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서울 단성사 정측면
서울 단성사 정측면
영화
개념
촬영으로 필름에 기록한 화상을 스크린에 투영, 영상과 음향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영화는 촬영으로 필름에 기록한 화상을 스크린에 투영, 영상과 음향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물이다.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 기계·기술적 요소,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야 하는 예술의 한 갈래이다. 처음에는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으나 오늘날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1895년 인류에게 첫선을 보인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1903년에 첫 상영이 이루어질 정도로 도입이 빨랐다. 일제강점기에 연쇄극(1919), 무성영화(1923), 발성영화(1935)가 차례로 제작되었고 좌절과 수난의 시기를 거치기도 했지만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의
촬영으로 필름에 기록한 화상을 스크린에 투영, 영상과 음향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물.
개설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와 기계기술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는 재정을 책임지는 제작자와 스튜디오 · 카메라 · 녹음 · 현상 등의 시설이 있어야 하며, 작품을 감독하며 시나리오작가 · 배우 · 촬영기사 · 미술가 · 음악가 · 편집자가 공동으로 작업해서 이루어낸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관객이 볼 수 있게 되려면 배급업자 또는 흥행업자와 영화관이 있어야 하며, 광고가 따라야 하고 영화평론가들의 평가도 있어야 한다. 영화는 결국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나게 됨으로써 대중전달의 기능을 발휘하고 거기에서 상품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되며, 관객에게 심리적 영향을 줌으로써 예술적 또는 오락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영화는 오늘날 예술의 한 갈래이면서, 단순한 예술의 영역을 넘어선 넓은 사회 문화적인 복잡한 현상이다. 영화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카메라 · 필름 · 영사기이다. 이것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과학과 공업이 만들어낸 성과이며,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발명으로 취급되고 하나의 테크놀로지(技術系)로 논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새로운 사회적 언어로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영화는 오락으로서, 그리고 흥행으로서 그 양상은 대중을 상대로 한 매스미디어가 되었으며, 텔레비전 등장과 더불어 시각정보(視覺情報)의 전달 매체,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수단, 새로운 기호체계로서 연구, 인식되어가고 있다.

역사

기원

3만년 전에서 4만년 전의 인간들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명한 유적인 남프랑스의 라스코(Lascaux)동굴의 동물벽화는 인류가 이미 언어 이전에 영상을 발견하였고 이 영상을 통하여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그 벽화들은 비록 정적으로 그려져 있으나 거기에는 동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강렬한 의지가 깃들여 있다. 곧 거기에서 인류의 영화적 표현을 향한 꿈과 그 시발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화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뒤 환등이라든지 그림자극, 잔상(殘像) 현상을 이용한 장난감이나 움직이는 그림, 사진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19세기 말에 결합되고 종합됨으로써 오늘의 영화와 비슷한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19세기말 미국 · 영국 · 프랑스 등지에서 에디슨(Edison,T.) · 폴(Paul, W.) · 뤼미에르(Lumie`re, L.) 등에 의하여 거의 동시에 비슷한 형태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 중 오늘의 영화와 형식이나 형태가 가장 가까운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영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뤼미에르는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하여 1895년 2월 10일 특허권을 얻었으며, 3월 22일 프랑스의 리용 상공장려관에서 최초의 작품 「뤼미에르공장 공원(工員)의 운동」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잔상현상에 착안한 움직임의 분해와 사진기의 발명이 결합되어 카메라가 생겨나고, 환등기가 발전하여 전기의 발명과 결합됨으로써 영사기가 되고, 셀룰로이드의 필름이 발명됨으로써 오늘의 영화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한 기술적 발명이 아닌 현대사회의 자본을 배경으로 한 투자와 흥행, 그리고 현대사회의 욕구가 결집되면서 출현하였다.

한국영화전사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서구문명이 스며 들기 시작하면서 영화 역시 신기한 서구문명의 산물로서 건너왔다. 고구려나 신라의 벽화, 그리고 조선의 회화 속에서도 영상의 동적인 표현의 강렬한 욕구를 엿볼 수 있다. 또 홍석모(洪錫謨)『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4월 8일조를 보면 연등놀이를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영화의 선사적 의미인 하나의 패턴을 찾아볼 수가 있다. 우리의 전통적 연예 또는 놀이 속에 영화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많은 요소가 있었음을 『동국세시기』는 증언해 주고 있다. 라스코 벽화와 같은 인간의 이미지 활동과 표현을 영화의 씨앗으로 본다면, 우리의 문화 속에도 그 밖에 밝혀지지 않은 많은 예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러한 씨앗이 우리의 봉건적 사회풍토 속에서 싹트지 못하고 그냥 묻혀버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완전히 새롭고 신기한 서양문물의 하나로서 우리 나라에 건너온 것이다.

최초의 영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상영된 영화는 외국에서 건너온, 말하자면 수입 영화이다. 영화가 우리 나라에 건너와서 최초로 상영된 정확한 시기에 대하여는 몇 가지의 이론(異論)이 있다. 안종화(安鍾和)는 『한국영화측면비사(韓國映畫側面祕史)』(춘추각(春秋閣) 간행)에서 “우리 나라에 영화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도 전인 1905년이었다.”라고 말하고, 활동사진이라고 불린 이 문명의 괴물이 영미연초회사(英美煙草會社)의 창고에서 연초의 판매 선전을 위하여 처음으로 상영된 경위와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1943년 7월 조선영화문화연구소(朝鮮映畫文化硏究所, 소장 李創用)에서 발간한 『조선영화 30년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것은 1903년으로 되어 있다.

한편 1903년 6월 23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동대문 내 전기회사가 기계창(器械廠)에서 시술(施術)하는 활동사진은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설행(設行)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도시, 각종 극장의 절승(絶勝)한 광경이 구비하외다. 허입료금(許入料金:입장요금) 동화 10전(銅貨十錢)”이라는 광고가 실려 있다. 이로 보아 1905년이라는 안종화의 단정은 잘못된 기억으로 보인다. 또한 광고내용으로 보아 외국에서만이 아니라 국내에서 촬영된 영화도 상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국 최초의 영화 상영 시기도 1903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안종화도 『한국영화측면비사』에서 “영미연초회사에서 공개되기 전에는 서울 정동에 있는 독일 여성이 경영하는 손탁호텔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고 하거니와…….”라고 말함으로써 영화가 일반에게 공개되기 훨씬 이전에 왕실이나 외교관들의 모임에서 상영되었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조광(朝光)』 1938년 4월호에 실린 활동사진 변사 좌담회의 대담에서 “처음 들어온 것은 한 3십 7, 8년 될걸요.”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상영은 『황성신문』에 영화상영의 광고가 난 1903년 6월보다도 약간 앞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관의 등장

우리 나라에 건너온 영화는 움직이는 사진으로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나 아직 흥행으로서 정착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1906년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가 동대문 안에 활동사진관람소를 만들고 전차 승객을 늘리기 위하여 해설까지 곁들여서 초기의 미국영화를 많이 상영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영화관의 시작이다. 이어서 광무대(光武臺) · 장안사(長安社) · 단성사(團成社) · 연흥사(演興社) 등이 상설 영화관으로 등장하였다.

