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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繪畵)

회화개념용어

 여러 가지 선이나 색채로 평면상에 형상을 그려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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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필 풍속도 화첩/단오풍정
분야
회화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여러 가지 선이나 색채로 평면상에 형상을 그려낸 그림.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우리 나라의 회화는 삼국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이루며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 수많은 전란과 재난, 정치적인 불안이 국토를 휩쓰는 동안에도 건전하고 훌륭한 화풍이 계속하여 발달하였던 것이다.
또한 중국 회화의 영향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고, 일본 회화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우리 나라의 회화는 외국 회화와 빈번하고 활발한 교섭을 가지면서 그것을 토대로 외국의 회화와는 스스로 구분되는 한국적 화풍을 키워 왔다.
우리 나라의 회화는 조각·공예·건축 등 다른 분야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한민족이 지닌 예술적 창의력과 미의식의 대표적인 구현체로서 한민족이 이룩한 문화적 업적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변천을 구체적이고도 신빙성 있게 말해 주는 산 자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미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회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미술 문화 내지는 문화 전반의 변천을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게 이해하는 하나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구려의 회화
우리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믿어진다. 삼국의 회화는 중국을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아 수용하고 서로 교섭을 가지며 발전하여 각기 다른 성격의 회화를 형성하였다. 같은 삼국시대의 회화이면서도 나라와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며 발달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한대(漢代)와 육조시대(六朝時代) 회화의 영향을 받아들여 자체 발전의 토대를 삼았다. 이렇게 중국 회화 및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서역 회화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고구려는 어느 나라의 회화보다도 힘차고 율동적인 고구려 특유의 회화를 발전시켰다. 고구려의 회화는 통구(通溝)와 평양 부근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고분의 벽화를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초기에 해당되는 4, 5세기의 것은 대체로 주인공, 즉 묘주의 초상이 위주가 되고 불교적인 요소와 풍속화적인 요소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의 능이라는 설과 중국인 동수(冬壽)의 묘라는 설 등으로 논란이 많은 안악3호분(安岳三號墳)을 들 수 있다. 357년(영화 13년)의 묵서명(墨書銘)이 있어 그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이 무덤의 벽화는 묘주가 누구이든 고구려 초기 고분 벽화의 한 전형을 보여 주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 고분의 벽화에는 묘주가 생전에 누렸던 풍족하고 위엄 있는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묘주와 그의 부인의 초상화이다. 안악3호분 묘주의 초상화는 묘주 자신의 앉음새는 물론 그 좌우의 시인(侍人)들도 모두 삼각형의 포치(布置) 속에 들어가 있어 고식(古式)의 구도를 보여 준다.
안악3호분의 벽화가 보여 주는 여러 가지 특색은 408년(광개토왕 18년)에 축조된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의 벽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실 등은 고구려의 회화가 늦어도 4세기경부터는 중국 회화로부터의 영향을 받으며 고도의 발달을 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그러나 고구려의 동적이고 힘이 넘치는 회화의 특징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 것은 대체로 중기인 5, 6세기경부터라고 믿어진다.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를 예로 보면, 활을 겨누며 말을 달리는 기마 인물들이나 사력을 다하여 달아나는 산짐승들이 모두 힘찬 운동감에 휘말린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굵고 가는 파상선(波狀線)주 01)만으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산들조차도 그림 전체의 율동에 발맞추듯 그려져 있어 한층 힘찬 느낌을 자아낸다.
이 수렵도는 물론 그 소재 자체가 힘찬 동작의 세계를 표현해야만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힘차고 율동적인 효과의 정도가 같은 소재를 다룬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도 격렬함을 보여 준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무용총의 「수렵도」가 고구려인들의 기질과 재질을 동시에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임을 말하여 준다.
또한 이 그림은 늦어도 5세기경에는 고구려적인 회화의 특색이 완연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물화가 고도로 발달하였고, 산수화도 발전의 궤도에 오르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이 점은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고분벽화의 수렵도와 비교해 보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5, 6세기 고분 벽화들은 벽면에는 주인공의 생활상이나 주인공이 겪은 중요한 일들을 서사적으로 표현하여 기록적인 성격을 띤다. 반면에, 천장 부분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 등 주인공의 영혼이 향할 천상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 보편적인 특징이다.
그러므로 무덤 내부는 현실 세계와 내세를 함께 구현한 일종의 소우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이 시기의 벽화에는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남도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무용총의 「수렵도」에 보이는 고구려적인 회화의 특색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이르면 더욱더 현저해진다. 이 점은 통구의 사신총(四神塚), 중화군 진파리1호분(眞坡里一號墳) 등의 후기 고분 벽화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엿볼 수 있다.
통구 사신총의 현무도(玄武圖)를 일례로 살펴보면, 거북과 그것을 휘감고 있는 뱀의 뒤틀린 몸 그리고 그들의 사납게 벌린 입에 세찬 정기가 감돌고 있다.
거북과 뱀의 격렬한 동작에 따라 그들의 주변에는 마치 바위에 부딪힌 파도와도 같은 것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물결인지 비운문(飛雲文)주 02)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무튼 이것이 자아내는 동적인 효과는 매우 강렬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동적인 미술의 근원이 본래 중국의 육조시대 미술에서 나온 것임은 진파리1호분의 벽화와 미국 캔자스시티의 넬슨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관의 표면에 새겨진 석각화(石刻畫)를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진파리1호분 현실(玄室) 북벽에 그려진 고구려의 벽화나 중국의 석각화(약 525년경)가 다같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 생동하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것이 보다 유연하고 곡선적이면서도 율동적이다. 이렇듯 7세기경의 고구려 고분 벽화는 힘차고 동적인 모습을 훨씬 더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전대에 비하여 대체로 구성이나 묘사법이 더욱 합리적이고 색채도 훨씬 선명해졌으며, 산수화적인 요소도 좀더 사실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 시기의 벽화에서는 기록적인 성격의 인물화나 풍속화가 자취를 감춘다. 그 대신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사신(四神)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 그 이전의 벽화 내용과 큰 차이를 나타낸다.
고구려는 이처럼 활력에 넘치는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고구려적 경향은 중기의 5, 6세기경부터 더욱 현저해지다가 후기인 7세기에 들어서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회화는 다른 미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 신라, 가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고구려의 회화는 비단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술사상 그 비중이 더 없이 크다고 하겠다.
영역닫기영역열기백제의 회화
백제는 고구려 및 중국 남조, 특히 양나라의 회화와 교섭하였으나 역시 다른 나라의 회화와 구분되는 부드럽고 세련된 모습의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공주 송산리6호분(宋山里六號墳)과 부여 능산리고분벽화(陵山里壁畫古墳)에 그려진 사신도·비운문·연꽃무늬, 부여의 규암면에서 출토된 산수문전(山水文塼) 그리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족좌(足座)와 두침(頭枕)에 그려진 어룡(魚龍)이나 연꽃무늬, 동탁은잔(銅托銀盞)에 새겨진 산악도 등의 자료 등을 통하여 백제 회화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백제에서도 웅진시대(475∼538년)부터는 무덤 내부에 사신을 그렸는데, 공주 송산리6호분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무덤의 벽화는 중국 남조의 자극을 받아 생겨난 전축분(塼築墳)의 벽면에 회를 바르고 사신을 그려 넣은 것이다.
따라서 이 무덤에서 백제가 수용하였던 고구려 및 중국 남조 미술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상이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색다른 것을 창조한 것은 역시 백제적인 능력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여 능산리고분벽화의 경우에는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진 벽면에 직접 사신을 그리고, 천장에는 비운과 연꽃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판석으로 이루어진 벽면에 회를 칠하지 않고 직접 사신을 그려 넣은 것 자체가 고구려 후기의 고분 벽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하여 준다.
이 능산리벽화고분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체로 고구려의 후기 고분인 진파리1호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백제의 고분 벽화는 비운문과 연꽃무늬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벽화에 비하여 훨씬 부드럽고 원만한 동감(動感)을 자아내고 있다. 이렇듯 백제의 회화 양식은, 힘차고 율동적이면서도 어쩐지 긴장감이 짙은 고구려의 회화 양식과는 현저한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백제 회화의 특색은 부여의 규암면에서 출토된 산수문전에서도 역력히 보인다. 7세기경에 제조된 것으로 믿어지는 이 산수문전은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의 회화적인 작품들 중에서 가장 발달된 산수문을 보여 준다.
좌우가 대칭을 이룬 안정된 구도, 근경으로부터 후경으로 후퇴하며 전개되는 공간과 거리 및 오행감, 나무가 우거진 산다운 분위기 등은 그 이전의 우리 나라 미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회화 세계를 나타낸다.
공예 작품들이 지니는 도식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곡선으로 된 삼산형(三山形)의 산들과 울창한 송림의 표현에는 백제적인 부드러움과 온화함이 넘치고 있다. 이렇듯 이 산수문전은 7세기경에 고도로 구체화된 백제 미술의 특색을 보여 줌과 동시에 발전된 백제 회화, 특히 산수화의 일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같은 삼국시대에 같은 한반도 내에 존재하였던 고구려와 백제의 회화가 서로 교섭하였으면서도 각기 독자성이 강한 다른 양식의 미술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신라의 회화
삼국시대 고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天馬塚, 155호분)과 황남대총(98호분)이 발굴되기까지는 아무런 작품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고분들에서 출토된 「천마도」·「기마인물도」·「서조도 瑞鳥圖」·「우마도」 등을 통하여 신라 회화의 일면을 엿보게 되었다.
그러나 앞의 세 그림들은 자작나무껍질에 그려진 일종의 공예화며, 끝의 「우마도」도 역시 검은 칠기의 표면에 붉은 선으로 간결하게 그려진 공예화이다. 그래서 이들이 신라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천마총 출토의 그림들은 고구려 회화의 영향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 수준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신라 회화의 수준이 고구려의 그것보다 낮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이 고분 출토의 그림들이 회사(繪事)를 전문으로 하였던 화원의 작품이 아니고 공예품을 장식하는 공장(工匠)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아무튼 이 그림들을 통하여 신라의 회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재확인하게 되고, 신라 회화의 최소한의 일면을 엿보게 되었다.
이 밖에도 ‘己未年銘順興邑內里壁畫古墳(기미년명순흥읍내리벽화고분)’과 ‘乙卯年於宿知述干(을묘년어숙지술간)’이라는 명기(銘記)가 있는 영주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신라에서도 경주가 아닌 변방 지역에서 벽화 고분이 축조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그림들은 비록 우수한 작품들은 아닐지라도 고구려나 백제의 회화와는 다른 경향을 보여 준다. 힘차고 율동적인 고구려의 회화나 부드럽고 유연한 백제의 회화와는 달리 신라의 회화는 어딘지 사변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지금까지 대충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시대의 회화는 외국으로부터의 영향과 상호 교섭에도 불구하고 각기 성격이 다른 독자적 양식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발전된 삼국시대의 회화는 일본 고대 회화의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늦어도 5세기 후반부터는 백제에서 건너간 화공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고, 7세기 초부터는 고구려 출신의 화공들도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백제의 백가(白加)·아좌태자(阿佐太子)·인사라아(因斯羅我)·고구려의 담징(曇徵)·가서일(加西溢)·자마려(子麻呂) 등은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우리 나라 화가들이다.
