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
고대사
지명/지명
서기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년(경순왕 9)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조.
이칭
이칭
사로(斯盧), 사라(斯羅), 서나(徐那),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伐), 서라(徐羅),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라는 서기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년(경순왕 9)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조이다. 경주평야에 자리하던 여섯 씨족이 연합한 성읍국가로 건국했다. 가야를 합병하고 중국과의 교통로인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강성해졌다. 7세기 중엽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하대에 들어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반복되고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왕권이 약해져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존립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후삼국으로 나뉘었다가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스스로 항복함으로써 신라왕조는 멸망했다.

정의
서기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년(경순왕 9)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조.
개설

신라는 고대 삼국의 하나로서, 7세기 중엽에 백제 · 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698년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이른바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나,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시대구분을 참작해 여섯 시기로 세분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이〔표〕중 제1기에서 제3기까지를 상대(上代), 제4기를 중대(中代), 제5기 이후를 하대(下代)로 구분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제1기와 제2기를 상고(上古), 제3기를 중고(中古), 제4기 이후를 하고(下古)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주로 왕통의 변화에 따른 독자적인 시대구분이지만, 불교의 공인 혹은 율령의 제정 같은 중요한 사건도 참작한 것이므로 신라 역사의 발전대세를 가지고 시대구분할 때도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명칭 유래

국호 신라는 사로(斯盧) · 사라(斯羅) · 서나(徐那) · 서나벌(徐那伐) · 서야(徐耶) · 서야벌(徐耶伐) · 서라(徐羅) · 서라벌(徐羅伐) · 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혹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수풀의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 한자의 아름다운 뜻을 가장 많이 가진 신라로 확정하였다고 하지만 414년에 건립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 이미 신라의 사용 예가 보인다. 『삼국사기』찬자에 의하면, 신라의 ‘신(新)’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羅)’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했다고 하는데, 이는 후세의 유교적인 해석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자연 환경

신라의 모태(母胎)가 된 사로국은 백운산(울산광역시 두서면 내와리)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주시를 남북으로 관통한 뒤 영일만을 통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형산강 지구대(地溝帶)에 전개된 경주평야를 무대로 형성되었다. 이곳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가장 넓은 농업지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지대가 낮아서 예로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경주는 형산강 지구대의 중심에 위치한 형산강 평야의 핵심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사로국의 국읍(國邑)에 해당하는 경주분지는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 하천의 범람에 의해서 퇴적된 선상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가지 서쪽을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 외에 북천(일명 알천)과 남천(일명 문천)이 경주분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북천은 토함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명활산과 금학산을 통과한 뒤 직선방향인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고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시가지 북쪽을 흐르는 남천과 합류하여 주변 여러 곳에 늪지를 발생시켰다. 그런 까닭에 경주분지 내에서는 북천의 범람을 피할 수 있는 지역에 일차적으로 거주공간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의 경주분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의 성과를 갖고 본다면 황성동유적에서 삼한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서기전 1세기 중반경의 고식(古式) 와질토기가 발견된다거나 대단위 취락이 형성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인왕동고분군 하층 유적에서 볼 수 있듯 서기 3세기 전반경부터는 왕궁이 있었던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한 반경 약 1㎞ 이내의 지역으로 확산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어쩌면 황성동 일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공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월성 주변으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남천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는 이 황성동지역과 월성지역 사이는 뒤에 신라 정부에 의해서 개발되기까지 오랜 동안 습지상태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한편 경주평야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중국의 경우처럼 수도 외곽에 별도의 나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만큼 천연적인 성곽을 이루고 있었다. 사로국을 구성한 여섯 촌의 시조전설을 보면 시조들이 하늘에서 경주 주위의 표암봉 · 형산 · 이산(일명 개비산) · 화산 · 명활산 · 금강산에 각기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경주의 지리적 조건과 결부시켜 윤색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경주의 성곽도시적 성격은 초창기 사로국의 발전과 방어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형산강과 그 지류들을 끼고 주위의 산으로 둘러싸인 이 국읍은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비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내부적인 통합을 꾀하는 데 있어서도 유리한 점이 많았다. 국가의 지배체제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던 진한 12국 시대는 국가들 사이에 연맹과 전투가 끊임없이 되풀이 된 시대였는데, 사로국이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주위의 소국들을 모두 병합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는 바로 이 지리적인 이점(利点)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인의 보수성이랄까 지역적인 폐쇄성이랄까를 양성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신라는 진한의 동료국가들을 모두 병합한 뒤 소백산맥 동남부의 영남지방을 기반으로 하여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소백산맥은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에 대해 영남지방을 보호하는 천연적 장벽의 구실을 톡톡히 했으나, 한편 교통상으로는 그 만큼 큰 장애물이 되어 심한 격절성(隔絶性)을 띠었다. 이를테면 외부의 주민들이 북쪽으로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일단 정착하게 되면 마치 울타리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다시는 여기서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의 도별(道別) 성씨 분포상황을 보면 경상도 성씨는 다른 도에 비하여 토성(土姓)과 내성(來姓) · 속성(續姓)의 성관(姓貫) 수효가 가장 많은 반면에 망성(亡姓)은 가장 적다. 이는 이 지방 호구의 다른 도(道)로의 유출이 가장 적은 대신에 반대로 다른 도로부터 토성의 유입은 가장 많았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사로국 건국기의 형편을 추측할 수가 있다. 고조선의 멸망을 역사적 계기로 하여 광범위하게 진행된 주민 이동의 물결 속에서 뒤에 진한변한을 형성하게 된 이주민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중층적으로 잡거(雜居)하는 가운데 이 지방의 독특한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교적 빠른 기간 내에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고, 더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한 토착적 성격마저 띠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3백년 이상에 걸친 가혹한 삼국 항쟁기를 거쳐 7세기 중 · 후반 한반도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하여 그 지배 영역은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이처럼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핵심부, 소백산맥 동남부를 본부로 생각하는 삼국 항쟁기의 편협한 지역 구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이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다스림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수도 경주를 끝내 고수하고, 더욱이 경주 6부 사람에 한하여 관직을 부여한 것은 그 뚜렷한 예증이다. 하기야 신라조정은 경주의 편재성(偏在性)을 보완할 목적에서 각지에 다섯 개의 소경(小京)을 두었으나, 김해에 설치한 금관경(金官京)을 제외하면 모두가 경주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소백산맥 바로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결국 신라가 한반도에 군림하게 된 뒤에도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방어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요컨대 경주분지와 영남지역이 제공한 지리적 이점은 신라의 성장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한편 그것은 동시에 신라 지배층의 폐쇄적인 영역의식을 낳게 되어 한반도를 대부분 통일한 뒤에는 오히려 새로운 발전을 제약 내지 저해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성립과 발전

건국과 초기의 발전

제1기는 신라의 건국으로부터 연맹왕국(聯盟王國)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신라도 다른 초기 국가와 마찬가지로 최초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출발했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서기전 57년이라 했으나, 성읍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빨랐을 개연성이 크다. 그것은 신라 역시 금속문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차차 부족장의 권한이 강화된 결과 성읍국가가 출현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경주지역으로의 금속문화의 유입은 서기전 1세기보다 몇 세기 일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속기의 사용은 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농업생산력의 일정한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강한 자극이 없이는 국가 수준의 정치체를 성취할 수 없다. 이처럼 생각할 때 서기전 2세기 말에 발생한 고조선의 멸망과 이에 따른 주민 이동, 특히 남한지역에 삼한사회가 성립되는 세력 재편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성읍국가로서의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급량(及梁) · 사량(沙梁) · 본피(本彼) · 모량(牟梁, 혹은 漸梁) · 한기(漢岐, 혹은 漢祉) · 습비(習比) 등 여섯 씨족의 후예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들은 처음 평야 주위의 산이나 구릉지대에서 취락생활을 하다가, 점차 평야지대로 생활권을 옮기는 과정에서 국가 형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된 것이 급량 출신인 혁거세(赫居世, 일명 弗矩內)였으며, 그는 사량 출신의 알영(閼英)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처음 신라는 여섯 씨족 가운데 급량과 사량의 두 씨족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씨족은 후에 성씨제가 도입되었을 때 각기 박씨 · 김씨를 칭하였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쪽으로부터 진출해온 탈해(脫解) 영도하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석씨(昔氏)라 칭하고 있다. 다만 탈해 집단은 부족적인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곧 종래의 지배층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2세기 후반에 탈해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새로운 세력집단이 다시 경주로 진출해 신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 즈음에 신라는 연합이나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진한(辰韓)의 여러 성읍국가를 망라해 보다 확대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종전의 점(點)에 불과하던 성읍국가로부터 일정한 영역 · 영토를 가진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주변국가들에 대한 지배 · 복속관계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신라에 복속한 국가들 중에는 수도 금성(金城)을 침입하거나 또한 토착세력의 거수(渠帥)들 가운데는 중국 군현과 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상태는 3세기말경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 초에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있던 낙랑군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타멸되고, 곧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대세력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날카롭게 대립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낙동강 동쪽사회도 이에 큰 자극을 받아 신라를 맹주(盟主)로 한 국가통합운동이 급속히 진전된 결과 4세기 중엽에는 연맹왕국이 완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마립간 시대의 신라

제2기는 연맹왕국의 발전기로서 다음에 전개될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준비하던 태동기였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왕호로서의 마립간(麻立干) 칭호이다. 이전까지 사용해온 거서간(居西干) · 차차웅(次次雄) · 이사금(尼師今) 등의 왕호는 계승자 이상의 권력자의 의미를 풍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내물마립간(356∼401) 때부터 사용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 · 고처(高處)의 지배자〔干〕혹은 최고의 지배자라는 의미 그대로 종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권력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성읍국가의 지배자인 간(干)들을 거느리면서 그 뒤에 군림하는 군왕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 연맹왕국 시대는 왕호를 따서 ‘마립간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에 들어오면 종래의 박 · 석 · 김 3성에 의한 교립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특히 5세기 중에는 왕위의 부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예방하였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내물마립간 때에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중국 북조(北朝)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사신은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았다. 특히, 382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는 전진의 왕 부견(苻堅)의 “경(卿)이 말한 해동(海東)의 사정이 예와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가 당당한 정복국가로 비약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정치 · 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왕의 능비문(陵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의 보기(步騎) 5만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해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그 뒤 신라의 왕위계승에 개입하는 등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427년(장수왕 15)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하자, 신라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에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 뒤 475년(자비마립간 18)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무력으로 침공,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신라는 백제와 다시 결혼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한층 강화했고, 일선지대에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이 시기에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단행하였다. 종래의 족제적(族制的)인 6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469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의 방리(坊里) 이름을 정했고, 487년(소지마립간 9)에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했으며, 다시 490년에는 수도에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하게 하였다. 5세기를 통해 신라조정이 꾸준히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음은 이 시기에 축조된 금관총이나 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한 수많은 고총고분(高塚古墳)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487년 혹은 지증왕 때에 설치된 김씨왕실의 종묘로서의 신궁(神宮)은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

제3기는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어 국왕과 여러 귀족과의 일정한 타협 조화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해가던 시기였다. 『삼국유사』에서 시대구분하고 있는 이른바 중고가 바로 이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는 법흥왕 때의 일련의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정치적 · 사회적 기반은 전왕인 지증왕 때에 대체로 마련되었다. 502년에 농사를 장려하는 왕의 명령을 공표하는 가운데 우경(牛耕)이 시작된 것은 농업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발달한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종래 구구하게 사용 표기되어오던 국호를 신라로 통일했고,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州郡)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모두 국가체제 확립에 수반하는 조처들이었다. 대외관계에서도 521년 중국 남조의 양(梁)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382년 이래 14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법흥왕 때에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중요 관부를 설치하며, 진골귀족회의를 제도화하는 등 신라의 전반적인 국가체제를 법제화 · 조직화한 시기였다. 520년(법흥왕 7)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백관의 공복(公服) · 17관등 등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 경상북도 포항시 중성리(북구 흥해읍)와 냉수리(신광면)에서는 각기 501년과 503년에 건립된 두 개의 비석이 발견되어 조정이 공론을 거쳐 교령(敎令)의 형식으로 6부 세력가의 현지 촌락 지배 혹은 재물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민간의 분규를 평결하고 그 내용을 비석에 새긴 사실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524년(법흥왕 11) 건립의 거벌모라(居伐牟羅)비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어떤 사태에 대한 문책으로 촌 사인(使人)들과 도사(道使)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장(杖) 1백대 혹은 60대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새겨져 있다. 또한 550년경에 세워진 충청북도 단양의 적성(赤城)비에는 호령(戶令) 및 전령(田令)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들 비문들을 통해 당시 율령의 수용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얻게 되었다.