주로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어성좌(御成座) · 경성좌(京城座) · 개성좌(開城座) · 고등연예관(高等演藝館) · 대정관(大正館) · 황금연예관(黃金演藝館) 등이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무성영화를 수입, 흥행을 하게 되자 여기에 영화의 해설자인 변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상영된 영화는 수입된 외화뿐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영화는 없었으며, 영화관도 대개가 일본인 손으로 세워졌으니, 우리 나라 영화기업은 처음부터 민족자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국자본 또는 침략자의 자본에 의지하는 취약점을 가지고 출발한 셈이다.

연쇄극과 무성영화

연쇄극

1910년경부터 싹트기 시작한 신파연극은 천편일률적인 레퍼토리로 관객을 잃어가고 있었고, 신파극단들도 도산 직전에 있었다. 그만큼 극단 상호간의 경쟁도 치열하였다. 이러한 신파극의 위기의 탈출구가 연쇄극((連鎖劇, kinodrama)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배우들을 이기세(李基世)문예단(文藝團)에 빼앗기고 의기소침해 있던 신극좌(新劇座)김도산(金陶山)이 변사 김덕경(金悳經)의 권유로 그 활로를 연쇄극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박승필(朴承弼)의 출자와 김도산의 각본 · 감독으로 촬영되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연쇄극이란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과 연극 사이, 무대 위의 스크린에 삽입함으로써 영화와 연극이 연쇄되어 줄거리를 이어가는 형식으로 영화라기보다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의리적 구투」에 삽입된 약 1,000피트의 필름은 우리 나라 배우들이 출연한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의리적 구투」에 삽입된 필름은 흥행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로서,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영화라 할 수 있는 「경성시가(京城市街)의 경(景)」이 동시에 상영되었다는 점에서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 영화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비록 촬영기사는 일본인이었으나 우리 나라 사람이 출자하고 구상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 영화가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다. 「의리적 구투」의 흥행 성공에 자극받아 문예단의 「지기(知己)」, 혁신단의 「학생절의(學生節義)」 등이 연달아 나옴으로써 연쇄극 붐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기세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지기」는 처음으로 한국인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에 의하여 촬영되었다.

무성영화와 나운규

1923년에 이르러 비로소 일관된 극적 내용을 가진 영화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비록 조선총독부 체신국의 돈으로 만들어지기는 하였지만 윤백남(尹白南)「월하의 맹서」는 극영화로서 한국 영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으며 무성영화시대의 막을 열었다. 같은 해에 일본인 하야가와(早川松次郎)에 의하여 만들어진 「춘향전」은 비록 제작 · 각본 · 연출 등 중요한 부분을 일본인이 맡아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졌고 한국배우가 출연하였으며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 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영화의 출발점을 마련한 셈이다.

「춘향전」의 흥행 성공은 박승필이 경영하는 단성사에 촬영부를 만들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 첫 작품으로 박정현(朴晶鉉)감독의 「장화홍련전」(1924)을 만들었다. 「장화홍련전」은 제작 · 자본 · 시나리오 · 연출 · 연기 그리고 기술면에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최초의 작품이었다. 이어서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雲英傳)」(1929), 이경무(李慶務) 감독의 「심청전」(1925) · 「개척자(開拓者)」(1925) · 「장한몽(長恨夢)」(1926), 이규설(李奎卨) 감독의 「농중조(籠中鳥)」(1926)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일본 연극이나 영화의 번안 또는 모작이거나 고전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활약한 배우로는 이월화(李月華) · 이채전(李彩田) · 김우연(金雨燕) · 복혜숙(卜惠淑) · 안종화 · 이규설 · 주삼손(朱三孫) · 김정숙(金靜淑)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나운규(羅運奎)「심청전」 · 「농중조」 등에서 연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연기자로 출발한 나운규는 1926년 「아리랑」에서 시나리오 · 감독 · 주연을 겸함으로써 강렬한 개성을 영화 속에 부각시켰다. 그때까지의 영화가 호기심의 반복과 기술적 습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면, 나운규는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예술로서 끌어올린 것이다.

나운규는 계속하여 「풍운아(風雲兒)」(1926) · 「들쥐[野鼠]」(1927) · 「금붕어」(1927) · 「잘 있거라」(1927) · 「옥녀(玉女)」(1928) · 「사랑을 찾아서」(1928) · 「사나이」(1928) · 「벙어리 삼룡」(1929) · 「아리랑 후편」(1930) · 「철인도(鐵人都)」(1930) · 「옥몽녀(玉夢女)」(1937) 등을 감독함으로써 양적 · 질적으로 이 시기의 한국 영화를 대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리랑」이 나온 1926년에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나온 1935년까지 10년 동안을 무성영화의 전성기라고 하면, 나운규의 영화가 한국 영화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그 밖에 심훈(沈薰) 감독의 「먼동이 틀 때」(1927), 김유영(金幽影) 감독의 「유랑(流浪)」(1928), 이경손(李慶孫) 감독의 「숙영낭자전」(1928), 안종화 감독의 「노래하는 시절」(1930), 윤봉춘(尹逢春) 감독의 「도적놈」(1930), 이구영(李龜永) 감독의 「승방비곡(僧房悲曲)」(1931), 김상진(金尙鎭) 감독의 「방아타령」(1931), 이규환(李圭煥)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 등이 이 시기의 주요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10년 동안에 무려 80여 편의 영화가 나오고 또한 40여 개의 영화사와 프로덕션이 생겨남으로써 활발하고 다양하게 발전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37년 나운규가 36세로 요절하고 일제의 검열이 까다로워지는 등 예술적 · 산업적인 개화(開花)는 기대할 수 없었다. 1922년부터 실시된 일제의 검열은 처음에는 구미의 수입 영화에 치중하여 풍기 · 폭력 등에 중점을 두었으나,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가 많아지자 1925년 「활동사진검열규칙」을 총독부령으로 공포하였으며, 1927년에는 다시 개정, 강화되었다. 1934년에는 「활동사진영화취채규칙」을 공포하여 그들의 식민지정책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작품은 상영을 금지했다.

발성영화

발성영화의 등장

1935년에 만들어진 이용우(李用雨) 감독, 이필우 촬영 · 녹음으로 된 「춘향전」은 한국 영화 최초의 발성영화이다. 즉 경성촬영소가 「춘향전」을 올 토키(talkye:영상과 동시에 음성 · 음악 등이 나오는 영화. 유성영화)로 만들어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것이다. 「춘향전」은 흥행에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러한 기술적인 혁명은 한국 영화계에는 빨리 닥쳐온 셈이다. 즉 무성영화가 예술적으로 완숙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요구하였으며 산업적으로도 발성영화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구미 영화계와는 달리, 한국 영화는 다음 단계로 옮길 채비를 미처 하지 못한 채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옮겨지게 되었다. 불과 10여 년의 무성영화기는 예술적 성숙을 위하여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산업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부족하였다. 무성영화시대에 비하여 엄청나게 뛰어오른 제작비는 영화계에 과중한 부담이어서 수지면의 균형을 취할 수 없었다.

