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사학(史學)

조선시대사개념용어

 우리 민족이 과거에 경험한 생활 양식을 학문적 입장에서 고찰하고 연구하는 역사이론의 학문.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사학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삼국사기(권1) / 혁거세 거서간
분야
조선시대사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우리 민족이 과거에 경험한 생활 양식을 학문적 입장에서 고찰하고 연구하는 역사이론의 학문.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역사는 민족의 역사적 자각과 시대 사조의 소산물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사학사에서 국가 성장에 따른 역사적 각성과 기록의 보존이라는 자각성(自覺性), 분열과 통일이라는 정치성(政治性), 그리고 자생(自生)과 외래(外來)라는 문화성(文化性), 자율과 타율을 분별할 줄 아는 민족성(民族性) 및 단절(斷絶)과 계통(繼統)이라는 명분성(名分性) 등이 역사의식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격변기에 강렬해지고 유동기에 변질된다. 이러한 관심을 역사의식이라고도 하지만 이 역사적 의식은 역사 서술에서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사학사는 한국사의 전개 과정과 문화 의식의 변용 과정, 또는 시대적 상황에 의한 사상적인 변화 사정과도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사학사를 발달사적 측면에서 보면, ① 고대국가의 발달 과정에 따른 전승과 기록의 시기(∼신라통일기), ② 중국적인 역사편찬 방법의 수용에 의한 계열적(系列的)이고 자치적(資治的)인 역사 편찬의 시기(고려∼조선 전기), ③ 한국적인 전통의 재발견과 사회적 각성에서 온 역사의 재정리 시기(조선 후기), ④ 근대 사학의 성장과 역사 연구의 다각적인 연구 시기(한말∼)로 전개되었다.
한편,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한국사학사를 대별해보면 유교사학·불교사학·도가사학(道家史學)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계열의 사학에서 한국사학사에 큰 비중을 가지는 것은 유교사학이지만 불교사학과 도가사학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사학사상이 한국사학 발달사에서 ②의 시기에 속하는 고려시대부터 발달해왔다는 것 외에도, 지배층에서 성장해온 유교사학에 비해서 불교사학과 도가사학은 피지배층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려왔기 때문이다.
여하튼 한국사학사는 아직도 미개척 분야의 하나이다. 역사서의 체재와 내용 분석 및 역사가에 대한 개별 연구는 다소 진행되었지만, 이를 종합해서 종적으로 골격화하고 횡적으로 확장시키는 총체적인 기도가 미흡한 단계에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삼국시대의 사학-역사적 자각과 역사기술
어느 민족이나 그 나름의 전승이 있다. 문자가 생활화된 뒤에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문자 생활이 시작되기 이전의 경우가 많다. 그 전승은 구비(口碑)로 전달되게 마련이었다. 민족의 조상·영웅들의 행적과 계보(系譜) 등에 관한 신화·설화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 뒤 국가가 이룩되고 발달하며 문자 생활이 시작되면서 종래 전승되어오던 신화·설화 또는 국가를 지배하는 왕족의 계보와 행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기록만으로 역사서가 성립된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에서 역사 서술의 자료가 되는 기록을 사학사의 범주에서 도외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과 역사서의 관계는 모호한 점이 적지 않다. 고대 사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고대 사회의 경우는 어떤 형식이 되었든 기록도 사학사의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한국사학사에서는 역사 편찬의 시기를 삼국시대 중기 이후로 잡는 것이 일반론이며, 이것은 이미 『삼국사기』에서 거론된 바 있다.
즉, 백제에서 근초고왕 30년(375) 『서기』가 편찬되었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6년(545) 『국사』가 편집되었으며, 고구려에서도 영양왕 11년(600) 『신집 新集』을 찬수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고구려에 『유기 留記』가 있었으나 편집 연대가 불분명하다. 고구려에서 누군가에 의해 국 초에 편집되었다고 전하는 『유기』 100권은, 삼국 가운데 가장 일찍이 국가를 성립한 국가답게 일종의 역사적인 기록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기』·『서기』 등에서 사용한 ‘기(記)’ 또는 ‘서(書)’의 뜻이 모두 기록이라는 의미이고 보면, 고구려에서 고사(古史)를 요약해서 『신집』 5권을 만들었다는 사정과 신라에서 『국사』를 편집했다는 상황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가 기록이라는 뜻 외에 어떤 왕조의 역사인 단대사(斷代史)를 뜻하는 경우가 있고 보면, 『국사』에서의 사(史)와 『신집』의 의의로 미루어보아서 특히 『유기』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삼국에서는 국가발달 사정으로 보아서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위치와 비슷한 시대였다.
국내적으로는 율령적(律令的)인 통치 체제가 이루어졌고, 대외적으로도 발전을 꾀하고 있던 시기였다. 여기에서 삼국은 공통적으로 왕실과 국가에 관한 전승적인 것이 신화였든 또는 계보였든간에 일단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나아가서 중국적인 영향에 의해서 일종의 역사서로서도 어떤 체재를 갖출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했다. 특히, 고구려에서의 『유기』가 기록의 집성이라면 『신집』은 어떤 이념과 체재를 가진 역사서였을 것이고, 신라에서의 『국사』는 문자 그대로 신라의 역사 편찬이었다.
오직 백제의 『서기』가 석연치 않지만 근초고왕 때의 발달 상황이나 삼국의 공통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단순한 기록으로서만이 아니라 어떤 성격의 역사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학사에서 삼국시대의 역사 편찬은 4세기 무렵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국가 발전과 왕권의 신장에 부응한 역사적 자각의 발로임과 동시에, 당시의 문화적 측면을 대변해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서는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한자의 수용과 같이 전래된 중국의 기록서인 『상서 尙書』는 물론, 제자서(諸子書) 그리고 역사서인 『사기 史記』·『한서 漢書』 등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이 서로 각축하면서 국가 발전을 꾀하고 그 상황을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토대로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술했다는 일은 당연한 결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삼국 초기의 상황이 불확실해 4세기 중엽까지의 공백이 그대로 메워지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자(漢字) 사용의 문제와 관계지어보면 삼국 초기에 역사서는 없었지만 숨겨진 어떤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어떤 기록은 고구려 초기의 『유기』와도 같은 것이 백제에도 있을 수 있고 약간 늦게 신라와 가야에도 있었음직한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추측이 허락된다면 삼국은 문자 사용과 거의 같은 무렵에 기록물이 있었을 것이고, 우리 사학사의 상한선(上限線)도 훨씬 소급될 수 있을 것이지만 상고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여튼 삼국시대의 각 나라들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역사가 편찬된 관찬물(官撰物)을 냈고, 그들 역사서의 성격은 전승된 신화·설화 혹은 왕실의 계보 등의 기록에서 출발해서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선양하고 국가 발전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적인 편찬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도 도외시할 수 없는데, 『백제기 百濟記』·『백제신찬 百濟新撰』·『백제본기 百濟本紀』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귀족들에 의해서 일본에 전해진 백제 관계의 역사물들이 일본에서 윤색, 개필된 것이다.
이들 백제삼서는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그 면모를 짐작할 뿐, 신빙성 역시 의심되는 바가 많지만, 백제 역사 편찬의 개연성을 보충해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백제기』를 위례시대(慰禮時代)의 역사서, 『백제신찬』을 웅진시대의 사서, 『백제본기』를 부여시대의 역사 편찬물로 추정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는 상당량이 신빙성을 결여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참고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학사의 본령과는 인연이 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통일신라시대의 사학-통일기의 역사의식과 그 성과
역사의식은 분열된 경쟁시대 못지 않게 통일기에도 고조되는 것이다. 분열기의 역사의식이 배타적이라면 통일기의 역사의식은 포괄적인 것이 특질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통일 대업을 성취시킨 신라로서는 정치적으로 혼란하였던 하대(下代) 150여년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통일 후의 100년 남짓 분명히 관찬의 역사서가 편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대(唐代)의 문물 제도를 충분히 받아들여서 문한기구(文翰機構)뿐만 아니라 역사 편찬을 국가 주관으로 추진시켰던 사관제도(史館制度)까지도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관찬의 역사서가 불명한 대신 사찬(私撰), 즉 개인의 찬술에 의한 역사서가 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8세기 전기의 김대문(金大問)과 9세기 후기의 최치원(崔致遠)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김대문은 『고승전 高僧傳』·『화랑세기 花郎世紀』·『계림잡전 鷄林雜傳』과 『한산기 漢山記』를 찬술하였다.
삼국시대의 전승적·기록적인 역사 편찬에서 귀족들의 역사와 전기, 그리고 사상적인 지주였던 불교와 지도자의 역사에까지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김대문의 찬술서는 신라사, 그것도 왕경(王京)중심의 진골 귀족에 초점을 두면서도 서술은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역사 찬술의 저의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진골 귀족의 입장에서 국왕의 전제성에 반대하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김대문의 역사 평가가 부수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한데, 이는 역사가로서의 사평(史評)을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김대문의 경우, 역사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보면서 역사 평가도 시도할 줄 알았으며, 역사 인식의 수준도 삼국시대의 역사인식보다 진전된 것이었지만 유교사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에 비해, 신라 말기에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을 편찬한 최치원은 김대문과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바가 있다. 즉, 최치원은 중국(唐)문화의 우위성과 중국적인 역사 서술의 차원에서 신라 문화를 부감하고자 했고 중국적인 역사 개념에서 신라사를 보고자 했다.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으로서는 쇠퇴해가던 신라의 상황을 중국적인 흥망·성쇠의 역사적인 경험에 비교해가면서 연대기적으로 찬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신라의 전시대사를 중국의 연대기에 대비하면서 엮어가되 단순한 연표(年表) 정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기에 편년적(編年的)인 서술도 포함하는 체재였을 가능성이 많다.
하여튼 통일신라시대는 개인에 의해서 찬술된 사찬의 편찬물이 오늘날까지 알려진 특징적인 것이고 일반 귀족이나 고승의 전기, 그리고 연대기 등이 대표적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찬물을 다같이 서술하면서도 진골 출신인 김대문은 왕권의 강화에 따라 쇠퇴되어가던 진골 귀족의 입장에서 전제 왕권에 반발하는 의식적인 서술을 시도함과 동시에, 신라에 침투해오던 중국(당나라)의 사상과 문물에 대응해 신라의 전통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신라 말의 육두품(六頭品)출신 최치원은 진골 만능의 정치 풍토에 반발하는 한편, 중국적인 문화 의식과 역사 개념으로 신라사를 보고자 했다.
한편, 신라통일기의 사학사를 이해하는 데 놓칠 수 없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인용되고 있는 고기류(古記類)와 기타의 전기·잡저(雜著)들이다.
7, 8종류에 이르는 이들 고기류는 신라통일기에 이룩된 어떤 기록을 뜻함이 분명하고, 통일기 신라시대에 편찬되었던 다른 성향의 역사적 산물들이었을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려시대의 사학-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
후삼국을 다시 통일해 새로운 통일 국가를 이룬 고려는 통일신라를 이어서 재통일했으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계통(繼統)을 내세웠다.
고려가 흥기하기는 옛 백제 지역이었고, 계승은 신라이면서도 계통은 고구려로 잡은 것이다. 이러한 삼국의 연결 의식은 후삼국을 통일한 연결 의식 못지않게 역사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고려초의 『구삼국사 舊三國史』이다. 『구삼국사』는 오늘날 전하지 않아 면모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 중 일부인 동명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을 『삼국사기』와 비교해보면 『구삼국사』는 전통적인 것을 강조하는 책으로서,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으로 서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고려에서는 11세기에 들어오면서 『칠조실록 七朝實錄』이 편찬되었다. 요나라의 침공을 받았던 어수선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초부터 7대에 걸친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한 것이다.
이후 실록은 계속 편찬되었는데, 11세기초인 현종 때 실록을 처음 편찬했다는 것은 중국적인 역사 편찬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국적인 역사 편찬의 제도화는 유교사학의 대표이기도 하였다. 일종의 자치적(資治的) 혹은 감계적(鑑戒的)인 요소가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었다.
실록의 편찬은, 전왕조(前王朝)의 역사를 정사(正史)로 편찬한다는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 찬술과도 마찬가지로 전왕(前王)의 행적과 업적을 그대로 기록해 후세에 물려준다는 역사의식의 하나로 자치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 편찬의 정신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명분론에서 의식화되고 이것이 유교적 윤리성에서 제도화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인종 때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나오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실록이 편찬되고 있는 제도적인 상황에서 이해한다면 유교사관에 의한 편찬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삼국사기』는 종래의 여러 역사서에 비해서 중국적인 정사의 기전체(紀傳體)를 그대로 모방한 유교적·중국적인 체재를 갖춘 한국에서의 최초의 역사서이었다.
간혹 『삼국사기』를 문화적 사대주의의 결과라고 혹평하기도 하지만, 사실(史實) 위주로 편찬한다는 중국 역사 편찬의 방법에 충실해 고대의 역사서에 흔히 거론되고 있는 비합리성·비현실성 같은 것이 비교적 도외시되고, 대신 유교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하면서 합리성·객관성을 중시했다.
그러면서 김부식은 사평(史評)을 붙여 자기 나름의 역사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래의 삼국의 연결 의식이나 고구려 계승 의식에서 신라 계승으로 고려의 계통을 변질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삼국사기』는 역사 서술 체재에서 종래에 비해 일단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관에 매혹되고 중국문화 의식의 차원에서 삼국시대의 상황을 다루었기 때문에 한국 고유의 전통성이 비교적 경시된 결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중국적인 체재를 갖춘 최초의 역사서로서 한국사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또 사료적 가치도 높다고 볼 때, 『삼국사기』의 편찬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실록 편찬이나 『삼국사기』와 같은 기전체의 정사류(正史類)는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관례화되었다.