이밖에 황문화사(黃文畫師)·산배화사(山背畫師)·책진화사(簀秦畫師) 등도 이 시대 우리 나라 출신의 전문 화사씨족(畫史氏族)들이다. 일본에서 9세기에 활약하였던 뛰어난 화가 하성(河成)도 백제의 후손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예들만 보아도 삼국시대의 우리 나라 회화가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통일신라의 회화
상호 연관을 맺으면서도 각기 다른 양식을 형성하였던 삼국시대의 회화는 불교 조각이나 공예의 경우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통합되고 조화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고신라시대 말기에 회사(繪事)를 관장하기 위하여 세워졌던 것으로 믿어지는 채전(彩典)이 계속 기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솔거(率居)·정화(靖和)·홍계(弘繼)·김충의(金忠義) 등의 유능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당나라와의 빈번한 문화 교섭을 통하여 궁정 취향의 인물화와 청록 산수화(靑綠山水畫)가 발전하였다. 또한 불교 회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에 활동하였던 화가들 중에서 솔거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경주 황룡사(皇龍寺)의 「노송도 老松圖」, 분황사(芬皇寺)의 「관음보살상 觀音菩薩像」, 진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 維摩像」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솔거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통일신라 때 지어진 진주의 단속사에 「유마상」을 그렸다는 사실이나, 황룡사의 「노송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주는 화풍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기에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솔거가 황룡사의 벽에 그린 「노송도」는 너무나도 훌륭하여 까마귀·제비·참새 등의 새들이 종종 날아들다 떨어지곤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믿는다면 솔거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채색화에 뛰어났고 불교 회화에도 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솔거의 「노송도」에 얽힌 이야기, 당나라에서 활약한 김충의에 관한 기록, 당나라의 대표적 인물화가인 주방(周昉)의 그림들을 신라인들이 대량으로 사들였던 일 등을 고려하면, 통일신라시대의 회화에서는 청록 산수 계통의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산수화와 풍만한 미인들을 즐겨 다루는 궁정 취향의 인물화가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대 불교 회화의 양상은 1977년에 발견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를 통하여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754∼75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불보살들의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태, 균형 잡힌 몸매가 이루는 부드러운 곡선, 정확하고 정교한 묘사, 호화롭고 미려한 분위기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8세기 중엽경의 불교 회화가 당시의 불상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한편, 이 시대에 북쪽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발해에서도 회화가 상당히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석(松石)과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는 대간지(大簡之)라는 화가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무덤에서 유려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그려진 인물화가 발견되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려의 회화
고려시대에 이르러 회화는 전에 없이 다양성을 띠며 발전하였다. 실용적 기능을 지닌 작품들뿐만 아니라 여기(餘技)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순수 회화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회사를 관장하는 도화원(圖畫院)이 설치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이녕(李寧)을 비롯한 훌륭한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화원들 이외에도 왕공 귀족과 승려 중에 그림을 즐겨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림의 소재 또한 인물·초상·산수·영모·화조(花鳥)·묵죽(墨竹)·묵매(墨梅) 등 매우 다양해졌다. 초상화에서는 제왕(諸王)·공신, 기타 사대부들의 초상이 빈번하게 제작되었다.
특히 제왕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전(眞殿)의 발달은 더욱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회화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산수화도 전에 없이 다양하고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우리 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경치를 대상으로 삼아 그리는 실경 산수화(實景山水畫)가 태동되었던 것은 특히 주목을 끈다. 고려시대 최대의 거장이었던 이녕이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天壽寺南門圖」를 그렸던 사실과 그밖에도 작자는 알 수 없지만 「금강산도」·「진양산수도」·「송도팔경도」 등이 그려졌던 사실 등은 바로 실경 산수의 태동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비록 이것이 조선왕조 후기의 정선(鄭敾) 일파의 진경산수와 양식적인 면에서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하더라도 회화사상 차지하는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이는 이녕이 활동하였던 12세기 초엽경에 고려의 산수화가 이미 토착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와 함께 묵죽·묵매·묵란 등의 문인화가 사대부 화가들과 선승 화가들에 의하여 활발히 제작되었던 것도 전시대에서 볼 수 없었던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일반회화 뿐만 아니라 불교·유교·도교 등의 종교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불교 회화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여 청자와 더불어 이 시대 미술의 귀족적 아취를 잘 나타내 준다.
이 시대의 회화는 송·원을 비롯한 중국 역대의 회화와 빈번히 교섭하면서 더욱 다양하고 활력 있는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 시대의 일반 회화는 그 수가 매우 적을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당시의 수준을 대표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 시대 회화의 높은 수준은 오히려 일본에 다수 전해지고 있는 13, 14세기의 불교 회화 작품들에서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불교 회화는 궁중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이루어졌다. 또 그 제작에 참여한 화공들도 궁중을 중심으로 활동한 우수한 불화사(佛畫師)들이었기 때문에, 일반 회화와 마찬가지로 당시 미술의 수준과 경향을 충분히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동경 센소지(淺草寺)에 소장되어 있는 혜허(慧虛)의 「양류관음상 楊柳觀音像」은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불교 회화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비단 바탕에 아름다운 채색으로 그려진 이 관음상의 유연하게 곡선진 몸매, 부드러운 동작, 투명한 옷자락, 호화로운 장식, 가늘고 긴 눈매, 작은 입, 섬섬옥수와 가냘픈 버들가지 등은 고려적인 특색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다.
관음의 이목구비는 물론 옷자락과 문양 하나하나가 완벽하리만큼 정교하며, 소홀히 다루어진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려의 다른 불교 회화들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회화도 높은 경지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의 회화
한국 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발전하였던 때는 조선시대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조직화된 도화서(圖畫署)를 중심으로 다수의 훌륭한 화원들이 배출되었고, 이들과 아울러 상당수의 사대부 화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억불 숭유 정책 때문인지 고려시대에 한몫을 하던 승려 화가들의 활동은 극히 쇠퇴하였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보다도 더욱 다양해졌다. 또한 한국화 현상을 더욱 뚜렷하게 형성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현상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구도·공간 처리·필묵법·준법(皴法)·수지법(樹枝法) 등에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대의 회화도 송·원·명·청의 중국 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또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렇게 확립된 한국적 화풍이 시종 강한 전통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많은 변화를 거듭하였으니, 양식적 변천에 따라 대략 ① 초기(1392∼1550년경), ② 중기(1550∼1700년경), ③ 후기(1700∼1850년경), ④ 말기(1850∼1910년경)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1. 초기
조선시대의 회화 발달과 관련하여 맨 먼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시기는 초기, 그중에서도 세종조를 중심으로 한 15세기이다. 이 시기에 이미 안견(安堅)과 강희안(姜希顔)을 비롯한 거장들이 배출되어 격조 높은 한국적 화풍을 성취하고, 후대의 회화 발전을 위한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이때에 형성된 한국화풍의 전통은 초기의 성종조를 거쳐 중종 말년과 명종 초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로도 중기 회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축적되었던 중국의 화적(畫跡)이 다수 전승된 이외에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한 명나라와의 회화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주요 화풍들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토대가 되었다.
① 북송의 이성(李成)과 곽희(郭熙)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이른바 이곽파 또는 곽희파 화풍, ② 남송의 화원 마원(馬遠)과 하규(夏珪)가 형성한 마하파 화풍을 비롯한 원체 화풍(院體畫風), ③ 명대의 원체 화풍, ④ 저장성(浙江省) 출신인 대진(戴進)을 중심으로 명초에 이룩된 절파 화풍, ⑤ 북송의 미불(米芾)·미우인(米友仁) 부자에 의하여 창시되고 원대의 고극공(高克恭) 등에 의하여 계승된 미법 산수 화풍(米法山水畫風) 등이다.
조선 초기의 화가들은 이러한 화풍들을 철저히 소화하고 수용하여 중국 회화와는 완연히 구분되는 특색 있는 양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최대 거장인 안견은 그 좋은 예이다. 그의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나 전칭 작품인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등을 보면, 그가 곽희파 화풍을 토대로 자성일가(自成一家)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쪽에 치우친 편파 구도, 몇 개의 흩어진 경군(景群)들로 이루어진 구성, 넓은 공간과 여백을 중요시하는 공간 관념, 대각선 운동의 효율적인 운용 그리고 개성이 강한 필묵법 등은 안견이 형성한 화풍의 특색을 잘 반영하여 준다.
이러한 화풍은 16세기 전반에 양팽손(梁彭孫)과 그 밖의 화원들에 의하여 추종이 되었고, 그 뒤의 조선 중기 화단에서도 끈질기게 추종이 되었다. 이처럼 안견파 화풍은 조선시대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안견이 대성하게 된 배경에는 그를 비호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이론과 중국화 소장품이 큰 구실을 하였다.
세종조를 무대로 안견과 동시에 활약한 사대부 화가 강희안 역시 크게 주목된다. 그는 명대의 원체 화풍과 절파 화풍을 수용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에서 볼 수 있듯이 문기(文氣)에 넘치는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담하게 수용하였던 절파 화풍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마하파 화풍은 안견파의 그림들에 부분적으로 수용된 이외에 이상좌(李上佐)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송하보월도 松下步月圖」 등에서 그 면목이 엿보이고 있다.
이밖에 최숙창(崔叔昌)·이장손(李長孫)·서문보(徐文寶) 등 15세기 말경의 화원들에 의하여 원대 고극공 계통의 미법 산수화가 그려졌음이, 일본에서 발견된 작품들에 의해서 밝혀지게 되어 큰 주목을 끈다. 이 점은 남종 문인화의 한 지류인 미법산수의 동전(東傳)이 종전의 통념과는 달리 1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말해 준다.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몇 가지 화풍을 토대로 한국적 화풍이 형성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산수화의 형태는 더욱 다듬어지고 공간은 더욱 넓어지며, 필벽(筆癖)은 더욱 토속화되어 단선점준(短線點皴) 등의 한국적 준법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16세기의 화가들은 이미 한국화된 15세기의 화풍에 집착하는 전통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세종조 이래의 조선 초기의 문화가 뿌리를 깊이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진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금강산도」·「삼각산도」 등이 화원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제작되어 실경 산수화의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밖에 이 시대에는 이암(李巖)의 강아지 그림,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등 한국적 정서가 짙게 발현된 화풍이 자리를 잡았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회화는 중국 회화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한국적 화풍을 이루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회화가 송대·원대 회화를 모방하는 데 그쳤다고 막연하게 믿던 종래의 통념은 이제 마땅히 불식되어야 한다.
조선 초기의 회화는 또한 일본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의 수묵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 수묵 산수화의 비조인 슈분(周文)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는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이밖에도 수문(秀文)과 문청(文淸)은 조선 초기의 회화를 일본에 전하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였던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중기
조선 중기는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정묘호란 등의 극도로 파괴적인 대란이 속발하고 사색당쟁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는, ① 조선 초기에 강희안 등에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 화풍이 김제(金褆)·이경윤(李慶胤)·김명국(金明國) 등에 의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② 이정근(李正根)·이흥효(李興孝)·이징(李澄) 등에 의하여 조선 초기의 안견파 화풍이 추종되고 있었다.
③ 김식(金褆)·조속(趙速) 등에 의하여 영모나 화조화 부문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의 한국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④ 묵죽·묵매·묵포도 등에서도 이정(李霆)·어몽룡(魚夢龍)·황집중(黃執中) 등의 대가들이 꽃을 피웠다.
⑤ 이밖에도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전래되어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 혼란하였던 조선 중기에 이처럼 회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사실상 중기의 화가들은 안견파 화풍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회화 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의 토대 위에 수용하였던 것이다.