율령제정에 앞서 516∼517년경에는 군사문제를 전담하는 병부가 설치되었다. 531년에는 진골귀족회의의 주재자로 상대등 제도를 채택하였다. 또한, 상대등의 설치를 전후한 527년 내지 535년경에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가 있은 뒤인 536년에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통치체제가 확립되어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이 무렵 왕의 칭호도 종래의 매금왕(寐錦王) 대신 대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소속 부인 탁부(喙部) 출신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6부 전체를 지배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이 기반 위에서 대외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켰다. 이미 법흥왕 때에 김해에 있던 본가야를 병합해(532) 낙동강 하류지방에서부터 북상하면서 가야 여러 나라를 위협했는데, 진흥왕은 다시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 창녕의 비화가야(非火加耶)를 병합한 다음 562년(진흥왕 23)에는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고령의 대가야를 공략, 멸망시킴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정복사업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한강 유역의 점령이었다. 550년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 : 지금의 충청남도 天安 혹은 충청북도 槐山)금현성(金峴城 : 지금의 충청남도 全義 혹은 충청북도 鎭川)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았다. 진흥왕은 이듬해에 개국(開國)이라 개원(改元)하고, 직접 정치를 운영하면서 백제 중흥의 영주(英主) 성왕과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다.

신라는 처음 한강 상류지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 지금의 鐵嶺)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의 6군을 기습 공격해 그들을 몰아냄으로써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554년에는 신라의 약속 위반에 분격해 관산성(管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沃川)으로 쳐들어온 성왕을 죽이고, 백제의 3만 대군을 섬멸시켰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이 지역의 인적 · 물적 자원을 얻은 것 외에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편으로는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556년에는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 일명 碑利城)를 설치했고, 568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에까지 진출하였다. 이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에 있는 적성비가 잘 말해주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중대의 황금시대

삼국통일전쟁의 수행

신라는 560년대에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때부터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660년대까지 한 세기 동안 실지회복을 노리는 고구려 · 백제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국가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진평왕대 후반기부터 강화되기 시작한 두 나라의 침략은 선덕여왕의 즉위 후 한층 가열해졌다. 642년(선덕여왕 11)에는 한강 방면의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南陽)이 양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함락직전까지 갔으며,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현재의 陜川)은 백제군에 함락되어 대야주 군주(軍主)이던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서부 군사령부는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대당외교(對唐外交)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지적한 여왕통치의 문제점과 그 대안으로 제시한 당나라의 황족에 의한 신라의 감국안(監國案)이 도리어 신라정계를 분열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이에 여왕 측근세력과 진골귀족세력 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중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 일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반란은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내란 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그들은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정치 · 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김춘추가 즉위,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이로써 제3기는 종말을 고하고, 신라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무열왕의 즉위를 기해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무열왕은 이 같은 군사적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종래의 수세에서 벗어나 일약 공세로 전환하였다. 바야흐로 종전의 국가 보위전쟁은 삼국통일전쟁으로 대전환을 맞았다. 대당 친선외교는 당이 고구려와 백제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거중(居中)조정을 청원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를 치기 위한 양국 간의 군사동맹 체결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무열왕은 660년 당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무열왕이 죽자 삼국통일의 대업은 그의 아들 문무왕에게 넘겨졌다. 문무왕은 663년 백제 부흥운동군을 완전히 진압하고, 668년에는 당군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만 당군은 백제 고지(故地)와 고구려 땅에 주둔하면서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려고 하였다. 당의 야욕을 간파한 문무왕은 당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신라군대는 옛 백제 땅으로 진출해 이를 송두리 채 차지하였고 고구려의 부흥운동군을 몰래 지원했다. 신라와 당 양국간의 긴장과 반목은 이윽고 전쟁상태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671년 이래 당군을 상대로 하여 사투를 벌인 끝에 676년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은 압록강 너머 만주지방으로 물러갔다. 이로써 신라는 진정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의 황금시대

제4기는 왕통상으로 보면 태종무열왕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해간 시대이며,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이전과는 달리 왕권이 크게 강화된 전제왕권시대였고, 문화상으로는 신라 문화의 극성기였다. 『삼국사기』의 시대구분인 이른바 중대가 바로 이 시대이며, 『삼국유사』는 이때부터를 하고(下古)로 잡고 있다.

신라가 이 시기에 들어와 전제왕권을 구축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태종무열왕과 아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성취함으로써 왕실의 권위가 크게 고양된 점,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단행된 중앙귀족의 도태 · 숙청 및 지방세력과의 연계 강화, 집사부(執事部) 중심의 일반행정체계와 유교적 정치이념의 도입과 강행, 나아가 이로 인한 관료제의 발달 등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기여한 요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집사부 중심의 정치운영이 전제왕권의 안전판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본래 집사부는 651년(진덕여왕 5)에 김춘추 일파가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해 종래의 품주(稟主)를 개편, 설치한 국왕직속의 최고관부였다. 이는 품주가 지닌 가신적(家臣的)인 성격을 표면화해 왕정의 기밀을 맡게 됨으로써 그 장관인 중시(中侍)는 국왕의 집사장 구실을 맡게 되었다. 이른바 중대왕권은 이를 통해 전제화되어 갔다. 제3기가 불교식 왕명시대(王名時代)였다고 한다면, 이 시대는 중국식 묘호(廟號)를 쓰기 시작한 시대로서, 당시 정치적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대의 전제왕권은 신문왕 때에 정력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는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통일에 따른 중앙 · 지방의 여러 행정 · 군사조직을 완성하였다. 중국 제도를 모방해 6전조직(六典組織)을 갖추거나, 제일급 중앙행정기구의 관직제도를 다섯 단계로 정비한 것, 지방에 9주(州)를 비롯해 5소경(小京)을 설치한 것, 수도와 지방에 각각 9서당(誓幢)10정(停) 등의 군사조직을 배치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성덕왕 때에는 전제왕권하의 극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적 · 사회적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 경덕왕 때에는 진골귀족들이 반발하였다. 689년에 폐지된 바 있는 진골귀족들의 녹읍이 757년에 부활된 것은 귀족들이 전제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움직임을 막기 위해 경덕왕은 757년에 전국의 모든 지명을, 759년에는 모든 관청 · 관직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이렇게 겉으로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표방하면서 국왕의 권력집중을 위한 정치개혁에 열을 올렸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를 이어 즉위한 혜공왕 때는 전제왕권의 몰락기로서,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에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반란과 친위 쿠데타가 잇따랐다. 특히, 768년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반란은 전국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얽혀 싸웠다고 하는 대란으로서 3년 동안 지속되었다. 774년에는 반왕파의 중심인물인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780년에 혜공왕이 김양상 · 김경신(金敬信)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태종무열왕 계통은 끊어지고 『삼국사기』에서 시대구분하고 있는 3대의 마지막 시대인 하대가 개막되었다.

신라의 쇠퇴와 멸망

신라의 쇠퇴

제5기는 왕통상으로 원성왕 계통이지만, 원성왕 자신이 내물왕의 12세손임을 표방한 점에서 혹은 부활내물왕계통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진골귀족들이 왕실에 대해 서로 연합하는 형세를 띠면서도 각기 독자적인 사병세력을 거느리고 있어 귀족연립(貴族聯立) 혹은 분열의 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야를 전국적으로 확대해본다면 지방의 호족세력이 크게 대두하고 있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9세기 말에 전개되는 호족의 대동란은 실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었다.

이 시대의 개창자인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인 뒤 즉위해 선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변혁기의 정치적 ·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겨를도 없이 재위 5년 만에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경쟁에서 승리한 상대등 김경신이 즉위, 원성왕이 되었다. 그는 788년에 국학(國學) 출신자에 대한 관리등용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는 등 정치 개혁에 착수했으나, 왕실 직계가족 중심으로 권력구조를 개편함으로써 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그 뒤 애장왕 때는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섭정이 되어 율령의 개정과 오묘제도(五廟制度)의 확립을 통해 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고, 김언승이 왕을 살해하고 헌덕왕이 된 뒤로는 이와 같은 노력이 한층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왕실가족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소외된 진골귀족들의 불만이 커져 822년(헌덕왕 14)에는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웅천주(熊川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단시간 내에 진압되었으나, 호족의 지방할거적 경향이 이로써 크게 촉진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뒤 흥덕왕 때에는 진골귀족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일대 개혁정치가 단행되었는데, 그 실효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더욱이 그가 죽은 뒤에는 근친왕족 사이에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 3년간에 걸쳐 2명의 국왕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골귀족들이 중앙에서 정쟁(政爭)에 휩쓸려 있는 동안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차츰 성장해 장차 왕실을 압도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청해진(淸海鎭)을 근거로 한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해상세력가는 그 두드러진 존재였다. 경문왕 · 헌강왕 때에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되었으나, 이미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늦었고, 정강왕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에는 사태가 절망적이 되어 국가재정은 파탄에 직면하고 말았다. 889년(진성여왕 3)에 조정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들의 반란을 유발했고, 조정이 끝내 이를 수습하지 못해 장기간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신라의 멸망

제6기는 왕통상으로 제5기의 계승, 연장이었으나, 신라가 50년 가까운 내란 끝에 마침내 멸망하게 되는 쇠망기이다. 이 시기에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등 박씨왕이 3대에 걸쳐서 15년 간(912∼927) 재위했으나, 그들은 김씨 왕통과 혼인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군웅들이 전국 도처에 할거해 신라조정이 전혀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왕경 자체도 무방비상태가 되어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왕경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할 정도였고, 927년에는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김씨 왕통 출신의 경순왕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주역은 전국 각지에 자립하고 있던 군웅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한 견훤과 궁예(弓裔)였다. 신라는 이들이 서로 대결하는 동안 여맥(餘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정책상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하게 됨에 따라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가 후백제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해 신라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신라의 제도

골품제도

골품제도는 6∼7세기경 신라 조정에 의해 법제화된 이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3백여 년간 거의 변함없이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규제하는 대본(大本)으로서 기능, 작용하였다. 이 제도는 왕경 6부민을 대상으로 개인의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이라든지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가한 신분제도였다. 따라서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교되고 있다.

형성과 계통

본래 골품제도는 신라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복속된 성읍국가 혹은 연맹왕국의 지배층을 왕경에 옮겨 6부제로 편성한 뒤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 신분 등급을 매기면서 제정되었다. 그런데 원시씨족제도 내지 족장층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지 못한 채 집권화의 방향으로 나갔던 까닭에 등급 구분의 원리는 혈연적 · 족적인 유대를 토대로 하게 되었다. 골품제도는 처음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경 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가 별개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듯한데, 뒤에 두 계통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골품제도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라는 두 개의 골과 육두품에서 일두품에 이르는 여섯 개의 두품을 포함해 모두 8개의 신분으로 나누어졌다. 다만 골품제도가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연한 신분체계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친 사회성층의 결정화(結晶化)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그 최종적인 완성 시기는 7세기 중엽이 아닐까 짐작된다.

성골과 진골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하며 성골이 소멸되자 김춘추 때부터는 왕위에 올랐다. 그뒤 신라의 멸망 때까지 모든 왕들은 진골이었다. 이처럼 같은 왕족이면서도 양자가 구별된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진골 중에는 김씨 왕족 이외에 전 왕족이자 중고시대의 왕비족으로도 생각되는 박씨족이나 혹은 신라에 의해 병합된 비교적 큰 국가의 왕족들에게도 부여되었다. 즉, 본가야의 왕족이나 고구려의 왕족출신인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은 모두 김씨성을 받고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비록, 이들은 ‘신김씨(新金氏)’라 하여 본래의 신라왕족과는 구별되었지만, 진골 대우를 받음으로써 김씨 왕족과도 통혼할 수 있게 되었다.