발성영화 초창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이규환 감독의 「나그네」(1937), 안석영(安夕影) 감독의 「심청」(1937), 방한준(方漢駿) 감독의 「한강」(1938) · 「성황당(城隍堂)」(1939), 홍개명(洪開明) 감독의 「청춘부대(靑春部隊)」(1937), 윤봉춘 감독의 「도생록(圖生錄)」(1938), 김유영 감독의 「애련송(愛戀頌)」(1939),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국경(國境)」(1939) · 「수업료(授業料)」(1940) · 「집 없는 천사」(1941) 등이 있다. 이들은 한국 영화의 수준을 향상시키면서 우리들 고유의 것, 우리의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아 이른바 자연주의적 미학에 충실하려는 기미를 보인 것이다.

이 시기에 활약한 중요한 배우로는 정기탁(鄭基鐸) · 윤봉춘 · 서월영(徐月影) · 이금룡(李錦龍) · 이원용(李源鎔) · 이경선(李慶善) · 전옥(全玉) · 김소영(金素英) · 조경희(趙敬姬) · 유신방(柳新芳) · 김신재(金信哉) · 김연실(金蓮實) · 김선영(金鮮英) · 문예봉(文藝峰) 등을 들 수 있다.

좌절과 수난

한국 영화가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옮기면서 그런 대로 안정을 찾고 성장을 이룩하려는 시기에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전쟁은 경제의 악순환을 가져와 자재난(資財難)으로 영화제작은 또다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40년에는 「조선영화법」이 제정, 실시되어 영화는 일본 군국주의의 통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2년에는 기존 10개 영화사를 폐쇄하고 조선영화제작회사가 설립되어 전쟁에 협력하는 이른바 합작영화의 제작을 강요받게 되었다.

총독부는 영화제작사만이 아니라 배급사도 통폐합하여 조선영화배급사를 설립함으로써 영화의 제작과 배급을 통제, 장악하고 이른바 국책영화를 만들게 하여 영화를 정책 선전의 전용물로 삼으려 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 편수는 25편으로 그 가운데 14편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고, 나머지 11편은 이 회사가 발족하기 이전에 기존 회사들에 의하여 이미 기획되어 제작된 작품들이다.

광복과 동란, 그리고 전성기

광복영화의 시기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하자 영화인들은 다시 작품활동을 개시하였다. 1945년 9월 24일 미군정청 보도부(美軍政廳報道部)는 당시 조선영화건설본부에 뉴스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허용하였는데, 이 무렵 나온 해방뉴스가 영화활동 재개의 시발점이었다. 1946년에는 광복과 자유의 기쁨을 그대로 표현한 가작(佳作)이라 할 수 있는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가 개봉됨으로써 영화계에 청신호를 올렸다.

영화인들은 일제하에서는 만들 수 없었던 일제에 대한 민족의 저항을 소재로 한 영화를 앞다투어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구영 감독의 「안중근사기(安重根史記)」(1946), 윤봉춘 감독의 「3 · 1혁명기」(1946), 김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1947), 윤봉춘 감독의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1948) · 「유관순(柳寬順)」(1947), 김영순(金永淳) 감독의 「불멸의 역사」(1947), 이규영(李圭榮) 감독의 「민족의 절규」(1948) · 「민족의 새벽」(1948), 신경균(申敬均)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 최인규 감독의 「독립전야(獨立前夜)」(1948) 등은 모두가 이 계열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광복 영화 붐도 차차 가라앉고 1949년에는 윤용규(尹龍奎) 감독의 「마음의 고향」, 최인규 감독의 「파시(波市)」 등 주목할만한 작품이 나왔으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영화계는 다시금 수난을 겪게 되었다. 영화인들은 첫째로 촬영기재를 잃게 되었으며, 유능한 영화인들을 동란이 앗아가기도 하였다. 작품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고 겨우 기록영화와 뉴스영화의 제작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양적 팽창과 다양한 전개

1953년 7월 휴전이 이루어지고 영화에 면세조치(免稅措置)가 취하여짐으로써 영화계는 다시금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이 흥행에 크게 성공함으로써 영화제작사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이른바 ‘사극영화(史劇映畫)’ 붐을 일으켰다. 그 이듬해인 1956년에는 한형모(韓瀅模) 감독의 「자유부인(自由夫人)」이 다시 흥행기록을 세우고 멜로드라마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연간 영화 제작 편수는 1957년부터 급속히 늘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84편, 1959년에는 100편이 넘는 양적 팽창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도 한국 영화의 기업적인 성장을 수반하지는 못하였으며, 영화 제작자가 아닌 전주(錢主:밑천을 대주는 사람), 특히 지방 흥행사들의 횡포 속에서 영화예술은 흥행계의 고아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흥행성적의 뒤를 좇아 흥행에 성공한 영화와 엇비슷한 영화를 다시 만듦으로써 관객을 지겹게 하고, 그래서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향상을 수반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높았다.

1961년 5 · 16 이후 당국은 영화기업 육성책으로 「영화법」을 공포하여, 난립한 영화제작사를 정리하고 외국 영화 수입에서 오는 이윤을 한국 영화 제작에 돌리도록 하는 등의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으나 거기에는 또다른 부작용이 따르게 되었다. 제작쿼터 · 스크린쿼터 · 배급 · 흥행문제 등을 규제한 일련의 조처가, 그러한 문제들을 방치하고 자유경쟁에 맡기던 시기에 비하여 과연 한국 영화의 발전을 도왔느냐 하는 데 이견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한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한국 영화계가 보다 자유롭고 다양하게 발전했으며, 예술적 수준에도 하나의 정점을 구현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견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걸쳐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화려하게 전개되던 한국 영화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기력해지고 상대적으로 침체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텔레비전의 등장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규제를 위주로 한 「영화법」과 검열, 그리고 외화 유입과 관련된 정책의 오류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1955년에서 1965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한국 영화는 제작 편수에 비하여 문제될만한 작품이 적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으나, 결국은 예술적인 의미에서도 다른 어느 시기보다 알찬 수확을 올린 개화기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 시기에 한국 영화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예술적 ·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고 창조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강천(李康天) 감독의 「피아골」(1955), 신상옥(申相玉) 감독의 「꿈」(1955) ·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 · 「성춘향」(1961) · 「벙어리 삼룡」(1964) · 「십대의 반항」(1959) · 「하녀」(1960), 최훈(崔薰) 감독의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이성구(李星究) 감독의 「젊은 표정」, 이봉래(李奉來) 감독의 「삼등과장(三等課長)」(1961) ·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1965), 이형표(李亨杓) 감독의 「서울의 지붕밑」(1961) · 「로타리의 미소」(1965), 박상호(朴商昊) 감독의 「또순이」(1963) 등이 있다. 김수용(金洙容) 감독의 「혈맥(血脈)」(1963) ·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 「갯마을」(1965), 김기덕(金基悳) 감독의 「남과 북」(1964), 정진우(鄭鎭宇) 감독의 「밀회」(1965), 이만희(李晩熙) 감독의 「시장(市場)」(1965) · 「흑맥(黑麥)」(1965) 등도 우수작으로 꼽을 수 있다.