중기의 회화에서 또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조선 왕조적인 정취를 짙게 풍겨주는 영모와 화조화가 발달하였던 사실이다. 달무리진 눈매와 퉁퉁한 몸매를 보여 주는 김식의 소 그림,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조속과 지운(之耘) 부자의 수묵 화조화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리고 이정의 묵죽, 어몽룡의 묵매, 황집중의 묵포도 등에도 한국화 현상이 현저히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의 회화도 조선 초기 회화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화풍을 가미하면서 조선 중기 특유의 양식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보수적 경향 때문이었는지 이미 들어와 있던 남종화풍은 적극적으로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후기
조선 후기는 특히 두드러진 새로운 경향의 회화를 발전시킨 시대이다.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이 시대에 풍미하였다. 이러한 후기의 회화는 세종조 때부터 꽃피웠던 조선 초기의 회화와 비교되는 훌륭한 것이었다.
초기의 회화가 송대·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하였다. 이에 반하여 후기의 회화는 명대·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새로운 회화 기법과 사상의 수용 및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으로 믿어진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 팽배했던 자아의식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다룬 조선 후기의 회화는 특히 주목된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청나라의 강희(康熙, 1662∼1722년)·옹정(雍正, 1723∼1735년)·건륭(乾隆, 1736∼1795년) 연간의 중국 회화와 그곳에 전래되어 있던 서양화풍이 전해져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에 기반을 둔 이 시대 회화의 조류로는, ① 조선 중기 이래 유행하였던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
②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 산수화가 정선 일파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발달한 사실.
③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 등에 의하여 풍미한 점.
④ 서양화법이 전래되어 어느 정도 수용되기 시작하였던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남종화법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전대에 전래되어 있었던 것이나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이 남종화법의 유행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적 기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남종화법의 전개에는 남종 문인화론이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되어 역시 참신한 화풍의 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후기의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신위(申緯) 그리고 말기의 김정희(金正喜) 등은 남종화의 유행을 부채질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러한 남종화법을 토대로 발전된 전형적인 한국적 회화가 바로 진경산수이다. 정선에 의하여 발전된 진경산수는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를 말한다.
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의 맥락을 이어왔다. 그러나 정선 일파의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남종화법을 토대로 하여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이다.
상상에 의한 관념적 산수화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보고 느낀 직접적인 시각 경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음으로써 진경산수는 농도 짙은 생동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시각을 당기는 구도와 개성화된 각종 준법, 농담이 강한 필묵법과 안온한 설채법(設彩法) 등은 정선과 그의 추종자들의 화풍을 더욱 한국적인 것으로 돋보이게 한다.
진경산수와 더불어 조선 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풍속화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이미 조선 초기와 중기의 각종 계회도(契會圖)를 비롯한 기록화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속화(俗畫)라고도 불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역시 김홍도·신윤복·김득신(金得臣) 등 후기 화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었다.
김홍도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득신은 주로 서민 생활의 단면들을 소재로 삼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양반만을 대상으로 양반만을 위해서 그려진 전 시대의 계회도와는 달리 그들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하에서 이루어졌다.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 후기의 서민들이 그들의 주인공이며, 초가와 논밭과 대장간이 그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를 이룬다.
이러한 풍속화는 전시대의 회화에서 찾아보기 어렵던 새로운 것이다. 서민들의 생활주변에서 찾은 재미있는 소재를 간결하면서도 초점을 이루는 구도 속에 익살스럽게 승화시킨 것이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지니는 큰 특색이다.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대조적으로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파헤치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기보다는 인생의 즐거움과 ‘로맨스’를 누리는 한량이나 기녀, 양반 등이 대부분이다.
아직도 유교적인 규범이 엄하였던 당시에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은 당시의 사회적 풍조를 고려해도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신윤복은 산수나 옥우(屋宇)주 03)를 배경으로 그의 주인공들을 섬세하고 유연한 필치와 산뜻한 채색을 구사하여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이렇듯 신윤복은 소재의 선택·구도·배경 설정·필법·설채법 등 다각적인 면에서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큰 차이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의 시대상이나 생활상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진지하고 적나라하게 묘파하였다는 데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솔직하게 반영한 가장 한국적인 화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과거의 상당한 부분을 모를 뻔하였다.
조선 후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을 통한 서양화법의 전래와 수용이다. 명암법과 원근법·투시 도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서양화법은 청조에서 활약한 서양인 신부들에 의하여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연경을 오고간 사행원(使行員)들의 손을 거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두량(金斗樑)·이희영(李喜英)·박제가(朴齊家) 등의 일부 18세기 화가들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한 서양화법은 그 뒤에도 화원들이 그리는 궁궐의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꽂이 그림 등에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화가들이 수용한 서양화법은 오늘날의 유화와는 달리 한국적 소재를 명암이나 요철법 또는 원근법을 가미하여 다룬 수묵화의 한 가지였다.
이 화법은 비록 널리 유행하지는 못하였지만 회화상의 근대화를 예시하는 중요한 것이었다고 믿어진다. 아마도 이 화법의 전래와 수용은 19세기의 한국 회화가 이색적인 화풍을 형성할 수 있게 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는지도 모른다.
영역닫기영역열기4. 말기
조선 말기에는 후기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쇠퇴하고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일방적인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 이색적인 화풍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경향은 김정희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전기(田琦) 등 이른바 추사파(秋史派)와 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그리고 홍세섭(洪世燮) 등의 작품들에서 전형적으로 간취된다.
김정희 일파가 남종화법을 다져놓는 데 기여하였다면, 김수철·김창수·홍세섭 등은 남종화법을 토대로 세련된 서구적 감각의 이색 화풍을 형성한 데 그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회화는 중국 청대 후반기 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18세기 조선 후기 회화의 전통을 이어 전 시대에 못지 않게 뚜렷한 성격의 화풍을 형성하였다. 또 근대 회화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회화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세차게 밀어닥친 국내외의 정치적 격동과 더불어 위축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주 04)과 민영익(閔泳翊) 등에 의하여 묵란이, 그리고 정학교(丁學敎) 등에 의하여 괴석(怪石)이 그려지는 등 문인화적인 소재가 약간 활발하게 다루어진 편이나, 전반적으로는 화단의 침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침체 상태에서 한 줄기의 빛을 발하며 맺어진 열매가 바로 장승업(張承業)이라고 볼 수 있다. 뛰어난 기량을 지녔던 장승업은 인물·산수·화훼·기명(器皿) 등 다양한 화재를 능란하게 다루어 화명을 떨치고 후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영향을 미쳐 조선 말기의 회화 전통을 현대 화단으로 잇게 하였다. 따라서 장승업은 한국 근대 회화와 관련하여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장승업은 뛰어난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을 높은 수준의 격조로 승화시켜 줄 학문이나 교양을 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개성을 발하면서도 이른바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를 품고 있지 못하다.
안견·정선·김홍도 등 그 이전의 화원들이 안평대군이나 강세황 등의 뛰어난 문인들로부터 받았던 화론상의 지도를 그는 충분히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기이한 형태와 강렬한 필묵법과 설채법을 특징으로 하는 장승업의 화풍은 안중식과 조석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들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격조는 그 이전의 거장들에 비하여 현저하게 하락한 것이다. 조선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소용돌이와 더불어 이 시대 회화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저하되는 추세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회화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등 외국 회화와의 교섭을 유지하고 좋은 점을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일본 및 서양의 문물이 세차게 밀려오는 19세기 후반부터 다소 위축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한 채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현대 미술의 커다란 물결을 형성해 온 것은 단색파였다. 일명 백색파라고도 불린, 화면 전체를 단일한 색과 균질한 톤을 시도한 경향을 지칭한 것이었다. 절제, 간결, 고답적인 단색파의 경향은 미니멀리즘의 한국적인 대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념적 속성을 다분히 띤 것이다. 가능한 한 그린다는 것을 배제하고 저음의 화면 속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깊이를 추구하려는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는 정치, 사회적으로 억압된 시대로서 미술의 일각에선 민중의 정서를 반영한다는 민중 내지 민족 미술이 등장되어 기존의 미술권과 대립된 양상을 보여 준 시대라 할 수 있다.
또 한편 지금까지 금기되었던 그린다는 것이 다시금 의미를 띠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왕성한 표현력이 구가되기에 이르렀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둔 낙서파와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는 현실 이미지의 회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다양하고도 왕성한 표현의 일각을 장식하면서 1990년대 가장 활기찬 이슈로서 떠올랐다.
1990년대 한국 미술에서 주목되는 현상으로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창설과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판 건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권에서 유일한 국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관 건립과 더불어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베니스비엔날레는 두 차례에 이어 한국작가들이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므로서 다시금 한국 현대 미술의 수준을 세계에 과시한 계기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근대의 회화
한국 미술사의 ‘근대’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미술’이라는 신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4년의 신문 보도를 통해서였다. 그 뒤 여러 경로와 매체로 서양화법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고 혹은 접촉되었다.
1890년대부터 나타난 서양식 교육 제도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기본이 되는 서양화법의 도화(圖畫)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에는 고희동(高羲東)이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마침내 양화가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선시대의 맥을 잇는 전통 회화의 줄기와 서양 문화 수용인 양화의 새로운 줄기가 시대적 특징으로 병존하게 되었다. 그 두 줄기는 방법상 대립적이면서 한국 회화 예술의 새로운 궤도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1. 한국화
영역닫기영역열기1.1. 조석진과 안중식
전통적인 한국화의 근대적 변화는 장승업의 뒤를 이은 조석진과 안중식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그들은 작품 자체에서보다도 1920년대 이후의 확실한 근대적 양상을 개척하게 되는 새 세대를 양성한 측면에서 한층 역사적으로 기여하였다.
조석진과 안중식은 1881년에 정부가 일단의 청소년을 선발하여 중국 톈진(天津)의 기계 제작소로 서양 문화의 각종 기계 조작 및 제조법 연수를 보낼 때에 제도(製圖)부문에 뽑히면서 처음 만났다.
그들은 톈진에서 1년가량 머무르고 서울로 돌아온 뒤 다같이 직업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장승업의 화법에 감화를 받았음이 분명하며, 안중식은 장승업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1900년 무렵에 조석진과 안중식은 서울 화단에서 대표적인 쌍벽 화가로 명성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산수·인물(주로 神仙)·화조·영모·어해(魚蟹) 그림들은 어떤 근대적 특질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19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걸치는 시기의 주목할 만한 근대적 필치 구사는 오히려 홍세섭의 영모 그림의 참신한 현실적 시각과, 투명한 색채 표현이 서양화법의 수채화를 방불하게 하는 김수철의 꽃 그림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설사 작품에서 이렇다 할 근대적 요소가 인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석진과 안중식은 1910년대까지의 가장 다양한 회화 역량의 두 대가였다. 그들은 수묵과 농채(濃彩)주 05)로 산수화와 묵화는 물론 세밀한 묘사의 인물화·화조화에 이르는 모든 수법을 자유로이 구사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1902년에 어진(御眞) 봉사(奉寫)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안중식은 조석진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개화파에 속하였고, 근대적 현실 시각의 실경 작품도 더러 남기는 점에서 작품 내면이 한층 다채롭다.
그는 톈진에 갔다온 뒤 1891년에도 상해(上海) 등지를 여행하였다. 1899년에는 세 번째 중국 여행을 떠났다가 거기서 일본으로 직행하여 약 2년간 머무르며 시대적 견식을 넓히고, 회화의 경지도 심화시켰다.