그 뒤 고려 중기에는 실록이나 『삼국사기』와는 다른 성향의 역사서가 출현했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그것이다.
전자는 원나라의 강압 아래에 있던 고려의 수난과 복잡다단했던 국제 관계 속에서 민족의 고난과 생활을 중국과 우리나라의 흥망사를 대비하면서 서사시로 읊은 것이다.
한편, 단군(檀君)이라는 민족 공동의 시조를 내세워서 우리 나라가 중국과 다른 문화를 누려온 나라임을 강조하면서도 유교적 사관을 내세워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요망했다.
후자는 지난 날의 역사적 전통을 불교사관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한편, 전통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고증을 통해서 시도하였다. 아울러, 일연은 단군의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는 한국 고대사의 체계를 자기 나름으로 체계화했다.
그런데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에서 다같이 민족의 시조로서 단군을 내세우고 있는 일은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한국사학사에서 처음으로 민족의 역사의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단군을 신화로서만 본 것이 아니라 사실(史實)로서의 단군을 민족 시조로 승화시킨 것이다. 비록, 유교사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제왕운기』에서도, 이전의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군의 민족시조화는 확실히 당시의 시대적인 사조의 반영이기도 하다.
무신집권으로 인해 문화의 단절이라는 위기 의식이 강렬해졌고, 바로 이어서 몰아닥친 원나라의 예속화로 고려의 지식층은 전통적인 한국의 문화 계승을 자각했다.
나아가 자기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당시 무신의 물리적 탄압과 이민족의 억압을 받는 현실에 항거하고자 했던 저항과 자주의 정신적 기운이 반영되었다. 이밖에도 고려 후기는 무신란 이후 원나라의 억압에 의한 문화적 위기 의식에서 당시의 기록과 역사의 정리를 꾀하게 되었다.
즉, 고종 때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 충렬왕 때의 『고금록 古今錄』·『천추금경록 千秋金鏡錄』·『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와 충선왕 때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 그리고 공민왕 때의 『사략 史略』 등 고려 왕조사의 정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역사서는 원나라의 지배 아래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왕조가 망하기 전에 당시의 왕조사를 정리하는 특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되는 일이다.
이밖에 개인의 문집류도 나왔는데, 단순한 시문집이 아니라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서술들이었다.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 白雲小說』,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 破閑集』·최자(崔滋)의 『보한집 補閑集』·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 櫟翁稗說』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게 보면 고려 전기는 관찬서인 실록과 『삼국사기』·『해동고승전』 등이 나왔던 시기이고, 각기 편년체·기전체·전기 등의 체재였으며, 중국 역사관의 소산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고려 후기는 사찬서(私撰書)인 『제왕운기』·『삼국유사』를 비롯한 많은 고려 왕조 관련 역사서와 기록이 나왔던 시기이고 모두가 중국 문화에 손색이 없는 한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은 『삼국사기』의 보충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전기의 사학-객관적 역사 인식과 주관적 역사체계
앞에서 거론한 고려 후기 역사의식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민족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정신적인 바탕이 되었다. 역사인식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한국사의 체계적인 인식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많은 역사서에 단군을 민족시조로 삼는 일이 일반화되기도 했다.
여하튼 조선 전기의 역사서는 먼저 관찬서와 사찬서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지만, 역사관에 따라서는 가치관의 정립을 위한 주관적인 역사인식과 사실을 후세에 올바르게 전해주기 위한 객관적인 역사인식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현존하는 관찬서의 대표로는 권근(權近)의 『동국사략 東國史略』,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김종서(金宗瑞)의 『고려사절요』, 서거정(徐居正)의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등이 있다.
사찬서로는 권근의 『동현사략 東賢事略』과 『응제시 應製詩』, 권제(權踶)의 『동국세년가 東國世年歌』,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 박상(朴祥)의 『동국사략 東國史略』,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동국사략 標題音註東國史略』, 윤두수(尹斗壽)의 『기자지 箕子志』, 이이(李珥)의 『기자실기 箕子實紀』,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 童蒙先習』이 있다.
물론, 이들 관찬서와 사찬서는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많은 차이가 있다. 관찬서는 질과 양에 있어 사찬서보다 훨씬 방대하고 유교사학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찬술되었다.
사찬서는 『동국세년가』와 같이 『제왕운기』를 모방해 이룩된 것이 있는가 하면, 도참적(圖讖的)인 신비설(神祕說)과 도가적 영향에서 이루어진 『응제시주』 같은 유형도 있으며, 『동국통감』의 요약인 『동국사략』과 교훈적 역사교육에서 시도된 『동몽선습』에서의 역사인식도 있는 등 각기의 성향이 달랐다.
아울러, 조선시대에서는 태종 때부터 역대의 실록이 계속 찬수되고 세조 때부터는 『국조보감 國朝寶鑑』이 편찬되어 이후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역사인식의 표본은 관찬서에서의 객관적 역사와 주관적 역사의 인식 차이였다. 즉, 『고려사』와 『삼국사절요』에서의 객관적인 역사인식과 『동국통감』에서의 주관적 역사 체계였다.
물론, 전왕조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찬수한다는 일은 중국적인 역사 편찬의 관례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 때 삼국시대의 역사 편찬을 이룬 뒤 일정한 관행이 되었다. 이에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때의 역사가 편찬되었는데, 이는 고려왕조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기정 사실로 삼기 위함이었다.
먼저 이루어진 것이 정도전(鄭道傳) 등에 의한 『고려국사 高麗國史』 37권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약 3개월만에 착수해 2년 2개월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의 실록이 이용되는 등 전통적인 편찬 방법에 의한 것이었지만, 고려 멸망의 당위성과 조선 건국의 합법성 여부에서 불만을 품은 태종이 개편을 명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조선 건국과 동시에 처음으로 시도된 고려시대사였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 고려 말기의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선례가 되기도 했다.
아울러, 『고려국사』의 개편이 시작되기 이전 조선에서는 삼국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삼국사략 三國史略』으로 명명했으나, 『동국사략』으로 완성되었다.
권근 등이 주관한 편년체의 『동국사략』은 『삼국사기』를 골격으로 삼고 있으면서 풍부한 사료를 중심으로 객관성을 유지한 『삼국사기』에 비해, 유교적 윤리관과 주자학적 정치이념에 입각해 정치의 보조 수단으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고려국사』와 『동국사략』은 새로 건국한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 기왕의 전대사(前代史)를 총정리해 신생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을 정립하려고 했던 성급하고도 긴요한 작업이었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합법성과 명분이 국내외에 정립되었다.
그 뒤 세종때는 태종 때 개편을 시도했던 『고려국사』의 계속적인 개편이 시작되었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완성을 보지 못했다가 60년 만인 1451년(문종 1) 기전체의 『고려사』가 완성되고 문종 2년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짐으로써 고려사에 대한 정리가 완성되었다.
『고려사』를 기전체로 하고 『고려사절요』를 편년체로 삼은 것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사관(史觀)의 안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려사』는 풍부한 자료와 객관적인 서술에 충실한 조선시대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세종 때의 학문적인 수준과 열의가 대단했다는 것과 고려시대의 실록을 포함한 풍부한 자료가 있었으며, 중국의 역사 편찬에 관한 연구와 안목이 높았음과 동시에 역사 편찬의 정신적인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려사』 편찬에 동원된 학자들이 세종 때 실록을 비롯한 많은 편찬물을 편찬했던 경험이 풍부하였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편년체인 『고려사절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고, 세조 때 『고려사절요』의 예를 따라서 『동국사략』을 개편, 보완한 『삼국사절요』에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삼국사절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삼국 말까지의 편년체 역사서로서 『동국사략』과 같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비교적 객관성을 띤 역사서로서 『고려사절요』의 계열에 속하는 비중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의 역사 편찬은 어디까지나 단대사(斷代史)의 편찬에 머물렀다. 비록, 『동국사략』에서 『고려사』로 이어지고, 『삼국사절요』에서 『고려사절요』로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한국사의 전사(全史)인 통사(通史)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중국적인 정사(正史)의 예에 의한 공적인 찬수 작업이었다.
그러나 1484년(성종 15)에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의 통사인 『동국통감』 57권이 이룩되었다. 처음 세조 때 기도되었으나 『삼국사절요』에 의해 지연되다가 서거정의 요청에 의해 1년 남짓 걸려 편찬된 것이다.
편년체인 『동국통감』은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서이다. 단군조선에서 삼한(三韓)까지는 외기(外紀)로 다루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거질의 『동국통감』이 1년 여의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은 기왕에 편간된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의 편년체 사서를 대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국통감』은 『고려사』·『고려사절요』 등에서의 객관적인 역사서에 비해 『동국사략』에서와 같은 통치 이념의 제시라는 주관적인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동국통감』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론(史論)에서도 농후하게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들 사론 중에는 『삼국사기』에서의 김부식과 『동국사략』에서의 권근의 사론도 들어 있지만 『동국통감』 자체의 사론도 200여 편이나 된다.
이에 의하면 명분과 예절이 강조되는 사대적인 성향이 짙으며, 숭문주의(崇文主義)가 강조되었는가 하면 조선건국의 합리성을 설파하고 있다. 이밖에도 불교·도교·도참사상 등을 이단(異端)으로 배척하고 있다.
한편, 『동국통감』에서는 발해의 역사를 처음으로 한국사의 범주에 편입시키고 있다는 일이다. 또, 가야에 관한 기록도 비교적 풍부하게 다루어져 있다. 불교적인 요소를 배격하면서도 『삼국유사』 관계의 기록도 적지 않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세종·세조 때의 북방 정책이 성종 시기에 들면서 확대된 국토의 역사지리적인 관심으로 승화되어 역사인식에 작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재인식을 통한 만주 및 발해에 대한 관심이 두터워진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심과 인식은 이후의 역사인식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 후기의 사학-전통의 역사와 각성의 역사
17, 18세기의 조선 후기, 이른바 실학파(實學派)의 학자들이 활동했던 이 시대는 조선 전기부터의 전통적인 역사 체계와 역사인식을 계승하면서도 역사에 관한 관심이 크게 환기된 시기였다. 그리고 역사 연구에서도 기왕의 연구 태도에 비해 객관성과 자주성이 강조되었다.
실학파의 선도자인 이익(李瀷)이 역사를 주관보다는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경학(經學)의 종속에서 독립된 학문으로 삼아야 하며, 화이관(華夷觀)에 의한 중국 중심의 사대적 역사관에서 독자적인 한국사로 정립해야 한다고 설파한 것은 이 무렵의 선진적 역사인식의 지주(支柱)이자 공통적인 역사 정신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출현한 역사서는 대부분 종래의 역사서를 이어받아서 대본으로 했고 수많은 야사(野史)들을 참고했지만, 이를 묵수(墨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으로 체재화하고 비판해 새로운 감각의 역사서로 편성했다.
당시의 대표적인 역사서를 보면, 오운(吳澐)의 『동사찬요 東史纂要』, 조정(趙挺)의 『동사보유 東史補遺』, 유계(兪棨)의 『여사제강 麗史提綱』, 홍여하(洪汝河)의 『휘찬여사 彙纂麗史』와 『동국통감제강 東國通鑑提綱, 일명 東史提綱』, 북애(北崖)의 『규원사화 揆園史話, 일명 檀君實史』,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목 東國歷代總目』,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 東史會綱』,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東史綱目』,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海東繹史』,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渤海考』 등이 있다.
순수한 역사물은 아니지만 역사인식에서 주목할만한 저술로는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 허목(許穆)의 『동사 東史』,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사강조례 東國史綱條例』, 남구만(南九萬)의 『동사변증 東史辨證』, 이세구(李世龜)의 『동국삼한사군강역고 東國三韓四郡疆域考』, 이익의 『성호사설』과 『성호선생문집』, 이종휘(李鍾徽)의 『동사 東史』, 정동유(鄭東愈)의 『주영편 晝永編』, 이면백(李勉伯)의 『해동돈사 海東惇史 : 지금은 없어짐.』,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특히 疆域考) 등이 있다.
이 무렵 야사류도 많았다. 『소대수언 昭代粹言』·『대동패림 大東稗林 : 稗林』·『광사 廣史』·『휘총 彙叢』·『동야수언 東野粹言』·『아주잡록 鵝洲雜錄』·『대동야승 大東野乘』·『설해 說海』·『총사 叢史』·『동사록 東史錄』 등의 총서에 수록된 것만 해도 293종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
이 중 조선 전기의 저작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선 후기의 것이다.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의 것이 많은 까닭은 전쟁과 당쟁, 그리고 급격한 사회 변화에 따른 영향 때문이다.
이러한 야사류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역사서를 보면 단대사와 통사의 두 종류로 찬술되었고, 체재도 기전체·편년체·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가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유교사학에 의한 찬술이지만 『규원사화』와 같은 도가사학에 속하는 이색적인 것도 있다. 또, 역사 서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이론·역사 지리·역사 고증에 관한 관심도 대단히 높았고 비중도 컸다.