유신체제의 영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계는 1969년의 영화관객의 수를 정점으로 서서히 관객을 잃기 시작하면서 불경기를 맞게 되자 정부는 영화법을 개정한다. 1973년 4차 영화법에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과 이념의 구현을 위한 홍보 선전 수단을 강화하는 시책이 발표되었다. 유신정권의 시대가 시작하면서 관료주의의하의 통제를 받는다. 관료주도적인 능률주의로 변모하였다. 이런 능률주의는 국민의식의 형성을 위해 영화를 동원하였다.

유신체제의 영화정책을 가장 잘 반영한 한국영화진흥조합 선정 우수영화 및 문화공보부 선정 우수영화, 그리고 대표적인 국책영화를 가장 잘 반영한 한국영화진흥조합 선정 우수영화 및 문화공보부 선정 우수영화, 그리고 대표적인 국책영화를 중심으로 유신정권시대의 통치논리를 안보, 새마을운동, 사회계몽영화 같은 것에 담고 있다. 주동진 감독의 「의사 안중근」(1972), 곽정환 감독의 「쥐띠 부인」(1972), 신상옥 감독의 「효녀 심청」(1972), 김수용 감독의 「작은 꿈이 꽃 필 때」, 임권택 감독의 「옥례기」(1977), 「달려라 만석아」(1979), 유현목 감독의 「다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1979), 권영순감독의 「태백산맥」(1975), 김수용 감독의 「아라비아의 열풍」(1976), 여남의 감독의 「어머니」(1977) 등이 그 예이다.

제4차 영화법 개정의 시책으로 국산영화 3편에 외화 수입권 1편을 배정받게 하는 수입 쿼터제가 실시됨으로서 제작사들은 영화제작을 의무적으로 하는 풍토를 만들어 냈지만, 이것은 외국영화 수입을 위한 국산 영화의 제작 남발을 초래하게 하여 저질의 국산 영화가 양산되는 모순을 나았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정부가 영화사를 기업화하려는 의도에서 하나의 특례조치를 취한 것으로 외화 수입권을 이권화시켰다.

1970년대는 경제 계획에 의한 근대화의 정책이 추진되면서 서구적인 것에 대한 가치 평가가 높아지고, 국민의 의식은 물질적인 추구를 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적인 상향심리와 쾌락성의 지향으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영화나 폭력적인 영화들이 대중문화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 영화들을 유형별로 분류해보면 ‘상업주의적 소설영화’ · ‘호스테스 영화’ · ‘하이틴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대중소설을 각색하여 영화화 한 것들이 비교적 흥행에도 성공을 하면서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 최인호 원작, 이장호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 조선작 원작,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최인호 원작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 이런 영화들은 새롭고 신선한 감각적인 영상과 빠른 템포, 생생한 대사로 방화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였다. 이들 영화는 1970년대 여성영화가 붐을 일으켰고, 양적인 팽창을 야기 시켰다. 이 영화들은 역설적으로 밀도짙은 주제나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이 만들어 질 수 없는 상황에서 통속적인 리얼리티의 일면인 산업사회화 되어가는 사회상황을 담았다는 것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하길종 감독의 「속 별들의 고향」 · 「병태와 영자」(1979), 이경태 감독의 「도시의 사냥꾼」, 또 1970년대의 또 다른 장르인 성의 상품화를 부추긴 ‘호스테스 영화’는 김수용 감독의 「야행」(1977)의 흥행성공으로 영화붐을 이루었다. 1978년에 정소영 감독의 「내가 버린 여자」, 변장호 감독의 「O양의 아파트」, 문여송 감독의 「아스팔트 위의 여자」, 1979년에 「꽃순이를 아시나요」 · 「26 x365=0」등 많은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이런 영화들은 근원적인 당위성을 내포, 단순한 오락상품으로서 당시 쾌락지향적 소비문화의 양상으로서의 욕구불만의 분출 창구 역할을 초기에는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적인 묘사가 노골화되고 에로티시즘적인 영화로 변화하였다. 이런 영화들의 제작으로 불황이었던 영화계는 일시적인 활기를 찾게 되었다.

1970년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1976-1977년 사이에 등장한 ‘고교 영화’의 등장이다. 김응천 감독의 「여고 졸업반」으로 시작한 여고생 시리즈는 「진아의 편지」 · 「소녀의 기도」를 비롯한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미안해」 시리즈이다. 그리고 허리우드 극장을 중심으로 석래명 감독의 「고교얄개」시리즈는 극장가를 석권하는 기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이런 장르들의 영화가 등장한 것은 당국의 강력한 시나리오 사전 심의와 검열로 표현의 한계를 느낀 감독들이 자기의식을 표출 할 수 있는 영화에는 손을 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도 주목할 만한 영화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측면을 그린 김기영감독의 「화녀」(1971), 「충녀」(1972), 「파계」(1974)를 들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추구한 영화인 하길종 감독의 「수절」(1974), 「한네의 승천」,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문예영화인 정진우 감독의 「석화촌」(1972), 최하원 감독의 「무녀도」(1972) 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의 한국영화

1980년대는 영화산업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는데, 1984년-1985년의 제5-6차 영화법 개정으로 인해 20개 영화사의 과점 형태가 깨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법의개정은 한국영화에 대한 지원책 없이 제작의 자유만을 주었기 때문에 제작사와 독립 PD사의 등록은 증가하는데 반해 제작사의 의무편수가 없어지면서 제작편수가 낮아지는 현상을 보였다. 그리고 미국의 통상법 제3조를 무기로 삼은 경제적 외교적 압력에 굴복하여 제6차 개정법으로 인해 미국영화들의 직배가 시작되었다.

미국영화사들은 한국에 지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고 영화 프린트에 대한 제한이 1994년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1988년 UIP 직배의 「위험한 정사」가 첫 선을 보이고 1990년 2월이 되자 14편으로 증가하고 12월이 되자 서울 중심부의 극장인 단성사, 서울시네마타운과 같은 극장에서 상영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한국영화계의지지 노력이 있었지만 집단간의 이해와 개인의 이익과 시각의 차이로 오래가지 못하였다. 수입의 자유화로 폭발적인 물량이 증가되어 재개봉관이 개봉관으로 바뀌면서 소극장의 범람 현상이 생겨났다. 외국영화사의 직접 배급으로 인해 제작 · 수입업자와 지방 배급업자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외국영화들의 양적인 증가는 한국영화의 극장잡기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외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점점 증가하여 한국영화대 외국영화의 비율의 폭이 커지고 있다.

