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정부 부문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한국의 과학기술은 1980년대를 거치며, 정부출연연구기관, 대학, 기업체연구소로 이루어진 제도적 틀을 갖추어갔다. 게다가 1980년대는 과학기술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이 이루어지고 기업의 연구비 투자가 대폭 증가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연구개발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의 시기는 이렇듯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연구개발의 양적 규모는 물론 질적 수준에서도 선진국의 수준으로 도약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거치며 한국의 과학기술은 1980년대까지 선진 기술의 도입, 흡수, 개량의 방식으로 발전하던 추격형 모델에서 서서히 벗어나, IT와 같은 몇몇 첨단 분야에서는 세계 기술의 향방을 선도하는 위치로 올라서고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모방, 추격의 단계에서 이제는 스스로 새로운 기술을 창출하는 단계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이 무난한 성장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급변하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질서의 변화에 의해 불가피하게 강제된 면이 있으며, 1997년의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구조의 급격한 변동을 수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졌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이전 미국과 소련의 체제 경쟁에 의해 주도되던 냉전체제가 무너졌다. 그 대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경쟁하며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냉혹한 세계질서가 형성되었다.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로 상징되는 새로운 경제 질서가 등장했고, 한국은 곧이어 OECD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과거 냉전체제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보호받던 한국이 이제는 냉혹한 신자유주의 국제 경쟁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세계적 경쟁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는 독자적 과학기술력을 보유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선진국의 기술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기술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시장을 주도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까지 무시되었던 대학의 기초과학 연구 능력을 배양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도 점차 널리 인식되었다.
1990년대 이후는 세계 기술의 주도적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인터넷의 확산, 이동통신의 발전으로 정보화, 디지털화의 추세가 가속화되었고, 생명과학, 나노기술이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된 정치, 경제, 기술적 환경에서 한국의 정부와 기업이 택한 과학기술 전략은 새로이 등장하는 신기술 부문에 과감히 투자하는 것이었다. 즉, 선진국의 변화를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막 등장하고 있는 첨단 분야에 경쟁자로 직접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에서 짐작할 수 있다. 1992년 10년 계획으로 시작된 선도기술개발사업(이른바 G7프로젝트)이 그 좋은 예이다. 2001년 한국의 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목표를 표방한 이 사업은 총 18개 과제를 선정하여 미래에 유망한 사업의 첨단 제품 또는 기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추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과학기술기본계획(2001년)을 통해 미래 유망 신기술 분야를 선정한다거나 2003년 10대 차세대성장동력 사업을 선정하는 등 첨단 산업의 기술력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 이루어졌다. 1998년 과학기술처가 부총리급의 과학기술부로 승격된 일도 과학기술을 중시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1980년대 대학원의 양적 팽창이 시작되었다면, 1990년대 이후로는 그와 함께 대학원의 연구와 교육이 질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주로 과학기술 인력 배출기관에 머물렀던 대학이 연구개발의 중심축의 하나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부터 정부가 대학의 연구와 교육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탓이 컸다. 1990년 한국과학재단은 대학에 13개 우수연구센터를 지정하여 9년간 장기적으로 지원했다. 1999년부터 2011년까지는 두뇌한국(BK) 21사업이 추진되어 대학원의 교육과 연구를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정부의 장기적 연구 및 교육 지원 사업을 통해, 일부 대학의 연구 및 교육 역량이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 한국의 과학기술은 과거의 추격 모방의 단계에서 ‘탈추격’의 단계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처해있다. 1990년대 이후 양적 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룬 것은 틀림없으나, 앞으로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서는 몇 가지 개선되어야 할 점도 보인다.
첫째, 과학기술의 창의력이 한국 사회 경제의 발전에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지만, 실제 이공계 연구 인력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그만큼 두텁지 않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이공계 연구 인력이 우선적으로 정리해고 된 사실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과학기술과 그 인력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2008년 과학기술부가 폐지되고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합된 일도, 많은 과학기술자들에게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약화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과학기술의 필요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과학기술자들을 대우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개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기업의 기술 개발의 능력이 일부 대기업에만 집중된 현상을 개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06년 민간 기업의 연구개발비 중 75.8%가 대기업에 편중되어 있다. 이러한 연구개발능력의 집중 현상은 최근 삼성, 현대와 같은 기업의 세계적 약진을 가능하게 한 장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양성과 경쟁으로부터 비롯되는 건강함이 결여된 증거이기도 하다. 중소기업과 벤처 기업의 연구개발 역량이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비중이 커지면서, 그것이 사회적, 윤리적으로 더욱 성숙해야할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2005년의 줄기세포논문 조작 사건은 성장 지상주의와 조야한 민족주의를 통해 급성장한 한국 과학기술이 지닌 문화적 낙후함을 잘 보여주었다. 이제는 과학기술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화적 의미, 과학기술의 윤리적 문제를 깊이 깨닫고 그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만이 한국의 과학기술은 지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 한층 더 발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