두품제

진골 아래의 여섯 개의 신분은 뒤에 가면 크게 상하 두 계급으로 구별되었다. 즉, 6두품 · 5두품 · 4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었으나, 3두품 · 2두품 · 1두품은 그렇지 못하여 일반평민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물론,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이라도 그 특권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진골 바로 다음가는 신분인 6두품은 일명 득난(得難)이라고 불린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좀처럼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이었다. 여기에는 본래의 신라국을 형성한 여섯 씨족장 가문의 후예와 신라의 팽창과정에서 복속되어 왕경 6부에 편입된 여러 성읍국가의 지배층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영(令)을 장관직으로 하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이나 혹은 6정 · 9서당 등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인 장군이 될 수 없었고, 그 아래의 차관직이나 부지휘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는 관리나 군인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유학자 혹은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원효(元曉)와 같은 위대한 승려나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뛰어난 문장가 · 학자는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한편, 5두품과 4두품은 6두품에 비해서 보다 낮은 관직을 얻는 데 불과했다. 3두품 · 2두품 · 1두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분된 의미를 잃어 9세기 경이 되면 평인(平人) 혹은 백성이라 통칭되었다.

변천

골품제도는 본래 8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성골이 소멸하고 또한 평민들의 등급구분이 없어지게 된 결과 진골 · 6두품 · 5두품 · 4두품 · 백성의 5등급으로 정리되었다. 834년(흥덕왕 9)에 제정된 거기(車騎) · 기용(器用) · 옥사(屋舍)에 대한 사용 제한규정에서 보면, 4두품은 백성과 같은 규제를 받고 있어 점차 백성층으로 강등된 듯하다. 카스트제도와 마찬가지로 골품제도도 최고신분인 성골 · 진골은 엄격히 지켜졌으나, 4두품 이하의 하층신분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계급의 이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골품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은 왕경에 사는 사람만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지방의 촌락민과는 같이 논할 수 없는 우월한 존재였다. 왕경사람들은 지방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골품제도는 이를 합법화하기 위한 왕경 지배자공동체의 배타적인 신분제도였다. 다시 말해 지방민은 노예나 부곡민(部曲民) 등 천인계층과 더불어 골품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이른바 탈락계층이었던 셈이다.

정치적 규제

여러 골품은 정치적 ·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규정이 정치적 진출에 대한 것이었다. 즉, 골품제도는 신분에 따라 일정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등의 상한선을 설정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진출에 제한을 가하였다. 신라의 관등제도는 골품제도에 앞서 법흥왕 때에 완성되었는데, 왕경인에 대한 경위제도(京位制度)와 지방민에 대한 외위제도(外位制度)의 이원적인 체계로 구성되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외위제도를 폐지하고 경위제도로 일원화하면서,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그밖에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로 각기 승진의 한계를 정하였다. 그런데 집사부의 장관직인 중시나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직인 영은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장관직은 진골귀족의 독점물이었다. 6두품은 차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고, 5두품과 4두품은 각기 제3등 관직인 대사와 그 이하 관직인 사지(舍知) · 사(史)에 한정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와 같은 원칙은 주요 군부대 · 지방관직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사회적 규제

골품제도는 정치적 규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규제 또한 엄격하였다. 원칙적으로 같은 신분 내에서만 결혼이 가능했으므로 최고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진덕여왕이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왕실 안에서 성골 신분의 남성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충분히 그럼직한 상상이다. 또한, 같은 진골이라도 김씨 왕족은 뒤에 왕경으로 이주해온, 신라에 의해 병합된 조그만 나라의 왕족 후예와의 혼인을 꺼리는 관습이 있었다.

이외에도 거처할 수 있는 가옥의 크기에까지 적용되었다. 834년의 규정에 따르면 진골의 경우라도 방의 길이와 너비가 24척(尺)을 넘지 못하며, 6두품 · 5두품 · 4두품은 각기 21척 · 18척 · 15척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옷빛깔에서는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 제9관등인 급벌찬(級伐飡) 이상, 제11관등인 나마(奈麻) 이상, 제17관등인 조위(造位) 이상이 각기 자색(紫色) · 비색(緋色) · 청색(靑色) · 황색(黃色)의 복장을 하도록 규제하였다. 이는 진골 · 6두품 · 5두품 · 4두품 신분에 각기 상응하고 있다. 이 밖에도 우차의 자재 및 장식, 일상생활 용기들이 골품에 따라 각기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결국 골품제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은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진골이었다.

정치제도

신라의 정치제도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에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으나, 연원은 마립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시대의 정치운영방식이나 관제는 뒷날의 화백제도(和白制度) 및 관등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관등제도를 예로 들어본다면, 6세기초 법흥왕 때에 크게 정비되었으나, 관등의 원류를 소급해보면 연맹왕국시대에 이미 관직으로서 기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1 · 2관등인 이벌찬과 이척찬(伊尺飡, 일명 伊飡)은 법흥왕 때 상대등직이 설치될 때까지는 수상에 해당하는 관직이었고, 제4관등 파진찬(波珍飡)은 본래 해관(海官) 혹은 수군(水軍) 지휘관을 가리키는 고유한 직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관등의 관직적 성격은 6세기 이래 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점차 지양되었으나, 완전하게 정지되지 않은 채 관직의 제도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법흥왕 이후 관등과 관직이 분리된 뒤에도 대사 · 사지 등 관등명칭은 집사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제3 · 4등 관직명칭으로 함께 쓰여졌다.

중앙행정제도

중앙의 통치조직을 보면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해 516∼517년경에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로서는 처음으로 병부(兵部)가 설치되었으며, 531년에는 귀족회의 의장으로서의 상대등 제도가 채택되었다. 진흥왕 때인 544년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司正府)가 만들어졌고, 565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맡은 품주가 설치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행정기구 발달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는 진평왕 때였다. 581년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583년에는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각각 창설되었다. 이듬해에는 공부(貢賦)를 맡은 조부(調府)가 품주로부터 분리, 독립했으며, 승여(乘輿) · 의위(儀衛)를 담당하는 승부(乘府)가 설치되었다. 586년에는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등이 창설되어 관제발달을 맞게 되었다. 580년대의 관제조직상의 특징은 새로운 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고, 소속 직원의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보여 일종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진덕여왕 때에는 김춘추 일파에 의해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대규모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651년에 종래의 품주를 개편, 국왕직속의 최고 관부로서 집사부를 설치하고, 품주의 본래 기능은 신설된 창부(倉部)로 이관하였다. 또한, 입법과 형정(刑政)을 담당하는 이방부(理方府)가 설치되었는데, 667년(문무왕 7)에 또 하나의 이방부가 설치됨으로써 종래의 것은 좌이방부, 신설된 것은 우이방부로 고쳤다. 이와 동시에 예부와 사신접대를 담당하는 영객부(領客府)의 지위를 높였다. 개혁작업은 김춘추가 즉위한 뒤에도 계속 추진되어 삼국통일 직후인 686년(신문왕 6)에 토목 · 영선(營繕)을 담당하는 예작부(例作府) 설치를 끝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1급 행정관부의 관원조직도 확충되었다. 종전에는 관원조직이 영 · 경(卿, 병부는 大監) · 대사 · 사의 4단계였는데, 685년에 대사와 사의 중간에 사지를 신설함으로써 결국 5단계조직으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기구들은 신라 멸망 때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759년(경덕왕 18)에 모든 관부와 관직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친 일은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776년(혜공왕 12)에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행정기구 자체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기능이나 지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9세기에 접어들면 종전의 내성(內省) 일국(一局)에 불과하던 어룡성(御龍省)이 승격, 독립해 일종의 섭정부(攝政府)로 등장하였다(801). 또한 국왕의 문필(文筆) 비서기관인 세택(洗宅)이 중사성(中事省)으로 승격해 집사성(執事省 : 執事部가 개칭됨) 장관인 시중(侍中 : 中侍가 개칭됨)을 견제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문왕 · 헌강왕 때에는 문한(文翰)기구의 비중이 커지면서 서서원(瑞書院) · 숭문대(崇文臺) 등에 학사(學士) · 직학사(直學士) 제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화백제도

신라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그것이 합좌제도(合坐制度)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에서는 이 회의체를 화백이라고 불렀는데, 그 기원은 연맹왕국시대의 정사당(政事堂) 혹은 남당(南堂)에까지 소급되고 있다. 하지만 화백제도가 비교적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것은 법흥왕 때 의장인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부터의 일이다. 진골귀족출신의 대신이라 할 수 있는 대등(大等, 혹은 大衆等)으로서 구성되는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그밖에 불교의 공인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만장일치에 의해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왕경 사위(四圍)의 청송산(靑松山, 동쪽) · 오지산(亏知山, 남쪽) · 피전(皮田, 서쪽) · 소금강산(小金剛山, 북쪽) 등 이른바 영지(靈地)를 택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합좌제도의 존재는 당시의 정치형태가 귀족연합적인 성격을 지닌 데 연유하였다. 이 귀족회의의 주재자로서의 상대등은 진골 중에서도 이척찬과 같은 높은 관등의 인물이 임명되어 귀족세력과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즉, 상대등은 국왕의 교체와 거취를 같이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에서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존재였고, 귀족의 통솔자일 뿐 아니라 그 대변자요 대표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제일후보자로 여겨졌다.

다만, 집사부의 설치를 계기로 국가의 정무를 분담하는 새로운 관부가 만들어지자 어느 관청에도 소속되지 않는 대등의 존재 의의는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통일기에 들어와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등으로 상징되던 화백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빛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합좌제적인 정치운영의 전통은 변형된 형태로나마 여전히 잔존하였다. 가령 집사부와 사정부 · 예작부 · 선부 등 몇몇 관부를 제외한 주요 관청의 장관직인 영이 대개 2명 이상의 복수로 되어 있는 점이라든지, 더욱이 이들 장관직이 겸직의 형태로 소수의 진골귀족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것은 통일기 신라의 정치가 기본적으로 합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것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지방행정제도

지방의 통치조직은 점령지역의 확보책으로서 설치되어 지방의 촌(村)에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는데, 지증왕 때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즉,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州郡)제도를 채택, 실시했는데, 군정적(軍政的) 성격을 띠어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때때로 중심지를 이동할 수 있었다. 큰 성에 설치한 주의 장관을 군주(軍主), 중간 정도 규모의 성에 설치한 군의 장관을 당주(幢主)라 하였다. 뒤에 군주는 총관(摠管) · 도독(都督)으로, 당주는 태수(太守)로 각각 바뀌었다. 한편, 몇 개의 촌을 장악한 작은 규모의 성은, 통일기에 들어와 현(縣)으로 개편되었는데, 장관 명칭은 현의 크기에 따라 현령 혹은 소수(小守)라 하였다. 6세기 전반기 신라의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 정사인 『양서(梁書)』 신라전에는 왕경 안에 여섯 개의 탁평(啄評), 지방에 52개의 읍륵(邑勒)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읍륵을 군으로 보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군제도는 한꺼번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주만 하더라도 505년에 실직주(悉直州 : 지금의 강원도 三陟) 1개가 설치되었고, 525년에 다시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尙州), 550년대에 신주(新州 : 지금의 경기도 廣州) · 비사벌주(比斯伐州 : 일명 下州라고도 하며 지금의 경상남도 昌寧),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安邊) 등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한편, 주군제도와는 별도로 왕경을 모방해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소경을 설치하였다. 소경은 처음 514년에 아시촌(阿尸村 : 위치에 대하여는 安康 · 咸安 · 義城 등이 있음)에, 557년에는 국원(國原 : 지금의 충청북도 忠州)에, 다시 639년에는 하슬라(何瑟羅 : 지금의 강원도 江陵)에 각각 설치하였다. 이들 소경에는 왕경 6부의 진골을 비롯한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소경은 주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주로 정치적 ·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한편으로는 주군을 견제, 감시하는 듯한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관은 사신(仕臣 : 일명 仕大等)이라 하여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다만, 삼국통일 이전의 소경제도는 전국적으로 체계 있게 정비되지는 못하였다.