1980년대의 작품들은 계몽적인 영화에서 탈피하여 사회적인 발전 양상에 맞춰 다양하게 변하였다. 1980년대에는 사회적인 모순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영화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는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과 일맥 상통한다. 소외된 밑바닥 삶을 그림으로써 이전의 영화속 삶들에 대한 왜곡된 허상을 깨뜨리는 영화로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 · 「어둠의 자식들」 · 「과부촌」,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이 있다.

또 현대 산업사회체제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빈민의 위기적인 삶, 억눌린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도 등장하였다. 이원세 감독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이두용의 「장남」(1984), 박종원의 「구로 아리랑」(1989)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화하고 희화한 새로운 류의 영화가 등장하였다. 이장호의 「바보선언」, 장선우의 「서울황제」 · 「성공시대」, 그리고 한국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르인 멜로물은 산업사회의 개방에 따른 외래문화와 전통문화와의 괴리 속에 가치관의 혼란을 그린 영화 이장호 감독의 「무릅과 무릅 사이」(1984), 송영수감독의 「우리는 지금 제네바에 간다」(1980), 곽지균감독의 「겨울 나그네」(1986) · 「상처」(1987), 멜로물과는 다르게 여성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등장하여 여성의 내면현실을 파고 들어 좀 더 깊이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도 있다.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 · 「안개기둥」(1987) 등이 그것이다.

1980년대는 다양한 역사영화들이 등장하였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예성이 강한 작품들로 순박한 향토성과 로맨티시즘을 결합한 영화, 정진우 감독의 「앵무새는 몸으로 울었다」(1981)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이두용의 「뽕」(1985) 등과 일제시대의 민중에 대한 진지한 시각을 지닌 영화 하명중의 「땡볕」(1985)이 있는데 이들 작품의 한계는 사회적 현실문제를 호도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상업적인 차원에서 제작된 성과 결합한 사극영화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1986), 엄종선의 「변강쇠」(1986), 이혁수 감독의 「연산군」(1987)과 이와는 대조적인 연출자의 미학적인 탐구와새로운 양식의 시도인 배창호의 「황진이」(1986), 임권택의 「연산일기」(1987)이 있다. 「황진이」는 황진이 내적인 아름다움과 새로운 카메라 기법인 롱테이크를 실험한 작품이고 「연산일기」는 연산군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고 「헬로 임꺽정」은 임꺽정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담고 있다. 이와는 달리 유교계급과 무속의 질서를 다룬 작품인 이두용의 「피막」(1980) · 「물레야 물레야」(1983)와 임권택 감독의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 「씨받이」는 권력과 유교적 관습에 억압된 인물을 그리고 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예술영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이명세의 「개그맨」은 대중에게는 낯설고 황당하기 조차 한 블랙 코메디적인 양식의 영화를 선보였다. 그리고 새로운 유학파 박광수 감독의 「철수와 만수」는 지적인 영화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6.25전쟁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89)은 그동안 영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빨치산에 대해 기존의 보수 우익적인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적인 시각으로 6.25전쟁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을 하고 있다.

1990년대는 영화산업에 대기업이 뛰어들고 비디오 시장이 급성장하고, 케이블방송이 시작되고, 뉴미디어가 발전됨으로써 영상 산업의 개념이 변하는 시기이다. 영화를 예술로 보기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라는 논리가 팽배하는 시기이다. 영화산업의 구조변화에 따라 영화 관객층도 변하였다. 신세대 관객들은 1980년대의 사회적인 영화보다는 코미디류의 영화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영화관객층에 맞는 기호도를 탐구하여 제작한 전문기획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그 예가 신씨네가 제작한 로맨틱 코미디라 할 수 있는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로맨틱 코미디가 대거 등장하였는데, 이런 류의 영화로는 강우석 감독의 「미스터 맘마」(1992) · 「마누라 죽이기」(1995), 신승수감독의 「아래층여자 위층여자」(1992) · 「가슴달린 남자」(1993) 등이 있다. 또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4) 같은 여성영화도 등장하였고,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은 어두운 갱 영화도 등장하였는데, 그 예가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1994) · 「본투킬」(1996), 김영빈감독의 「김의 전쟁」(1992) · 「테러리스트」(1995)이다. 그리고 청소년층에 맞는 액션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시리즈도 흥행적으로 성공한 영화이다.

1980년대에 진지한 감독들은 여전히 사회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 · 「그섬에 가고싶다」(1994)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 장선우감독의 「경마장 가는길」(1991), 「꽃잎」(1995), 월남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지닌 정지영의 「하얀전쟁」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이와는 달리 새롭게 등장한 젊은 감독군으로는 이명세감독의 「나의사랑 나의신부」(1990) · 「첫사랑」(1993), 여균동감독의 「세상밖으로」(1994), 김홍준감독의 「장미빛 인생」(1994),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민용 감독의 「개같은 날의 오후」(1995) 등이 이 시기에 등장한 감독들의 작품으로 주목할 만하다.

북한영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8선으로 분단된 상태의 북한에는 영화촬영소가 없었다. 그러므로 광복후 약 4년동안은 전적으로 소련영화의 수입상영에 의존해 왔다. 1949년 국립영화촬영소가 만들어져 「문화영화」 · 「용광로」를 만들었다. 극영화로는 1950년 김홍식 감독의 「내고향」이 북한에서 나온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6 · 25동란으로 하여 영화촬영소는 기능을 상실하고, 1950-1953년에는 다시 소련영화의 수입상영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1955년에는 국립영화촬영소의 시설이 복구된 것으로 나타나며, 기록상으로 극영화 2편, 기록영화 9편, 문화영화 1편, 뉴스영화 63편이 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1957년에는 국립영화촬영소가 예술영화촬영소와 기록영화촬영소로 나누어지게 되며, 1960년에는 장편과 단편을 합쳐서 182편의 영화가 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해에 개봉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이 천연색 광폭영화로 촬영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색채영화와 시네마스코프가 북한에 최초로 등장한 것이 이 때가 아닌가 한다.

1960년을 고비로 하여 북한 영화는 전후의 복구를 거쳐 상당히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조국의 품으로」 · 「두만강」 등을 카이로 영화제 · 모스크바 영화제 등에 출품한 것도 이 시기이며, 그들이 걸작으로 내세우는 「분계선 마을」도 1961년에 제작되었다. 1963년에는 그들이 인민상 계관작품으로 불후의 명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정방공(精紡工)」이 제작되고 극영화가 20편 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1964년에는 「공화국기치 만세」(1부와 2부)라는 쳔연색 장편 기록영화가 인민상 계관작품으로 선정되는데 조국을 서사시적 화풍으로 담은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록영화를 이처럼 높이 평가한것은 주목할만하며 이해에 2.8 영화촬영소가 새로이 창설되었다.