이밖에도 단군·발해에 관한 관심이 통사의 경우 거의 일반화되었고, 한국사에서의 정통론(正統論)이 고대사 체계화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 문화에 대한 종래의 종속관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농후해져서 문화의 독자성과 긍지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추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 전기부터의 맥락을 이어오면서 조선 후기 나름의 시대 상황에 의해서 특질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가장 대표할 수 있는 역사서는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한치윤의 『해동역사』와 정약용의 『강역고』이다.
『동사강목』에서는 명분과 정통이 강조되고, 『연려실기술』에서는 실증과 과학성을 내세웠으며, 『해동역사』에서는 객관성과 합리성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강역고』에서는 역사의 해석과 비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이 시기에 오면 종래 전통적인 세계에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이속층과 서민층의 역사의식이 높아져 『연조귀감 椽曹龜鑑』·『규사 葵史』·『희조질사 熙朝軼事』·『호산외사 壺山外史』·『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과 같은 이색적인 저술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야사류의 전통을 이어오면서도 민중의 각성을 보여주는 본보기이기도 했다.
위와 같은 조선 후기 특히 17, 18세기의 역사인식과 결과들은 한국적 전통의 재발견과 사회적 각성에서 온 역사의 재정리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사 연구의 방법과 인식 차원이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 비교적 합리적이었고 객관적이었으며 과학적이었다.
따라서, 장차 개진될 근대적인 역사 연구에 밑받침이 되어주는 바도 적지 않았다. 한국 전근대의 사학사의 발달 과정과 단계적인 성격을 대관하면서 몇 가지의 특질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전승이 기록화되어 고대적인 역사서의 모습을 갖추면서부터 한국사학사가 시작되지만, 명실상부한 역사적인 사서(史書)로서는 고려 중기의 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에서 구체화되고, 이 전통이 조선 후기에 와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둘째, 자치적이고 감계적이었던 역사가 고려 후기의 민족의 역사로 발달되고 조선 후기의 민중의 역사로도 전개되었다.
셋째, 중국의 영향에서 유교사학이 전통적인 역사관으로 지속되었지만 고려 후기의 불교사학과 조선 후기의 도가사학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넷째, 역사서의 편찬이 처음은 국가 사업인 관찬이었으나 고려 후기부터 사찬의 역사서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특히 조선 후기는 야사를 포함한 사찬의 전성시기가 되었다.
다섯째, 역사가 경학·문학과 같이 학문의 종합적인 범주에 속해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학문이 분화되어 역사가 독립된 학문으로 승화되었다.
여섯째, 중국 중심의 사대적 역사관이 지배되어오다가 고려 중기부터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자주적인 역사의식으로 변모되고, 이것이 조선 후기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일곱째, 유교주의에 의한 주관적·연역적인 역사관이 고려 중기부터 차차 객관적·귀납적인 역사관으로 발전되고 조선 후기에 와서 특히 개진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 전근대사학사에서의 괄목할만한 단계는 고려 중기 『삼국사기』가 편찬되고 고려 후기 『제왕운기』와 『삼국유사』가 찬술된 시기와 조선 후기 실학파 학자들에 의해 역사서가 찬술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문화의 수용과 이해가 전폭적으로 추진되면서 유교사학이 정착되었다. 한편, 송나라에서 발달한 민족주의·국가주의가 고려의 문화의식으로 승화되고 각성된 민족적·자주적인 경향과 결부되어 민족사학의 성향으로 전진되었다.
조선 전기를 지나 후기에 접어들면서 싹트기 시작한 개신적(改新的)인 시대사조에 의해 17, 18세기의 문예부흥적인 기운으로 발달되고, 이 기운에 의해서 역사인식도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단군의 민족시조관도 민족주의·국가주의의 발달과 비례되기도 한다. 아울러 발해에 관한 관심이 조선 전기부터 발생한 것도 민족주의·국가주의의 발달과 같이 북방 국토 확장의 결과에서 온 관심의 소산이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후기에 걸친 한국사학사의 인식은 고대사가 이전보다 훨씬 연장되고 문화적인 영역도 확대되는 이른바 역사의식의 확산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진폭(振幅)은 이후의 민족주의사학에 그대로 계승, 확대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과도기의 역사학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의한 개항은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에 큰 충격과 변화를 주었다. 외세의 충격에 대응하는 자세에 따라 크게 개화(開化)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사상적 조류가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조선 말기 역사 이해의 정형처럼 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기존의 역사이해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수반하고 있었다.
앞에서 이미 이 시기에 시대적 각성에 따른 역사의 재정리의 필요성이 주어졌다고 지적되었거니와, 이것은 외세의 침략과 봉건적 사회 모순에 대응하는 반침략·반봉건의 근대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과도기의 역사학은 개항 이후의 조선 사회와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시대의식의 반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투로 민족적 자존에 대한 위협이 심화될수록, ‘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잔존하고 있는 봉건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다는 역사의식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조선 말기에, 이러한 역사의식을 근거로 이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의병 투쟁 등 무력 활동의 방식과 교육·언론·식산 등을 통한 민중계몽·실력배양 등 자강 운동의 방식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중 후자의 경우 필연적으로 민족사를 각성시키는 데서 출발점을 삼고 있었다. 조선 말기의 역사 연구와 역사 교육이 일종의 자강 운동으로서의 실천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기의 역사가들은 국가 흥망의 원인과 민족 성쇠의 과정을 살펴보게 하는 역사야말로 애국심의 원천이면서 구국 운동을 전개하는 근거라고 했다.
역사는 이제 지난 날의 어떤 사실을 나열하는 단순한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민족적 현실의 원인을 살펴 그것을 타개하는 인문학적 근거로 등장했다.
역사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종래의 역사학의 근거라고 할 역사관·연구 방법·서술 태도를 재검토하게 되었고, 새로운 연구 방법 등이 모색될 수밖에 없었다.
종래의 역사학은 지배자의 자기 정당성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고, 기껏해야 훈민적(訓民的)·교훈적인 성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을 담는 역사 서술의 방법도 사실을 편년체적으로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종래의 과거 지향적인 역사인식 태도나 고식적인 분석 종합의 방법으로서는 당시의 급박하고, 중첩된 과제를 제대로 분석해 해결할 수 없었다. 역사학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회 발전을 인과 관계 위에서 분석, 종합하는 근대 역사학이 등장하는 것은 이같은 추세와 관련이 깊다. 역사의 대상도 지배층이 아니라 국가·민족·민중으로 변화되었으며, 주관적·순환론적인 역사인식이 객관적·발전적인 인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역사는 자신의 ‘왜 그렇게 된 것’을 냉엄하게 인과적으로 밝혀야만 했고, 그것도 무비판적으로 사료를 나열하던 방법을 지양하고 사료의 객관적 검증을 토대로 인과 관계를 발전적으로 서술하는 태도를 지녀야 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에 새로운 역사학이 태동되는 배경의 하나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뒷날 식민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은 서구의 학술과 문물을 급속히 도입해 서구식 근대화에 열을 올렸다.
일본은 1877년 제국대학을 설립하고 10년 후 사학과(史學科)를 설치해 근대 역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뒷 날 제국대학 출신의 관학자들이 한국사 연구에 종사하며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이른바 식민주의 사학을 성립시키게 된다.
일본측의 한국사 연구는 대학의 학자들에 의해 본격화되기 전에, 참모본부에서 먼저 관심을 가지고 조선 침략을 위한 군사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즉, 일본 참모본부는 1883년 만주에서 탁본해 온 광개토왕비문을 검토해, 고대 일본이 이미 한반도에 진출하고 있었음을 기정 사실화하는 작업을 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고대사에 국한되어 있었다. 일본은 한국 진출의 역사적 근거를 고대 한일 관계에서 찾았다.
옛날 신화시대부터 한국이 그들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고대사 인식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의 역사관을 한국 진출의 명분과 침략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구실로 삼은 것이다.
초기에는 그러한 관점에서 하야시(林泰輔)의 『조선사 朝鮮史』(1892)와 요시다(吉田東伍)의 『일한고사단 日韓古史斷』(1893) 등이 출간되었다. 이같은 일본의 조선사 관계 책자들은 뒷날 현채(玄采)와 김택영(金澤榮)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대사 연구에서 시작된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는 1894년(고종 31)의 청일전쟁 후 점차 근대사·사회경제사 분야의 연구로 전환했다.
그들의 한국 진출이 침략의 명분을 찾는 단계에서 강점을 위한 실질적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의 한국사연구도 이러한 변화에 보조를 맞추었던 것이다.
1902년 한국을 방문한 후쿠다(福田德三)은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한국사의 ‘정체성론(停滯性論)’을 주장했고, 그 뒤 일본 여러 학자들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게 되었는데,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던 시카타(四方博)도 그 대표적인 학자다.
정체성론은 한국사가 왕조의 변화 등 정치적인 변동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는 제대로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의 정체성이론이 주창될 20세기 초에는 역시 일본인 어용학자들에 의해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이 수립되었다.
타율성론은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동경(東京)지사 안에 설립된 만선지리역사조사실에서 주장한 만선사관(滿鮮史觀)에 기초해 성립된 것으로, 한국사가 한국인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외세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 사관과 타율성 사관은 식민주의 사학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는데, 두 이론은 모두 일본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한국사를 통해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이같이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 말기에 새로운 역사학이 태동하는 한편, 근대민족주의사학이 성립된 것은 앞에서 말한 일제 어용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이 미친 영향과 자극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말기 과도기의 역사학은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교육·계몽 운동에 종사하던 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실학시대의 박지원(朴趾源)·정약용·김정희(金正喜)의 사상을 연구하거나 그들의 저술을 복간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 때 복간된 것은 『연암집 燕巖集』과 『목민심서』·『흠흠신서 欽欽新書』·『아언각비 雅言覺非』와, 장지연(張志淵)이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我邦疆域考』를 증보·개정하여 출간한 『대한강역고 大韓疆域考』 등이 있다.
또 조선 말기의 사회 변동과 외세의 압력이 지식인들의 역사의식을 자극시켜 몇몇 저서들을 출간하게 되었다. 통사류로서는 정교(鄭喬)·최경환(崔景煥)의 『대동역사 大東歷史』와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 歷史輯略』, 일본인 하야시의 『조선사』와 『조선근세사 朝鮮近世史』를 번역·편집하여 만든 현채의 『동국사략』등을 들 수 있고, 당대사(當代史)의 성격을 띤 것으로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정교의 『대한계년사 大韓季年史』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대동역사』는 처음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자주적인 한국사를 가르쳐 역사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독립협회가 해체된 지 8년 만에 출간되었다.
1905년 『역사집략』을 출간한 김택영은 그 전에 『동국역대사략』과 『동사집략』 편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집략』은 『일본서기』 등에 나타나는 고대 일본의 한국 침략과 경영을 그대로 옮기는 등, 일본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역사 체재 수립에 고민했다. 현채가 하야시(林泰輔)의 것을 편역해 『동국사략』을 간행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체제분립(體制分立)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반성을 『동국사략』의 편역에 담으려 했다.
한편 『동국사략』은 『조선사』가 지녔던 식민주의 사관적인 요소를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수정할 수 있었다. 『조선사』와 달리 현채는 단군을 역사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사군문제(四郡問題)와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및 임진왜란 등에서 하야시의 『조선사』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조선 말기 과도기의 사학은 반봉건·반외세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 계몽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연구 방법론이나 역사 서술면에서는 근대적인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었다. 과도기의 사학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를 거치면서 근대민족주의 사학으로 정진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근대민족주의사학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됨에 따라 반침략적인 항일 민족운동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또한, 이때는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이 강조되었으므로 강렬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민족주의사학이 성립하게 되었다.
‘근대민족주의 사학’이란 의식면의 민족주의만 강조한 것이 아니고, 그 바탕에 근대역사학이 지니고 있는 근대적 학문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민족주의 사학’이라 부른다.
개항 이후 전개된 민족주의 이념의 유형에는 주자학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입각한 척사위정계(斥邪衛正系)와 개항에 따라 해외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도입해 근대 사회를 이룩하려는 개화계, 혈통·신분 등 봉건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사회 개혁을 내재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민중계(民衆系)가 있었다.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의식면에서 민족주의의 앙양과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 전제되어 있고 방법론적으로는 근대 역사학의 성격을 갖는 것이어야 했다.