그의 대표적 실경 그림은 1915년에 국망(國亡)의 현실을 상징하듯 굳게 닫힌 광화문과 그 뒤의 정적한 경복궁 및 백악을 조감한 구도와 정확한 원근법으로 그린 「백악춘효 白岳春曉」이다.
같은 해에 그려진 「영광풍경 靈光風景」(10곡병풍 연작)도 같은 수법의 사실적인 화면이다. 전통적 한국화의 근대적 사실주의는 바로 이 두 작품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근대주의는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1920년대 이후 폭넓게 확산되었다.
조석진과 안중식의 제자 배출은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직후인 1911년에 서울에 등장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를 통하여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3년 교육 과정의 서과와 화과를 설정하고 창덕궁 왕실 지원으로 재능과 뜻이 있는 청소년을 입학시켰던 그 강습소에서 전통 회화 지도를 맡은 중심적인 선생이 조석진과 안중식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근대적 미술 학교인 서화미술회 화과에서는 1914년의 1회 졸업생인 이용우(李用雨)·오일영(吳一英)을 필두로 1918년까지 김은호(金殷鎬)·박승무(朴勝武)·최우석(崔禹錫)·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을 정식 졸업생으로 배출하였다.
변관식(卞寬植)은 같은 시기에 외할아버지인 조석진의 영향을 받아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였다. 1918년에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한 이한복(李漢福) 역시 일찍이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배웠다. 그런가 하면 고희동도 일본의 미술 학교로 양화 수업을 떠나기 전에 먼저 그 두 선생에게 전통 화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렇듯 조석진과 안중식은 1920년대 이후의 전통 화단을 새롭게 이끈 핵심적 주역들과 직접적 사제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0년은 근대 전통 화단의 분수령이었다. 1919년에 안중식이, 이어서 1920년에는 조석진도 타계하여 그 두 화가로 대표되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 세대의 활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1.2. 새 세대의 활약
1918년은 민족 미술가들의 근대적 미술 지향의 의지가 처음 조직적으로 표명된 해였다. 그것은 서화협회의 발족이었다. 발기인은 서화미술회 교수진이던 안중식과 조석진·정대유(丁大有)·강진희(姜璡熙)·김응원(金應元)·강필주(姜弼周)·이도영(李道榮)과 1915년 이후 독자적으로 서화연구회를 운영하던 서화가 김규진(金圭鎭) 그리고 당시 서화계의 또 다른 대표적 인사들이던 현채(玄采)·오세창(吳世昌)·정학수(丁學秀)·김돈희(金敦熙)·고희동 등 13인이었다.
고희동만이 미술 학교 출신의 유일한 양화가이고, 다른 12인은 모두 옛 법을 묵수하던 전통 화가와 서예가 및 서화 겸비자였다. 때문에 그들은 협회 이름을 정할 때에 미술이라는 새 용어를 거부하는 반발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화협회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으로 근대적 미술 운동을 다각도로 도모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 운동과 그 뒤의 여러 사정으로 협회 활동이 유보되다가, 1921년 4월에 가진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약칭 협전)는 종합적 성격의 미술전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여기에는 회원들의 전통 회화와 서예, 신미술의 유화가 출품되었다.
전람회라는 외래의 미술 작품 발표 형식이 민족 사회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1913년으로 서화미술회가 주최한 ‘서화대전람회’였다. 출품자는 서화미술회 회원과 교수진 및 학생들이었고, 따로 고서화의 특별 진열이 있었다. 아직 양화가의 탄생이 있기 전이어서 그때에는 유화 출품은 없었다.
초기 서화협회전의 전통 회화 출품자는 안중식·조석진 이후 협회의 중심적 존재이던 이도영과 서화미술회 출신 신진들이던 이용우·오일영·김은호·박승무·최우석·이상범·노수현 외에 변관식·이한복 등이었다. 한동안 묵화와 유화를 병행하다가 1920년대 중엽부터 전통 회화로 완전히 복귀해 버린 고희동의 출품도 있었다. 그는 이도영과 함께 서화협회의 핵심적 지도자였다.
1920년대 중엽 이후에는 또다른 신진인 김경원(金景源)·백윤문(白潤文)·이영일(李英一) 등이 참가하고, 1930년대에는 배렴(裵濂)·한유동(韓維東)·장운봉(張雲鳳, 뒤에 德으로 개명)·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응로(李應魯)·정운면(鄭雲葂)·김영기(金永基)·이유태(李惟台) 등이 신진으로 출품하였다.
그들은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서화협회전의 민족적 움직임과 단합을 위험시하자 서둘러 시작한 대규모의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도 개별적으로 한때 또는 계속 참가하며 전통 화가로서의 자기 성장과 사회적 위치를 다졌다.
조선미술전에서는 식민지 정착의 일본인 출품자가 처음부터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민족 사회의 출품자에게 경쟁적 혹은 대결적 심리와 정신자세를 다지게도 하였다.
이 전람회의 심사·경연 제도는 무엇보다도 자극적이었다. 입선·입상·특선자에 대한 신문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이 미술전은 최대 권위의 신인 등용문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신진들은 그 관문을 통하여 화단에 데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운영 규정에서 이 땅의 전통 회화를 ‘동양화’로 고착시킨 것은 일본인들의 ‘일본화’도 함께 출품되던 실정이 고려된 ‘서양화’의 대칭이었다.
그것은 민족적 입장에서는 정신적 독자성이 봉쇄당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미술전을 운영함에 있어서 서양화부·조각부는 물론, 동양화부까지도 동경에서 데려온 저명한 일본인 작가에게 작품 심사를 맡겼다.
조선총독부는 초기에는 민족 사회의 반발을 무마하는 계책으로 서화협회측의 이도영을 동양화부 심사원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람회 운영이 총독부의 정략대로 기틀이 잡혔다고 본 1927년의 6회전부터는 완전히 일본 화가에게 심사를 맡겼다.
거기서 일부 조선인 출품작 중에 일본화법을 취한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 일시적 현상이었다. 뿌리 깊은 전통과 역사의 흐름을 가진 민족적 체질의 미의식과 표현 감각이 그렇게 쉽사리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는 없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1.3. 표현 사고의 변혁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 동양화부에서 부각된 신진 세대의 표현 사고와 수법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변혁을 수반하고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의도는 양화의 자연 사생법에서 배운 현실 풍경의 관조와 생활 주변의 일상적 시각미에 눈을 돌린 객관적 자연주의였다. 그러한 풍경화와 인물화·정물화에는 그 화면에 알맞은 자연스러운 명제가 붙여졌다.
고전적인 화법의 인습적 추종이나 틀에 박힌 화면 전개를 거부한 그들의 현실 시각 존중은 일본화의 근대적 사생주의에서도 자극받고 있었다.
과거의 관념주의와 형식주의가 배격된 그 근대적 변화는 1920년에 『동아일보』에 기고된 변영로(卞榮魯)의 「동양화론」에서 처음 강력히 촉구되었다. 신문학 초창기의 신시(新詩) 개척자인 변영로의 그 글은 근대 미술 비평으로도 선구이다.
변영로는 ‘시대 정신’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잠깐 동양화를 보라. 특히 근대의 조선화를. 어디 호발(毫髮)만큼이나 시대 정신이 발현된 것이 있으며, 어디 예술가의 굉원(宏遠)하고 독특한 화의(畫意)가 있으며, 어디 예민한 예술적 양심이 있는가를. 단지 선인(先人)의 복사요 모방이며 낡아빠진 예술적 약속을 묵수(默守)함이다.” 그는 신화법으로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결론적으로 역설하였다.
예리한 그 방향 제시는 1921년 이후의 새로운 전통 회화 움직임에 곧바로 이어졌다. 표현 소재와 명제의 조용한 변혁은, 예컨대 초기 조선미술전에 출품되었던 고희동의 「여름의 시골」, 김은호의 「아가야 저리 가자」, 박승무의 「흐린 달밤」, 이상범의 「모연 暮煙」, 이용우의 「제7작품」, 변관식의 「가을」, 이한복의 「엉겅퀴」, 최우석의 「봄의 창경원」, 노수현의 「산촌귀목 山村歸牧」 등에서 엿볼 수 있다.
1920년대의 그러한 전통 개혁의 의지는 새 세대 개개인의 특출한 재능과 사제 관계 및 체질적 성향에 따라 크게 두 경향을 형성시켰다. 곧 과거와는 다른 수묵 담채파와 선묘 채색파였다.
전통적 수묵 산수의 개혁파로 말할 수 있는 대표적 신예는 이상범·노수현·변관식 등이었다. 이들의 공통적 관심과 특징은 새로운 자각의 향토적 자연애였다.
1923년에 그들은 중국화풍 탈피와 일본화풍 배격의 자주적 조선화 방향을 모색, 연구하자는 모임의 동연사(同硏社)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이용우도 참가하였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20대 초의 청년 화가로서 그들은 각기 자신의 수법을 시도하고 추구하였다.
이상범은 농가와 논밭이 나타내는 평범한 산야를 일관되게 주제 삼아 누구보다도 짙은 향토애의 정경을 표현하였다. 노수현도 자연 풍경과 농촌 생활의 서정을 소재 삼아 필선(筆線)의 깔끔함과 정확한 묘사 태도를 보였다.
변관식은 현실적 자연경일지라도 자신의 화의로 자유롭게 변용시키며 합리적 사실주의에 구애받지 않은 개성적인 면으로 주목을 끌었다.
반면에 이용우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실험 정신을 발휘하였다. 1928년의 조선미술전 출품작이던 바위와 물 그림에 「제7작품」이라는 현대적 명제를 붙인 것은 그의 진취적 사고의 한 단면이었다. 박승무는 수묵 담채파의 또 다른 신예였다. 그는 수려한 산세와 수목과 들길을 확실한 사생풍으로 주제 삼았다.
근대적 표현 사고에 입각한 선묘 채색화는 김은호·최우석·김경원·백윤문에 의하여 추구되었다. 동경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수학한 이한복과 역시 일본에서 공부한 이영일의 채색화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서화미술회 재학 때부터 천부적 묘사력의 초상화와 미인화 및 화조화로 두각을 나타냈던 김은호야말로 근대적 채색화의 대표적 개척자였다. 그는 주변에서 택한 여러 모습의 여인상을 섬세한 필선과 현실적인 채색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화조화에서도 독보적 기량을 발휘하였다. 일본화법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 때도 있었으나 그 뒤로 자신의 우아한 수법을 정립시켰다.
최우석의 초기 채색화의 인물과 풍경은 대체로 김은호와 유사하였다. 그러나 한때 최우석이 민족사의 인물상 제작에 집착하였던 내면은 각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하나도 보존되지는 못하나 그는 조선미술전에 「포은공 圃隱公」·「이충무공 李忠武公」·「고운선생 孤雲先生」·「을지문덕 乙支文德」 등을 출품하여 민족의식을 나타내었다.
이도영의 제자인 김경원은 양화와 일본화에서 영향을 받은 적극적인 채색화로 꽃과 풍경을 즐겨 그렸다. 이한복의 경우도 일본화 기법에 양화의 사실주의를 절충한 채색화로 꽃과 풍경을 다루었다.
이영일은 가장 완연한 일본화 양식으로 꽃과 새와 인물을 그린 작품을 조선미술전에 출품한 존재였다. 백윤문은 그가 사사한 김은호의 수법을 따르며 주목을 받았다.