1973년에는 가난한 고용농민의 딸 꽃분이와 그 일가의 생활을 착취와 압박에 대한 계급투쟁으로 그린 「꽃파는 처녀」를 천연색 시테마스코프화면에 담았고, 1980년 이후에는 김일성의 조선 인민조 창건까지의 항일투쟁기 「조선의 별」 10부작을 완성했다. 북한영화는 1980년대 중반이 전성기였다. ‘ 평양영화축전’이 창설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비동맹국 교육문화장관회의의 합의에 따라 1987년부터 격년제로 열리고 있는 이 국제영화제는 1999년까지 여섯 차례 개최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면서 북한영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연간 제작 편수는 예전과 다름없었으나 수준작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이유로 이념을 같이했던 동구권의 몰락과 교류의 단적,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김정일의 위상 강화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기록영화촬영소, 과학교육영화촬영소, 2 · 8영화촬영소 등 4개의 촬영소가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평양연극영화대학이 있다. 북한의 영화인들이 김일성과 당으로부터 ‘혁명적 예술인’, ‘천리마 예술집단’, ‘사상 · 예술적으로 준비된 모범부대’라는 칭호와 평가를 받아 왔다는 사실로 볼 때, 북한 사회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예술분야에 비하여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있는 창조작업으로서의 예술은 북한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김진태라는 영화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공산주의적 혁명정신으로, 교양하는 힘있는 무기로, 생활과 투쟁의 교과서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확고부동한 북한의 예술정책이 개인적인 작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일반예술의 경우 때로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이 완전히 거세된 북한영화의 경우 이러한 목적의식에 쉽사리 순응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유일사상이 강조되고, 1960년대 중반까지 볼 수 있었던 개인의 이름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또는 김일성이 직접 쓴 작품을 충실히 옮겼다는 식으로 모든 예술적 창조의 영광을 김일성에게 돌리며, 예술영화사 · 기록영화촬영 · 백두산창작단 식의 제작촬영소만이 기록으로 나온다. 개인의 말살 내지는 상실이 영화제작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그들이 불후의 명작로 내세우는 인민상 계관작품들은 김일성의 유일사상에 투철하며 그때그때의 이른바 당의 과제를 반영시킨 작품들이다. 결국 북한의 모든 우수영화는 김일성 자신이 극본을 썼거나 김일성의 교시를 충실히 영화화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불후의 명작 또는 인민상 계관영화는 다음과 같다. 「내 고향」(1949) · 「분계선 마을」(1961) · 「정방공」(1963) · 「공화국기치 만세」(1964) · 「유격대의 오형제」(1968) · 「피바다」(1969) · 「꽃피는 마을」(1970) · 「한 자위단원의 운명」(1970) · 「로동가정」(1971) · 「꽃파는 처녀」(1973) · 「이 세상 끝까지」(1977)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1979) · 「전사의 어머니」(1979) · 「도라지꽃」(1987) · 「먼 훗날의 나의 모습」(1998) 등이다.

한국영화를 반성할 때 지나친 상업주의로 하여 예술성이 망각되고 단순한 흥행으로 타락한 경우를 비판하여야 한다면, 반대로 북한영화는 영화산업을 완전히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상업주의로 타락할 염려는 없으나 완전히 권력자와 당의 선전도구로 전락함으로써 완전무결하게 예술성을 거세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가 보다 다양한 전개에의 가능성이 있고 그럼으로써 예술적 창조에의 가능성이 있다면, 북한영화는 그 철저한 획일성으로 하여 예술적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시대적 배경

영화가 처음부터 예술이며 산업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활동사진이 예술가의 손에 의하여 예술이 되어갔고, 기업가의 손에 의하여 현대의 산업으로 발전되어온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 영화는 기업 및 예술로서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원인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① 일본 식민지하에서 출발하였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영화가 들어온 것이 1900년 전후였고 최초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1919년이라면,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하여 독립과 주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04년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하고 본격적인 간섭을 시작하였으며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 체결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영화는 일본 식민지하에서 출발하였다고 하겠으며, 따라서 식민정책의 억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어려운 여건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였다.

② 민족자본에 의지하지 못하였다. 외래 자본, 특히 일본인의 자본에 의지하거나 뜨내기의 유동자본에 의지함으로써 기업적으로 뿌리를 박지 못하였다.

③ 개화기 외래사상 숭상의 경향으로 하여, 이른바 외화가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영화는 소박을 맞아왔다고 볼 수 있다.

④ 기계 및 기술 전반을 외국에 의존함으로써 기술면이 빈곤하여 1980년대에 들어선 오늘까지도 동시 녹음이 아닌 애프터 레코딩 시스템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⑤ 예능인을 천시하는 뿌리깊은 봉건사상으로 영화인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지 않았고, 따라서 영화의 예술적 향상도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 영화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일제 36년과 6 · 25전쟁 등 격동과 수난의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제작

영화의 제작은 다른 예술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어느 예술보다도 기계에 의존한다. 영화의 발전사가 기술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 제작형태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변하여왔다. 동작 자체도 부자연스럽게 기록되던 초기의 무성영화시대, 사실적인 동작의 재현이 가능하던 발전된 무성영화시대, 그리고 유성영화시대, 색채영화시대, 대형영화시대, 입체영상시대, 입체음향시대 등으로 발전하여왔다.

1편의 영화가 제작되기 위해서는 기획 · 시나리오 · 연출 · 촬영 · 조명 · 녹음 · 장치 · 의상 · 연기 · 현상 · 편집 등 각 부문들이 유기적인 협동과정을 거쳐야 한다. 영화의 특징은 집단예술형태와 기계예술적 형태와 산업적 예술형태를 취하고 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드는 영화는 숙명적으로 상업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제작비를 뽑고 이윤을 남기기 위한 사업체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제작형태에는 어느 인물에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이 영화산업에 유리한가에 따라 제작자 시스템 · 감독 시스템 · 배우 시스템으로 나뉜다. 영화제작은 기획에서 어떤 종류의 영화를 누구누구를 참여시켜 어떻게 만들어서 어느 관객층을 공략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런 다음 시나리오를 집필시키고 감독을 결정한다. 감독은 실무제작자의 감독 밑에 출연배우들을 결정하고 촬영 · 미술 · 의상 · 조명 · 녹음 · 편집 등에 참여할 인물들을 선별한다. 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은 배급회사를 거쳐 배급, 흥행을 하게 된다.