통일에 따른 지방제도의 개편

이와 같은 지방통치조직은 삼국통일에 따른 영토의 확대로 크게 개편되어 685년에 9주 · 5소경제도로 완성되었다. 9주는 중국의 옛 우왕(禹王) 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 · 백제 · 고구려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주 밑에는 전국에 117∼120개의 군과 293∼305개의 현을 두었다. 한편, 5소경은 대체로 국토의 동서남북 방향에 맞추어 정비되었다. 이는 왕경이 동남쪽 한끝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통일기의 지방통치조직의 변화는 이 같은 각급 행정단위의 증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주군제도는 종전의 군정적 성격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행정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는 군현에 파견되는 외관(外官) 중에 문관 출신을 적극 등용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신라가 약 1세기 동안 생사를 건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안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으로 주 · 군 · 현과 소경 밑에는 촌(村) · 향(鄕) · 부곡(部曲)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이 있었다. 촌은 양인이 사는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이른바 행정촌이었는데, 그 지방의 토착세력가를 촌주(村主)로 임명해 현령을 도와 촌락행정을 맡도록 하였다. 한편, 향 · 부곡은 촌과는 구별된 듯한데, 이는 특수한 직역(職役)에 종사한다거나 혹은 현을 편성하기에 호구(戶口)가 크게 부족한 데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군사제도

신라는 처음에 왕경 6부의 소속원을 군인으로 징발해 이른바 6부병을 편성, 왕경을 수비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6세기에 들어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발전함에 따라 국왕은 전국적인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국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귀족출신의 무장을 대신 파견해 싸우게도 하였다. 국왕지휘 하의 부대편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독립된 단위부대를 흔히 군기(軍旗)의 뜻을 가진 당(幢)이라고 불렀고 그 지휘관을 당주라고 한 것만은 확실하다.

정의 설치

신라의 군사제도는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된 진흥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544년에 종래 왕경 6부민을 단위로 편성했던 부대를 통합해 대당(大幢)을 편성한 다음 왕경 주위의 6개 주둔지역에 분산 배치했는데, 이는 중고시대 군사력의 기본이 되는 6정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 550년대에 영토의 비약적인 확장과 더불어 점령지에 주를 설치하고, 주마다 군단을 설치한 결과 종전의 대당 이외에 상주정(上州停 :『삼국사기』에는 뒤에 귀당(貴幢)으로 개편되었다고 했으나, 실은 귀당은 한동안 상주정과 병존했던 별개의 군단으로 생각됨) · 신주정(新州停 : 漢山停의 전신임) · 비열홀정(比列忽停 : 牛首停의 전신임) · 실직정(悉直停 : 河西停의 전신임) · 하주정(下州停 : 完山停의 전신임) 등 모두 6정이 편성되었다. 6정 군단은 주치(州治)에 배치되어 주의 이동과 함께 소재지가 이동되었다. 대당을 제외한 이들 5개의 정은 모두 지방민을 징발해 편성된 부대로 생각된다. 한편, 6정 외에 비중이 큰 군단으로 법당(法幢)이 있었는데, 확실한 창설연대를 알 수 없으나 6세기 전반경으로 짐작되며 지방의 성과 촌을 단위로 설치된 듯하다. 또한, 궁성을 수비하는 군사조직으로 624년(진평왕 46)에 시위부(侍衛府)가 조직되었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이 같은 핵심 부대 외에 국왕 혹은 귀족 무장이 개인적으로 군대를 가려 모아서 편성한 이른바 소모병(召募兵)이 있었다. 544년에 설치된 것으로 짐작되는 삼천당(三千幢)은 국왕에 의해 왕경인 가운데서 모집하여 편성한 부대로 삼국통일 후 군제 재편성 과정에서 10정 군단의 주요한 모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소모병은 583년에 서당이, 그 뒤 625년에는 다시 낭당이 설치되어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들 부대의 병사들은 군인이 되는 것을 괴로운 의무이기보다는 오히려 명예로운 권리로 생각해 전투에 임해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전하였다.

화랑제도

또한, 6정 군단의 보충을 목적으로 한 군사조직에 화랑도(花郎徒)와 같은 청소년단체가 있었다. 화랑도의 원류는 성읍국가시대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청소년조직으로 생각되는데, 진흥왕 때 대규모의 군단이 편성될 때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화랑도는 단순한 군사조직은 아니었다. 화랑집단은 원광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 볼 수 있는 충(忠)과 신(信) 등 사회윤리 덕목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일정 기간 수련을 쌓았다. 그 결과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1세기 동안 국난기에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을 이끌어갔으며, 특히 무사도의 현양(顯揚)에 이바지한 바 컸다. 화랑출신인 사다함(斯多含) · 김유신 · 김흠운(金欽運) · 관창(官昌) 등의 무용담은 신라 무사도의 귀감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화랑세기(花郎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해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서당 · 10정제도

삼국통일 후 신라의 군사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즉, 중앙군으로서 9서당, 지방 주둔군으로서 10정, 기타 많은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같은 개편은 대체로 문무왕 · 신문왕 때에 이루어졌다. 9서당의 특징은 본래의 신라사람 이외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피정복민을 포함해 구성된 군단이라는 점에 있다. 즉, 신라민으로는 종전의 서당과 낭당을 각각 개편해 두 개의 군단을 편성하고, 672년에 조직한 장창당(長槍幢)을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라 개칭하면서 9서당에 포함시켜 도합 3개의 군단을 조직하였다. 백제민으로는 전후 2개의 군단을 조직했으며, 고구려민으로는 3개 군단, 그리고 말갈민으로 1개 군단을 조직하였다. 고구려민으로 구성된 3개 군단 중에는 신라의 보호국으로 금마저(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 세워졌던 보덕국의 성민(城民)으로 구성된 군단이 2개 포함되어 있다. 결국 9서당은 피정복민으로 조직된 군단의 수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했는데, 신라통일기의 최대군단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었다.

10정은 9주에 각각 하나씩 정을 둔다는 원칙 아래 고루 배치하였다. 다만, 한주(漢州)는 국경지대에 위치했고, 지역 자체도 넓었기 때문에 2개의 정을 배치하였다. 10정은 국방상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군사조직이었다. 한편, 9주 가운데 특히 다섯 주에 배치된 군대로 5주서(州誓)가 있었다. 이는 기병집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국경지대에는 3개의 변수당(邊守幢) 등 여러 군사조직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경제제도

신라시대의 경제제도는 기록이 매우 불충분해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농업을 비롯하여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했고, 삼국통일 뒤에는 대외무역이 크게 활기를 띠었다.

토지제도

농업은 여러 산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므로, 농업생산의 토대가 된 토지는 경제적 부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관심은 성읍국가 성립 이전부터 싹트기 시작했고, 국가의 성립 이후에는 그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6세기 이래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성장에 따라서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요, 모든 국민은 왕신(王臣)’이라고 하는, 중국 고대의 이른바 왕토사상이 전해져서 모든 토지와 국민이 국왕에게 예속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토지가 국왕에 의해 독점된 것은 아니었다. 관직과 군직을 독점한 귀족들은 국가에 대한 공로로 식읍(食邑) · 사전(賜田) 등의 명목으로 많은 토지를 받았고,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토지의 면적은 증가되어 갔다. 또한, 고급 관료들은 녹읍을 지급받았는데,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일정한 양의 조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특권도 묵인된 듯하다.

그러나 삼국통일 후 토지제도는 크게 변화하였다. 즉, 687년에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2년 뒤에는 녹읍을 폐지, 대신 세조(歲租)를 지급하였다. 관료전은 다만 조의 수취만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성질의 토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개혁은 귀족들의 토지지배에 부수된 일반농민에 대한 지배를 제한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획기적인 조처였다. 다만,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나 컸고, 한편 이를 억누를만한 국가권력이 쇠퇴해 757년에는 녹읍을 부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때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귀족 관료들은 부활된 녹읍 이외에도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해 국가권력이 퇴조를 보이기 시작한 하대에는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릴만큼 재산을 축적해갔다.

한편, 전제왕권의 전성기였던 722년(성덕왕 21)에는 농민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는데, 이는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지급한 토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를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에 입각한 토지 지급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농민들이 본래부터 자영하고 있던 농토의 소유를 국가에서 인정해 준 조치로 보기도 한다. 한편 이는 삼국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크게 피폐해졌고, 더욱이 고리대자본의 성행으로 몰락하고 있던 농민층을 구제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책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농민을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적 결집에서 분리시키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서원경(西原京 : 지금의 충청북도 淸州지방) 지방 촌락 장적(帳籍)에 의하면, 촌에는 관모전답(官謨田畓) · 내시령답(內視令畓) · 마전(麻田) 등이 할당되어 촌민들에 의해 경작되었으며, 촌주는 촌주위답(村主位畓), 촌민은 연수유답(烟受有畓)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연수유답을 정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어쨌든 그보다는 농민들의 자영농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세제도

조세제도 또한 토지제도와 마찬가지로 편린만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도 고구려 · 백제와 같이 자영농민에게 조세 · 공부와 역역(力役)을 부과했는데, 그 세액은 알 길이 없다. 신라는 6세기 중엽에 품주(稟主: 일명 租主)가 설치되어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받아 국가 재정을 관할한 것을 보면 6세기경에는 이미 부세(賦稅) 행정체계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 성산산성(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에서 출토된 이 시기 목간(木簡)을 보면 신라가 아라가야를 병합한 뒤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에 설치한 감문주(甘文州, 일명 上州) 관할의 안동 · 영주 · 성주 등 여러 성 · 촌에서 거둔 비(秕) · 맥(麥) · 소금 · 철 등을 이곳으로 운송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제도에서 설명한 것처럼 651년에 품주가 집사부로 확대, 개편되었을 때 창부는 이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한편, 584년에 설치되어 공부를 담당하던 조부의 실무관료조직이 이 때 확립되었다. 이처럼 7세기 중엽에는 조세와 공부를 담당하는 관청조직이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쇼소인 소장 「신라촌락문서」에서 보듯이, 통일기에는 촌락의 뽕나무〔桑〕 · 잣나무〔栢子木〕 · 호도나무〔楸子木〕등에까지 과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 · 백제와 마찬가지로 토지에 대한 지배 이상으로 농민의 노동력에 대한 지배에 관심이 컸다. 신라의 역역제(力役制)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라에서는 대체로 15세 이상의 남자에게 일정한 기간의 방수(防戍)나 축성(築城) · 축제(築堤)와 같은 역역에 동원하였다. 영천 청제비(菁堤碑)나 혹은 경주 남산 신성비(新城碑)의 비문을 통해 구체적인 일면을 알 수 있다. 즉, 청제비에 의하면, 536년에 영천의 청제를 수리할 때에 7천명에 달하는 이른바 장작인(將作人)이 차출되었는데, 이들은 25명을 한 조로 하여 모두 280개의 작업분단으로 편성되어 공사책임자인 장상(將上)의 지휘 아래 사역노동에 동원되었다. 또한, 신성비의 비문에 의하면, 591년에 남산성을 개축해 새로이 성을 쌓을 때 전국적인 규모의 촌락민이 차출되어 2백여 개의 작업분단으로 편성되어 촌의 세력가의 책임 아래 사역노동에 동원되었다. 이와 같은 농민의 노동력에 대한 관심은 삼국통일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신라촌락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촌의 인구를 성별 · 연령별(6등급)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매 촌락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정수(丁數)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호(戶)를 인위적으로 편성한 위에 이른바 계연(計烟)을 산출하고 있는 것 등은 그 단적인 증좌라 할 수 있다.

