부터의 육우 도입은 크게 줄어, 1981년 말 통계에는 약 3만여 두의 육우가 국내에서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한우의 산육능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결국 1982년도부터는 젖소 수컷을 포함하여 육우를 한우 통계에 포함하여 다루게 되었다. 한우 사육두수의 변천상황을 보면, 1910년에는 70여만 두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증가하다가 광복과 6 · 25전쟁으로 크게 감소하였으나, 1960년도 이후부터는 다소 기복은 있었지만, 1990년도 육우 수입으로 인한 쇠고기 파동시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꾸준히 증가하여 왔다. 특히 1993년부터 도입된 도축장에서의 등급판정제도는 고품질 한우육 생산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부터 시작된 쇠고기 수입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시작과 함께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매년 쿼터량을 훨씬 상회할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입 쇠고기의 급증은 국내 쇠고기 자급률을 크게 떨어뜨려 1985년 96%이던 자급률이 1995년에는 52%까지 하락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98년에는 IMF 금융위기로 한우농가는 수입이 줄고 다수가 한우사육을 포기하거나 또는 규모를 축소하면서 도축두수가 늘어남으로써, 일시적으로 쇠고기 자급률이 70%를 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입증가로 인해 가격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국내 한우 사육두수는 1997년 280여만 두를 정점으로 빠른 속도로 감소함으로써 1999년 말 현재 190만 두를 상회하고 있다.

장차 쇠고기와 생우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는 2001년 이후부터는 관세율의 대폭 감소와 함께 수입이 대폭 더 증가할 것이며, 별도의 정책적 배려가 없는 한 우리나라의 쇠고기 자급률은 결국 2004년경에는 30% 수준으로 감소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그러므로 날로 심해지는 국제경쟁 속에서 우리 가축의 대종(大宗)인 한우가 살아남는 길은 한우고기를 어떻게 고품질화 하면서 생산단가를 낮추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우산업 안정화를 위한 행정당국의 일관성 있는 정책이 중요하다.

또 생산자는 종래의 사육방법에 의한 소규모 생산형태에서 탈피하여 대규모의 기술집약적 경영으로 사료비 절감을 꾀함으로써, 최소의 생산비로 수입육을 능가하는 고급육을 생산하여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외 소비자에게 국내산 한우고기가 외국산보다 위생적이고 맛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도록 한우의 우수성을 홍보하여야 한다.

젖소

서구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식품으로서 우유를 이용한 역사가 매우 짧아 1970년대에 들어서야 국민의 식생활 개선과 함께 우유소비가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함께 젖소도 낙농의 발달과 함께 활발한 증가세를 보여 왔다. 국내 젖소는 거의 모두가 홀스타인(Holstien) 흑백종인데, 이 품종은 유럽 저지대에서 성립된 관계로 여름철 고온에 스트레스가 심하고, 지세(地勢)가 약한 편이어서 경사진 산지에 방목하기가 부적합한 약점이 있기는 하나, 세계의 다른 어느 품종보다 산유량이 많고 우리나라의 풍토에 비교적 적응을 잘 하는 품종으로 인정된다. 뿐만 아니라, 수컷의 경우에는 고기맛이 우수한 편이어서 국내 쇠고기 공급에 상당한 몫을 차지하며, 특히 송아지고기(veal)는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젖소는 사육두수가 줄지 않고 꾸준히 증가해 온 대표적 축종인데, 특히 1970년대에는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 데 반하여 1990년대 후반에는 우유소비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육두수의 증가폭은 둔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999년 현재 약 54만 두의 젖소가 국내에 사육되고 있고, 사육두수는 거의 변동이 없는 반면에 낙농가의 수는 1990년에 3만 3000호에 달하였던 것이 1998년에는 절반인 1만 6000호로 감소함으로써, 경쟁력 있는 낙농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사육형태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의 국내 원유(原乳) 생산량은 200만 톤을 넘어섰으며, 국민 1인당 평균 연간 우유소비량은 50㎏을 넘어섰다. 우리나라의 우유소비 성향을 보면, 구미 선진국에서와 같이 주로 가공된 유제품의 형태로 소비되기보다는 음용유 중심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음용유의 경우, 아직 해외로부터 본격적으로 수입되지 않는 대신에, 모조 분유의 형태로 낮은 관세에 싼 가격으로 수입되어 요구르트를 포함한 가공유의 원료로 이용되고 있고, 치즈 역시 거의 모두가 수입되고 있음을 볼 때, 우유와 유제품의 자급률도 장차 시장개방과 함께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낙농산업은 선진기술을 적극 도입 응용하면서, 적정 사육규모를 설정하고 자급사료 증산을 바탕으로 경영의 합리화를 꾀함으로써 저비용으로 위생적인 고품질 원유를 생산한다면 국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사육두수의 변천을 보면, 1910년도에 4만 5000여 두가 사육되던 것이, 제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일제의 군수용말 증식계획으로 1944년에는 8만 4000두까지 증가하였지만, 1945년 광복이 되면서 3만 4000두로 크게 감소하였다. 그 뒤 도로교통 및 철도의 발달과 자동차 등 운송수단의 급증과 함께 말 사육은 가속적으로 감소하게 되었고 국민경제 향상으로 쇠고기의 생산이 필요하게 되면서 말 생산은 소 사육에 압도되어 더욱 위축되었다.