시나리오

세나리오(scénario)의 영어식 발음이다. 영화대본을 지칭하는 말인데, 영어권에서는 스크린 플레이라는 말이 보다 널리 통용되고 있다. 때로는 스크린라이팅(screen writing) 또는 필름 스크립트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시나리오에는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있는가 하면, 소설이나 희곡이나 다른 장르의 문학작품 또는 예술작품, 때로는 기록물로부터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각색 시나리오가 있다. 시나리오에는 배우의 대사와 함께 배우의 동작과 장면의 구체적인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시각적 영상용어가 표기되어 있고 음향 효과나 음악 또는 영상 효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시나리오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데, 첫 번째 단계가 줄거리의 짧은 개요와 등장인물, 극적 클라이맥스를 설정하는 시놉시스 단계이다. 여기에 줄거리를 발전시키고 등장인물을 추가 및 재배치하고 대사와 영상효과를 첨가하는 트리트먼트(treatment)단계가 있으며, 이를 최종적으로 여러 차례 다듬고 다시 고쳐 쓰고 세련되게 하는 세 번째 단계가 있다. 미국에서 시나리오는 희곡과 비슷하게 대사와 지문(direction) 중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다큐멘터리와 산업영화는 양면으로 나누어 좌측에는 카메라의 효과를, 우측에는 대사와 해설, 음악과 음향 효과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 방식은 대부분의 유럽 극영화 감독들이 애용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각색

영화화에 적합하게 소설이나 희곡 또는 시, 전기물, 때로는 사회학적 · 자연과학적 보고서를 기술적으로 전환시키는 시나리오 창작의 한 형태이다. 많은 극영화가 각색물로 되어 있다. 각색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원작물의 내용을 충실히 옮기려는 것보다는 그 원작물 중에서 영화적인 것만 발췌, 재구성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각색물로는 방영웅(方榮雄)의 소설을 유현목(兪賢穆) 감독이 연출한 「분례기(糞禮記)」(1971), 김동리(金東里)의 소설을 최하원(崔夏園) 감독이 각색한 「무녀도(巫女圖)」(1973), 박경리(朴景利)의 소설을 김수용(金洙容) 감독이 각색한 「토지(土地)」(1974), 황석영(黃晳暎)의 소설을 이만희(李晩熙) 감독이 각색한 「삼포가는 길」(1975), 조선작(趙善作)의 소설을 김호선 감독이 각색한 「영자의 전성시대」, 이문열(李文烈)의 소설을 장길수 감독이 각색한 「레테의 연가」(1987) 등이 있다. 외국 영화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의 「헨리 5세」(1945),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각색한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1966) 등이 대표적이다.

콘티뉴이티

영화의 주제나 줄거리 발전에 논리적이나 물리적 또는 심리적으로 장면(쇼트, 신, 시퀀스)이 단절되지 않은 연속성을 말한다. 영화는 연극과 달리 극영화의 경우 약 500∼600개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독립적으로 나뉘어 촬영되므로 숙명적으로 비연속성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을 자연스러운 시각적 논리에 의하여 유기적으로 연결(편집)해야 한다. 영화 편집시에는 항상 콘티뉴이티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촬영시 감독을 보조하여 콘티뉴이티 걸이 콘티뉴이티 리포트나 시트(sheet)를 가지고 콘티뉴이티의 관점에서 모든 촬영상황을 기록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나 일본에서는 리포트나 시트라는 말을 빼버리고 콘티뉴이티(일본에서는 콘티)를 촬영대본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촬영

영화 촬영은 일반적으로 극장 상업영화의 경우 35㎜영화가 주종을 이룬다. 광복 이후 6 · 25전쟁 때까지 한국영화는 16㎜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상영되었으나 국제적으로는 70㎜영화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촬영이란 감독이 배우들을 연기시킨 장면이나 영화상 필요한 장면들을 현실의 시각 체험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찍는 것이다. 그러나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세계를 기존 촬영기법으로 모두 촬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어렵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위험하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영상은 특수효과(특수 촬영, 현상소에서 특수작업 함)로 처리하게 된다.

촬영기를 이용한 특수효과로는 고속촬영, 저속촬영, 글라스 쇼트, 거울 쇼트, 모델 또는 미니어처 쇼트, 슈프탄 프로세스, 스플리트 매트 쇼트 등이 있다.

① 고속촬영(high-speed cinematography):영화는 1초에 24프레임(독립, 정지된 화면)이 촬영되고 영사된다. 그런데 만일 1초에 48프레임을 촬영하여 24프레임으로 영사한다면 화면 속 움직이는 대상은 2배의 느린 동작으로 보이게 된다. 특수한 과학촬영이 아닌 한 보통 영화에서는 약 3배의 고속촬영에 의한 3배의 느린 동작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방법으로는 비엔나 왈츠풍의 완만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② 저속촬영(accelerated-motion):영화의 표준 촬영속도인 초당 24프레임보다 적은 프레임으로 촬영을 하여 초당 24프레임이라는 정상적인 속도로 영사를 하면 움직이는 대상은 빠른 동작으로 보인다. 만일 초당 1프레임씩 촬영된다면 영사시 동작은 24배 빠르게 움직인다. 빠른 동작은 속도감 있는 현대적 시간 분위기와 희극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③ 로케이션촬영:촬영소에서 세트를 만들어 촬영하는 것이 아니고 촬영소 이외의 장소에서 촬영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촬영소 내에서 모든 영화를 찍는 경우는 거의 없다.

④ 세트촬영:현실 공간에서 로케이션촬영만으로 시각적 현실감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것은 영화 촬영의 메커니즘상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상에서 현실감을 주기 위하여 또는 미학적인 이유로 촬영소 안이나 밖에 세트를 세워 촬영을 하게 된다. 이 경우 배우의 연기가 자유롭거나 촬영기의 배치 및 이동이 자유롭고, 경우에 따라서는 특수 촬영이 용이한 이점이 있다.

조명

감광유제(감광성을 주는 약제) 겉에 바르는 네거티브 필름을 영화촬영기가 사용하는 한 촬영에서 조명이란 필수적인 조건이다. 영화사 초기 필름의 감광도가 낮은 시절에는 조명은 적정노출을 위한 보조 수단이거나 실내장면이나 밤장면을 위하여 사용되었지만, 고감도필름(빛을 느끼는 예민도가 높은 필름)이 생산되는 최근에는 조명이 미학적인 측면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조명은 스크린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적절한 밝기로 보게 해 주고, 분위기나 화면의 깊이감 또는 입체감을 더해 주며 3차원의 환각과 미적 쾌감을 더해주며 위하여 사용된다. 광선과 피사체의 각도나 채광법에 따라 정면조명 · 측면조명 · 뒷면조명 · 사선조명 · 상측조명 · 하측조명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촬영기 렌즈 근처에서 주인공에게 비추는 시선조명이라는 것도 있다. 조명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따라 밝은 상태를 하이 키 조명, 어두운 상태를 로우 키 조명이라 한다. 조명의 방향을 시계 숫자를 이용하여 부르기도 한다.