수공업의 발달

수공업은 처음 부족장을 비롯한 지배층에 의해 부민(部民)과 노비를 집단으로 사역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다가 국가 지배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농민들이 그들에게 부과된 마포 · 견 · 사마(絲麻) 등을 생산하기 위해 가내수공업의 형태를 띠고 발달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 뒤 관청과 왕실 및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과 특히 외국과의 교역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관영수공업의 생산부문이 보다 발달하였다. 관영수공업은 왕궁 내에 설치되었음직한 작업장에서 전문 공장(工匠)과 노비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 같은 관영공장을 통솔하는 행정부서가 내성(內省) 산하에 많이 설치된 것을 보면 물품의 종류는 다양했으며, 수량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보이는 이러한 관청 가운데는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는 조하방(朝霞房) · 금전(錦典) · 기전(綺典), 특수모직물과 가발을 생산하는 모전(毛典), 직물의 염색을 담당하는 염궁(染宮), 각종 철물을 주조하는 철유전(鐵鍮典), 각종 칠기를 생산하는 칠전(漆典), 가죽의 제조를 담당하는 피전(皮典), 각종 식탁가구를 제작하는 궤개전(机槪典), 각종 도기와 제기 · 와전(瓦塼)을 제작하는 와기전(瓦器典), 각종 장식물을 제작하는 물장전(物藏典), 금 · 은 · 옥 · 세공품을 제작하는 남하소궁(南下所宮), 각종 행사에 사용되는 천막을 제작하는 급장전(給帳典)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제작되는 물품 중 조하주(朝霞紬) · 조하금(朝霞錦) · 가발 · 해표피(海豹皮) · 금대은(金帶銀) · 주옥(珠玉) 등은 신라의 특산품으로 당나라에 수출되었다.

상업의 발달

삼한시대에 사회적 분업이 진행되어 상인층이 등장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물자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듯하다. 490년에 왕경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품을 유통하게 한 것으로 보아 신라에 공영시장(公營市場)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방에서 바친 물자 중 쓰고 남은 잉여분을 처리할 목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 뒤 509년에는 왕경에 동시(東市)가 설치되었고,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으로 동시전(東市典)을 두었다. 삼국통일 후에는 왕경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또한 상품생산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695년에 서시(西市) · 남시(南市)를 더 두었으며, 감독 관청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경시(京市) 이외에도 지방의 성읍 중심지나 혹은 교통의 요지에는 이른바 향시가 생겨나서 수요자와 공급자가 모여 주로 물물교환의 형태로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였다.

대외무역의 발달

수공업 및 상업의 발달과 귀족사회의 번영은 대외무역을 크게 촉진시켰다. 신라의 대외무역은 조공이나 예물 교환형식으로 행해지는 공무역과 사절단의 수행원과 상인들이 사사로이 행하는 사무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대상국가는 중국 특히 당나라이었으며, 그밖에 일본이 있었고 신라 말기에는 아랍 상인들까지 신라에 와서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쇼소인에 전해지고 있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는 752년 일본 조정이 신라 사신을 따라온 상인들로부터 매입한 물품을 적은 것인데, 당시 신라는 7척의 배에 7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 바 있다. 삼국통일 이전의 소규모의 대외무역이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해상교통이 한층 손쉽게 되었다. 또한 9세기에 들어오면 중앙 정치무대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지방세력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마침 당나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진 데 힘입어 민간의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여 차츰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한국 서남해안에 출몰하는 해적을 퇴치한 뒤 중국 ·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해 단기간 내에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당나라에 파견했으며,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라는 이름의 무역사절단을 파견해 신라 · 당나라 · 일본 사이의 삼각(三角) 무역을 주도하였다. 당시 신라인의 내왕이 빈번한 산둥반도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반자치적인 신라인의 집단거류지가 생겼다.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불렀고,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까지 설치되었다. 이들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장보고가 산둥성 원덩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교역이 번성해지자, 일본은 812년에 지쿠젠[筑前 : 지금의 九州 福岡縣 북서쪽]에 신라어학생(新羅語學生)이라는 통역생을 두었으며, 그 밖에 대마도(對馬島)에 신라역어(新羅譯語)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문화

신라의 학문

신라의 문화는 고유한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 고구려 및 백제의 선진문화를 가미한 점에 특색이 있다. 6세기 이후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건설한 신라의 지배층은 중국문화를 왕성하게 받아들였지만, 외래문화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관습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두의 사용

고조선이 멸망되기 전에 진국(辰國)에서 중국의 한(漢)나라에 국서를 보내려 했다는 역사기록을 보면 남한지방에서 한자가 사용된 시기는 한이 낙랑군을 설치하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신라에서는 5세기의 고분에서 명문 자료가 출토되고 있으며, 6세기에 들어오면 많은 비석들이 만들어졌다. 신라인들은 문어(文語)로는 외국문자인 한자 및 한문을 쓰면서 구어(口語)로는 이와 그 구조를 전혀 달리하는 우리말을 쓰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을 없애기 위해 일찍부터 독특한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발전시켰다. 물론, 이 표기법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전해진 것이지만, 신라인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이두(吏讀)를 성립시켰고, 7세기 후반에 설총(薛聰)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吐)를 넣은 이두문의 문법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755년(경덕왕 14)에 완성된 「신라 화엄경 사경 조성기(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표기법은 일본으로 전해져 그들의 음절문자인 가나(假名)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 자연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진흥왕순수비 비문은 현재 남아 있는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한문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국사의 편찬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행해진 국가적인 편찬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545년(진흥왕 6) 『국사(國史)』의 편찬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대신이던 이사부가 상주해 국왕의 재가를 얻은 뒤에, 왕명을 받은 거칠부(居柒夫)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해 왕자(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새로이 관찬사서를 편찬했을 법한데,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8세기 초 성덕왕 때에 진골출신의 정치가요 역사가인 김대문이 『계림잡전(鷄林雜傳)』 · 『화랑세기』 · 『고승전(高僧傳)』 · 『한산기(漢山記)』 · 『악본(樂本)』 등 많은 저술을 했다고 한다. 김대문의『고승전』 외에도 여러 고승들의 전기가 나왔고, 김장청(金長淸)에 의해 『김유신행록』과 같은 화랑 출신의 대표적 위인에 대한 전기도 저술되었다. 이들 저술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때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남아 있어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에 의해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등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는데, 이 역시 현재 그 편린만 전해지고 있다.

유교의 발달

신라시대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교육적 기능을 지닌 화랑도가 도덕적 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화랑도가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유교덕목은 신(信)과 충(忠)이었는데,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확인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당시 국가가 앞장서서 유교도덕을 널리 국민에게 권장했던 것과 관계가 있는데,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충신정성(忠信精誠)해 나라를 위해 절개를 다하는 인물을 표창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들 비문에서는 유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이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통일기에 들어오면 유교는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국학이 설립되었다. 본래 국학은 통일 직전인 651년에 설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여 사무직인 대사(大舍)를 두었으나, 682년에 예부 소속으로 정식 설치되어 3과(科)로 나누어 박사와 조교의 지도하에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여기에 입학하는 학생은 나이가 15∼30세로서 대사 이하의 관등을 가진 관료이거나, 무위(無位)인 자에 한정되었으며, 수학연한은 9년이었다. 그리고 국학생들이 졸업할 때 학력을 시험해 3등급을 매겨서 관직에 나아가게 하는 제도가 788년(원성왕 4)에 생겼는데, 이것이 독서삼품과였다. 국학의 입학생은 주로 육두품이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유교를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주장하였다. 설총이 지은 『풍왕서(諷王書)』[일명 화왕계(花王戒)라고도 함]나 혹은 강수(强首)의 입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골품제 아래서 관계진출에 제약을 받고 있던 육두품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육두품출신 지식인들에 의해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나아가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최치원이 894년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10여 조의 시무책 중에는 이 같은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비록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육두품 지식인들의 정치이념은 뒤에 오는 고려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과학기술의 발달

신라시대에는 과학기술도 매우 발달하였다. 통일 이전부터 농업과 정치의 두 부문에 관련이 깊은 천문학이 발달했고, 금속 야금(冶金) 및 세공기술이 뛰어났으며, 건축부문에서는 역학(力學)과 수학의 원리가 응용되었다. 이에는 중국 과학기술의 영향이 매우 컸으나, 신라는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개량, 변형하였다. 특히, 천문학 지식은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도 강했으므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경주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로서 천체관측에 대한 당시의 관심과 아울러 놀랄만한 과학기술의 도입 수용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기술분야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 · 동의 세공 및 도금과 같은 금속가공기술인데, 마립간시대 경주의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은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토기의 제작기술 역시 일찍부터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경주 왕릉에서 유리제품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유리를 만들어 썼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삼국통일 후에는 이와 같은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천문학에서는 718년에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해 누각박사로 하여금 시각을 측정하도록 했으며, 혜공왕 때에는 김암(金巖)과 같은 뛰어난 천문학자가 배출되었다. 역학(曆學)도 발전해 674년에는 덕복(德福)이 당나라에서 역술을 배워와 새로운 역법을 만들어 썼다. 또한, 금속제품의 주조기술도 발달해 구리로 만든 불상이나 종을 주조함에 기포가 매우 적은 우수한 것을 만들어냈다. 특히, 수학이 발달해 사원건축 등에 크게 응용되었다. 신라의 최고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교육이 행해졌으며, 717년에는 산박사제도(算博士制度)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발달된 수학지식은 불국사 · 석굴암 등 사원이나 석가탑 · 다보탑 등 석탑의 제작에 실제 응용되어 균형미 넘치는 건축물을 낳게 하였다. 또한, 의학도 발달해 692년에는 의학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세우고 의학박사를 두어 중국의 의서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통일기의 신라 의학은 신라 고유의 의술에다가 한방의학(漢方醫學)을 가미했을 뿐 아니라, 불교의 융성에 따른 인도의학, 그리고 남방 및 서역(西域)의 의학도 받아들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서적의 보급과 함께 인쇄술 · 제지술도 발달하였다. 최근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목판으로 인쇄된 것인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다. 또한, 닥나무〔楮〕를 써서 만든 이른바 저지(楮紙)는 색이 희고 질겨서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신라의 종교

신라시대의 종교를 보면 재래의 샤머니즘 외에 불교 · 도교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전래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불교의 발달

불교는 5세기초,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를 통해 전해져 처음 북쪽 변경지방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전도자들은 당국의 박해를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소지마립간 때에 아도(阿道)가 일선(一善 : 지금의 경상북도 善山)지방에 숨어 지내면서 전도에 힘썼으나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그러던 중 521년에 중국 남조인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두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해 비로소 불교가 신라왕실에 정식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흥륜사(興輪寺)를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던 법흥왕의 노력은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실패로 끝났고, 527년(법흥왕 14) 왕의 총신인 이차돈(異次頓)이 창사(創寺) 준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왕과 귀족세력간에 일정한 타협을 보게 되어 늦어도 535년경에는 마침내 공인을 받게 되었다.

불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매우 적합했을 뿐 아니라, 귀족들의 특권을 옹호해주는 이론적 근거도 갖추었기 때문에 공인 후 국왕과 귀족세력 쌍방의 조화 위에서 국가불교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물론, 질병을 고친다든지 자식을 구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현세이익을 기원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전반적으로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호국경전인 『인왕경(仁王經)』과 『법화경(法華經)』이 매우 존중되었으며, 호국의 도량(道場)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왕궁 가까운 곳에 황룡사 같은 큰 사찰을 짓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찰에서는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함께 팔관회 같은 호국적인 행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선덕여왕 때 군사적 위기가 한껏 고조되었을 때, 중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와 황룡사의 사주(寺主)로서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불교를 주관한 자장(慈藏)은 신라 왕실이 석가와 같은 찰제리종(刹帝利種, 크사트리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불법(佛法)과 왕법(王法)을 일치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아가 호국을 위한 전쟁이 동시에 호법(護法)을 위한 싸움이라고 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였다. 이처럼 승려들에게 있어서 호국과 호법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을 적극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원광 자신은 비록 전쟁을 용인한 적은 없으나, 진평왕의 명령을 받아들여 608년 「걸사표(乞師表)」를 쓰기도 했으며, 또한 임전무퇴(臨戰無退) 등 전투에 있어서 용감하기를 권하는 세속오계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윤리적 · 실천적 의미의 현세구복적인 성격에서 점차로 종교적 · 신앙적인 의미의 내세적인 불교로 바뀌어갔다. 정토신앙(淨土信仰)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뚜렷한 증좌이다. 정토신앙은 통일 직전 왕경의 하급귀족이나 평민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몰락해 지방으로 낙향해간 사람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원효(元曉)는 극락(極樂)에 왕생하는 데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여섯자를 극진한 마음으로 부르면 족하다고 설교하였다. 이로써 교리상의 발전은 물론, 신앙면에서도 위로는 국왕과 귀족을 비롯해 아래로는 일반민중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퍼져갔다.