이 밖에도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요인이 그 배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앞에서 과도기의 역사학이 일본인들의 한국사 연구에 자극된 바 있다고 지적한 바 있지만, 같은 맥락에서 과도기의 계몽주의 역사학을 거친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대외적으로는 당시 노골화되어가고 있던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에 대결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전통적인 유교사학이 가지는 중세적 봉건성을 내재적(內在的)으로 극복해야만 하였다.
식민주의 사학이 정체성론과 타율성론 및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을 통해 그들의 한국 진출과 침략·강점 등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하였을 때,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근대 학문의 이름을 빌려 교묘하게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려는 일제 관학자들과 대결하면서,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자주 독립의 전통을 강조했다.
근대민족주의 사학이 한국고대사 연구에 치중했던 것은 일제 관학자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된 연구 영역이 한국고대사였기 때문이다.
또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삼국사기』 이래 조선 말기까지 한국의 사학계를 지배해온 유교사학을 극복해야만 했다. 유교사학은 충효적 가치관(忠孝的價値觀)에 입각한 지배자 중심의 역사 이해로서, 역사인식에는 민중의 역할이 배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밑으로부터의 개혁 의지가 지배층의 이해와 충돌했을 경우 대부분 난(亂)으로 인식했다.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중세사학이 외면했던 민중을 민족주의운동의 주체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봉건적 유교사학을 극복하고 있었다.
또 하나 중세적인 유교사학에서는 정통론(正統論)이 강조되었다. 정통론은 정권의 성격을 전후 왕조와의 관계에서 규명하는 것으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왕조의 정통성 여부는 영토·국민·문화·주권 등의 실세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관념론적이고 윤리적인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입각해서 규정되었다.
따라서, 정통론적 사관은 역사적 실체를 인식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해석과 평가를 앞세웠다. 따라서, 역사는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 봉사해야 한다는 근대사학의 입장에서 정통론은 내재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과제였다.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배경에는 실학시대 역사학의 비판적 계승이라는 또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박지원과 정약용의 저술들이 복간된 것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고증 정신과 실학의 서민 정신이 발휘된 것은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태동기는 앞에서 본 과도기의 사학인 계몽사학의 성립 시기이며, 그 성립기는 1910년∼1920년대의 박은식·신채호에 이르러서이다.
백암(白巖)·겸곡(謙谷)·태백광노(太白狂奴)의 호를 가졌던 박은식(1859∼1926)은 조선 말기·일제 강점기에 유학·교육·언론·역사 연구 및 독립 운동에 공헌했다.
그는 계몽 운동에 종사하면서 사상적 바탕으로서 국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우 西友』·『서북학회월보 西北學會月報』·『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지에 국사를 소개했고, 국치 후 만주에 망명, 『동명왕실기 東明王實記』·『천개소문전 泉蓋蘇文傳』·『명림답부전 明臨答夫傳』을 썼고, 그 뒤 『안의사중근전 安義士重根傳』·『이준전 李儁傳』·『이충무순신전 李忠武舜臣傳』을 저술하고 『발해사 渤海史』·『금사 金史』 등을 역술했다.
박은식을 민족주의 사학자로 돋보이게 한 것은 『한국통사 韓國痛史』(1915)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등이다.
대원군(大院君) 집권에서 국치에 이르는 약 50년간의 한국 근대사를 일제의 침략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 『한국통사』에는 4300여 년이나 문화 국가로 계속된 한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노예의 나라로 전락되어간 과정을 기술하면서, 비록 한국의 형(形)이 훼파되었다 하더라도 내면적인 신(神)을 보전하면 언젠가는 외형적인 국가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즉 『한국통사』는 신(神)을 보전하기 위해 저술된 것이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민족주의의식은 물론 ‘통사’를 서술한 방법에 대해서도 밝혔다. 당시 신사(新史)들이 취한 체재와 방법을 모방했고, 내용을 서술하고 논평을 가하는 형식을 취했다.
때로는 사실 기술에 앞서 논평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부론(附論)과 안설(按說)을 덧붙이기도 하는 등 저술 방식과 체재는 근대 역사학의 경향에 상당히 접근했다.
『한국통사』에서 국권 회복의 소망을 역사의식을 통해 강하게 환기시켰던 박은식은 이 소망을 3·1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자주 독립의 자신감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펴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나는 한결같이 우리 나라가 반드시 광복의 날을 맞을 것과 일본이 장래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것을 자신하였으므로, 비록 전패·유리·기한·병고 중에서도 일찍이 일종의 낙관을 가지지 않음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우리 나라가 반드시 광복을 맞을 것이라는 확신을, 일제의 침략·식민·수탈 통치에 투쟁하는 이 ‘피의 역사(血史)’에서 논증하려 했던 것이다.
‘통사’와 ‘혈사’에 나타난 박은식의 사학은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강렬함에 비해서 근대적인 성격은, 다음의 지적에서처럼, 약하게 나타난다.
첫째, 그의 사학은 혼(魂) 혹은 신(神) 중심의 역사로서 서술의 목적 또한 민족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데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 발전의 중요한 기반인 물적(物的) 인식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여기서 관념론적인 편향성을 엿볼 수 있다.
둘째, 박은식의 역사 서술 체재와 시대 구분, 가치 평가 등에서 다소 진보적이며 주체적인 점이 보이지만, 역사 주체 인식면에서는 아직도 영웅 중심 사관을 완전히 극복한 단계는 아니었으며, 따라서 근대사학에서처럼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의 민족주의 사학은 근대사학과 일치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은 신채호에 와서야 성립됐던 것이다.
신채호(1880∼1936) 역시 한말·일제 강점기의 언론인·교육자·독립운동가로서, 1905년경부터 국사 연구를 시작했고, 계몽 활동에도 나섰다.
그는 『대한매일신보』 등에 역사 관계 논설을 써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시기에 역사·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한편, 『이태리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을 역술하고, 『성웅이순신』·『을지문덕』·『동국거걸최도통전 東國巨傑崔都統傳』 등을 써서 위난에 처한 국가와 민족을 구원할 영웅의 출현을 촉구했다.
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 讀史新論』이라는 한국고대사 관계 사론을 써서 당시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이 글에서 종래의 전통적인 유교사학이 가졌던 사대적·노예적 역사관과 그러한 역사관이 처음 보이는 김부식(金富軾)과 『삼국사기』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종래 한국 역사가들의 인식과는 다른 한국 고대사 인식 체계를 시론적으로 제시했다.
즉, 실학시대 이래 면면히 기술되어오던 마한정통론(馬韓正統論)을 부정하고 부여·고구려 주족론(主族論)을 주장했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계몽주의 사학자 김택영마저도 수용했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고, 발해사를 중요시해 발해·신라의 양국 시대론을 제창했던 것이다.
『독사신론』에 나타난 한국고대사의 인식 체계는 뒷날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등에 나타난 방대한 고대사 체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신채호는 중국으로 망명해 국권회복 운동에 나서는 한편, 독립 투쟁의 방편으로 국사 연구에 몰두했다.
1910년대 말 『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를, 1920년대에 들어 주저라 할 『조선상고사』를 남겼고, 거의 같은 무렵 한국고대사 관계 논문을 모은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를 완성했다.
대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풍겨지고 있는 『조선상고문화사』는 중국 민족과의 정치적·군사적 대결 의식을 짙게 깔고 문화적으로는 중국을 능가했다는 강한 자부심을 근거로 하여 한국 상고사가 기술되어 있다.
『조선상고문화사』가 이루어진 1910년대 신채호는 우리 상고사의 무대를 만주·한반도와 부여족의 식민지로서의 중국 동북 지역까지 확대시켰고 한국 상고문화의 국수적 성격을 강조했다.
한사군의 반도외존재설(半島外存在說)과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 등을 주장하는 한편, 역사연구에서 유증(類證)·호증(互證)·추증(追證)·반증(反證)·변증(辨證) 등의 실증 방법과 문헌 수집·유물 발굴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무렵에는 역사 주체에 대한 인식이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신채호 사학은 근대민족주의 사학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이때 유교적 사관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고 반주자학적 성격(反朱子學的性格)을 뚜렷이 드러내었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했다.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정립하는 한편, 낭가사상(郎家思想)을 주체적으로 부각시켰으며, 역사관·역사방법론 등을 객관적인 역사 과학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신채호에게서 성립되는 근대 민족주의 사학은, 첫째 사료론(史料論)·고증론·서술론 등의 역사연구 방법론이 근대적 역사 방법론에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둘째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인식하는 점에서도 근대 역사학의 그것과 일치하며, 셋째 정통론이나 대의명분론과 같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던 중세적 역사학을 해방시켜 역사학의 객관성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채호의 사학은 일제하라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해 사대주의적·타율적인 한국사의 인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민족사의 자주적 발전과정을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역사란 역사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역사학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역사 이론과 연구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사학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채호에 이르러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근대사학의 분화
1910년∼1920년대에 발달한 한국의 근대사학은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결하는 한편, 유물론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 이론과 방법론을 도입하면서 분화 현상을 겪게 된다.
국사학계에서는 이들 분화 현상을, 박은식·신채호 등의 초기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한 후기 민족주의사학과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및 진단학회(震檀學會) 중심의 실증주의 역사학으로 정리하고 있다.
후기 민족주의사학은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문일평(文一平)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권덕규(權悳奎)·황의돈(黃義敦)·장도빈(張道斌) 등도 이 계열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들 중에는 국망(國亡) 후 중국에 망명해 박은식·신채호와 함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해 민족독립 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있어 역사 연구를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했다.
강한 민족 의식으로 무장된 이들은 일제의 타율사관에 대항해 민족주체 사관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또 그들은 박은식의 국혼 사상, 신채호의 낭가 사상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정신사관을 강조하였는데, 정인보는 ‘얼’, 안재홍은 ‘민족정기’, 문일평은 ‘조선심’을 각각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세력으로 인식했다.
양명학(陽明學)을 배경으로 한 정인보는 이건방(李建芳)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서 일제강점 후 한 때 상해(上海)에 망명, 박은식·신채호와 교유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 식민주의 사관론자들이 한국고대사를 훼멸하는 것을 보고 분개해 『동아일보』에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했는데, 뒷 날 이를 『조선사연구 朝鮮史硏究』(상·하)로 간행했다.
그는 역사의 본질을 ‘얼’에서 찾으려고 했으며, 민족 정신인 “얼을 고수함으로써 민족의 발전과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인보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고대사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일제 관학자들이 부인하는 단군조선에 대해 역사적 실재성을 주장했고, 고조선을 발조선(發朝鮮)·진번조선·예맥조선·낙랑조선으로 파악하는 한편, 한반도와 만주 전역 및 중국 동해안 회수(淮水) 지역의 동이족(東夷族) 활약을 강조했다.
그의 고대사 인식은 신채호의 것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는데, 한사군론이나 백제의 해상 발전설 등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인보는 한사군이 압록강 이남에 존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이른바 ‘낙랑출토 유물’을 들었는데, 이는 일제 어용학자들이 평양 근처에서 출토된 봉니(封泥)에 ‘낙랑’이라는 명문이 있다고 하면서 그 지역을 한군현 중의 ‘낙랑’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된 명쾌한 답변이었다.
그는 또 일제 관학자들이 광개토왕비문을 들어 고대 일본의 조선진출을 강조했음에 대해, 같은 비문의 신묘년조(辛卯年條)를 새롭게 해석해 일본학자들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왜(倭) 정벌을 주장했다.
안재홍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수학 후 상해에 망명해 동제사를 통해 독립 운동에 참여했고, 귀국 후 언론·사회 활동에 투신했다. 조선일보사 사장 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등을 연재했다.
1930년대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이 크게 제약받자 그는 민족 정기를 불후에 남기기 위해 국사 연구에 전심하여 『조선상고사감 朝鮮上古史鑑』(상·하)를 남겼다.
이 연구에서 언어학적 방법론과 사회발전 단계설을 도입해 한국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한편,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있던 고대사를 바로잡는 데에 노력했다.
문일평은, 정인보·안재홍과는 달리 고대사연구에 주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신채호가 주장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관을 역사 연구에 반영하려고 애썼다.
그가 한국사에 나타난 ‘반역아’를 굳이 연구의 대상으로 한 것이나, 국제 관계사로서 『한미수교50년사』를 서술한 것은 국내·국제 관계에서 ‘아와 비아’를 주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문일평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한 것도 신채호가 사회 발전 주체로서의 민중을 인식한 것과 같았다.