앞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시기에 전통적 산수화법과 근대적 인물화를 자유롭게 병행시킨 화가로는 지성채(池盛彩)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풍은 뚜렷한 주목을 사지는 못하였다.
그보다도 허백련(許百鍊)으로 대표되는 전통 고수의 제3의 경향이 있었다. 시대의 자각과 고법(古法) 거부 및 창조적 화법 지향의 신흥세가 조석진과 안중식의 제자들에 의하여 주도되던 1920년대에 허백련의 화단 진출은 처음부터 보수적이었다.
신학문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가 정통 남종화법을 연마하게 된 그는 초기 조선미술전에서 그 경향으로 각광을 받은 뒤 광주(光州)에 정착하여 호남화파를 창도하였다. 고전화론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그는 자신의 화면에 전통적 고격성(古格性)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1.4. 1930년대와 일제 말기
1920년대에 시작된 전통 회화의 양상 변화는 1930년대의 잇따른 신진 출현과 더불어 더욱 다채롭고 풍성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앞에서 엿본 세 경향은 한층 폭을 넓히게 되었다. 그 시기의 가장 활발한 계열은 김은호를 정점으로 하는 선묘 채색파였다.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1930년부터 조선미술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고 서화협회전에도 참가한 신진은 한유동·장운봉·김기창·장우성·이유태·조중현(趙重顯)·정완섭(鄭完燮)·정홍거(鄭弘巨)·김화경(金華慶)·배정례(裵貞禮)·허민(許珉)·안동숙(安東淑)·이규옥(李圭鈺)·김학수(金學洙)·김재배(金栽培) 등이었다.
이들은 스승의 작품과 기법주의를 본받은 곱고 정확한 필선과 맑은 설채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포함한 인물화와 꽃·새·동물 기타 생활 주변의 대상을 작품 제재로 삼았다. 이들은 1936년에 동문 모임으로 ‘후소회(後素會)’를 만들고 1943년까지 6회의 회원전을 가지며 주목을 끌었다.
이상범의 제자들도 1941년부터 청전화숙전(靑田畫塾展)을 가졌다. 후소회전과 청전화숙전은 매우 대립적이었다. 채색화와 수묵화로서의 대립적 측면이 뚜렷하였기 때문이다.
이상범의 문하생들은 선생의 수묵화 기법과 향토적 풍정 및 야취(野趣) 표현의 특질을 본받았다. 청전화숙전은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제약되던 1943년까지 3회전을 가졌다. 그동안의 동문 출품자는 배렴·심은택(沈銀澤)·이현옥(李賢玉)·정용희(鄭用姬)·박원수(朴元壽)·정진철(鄭鎭澈) 등이었다.
1937년 이후 김은호와 이상범은 다같이 조선미술전 동양화부 참여 작가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러한 배경과 함께 그들의 문도들도 대외적으로 뚜렷한 두 경향을 나타냈다. 1939년에 광주에서 시작된 허백련 중심의 연진회(鍊眞會)의 움직임은 서울의 시대적 흐름과는 본질적으로 궤도를 달리하였다.
제3의 지방화파로 태동한 연진회의 정신적 방향은 철저한 전통주의의 남종화법 숭상 및 문인화법의 계승이었다. 허백련 외에 연진회 초기의 대표적 존재인 정운면과 허행면(許行葂) 등이 고법주의를 보인 것이나, 그 뒤의 구철우(具哲祐)·이범재(李範載) 등이 문인화 범위에 그치는 내면이 그 한계를 말하여 준다. 한때 허백련을 사사하였으나 기질적으로 자신의 수법을 실현시킨 성재휴(成在烋)는 예외적 이탈이었다.
그런가 하면, 1930년 이전부터 목포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법을 추구한 진도(珍島)의 같은 허씨 문중 출신인 허건(許楗)이 지척인 광주의 허백련에게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허건은 오히려 서울의 새로운 사생풍 향토주의에 감화를 받으며 경쾌한 필치로 자신의 생활주변의 자연경을 소재 삼았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1년 이후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의 막바지 단계에서는 전통 화단뿐 아니라 양화계에서도 몇몇 화가가 일제에 협력하는 그림을 강요당하고 혹은 자의로 그린 수치스러운 내막도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양화
영역닫기영역열기2.1. 서양화법의 수용 배경
합리적 사실주의의 서양화법이 중국의 북경을 통하여 한국에 알려진 시초는 17세기 인조 연간의 천주상(天主像) 유입과 그밖에 서양 풍속을 소개한 그림이 들어 있던 서양 책의 접촉 등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한 현실감을 수반하는 사실적인 서양화법은 당시 북경의 일부 화가들에게 이미 침투되어 재래 수법에 양풍을 가미한 초상화·화조화·동물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새로운 화풍도 여러 경로로 서울에 알려지고, 몇몇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김두량의 「견도(犬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작가 미상의 또 다른 개 그림인 「맹견도 猛犬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에서 그 양풍 화법의 명백한 영향이 엿보인다.
천주교도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순교한 이희영의 한층 뚜렷한 서양화풍의 「견도」(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에 대해서는 1926년에 오세창(吳世昌)이 “서양화법을 모방하여 그린 그림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효시로 여겨진다.”는 발문을 썼다. 이희영은 천주교도로서 예수상을 거듭 그렸음이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다.
앞에 언급한 개 그림들이 비록 서양화법의 영향을 반영하고는 있으나, 그 표현은 어디까지나 종이에 먹과 붓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종래적인 묵화의 테두리에서 양풍 화법을 원용하였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양풍 회화 개척의 초기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화법의 양풍 요소와 무관하지 않게 주목되는 것은 주제의 개 그림 자체가 모두 서양종이라는 점이다.
서양개를 그린 그림 외에 몇몇 초상화에서도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의 양풍 화법이 가미된 예가 있다. 18세기 작품으로 여겨지는 작가 미상의 「이재(李縡)의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그러한 작례(作例)의 하나이다. 초상화에서는 얼굴 묘사에서만 서양화적인 입체감 표현이 시도되었다.
앞서와 같은 서양화 수법에 대한 관심과 수용 태세를 반증하는 주목할 만한 배경 기록의 하나는 1780년에 연행사(燕行使)를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쓴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속의 ‘양화(洋畫)’ 항목이다.
거기에는 박지원이 북경의 천주교당에서 본 양화의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현실적 색채로 그려진 인물화와 천사들의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묘사에서 받은 충격적 감동과 경탄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 시기에 실물 유화도 적지 않게 유입되었던 사실이 기록에 전한다.
박지원 이외에도 북경의 내왕자들에 의하여 양화 지식이 거듭 전파되었다. 1830∼1840년대의 헌종 연간에 간행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양화’ 항목에 이르면 그 놀라운 색상과 생동감이 특이한 약물 사용 때문이라고 해설할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양화 전문화가의 출현은 1910년대에 가서야 비로소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다만 양화가 출현을 자극하고 가능하게 한 직접적 배경으로서의 사건들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1876년 개항 이후의 일본 및 구미 여러 나라와의 교류와 서양 문물의 잇따른 유입 및 접촉으로 가속된 시대 변화 상황에서 있었던 사건들이었다. 1899년에 왔던 네덜란드 계 미국인 화가 보스(Vos,H.)가 서울에 왔다가 고종 황제와 황태자(뒤의 순종)의 등신대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 크게 화제가 되었던 일은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서울에서 정상적인 유화가 직접 그려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보스는 서울에서 한 달쯤 머무르며 서울 풍경과 다른 인물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런가 하면, 1900년에는 프랑스가 협력을 약속했던 관립 공예 학교 설립 추진의 일환으로 파리에서 초빙된 젊은 도예가 레미옹(Re'mion)이 정부 사정의 변화로 그 학교 계획이 무산되는 바람에 1904년까지 서울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동안 제한된 개인적 도예 생활 외에 수채화도 그린 사실이 있었다. 보스와 레미옹이 서울에서 보여준 양화 기법은 그것을 직접 목격한 한국인에게는 신기함과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그때의 목격자의 한 사람이 뒤에 양화 전공을 위하여 일본 유학을 떠난 고희동이었다. 그는 법어학교(法語學校)에 다닐 때에(1903년에 졸업) 어느 날 학교에 레미옹이 놀러 와서 같은 프랑스 사람이던 프랑스어 교사 마르텔(MartelE., 한국명 馬太乙)의 초상을 연필로 스케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명이 뒷날 양화 개척의 결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2.2. 양화가의 탄생-고희동·김관호·나혜석
고희동이 법어학교에서 프랑스 어를 공부한 뒤 궁내부(宮內部) 하급 관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림에 흥미를 가져 명성 높던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한동안 전통 화법을 익혔다.
다시 신문화 개척에 뜻을 두고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미술학교 유학 길에 오른 것은 국망 직전인 1909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1910년과 그 다음 해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평양의 부호집 태생이던 김관호(金觀鎬)와 김찬영(金瓚永)이 뒤따라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1913년에는 나혜석(羅惠錫)이 동경의 여자미술학교에 입학, 양화를 전공하여 여성으로서 선구자가 되었다.
그들은 1910년의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여러 배경과 경로로 일본 유학 길에 올라 신학문 및 신문화 수학을 꾀한 상당수의 청년 학도들 중의 선택된 서양 미술 지망자였다.
새 시대 개척의 동경 유학 서양 미술 학도들은 1915년부터 유학 과정을 마치고 서울과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럼으로써 한국에서도 마침내 양화가의 등장을 보게 되고, 전통 회화와 병존하며 새로운 시대적 회화 문화를 전개하게 된 양화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앞의 양화 개척자들이 동경 유학에서 익힌 유화 기법은 일본도 서양에서 받아들인지 얼마 안 되는 초기 수준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및 인상파적인 밝은 색채 수법이었다.
1915년에 그려진 고희동의 「자화상」(국립현대미술관 소장)과 1916년의 미술 학교 졸업 제작인 김관호의 「해질녘」(동경예술대학 자료관 소장)에서 그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김찬영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미술 학교 유학은 하였으나 그 뒤의 제작 활동이 일체 없었다. 반면 나혜석의 유화는 1920년대 이후의 것들이 상당수 전해진다.
고희동과 김관호는 양화가로서의 활동을 10년 이상 지속하지 못하였다. 신미술 유화 개척 선구자로서의 역사적 명예를 그들이 그렇게 중도에 포기한 배경에는 이질적인 양풍 그림에 대한 일반의 백안시와 몰이해가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정신적 좌절에 있었다.
고희동은 유화의 작품 생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사회가 전통 회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1920년대 중엽부터 전통 회화로 전향해 버렸다.
그리고 김관호는 평양에서 부유한 생활을 즐기며 작품에 열의를 보이지 않다가 같은 무렵에 화필을 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최초의 양화가로 각광을 받던 시기의 작품 실적과 양화계 형성 및 발전에 기여한 공적만으로도 그들의 역사적 위치는 뚜렷하다.
고희동은 동경 유학을 마친 뒤, 그 또한 최초의 조선인 미술 교사로 몇몇 중학교에 출강하는 한편, 그의 집 사랑방에서 그림에 재질이 있는 학생들에게 따로 석고·데생의 목탄화를 지도하여 양화가를 지망하도록 자극하였다. 그때의 고희동 주위의 중학생급 미술 학도들은 1919년에 고려화회라는 이름의 그룹을 만들고,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공간도 얻어 연구소를 삼기도 하였다.