한편 통일기에는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갔다. 통일 전 국가불교가 융성했을 때의 승려들은 현실참여를 강요당하게 되어 교리연구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덕(覺德)이 양나라에 다녀온 549년 이래 많은 승려들이 서학(西學)하고 돌아와서 교학불교(敎學佛敎)의 전개에 큰 자극을 주었다. 역시 6세기 후반에 진(陳)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이 진평왕 때 운문산 가슬사(嘉瑟寺)에 머물면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가르쳤던 것은 그 뒤 교학불교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통일기에는 불교에 대한 허다한 저술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이름난 것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 『판비량론(判比量論)』 등이었다. 그밖에 원측(圓測) · 의상(義湘) · 도증(道證) · 승장(勝莊) · 경흥(憬興) · 의적(義寂) · 태현(太賢) 등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저술은 내용이 풍부하고 이해의 수준이 높아서 중국 및 일본에 교리 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 교리의 대립을 가져와 여러 교파의 분립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종래에는 흔히 5교(敎)라 하여 열반종(涅槃宗) · 계율종(戒律宗) · 법성종(法性宗) · 화엄종(華嚴宗) · 법상종(法相宗)을 꼽아왔으나 최근에 이 5교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통일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의상의 화엄사상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었다.

한편, 신라 말기에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지니는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 데 치중했던 만큼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존하는 교종과는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선종이 처음 신라에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 때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이해를 얻지 못하다가 헌덕왕 때 도의(道義)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함에 따라 점차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9산(山) 선문(禪門)이 성립되었고,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발달했다. 선종은 진골귀족의 지배체제에 반발하고 있던 지방호족들에게 자립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도교의 발달

도가사상(道家思想)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도가사상은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의 형태를 띠고 발달했는데, 산악신앙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경주 서악(西嶽)의 선도산성모설화(仙桃山聖母傳說)는 선도와 인연이 깊은 서왕모(西王母)의 전설을 연상하게 한다. 진평왕 때 지상의 범골(凡骨)들과는 다른 장생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대세(大世)의 이야기라든지, 혹은 김유신이 중악(中嶽) 석굴에서 신술(神術)을 닦은 것 등으로 미루어볼 때 선풍(仙風)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신선방술(神仙方術)을 곁들인 도교문화가 쉽사리 수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674년(문무왕 14)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세 섬은 삼신산(三神山)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되며,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은 유교와 더불어 노자(老子) · 장자(莊子)의 설(說)을 섭렵했다고 하므로 그가 도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도가사상은 장생불사의 신선사상으로 관심을 끌었으나,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해 자연 속에 묻히려는 은둔사상도 발달하였다. 8세기 초 감산사(甘山寺)를 지은 김지성(金志誠)이나 당나라의 수도 장안 종남산(終南山)에서 도사로서 일생을 마친 당 진사과 출신의 김가기(金可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라 말기에 지방세력의 등장과 동시에 유행되기 시작한 사상에 풍수지리설이 있다. 이는 인문지리학의 지식에 예언적인 참위설(讖緯說)이 가미된 것이었는데, 이를 크게 선양한 것은 9세기 후반에 활동한 승려 도선(道詵)이었다. 그는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이른바 명당을 골라서 근거지를 삼거나 혹은 주택과 무덤을 지어야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수의 쇠왕과 순역(順逆)을 점쳤다고 한다. 이 설은 호족들 사이에서 크게 신봉되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신라의 문학

신라시대의 문학은 원시 심성(心性)의 가장 보편적인 정령관(精靈觀)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가무 · 제의에서 발생했는데, 크게 설화문학과 시가문학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설화문학과 시가문학

설화문학에 속하는 것으로는 석씨 출신의 왕자 우로(于老)나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나물왕의 아들을 구출한 박제상(朴堤上) 등에 얽혀 있는 단편 사화(史話)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가 역사적 실존인물이고, 내용도 적국(敵國)인 왜에 대한 투쟁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일종의 영웅서사시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시가문학은 민요 · 향가 등 다양한 편이다. 민요풍을 띠는 시가로는 「서동요(薯童謠)」「풍요(風謠)」가 있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武王, 혹은 東城王)이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와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공주가 몰래 자신과 밀회를 즐긴다는 내용의 동요를 지어 신라 왕경 안의 민중들에게 모략적으로 유포시켰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민중들이 어떤 왕실귀족의 떠들썩한 연애사건을 풍자해 지어낸 노래인 듯하다.「풍요」는 경주 영묘사 내의 조상(造像) 공사와 관련된 일종의 노동요로서 후대에까지 민중 사이에 불렸다.

향가의 발달

시가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진평왕 때 향가로 발전했으며, 통일기에는 많은 향가작가가 나타났다. 소박한 노래 속에 부드러운 가락을 담고 있어 국문학상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향가는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에 대치되는 불교적인 노래였으나, 특히 주원적(呪願的)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8∼9세기 경에는 많은 향가가 제작되어 888년에는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상대등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체의 수를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14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이름난 것이 승려 융천(融天)「혜성가(彗星歌)」, 재가승(在家僧) 광덕(廣德)「원왕생가(願往生歌)」, 낭도 득오(得烏)「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 승려 월명(月明)「제망매가(祭亡妹歌)」, 승려 충담(忠談)「찬기파랑가(讚耆婆郎歌)」, 처용(處容)「처용가」 등이다. 향가는 주로 승려나 화랑과 같은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을 작가로 한 귀족사회의 소산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민중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어 국민 상하간에 널리 애창되었다.

신라의 예술

음악과 춤의 발달

시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악은 종교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지녔다.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의 전래를 계기로 크게 발달하였다. 본래 가야금은 대가야에서 만들어졌으나, 6세기 중엽에 악사 우륵(于勒)에 의해 신라에 전해져 마침내 대악(大樂, 일명 宮中樂)으로 채용되었다. 한편, 우륵은 12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가야지방에서 유행한 노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노래는 비록 지방색이 강한 시골음악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대중의 속악(俗樂)은 아니었으며, 궁중이나 귀족들의 연회에 쓰일 만큼 세련된 음악이었다. 우륵의 제자 중에는 계고(階古) · 법지(法知) 등이 유명했는데, 가야금에는 하림(河臨) · 눈죽(嫩竹)의 2조(調)와 도합 180개나 되는 악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백결선생(百結先生)「대악(碓樂)」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야금 계통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통일기에도 가야금이 악기 중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으나, 이외에도 많은 악기를 사용하였다. 그 중 기본이 되는 악기는 가야금 · 거문고〔玄琴〕 · 향비파(鄕琵琶)의 3현(絃)과 대금(大笒) · 중금(中笒) · 소금(小笒)의 3죽(竹)이었으며, 여기에 박판(拍板)과 대고(大鼓)가 첨가되었다. 이 중 거문고는 본래 고구려의 악기였는데, 고구려가 망한 뒤 신라로 망명해온 일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전존되어 왔다. 이것을 옥보고(玉寶高)가 배워서 신조(新調) 30곡을 지었다고 하며, 뒤에 귀금(貴金)이 이를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한편, 향비파는 서역의 악기였는데, 그것이 향악(鄕樂) 합주에 쓰이게 됨에 따라 향비파라 불리게 된 듯하다. 이른바 3죽은 향악기였는데, 당악(唐樂)의 합주에도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노래곡조에 맞추어 추는 춤은 음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신라시대의 음악은 악기와 노래에 춤이 가미된 일종의 종합예술이었다. 여기에는 농사의 풍작을 비는 축제 때에 징과 북 장단에 맞추어 요란스럽게 추는 군무가 성행했는데, 가야금이 전래됨에 따라 그 가무는 한층 세련되어갔다. 특히, 중국을 통해서 서역계통의 가면무용이 전해짐으로써 금환(金丸) · 월전(月顚) · 대면(大面) · 속독(束毒) · 산예(狻猊) 등 이른바 신라오기(新羅五伎)가 성립되었다. 산예는 사자춤이었다. 이 밖에도 헌강왕 때에 처용무상염무(霜髥舞)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가면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의 발달

신라시대의 미술은 크게 건축 · 조각 · 공예 · 회화 · 서예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건축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릉 · 사찰 · 탑파(塔婆) 등이 있다.

① 왕릉 : 삼국통일 이전 신라왕들은 생시의 지상의 주거생활을 그대로 지하의 무덤으로 옮긴다는 취지에서 고총(高塚)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현세의 생활도구가 고스란히 부장되어 있어 왕릉은 건축뿐만 아니라 공예 혹은 회화를 살피는 데도 보고의 구실을 하고 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왕경 내의 평지에 수혈식(竪穴式) 적석총을 만들었다. 6세기 후반경에는 왕경의 주변지역으로 흩어져서 산 밑이나 언덕 위에 만들어졌고, 무덤의 양식 또한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통일 후에는 무덤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석제도(護石制度)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밖에 무덤 둘레에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네 석사자, 방주석 · 난간을 배치하며, 무덤 앞에 석상(石床)을 놓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양쪽으로 문무석인(文武石人)과 석주를 배치하는 복잡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② 사찰 : 왕경 안에 흥륜사(興輪寺) · 황룡사(皇龍寺) · 영흥사(永興寺) · 분황사(芬皇寺) · 영묘사(靈廟寺) · 사천왕사(四天王寺) · 황복사(皇福寺) · 망덕사(望德寺) · 봉덕사(奉德寺) · 창림사(昌林寺) 등 많은 거찰을 조영했다. 현재에는 모두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그 유지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1970년대 황룡사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통일 이전 사찰의 가람배치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종래에는 황룡사가 백제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보아 가람배치 역시 백제계통의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발굴결과 문 · 탑 · 금당 ·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과 강당에서 회랑에 연결되는 것 등은 백제와 같으나, 금당만은 고구려계통의 삼금당식에 속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만, 신라의 경우에는 세 금당을 탑의 동서와 북쪽에 배치한 고구려와는 달리 이것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밖에도 황룡사는 중문 남쪽에 남문을 또 하나 세웠으며, 사찰의 경계에는 담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가람배치의 양식이 무척 다양해져, 사천왕사 · 망덕사 · 감은사 · 불국사 등은 금당 앞 양편에 두 개의 탑을 세워두는 이른바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중앙지향적인 느낌을 주고 있어 마치 당시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와 같은 경향은 경덕왕 때에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석굴암에서도 엿볼 수 있다.

③ 탑파 : 탑파는 불교건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삼국통일 이전에는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때 백제사람 아비지(阿非知)가 2백여 명의 공장(工匠)을 지휘해 건축했다고 하는 황룡사 구층목탑은 고려 때 몽고의 병란에 불타 없어졌다. 옛 기록에 의하면 목탑은 전체높이가 80m쯤 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탑의 기단에 배치된 거대한 심초석(心礎石)을 보더라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현재 통일 이전 탑파의 모습은 분황사 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석재를 전형(塼形)으로 잘라서 전축(塼築)의 수법으로 축조했으며, 탑의 구조자체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번안했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대체로 기단부가 넓고 높아지며 탑신은 각층이 일정한 체감률을 가지고 조성된 균형 잡힌 방형 3층탑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덕왕 때에 건립된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해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感恩寺址東 · 西三層石塔),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원원사(遠願寺)터 삼층석탑,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葛項寺址東 · 西三層石塔) 등이 있다. 한편, 특수한 형태의 뛰어난 석탑으로는 석가탑(본래의 명칭은 무구정광탑)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불국사 다보탑과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화엄사(華嚴寺) 사자탑이 있다. 이밖에 독자적인 형식의 것으로 정혜사지 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을 들 수 있다.

조각으로서는 불상과 각종 석조물이 있다.