1980년대 초에 불과 3,000여 마리에 불과하던 말은, 경제가 성장하고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승용 또는 경주용 개량마가 도입 사육되면서 그 수가 불어나, 1999년 말 현재 국내에는 약 8,400마리가 사육되고 있는데, 이 중 약 5,000마리가 재래마인 소형조랑말로서 제주도에서 사육되고 있다. 그나마 혈통이 흐려지고 숫자도 감소일로를 걷게 되자 정부에서는 멸종을 막기 위하여 혈통의 순도가 높은 일부 제주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장차 국민소득과 생활이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승마 · 경마 등 오락용으로 인기가 더해 가면서 승용마의 사육두수는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돼지

식육은 종종 수요 공급의 불일치로 인하여 가격파동을 겪는데,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돈육파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1970년대 후반에 커다란 파동을 겪은 양돈 부문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돈육 소비량의 증가와 함께 매년 성장을 되풀이하였고, 사료 및 생산기술의 향상에 힘입어 사육두수도 급격히 증가함으로써, 1980년 180만 두 이하였던 돼지 사육두수는 1999년 현재 78만여 두를 유지하고 있다.

사육규모면에서도 양돈업의 형태는 상당한 변모를 보여, 1975년만 해도 부업규모의 양돈농가에서 기르는 마리 수는 전체의 83%를 점유했었음에 반하여 20년 후인 1995년 말 통계에 의하면 10두 미만의 부업규모는 30% 이하로 줄었다. 모돈(母豚) 과다사육으로 인한 파동이 우려되던 1990년대에 들어 돈육의 대외 수출길이 열리고, 특히 1997년 대만에 확산된 구제역(口蹄疫)의 돌발상황으로 대 일본 규격돈 수출이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5,000∼1만 두 이상의 대규모로 사육하는 농가도 늘고 있고, 우리 양돈업도 사육시설의 현대화와 함께 대규모로 사육하는 농가도 늘고 있어, 우리 양돈업도 사육시설의 현대화와 함께 대규모화 되어가고 있는데, 고급돈육 생산기술이 뒷받침되어 대일 수출이 확대되고, 구제역, 돈콜레라 등의 전염병에 대한 방역문제, 그리고 오폐수 처리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하에 돼지생산 분야의 전망은 타 분야에 비하여 밝은 편이다.

산양 사육에 비하여 면양의 사육은 동물에 대한 인식과 기술 수준이 높지 못하고, 양모(羊毛) 생산의 경제성도 낮은 관계로 국내 수요를 주로 뉴질랜드나 호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여 왔다. 따라서 일반 농가에서의 사육은 부진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는 4,000∼6,000두의 사육두수를 유지하여 왔으나 그 뒤 더욱 수가 줄어 1995년 말 통계에 의하면, 국내 총 사육두수는 1,600마리에 불과하며,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로 양모 생산보다는 양육(羊肉) 생산용으로 길러지고 있거나 연구기관에서 실험용으로 사육하는 정도이다.