1920년부터 고희동을 길잡이로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간 장발(張勃)·김창섭(金昌燮)·이제창(李濟昶) 등이 그 때의 회원들이었다. 그리고 양화가로서의 고희동 자신의 작품 실적은 1921년과 그 다음 해에 시작된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 초기에 몇 번 출품한 뒤 끝나 버렸다.
김관호는 미술학교 졸업 제작인 「해질녘」이 그해 가을의 일본 문부성미술전(약칭 文展)에서 일약 특선에 오르면서 화려한 출발을 했다. 서울에서는 창덕궁의 이왕실(李王室)을 비롯한 민족 사회에서 큰 칭송을 받으며 작품 의뢰도 받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고향인 평양에서는 그해 연말에 평양 일원을 그린 유화들로 개인전을 가졌다. 이것은 한국인 양화가로서의 첫 개인전 기록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의 그의 작품 내막은 제2회 조선미술전에 출품된 「호수」 정도이다. 그러고는 1925년에 평양에서 김찬영과 소성회(塑星會) 회화연구소를 개설하고, 한때 서양화법을 지도한 사실이 그의 양화가로서의 활동의 전부이다.
고희동과 김관호가 양화 선구자의 위치를 중도에 스스로 저버린 반면, 여성인 나혜석은 1930년대 후반에 가서 비극적으로 파멸할 때까지 유화가로 뚜렷한 작품 업적을 남겼다.
영역닫기영역열기2.3. 양화계의 형성(1920∼1930년대)
1920년대에 접어들자 양화가의 수는 해마다 급속히 증가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의 근대적 미술 전람회가 열리면서 일반 시민이 양화의 세계를 접촉하는 기회도 많아지게 되었다.
양화가 포함된 최초의 단체 전람회는 서화협회전이었다. 1918년에 발족한 서화협회는 새로운 민족 미술 창달을 위한 협회 이념을 ‘신구 서화(新舊書畫)의 발전, 동서 미술의 연구’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서화협회전에는 신·구서화와 함께 처음부터 유화 작품 출품이 있었다. 1921년에 열린 첫 회의 유화 출품자는 고희동과 나혜석이었다. 그 뒤의 서화협회전 유화 참가 내막은 조선미술전과는 달리 확실한 목록이 전하지 않고 도록도 간행되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1921년에 발행된 『서화협회회보』 제1호와 다음 해의 제2호에 게재된 회원 명단 중의 양화가 정회원은 고희동 외에 김관호·김찬영·장발·강진구(姜振九)·이제창 등으로 밝혀져 있다.
한국화 항목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민족적 움직임의 서화협회전이 조선총독부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서화협회전을 압도하는 최대 규모의 총합 미술전이자 자극적 심사 경연장으로 삼은 식민지 정책의 조선미술전을 서둘러 시작하여 대외적 권위를 과시하게 하였다.
미술계 진출의 제도적 관문으로 사회적 권위가 따르게 된 조선미술전은 현실적 명리 추구자들에게 서화협회전을 외면하거나 경시하게 한 일면도 보게 하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렇게 기울어질 수는 없었다.
서화협회전의 정신과 의미를 깊이 새기며 끝까지 지키려고 한 확실한 의식의 미술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조선미술전을 거부하며 서화협회전에만 참가한 뚜렷한 저항자도 있었다. 다음은 1936년에 15회전으로 중단될 때까지의 서화협회전 양화 출품자(1회 이상) 명단이다.
고희동·나혜석·장석표(張錫豹)·심영섭(沈英燮)·이승만(李承萬)·김응진(金應璡)·이제상(李濟商)·권명덕(權明德)·정현웅(鄭玄雄)·이이제창·김주경(金周經)·이해선(李海善)·이병규(李昞圭)·임용련(任用璉)·백남순(白南舜)·길진섭(吉鎭燮)·김중현(金重鉉)·김호룡(金浩龍)·김김창섭·이봉상(李鳳商)·홍우백(洪祐伯)·손일현(孫日鉉)·도상봉(都相鳳)·신홍휴(申鴻休)·송정훈(宋政勳)·임수룡(林水龍)·박광진(朴廣鎭)·공공진형(孔鎭衡)·장발·윤희순(尹喜淳)·김용준(金瑢俊)·이종우(李鍾禹)·이관희(李觀熙)·홍일표(洪逸杓)·이동훈(李東勳)·김종하(金鍾夏)·엄도만(嚴道晩)…….
서화협회전의 양화 내막은 초기에는 겨우 몇 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의 10회 기념전에는 모두 20명이 약 50점을 출품하는 발전을 보였다. 그 뒤 마지막 15회전 때에는 26명이 참가하였다.
조선미술전 서양화부 입선자도 처음에는 몇 명에 지나지 않다가 해마다 증가하여 서화협회전과 대비되었다. 조선미술전에서는 중학생과 독학도로부터 일본의 미술 학교에 유학 중이거나 졸업한 신진 및 소수의 기성 작가가 구별 없이 참가하여 일본인 출품자와 입선·특선을 겨루었다. 그 내면과 서화협회전에서의 양화 증가는 곧 민족 사회에 있어서의 양화 정착과 양화계의 형성 과정을 단적으로 말해 준 것이었다.
1944년까지 지속된 조선미술전 서양화부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여 미술계 진출의 기반을 다졌거나 명성을 구축한 주요 작가를 등장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나혜석·송병돈(宋秉敦)·손일봉(孫一峰)·김중현·이제창·이승만·김종태(金鍾泰)·박명조(朴命祚)·김응진·윤희순·정현웅·홍우백·서동진(徐東辰)·이동훈·이마동(李馬銅)·임응구(林應九)·이인성(李仁星)·이봉상·이철이(李哲伊)·김영창(金永昌)·김원(金源, 본명 源珍)·박영선(朴泳善)·서진달(徐鎭達)·윤중식(尹仲植)·박수근(朴壽根)·김용조(金龍祚)·양달석(梁達錫)·이관희·손응성(孫應星)·박상옥((朴商玉)·심형구(沈亨求)·최영림(崔榮林)·김만형(金晩炯)·김인승(金仁承)·김종하·김흥수(金興洙)·이대원(李大源)·주경(朱慶)·한홍택(韓弘弘澤)·조병덕(趙炳悳)·장이석(張利錫)…….
앞의 명단 중에서도 조선미술전이 요구하였던 아카데믹한 수법의 테두리에서 특출한 재능으로 연특선을 기록하여 1935년 이후 추천 작가가 된 대표적 존재는 김종태·이인성·심형구·김인승이었다. 그리고 말기 조선미술전에는 장욱진(張旭鎭)·권옥연(權玉淵)·박득순(朴得錞)·황유엽(黃瑜燁) 등이 입선을 거듭하기 시작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2.4. 그룹 운동, 새로운 방법의 추구
신미술 운동으로서의 양화 연구 그룹의 효시는 1919년의 고려화회였으나, 공동 작품 발표를 위한 그룹으로는 1923년에 강진구·박영래(朴榮來)·정규익(丁奎益)·나혜석 등이 참가한 고려미술회(高麗美術會)와 그해에 정규익이 또 하나 조직하였던 서울화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과 인천에서 각각 한 번씩의 그룹전을 가졌을 뿐 작품전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1927년에는 김창섭·안석주(安碩柱)·이승만·임학선(林學善) 등이 ‘조선 예술의 창조’라는 이념을 내건 창광회(蒼光會)를 만들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 없이 의욕만 보이다 말았다.
그러다가 한결 본격적인 성격의 녹향회(綠鄕會)가 1928년 서울에서 발족하여 작품전을 가졌다. 창립 회원은 심영섭·장석표·박광진·김주경이었다. 그러나 이 그룹도 1931년에 2회전을 가진 뒤 중단되었다. 다만 2회전 때에 오지호(吳之湖) 등 새 회원이 가담하며 ‘조선 양화의 발전 촉진과 그 대중화’를 표방하였다.
1930년부터 수년 계속한 동경미술학교 동문들의 동미전(東美展)은 전통 회화와 도안·공예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양화부의 비중이 컸던 또 하나의 계몽적 신미술 운동이었다. 그때의 양화 출품자는 이종우·이제창·이병규·도상봉·황술조·이해선·김용준·이마동·홍득순(洪得順)·김응진 등이었다.
1934년에는 이종우 등이 새 양화 단체로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하고 회원 작품전을 가졌다. 그런데 그 회칭이 총독부 당국에 의하여 일본 배격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경고를 받고 그 회칭 사용의 철회를 강요당하여 모임 자체가 해체된 상태였다.
1937년에 가서야 회칭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고 새 출발의 작품전을 가졌다. 그때의 출품 회원은 이종우·장발·공진형·이병규·황술조·송병돈·김용준·이마동·길진섭·홍득순 등 동경미술학교 출신들과 임용련·백남순·신홍휴·구본웅(具本雄) 등이었다.
그들의 작가적 성향이 당시의 불가피한 여건으로 거의가 일본 양화의 수법을 따르던 보편적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범주였다. 그러나 파리 중심의 새로운 창의적 순수주의 사조에 자극과 감화를 받아 야수파적인 표현과 그 밖의 반전통적 방법을 대담하게 시도하던 구본웅이 포함된 것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목시회 회원 중의 이종우·장발·임용련·백남순 등은 구미에 직접 유학한 화가였다. 그들은 일본 양화와의 동질성에서 벗어나 시야를 구미로 넓힐 수 있도록 전체 양화계에 유형무형으로 작용한 존재였다.
구미에서 체득한 여러 형태의 참신한 표현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린 그들의 작품은 시기적으로 아주 요긴한 자극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 한국 양화 발전에 획기적 공헌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 원인은 그들 자신의 적극적 가치 투쟁이 미흡하였던 점과 사회 배경에도 있었다. 양화에 대한 일반 사회의 반응이나 관심은 전통 회화에 비교가 안되게 냉담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목시회전도 1938년에 겨우 2회전을 가진 뒤 좌절하였다.
1920년대에 구미로 유학을 떠났던 선택된 소수의 화가들도 그쪽의 혁신적 추구였던 야수파·입체파·표현파·초현실파·추상파 등에는 별로 호응하지 못하고 대체로 종래의 방법에 머물렀다. 그리고 귀국 후에도 이렇다 할 새바람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의 온건한 예술 태도와 관련이 있다.
반면, 1930년대 이후 진취적 예술 의식의 몇몇 새 세대가 일본에서 공부하며 그곳 양화계 일각에 파급되던 서구의 충격적 새 미술 사조와 전위적 조형 정신에 적극 호응한 대담한 작품 활동을 보인 것은 하나의 시대적 필연이었다.
그 대표적 기수는 표현파·야수파 계열의 구본웅 외에 순수 조형주의와 추상파 계열의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시도한 순수한 작품들은 구본웅을 제외하고는 1940년을 전후하여 동경의 반관전파(反官展派) 전람회에서 주로 발표되어 서울 화단이나 민족 사회와는 직접적 관련이 거의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1945년의 광복과 더불어 새로이 틀이 잡히는 양화계에 새로운 창조적 활력소로 연결되었다. 한편, 1930년대 후반에는 오지호와 김주경이 밝고 신선한 색채 구사의 인상주의를 지향한 두드러진 작품 활동이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현대의 회화
한국의 현대 미술은 대체로 두 가지 관점에서 그 기점이 설정되고 있다. 1945년 광복으로부터 그 기점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그 하나요, 1957년 이른바 운동으로서의 현대 미술의 시작을 그 기점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1945년 기점설은 정치적·사회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에서도 독립을 찾았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의 장으로서 그 기점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미술 분야에서 과연 1945년을 분계로 해서 이전과 이후가 조형 전반에 걸쳐 뚜렷한 변혁과 발전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극히 부정적일 것이다.