① 불상 : 통일 이전의 불상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분황사탑에 조각된 8구의 인왕상(仁王像), 남산 장창곡(長倉谷) 삼화령(三花嶺) 미륵존상,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속칭 上人巖) 석굴의 마애상 등 모두 석불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574년(진흥왕 35)경에 만들어진 황룡사 금동장륙삼존상(金銅丈六三尊像)은 신라 최대의 거불이며 동시에 걸작으로 이른바 신라 3보(寶)의 하나로까지 손꼽혔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국적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두 불상, 즉 탑형이 새겨진 높은 보관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78호)과 얕은 삼산관(三山冠, 일명 三花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83호)을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통일 이전에는 조각가로 승려 양지(良志)가 있어서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을 비롯해 많은 불상과 와전(瓦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통일기의 불상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으나, 김지성의 발원(發願)으로 조성한 감산사의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은 중국 · 인도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는 걸작이다. 이는 굴불사(堀佛寺) 사면석불을 거쳐 석굴암의 불상에 이르러 그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② 석등 · 석조 · 당간지주 : 통일기의 조각작품으로는 불상 외에 석등 · 석조(石槽) · 당간지주 · 비석 · 호석 등 다양한 편이다. 석등은 중흥산성(中興山城) 쌍사자 석등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꼽을 만하며, 석조는 경주 보문사지 석조법주사 석련지(石蓮池), 당간지주로는 공주 갑사 · 망덕사터, 부석사터, 공주 반죽동(斑竹洞), 금산사(金山寺)의 것이 유명하다. 비석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김인문묘비의 것으로 짐작되는 귀부가 남아 있다. 끝으로 원조(圓彫) 혹은 부조(浮彫)된 호석으로는 성덕왕릉 및 원성왕릉으로 짐작되는 경주 괘릉(掛陵), 그리고 김유신묘가 대표적이다.

공예는 크게 금속공예와 도기 · 토기로 나눌 수 있다. 통일 이전의 왕릉은 구조상 도굴의 위험이 적기 때문에 많은 공예품을 남겨주고 있다. 대체로 5세기를 중심으로 이들 왕릉에서 나온 공예품들은 장신구 · 이기(利器) · 마구 및 토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장신구 중에는 금관을 비롯해 금귀걸이 · 금띠 · 금가락지 · 금팔찌 등 순금제품이 많다. 이기에는 유리제품의 잔을 비롯해 금으로 만든 고배(高杯) · 은잔 · 숟가락, 금으로 만든 바리〔盌〕 · 구리항아리 · 구리솥 등이 있다. 마구에는 금동(金銅)으로 만든 발디딤〔鐙子〕등이 있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불교의 융성 등 요인으로 공예기술이 더욱 발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범종과 사리구(舍利具)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오대산 상원사 동종과 특히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속칭 奉德寺鐘)은 큰 규모에 기법이 너무도 완벽하여 한국종의 특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또한, 감은사터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구도 한껏 기교를 부린 뛰어난 것이다. 토기에 있어서도 모양이 다양해졌는데, 특히 유약을 바르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끝으로 와당은 종래의 수막새와당 일변도에서 암막새와당 · 서까래기와 · 귀면와(鬼面瓦) 등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고, 무늬도 연화문 일변도에서 보상화(寶相華) · 인동(忍冬) · 포도 · 봉황 · 앵무 · 원앙 등 다채로워졌다.

황룡사 「노송도(老松圖)」와 분황사 「관음보살상」, 단속사(斷俗寺)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을 그렸다고 하는 솔거(率居), 8세기말경 당나라에서 활동한 김충의(金忠義), 신라 말기의 승려 출신인 정화(靖和) · 홍계(弘繼) 등 화가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들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내부구조상 현실(玄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처럼 벽화를 남길 수 없었다. 다만, 1973년 천마총(天馬塚)에서 마구의 다래〔障泥〕에 그려진 천마도와 관모(冠帽)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환형(環形)의 화면에 그려진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와 서조도(瑞鳥圖)가 발견되어 옛 신라의 그림이 패기에 찬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 태장리(台庄里)의 한 석실묘에 연화도와 신장도(神將圖)가 일부 남아 있다. 통일기에는 불교회화 이외에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나 인물화가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는 755년에 완성된 『화엄경』 사경(寫經)의 불보살상도가 있는데, 석굴암 보살상들과 비슷한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통일 이전의 서예는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금석문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졸(古拙)한 것이었다. 통일기에 들어와 중국으로부터 왕희지체(王羲之體)가 전해지면서 한결 수준이 높아졌다. 신라시대 최고의 명필은 8세기에 활약한 김생(金生)으로 왕희지체에 따르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의 서법(書法)은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와 서첩(書帖)인 전유암첩(田遊巖帖)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왕희지체의 대가로는 영업(靈業)이 유명한데, 그가 쓴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은 왕희지의 집자비로 오인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오면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해, 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刹柱本記)」등을 쓴 요극일(姚克一)과 진감선사비문(眞鑒禪師碑文)을 쓴 최치원이 대표적인 명필로 손꼽히고 있다.

신라 연구사

근대 이전 시기

신라가 멸망한 뒤 그 왕조의 역사와 제도 · 전장(典章) · 문물에 대한 첫 번째 정리사업은 고려왕조 초기에 시도되었다. 편찬시기와 편찬자를 잘 알 수 없는 소위 『구삼국사』가 바로 그것인데, 다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전해오는 신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구삼국사』를 토대로 하여 여기에 중국 역대 정사(正史)의 한국 관련 자료를 크게 보충한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비록 유교의 도덕주의 사관에 입각해 종래의 고기(古記) 기록에 필삭(筆削)을 가한 혐의를 떨쳐버릴 수 없으나, 불충분한 대로 신라의 역사와 지리 · 제도 · 문물 전반에 대한 일단의 집성으로 신라사 연구의 기본자료라 할만하다. 한편 이보다 140년쯤 뒤에 나온 일연선사의 『삼국유사』는 삼국 중 특히 신라시대의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적 기술이 풍부해 이 방면의 연구에서 거의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각종 고기류와 사찰의 고문서, 금석문 자료를 보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신라시대의 자료가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국사략』(일명 삼국사략)이 편찬되고, 『삼국사절요』에 뒤이어 그 일단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국통감』 등의 관찬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하지만 주자학의 도덕적 · 교훈적 및 명분론적 윤리사관에 입각한 사료의 필삭과 사론(史論)이 행해졌을 뿐,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앞선 역사서의 불비(不備)를 보완하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조선시대 중기를 거쳐 후기까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흔히 실학의 시대라고 불리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옛 강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어 고대의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전된 것은 사실이다. 이에 신라의 북방 한계선이 논의되고,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함흥 북쪽의 황초령(일명 草坊院)과 단천 소재의 마운령비가 이 문제를 검토하는데 있어 유력한 실마리를 제공해 그 뒤의 신라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신경준『강계고』에서 이 점에 대해 언급한 뒤 김정희는 1816년과 1817년 두 차례에 걸쳐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그 때까지 무학대사의 왕심비(枉尋碑) 혹은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진 북한산비가 실은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임을 확인하고, 이를 황초령비문과 대비하면서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토대로 해 본격적으로 논한 것은 진정 신라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획기적 사건이었다. 현재 신라사 연구에서 금석문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임을 상기할 때, 김정희의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야말로 신라사 연구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매우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록된 소위 박 · 석 · 김(朴 · 昔 · 金) 3성에 의한 왕실의 교립(交立)현상을 허목(許穆)이나 이종휘(李種徽)가 중국 삼대(三代)에도 없던 일이라고 예찬한 데 반해 정약용이 왕실 교체의 본질을 필경 권력에 의한 혁명으로 간파한 것은 초기 신라사의 실상에 근접한 해석으로 주목할 만했다.

일제시대

실학의 시대가 끝난 뒤 신라사 연구는 백년 이상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비로소 근대역사학의 성립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하여 한국고대사 연구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했으며 더욱이 부정적이기까지 했다.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계열의 역사가들은 삼국 중 고구려의 상무적(尙武的) · 자주적 기상을 찬양한 나머지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최고 지배층에 대해서는 사대주의자들이라 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 통치시대 신라사 연구에 종사한 것은 오히려 실증사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학자들의 연구활동에 맞서서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해 기관지를 발간하면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였다. 그 중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대표적인 성과를 보면, 이병도(李丙燾)는 「삼한문제의 신고찰」(1934∼1937)이란 장편 논문에서 신라를 포함한 백제 · 가야의 국가 형성기반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고찰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상기(金庠基)는 「고대의 무역형태와 나말의 해상발전에 대하여」(1934)에서 신라 통일기에 대외무역이 진행되는 가운데 9세기 전반 출현한 장보고의 해상왕국 청해진의 흥망사를 폭넓게 검토하였다. 또한 불교사 연구에서는 김영수(金映遂)가 「오교 양종에 대하여」(1937) 및 「조계선종에 대하여」(1938)에서 당에서 성립된 불교의 여러 종파가 신라에 전래된 뒤 교종의 5교, 선종의 9산으로 전개 발전해 간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것도 소중한 성과였다. 특히 최남선이 1929년 함남 이원군의 속칭 만덕산에서 조선 후기 이래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확인한 바 없었던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소위 마운령비를 답사하고,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한 것도 그 후의 신라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한편 일본의 관학자들에 의해 진행된 신라사 연구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식민지 지배기구를 독점한 상황에서의 연구였던 만큼 그 성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친 매우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 의해 추진된 금관총(1921), 금령총(1924), 식리총(1924), 서봉총(1926) 등 신라시대 초기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라든지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 등에 대한 조사 연구활동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건축사학자 후지시마[藤島亥治郞]에 의한 경주의 신라 왕경(王京) 유지에 대한 조사연구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헌사학 분야에서는 이마니시[今西龍]가 1906년 최초로 경주를 답사한 이래 신라시대의 유물 · 유적이라든지 금석문 · 고문서, 그리고 골품제도나 갈문왕제도 등에 대해 꾸준히 연구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그가 죽은 직후 정리되어 『신라사연구(新羅史硏究)』(1933)로 간행되었다. 이 밖에도 이케우치[池內宏]는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역사지리 및 신라의 왕위계승과 무사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미시나[三品彰英]는 신라의 건국신화를 주변 여러 나라 혹은 민족의 신화요소와 비교해 연구하는 한편 민속학 내지 민족학의 지식을 원용해 화랑에 대한 전문 연구서를 내놓았다. 역시 스에마츠[末松保和]는 신라의 6부제도라든지 군사제도를 비롯해 신라의 건국문제, 상고(上古) 및 중고(中古)시기의 세계(世系)문제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그 뒤 일본에서의 신라사 연구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해방 ∼ 1960년대까지

8 · 15 해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은 비로소 한국사 연구의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다만 해방 직후의 정치 · 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한국사 연구를 위한 제반 여건은 매우 열악한 편이었다. 연구 인력은 부족했고, 연구를 위한 시설 및 자료 역시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는 신라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 이후 3년간의 혼란 끝에 정부가 수립되어 차분한 연구분위기가 조성되어 갈 무렵 6 · 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진행 중인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젊은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학회가 결성되고 기관지로 『역사학보』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장래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었다.

이와 동시에 일제시대부터 한국고대사 연구에 종사해 왔던 기성 연구자들(이른바 제1세대)도 잇따라 역작들을 발표하면서 학계를 이끌어 갔다.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였던 이병도는 신라시대의 원시집회소로부터 화백회의에 이르기까지 정치형태의 변화과정을 여러 방면에서 입증한 「고대 남당고」(1954)를 비롯해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해방 이전 시기의 업적을 토대로 고대사 연구의 성과를 총정리해 진단학회 한국사 총서의 하나로 『한국사-고대편-』(1959)을 세상에 내놓았다. 씨는 뒤에도 신라사를 비롯해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꾸준히 발표했는데, 이는 『한국고대사연구』(1976)로 정리되었다.