편집

영화 편집자는 현상소에서 나와 감독에 의하여 오케이(OK)로 떨어진 포지티브 필름(프린트)을 시나리오와 콘티뉴이티 리포트를 놓고 영화 순서대로 붙인다. 필름을 특수한 목적에 의하여 잘라 붙이는 행위를 편집이라 한다. 영화의 순서대로 대충 프린트를 붙이는 행위를 어셈블(assemble)이라고 한다. 이 어셈블에 최종적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상과 같은 수준으로 정교하게 리듬과 스피드를 조절하여 편집하는 것을 파인 커트(fine cut)라 한다. 이 파인 커트된 프린트와 똑같은 네거티브 필름을 찾아 붙이는 작업을 네거티브 편집이라 한다. 이 네거티브필름과 사운드 네거티브를 함께 인화하여 영사용 프린트가 나온다.

편집이라는 말은 영어로 에디팅 또는 커팅이라고 한다. 초기 미국에서 에디팅 또는 커팅이라고 하였을 때는 영화의 표현기법이라는 개념보다는 단순히 필름을 끊고 붙이는 작업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소련이나 프랑스에서는 몽타주(montage)가 편집작업의 개념보다는 영화만이 갖는 독특한 수사적 표현기법의 개념이었다. 몽타주라는 용어는 프랑스어의 ‘monter(짜맞춘다는 건축용어)’에서 온 말로서 연극에서는 무대상에서 장치를 끌어올리거나 고정시키거나 조이거나 짜맞추는 것을 지칭하는데, 영화에 와서 편집의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포토몽타주라는 사진용어가 있는데, 이는 한 프레임에 여러 장의 사진을 조합하여 다중노출시킨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몽타주의 개념을 시간의 경과나 액션을 창조적으로 응축시키기 위하여 일련의 빠르고 짧은 쇼트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장면(sequence)에 적용하였다. 이와 같은 전형적인 기법으로 일련의 달력, 신문의 헤드라인, 지명, 열차바퀴 등이 1930년대 미국 영화에서 자주 이용되었다. 오늘날에 몽타주의 개념은 1920년대 소련의 몽타주파 영화감독들이 정립한 이론적 개념을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초기 미국영화, 특히 그리피스(Griffith,D.W.)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아 개발한 소련의 몽타주기법은 감독에 따라 개념을 달리한다. 아이젠슈타인(Eisenstein,S.M.)의 몽타주관은 몽타주를 통하여 관객에게서 정서적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며, 별개의 두 쇼트들의 충돌(편집의 연결의 의미)에 의하여 두 쇼트의 개념과는 다른 제3의 개념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는 몽타주의 수준이나 유형에 따라 길이 · 리듬 · 음조 · 탈음조의 지적인 몽타주로 분류하고, 후자의 것은 추상적인 개념을 영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레프 쿨레쇼프는 몽타주는 단순한 리듬을 창조하는 수단만은 아닌 현실과는 별개의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푸도프킨(Pudovkin,V.)은 쇼트는 생생한 원료로 있지만 그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복잡하게 결합하여 영화예술이 탄생된다고 보았다.

녹음

영화 음향에는 대사 · 효과음 · 음악이 있다. 대사의 경우 동시녹음일 때는 촬영현장에서 배우의 육성을 직접 채록하나, 후시녹음일 때는 스튜디오에서 출연배우 혹은 성우가 녹음한다. 효과음이나 음악은 녹음실에서 편집된 필름을 보면서 별도로 채록한다. 이 세 독립된 사운드 트랙을 편집된 필름을 보면서 녹음기사는 감독의 조언을 듣고 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믹싱을 한다. 이 믹싱을 한 자기녹음테이프를 사운드 필름으로 옮겨 사운드 네거티브 필름을 만든다. 이를 영상네거티브와 합성 인화하여 영사용 프린트를 만든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프린트를 광학방식에 의한 프린트라고 하며, 영사용 프린트 위에 자기사운드트랙을 입혀 녹음한 방식의 프린트를 자기녹음프린트라 한다. 70㎜ 영화는 모두 자기방식의 녹음방식을 채택하여 음질을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 녹음방식이 발달하여 잡음제거 방식인 돌비시스템으로 입체음향 녹음방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검열

영화를 일반 관객에게 공개하기에 앞서 정부 혹은 사회단체에서 헌법이나 기타 검열 규칙의 위법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하는 일종의 시사회이다. 영화사 초기부터 영화검열의 필요성이 인식되어 현재까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를 시행하고 있다. 사회주의국가나 후진국일수록 정치체제에 대한 검열이 엄격하고, 서방 선진국은 폭력과 섹스에 관심을 두고 이들 영화와 청소년들의 격리에 치중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영화업계의 자율심의기구를 두고 상영 여부와 관객의 연령층에 따른 등급만 결정할 뿐 필름의 삭제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가 등급과 삭제 행위를 병행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일제시대부터 조선총독부가 정치사상에 치중하여 엄격하게 검열을 했다. 1926년 조선총독부령 제59호 「활동사진필름 검열규칙」이 공표된 뒤, 나윤규의 「사랑을 찾아서」(1928)가 커트 및 제명 변경을 하고서야 상영될 수 있었고, 「혈마(血魔)」(1928) 같은 영화는 반이 커트되고도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전창근(全昌根)「복지만리」(1941)로 작품이 압수됨은 물론 100일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는 현재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영화 검열을 하고 있고 영화 삭제와 등급매기는 일을 하고 있다. 등급에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고교생 입장가’, ‘중학생 입장가’, ‘초등학생 입장가’ 등의 등급이 있다. 1989년 이후 영화검열은 정보기관이나 문공부의 공무원이 철수, 순수 민간인들만으로 하고 있다.

흥행

완성된 영화를 가지고 상행위를 하는 것을 영화 흥행이라고 한다. 영화 흥행에는 제작자 · 배급업자 · 극장주라는 세 요소가 있다. 과거에는 제작과 배급을 함께 하는 회사도 많았지만 현재는 제작과 배급을 분리해서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몇몇 큰 영화사가 주주가 되어 영화 배급회사를 설립, 운영하는 수도 있다. 영화 제작자는 일반적으로 배급회사에게 완성된 영화의 상영 지역과 기간에 대한 판권을 판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6개의 지역 배급망이 있는데, 영화 제작자는 대부분의 작품을 이들 지역 배급업자에게 상영권을 팔고 서울의 개봉관에만 직접 배급한다. 조건에 따라 약간 차이는 있으나 흥행 수익을 반반씩 배분한다. 판권 상영기간은 국제적인 관례가 5년이다. 선진국의 경우는 배급회사에서 많은 산하 극장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우리 나라의 경우는 대부분의 극장이 개인 소유이다.

참고문헌

『한국영화』(이정하, 씻김, 1995)
『한국영화탐구』(양윤모, 예니,1992)
『한국영화연감』(영화진흥공사, 1981)
『한국영화60년』(교육과학사, 1980)
『한국영화발달사』(유현목, 한진출판사, 1980)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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