일본의 한 변방 또는 지방 미술로서 유지되었던 한국 미술이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에는 좀더 오랜 시일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부정적 태도를 지탱해 준다. 그러한 점에서 1945년 기점설은 정치적 독립에 수반된 시대적 구획이라는 편이 더욱 부담이 없다.
이에 비한다면 1957년설은 보다 뚜렷한 변혁의 현상을 만날 수 있다. 그 가장 특징적인 현상의 하나는 조형 이념의 결속과 전개에 따른 보다 적극적인 미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945년 광복 이후에서 1950년 후반에 이르기까지 미술계는 조형 이념 외적인 사태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광복에서부터 6·25 동란까지의 좌우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 분쟁 그리고 동란 이후 1961년 5·16 군사 정변에 이르는 시기에 펼쳐졌던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의 분파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1957년을 기점으로 하는 조형 이념의 전개는 오랫동안의 방황에서 그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온 미술 본연의 자각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미술은 어떤 타율적인 것에 속박되지 않는 그 자체의 자율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 무렵에 와서야 그 정당한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1945년에서 1957년까지를 준비기로, 그리고 1957년 이후를 전개기로 보고 있으며, 주로 1957년 이후의 활동을 한국 현대 회화의 참다운 전개로 간주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1. 6·25 동란까지
광복 이후 미술계의 가장 커다란 이슈로 등장한 것은 일제 잔재의 극복과 민족 미술의 건설이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하여 의식·무의식적으로 침윤된 일본적 감성은 서양식 조형 사고의 영역뿐 아니라 전통적인 회화 양식 가운데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났다.
서양의 조형 방법을 일본을 통하여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자연 일본적인 해석에 의한 서양의 조형 방법이라는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되었다.
전통적인 회화 분야에서도 저들은 새로운 감각에 의한 양식적 해석을 일찍이 서둘렀으며, 그것이 감각적으로 뒤떨어진 한국의 미술 속에 침윤되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사실 이 같은 일본적 감성을 하루아침에 벗어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의욕에 비하여 현실이 이를 따라가 주지 않을 때 공소한 관념의 만연을 일으킬 뿐이었다.
또 하나 광복 직후의 미술계 상황은 그것이 1950년대 중반, 즉 동란 이후 수복기까지도 지속되고 있지만, 국제적인 유대 관계를 지니지 못한 일종의 닫힌 고립 지대로서 머물러 있었다.
일본과의 단절은 그나마 지금까지의 정보마저 완전히 두절되었음을 의미하며, 국제 미술의 대열에서 벗어난 것을 말하여 준다. 과거의 반복만이 이 시대 미술의 전체적 양상처럼 보인다.
그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로 지적할 만한 것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창설이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미술가들의 공동의 발표장을 마련해 줄 뿐 아니라 좌우 대립의 이데올로기적 분쟁에서 벗어나 미술가들을 다시 그들의 작업장으로 이끌어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비전을 가진 전시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지 못한 채 한갓 조선미술전람회의 연장에 안주해 버렸다는 점이 지적된다.
새로운 시대에 상응되는 이념적 체제를 이루지 못한 채 과거 체제의 답습에 머물렀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시대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일제의 교육을 통하여 성장하고 일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지속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성장하였다는 사실에서 그 요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는 어떤 새로운 것의 모델보다는 과거의 모델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상정이다. 따라서 광복 이후 한국 회화의 전반적 수준은 일본의 관전을 지향하는 관념적 인상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입체파 이후의 새로운 미학이 일부에서는 없지 않았으나 이들의 힘은 너무 미약한 편이었다. 조형 이념의 전개로서의 운동체로보다는 한 개인의 취향으로밖에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국제적인 시야에서 볼 때 1945년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한 시기는 뜨거운 추상 미술이 풍미하기 시작한 때이다. 또 그것은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국제적인 현상으로 만연되었다. 이 급진적인 밖에서의 변모에 비하여 안에서의 고여 있는 상황은 이 시대 한국 미술의 고립상을 흥미롭게 보여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6·25 동란 이후
6·25 동란은 미술계의 구조에도 많은 변모를 가져오게 하였다. 동란을 통하여 많은 미술가들이 실종 또는 월북하였으며, 이에 못지 않게 많은 북쪽의 미술가들이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피난지 부산은 서울에서 내려온 미술가들과 새롭게 남한으로 넘어온 북쪽의 미술가들이 혼류되어 새로운 정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반공과 구국이라는 이념 아래 전 미술계가 결속되었던 것은 광복 직후 좌우 분쟁 이후의 대동단결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동단결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미술가들을 결속시켰던 반공과 구국의 구호는 점차 긴박성을 잃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변하면서, 한동안 내부로 잠재되었던 복합적인 미술계 이해 관계가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국전분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한미술협회로 결속된 미술계는 다시 한국미술가협회로 이분되었으며, 이 두 단체를 통한 갈등과 반목은 1960년 정부 정책에 의한 단체 통합이 이루어지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이 시기의 주요 전시 활동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창설(1949년)과 대한미술협회전, 한국미술가협회전 등의 대규모 단체전 그리고 각종 행사의 기념전이 있었으며, 피난시절 몇몇 그룹전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미술인 단결과 문화 진흥을 표방한 전국 규모의 전시 체제로서 출발하였다. 고희동·이종우·도상봉·장발·이인성 등 중진 미술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광복 후 한동안의 미술계 혼란을 수습하는 구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동란으로 인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1회만을 치르고 일시 중단되었다. 1953년 수복 후 2회전이 열리기까지는 대체로 피난지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한 몇몇 그룹 활동과 행사 기념전이 미술계 활동의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이었다.
후반기동인(後半期同人-김환기·韓默·文信·李俊)·토벽동인(土壁同人-徐成贊·金昤敎·金耕·金潤玟··林湖)·기조동인(其潮同人-孫應星·한묵·朴古石·李仲燮·李鳳商)들의 전시와 1947년에 출범한 신사실파동인(新寫實派同人-김환기·유영국·이규상·장욱진·白榮洙·이중섭)의 전시 등이 피난 시절의 주요 미술 활동으로 기록된다.
개인으로는 이용우·백영수·배운성·남관(南寬)·천경자(千鏡子)·박고석·김환기·김흥수·변관식·박영선·윤식·이중섭전 등이 광복 이후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의 주요 개인전이다.
1954년에서부터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미술가들의 해외 진출도 특징적인 현상으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폐쇄되었던 미술계가 밖으로 향하여 열리는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하여 국제적인 미술 동향의 직접적인 체험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남관·김흥수·박영선·김환기·김종하·장두건(張斗建)·함대정(咸大正)·손동진(孫東鎭)·이세득(李世得)·권옥연(權玉淵) 등이 차례로 파리로 떠났다.
이들은 대개 2, 3년의 체재를 끝내고 돌아왔다. 또한 한결같이 새로운 조형 체험을 쌓고 돌아왔다. 이 같은 기성 작가들의 잇따른 해외 체류와 새로운 조형에의 폭넓은 체험은 1957년 이후의 현대 미술 운동의 자양이 될 수 있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1957년 이후
1957년을 현대 미술의 기점으로 설정하는 가장 구체적인 단서는 이해에 발족된 이념적 그룹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같은 해에 네 개의 단체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그것도 각기 뚜렷한 명분과 색채를 띠고 나타났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창작미술가협회·모던아트협회·신조형파·현대미술가협회가 1957년에 출범한 단체들이었다.
창작미술가협회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발판으로 활약하고 있던 중견 작가들이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추구하려는 모임이었다. 모던아트협회와 신조형파는 입체파 이후의 미학에 바탕을 둔 온건한 혁신을 꾀한 그룹이었다.
이에 비하면 현대미술가협회는 20대의 젊은 세대들에 의하여 결속되고 추진되었으며, 과감한 실험적 에너지의 분출을 보여 주었다. 이들에 의하여 전후에 새로운 추상미술이 수용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뜨거운 반응 속에서 화단을 풍미하게 되었다.
새로운 이념적 결속이 추진되어 가던 이 시기에 시대의 변혁을 더욱 구체적으로 다져 주었던 것이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이었다. 앞서의 그룹전들이 소단위라면 이 초대전은 현대 작가 전체를 대상으로 그때그때 초대 작가의 범위를 정하는 대단위 종합전이었다.
당시 보수적 미학의 아성을 쌓고 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도전하는 강력한 재야적(在野的)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출범하고 있는 소단위 그룹들에 의하여 현대 미술 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면, 1959년을 고비로 현대 미술 운동은 그 성숙기에 접어들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초대전은 국제적으로 보편화하고 있던 추상 표현주의(액션 페인팅)의 급격한 만연을 주도하였던 발판으로서도 주요한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 초대전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미술계 구조의 변혁과 다양한 경향의 대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색되어 갔다.
추상 표현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미술 운동의 열기는 1960년대 중반에 오면서 식어가기 시작하여 1960년대 후반에 와서 새로운 모색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67년에 기획된 청년작가연립전은 이 새로운 모색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연립전이 모체가 되어 1969년에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가 결성되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의 현대미술가협회와 현대작가초대전이 담당하였던 전위적 활동의 구심체 구실을 떠맡았다.
A.G.전은 ‘전위 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한다.’는 열의로 몇 차례에 걸친 테마전과 이념지의 발간을 시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구·서울·광주·부산·춘천·청주·전주 등지에서 현대 미술제가 열려 지금까지 서울 중심의 현대 미술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는 현상을 보였다.
1970년대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현상은 현대 작가들의 해외로의 적극적인 진출이다. 국제전에의 참여는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와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로 출발되어 카뉴국제회화제·인도트리엔날레·동경비엔날레·동경판화비엔날레 등으로 늘어났다. 이밖에 개별적으로 각종 국제 규모의 전시에 출품하는 작가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한국 현대 미술의 기획적인 소개는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있었다. 특히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진 것이 1970년대의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이다. 1977년 동경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斷面展)’은 한국 현대 미술의 신선한 이미지를 일본에 심어 준 계기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 현대의 한국화·양화
회화는 전통적 양식인 한국화와 근대 이후 수용된 양화로 크게 분류된다. 양화는 다시 경향별로 자연주의적 사실(寫實)과 표현주의적인 구상(具象)에 대비되는 추상과 비구상으로 나누어진다. 1957년 이후 현대 회화를 이상과 같은 양식과 경향에 따라 분류해 본다.
영역닫기영역열기4.1.한국화
전통적 회화 양식인 한국화는 광복 직후에 이른바 일본적 색채의 배제라는 진통을 겪는다. 그리고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통적 남종 산수와 문인화적 발상의 수묵 담채가 크게 부상되었다.
일본화적 색채의 배제와 아울러 민족 미술의 건설이라는 구호는 자연 전통에의 복귀와 전통적·양식적 특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하려는 두 개의 방향을 낳았다.
1957년을 전후로 한 미술계 전반의 의식 혁명은 한국화 영역에도 깊은 자극을 주었다. 그 결과 양화의 추상 표현주의와 맥락되는 대담한 표현 실험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견 화가들로 구성, 1957년에 발족된 백양회(白陽會)는 소재 관념에서의 탈피와 서구적 조형체험의 원용이라는 점에서 전통적 양식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입장을 보여 주었다.