후기 민족주의사학이 고대사 분야 연구에 역점을 둔 것은,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에 의해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분야가 한국 고대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기 민족주의사학이 방법론과 과학성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없지 않았으나, 초기 민족주의사학에 비해 한층 세련된 점이 없지 않다.
특히 일제의 타율성이론 등 식민주의사학에 대항해 한국사의 실제 면모를 자주적인 관점에서 부각시키려고 한 것은 사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새로운 조류가 수용되면서 노동·소작쟁의 등 민중 운동이 강렬하게 대두되었고, 역사학계에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전개되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학을 개척한 사람은 백남운(白南雲)으로, 그는 『조선사회경제사 朝鮮社會經濟史』(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 朝鮮封建社會經濟史』(1937)를 일본어로 펴냈다.
두 저서는 한국의 고대 및 중세사를 사회경제적 발전법칙에 의해 해명한 것으로, 유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세계사적 발전 법칙에 따라 과학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는 당시 우리 나라의 역사를 특수한 사관으로 이해하려는 식민주의 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을 동시에 비판했다. 한국사가 ‘세계사적 일원론의 역사법칙’에 따라 다른 민족들과 같은 발전 과정을 걸어왔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이 한국사를 타율성과 정체성으로 특수사관화했음을 폭로, 비판했다.
한편, 당시 민족주의 사학 역시 초월적·절대적인 ‘정신’을 내세우며 관념론적으로 특수화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이렇게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곧 ‘무의식적 노예화의 길’이라고 비난했다.
1930년대부터 활동한 유물사관론자들은 백남운에 이어 이청원(李淸源)·김광진(金洸鎭)·이북만(李北滿)·박극채(朴克采)·박문규(朴文圭)·김태준(金台俊) 등이 있었다.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는 김석형(金錫亨)·박시형(朴時亨)·전석담(全錫淡)·김사억(金思億)·임건상(林建相)·김일출(金一出)·이진영(李辰永)·김한주(金漢周)와 고고학자인 도유호(都宥浩)·한흥수(韓興洙) 등이 가세했다.
이들은 사적 유물론에 의해 한국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편적·과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했으며, 그러한 역사인식을 통해 현실 변혁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들의 연구는,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후쿠다 이후 일제의 정체성론자들이 주장해온 한국의 봉건제결여론(封建制缺如論)을 극복하는 한편, 이식자본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폭로해 현실 변혁을 위한 실천적 역사의식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유물사관론자들 또한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교조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사의 발전 단계를 서양사 중심 5단계 발전론의 틀에 대입함으로써 한국사의 바른 인식을 흐리게 하였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라는 일종의 특수 이론에 입각해 한국사를 해명하려고 오히려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런 연구 자세가 바로 그 한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해명하려 한 이들의 노력은 이렇게 방법론상으로 한계가 지적되고 있으나, 한국사 연구의 전통에서 볼 때 그 동안 방치되어온 사회경제사분야의 연구를 개척했다는 점에서도 한국사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광복 후 연구의 장을 달리해 북한의 역사학을 주도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이 남겼던 한국사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비판, 극복하는 한편,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 성립의 당위성을 역사발전 단계론의 입장에서 규명하는 데도 앞장서게 되었다.
후기 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발전하던 1930년대에는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학풍이 떨치게 되었다.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Ranke,L.)의 역사학을 기초로 개별적인 역사 사실에 대한 문헌 고증을 주된 학문적 방법으로 채용했는데, 당시 일본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조류를 이루고 있었다.
민족주의 사학이나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다분히 주관적이고 교설적인 성격이 강함에 비해, 이들은 랑케의 “주관적인 판단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사 연구에 임했다.
이 학풍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들로서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이상백(李相佰)·이선근(李瑄根)·이홍직(李弘稙)·신석호(申奭鎬)·유홍렬(柳洪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본의 와세다대학이나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및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사학과 등 일제의 고등교육 기관에서 근대 사학을 수련받았던 사학도들이었다.
이들은 대학 교육에서 이미 일본인 조선학 연구가들을 스승으로 했기 때문에, 스승들이 표방했던 가치 중립적인 문헌고증 사학의 방법론을 수용했다.
‘가치중립적’이라는 명분 하에 진행된 역사학 연구는 결과적으로 식민지적 상황을 의식해야 하는 역사학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민족 문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헌고증 중심의 실증주의 사학은 “사료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배격한다는 명분 아래 역사 연구에 있어서 사관과 이론을 배제하고 합리적인 사료 비판과 해석만을 강조하는”, 말하자면 ‘민족문제 인식부재의 역사학’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인식의 대상이어야 할 민족 문제를 일정하게 배제하고 있던 실증주의 사학은 개별적인 사실이나 역사지리의 문헌 고증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이 정치적인 요구와 학문적 호기심으로 한국의 고대사와 만선지리(滿鮮地理)에 집중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일제의 탄압 밑에 민족의 역사가 짓밟혀가는 수난 속에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밝혀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또 특히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우리의 주체성을 찾으려고”, “필시 고대사 연구에는 역사·지리의 연구가 기초적이고 선결적인 것을 느끼고 종래 학자들 사이에 취송(聚訟)이 분분한 삼한사군(三韓四郡)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지리의 고증을 중심으로 한 고대사 연구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대결 의식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임나일본부연구」 등 이홍직의 한국고대사 연구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1934년 당시 한국학 전반에 종사하는 한국인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국어·국문학자들과 민속·인류학자들도 참여했고, 역사학자들로서는 문일평같은 민족주의 사학자와 박문규(朴文圭)같은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도 참가했다.
진단학회는 표면상으로 ‘조선 및 인근 문화의 연구를 목적’으로 했으나, 내심으로는 ‘일인에 대한 학술적 또는 민족적 항쟁’을 위해 조직되었고, 따라서 『진단학보』의 간행도 연 4회로 하여 일본인들의 『청구학총 靑丘學叢』을 앞지르고 있었다.
실증주의 사학은 이렇게 연구자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학문의 객관성을 제고하는 등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역사학을 추구했기 때문에 역사학의 방법론인 문헌 고증을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러한 방법론에 입각해 일제 어용학자들과 대결할 수 있는 학자를 식민지하에서 배출했다는 점에서 사학사상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이 점은 국사 연구를 독립 운동의 방편으로 하였던 민족주의 사학이나 역사 연구를 이데올로기 혹은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연관시켰던 마르크스주의 사학과도 구별된다.
그러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학문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명분으로 일제의 식민지 체제를 묵시적으로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기구에 종사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 구축에 협력하게 되었다.
이같은 평가는, 그들이 일제 강점하에서 한국인으로서 한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민족적 자부심과 일제에의 저항 의식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동정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식민주의사학자들과 “똑같은 역사관·연구 방법·한국사 인식 체계를 가지고 연구를 하는 한” 그와 같은 학문적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형식 논리에서 연역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학자들에 의해 실증주의 사학이 “본질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기구 내 철저히 체제화 된 채 반식민주의 역사학과는 거리가 먼 식민주의 역사학의 아류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지적은 다소 성급한 결론인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세대의 비판적인 시각을 예고하고 있어서 앞으로 그에 대한 냉엄한 사학사적 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광복 후의 역사학
앞에서 말한 한국 역사학의 큰 흐름은 1940년대에 이르면서 거의 학문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명분으로 한국에 대해 민족 말살책을 획책하며 군국주의 체제의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었다.
한국사 연구 활동은 물론 한국사 교육이 금지되었고 한국어로 된 출판·언론도 정지되었다. 그런 추세 속에서 진단학회마저도 1943년 9월 강제 해산당하고 『진단학보』 또한 제14호로 중단당했다.
일제가 전시 체제를 강화하던 1930-40년대, 한민족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 및 민족 문화의 정수(精粹)인 국사마저 완전히 잃어버릴 뻔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역사학은 오직 식민주의 사학을 통해 일제 강점이 정당하다는 것과 한민족은 자주 독립할 수 없다는 것만 강조했다.
1945년 광복은 노예 상태에 빠졌던 한민족에게는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과 민족 문화를 회복·재생해야 한다는 사명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광복 직후 역사학 연구를 위한 학술 단체가 재건, 설립되었다. 광복 이튿날 조선학술원과 진단학회가 각각 출현했는데, 백남운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선학술원은 1946년 8월에 회지 『학술』을 간행한 바 있고, 진단학회는 47년과 49년에 『진단학보』를 간행했다.
1945년 10월에 탄생한 조선과학자동맹은 『과학전선』과 『주보 민주주의』를 간행했으며, 이 해 12월에 설립된 조선사연구회는 『사해 史海』(1948.12)를 간행했고, 역시 1945년 12월에 설립된 역사학회는 학술발표회를 개최하면서 『역사학연구』(1949.5)를 간행했다.
역사학회는 그 뒤 1952년에 재창건되어 『역사학보』를 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에는 경성대학의 이인영 교수를 중심으로 조선사연구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조선사개설』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밖에 신석호가 중심이 되어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를 수습해 1946년 3월에 국사관(國史館)을 설립하였는데, 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광복 조국의 재건은 무엇보다 각 분야에 침투해 민족 정기를 흐리게 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자주적 통일 국가의 수립과 반봉건적 민주 개혁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러한 민족적·민주적 사명은 역사학에도 부과되었다. 그것은 곧 일제의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을 철저히 청산하고 식민주의 사학과 깊이 유착되어 있는 사대주의적·봉건적인 역사의식을 타파해 자주적·민중적 역사학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의 역사학계는, 정국의 분열이나 사회의 분열에 영향을 받은 듯, 광복 정국의 시대적 사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제하 역사학계의 조류를 답습하면서 분열 상태를 지속했다.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한 신민족주의 사학과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 사학 및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그것이다.
광복 직후 한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한 것은 민족주의사학이었다. 그것은 일제 잔재의 청산과 새 조국의 건설을 위해서 민족 의식이 강렬하게 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가 ‘민족’의 이름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다소 소박한 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제 강점 하에서 제대로 출간되지 못했던 민족주의 사학 계열의 역사서를 포함해 많은 국사 관계 책들이 간행되었다.
이 때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48)를 비롯해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정인보의 『조선사연구』(1947),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1948), 권덕규의 『조선사』(1945), 장도빈의 『국사강의』(1946), 그 밖에도 황의돈의 『조선역사』, 최남선의 『조선역사』, 고권삼(高權三)의 『조선정치사』, 이선근의 『조선최근세사』, 최익한의 『조선사회정책사』, 홍이섭의 『조선과학사』 등이 간행되었다.
한편, 민족주의 사학은 이념적 측면이 신민족주의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신민족주의 사학은 안재홍·손진태(孫晉泰)·이인영 등이 일제 말엽부터 구상해온 것이다.
손진태에 의하면 “내가 신민족주의 조선사의 저술을 기도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때부터였다. 동학(同學) 수우(數友)와 더불어 때때로 밀회해 이에 대한 이론을 토의하고 체계를 구상하였다.”는 것이다.
신민족주의 사학은 대내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해 민족 구성원인 사회 여러 계층의 대립을 해소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간의 자주와 평등을 유지한다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이념에 기초해 발전시킨 것이다.
손진태는 광복 정국에서 노출되고 있는 민족간의 갈등과 계급간의 투쟁을 지양하고 민족 균등과 계급 균등을 이룩하기 위해 그의 신민족주의사학을 출발시켰다.
신민족주의 사학을 구상한 손진태는 광복 직후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朝鮮民族文化의 硏究』(1948)와 『조선민족사개론』(1948) 등을 저술해 국사학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으나, 6·25 때 그들 대부분이 납북됨으로써 민족주의사학의 학맥(學脈)은 잠시 끊어지게 되었다.
실증주의 사학은 광복 후 새로 설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실증주의 사학자 대부분이 일제 하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데다가 학문의 가치 중립성을 내세우며 학문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광복 후 일제의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혼란기에 쉽게 대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때 이병도·김상기·이상백·유홍렬 등이 서울대학교로, 신석호가 고려대학교로 진출해 근대적 학문 방법을 내세워 후진 양성에 노력했다.