또한 해방 전 고대 한 · 일관계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홍직(李弘稙)은 『삼국사기』에 대한 엄정한 사료비판과 더불어 신라시대의 각종 금석문자료 및 고문서에 대한 면밀한 고증을 꾀하는 등 매우 견실한 학풍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업적은 씨가 사망한 직후에 나온 논문집 『한국고대사의 연구』(1971) 신라편과 통일신라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나온 연구업적으로서 사회학을 전공한 이덕성(李德星)의 유고집 『조선고대사회연구』(1949)는 대학 강의안을 토대로 논문 「신라왕계와 골품의 형성과정」(『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 1, 1949)을 부록으로 싣고 있는 소품이지만 신라 초기의 왕위계승과 골품제도에 대해 흥미로운 견해가 엿보인다.

그러나 신라사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업적들은 해방 직후 학계에 새로이 등장한 이른바 제2세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개 역사학회 창립에 관여했고, 주로 그 기관지를 통해서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기백(李基白)은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역사학보』 6, 1954)를 통해 학계에 등장한 뒤 「신라 사병고」(1957) · 「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1958)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의 정치제도와 신분제도에 대한 문제들을 일관성 있게 추구했는데, 이는 뒤에 『신라정치사회사연구』(1974)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신라 지배세력의 변천과정과 더불어 국왕, 진골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상대등, 국왕 직속의 행정기관인 집사부 장관 시중을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뒤 씨는 신라사상사 연구에 착수해 유교사상 뿐 아니라 신라통일기의 정토신앙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는데, 그 성과는 『신라사상사연구』(1986)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국가불교의 성립기로부터 민중불교의 대두에 이르기까지 신라불교사의 여러 양상이 전반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한편 김철준(金哲埈)은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1952)을 발표한 이래 「고구려 · 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1956) · 「신라시대의 친족집단」(1968) 등 인류학적 방법을 신라사회사 연구에 적용한 논문을 발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뒤에 『한국고대사회연구』(1975)로 정리되었다. 이 논문집에는 신라 상고(上古)의 세계(世系)와 기년에 대한 조정이라든가 녹읍(祿邑) 경영에서 볼 수 있는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반문제 그리고 후삼국시대 지배세력의 성격문제 등을 추구한 주목할 만한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변태섭(邊太燮)은 뒤에 고려시대사 연구로 주전공을 바꿨지만 「신라 관등의 성격」(1954) · 「묘제(廟制)의 변천을 통하여 본 신라사회의 발전과정」(1964) 등의 논문을 발표해 신라 관등제도에 있어서의 이른바 중위제(重位制) 문제라든지 골품제도의 사회적 변질 분화과정을 심도 있게 추구했다.

1970년대 이후 ∼ 현재

1970년을 전후해 이른바 제3세대 연구자들이 다수 등장해 앞선 시기의 연구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다.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신라사를 전공하는 연구자의 수효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것은 대학원 교육의 팽창 강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신라사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1988년 울진에서 봉평비가 발견되어 그 공동연구를 계기로 ‘한국고대사연구회’가 결성되고 머지 않아 한국고대사학회로 발전한 것은 당시의 제반 상황에 비춰볼 때 자연스런 추세였다. 이 같은 현상은 신라사 연구에서 세분화 내지 전문화 경향을 촉진했으며, 그 결과 1990년경을 전후해서 고도의 전문 주제를 선택해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이처럼 전문 연구자들이 급증함에 따라 2003년신라사학회가 조직되어 그 이듬해부터 계간지 『신라사학보(新羅史學報)』가 발간되는 등 현재 신라사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띠고 있다.

1970년경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40여 년 간의 연구성과를 개인별로 하나하나 검토해 볼 여유가 없으므로, 이를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의 몇 개 부문으로 나누어 각 주제별 역사학계의 문제의식이랄까 연구 상황을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정치사 부문을 보면 해방 후 고고학계에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신라국가의 형성 배경과 기원 후 5세기경까지의 상고시대 발전과정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점을 들 수가 있다. 이는 주로 경주와 그 인근지역의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기초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1970년대부터 국내 학계에 소개된 미국 신진화주의 인류학자들의 국가(State)사회에 이르는 과도적 단계로서의 수장제(首長制, Chiefdom) 사회론이 던진 충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밖에도 천관우(千寬宇)가 삼한의 국가형성을 다룬 일련의 논문에서 제시한 성읍국가로부터 영역국가로의 국가발달 단계론이 논의를 한층 활성화했다. 이에 따라 일부의 연구자들 사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 있다는 긍정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의 초기 연대기를 전면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이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것만을 가려내서 검토해야 한다는 수정론이 학계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정치제도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성과를 거둔 것은 역시 왕경 6부의 성립과정과 그 변화, 관등제의 성립 그리고 지방통치체제의 확립과정에 대한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68년경북 영천 청제비(菁堤碑, 536년 제작)의 발견에서부터 1970년 학계에 알려진 울산광역시 두동면 천전리의 서석명문(書石銘文, 525∼545년의 간지가 표시된 부분), 1978년 충북 단양 적성비(540년대 후반 건립)의 발견에 이어 1980년대 말에 잇따라 발견된 경북 울진 봉평리비(524년 건립), 경주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 551년 건립), 포항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비(503년 건립), 그리고 2009년 역시 포항 흥해읍에서 발견된 중성리비(501년 건립) 등 일련의 금석문 자료였다. 이들 동시대 자료의 발견으로 종래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던 520년(법흥왕 7)의 율령 반포를 전후한 시기의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실마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대략 6세기 초 마립간시대로부터 대왕의 세기로 전환하고 있던 당시의 정치형태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즉 5세기 말까지의 집권체제에 대한 평가가 종전에 비해 저하되어 이른바 6부체제설이 보다 힘을 얻게 되었고, 경위와 외위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관등제가 종전에 생각한 것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지방통치체제가 차츰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방세력가로서의 촌주가 차지하고 있던 독자적인 위상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도 큰 성과였다.

정치제도 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구체적인 정치과정을 다룬 연구도 적지 않다. 통일 후 100년 간의 중대(中代)는 신라의 전 역사에서 보면 가장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볼 때도 가장 수준 높은 성취를 이룩한 황금시대였는데, 이 시대의 정치사 연구도 활발히 전행되었다. 일찍이 이기백은 이 시대의 정치형태를 전제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제3세대 · 제4세대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에 반론을 펴고 있어 논의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또한 종래 소홀하게 다루어져 온 하대(下代) 150여 년 간의 정치사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왕위계승의 문제라든지 지방세력가로서의 이른바 호족의 성장 문제가 깊이 있게 추구되고 있다. 특히 후삼국시대 동란기의 주역이었던 후고구려(일명 泰封) 궁예정권과 후백제 견훤정권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가 나오고 있다.

정치제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종래 주목하지 않았던 법당(法幢)군단이라든지 패강진(浿江鎭)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대해서도 이를 동아시아 역사의 전체적인 움직임 속에서 파악하려는 참신한 연구업적이 나오고 있다. 대외관계사 분야에서는 일찍이 신형식(申瀅植)이 숙위(宿衛)제도라든지 숙위학생 문제를 다루어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후속 연구자들은 근래 견당사(遣唐使)를 중심으로 한 한 · 중관계사를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재당(在唐) 신라인사회의 분석을 통해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심도 있게 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 사회사 부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제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골품제적 신분 편성에 대한 문제이다. 실제로 골품제도는 신라 신분제도의 대본(大本)으로 일찍부터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왕실의 혈족집단, 특히 상속과 혼인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근래 6부제도의 변화와 관련해서 새롭게 파악할 필요성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그러니까 왕권의 성장에 따라 6부제도가 재편성된 결과 제도화된 것이 골품제도라는 인식인데, 다만 최고 골품으로서의 성골은 진평왕 때에 이르러 왕실의 독존적인 혈연의식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장된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또한 각각의 골품이 얻을 수 있는 최고 관등에 대한 법적 규제는 7세기 중엽 중국 율령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정비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나아가 삼국이 통일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왕경 6부인만을 대상으로 경위 관등을 부여했을 것이라는 데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異見)이 없는 듯하다.

경제사 부문에서 주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역시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신라 촌락 장적(帳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는 1950년대 초의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뒤 일본인 연구자 하타다 타카시[旗田巍]에 의해서 기초적인 연구논문이 발표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제3세대 연구자들 사이에 이를 새롭게 재검토하자는 기운이 일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김기흥(金基興) · 이인철(李仁哲) · 이희관(李喜寬) · 윤선태(尹善泰) 등에 의해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하타다의 견해가 부분적으로 수정 내지 보완되었을 뿐 아니라 정전제와 녹읍제를 중심으로 한 통일기 토지제도 전반에 걸친 연구로 크게 확대되었다. 나아가 통일기에 들어와 정전 지급에서 볼 수 있듯이 종전의 인신적(人身的) 지배에서 토지에 대한 수취체제로 바뀌어갔다는 점을 들어 신라통일기를 한국사에서 중세사회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대구분 논쟁도 제기되었다. 한편 토지제도 외에도 통일기의 수공업과 상업 그리고 대외무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경제사 분야는 그 연구의 폭이 차츰 넓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화사 부문에서 가장 활기를 띠고 연구가 진행되는 분야는 미술인데, 이는 새로운 자료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다. 1970년대 이른바 신라문화권 개발계획에 따라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곧이어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안압지에 대한 정화(淨化) 복원사업이 추진된 결과 많은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고분의 구조라든지 절터의 가람배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대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이 글의 문화편에서 간략하나마 기술했으므로 다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미술분야를 제외하면 문화사 부문에서 비교적 큰 연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신라불교는 일종의 황금어장이라고 할 만큼 많은 연구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역시 문화편에서 간단히 기술했으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불교 교리를 중시하는 연구자와 불교사상 그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견해 차이에 대해서 조금 논의하고 싶다. 즉 이기백 · 안계현(安啓賢) · 김두진(金杜珍) 등은 불교의 화엄사상이 중대의 전제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고 보는 반면 김상현(金相鉉) · 김복순(金福順) · 정병삼(鄭炳三) · 남동신(南東信) 등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즉 화엄사상이 왕권의 안정적인 유지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불교계가 한 것처럼 정치이념을 수식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한다.

신라 말기의 최치원에 대해서는 역사학계는 물론 한문학이나 사상사 특히 불교사 분야에서 변함없이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역사학쪽에서는 6두품 출신의 중국 유학생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유교정치이념과 더불어 역사가로서의 자세를 파고들고 있다. 그가 귀국한 뒤에 지은 불교 관계의 이른바 4산비문에 대해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 이지관(李智冠) · 이우성(李佑成) · 최영성(崔英成) 등에 의해 교감 및 주석 번역이 이루어졌고,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문집인 『계원필경집』은 『고운집』과 함께 2009년 한국고전번역원에 의해 국역 출간되었다. 최근 그에 대해서는 일본과 중국에서도 전문 연구서가 나올 만큼 구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끝으로, 현재의 신라사 연구 상황과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항은 목간 자료를 활용하여 생활사 내지 심성사(心性史) 등 이른바 미시사(微視史) 분야로 심화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목간은 문서행정의 실무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문자 자료이므로, 아무런 가감없이 기록된 점이 특징이다. 금석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문이 대개 국왕 이하 지배층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송덕문(頌德文)의 성격을 띠고 있어 사실의 과장과 때로는 왜곡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것과 목간이 다른 점이다. 이처럼 당해(當該) 시대의 생생한 일차자료인 목간은 1975년 안압지 정화작업 때 처음 발견된 이래 월성 해자(垓子)를 비롯한 경주 시가지 여러 곳에서 출토된 바 있고, 1992년 이래 지금까지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6세기 중엽 무렵의 물품 꼬리표[荷札] 목간이 많이 나왔다. 그리하여 2007년에는 목간의 연구 및 학술조사를 목적으로 한 한국목간학회가 창립되어 기관지 『목간과 문자』를 발간하고 있다. 앞으로 보다 많은 목간이 발견되고 또한 그 자체로 연구수준이 높아진다면 신라사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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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上代建築の硏究』(米田美代治, 秋田屋,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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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古瓦の硏究』(濱田耕作·梅原末治, 刀江書院, 1934)
『新羅史硏究』(今西龍, 近澤書店,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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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苑筆耕集 校注』(党銀平, 中華書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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