젊은 세대들로 구성, 1960년대에 출범하고 있는 묵림회(墨林會)는 더욱 적극적인 입장에서 전통적 매재의 실험을 다양화하였다. 특히 이들의 실험은 동시대 추상 표현주의와 정신적인 유대를 형성하면서 한국화를 오랜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백양회는 국내전뿐 아니라 대만·일본 등지에서 해외전을 가져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영역과 그 가능성을 진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견 작가들로 구성된 백양회는 한국화가 처하여 있는 오랜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감각의 조형성을 추구하려는 지속적 관심을 보여 주었다. 특히 김기창·박내현(朴崍賢) 부부의 대담한 소재 해석과 표현의 추이는 새 세대의 한국 화가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양화 분야와 같이 현대작가초대전에서의 한국화 분야는 실험적인 경향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실험 정신은 자연히 한국화와 양화라는 장르 개념을 뛰어넘는 회화로서의 자각 현상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굳이 한국화나 양화라는 개념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회화라는 동일한 개념 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자는 것이 한국화나 양화의 범주를 벗어난 의식의 공통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지 않는 수묵의 흘림이나 발묵(潑墨)주 06)의 기법적 현상에서 일어나는 표현의 진폭은 액션 페인팅의 정신과 상통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화나 양화의 장르적 개념의 극복은 더욱 확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화에서의 추상 내지 비구상이라는 말은 이 무렵부터 등장하였다. 그것이 그대로 화단의 현실에 적용되어 이른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동양화 비구상부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실험적 추세와 대응되는 과거 형식에의 안주 역시 꾸준한 명맥을 지탱하였다. 주로 중진급 작가들이 전통적인 남화산수를 지속하였다.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종 산수의 분포도 한국 화단의 일각을 형성해 주었다.
한국 화단의 중진급 작가들은 안중식과 조석진의 서화미술회 문하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전통적 양식에 바탕을 두면서도 각기 개성적인 세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이상범과 변관식은 사경(寫景)을 통하여 한국 전형의 산수미를 완성시킨 점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노수현·허백련·박승무 등은 고답적인 관념미를 통하여 한국화의 정신적인 일면을 고수한 예로 남아 있다.
김은호는 홀로 공교(工巧)한 필법의 세계를 추구하여 한국의 또 다른 일면을 대표해 주었다. 이밖에 수묵 산수 계열로는 배렴과 허건이 역시 독자적인 세계를 열었다.
전통적인 소재와 방법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비단 1957년 이후의 현상만은 아니다. 이미 광복 직후부터 이러한 움직임은 잠재되어 왔다. 그 하나의 커다란 맥으로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장우성을 중심으로 한 문인화적 발상의 수묵 계열을 들 수 있다. 문인화의 고답적인 정신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소재의 해석과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는 현대적 감각을 추구하였다.
이 계열의 작가로는 박노수(朴魯壽)·서세옥(徐世鈺)·장운상(張雲祥)·민경갑(閔庚甲)·전영화(全榮華)·신영상(辛永常)·송영방(宋榮邦)·이종상(李鍾祥) 등을 꼽을 수 있다.
1960년에 창립된 묵림회는 문인화적 발상의 수묵 계열이 중심이 된 단체이다. 이들에 의하여 수묵의 다양한 표현적 실험이 이루어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세옥·박세원(朴世元)·장운상·장선백·민경갑·전영화·이영찬·남궁훈(南宮勳) 등으로 출발한 묵림회는 1965년까지 존속되다가 해체되었다. 이를 모체로 다시 형성된 것이 한국화회였다.
출발에 있어서 여러 경향의 작가들이 혼성되었던 청토회(靑土會, 1963년 발족)는 점차 남종 산수 계통의 작가들로 재정비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 홍익대학교 동문들의 모임인 신수회(新樹會)가 1963년에 창립전을 열었다. 전통적인 남종 산수나 수묵 실험의 계열에 다같이 동떨어진 채색 위주의 작품을 시도하였던 작가로 천경자와 박생광(朴生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보여 준 채색을 통한 실험적 추세 역시 한국화의 오랜 소재 관념과 재료 해석의 안이성에서 탈피하는 현대적 방법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4.2. 양화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양화단의 분포를 살펴보면 전전(戰前) 세대와 새롭게 등장한 광복후 세대가 혼성되면서 점차 전후 세대가 부상해 가는 일종의 세대 교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현대미술가협회와 현대작가초대전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현대 미술 운동의 추진력은 전후 세대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들의 수도 전전 세대를 앞지르는 현상을 보였다. 이 같은 현상은 자연 지금까지 양화계의 단일한 구조에 변혁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념의 분파 작용과 더불어 더욱 풍부한 편성을 독려한 것이 되었다.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당시 양화계를 살펴보면 자연주의적인 사실 계열과 표현주의적인 사실 계열이 전전 세대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입체파 이후의 이른바 새로운 감각의 근대적 조형은 수적으로 극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47년에 창립된 신사실파와 1957년에 창립된 모던아트협회가 입체파 이후의 조형 체험을 지닌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그밖에는 극히 몇몇 작가들이 이 같은 조형 체험을 바탕으로 하였을 뿐이다.
1957년에 창립된 창작미술협회는 계보로 보아서는 표현주의적인 사실 계열에 속하였다. 그러면서도 소재에의 정감적 해석과 새로운 감각의 확대로 점차 환원적인 상형의 세계로 진전되어 가는 추세를 보였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환원적인 방법을 통하여 대상성에서 벗어나 비구상의 세계로 탈바꿈하였다.
유경채(柳景埰)·고화흠(高和欽)·이봉상·이준(李俊) 등이 비구상의 세계로 전환하였으다. 박항섭(朴恒燮)·최영림·박창돈(朴昌敦)·홍종명(洪鍾鳴)·황유엽 등은 비록 대상성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각적 진실보다는 표현적 추세가 강한 경향을 지속해 나갔다. 이들은 자연주의적 사실 계열과 다른 구상 개념을 진척시켜 나갔다. 1968년 구상전(具象展)은 이들에 의하여 결성될 수 있었다.
모던아트협회는 자연주의 계열에서 벗어나 근대적 조형 방법을 모색해 온 작가들의 모임체였다. 유영국·한묵·이규상·황염수·박고석 등으로 출발, 점차로 정규·김경·문신·정점식·천경자 등이 참여하여 196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가운데 유영국·이규상은 김환기와 더불어 전전부터 순수 추상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김환기·유영국의 작품에는 일시 대상을 굴절시킨 반추상적 경향도 보여 주었다.
모던아트협회·현대미술가협회 등과 같은 시기에 출발한 신조형파는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 정신을 구현하자는 종합적인 조형 운동을 지향하였다. 화가뿐 아니라 건축가·실내 디자이너 등이 참여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단체의 색채를 말하여 준다.
현대미술가협회는 전후 세대들에 의하여 구성된 단체였다. 그 출발에서는 김영환(金永煥)·이철(李哲)·김종휘(金鍾輝)·장성순(張成旬)·김청관(金靑鱹)·문우식(文友植)·김창렬(金昌烈)·하인두(河麟斗)가 참여하였다. 뒤에 일부가 탈퇴하고 새로 김서봉(金瑞鳳)·조동훈(趙東薰)·김충선(金忠善)·나병재(羅丙宰)·조용민(趙鏞鋌)·이수헌(李樹軒)·이양로(李亮魯)·전상수(田相秀)··박서보(朴栖甫) 등이 가담하였다.
1961년 해체되기까지 일년에 거의 두 차례씩의 전시를 통하여 새 시대의 주도적인 발판을 구축해 나갔다. 이 회원들의 대부분은 또 현대작가초대전에서의 중심적인 작가들이였다. 그리고 사실상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걸친 한 시기의 현대 미술을 대표해 주고 있다.
현대미술가협회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추상 표현주의를 시도하였던 작가들로는 한봉덕(韓奉德)·김훈(金薰)·이세득(李世得)·김병기(金秉騏)·강용운(姜龍雲)·장석수(張石水)·양수아(梁秀雅)·김영주(金永周) 등 전전 세대와 이수재(李壽在)·김상대(金相大)·이명의(李明儀)·이일녕(李逸寧)·정창섭(丁昌燮) 등 전후 세대의 작가들을 꼽을 수 있다.
1958년경부터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던 추상 표현주의는 1960년에 접어들면서 어느덧 현대 미술의 중심적 경향으로서 풍미하였다. 이 뜨거운 파상 효과는 일부 자연주의 계열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일시나마 추상적 경향으로 경도되는 현상을 빚기도 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상 미술이 수용된 것도 이 같은 시대적 추세를 반영한 일례였다.
이 급격한 추상 미술의 파급은 급기야 자연주의 계열의 작가들에게 재정비와 결속을 가져오게 하였다. 1958년 목우회(木友會)의 창립이 그것이다. 이 단체는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 위원급의 원로 및 중진 작가들이 중심이 된 자연주의적 사실 계열의 유일한 집결체였다.
창립 당시의 회원은 이종우·도상봉·이병규·박득순·이마동·박상옥·손응성·이동훈·최덕휴·심형구·김종하·김형구(金亨球)·김인승(金仁承)·박광진(朴洸眞)·박희만(朴喜滿)·나희균(羅喜均) 등이었다.
나중에 여기에 가담하였거나 아니면 독자적으로 활동한 작가 가운데 자연주의적 사실과 표현주의적 사실 계열의 작가로는 임직순(任直淳)·이종무(李種武)·윤중식·김원·오지호·김창락(金昌洛)·김숙진(金叔鎭) 등을 들 수 있다.
자연주의적 바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시각과 화풍을 전개하였던 작가로는 1956년에 작고한 이중섭과 박수근·장욱진 등이 특이한 세계를 펼쳐 보여 주었다.
자연주의 계열과 전후 추상 계열의 예각적인 대립 양상은 1960년 전후의 구상·추상 논쟁을 야기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제적인 추세와 같이 역시 전후 추상의 세력화가 미술계의 중심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0년에 창립된 1960년미술협회는 4·19를 겪은 가장 젊은 세대로 출발하였으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전후의 뜨거운 추상이었다. 1961년에 현대미술가협회와 연합전을 가지고 다음 해 악뛰엘이라는 새로운 단체로 발전적 해체를 단행한 것도 이념의 동질에서 가능하였던 현상이었다. 정상화(鄭相和)·하인두·전상수·김종학·박서보·김봉태(金鳳台)·김창렬·장성순·조용익(趙容翊)·윤명로(尹明老) 등이 악뛰엘 창립에 가담하였다.
추상 표현주의의 포화 상태는 악뛰엘로 인한 젊은 세대의 재결속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탈출구를 모색하지 못하였다. 추상 표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즉물적 표현, 네오다다적 경향, 해프닝과 행위 예술, 기하학적·시각적 추상 등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경향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A.G. 그룹으로 이어져 1970년대 초반에까지 지속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다시 개념 예술, 미니멀리즘이 표면에 부상되었다. 그리고 추상 표현주의의 시대와는 달리 다양한 경향과 색채가 혼합을 이루는 양상을 보였다.
양화계는 지금 극사실주의의 대두와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자각, 창작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등 국제적인 추세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수용의 태세에서 벗어나 한국 독자의 조형 방법의 모색이 미술계 일각에서 서둘러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화가 도입된 이래 70년이 경과하고 있다는, 말하자면 수용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물결 모양의 선
주02
구름이 날아가는 모양의 무늬
주03
여러 집채
주04
李昰應
주05
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
주06
글씨나 그림에서 먹물이 번져 퍼지게 함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안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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