남북의 분단과 갈등으로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이 연구의 장을 달리하게 되고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거의 납북되자 문헌 고증에 충실했던 실증주의 사학은 한때 남한의 국사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개별적 사실과 역사 지리의 고증에 치중했던 이들의 역사인식에는 인간과 사회의 삶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었고, 광복 정국이 요구하는 민족적·민중적 문제에 부응하려는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
따라서, 문헌 고증학이 풍미하던 1950년대의 한국사학계는 통일 지향의 민족적이고 사회 개혁을 위한 민주적인 고민과 실천을 갖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 의식은 터부시되었고 극단적인 냉전 구조 속에서 ‘민족없는 역사학’만이 한동안 존재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분단사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광복 후 한 때는 민족주의 사학·실증주의 사학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광복 직후 남북, 좌우의 분열·대립이 날카롭게 시작되고 있던 시기에 역사학 분야의 학문 활동은 그들의 이념적 입지를 선점(先占)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광복 직후 백남운은 조선학술원과 민족문화연구소 등을 창립하는 한편 박극채(朴克采)는 조선과학자동맹을 결성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제반 학문 활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거점을 마련했고, 다수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이 여기에 참가했다.
그들은 새사회 건설에 필요한 실천적 변혁 이론을 창출하기 위해 사회 구조의 물적 토대의 역사를 다루는 사회경제사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선시대와 일제하의 사회 구조를 해명하는 저서들을 출간했다.
전석담(全錫淡)의 『조선사교정 朝鮮史敎程』『朝鮮經濟史』, 이능식(李能植)의 『근대사관연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광복 직후 남쪽에서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은 냉전 체제가 강화되고 6.25 등으로 남북 분단이 현실화됨에 따라 대부분 월북해 연구의 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한편 광복 당시에 북한에 있었던 사학자는 1939년 보성전문학교를 사임한 뒤 평양에 왔던 김광진(金洸鎭) 뿐이었고, 역사 저술로는 1946년에 함흥에서 간행된 문석준(文錫俊)의 『조선역사』(함흥인민출판사)·『조선사연구』(함흥인민위원회) 정도였다.
소련 군정 하에서 각급 학교의 교재가 당장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1947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이청원(李淸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력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유물사관에 입각한 역사 연구를 서둘렀다. 그 때 나온 것이 『조선력사연구론문집』이었다.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로 굳어지면서 학문도 철저히 당과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관학 체제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내각 결정으로 조선력사편찬위원회(위원장 白南雲)를 설치하고 『력사제문제』를 기관지로 간행했다. 소련의 것을 본받아 간행된 북한의 『력사제문제』에 실린 초기의 논문은 초보적인 유물 변증법 수준을 넘지 못했다.
또 북한은 무엇보다 그들의 정권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기 위해 이 무렵 『조선민족해방투쟁사』를 서둘러 간행했다. 최창익·이청원이 편집을 주도했던 이 책은 김일성(金日成)투쟁사 뿐만아니라 연안의 독립동맹(위원장 金枓奉)과 조선의용군(사령관 金武亭)의 활약도 서술되어 있어서 북한 정권의 초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민족주의사학의 재인식과 민중사학의 모색
동서 냉전 체제하에서 일어난 6·25 동족상잔은 조국의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켰을 뿐 아니라 광복 후 한 때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던 한국사 연구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대학교 등에서 한국사를 연구, 저술하던 사학자들이 자의적으로 연구의 장을 달리하거나, 아니면 납북되어 학문 풍토에 큰 혼란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종래 마르크스주의 사학에 종사하던 이들은 6.25를 전후하여 북한으로 옮겨 그 후 북한의 한국사 연구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납북되어간 학인들은 그 뒤 거의 소식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학문 활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납북된 인사들에는 민족주의 사학의 정인보·안재홍을 비롯해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새로운 학맥을 형성하면서 서울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손진태·이인영도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흑백 논리의 강력한 재단성(裁斷性)으로 1950년대의 역사학은 전반적으로 ‘민족’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아직도 민족 문제를 역사학에 반영하지 못한 채 경색된 분위기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학계는 6·25 전 신민족주의 사학의 손진태·이인영의 지도를 받은 바 있는 신진학자들을 중심으로 1952년 기존 학계를 비판하면서 진단학회와는 별도로 역사학회(歷史學會)를 창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적인 움직임도 광복 후 당위적인 과제라 할 식민주의 사학을 청산하고 냉전 체제하의 분단 구조를 극복하는 학문적인 방향을 정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을 요했다.
반면,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학계는 그들의 문헌 고증학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완성했다. 이것이 미국의 출판비 원조로 이룩된 진단학회의 『한국사』(1959) 7권이었다.
『한국사』는 진단학회의 이병도·이상백·이선근이 중심이 되고 몇몇 소장학자들이 도와 집필된 것으로, 일제하에서 광복 후 냉전 시대에 이르는 실증주의 역사학을 총정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60년의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분야에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대내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혁명은 대외적으로 조국 분단을 실감케 하면서 민족적 과제로서의 통일을 인식하게 하였으며, 냉전 체제하에서 민족의 자주를 비로소 각성하도록 했다.
아울러 일제 강점의 결과로서 재래된 민족 분단이 지속되는 한,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여기서 비로소 일제 잔재 청산의 과제를 역사학에 적용하려는 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역사의식이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수렴하게 되었다.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사회경제사학의 학맥에서 먼저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세계사의 보편적 법칙을 근거로 한국사의 발전과 전개를 조망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체성 사관의 극복에 앞장서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과는 달리 남한에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게 되는 시도는 4.19 후 1960년대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은 일제의 어용 관변학자들이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안출한 사학으로서,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근간으로 하고 일선동조론 등이 가세하고 있었다.
식민주의사학의 극복이란 바로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타파하고 자주적인 한국사를 건설하는 데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에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하는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이다. 4.19 혁명이 일어난 후 1961년에 간행된 이기백(李基白)의 『국사신론 國史新論』이 이전부터 간간히 제기되어 왔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했다.
이기백이 『국사신론』의 서론에서 일제 식민주의사관(반도적 성격론·사대주의론·당파성의 문제·문화적 독창성의 문제·정체성의 이론)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사학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국사신론』은 식민주의 사관을 타파하는 한편, 그와 음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받고 있는 종래의 문헌고증 사학을 극복하면서 우리 나라 역사학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개안(開眼)하게 했다.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은 주로 식민주의 사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타율성이론과 정체성 이론을 근간으로 만선사관(滿鮮史觀)과 사대주의론, 당파성 등에 이르는 광범한 것이었다.
먼저 타율성 사관에 대한 비판은 이미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분단고착 후 북한에서도 주체 사상이 강조되면서 대일(對日)·대중국 관계사를 자주적인 시각에서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종래 한말 일제 하의 민족주의 사학은 주로 고대사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타율성사관을 극복하려 하였다. 북한의 사학에서도 고조선사 연구와 고대 한일관계사의 연구에서 이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북한 사학의 고대 조일(朝日)관계사 연구와 관련,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분국론」을 비롯해 『고대조일관계의 연구』등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사학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바로 일본 열도의 고대 국가 형성이 삼한 삼국 세력의 진출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려는 최초의 역작들이었다.
주목되는 점은 1960년대에 이르러, 북한 사학에서 대외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면서,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의 고대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신채호·정인보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민족주의 사학을 비과학적 특수사관이라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민족 주체성이라는 명제 하에서 북한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민족주의 사학에 접근해갔던 것이다.
4·19 이후 고양된 민족주의 사상은 사학계에 식민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을 가열시키는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일제 하의 민족주의 사학을 재인식하도록 분위기를 몰아갔다. 한말 일제 하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와 박은식 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이러한 추세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의 유고(遺稿)들이 전집 형태로 정리, 출간되었고 이들에 대한 사학사적 검토가 이루어졌다. 신채호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결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문헌고증의 방법론을 중시해 한국고대사 인식에서 특출한 연구 성과를 드러냈다.
그의 역사학 이론이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고대사 인식은 그 뒤 한국사의 주체적이고 강건한 역사상을 심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 고대사의 주체적인 인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1960년대부터 남북한에서 발굴되기 시작한 고고학적 성과와 고대사 인식의 인류학적 접근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이로써 한국사는 구석기시대를 영역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민족주의 사학 계열인 박은식의 『통사 痛史』와 『혈사 血史』도 근현대사에 접근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업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북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북한 사학의 주류인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우선 사회경제사 연구에 주력하면서 한국 사회경제의 발전 단계를 세계의 보편적인 역사 발전의 틀에 따라 규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북한 사학의 연구의 성과는 ‘시대구분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역사 발전의 단계를 ‘시대구분론’에 의해 설정하고 그 틀에 맞춰 사회 발전의 제 단계를 설명해 왔다.
그들이 설정해 놓은 시대구분론은 경제와 사회의 발전 단계를 종합한 것으로, 세계사가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근대 자본주의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론에 따르면, 20세기 초의 한국사의 발전 단계는 아직 중세 봉건제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정체성론에 의하면 한국사는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은 정체성론을 그냥 두고서는 논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 역사학은 정체성론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사회주의 정권 출현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 사학이 정체성론 극복에 매달리게 된 것은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성격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주의 정권 출현의 역사적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사학의 시대구분론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한편, 분단시대의 남한 사학계에서도 사회경제사학을 발전시켜 최근 민중사학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일제 때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던 마르크스주의사학자들이 6·25를 전후해 연구의 장을 달리한 뒤 남한에서는 한동안 문헌 고증학의 독무대가 되어 사회경제사 연구가 부진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 전국역사학대회 등을 통해 실학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조선 후기 봉건체제 해체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이 함께 논의되었다.
이 때 논의된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는, 농업 분야에서는 농업 기술의 변화로 대농경영과 상업적 농업이 가능해졌으며, 상업 분야에서는 화폐의 전국적인 유통과 조세의 금납화, 장시(場市)의 발전과 지역 상권(商圈)의 형성, 도고(都庫)상인의 발달과 거대한 상업 자본이 형성되었다.
수공업 분야에서는 장인들이 국가적 지배에서 벗어나고 매뉴팩쳐 단계의 산업화가 이루어졌으며, 광업에서는 자본과 기술이 분리되고 19세기초에는 수천 명을 고용하는 광산이 생기게 되었다.
신분 제도와 관련해서는 납속책(納粟策) 등으로 교지(敎旨)가 남발되고 호적과 족보를 통해 양인(良人)화 현상이 빈발하면서 신분제의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같이 사회경제사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이를 종합하는 의도에서 1967년 한국경제사학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의 심포지엄을 가졌고, 뒤이어 그것을 정리해 『한국사시대구분론』(1970)이라는 책자를 간행했다.