1960년대 초에 국내 산양(염소)은 무려 30만 두를 넘어섰고, 이 중 대부분이 재래산양이었는데, 1960년대 말경에는 축산소득이 높은 소와 양돈, 양계에 밀려나 한때 다소 감소한 적도 있지만, 1980년대에 들어 약용 등으로 가공 판매하는 조합들이 생기면서 다시 회복하여 꾸준히 사육이 증가하여 1995년에는 68만 두에 달하였으나, 그 뒤로 소비자의 신뢰도 저하와 양육수입의 증가로 인해 소비와 사육 모두 점차 감소하고 있다.

한편 유용종(乳用種)인 젖산양은 1970년대 들어와 젖소(乳牛)의 사육이 늘어나면서 양젖(羊乳)의 수요가 줄어들자, 농가에서는 다만 자가 소비를 위해 1∼2두 사육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일부 규모가 큰 유산양 사육목장들이 생기고 해외로부터 유용종 종모양, 또는 정액과 수정란 등이 도입 증식되는 데 힘입어, 1999년 현재에는 약 3,000두 정도가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장차 양유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그 숫자가 서서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산양육이나 양유 모두 소비자 홍보가 미진하며, 가공품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 회복이 활성화를 위한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토끼

1970년 이후 토끼의 사육 두수의 변화는 상당한 기복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세계의 경기가 호전되어 토모피류와 토모의 수요가 늘고 특히 고급 모직물인 앙고라직물이 유행하여 앙고라토모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자 앙고라토끼의 사육이 유행을 이루는 등, 1975년도에는 국내 토끼의 숫자가 80만을 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값싼 중국산 모피와 털의 수입으로 토끼 사육은 전체적으로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양토업계의 불황은 1986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주된 이유는 국내 민간 양토장이 대부분 규모가 영세하여 경영수지의 악화로 사육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앙고라 토모는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며, 토피 역시 1990년에 들어서부터는 밍크, 여우 등의 고급모피류가 더 각광을 받게 되면서 생산이 격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번식능력과 발육성적이 모두 양호한 모피 · 육 겸용종이 수입되기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적응성이 가장 좋은 뉴질랜드화이트와 캘리포니안종이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 두 품종이 주종을 이루면서 1999년 말 현재 전국적으로 약 25만여 마리의 토끼가 사육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최근에 들어와 실험동물로서의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으로서, 이에 대처하여 영세한 국내 사육농가들은 사육환경의 청정화에 힘을 기울여 깨끗하고 제일도(齊一度) 있는 토끼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닭 생산은 경영형태에 따라 채란양계 · 브로일라양계 및 종계부화업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양계업은 1970년대 이후에 크게 신장하여 닭의 사육두수는 1975년에 2,100만 수였던 것이 1999년 현재에는 9,900만 수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중 산란계가 약 52%를 차지한다.

닭고기와 계란 소비의 증가로 주로 국민소득의 증가와 식생활 개선에 힘입은 덕택이겠으나, 채란양계의 경우 오랫동안 계란 가격이 다른 식품류에 비하여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소비가 촉진된 데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닭은 그 어느 축종보다도 먼저 전업 내지 기업화하여 현재 전체 사육두수의 97%를 전업 또는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채란양계업은 특히 시설의 자동화와, 생산에서 유통가정까지의 계열화 등으로 점점 대형화되는 추세에 있고, 외국산에 비해 경쟁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량 조절에 의한 국내 가격의 안정화 문제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한국의 축산』(농업협동조합중앙회, 1974)
『신고축산학개론』(육종륭, 향문사, 1979)
「한국가축문화사」(이규태, 『축산진흥」, 1979)
『한국가축개량사』(한국종축개량협회, 1980)
『한국축산의 경제분석』(허신행, 한국농촌경제연구소, 1983)
『한국가금발달사(韓國家禽發達史)』(한국가금발달사편찬위원회, 1985)
『1999 축산물가격 및 수급자료』(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 2000)
관련 미디어 (7)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