이 책자에는 사회경제 사학자들의 견해만 수용된 것이 아니고 다른 각도에서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고민하는 분들의 견해도 반영되어 있어서 시대구분을 보는 다양한 기준들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면 사회 발전단계·민족의 성장 과정·지배 세력의 변화 등에 의한 한국사의 시대구분들이 제시되어 있어서, 북한처럼 토론을 통해 하나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다양한 견해들이 최초로 토론의 장을 마련하게 된 것은 그 뒤 이 방면의 연구를 위해서 퍽 유익했고 이러한 연구 과정을 통해 정체성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 갔다.
- 분단사학과 통일지향사학의 모색 -
앞에서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 과정에서 민족주의사학이 재발견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거니와, 식민주의사학의 극복되는 분위기에서 한국사의 자주적·발전적 인식이 점증되어 간 것은 자연스러웠다.
우선 1962∼63년부터 남북한에서 활발하게 고고학적 발굴 사업이 진전되어 우리 역사의 상한선을 상향 조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가장 괄목할 것은 남북한에서 구석기시대 문화가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웅기 굴포리유적과 공주 석장리 유적이 60년대 중반 거의 같은 시기에 발굴되어 한반도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후반 동관진(潼關津) 유적에서 일부 유물이 구석시대의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흐지부지된 이후 한국 고고학이 세운 쾌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뒤 이어서 상원 검은모루 유적, 제천 점말동굴 유적, 제주 빌레못동굴 유적, 전곡리 유적 등이 확인되면서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이 많이 발굴되었고 상한선도 60만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은, 종래 청동기시대의 독자적 존재 가능성을 부정해 온 학문적인 풍토를 변화시켜, 금석병용기 대신 독자적인 청동기시대를 설정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석기·청동기와 동시에 출토되는 토기를 통해 문화적 성격을 규명하고 시대구분과 민족 구성 문제를 규명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성격을 천착하게 되었다.
분단시대 남북한에서 거둔 성과는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삼국시대 이전의 사회발전론(예를 들면, 부족 국가론과 성읍 국가론 혹은 군장 사회론 등)과 지명 이동설에 근거한 삼한(三韓)의 이해, 중세의 토지제도사 연구와 나말 여초의 사회 변동, 고려시대의 사회성격 문제와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의 등장, 실학 연구와 그와 함께 제기된 조선 후기 봉건제 해체론과 자본주의 맹아론, 근대의 기점(起點) 문제와 그와 관련된 한국사 시대구분론 등의 연구 업적들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사 연구의 독자적 업적들이 가시화되면서 이를 더욱 전문적 영역과 방법론으로 발전시키고자 1967년에 한국사 연구자들에 의한 ‘한국사연구회’가 조직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역사학계가 실천적 과제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분단 사학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산업화의 단계를 들어서는 한편 유신 체제를 맞게 되었다.
유신 체제와 제4공화국의 ‘민족적 민족주의’하에서 제국주의 역사인식으로 비판받는 문화주의 역사관과 근대주의 역사관이 이식되었다.
전자가 남한의 문화사적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면, 후자는 조국 근대화를 앞세운 제4공화국의 경제개발정책을 합리화하는 데에 관련되었다고 지적된다.
1970년대 이후의 독재 체제와 관련해 주목되는 점은, 국수주의에 가까운 민족 지상주의와 민족(주체)사관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기존의 사학계를 식민주의 사학으로 매도하는 일군의 재야사학(在野史學)이 등장했다.
한편, 정부에서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입시·관리임용 시험 및 대학 교양과정에서의 ‘국사’의 필수과목화 등을 정책화했다.
국사교육 강화 정책은 국사학을 체제 옹호에 이용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는 했으나,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저변을 확대시킨 일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사편찬위원회는 민족(주체)사관에 입각하여 1973년부터 몇 년에 걸쳐 『한국사』 25권을 완성했는데, 이는 진단학회 편찬의 『한국사』(7권) 이후의 학계의 연구 업적을 총정리하는 성격도 띠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남북한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룩한 것은 사회경제사학 및 그와 관련된 시대구분론이다. 북한 사학은 원래 일제 하에서 발전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계승하여 발전한 것이다.
사적유물론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사회경제사연구는 한국사의 전체적인 발전상을 체계화하는 시대구분론으로 연결되었다.
시대구분론은 역사발전 단계에서 북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학문을 정치에 예속시키고 있는 북한의 정치적 요구와도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6년 『조선통사』(상·하)를 간행하기 시작한 북한 사학계는 1962년 『조선통사』의 개정판을 내면서 시대구분론을 공식적으로 정리했다. 즉, 고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삼국에서 1866년까지를 농노제 사회로, 그 뒤 1945년까지를 자본주의 사회에 상응하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그 이후를 사회주의 사회로의 발전기로 각각 규정했다.
그 뒤 1979∼1982년에 걸쳐 ‘주체사관’에 입각, 한국사의 전체계를 정리해 33권의 『조선전사』가 간행되었다. 주목할 것은 『조선전사』에 들어서서 종래의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분기점을 변화했다는 것이다.
『조선전사』에 의하면, 원시사회는 기원전 60만년 내지 40만년 전에서 기원전 10세기까지로 보되, 기원전 5천년까지는 구석기시대, 기원전 2천년까지를 신석기시대, 기원전 1천년까지를 청동기시대로 잡았다.
고대사회는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 후 1세기까지로 잡았는데, 이 때 노예제 사회인 고대국가로서 고조선·부여·진국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중세사회는 기원 후 2세기부터 1860년대까지로 잡았는데, 이 때 중세 봉건국가로서 고구려·백제·신라가 출현하고 발해·고려·조선을 거쳐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단계가 태동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근대사회는 1860년대에서 1926년의 ‘타도제국주의동맹’에 이르기까지로 잡았는데, 이 때는 반침략·반봉건의 부르조아 민족운동기로서 개화·갑신정변·갑오개혁·애국문화운동·3.1운동으로 진전되며, 민중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이 있었다고 한다.
현대사회는 1926년부터 현재까지로 잡고, 그 기간을 김일성 중심의 무장항일 투쟁사와 사회주의 건설사로서 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광복 후 남북의 역사학은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라는 공통된 명제를 두고 그 중요한 요소라 할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타파하는 등 독립된 민족이 건설해야 할 역사학을 수립하기에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남북의 역사학은 역사학의 기본 임무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관이나 방법론, 시대구분론과 시대사 및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 등에서 시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았다.
가장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독립운동사를 비롯한 민족운동사 부분이었다. 남북한의 근·현대사는 그야말로 현격한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분단이 분단사학을 재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제5공화국에 이르자, 한국사 연구는 자주·민주·통일의 민족적 과제와 연결, 학문적·실천적 움직임을 다양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사 연구는 사회 변화의 역동성에 힘입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별·분야별 연구 활동을 위한 학회의 결성이 활발했다. 한국고대사연구회·한국근현대사연구회·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한국사상사학회·한국역사연구회·한국교회사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 등이 1980년대에 창립되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연구기관들이 학문의 분야와 학문 활동 지역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이 중 대부분은 학술지를 간행하면서 연구 발표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 연구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공동 연구는 종래의 연구 형태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둘째, 역사학의 실천성이 요구되면서, 군부독재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과 자주 통일 지향의 민족 운동이 그 운동적 기반인 민중을 발견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서술하는 민중사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민중에 대한 역사적·사회과학적 인식으로서는 『한국민중론』(1984)에 이어 『한국민중사』(Ⅰ·Ⅱ, 1986)가 간행되어 한때 민중사학이 본격화되는 듯했다.
셋째, 종래 터부시되던 연구 영역으로서 일제시대사와 광복전후사 및 최근의 역사가 이제 ‘거리낌없이’ 역사연구의 객관적 대상으로서 도마 위에 올려지게 되었다.
광복 후 지금까지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던 분위기가 일제시대사는 물론, 그 후의 시대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 체제와 제5공화국의 독재 체제와 싸운 세대들이 그 힘을 축적해 종래 터부시하던 연구 영역을 타파하게 되었다. 이 또한 실천적 운동력이 연구 세력화했기 때문이다.
넷째, 남북한의 역사학이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측에서 보면 북한 사학의 성과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아직은 활발하게 수용되지는 않지만, 1988년 7·7선언으로 분야에 따라서는 상당한 수준까지 논의, 수용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남한 학계의 연구 업적이 북한 학계에 어느 정도까지 수용되느냐의 문제는 미지수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문민정권'과 '국민의 정부'가 집권해 학문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신장되었고 따라서 국사학도 자료 발굴과 연구의 활성화로 새로운 도약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것이다.
각종 국역 자료들과 독립운동 자료들, 문집류의 간행 등이 국사학을 포함한 국학의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으며, 연구의 다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90년대에도 여러 연구회 학회 및 연구소가 설립, 연구 발표와 학술지 간행을 통해 학술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들 기관(연구회·학회·연구소)들 중에는 90년대의 추세에 맞춰 그 명칭을 ‘연구회’에서 ‘학회’로 변경하기도 했다.
학문의 분야도 정치사를 비롯해 경제사회사·문화예술사·종교사상사·지방사·대외관계사·군사(軍史)·민속사·사학사(史學史)·인물사 등 여러 분야에서 깊이 있는 연구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남한 학계가 이 같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 학계는 70년대 유일 체계가 수립된 이래 북한 체제에 부응하는 몇몇 특수한 분야(예를 들면 단군 등)를 제외하고는 침체 상태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 사학은 그 동안 남북의 분단이 가장 심하게 노출되었던 분야로서 앞으로 민족 사의 정립을 위해 분단 상황에서 연구된 내용을 서로 수렴해 통일시대의 국사학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남한이 민족주의 사학과 실증주의 사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데 비해 북한이 마르크스주의 사학을 수용했기 때문에, 아직은 연구의 시각에 큰 편차를 보였을 뿐 아니라 중점 연구의 대상과 해석에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통일시대의 한국 사학은 통일된 하나의 견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통일시대의 사학을 지향하기 위해 남북한 사학은 그 동안 편차를 보이고 있는 부분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역사 연구의 골간인 시대구분에서 남한 학계는 북한 학계의 토론을 거친 통일된 시대구분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구석기시대의 상한선을 40만년 내지 60만년으로 잡은 것은 남한의 제천 점말동굴의 것과 비슷하지만, 평양의 ‘만달사람’이나 평남 덕천의 ‘승리산 사람’을 민족의 선인으로 보고 민족의 본토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남한 학계가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의 단군유골 발굴도 남한 학계에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청동기시대의 상한선을 기원전 2,000년대를 넘기는 것도 남한 한계와 차이가 있다. 또 고대국가로서 고조선이 과연 노예제 국가인가 하는 문제와 고대의 하한선을 고조선 말기로 보는 문제, 이어서 삼국시대의 출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문제들이 남한 학계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중세의 설정과 관련, 그 중간의 시대구분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중세를 기원 1, 2세기에서 1860년대까지로 보는 것은 한 시대가 너무 길어 한국 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담을 수 있을지도 우려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가 태동했다는 주장은 남한 학계의 1960∼70년대의 연구 성과와 비슷하지만, 근대의 출발을 1860년대로 보고 한국 사회의 내재적 발전보다는 반침략을 강조하는 북한 학계의 인식은 남한 학계에서 조선 후기에서 1890년대설 등 다양하게 주장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대를 광복 후로 보았으나, 유일주체 사상이 확립되면서 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 년도로 바꾼 것은 정치력이 역사학까지도 지배하는 단적인 예로 간주된다.
남북 사학연구에서 가장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독립운동사 혹은 민족운동사 부분으로서, 남한 사학계가 중국 관내와 동북삼성의 독립 운동은 물론 러시아와 미주의 것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북한은 북만주 지역의 무장 항일운동 외에는 수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시대의 한국사 인식을 위해서는 남북한이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한 방법론과 사관을 통해 연구의 활성화를 기해야 할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발굴 보고와 문헌 자료의 교환, 연구 성과물의 교환·공유 및 토론 등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남북한 양측은 역사의 이념과 연구 방법 및 연구 대상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서로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한계가 주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민족통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민족사 연구를 위한 자료와 연구 업적을 수용하고 공유하는 노력은 끈기 있게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광복 30년(光復 30年) 국사학(國史學)의 반성(反省)과 방향(方向)-민족사학론(民族史學論)을 중심(中心)으로-」(강만길,『역사학보』68,1975)

  • 민족과 역사  (이기백, 일조각, 1976)

  • 「민족사학의 성장방향」(김철준,『한국문화전통론』,세종대왕기념사업회,1983)

  • 단재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이만렬, 문학과지성사, 1990)

  • 북한의 한국사인식(한길사,1990)

  • 『분단시대(分斷時代)의 역사인식(歷史認識)』(강만길,창작과비평사,1978)

  • 「우리나라 근대역사(近代歷史)의 발달(發達)-1930·40년대의 민족사학(民族史學)-」(김용섭,문학과 지성 6,1971)

  • 「일제관학자(日帝官學者)들의 한국사관(韓國史觀)」(김용섭,『사상계』,1963.2.)

  • 『조선전기사학사연구(朝鮮前期史學史硏究)』(한영우,서울대학교출판부,1981)

  • 『조선후기사학사연구(朝鮮後期史學史硏究)』(한영우,일지사,1989)

  • 『한국근대역사학(韓國近代歷史學)의 이해(理解)』(이만렬,문학과 지성,1981)

  • 『한국민족주의역사학(韓國民族主義歷史學)』(한영우,일조각,1994)

  • 『한국민중사(韓國民衆史)』Ⅰ·Ⅱ(한국민중사연구회,풀빛,1986)

  • 『한국사강의(韓國史講義)』(한국역사연구회,한울,1989)

  • 한국사론  (韓國史)

  • 『한국사학사(韓國史學史)의 연구(硏究)』(한국사연구회,을유문화사,1985)

  • 『한국사학(韓國史學)의 방향(方向)』(이기백,일조각,1978)

  • 『한국의 역사인식(歷史認識)』상·하(창작과 비평사,1976)

  •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조동걸·한영우·박찬승, 창작과비평사, 1994)

  • 『현대한국사학사(現代韓國史學史)』(조동걸,나남출판,1998)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황원구|이만열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